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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 수도자 |
성 마르티노 보이론 연합회 Congregatio Beuronensis S. Martin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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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88e,#00488e><colcolor=#fff,#fff> 이명 | 보이론 베네딕도연합회 (Beuroner Benediktinerkongregation) | ||||
표어 | <colbgcolor=#00488e,#00488e><colcolor=#fff,#fff> 라틴어 | {{{#00488e,#fff 'Ora et Labora'}}} | |||
영어 | Pray and Work | ||||
한국어 | 기도하고 일하라 | ||||
설립 시기 | 1863년 보이론 수도원 설립 ([age(1863-01-01)]주년) 1873년 공식 인가 ([age(1873-01-01)]주년) | ||||
설립자 | 마우루스 & 플라치두스 볼터 O.S.B.[1] | ||||
설립 허가 | 교황 비오 9세 | ||||
총재아빠스 | 초대 | 마우루스 볼터 O.S.B. | |||
현재 | 프란치스쿠스 베르츠도르프 O.S.B. | ||||
규모 | 150명 (사제 84명) | ||||
종교 | 가톨릭 | ||||
소속 | 베네딕도회, 베네딕도회 총연합 | ||||
모원 | 독일 보이론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 (Abteistraße 2, 88631 Beuron, 독일) | ||||
<nopad> | |||||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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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 Beuroner Kongregation von St. Martin | ||||
프랑스어 | Congrégation bénédictine de Beuron | ||||
이탈리아어 | Congregazione Benedettina di Beuron | ||||
영어 | Beuronese Congregation of St. Mart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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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쿠스 베르츠도르프 총재아빠스의 축복식 |
1. 개요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 연합회는 베네딕도회 총연합에 속해있는 19개의 연합회 중 하나로, 19세기 독일에서 베네딕도회 전통을 회복하려는 개혁 운동 속에서 탄생하였으며, 1873년 교황청의 인가를 받아 보이론의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보이론 연합회는 보이론 예술학파를 통해 전례 예술과 영성을 결합한 독자적 전통을 형성하였고, 벨기에의 성모영보 연합회, 란츠베르크의 오딜리아 연합회의 탄생에 대한 역사적·영적 기반이 되었다.2. 역사
2.1. 독일어권 수도 개혁과 보이론 수도원의 설립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 연합회는 19세기 독일어권 지역에서 수도 생활 전반에 걸쳐 일어난 중대한 변화를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1803년 3월 25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채택된 제국 대표 회의 최종 결의안(Reichsdeputationshauptschluss)에 따른 세속화 정책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전역의 대부분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해산시켰고, 수세기 동안 교육과 전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수도원 전통은 이로 인해 크게 단절되었다.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베네딕도회 정신을 되살리려는 수도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프랑스의 수도사제 프로스페르 게랑제가 주도한 개혁과 솔렘 연합회의 창설이었다. 게랑제 아빠스는 솔렘 대수도원을 중심으로 베네딕도 규칙으로의 회귀, 라틴 전례와 그레고리오 성가의 전통 보존, 수도 공동체의 일치 강화를 중시하였고, 이러한 개혁은 독일 내에서도 깊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63년 마우루스와 플라치두스 볼터 형제가 도나우강 상류 계곡의 보이론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들은 로마와 솔렘에서 수학한 수도승으로, 초기 중세 베네딕도 전통을 따르는 전례, 건축, 생활 양식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보이론의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은 곧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이고 문화적인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보이론의 이러한 개혁 운동을 제도적으로 확립하려는 움직임도 뒤따랐다. 1866년에는 뜻을 같이하는 수도원들의 연합을 위한 공동 규칙이 처음 마련되었고, 1873년에는 교황청이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 연합회의 첫 헌장을 승인하였다. 이로써 보이론 수도원을 모원으로 하는 독자적인 베네딕도회 연합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2.2. 제도 정비와 확장
1873년 교황청이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 연합회의 헌장을 공식 승인함으로써, 보이론 개혁은 하나의 독립된 연합회로서 제도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몇 차례의 교령을 통해 연합회의 법적 지위가 더욱 구체화되었다. 보이론 연합회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도와 노동, 예술적 표현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지향한 데에 있었다. 모원인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은 예술적 양식 면에서 독창적인 모범을 제시하는데, 특히 보이론 예술학파(Beuroner Kunstschule)는 비잔틴과 초기 중세 미술 전통을 바탕으로 고유한 전례 미학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독일어권 지역을 중심으로 수많은 교회 건축과 장식에 영향을 주었다.연합회는 설립 초기부터 빠르게 성장하였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새로운 수도원 설립과 과거 수도원의 재건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으로 벨기에의 마레드수 수도원, 독일 아이펠 지방의 마리아라흐 수도원, 오스트리아 젝가우와 스위스 마리아슈타인 등지의 수도원들이 있다. 이후에는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도 보이론 연합회 소속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보이론 연합회는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에 충실한 삶을 바탕으로 한 전례 중심의 영성과, 신학과 학문, 예술의 긴밀한 결합을 통해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연합회의 헌장은 수련과 서원, 성무일도, 각 수도원과 연합회 전체 간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수도 생활의 핵심 요소들을 일관되게 규정하고 있었으며, 이는 연합회 소속 수도원들이 공유하는 공통된 생활 규범으로 기능하였다.
보이론 연합회는 1893년 교황 레오 13세가 설립한 베네딕도회 총연합에 가장 먼저 참여한 연합회 중 하나였다. 이를 통해 보이론 연합회는 국제적인 연합회로 자리매김하며, 보편적 베네딕도 전통과의 유기적 연결 속에서 그 정체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었다.
2.3. 20세기의 위기와 쇄신
20세기는 보이론 연합회에 여러모로 중대한 도전을 안겨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회 소속 수도원들은 징집, 경제적 곤란, 문화 활동의 정체 등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전쟁은 수도 공동체의 일상뿐 아니라, 벨기에와 오스트리아 등지에 위치한 회원 수도원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부분적으로 영적 쇄신의 여지가 있었으나, 1933년 나치 정권이 집권하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나치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수도생활과 가톨릭 교회를 부정하였으며, 보이론 연합회 소속 여러 수도원이 해산되거나 국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일부 수도승들은 체포되거나 망명을 떠나야 했고, 1940년에는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 자체가 강제 해산되어 수도승들이 쫓겨났으며, 수도원 건물은 본래 목적과 무관한 용도로 전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보이론 연합회는 어렵고 더딘 재건 과정을 시작하였다. 1945년부터 1946년 사이에는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이 다시 열렸고, 독일과 그 밖의 지역에서도 여러 수도원이 다시 문을 열었다.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의 제5대 아빠스로, 나치 정권을 강하게 반대했던 베네딕트 바우어(Benedikt Baur) 아빠스가 연합회 재건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이 시기 연합회는 양차대전 이전의 연합회와 전례와 영성의 연속성을 지켜내며 공동체로서의 결속력을 확인하였다. 또한 탄자니아와 브라질 등지에서의 선교 활동과 더불어, 교회 일치운동, 교육 활동 등 새로운 영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른 연합회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보이론 연합회의 수도생활 전반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보이론 연합회는 공의회의 개혁 흐름에 발맞추어 헌장을 수정하고, 전례의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며, 현대 사회에 열린 태도를 갖추려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무일도, 그레고리오 성가,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대하라'는 베네딕도회 전통의 손님 접대 정신, 평신도에 대한 영적 지도 등 기존의 핵심 가치를 지속적으로 계승하였다.
2.4. 오늘날의 보이론 연합회
21세기에 들어서며, 보이론 연합회는 유럽 인구 구조의 변화, 수도원 입회자의 지속적인 감소, 전통적인 종교 제도의 사회적 영향력 약화 등이 겹치면서 수도 생활의 형태를 재조정할 필요를 인식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보이론 연합회는 세속주의와 타협하기보다, 스스로를 베네딕도 규칙에 기반한 영적·전례적·문화적 사명의 주체로 인식하여 창립 이래 이어져온 전통과 긴밀하게 연결된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오늘날까지 연합회의 모원이자 중심 수도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성 마르티노 대수도원은 라틴어로 봉헌되는 전례, 그레고리오 성가에 따른 성무일도, 예술·신학·음악에 대한 문화적 개방성 등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수많은 방문객, 피정객, 연구자들이 수도원을 찾아 영적 지향과 내면의 침묵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유럽 내 수도원의 구조적 축소에도 불구하고, 보이론 연합회는 수도생활의 국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 위치한 수도원들은 해당 지역 내 성소를 적극 장려할 뿐 아니라, 고유한 문화적 맥락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베네딕도회 생활을 탐구한다. 연합회 총회는 이들 지역 수도원과 상호 존중과 공동 양성, 지속적인 교류를 바탕으로 협력하고 있다.
오늘날 보이론 연합회의 또 다른 중점은 평신도에 대한 영적 교육과 사목적 동반, 수도적 가치의 문화적 전승에 있다. 많은 수도원들이 침묵과 기도, 전례 안에서 삶의 방향을 찾으려는 이들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으며, 기도·노동·독서를 균형 있게 조화시키는 베네딕도회 영성은 수도원 밖의 세속 세계에서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이처럼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 연합회는 오늘날 전통과 쇄신의 경계 위에 서서, 시대에 걸맞은 형태로 수도 유산을 살아내고 그것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3. 다른 두 베네딕도회 연합회의 출발점
법적으로는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 연합회가 다른 베네딕도회 연합회의 '모회'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역사적·영적 관점에서는 두 개의 중요한 베네딕도 공동체의 출발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두 공동체는 성모영보 연합회(Congregatio ab Annuntiatione B.M.V.)와 오딜리아 연합회(Congregatio Ottiliensis)이다.성모영보 연합회는 1920년에 '벨기에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으며, 연합회의 구성 수도원들은 본래 보이론 연합회에 속해 있던 공동체였다. 특히 마레드수, 카이저스베르크, 브뤼헤의 성 안드레아스 수도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수도원은 보이론에서 직접 설립되거나 보이론 수도승들의 파견으로 세워졌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독자적인 수도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사목적·학문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흐름 속에서 새로운 구조가 형성되었고, 이는 교황청으로부터 하나의 독립된 연합회로 인정받았다. 제도적으로는 분리되었지만, 이들 수도원은 전례, 영성, 인적 구성 면에서 보이론의 영향력을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다.
오딜리아 연합회의 경우도 유사한 과정을 보인다. 오딜리아 연합회의 창설자인 안드레아스 암라인은 본래 보이론 대수도원의 수도승이었다. 그는 보이론 개혁의 정신, 특히 깊이 있는 전례, 수도적 훈련, 그리고 문화에 대한 개방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분위기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베네딕도 생활과 선교 사명을 결합하려는 자신의 이상을 기존 보이론 연합회의 구조 안에서 실현하기 어려웠기에, 보이론을 떠나 라이헨바흐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하였다. 이 공동체가 이후 선교를 중심 사명으로 삼는 오딜리아 연합회로 발전하였다.
이 두 연합회의 사례는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 연합회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수도생활의 다양성과 확장을 이끌어낸 한 줄기의 원천으로 자리하였으며, 그 흐름이 하나는 학문적·사목적 방향(성모영보), 다른 하나는 선교적·확장적 방향(오딜리아)으로 분화되어 발전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4. 성 베네딕도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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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 | 후면 |
1400주년 기념 메달은 독일의 예술가이자 보이론 연합회의 수도자인 데시데리우스 렌츠(Desiderius Lenz, 1832–1928) 신부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렌츠 신부는 가브리엘 뷔거(Gabriel Wüger, 1829–1892) 수사와 함께 보이론 예술학파(Beuroner Kunstschule)의 시조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렌츠 신부가 디자인한 기념 메달에서는 보이론 미술학파 특유의 상징성과 형식미를 볼 수 있다. 이 버전의 메달은 오늘날까지도 베네딕도회의 대표적인 예술 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5. 역대 총재아빠스
6. 소속 수도원
[1] 형제, 공동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