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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Pray and Work | ||||
한국어 | 기도하고 일하라 | ||||
설립 시기 | 1684년 8월 26일 최초 결성 ([age(1684-08-26)]주년) 1858년 2월 5일 재결성 ([age(1858-02-05)]주년) | ||||
설립 허가 | 교황 인노첸시오 11세 (최초 결성) 교황 비오 9세 (재결성) | ||||
총재아빠스 | 초대 | 셀레스틴 포글 O.S.B. (최초 결성) 우토 랑 O.S.B. (재결성) | |||
현재 | 마르쿠스 엘러 O.S.B. | ||||
규모 | 총 143명 (사제 143명) | ||||
종교 | 가톨릭 | ||||
소속 | 베네딕도회, 베네딕도회 총연합 | ||||
모원 | 독일 바이에른 메텐 베네딕도회 메텐 수도원 (Abteistraße 3, 94526 Metten, Deutschlan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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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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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 Bayerische Benediktinerkongregation | ||||
영어 | Benedictine Congregation of Bavaria | ||||
프랑스어 | Congrégation bénédictine de Bavière | ||||
이탈리아어 | Congregazione Benedettina di Baviera |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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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보이론 대수도원의 바이에른 연합회 수사들 |
1. 개요
성 베네딕도회 바이에른 연합회는 베네딕도회 총연합에 속해있는 19개의 연합회 중 하나로, 1684년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의 승인 아래 바이에른 지역 수도원들의 협력 체제로 출범하였으며, 전통적인 수도규율의 회복과 공동의 영적 사명을 바탕으로 교육, 전례, 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 사회와 긴밀히 연결되어 왔다. 1803년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세속화 정책으로 한때 해산되었으나, 19세기 중반 재결성 이후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에도 각 수도원은 고유한 사도직을 수행하며,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베네딕도적 삶의 영성과 공동체 정신을 보존하고 있다.2. 역사
2.1. 17세기 말의 최초 결성과 발전
성 베네딕도회 바이에른 연합회는 1684년,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여러 수도원이 연합하여 구성되었다. 당시 각 수도원에서는 오랜 기간 내부 개혁이 시도되고 있었으며, 30년 전쟁 이후 흐트러진 수도생활의 상태를 되돌릴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수도 규율을 정비하고, 공동의 영적 사명을 회복하며, 수도원 간 협력을 제도화하려는 구상이 마련되었다. 같은 해,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수도원 장상들이 추친한 이 계획을 승인하면서 바이에른 연합회는 정식으로 출범하였다.연합회는 창립과 동시에 공동 규칙을 수립하고, 수도생활과 전례, 교육에 관한 원칙을 정비하였다. 이러한 제도적 기반은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총회를 통해 유지되었으며, 회의에서는 수도원의 운영 방향과 개혁 방침이 결정되었다. 각 수도원을 방문하여 상황을 점검하는 순시관이 선출되었고, 내부 질서 유지를 위한 조정도 함께 이루어졌다. 연합회 전체를 관리하는 총재아빠스가 수도원의 아빠스들 가운데에서 선출되어, 연합회의 영적 일치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제도적 구조를 바탕으로, 바이에른 연합회는 18세기 내내 바이에른 지역 사회의 종교적·문화적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소속 수도원들은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활동을 담당하였으며, 지역 본당의 사목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또 신학, 역사, 자연과학 분야에서 학문적 활동을 이어갔고, 도서관과 천문대, 인쇄소를 운영하며 지식의 축적과 보급에 기여하였다. 잘츠부르크와 잉골슈타트의 대학과도 긴밀한 연계를 맺으며, 수도원들은 지역의 학문 공동체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2.2. 세속화 정책과 수도원에 대한 억압
1803년,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Maximilian IV. Joseph)[1]의 지시에 따라 바이에른 전역에서 대대적인 세속화 조치가 단행되었다. 이는 1802년 8월 24일,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공포되어 주교후들을 끝장내버린 제국사절회의 주요결의안(Reichsdeputationshauptschluss)에 따른 추가적 조치였으며, 바이에른 외무장관 막시밀리안 폰 몬트겔라스(Maximilian von Montgelas) 백작의 주도 아래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포함한 대부분의 수도기관이 해산되었다. 수도원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공동체는 해체되었으며, 수도생활은 거의 전면적으로 중단되었다. 바이에른 연합회도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수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교구 소속의 본당 주임신부로 활동하거나 학교 교사로 일했으나, 이전까지 바이에른 연합회가 지닌 영적·제도적 기반은 철저히 무너졌다. 오랜 세월 축적된 수도원의 장서와 예술품은 유실되거나 분산되었고, 교육과 전례, 학문과 사목이 어우러졌던 삶의 구조는 해체되었다. 폐쇄된 수도원 건물들 가운데 상당수는 방치되거나 파괴되었으며, 수도원이 지역 사회에서 담당했던 종교적·문화적 기능도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였다.
연합회가 붕괴되고 약 반 세기 동안, 바이에른 사회 전반에서 바이에른 연합회가 차지하던 역할은 거의 기억되지 않게 되었으며, 정부 기관이나 세속 학회 등으로 대체되었다. 수도생활에 대한 것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고 향후 바이에른 내에서 연합회가 다시 제도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2.3. 19세기 중엽의 재결성
19세기 전반기, 바이에른 지역에서 수도생활에 대한 교회 내 분위기는 점차 변화하였다. 바이에른 왕국의 명시적 지지는 없었지만, 왕국 내 일부 교구에서는 조심스러운 태도 아래 수도원들의 재건을 시도하였고, 폐쇄된 수도원들에 대한 수사들의 재입주도 이뤄지기 시작했다. 메텐(Metten)과 샤이언(Scheyern)에서는 교구 성직자들이 열악한 물질적 여건과 정치적 제약 속에서도 베네딕도회 공동체의 복원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교회 안팎의 후원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점차 확산되었으며, 교황청에서도 점차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마침내 1858년, 교황 비오 9세는 바이에른 연합회의 재설립을 공식 승인하였다. 새로운 연합회는 1803년 무너진 이전 연합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대 국가 질서와 사회 구조 속에서 수행해야 할 영적·사목적 소명을 재정립하며 변화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수도공동체로서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연합회는 점차 제도적 기반을 갖추어 나갔다. 메텐, 샤이언, 플랑크슈테텐(Plankstetten) 등의 수도원이 재건되었고, 이후 다른 수도원들도 재건되거나 새로 설립되었다. 재건된 공동체들은 학교 교육과 민중 선교, 본당 사목, 정성 어린 전례 거행 등 다양한 활동에 헌신하였다. 초기에는 정부의 간섭과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베네딕도적 수도승의 삶은 점차 다시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연합회는 다시금 바이에른 교회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교육과 사목, 공동체 삶의 현대적 과제를 수용하였고, 독일어권 내 타 연합회와의 교류 및 베네딕도회 총연합으로서의 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바이에른 연합회는 지역 교회에 뿌리를 둔 동시에, 세계적 베네딕도회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강화해 나갔다.
2.4. 20세기 초의 위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교회의 공적 권위는 흔들렸고, 많은 수도원은 재정난과 수도자 부족에 직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탈(Ettal), 샤이언, 메텐과 같은 수도원은 교육과 사목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고, 다른 일부 수도원은 전통적인 수도생활과 영적 쇄신에 더욱 집중하였다. 독일 제국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바이에른 내 베네딕도회의 기반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편이었다.전간기에는 수도원들 간에 전례 갱신 운동이 확산되었다. 니더알타이히(Niederaltaich) 수도원은 성무일도의 정비와 신자들의 능동적 전례 참여를 장려하며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하였고 여러 수도원들이 현대 세계와의 대화를 시도하며, 신학적 출판 활동이나 영성 지도, 피정 사도직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나치의 등장 이후 수도원들은 한층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였다. 나치 독일 정부는 국제적 연계를 가진 수도 공동체를 국가 내부 정보 유출의 대상으로서 경계했고, 수도원들이 주관하는 교육과 대외 활동을 강제적으로 제한하였다. 샤이언 수도원은 재산을 몰수당했고, 에탈의 학교는 한때 폐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에른 연합회 소속 수도원들은 할 수 있는 저항을 이어가며, 수도생활과 기도,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였다. 일부 수사들은 나치의 탄압 속에서도 박해받는 이들을 숨기거나 영적 지지자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연합회는 빠르게 평상시의 수도생활을 회복하였다. 파괴된 수도원 시설은 복구되었고, 교육과 사목 활동도 재개되었다. 지기스베르트 미터러(Sigisbert Mitterer) 총재아빠스와 니더알타이히의 에마누엘 호이펠더(Emmanuel Heufelder) 아빠스 등의 지도 아래, 연합회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며 새로운 사목적·사회적 과제에 참여하였다.
2.5. 20세기 중반 이후의 쇄신과 현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에른 연합회는 다른 모든 연합회들과 마찬가지로 영적 쇄신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각 수도원은 교육, 전례, 사목 활동을 다시금 충실히 수행하기 시작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공의회는 베네딕도회 연합회들에 성 베네딕도 수도영성의 근원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함과 동시에, 현대 사회와의 책임 있는 만남을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공동체는 공의회 문헌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시도하며, 하느님을 함께 찾는 삶과 손님을 환대하는 자세를 중심으로 수도생활을 재정립하였다.한편, 빠른 세속화와 탈종교화로 인해 사회적 환경은 급속히 변하였다. 수도 지원자는 감소하였고, 기존의 활동 영역에도 변화가 일었다. 바이에른 선제후국 시기나 나치 정권 때처럼 외압은 없었으나 몇몇 수도원에서는 학교나 기숙사를 폐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회는 수도원 체험 프로그램, 피정, 수사들의 영적 동반, 바이에른 가톨릭 유산에 대한 문화 행사 등 새로운 사도직 활동 등을 꾸준히 확장하였다.
오늘날 연합회에 소속된 수도원들은 서로 긴밀히 협력하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활동 영역을 유지하고 있다. 에탈 수도원은 중고등학교와 양조장을 운영하여 지역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고, 플랑크슈테텐 수도원은 유기농업과 생태 신학을 결합한 프로그램으로 주목받는 중이며, 니더알타이히 수도원의 경우에는 정교회 전례 연구 및 동방교회 전통과의 교류에 지속적으로 힘쓰고 있다. 연합회 전반적으로는 수도생활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장기 체류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21세기 들어 새로운 입회자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바이에른 연합회는 여전히 지역 사회의 영적 중심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