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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시아 도르트문트|보루시아 도르트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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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볼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핸드볼 | |||
역사와 문화 | 역사 | 역사|유니폼 | 관련 인물|역대 감독 1대~40대 | 역대 감독 41대~ | 역대 로고 | ||
역대 시즌 | 2012-13|2013-14|2014-15|2015-16|2016-17|2017-18, 리그|2018-19, 리그|2019-20, 리그|2020-21, 리그|2021-22, 리그|2022-23, 리그|2023-24, 리그|2024-25, 리그 | |||
기록 | 분데스리가 ★★ 5회 | 1994-95, 1995-96, 2001-02, 2010-11, 2011-12 | ||
DFB-포칼 5회 | 1964-65, 1988-89, 2011-12, 2016-17, 2020-21 | |||
DFL-슈퍼컵 6회 | 1989, 1995, 1996, 2013, 2014, 2019 | |||
UEFA 챔피언스리그 1회 | 1996-97 | |||
문화 | 응원가 | |||
관련 상식 | 더비 매치 | |||
기타 | 1997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2013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2024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 |||
구단 시설 | 경기장 | 지그날 이두나 파크|슈타디온 로테 에르데 | ||
훈련 시설 | 도르트문트 브라켈 트레이닝 센터 | |||
이 외 | 연고지 | 도르트문트 | ||
기타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
1. 개요
제목 그대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이다.2. 역사
2.1. 노란 바람의 시작
<colcolor=#000> | |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창단한 젊은 청년들 '''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909년 12월 19일, 교회의 축구 활동 제한에 불만을 품은 트리니티 유스 소속 18명의 젊은이들에 의해 창단되었다. 이 트리니티 유스는 1901년 11월에 설립된 드라이팔티히카이츠게마인데[1]라는 가톨릭 교회의 청년단체였다. 당시 도르트문트는 프로테스탄트가 주류인 도시였는데, 이 교회[2]는 1900년에 완공되어 중공업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 온 가톨릭 신자들[3]에게 종교적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 젊은 가톨릭 신자들은 축구에 대한 열정이 있었으나, 당시 가톨릭 교회는 축구를 "거칠고 야만적인 경기"로 여겨 청년들의 축구 활동을 제한하고 있었다. 특히 후베르트 데발트(Hubert Dewald) 부제는 젊은이들이 일요일에 축구를 하던 바이세 비제(Weiße Wiese)에서 골대를 제거하게 하고, 일요일 오후에 추가 예배를 마련해 축구 활동 시간을 방해했으며, 선수들이 "쥠 빌트슈츠(Zum Wildschütz)" 술집에서 만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회와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약 50명의 청년단체 회원들이 모여 독립적인 클럽 창설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창단 역사의 결정적인 날인 1909년 12월 19일[4], "쥠 빌트슈츠" 술집의 별실에서 모임이 열렸고, 교회로부터 독립된 클럽 창설에 대해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 중 많은 사람들이 모임을 떠났고, 나머지 18명만이 남아 클럽 창단을 결정했다. 데발트 부제는 모임 소식을 듣고 술집에 도착했지만, 그의 입장은 거부되었다. 남은 18명의 젊은이들은 그날 저녁 구기 클럽 보루시아 09 도르트문트(Ballspiel-Verein Borussia 09 e. V. Dortmund)를 공식적으로 창단하였다.
창립 모임 전에는 클럽 이름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고 한다. "보루시아(Borussia)"라는 이름은 모임 장소였던 술집 벽에 걸려 있던 보루시아 양조장(Borussia-Brauerei)의 광고에서 따왔다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다. 동시에 "보루시아"는 프로이센의 라틴어 표현이기도 하여,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BVB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참고로, 보루시아라는 이름은 슈타이거 거리(Steiger Strasse)에 있던 보루시아 양조장에서 따온 것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5]
그렇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란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들의 클럽을 갖게 된 젊은이들은 차분한 걸음으로 명문 클럽으로 성장하기를 꿈꿨다. 클럽은 설립 직후부터 체계적인 조직 구성에도 신경을 썼다. 흥미로운 사실은 비록 축구가 주된 목적이었지만, 처음부터 축구부와 육상부를 함께 갖춘 종합 스포츠 클럽으로 설립했다는 점이다. 당시 독일 서부 축구 연맹(Westdeutscher Spiel-Verband, WSV)은 신규 축구 클럽의 가입을 제한하고 있었고, 이에 클럽은 먼저 제한이 없었던 육상부를 1910년 6월 19일에 WSV에 가입시킨 다음, 같은 해 12월 3일에 축구부를 육상부 산하에 두는 형식으로 WSV에 등록하는 우회 전략을 택했다. 축구부만 별도로 가입을 신청할 경우 허가를 받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트로이 목마 전략은 당시 도르트문트의 경쟁 클럽이었던 도르트문트 SC 95[6]를 이끌던 독일 축구 연맹 소속의 발터 산스(Walter Sanß)가 조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독일 서부 축구 연맹의 신규 가입 중단 조치가 계속 유효했기 때문에 1912년 여름에 도르트문트 지역의 레나니아(Rhenania), 브리타니아(Britannia), 도이체 플라게(Deutsche Flagge) 세 클럽은 독자적으로 연맹에 가입할 수 없어 이미 WSV에 등록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합병하게 되었다. 특히 1913년 1월에는 클럽의 민주적인 운영 방식을 보여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사회는 클럽 회원들을 스포츠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 매주 금요일 공개 회원 미팅을 개최하기로 했다. 이 미팅에서는 팀 주장들이 일요일 경기의 선수 구성을 제안하고 회원들과 함께 논의했으며, 선수 선발에 의견 불일치가 있을 경우 최종 결정권은 이사회가 가졌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도르트문트의 초창기 클럽 문화가 얼마나 참여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편, 이 과정에서 하인리히 운게르(Heinrich Unger)가 첫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그는 1910년 중반 개인적인 이유로 이 직책에서 물러났다. 이후 프란츠 리제(Franz Risse)가 짧은 6주간의 임기를 맡았고, 곧이어 프란츠 야코비(Franz Jacobi)가 회장직을 맡아 1923년까지 클럽을 이끌었다. 야코비는 도르트문트의 초기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로, 그의 리더십 아래 클럽은 최초의 홈구장 확보와 지역 리그에서의 성장을 이루어냈다.
클럽은 이러한 리더십 체계를 갖추며 차근차근 성장해 나갔다. 1909년 12월 19일 창단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첫 공식 경기를 치르기까지는 392일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클럽은 먼저 독일 서부 축구 연맹의 가입 승인을 받아야 했고, 그 후에야 1911년 1월 15일 VfB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첫 공식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이 역사적인 첫 경기에서 도르트문트는 9-3이라는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서 클럽 최초의 챔피언십 경기는 1911년 9월 10일 라욱셀에서 라욱셀 체육협회 축구 부문(Spielabteilung des Turnerbundes Rauxel)을 상대로 열렸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0으로 승리했다.
도르트문트의 초창기 역사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었다. 1913년 9월 8일, 도르트문트는 홈구장인 바이세 비제에서 VfB 도르트문트와 경기를 치렀다. 비엔케의 득점으로 1-0 승리를 거두었으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VfB 도르트문트 선수들의 항의로 경기장 근처에 살던 뷔베케 농부에게서 자를 빌려와 골대를 측정한 결과, 한쪽 골대가 규정보다 22cm 더 넓은 것으로 밝혀져 경기 결과가 무효 처리되었다. 또한 공식 유니폼은 처음에 푸른색과 흰색의 줄무늬 셔츠에 빨간 허리띠와 검은색 반바지로 지금과는 다른 유니폼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후 1913년 2월 14일 독일 서부 축구 연맹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클럽 색상과 레몬 노란색 셔츠에 검은색 'B'를 착용하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의 상징적인 검정-노랑 색상 유니폼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이 당시 젊은이들이 설립한 다른 클럽들은 대부분 곧바로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 전력 보강을 서둘렀지만, 도르트문트는 다른 길을 택했다. 클럽은 당시 독일 최상위 대회였던 전국 리그[7]에 바로 참여하는 것보다, 기초를 다지는 것을 우선시했다. 대신 지역 리그에 주로 참여해 명문 클럽으로 가는 초석을 닦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결정은 젊은 혈기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히 클럽의 미래를 건설하고자 했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911-12 시즌에 당시 3부 리그에 해당하는 C-클래스에서 시작하여 1위를 차지하고 B-클래스로 승격했다. 1913-14 시즌에는 B-클래스에서 1위를 차지하며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최상위 리그인 A-클래스로 승격했다. 이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설립된 후 불과 5년 만에 이룬 빠른 성장이었다. 하지만 1914-15 시즌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이로 인해 도르트문트는 빠른 성장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전쟁 기간 중에는 적십자를 위한 자선 경기들만 열렸으며, 18명의 창립 멤버 중 9명은 전쟁 중 사망하여 클럽의 10주년을 맞이하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작용하기도 했다. 도르트문트는 젊은이들에 의해 창단된 클럽이었기에 재정적 자립도가 약할 수밖에 없었고,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클럽을 만들었던 탓에 투자를 하려는 사람들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또 창단 후 10년 정도가 지난 1920년대에는 적극적인 스폰서 유치로 인한 클럽의 덩치 키우기에 도전했으나, 이 역시 경험 부족으로 인해 참담한 실패만 맛본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당시 도르트문트의 도전은 클럽 파산 위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클럽이 사라질 수도 있었던 극심한 재정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창단 때부터 그들이 보여준 진취적 정신 덕분이었다.
1923년 야코비가 물러난 후에는 하인츠 슈바벤(Heinz Schwaben)이 회장직을 맡았는데, 그는 도르트문트 우니온 양조장(Union-Brauerei)의 책임자로서 바이세 비제 구장을 1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보루시아-슈포츠플라츠(Borussia-Sportplatz)"로 확장하는 데 필요한 재정적 자원을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초대 감독이 이 시기에 선임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토니 카르녤리가 그 주인공이었다. 비록 6개월만 지휘하고 떠났지만 후에 세리에 A의 토리노와 인터 밀란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1926-27 시즌, 도르트문트는 팀 강화를 위해 다른 도르트문트 클럽들로부터 여러 선수들을 영입했는데, 일부 영입 과정에서 당시 아마추어 규정을 위반한 사례가 있었다. 이 문제는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나중에 발각되었다. 이러한 위반이 그 시즌 SV 랑엔드레어 04(SV Langendreer 04)와의 결정적인 승격 경기에서 1-3으로 패하고 다시 2부 리그로 내려가는 결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클럽은 이 패배로 재정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으나, 하인츠 슈바벤 회장의 개인 자산 기부로 위기를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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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르트문트의 초창기 홈 경기. 슈타디온 로터 에어데[8]에 모인 많은 도르트문트의 홈 팬들 ''' |
지역 주민들은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는 도르트문트를 그대로 망하게 두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젊은 사람들이 올바른 축구 클럽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던 그들의 건강한 초심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르트문트의 팬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건강한 클럽을 만들어주길 당부하며 도르트문트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런 서포터들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은 도르트문트는 클럽의 간판을 내려야 할 위기를 간신히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초창기의 홈구장 발전 과정도 함께 살펴보자면, 처음에는 울퉁불퉁한 경사가 있는 단순한 밭에서 경기를 치르다가 1910년대 초에 바이세 비제를 홈구장으로 선택했다. 이 구장은 보르시크플라츠 근처에 위치했으며, 호쉬 제철소 공업 단지 인근에 있었다. 축구 클럽으로서 공식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1919년 5월 24일에 법적으로 등록되었고, 이때 첫 공식 정관과 경기 규정도 함께 작성되었다. 이를 통해 바이세 비제 구장을 확장하기 위한 법적 권리도 함께 확보했다. 이후 1926년에는 앞서 살펴본 슈바벤 회장의 재정 지원 약속이 현실화되어, 바이세 비제가 마침내 1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보루시아-슈포츠플라츠로 확장되었다.
1924-25 시즌에는 도르트문트-헤르네 1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1927-28 시즌에서 도르트문트는 2부 리그에서 2위를 차지하며 승격에 실패했다. 1929년 독일 리그 시스템에 특별 클래스(Sonderklasse)가 추가되었으나 도르트문트는 이 리그나 1부 리그 진출에 실패하여 1929-30 시즌에 3부 리그에서 경기했다. 그러나 곧 4위를 차지하며 1부 리그로 승격했고, 1935-36 시즌까지 1부 리그에 머물렀다. 이 시기 도르트문트의 첫 스타는 아우구스트 렌츠(August Lenz)였다. 렌츠는 1935년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도르트문트 선수로는 처음으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었다. 그는 1927-28 시즌 유소년 선수로 도르트문트에 합류하여 빠르게 팀의 핵심 선수로 성장했다.
한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유소년 팀은 1939년에 베스트팔렌 챔피언십과 서독 챔피언십을 모두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935-36 시즌에 프로페셔널리즘을 향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당시 FC 샬케 04의 미드필더였던 프리츠 텔렌(Fritz Thelen)을 클럽 최초의 전문 감독으로 영입했다. 텔렌이 즉시 부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샬케의 레전드 에른스트 쿠초라가 몇 주 동안 임시로 팀을 지도했고, 이로써 도르트문트의 첫 감독이 되었다. 텔렌은 첫 시즌에 도르트문트를 최상위 리그로 승격시켰다. 이후 1936-37 시즌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페르들 스바토슈(Ferdl Swatosch)가 감독을 맡아 팀을 가우리가 4위로 이끌었다.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큰 위기에서 벗어난 도르트문트는 본격적으로 비상을 준비했다. 20여 년 동안 지역 리그에서 갈고 닦은 실력에다 큰 실패로 인한 교훈, 여기에 지역민들의 깊은 사랑까지 두루 얻은 도르트문트에게 성공은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그들을 괴롭혔다. 1930년대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을 뒤흔든 나치즘때문이었다. 극도의 전체주의 정당이었던 나치즘은 독일 내 모든 스포츠 및 운동 단체들에게 "우리의 목표에 맞게 팀을 운영하라"라는 간결하면서도 섬뜩한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정권 선전 도구로 스포츠를 이용한 것이다. 특히 심각했던 것은 1937년 나치 정권이 도르트문트의 홈구장이었던 바이세 비제를 강제로 몰수하고, 대신 로테 에르데(Rote Erde)로 이전하게 한 사건이었다. 이는 호쉬파크 내에 수영장을 건설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9] 정권의 이러한 강제 이전은 클럽의 정체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
도르트문트는 1930년대 초 나치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내부적 갈등을 겪었다. 1934년 아우구스트 부세(August Busse)가 클럽 회장으로 복귀했는데, 그는 이미 1928년부터 1933년까지 회장직을 맡은 인물이었다. 에곤 펜트루프(Egon Pentrup)는 1933년 부세로부터 회장직을 인계받았으나, 가톨릭 신자이자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펜트루프는 나치즘의 지도자 원칙(Führerprinzip)에 따라 설치된 클럽 지도자(Vereinsführer)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이렇게 나치 정권의 영향으로 클럽 경영진이 교체되는 과정이 있었고, 이는 축구 클럽인 도르트문트도 예외일 수 없었다. 도르트문트는 나치즘의 그런 권고를 무시해 당에 가입하지 않는 등 항전의 자세를 취했고, 그런 도전은 성난 나치즘으로 하여금 클럽 경영진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큰 생채기를 남기게 하고 말았다. 이후엔 클럽 내부에서 나치즘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작업이 계속됐고, 그렇게 색출된 사람은 공개 처형을 당하는 등 클럽 내 어두운 그림자가 계속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게 팀이 커다란 혼란에 흔들렸으니 선수들은 물론 도르트문트를 응원하는 팬들까지도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돌격대 소속이었던 빌리 뢰어(Willi Röhr)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활동하며 나치당 지도부와의 좋은 관계를 통해 클럽 선수들이 병역이나 노동 의무에서 면제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클럽 공식 30주년 기념책에 따르면, 첫 번째 전쟁 해에 가우리가 팀 선수의 80%가 SA 소속이었으며, NSDAP 회원이었던 아우구스트 렌츠는 당시 토트 조직(Organisation Todt)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나치즘의 강제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도르트문트의 여러 회원들은 저항 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클럽의 시설 관리자였던 하인리히 체르쿠스(Heinrich Czerkus)와 핸드볼 부서 의장이었던 프란츠 히플러(Franz Hippler)는 저항 활동 중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1945년 성금요일에 처형되었다. 이들은 클럽의 인쇄 설비를 이용해 반나치 전단지를 제작하는 등 활발한 저항 활동을 펼쳤다. 오늘날 도르트문트 팬들은 매년 체르쿠스를 기리는 추모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도르트문트에도 희망의 빛이 깃들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도르트문트는 나치즘 초창기 가입을 거부하고 항전했다가 클럽 경영진이 송두리째 바뀌어 나치즘 신봉자들이 클럽의 실권을 장악하게 됐는데, 바로 이 문제가 세계대전 종료 후 연합군들에게 또 다른 명분을 제공했다. 연합군은 당시 독일 내 나치즘의 잔재를 몰아내는 데 힘을 쏟았는데, 클럽 경영진과 직원 대부분이 나치즘이었던 도르트문트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클럽이 해체당한 것이다. 다행히 주변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클럽들과 합병해 그럭저럭 명맥은 이어갈 수 있었지만, 원하지도 않았던 나치즘으로 인해 수십 년의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
2.2. 독일을 물들인 노란 바람
하지만 그러한 위기는 도르트문트를 강팀으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전쟁 후 독일의 클럽들은 대부분 선수와 관계자들을 잃어 재건이 필요했다. 도르트문트도 마찬가지였으며, 1945년 7월에 연합군 군정이 빌리 비체크(Willi Bietzek)를 클럽 회장으로 임명하면서 클럽의 재허가가 이루어졌다. 1945년 8월부터 호쉬파크에서 다시 축구 경기가 시작되었고, 1946년 새로운 시즌에 도르트문트는 서부 지역 리그의 두 번째 디비전에 속하게 되었다. 1947년에는 루디 뤼커트(Rudi Lückert)가 전쟁 후 첫 번째 공식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대 말 도르트문트는 이전과는 몰라보게 강한 팀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은 연합군에 의한 강제 해체 후 이뤄진 클럽 합병 덕분이었다.당시 도르트문트는 주위 두 개 클럽과 합병에 가까운 상생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군의 제재 후 도르트문트 출신의 경영진들이 가장 빨리 현장 1선에 복귀해 팀을 재건시켰고, 이 과정에서 세 팀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팀을 재창단할 수 있었다. 거의 40년에 달하는 클럽 역사에서 가장 큰 성공은 전후 두 번째 시즌에 이루어졌다. 한층 높아진 전력을 보유하며 그렇게 승승장구를 시작한 도르트문트는 당시 베스트팔렌 지역 최강으로 꼽히던 샬케 04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레비어 더비라 불리며 루르 지역 더비중 가장 유명한 더비 매치이자 독일 내 최고의 더비 매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 바로 이 시기다. 1946-47 시즌 도르트문트가 SpVgg 에르켄슈비크를 3점 차로 앞서 지역 그룹 우승을 차지하며 승격을 획득한 후, 1947년 5월 18일 헤르네의 슈트룬케데 성 경기장에서 서부 독일 챔피언십을 두고 샬케 04와 결승전을 치렀다. 도르트문트는 3-2로 승리했으며, 이 경기는 서부의 전환점(Wende im Westen)으로 독일 축구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 경기로 인해 샬케 04의 루르 지역 축구 패권이 무너졌고, 도르트문트는 서부 독일 축구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렇게 재건된 도르트문트는 빠르게 경기력을 회복하며 성장했다. 1947-48 시즌에도 12승, 12무, 4패의 승점 36점이라는 성적과 62골 득점, 22골 실점이라는 기록과 함께 오버리가 베스트(Oberliga West)에서 우승, 베스트팔렌 지역을 대표해 전국 챔피언십[10]에 참가하게 됐다. 처음으로 전국 대회의 맛을 알게 된 도르트문트는 다음 시즌인 1948-49 시즌에도 17승, 4무, 5패의 승점 38점이라는 성적과 79골 득점, 30골 실점이라는 기록과 함께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서부 리그 챔피언이 되었고, 1949년에는 에두아르트 하블리체크(Eduard Havlicek) 감독 지휘 하에 처음으로 독일 챔피언십 결승에 진출했다. 이 슈투트가르트 열전(Stuttgarter Hitzeschlacht)으로 불리는 결승전에서는 헤르베르트 에르트만(Herbert Erdmann)의 두 골에도 불구하고 VfR 만하임에 2:3으로 패했지만 조금씩 베스트팔렌 지역을 넘어 독일 전역에 존재감을 과시하던 도르트문트는 꾸준한 강세를 보였다.
1949-50 시즌에도 76골 득점, 36골 실점, 43점으로 3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어서 1951-52 시즌에는 3위, 1952-53 시즌에는 다시 1위를 기록했으며, 1955-56 시즌과 1956-57 시즌의 연속 독일 챔피언십 우승까지 이어지는 황금기의 기반을 다졌다. 이러한 성공으로 도르트문트는 베스트팔렌주는 물론, 전국 챔피언십에 나가서도 손색없는 전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1955-56 시즌에는 헬무트 슈나이더(Helmut Schneider)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도이치 마이스터란 이름 아래 창단 첫 독일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슈나이더 감독은 매우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선수들을 효과적으로 조직화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이 시기 도르트문트의 성공은 뛰어난 선수진 덕분이었다. 알프레드 '아디' 프라이슬러는 168골을 넣으면서 클럽 역사상 최다 득점을 기록한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였고, 알프레드 니피에클로(Alfred Niepieklo)와 알프레드 켈바사(Alfred Kelbassa)와 함께 세 명의 알프레도(drei Alfredos)라고 불리던 강력한 공격 삼각편대를 형성했다. 이들 셋은 1956년과 1957년 결승전에서 총 8골 중 7골을 합작했다. 수비에서는 막스 미할렉이 1940-50년대 팀의 핵심으로 활약했는데, 그는 처음에는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다가 나중에는 거미(Die Spinne)라는 별명을 얻으며 스토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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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56 시즌 우승후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리는 알프레드 프라이슬러 ''' |
다음 해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출전한 1956-57 시즌에 또 한 번 결승전에 진출했고 함부르크와의 맞대결 끝에 4-1이란 넉넉한 스코어로 우승을 차지하며, 대회 2연패란 금자탑을 세웠다. 슈나이더 감독은 이 결승전에서 젊은 국가대표 선수인 아키 슈미트를 기용하지 않고 전년도 우승팀의 라인업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 결과 도르트문트는 같은 결승전 라인업으로 연속 우승을 차지한 첫 번째이자 마지막 독일 팀이 되었다. 또한 같은 시즌에 참가한 유러피언컵에서 CA 스포라 룩셈부르크를 예선 라운드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홈에서 열린 1차전을 도르트문트가 4-3 점수로 승리를 거두며 창단 첫 유러피언컵 승리를 기록했으나 룩셈부르크 원정에서는 1-2로 패배하여 창단 첫 유러피언컵 패배도 기록하였다. 이후 재경기를 홈에서 치뤘는데, 여기서 7-0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도르트문트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게 되었다.[11]
1라운드에서 만난 다음 상대는 맷 버스비가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1차전은 맨체스터에서 열렸고, 원정팀을 상대로 맨유가 3-0으로 먼저 앞서나갔다. 후반에 도르트문트가 2골을 넣으며 추격을 시작했으나 더 이상의 득점은 넣지 못하며 도르트문트의 2-3 패배로 1차전이 끝났다. 이후 도르트문트의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0-0 무승부를 거두며 맨유가 종합 3-2 스코어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그렇게 도르트문트의 첫 유러피언컵은 16강에서 마무리되었다.
이 시기의 다른 주요 인물로는 1957년 두 번째 우승의 주역인 헤르베르트 잔트만(Herbert Sandmann)과 빌헬름 부르크스뮐러(Wilhelm Burgsmüller)가 있다. 부르크스뮐러는 도르트문트가 우승한 세 번의 챔피언십 결승전에 모두 출전한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12] 또한 에리히 샨코(Erich Schanko)는 도르트문트에서 태어난 로컬 출신 공격수로, 1950년대 초 도르트문트에서 첫 번째로 독일 국가대표에 발탁된 선수였다. 중원에서는 아키 슈미트가 1956년 우승팀의 중요한 구성원이었고, 후에 1963년 독일 챔피언십, 1965년 DFB-포칼과 1966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에도 기여했다.
수비수 헤르베르트 잔트만의 경우, 잔트만은 1956년과 1957년 챔피언십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무릎 문제로 인해 1958년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골키퍼 하인리히 크비아트코프스키(Heinrich Kwiatkowski)는 1950년대 세 번의 챔피언십 동안 팀의 수문장이었으며, 1954년 월드컵 우승팀의 일원이기도 했다. 이렇게 뛰어난 개인 기량도 중요했지만, 도르트문트의 성공은 무엇보다 팀워크의 결과였다. 특히 앞서 말했듯이 1957년 우승팀은 전년도와 동일한 선수 구성으로 경기를 치르는 전략을 통해 연속 우승을 거뒀고, 그러한 선수들 간의 높은 호흡과 경험을 통해 독일 축구 역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세울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안정성과 경험은 도르트문트가 유럽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갖추는 밑거름이 되었다.
아무튼 도르트문트는 2연속 유러피언컵에 참가했고, 1라운드 상대로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 맞닥뜨렸다. 홈에서 열린 1차전은 도르트문트가 4-2로 승리를 가져갔지만 부쿠레슈티 원정에서 1-3으로 패하며 저번 시즌과 마찬가지로 재경기로 다음 라운드 진출을 가리게 되었다. 이번에는 중립 구장에서 경기가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재경기 장소는 볼로냐의 스타디오 레나토 달라라로 정해졌다. 도르트문트와 스테아우아의 3차전 경기는 도르트문트의 3-1 승리로 끝이 나며 도르트문트가 8강에 진출하였다. 8강 상대는 지포 비아니가 이끄는 AC 밀란이었는데, 도르트문트는 홈에서 밀란을 상대로 1-1로 비겼고, 원정에서 1-4로 대패하며 도르트문트의 두 번째 유러피언컵은 8강에서 마무리되었다.
한편, 1957-58 시즌과 1958-59 시즌 오버리가에서 두 시즌 연속 5위를 기록한 후, 1958년 여름 막스 메르켈(Max Merkel) 감독이 부임하여 팀의 세대교체를 시작했다. 메르켈은 디터 "호피" 쿠라트(Dieter "Hoppy" Kurrat), 찰리 쉬츠(Charly Schütz), 티모 코니츠카, 로타어 에머리히 같은 젊은 선수들을 주전으로 기용했고, 이 투자는 곧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1959-60 시즌 3위를 차지한 뒤 1960-61 시즌에는 독일 챔피언십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하노버에서 열린 경기에서 뉘른베르크에 0-3으로 패했다. 이 젊은 도르트문트 팀은 아직 경험이 부족했지만, 곧 최고의 팀으로 성장할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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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63 시즌 마지막 전국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는 도르트문트 선수들의 모습 ''' |
이후 1962-63 시즌에는 쾰른을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 3-1로 승리하며 대회 통산 세 번째 우승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로 이 대회는 1963-64 시즌부터 시작된 분데스리가 출범전에 열린 마지막 전국 챔피언십이었는데, 도르트문트는 이 마지막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대미를 장식한 클럽으로 남게 됐다.[13] 베스트팔렌 지역에서만 조용히 불던 노란 바람이 마침내 전 독일을 물들인 순간이었다.
2.3. 첫번째 몰락과 힘겨운 시기들
분데스리가 출범 후 원년 멤버가 된 도르트문트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도르트문트는 당시 팀 내 넘버 원 골잡이였던 프리드헬름 코니츠카를 선두에 내세워 유수의 강호들과 대등한 싸움을 했고, 젊은 청년들의 혈기에 의해 창단된 축구 클럽은 나치즘과 세계대전이란 후유증을 잘 이겨내고 독일 내 명문 클럽으로 빠르게 자리 잡는듯 했다. 그렇게 분데스리가 창설 첫 시즌인 1963-64 시즌, 도르트문트는 리그에서 4위에 그쳤지만, 유러피언컵에서는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1라운드에서 노르웨이 구단인 륀 오슬로를 만나 종합 7-3 스코어로 여유롭게 2라운드에 진출했는데, 하필이면 체이즐레르 러요시가 이끄는, 세 시즌 연속 결승전에 진출한 포르투갈의 명문 벤피카를 만났다.1차전 벤피카 원정에서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꼽히던 에우제비우가 득점을 기록하며 도르트문트는 1-2로 패했지만, 다행히도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에우제비우가 결장한 벤피카를 상대로 5-0 대승을 거두며 종합 6-2로 2라운드 진출을 확정지었다. 8강에서는 두클라 프라하를 상대로 1차전 원정에서 4-0 승리를 거두었으나 2차전 홈에서 되려 1-3으로 패배하며 우여곡절 끝에 준결승까지 진출하였다. 비록 준결승전에서는 후일 우승팀이 되는 인터 밀란을 상대로 원정에서 0-2로 패하면서 탈락했지만, 이는 도르트문트의 초창기 유럽 대항전에서 거둔 의미 있는 성과였다.
1965-66 시즌, 도르트문트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 출전하여 결승까지 진출했다. 햄던 파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2-1로 승리하며 독일 클럽이 유럽 대항전에서 거둔 첫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연장전에서 라인하르트 리부다의 기적적인 골이었다. 리부다는 30미터 거리에서 로빙 슛을 날렸고, 공은 골대를 맞고 리버풀 수비수 론 예이츠의 몸에 부딪혀 골문으로 들어갔다. 이 역사적인 승리로 도르트문트는 유럽 무대에서 독일 축구의 위상을 높이는 선구자가 되었다.
그렇게 순조로운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도르트문트는 처음 맛보는 성공에 취해 방만한 클럽 운영을 하게 되는데,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과 분데스리가에서의 선전으로 지금껏 만져보지 못했던 막대한 자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성공에 눈이 먼 클럽 경영진은 쓸데없는 지출과 무작위 선수 영입을 일삼아 순식간에 금고를 바닥냈고, 도르트문트의 재정상황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아직까지 경험한 적 없는 재정 위기와 마주친 도르트문트는 이후 급격한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 팀의 주축 선수들이 자금이 바닥난 팀을 떠났고, 그것이 직접적인 충격파로 작용해 성적까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특히 유럽 무대를 호령했던 주요 선수들이 잇달아 팀을 떠난 것이 팀 전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69년에는 분데스리가 득점왕 출신인 로타어 에머리히가 떠났지만 그를 대체할 선수를 영입하지 못했고, 1970년에는 팀의 장기 주장이었던 볼프강 파울(Wolfgang Paul)이 커리어를 마감했다.
거의 매년 분데스리가에서 두 자릿수 승수 이상을 기록하며 베스트팔렌 지역을 대표하는 축구 클럽으로 이름값을 했던 도르트문트였지만 1968-69 시즌 최종전 승리로 16위 턱걸이 잔류[14]를 한 데 이어 1969-70 시즌 잠시 5위를 기록한 뒤 1970-71 시즌엔 간신히 10승을 기록하며 또다시 13위로 급락하는 충격을 맛봤다. 이 시기 클럽 회장이 발터 클리멧(Walter Kliemt)에서 하인츠 귄터(Heinz Günther)로 바뀐 것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는데, 귄터는 오래 미뤄졌던 구단 재건의 길을 제시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충격은 1971년에 왔다. 도르트문트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대규모 매각을 단행해야 했다. 라인홀트 보삽(Reinhold Wosab), 빌리 노이베르거(Willi Neuberger), 베르너 바이스트(Werner Weist), 지그프리트 헬트(Sigfried Held) 등 팀의 핵심 선수들을 모두 다른 클럽으로 이적시켰다. 이 과정에서 선수단의 질은 크게 떨어졌고, 결국 그 다음 시즌인 1971-72 시즌에는 6승을 올리는 데 그치며 급기야 17위로 추락해 1부 리그 등장 36년 만에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최악의 상황에까지 직면했다.[15]
강등 후 2부 리그에서의 시기는 도르트문트에게 쉽지 않았다. 1972-73 시즌 팀은 2부 리그에서 4위를 기록했고, 프로이센 뮌스터를 상대로 9:0이라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관중이 1,5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하락했다. 1973-74 시즌에는 야노스 베들 감독 체제에서 6위로 마무리했다. 당시 클럽 재정 상황은 여전히 심각했으며, 홈구장도 없어 유소년 팀을 위한 훈련 시설도 부족했다. 더구나 홈 경기 수입의 8%를 시에 지불해야 하는 조건도 부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행히 1974년 월드컵을 앞둔 서독 정부의 지원으로 도르트문트가 월드컵 개최 도시로 선정되어 5만 4천석의 신구장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이 건설된 것은 도르트문트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새 구장은 로테 에르데 서쪽에 위치했으며, 초기에는 54,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구장은 도르트문트의 홈 경기 관중을 평균 25,000명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이는 클럽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멋들어진 홈구장을 새로 받았다고 해서 당장 도르트문트가 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창단 초기 몰락해가던 도르트문트를 구했던 지역 주민들의 사랑은 여전했고, 그 사랑이 채워질 수 있는 드넓은 홈구장을 가졌다는 것은 도르트문트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도르트문트는 어렵게 주어진 그 발판을 허투루 밟지 않았다. 1975-76 시즌에는 오토 크네플러 감독이 팀을 이끌다가 시즌 중 호르스트 부츠로 교체되었는데, 부츠는 뉘른베르크와의 승격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뉘른베르크와 다음 시즌 계약을 맺었다는 이유로 경질되었고, 오토 레하겔이 새 감독으로 부임하여 승격을 이끌었다. 2부 리그에서 혹독한 수련을 쌓은 끝에 1976-77 시즌 다시 1부 리그로 돌아왔지만, 이후엔 항상 중위권에 턱걸이 하는 것에 머물렀었고, 심지어 1977-78 시즌 마지막 리그 경기였던 1978년 4월 29일에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게 12-0이라는 최악의 흑역사급 스코어[16]로 대패한 적도 있을 정도로 초창기의 명성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당시 독일은 바이에른 뮌헨을 중심으로 유럽을 제패했고 월드컵에서도 잇달아 좋은 성적을 기록해 전성기를 맞았는데, 도르트문트만은 그런 행복한 나날들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1976-77 시즌 8위를 기록한 뒤 1977-78 시즌에는 위에서 언급한 0-12 대참사를 겪으며 11위로 마쳤고 1978-79 시즌에도 12위에 그쳤다. 1979년 여름 바이에른 뮌헨과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었던 우도 라테크를 감독으로 선임하였고 6위와 7위로 순위는 올렸으나 한끝 차이로 유럽대항전 진출에 실패했다.[17] 그리고 우도 라테크 감독은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라테크가 떠난 뒤 5년간 혼란기가 찾아왔는데, 1981년 봄부터 1986년 봄까지 10명의 감독이 교체될 정도였다. 일단 1981-82 시즌은 함부르크를 분데스리가 우승과 유러피언컵 준우승으로 이끈 브란코 제베츠가 감독을 맡아 6위로 UEFA컵에 나가게 되며 1966년 이후 16년만에 유럽대항전 진출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제베츠 감독은 알코올 문제로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고, 카를하인츠 펠트캄프가 1982-83 시즌을 맡아 7위로 이끌었다.[18] 1982년 9월에는 재정적 이유로 라인하르트 라우발(Reinhard Rauball) 회장이 사임했고, 이는 스포츠적, 재정적 하락으로 이어졌다. 임시 회장 프리드헬름 크라머(Friedhelm Cramer)와 회장 프랑크 로링(Frank Roring) 하에서 클럽 부채는 830만 마르크에 달했다.
이로 인해 도르트문트는 1983-84 시즌 13위로 떨어졌고, 결국 1984년 10월 22일 도르트문트 법원이 비상 이사회를 임명해야 했다. 이 비상 이사회는 도르트문트가 파산 위기에서 벗어날 때까지 클럽의 재무와 운영을 감독했다. 당시 도르트문트는 홈 경기당 평균 관중 2만 명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하락했고, 심지어 선수들의 급여 지급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라우발이 다시 회장으로 복귀하고 게르트 니바움(Gerd Niebaum)이 부회장으로 합류하며 위기를 넘기려 했다. 니바움의 부임 이후 클럽은 지역 기업들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비핵심 자산 매각 등의 구조조정을 실시했지만, 경기력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1984-85 시즌에는 최종전에서 우승에 도전했던 SV 베르더 브레멘에 2-0 승리를 거두며 가까스로 14위로 분데스리가에 잔류했다.[19]
1985-86 시즌에는 급기야 16위로 마치며 SC 포르투나 쾰른과 강등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됐다. 1차전 원정에서 2-0 패배를 당했던 도르트문트는 2차전에서 전반 선제골을 실점한 뒤 미하엘 초어크과 마르첼 라두커누의 득점으로 후반에 2골을 넣으며 추격했다. 그러나 종료 직전까지 승부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득점이 나오지 않아 조마조마했던 순간에 위르겐 베크만의 기적적인 추가시간 득점으로 스코어를 3-3으로 맞추며 간신히 재경기로 끌고갔다.[20] 그리고 중립구장에서 치러진 재경기에서 놀랍게도 8-0 대승을 거두며 가까스로 생존에 성공했다.
1986-87 시즌에는 프랑크 밀, 노르베르트 디켈, 토마스 헬머를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고 라인하르트 자프티히 감독 아래 전년도 16위에 강등에서 겨우 탈출한 팀은 4위로 마치며 UEFA컵에 진출했다. 1987-88 시즌 리가는 13위에 그쳤지만 UEFA컵에서 셀틱과 벨레즈 모스타르에 승리하며 16강에 진출했다.[21] 1988-89 시즌을 앞두고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유망주 안드레아스 묄러, FC 바이에른 뮌헨의 미하엘 루메니게가 입단했다.
자프티히 감독은 시즌 초 주장과 불화를 겪으며 사임하여 호르스트 쾨펠이 감독이 되었다. 리가는 7위로 마무리했으나 DFB-포칼 결승에서 베르더 브레멘을 4-1로 꺾고 클럽 역사상 두 번째 DFB-포칼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약 40,000명의 도르트문트 팬들이 76,000명 수용 규모의 올림피아슈타디온을 가득 메워 열광적인 응원을 펼쳤고, 우승 다음 날에는 약 200,000명의 팬들이 도르트문트 시내 거리에서 선수단을 환영했다. 이 트로피는 클럽의 재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1990년대 전성기의 서막을 열었다.
2.4. 유럽에 퍼지는 노란 바람
DFB-포칼과 독일 슈퍼컵을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한 도르트문트는 본격적인 비상을 시작했다. 1991-92 시즌을 앞두고 스위스 명문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에서 이름을 날린 명장 오트마어 히츠펠트를 감독으로 선임하였고, 히츠펠트는 도르트문트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기를 이끈 주역되었다. 그는 전술적 지식이 풍부했고, 특히 팀 조직력과 수비 안정성을 중시했다. 그는 "개인보다 팀이 우선"이라는 철학을 선수들에게 심어주었고, 이는 도르트문트의 성공 비결이 되었다. 그렇게 스위스 최고의 스트라이커 스테판 샤퓌자 등을 앞세워 분데스리가 준우승을 차지한 후 1992-93 시즌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권위 있었던 UEFA컵에서 준우승[22]까지 달성하게 된다. UEFA컵에서의 선전으로 독일 축구 연맹은 이례적인 상금 2천5백만 마르크[23]를 도르트문트에게 지급했는데, 이 돈으로 도르트문트는 빅 클럽으로의 도약에 가속을 붙일 수 있게 됐다. 독일 축구 연맹은 이 돈을 도르트문트에 지급하며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팀에게 주기 위해 마련한 포상금이다”라고 밝혔는데, 1970년대 유럽을 호령한 바이에른 뮌헨 이후 독일 클럽들이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자(...) 당근으로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뜻밖의 거액을 손에 쥔 도르트문트는 이전처럼 방만한 운영으로 거액을 날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1970년대 겪어야 했던 암흑을 경험 삼았기 때문인데, 도르트문트는 적절한 투자로 유망한 선수들을 영입하는 동시에 클럽의 재정 자립도를 더욱 튼튼하게 하기 위해 거액을 계획적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 카를하인츠 리들레, 위르겐 콜러, 외르크 하인리히, 마티아스 자머, 안드레아스 묄러, 슈테판 로이터, 라르스 리켄, 파울루 소자, 폴 램버트, 마르틴 크레 등 당시 유럽 축구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선수들을 대거 영입할 수 있었고, 이들을 바탕으로 하여 도르트문트는 유럽 무대에 본격적인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중 절정은 1994-95 시즌부터 1996-97 시즌까지였다. 히츠펠트 감독은 특유의 뚝심 있는 지도력으로 도르트문트를 조직적으로 강한 팀으로 조련시켰는데, 개인보다 팀을 더 중시했던 그의 지도 철학은 많은 스타 선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르트문트가 잡음 없이 굴러갈 수 있도록 큰 힘을 보탰다. 게다가 도르트문트 로컬 유스 출신에다 원클럽맨 주장인 미하엘 초어크의 존재는 구심점이 되어 선수들을 잘 이끌어주었다.
2.4.1. 1994-95 시즌
1994-95 시즌 순위표 | |||||||||
<rowcolor=#fff> 순위 | 팀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rowcolor=#000> 1 | | 34 | 20 | 9 | 5 | 67 | 33 | +34 | 49 |
<rowcolor=#000> 2 | | 34 | 20 | 8 | 6 | 70 | 39 | +31 | 48 |
<rowcolor=#000> 3 | | 34 | 20 | 6 | 8 | 66 | 44 | +22 | 46 |
<rowcolor=#000> 4 | | 34 | 17 | 12 | 5 | 58 | 41 | +17 | 46 |
<rowcolor=#000> 5 | | 34 | 17 | 9 | 8 | 66 | 41 | +25 | 43 |
<rowcolor=#000> 6 | | 34 | 15 | 13 | 6 | 55 | 41 | +14 | 43 |
<rowcolor=#000> 7 | | 34 | 13 | 10 | 11 | 62 | 51 | +11 | 36 |
<rowcolor=#000> 8 | | 34 | 11 | 14 | 9 | 51 | 47 | +4 | 36 |
<rowcolor=#000> 9 | | 34 | 12 | 9 | 13 | 41 | 49 | -8 | 33 |
<rowcolor=#000> 10 | | 34 | 11 | 10 | 13 | 54 | 54 | 0 | 32 |
<rowcolor=#000> 11 | | 34 | 10 | 11 | 13 | 48 | 54 | -6 | 31 |
<rowcolor=#000> 12 | | 34 | 10 | 10 | 14 | 52 | 66 | -14 | 30 |
<rowcolor=#000> 13 | | 34 | 10 | 9 | 15 | 43 | 50 | -7 | 29 |
<rowcolor=#000> 14 | | 34 | 8 | 11 | 15 | 41 | 57 | -16 | 27 |
<rowcolor=#000> 15 | | 34 | 7 | 11 | 16 | 37 | 52 | -15 | 25 |
<rowcolor=#000> 16 | | 34 | 9 | 4 | 21 | 43 | 67 | -24 | 22 |
<rowcolor=#000> 17 | | 34 | 6 | 8 | 20 | 31 | 64 | -33 | 20 |
<rowcolor=#000> 18 | | 34 | 4 | 8 | 22 | 33 | 68 | -35 | 15 |
<rowcolor=#000> ◀ 1993-94 분데스리가 | 1995-96 분데스리가 ▶ |
<colcolor=#000> |
'''''' |
스타 플레이어와 조직력을 두루 갖춘 도르트문트는 스테판 샤퓌자, 카를하인츠 리들레, 미하엘 초어크 등이 공격에서 활약했고, 마티아스 자머가 중원을 장악했다. 그 결과, 해당 시즌 리그 34경기에서 20승 9무 5패를 기록하며 총 49점을 획득했고, 독일 분데스리가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전국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분데스리가 정상 등극은 처음이었다.
특히 이 시즌의 우승은 마지막 라운드까지 이어진 브레멘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이루어졌다. 최종전에서 도르트문트가 함부르크를 2-0으로 꺾으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우승 다음 날, 도르트문트 시내에서는 약 50만 명의 팬들이 참여한 가운데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큰 우승 축하 행사가 열렸다. 이 우승으로 도르트문트는 1963-64 시즌 이후 32년 만에 유러피언컵 출전권을 얻었다.
2.4.2. 1995-96 시즌
1995-96 시즌 순위표 | |||||||||
<rowcolor=#fff> 순위 | 팀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rowcolor=#000> 1 | | 34 | 19 | 11 | 4 | 76 | 38 | +38 | 68 |
<rowcolor=#000> 2 | | 34 | 19 | 5 | 10 | 66 | 46 | +20 | 62 |
<rowcolor=#000> 3 | | 34 | 14 | 14 | 6 | 45 | 36 | +9 | 56 |
<rowcolor=#000> 4 | | 34 | 15 | 8 | 11 | 52 | 51 | +1 | 53 |
<rowcolor=#000> 5 | | 34 | 12 | 14 | 8 | 52 | 47 | +5 | 50 |
<rowcolor=#000> 6 | | 34 | 13 | 10 | 11 | 47 | 43 | +4 | 49 |
<rowcolor=#000> 7 | | 34 | 12 | 12 | 10 | 53 | 47 | +6 | 48 |
<rowcolor=#000> 8 | | 34 | 11 | 12 | 11 | 52 | 46 | +6 | 45 |
<rowcolor=#000> 9 | | 34 | 10 | 14 | 10 | 39 | 42 | -3 | 44 |
<rowcolor=#000> 10 | | 34 | 10 | 13 | 11 | 59 | 62 | -3 | 43 |
<rowcolor=#000> 11 | | 34 | 11 | 9 | 14 | 30 | 41 | -11 | 42 |
<rowcolor=#000> 12 | | 34 | 9 | 13 | 12 | 33 | 35 | -2 | 40 |
<rowcolor=#000> 13 | | 34 | 8 | 16 | 10 | 40 | 47 | -7 | 40 |
<rowcolor=#000> 14 | | 34 | 8 | 14 | 12 | 37 | 38 | -1 | 38 |
<rowcolor=#000> 15 | | 34 | 9 | 11 | 14 | 43 | 51 | -8 | 38 |
<rowcolor=#000> 16 | | 34 | 6 | 18 | 10 | 31 | 37 | -6 | 36 |
<rowcolor=#000> 17 | | 34 | 7 | 11 | 16 | 43 | 68 | -25 | 32 |
<rowcolor=#000> 18 | | 34 | 5 | 11 | 18 | 33 | 56 | -23 | 26 |
<rowcolor=#000> ◀ 1994-95 분데스리가 | 1996-97 분데스리가 ▶ |
다음 시즌인 1995-96 시즌에도 분데스리가 정상에 서며 리그 2연패를 달성한다. 전 시즌 주축 선수들을 모두 유지한 채 유벤투스에서온 대형 수비수 위르겐 콜러를 시작으로 인테르의 루벤 소사, 묀헨글라트바흐의 하이코 헤를리히 등이 합류하며 더욱 강력한 전력을 갖추게 된 도르트문트는 두 시즌 연속으로 15골을 터뜨린 초어크의 활약에 힘입어 33라운드에서 1860 뮌헨과의 2-2 무승부로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지었다. 최종 성적은 23승 9무 2패, 승점 68점으로, 2위 바이에른 뮌헨과의 승점 차는 6점이었다.[24]
도르트문트는 독일 슈퍼컵에서도 우승하며 리그와 슈퍼컵을 석권했다. 또한 1963-64 유러피언컵 이후 32년만에 참가한 챔피언스 리그 C조에서 유벤투스,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레인저스와 한 조를 이뤘다. 홈에서 열린 유벤투스와의 1차전에서 안드레아스 묄러가 선제골을 넣었으나 미켈레 파도바노,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안토니오 콘테에게 연속 실점하며 1-3으로 역전패했다. 레인저스 원정에서는 하이코 헤를리히의 선제골로 앞서갔으나 동점골을 허용했고, 마르틴 크레가 다시 앞서가는 골을 넣었지만 3분 만에 또다시 동점골을 허용하며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1무 1패로 조 3위로 밀려난 도르트문트는 홈에서 열린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의 3차전에서 라르스 리켄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며 32년만의 유러피언컵 승리를 달성했고, 이어진 원정에서는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조 2위로 올라섰다. 유벤투스 원정에서는 미하엘 초어크와 라르스 리켄의 득점으로 2-0 리드를 잡았고, 후반 막판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추격골에도 불구하고 2-1로 승리하여 1차전 패배를 설욕했다. 마지막 6차전 레인저스와의 홈경기에서는 브리안 라우드루프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안드레아스 묄러의 동점골과 카를하인츠 리들레의 역전골로 2-1 리드를 잡았다가 후반 막판 다시 동점골을 허용하여 2-2 무승부로 마무리했다.
최종 성적 2승 3무 1패로 조 2위를 차지한 도르트문트는 8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아약스를 만나 종합 스코어 0-3으로 패배하며 대회를 마감했지만,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이 시기 도르트문트의 평균 관중 수는 41,886명으로, 이는 분데스리가 최고 수준이었다. 특히 홈 경기의 열광적인 분위기는 상대 팀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시즌이 종료된 후 도르트문트는 유벤투스 FC로부터 파울루 소자를, 머더웰 FC로부터 폴 램버트를, SV 카지노 잘츠부르크로부터 볼프강 파이어징어를 영입하며 선수단을 보강했다.
2.4.3. 1996-97 시즌
1996-97 시즌 순위표 | |||||||||
<rowcolor=#fff> 순위 | 팀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rowcolor=#000> 1 | | 34 | 20 | 11 | 3 | 68 | 34 | +34 | 71 |
<rowcolor=#000> 2 | | 34 | 21 | 6 | 7 | 69 | 41 | +28 | 69 |
<rowcolor=#000> 3 | | 34 | 19 | 6 | 9 | 63 | 41 | +22 | 63 |
<rowcolor=#000> 4 | | 34 | 18 | 7 | 9 | 78 | 40 | +38 | 61 |
<rowcolor=#000> 5 | | 34 | 14 | 11 | 9 | 54 | 51 | +3 | 53 |
<rowcolor=#000> 6 | | 34 | 13 | 10 | 11 | 55 | 44 | +11 | 49 |
<rowcolor=#000> 7 | | 34 | 13 | 10 | 11 | 56 | 56 | 0 | 49 |
<rowcolor=#000> 8 | | 34 | 14 | 6 | 14 | 53 | 52 | +1 | 48 |
<rowcolor=#000> 9 | | 34 | 12 | 9 | 13 | 44 | 49 | -5 | 45 |
<rowcolor=#000> 10 | | 34 | 13 | 5 | 16 | 62 | 62 | 0 | 44 |
<rowcolor=#000> 11 | | 34 | 12 | 7 | 15 | 46 | 48 | -2 | 43 |
<rowcolor=#000> 12 | | 34 | 11 | 10 | 13 | 35 | 40 | -5 | 43 |
<rowcolor=#000> 13 | | 34 | 10 | 11 | 13 | 46 | 60 | -14 | 41 |
<rowcolor=#000> 14 | | 34 | 11 | 7 | 16 | 46 | 54 | -8 | 40 |
<rowcolor=#000> 15 | | 34 | 11 | 7 | 16 | 35 | 46 | -11 | 40 |
<rowcolor=#000> 16 | | 34 | 9 | 6 | 19 | 26 | 57 | -31 | 33 |
<rowcolor=#000> 17 | | 34 | 8 | 5 | 21 | 43 | 67 | -24 | 29 |
<rowcolor=#000> 18 | | 34 | 7 | 6 | 21 | 32 | 69 | -37 | 27 |
<rowcolor=#000> ◀ 1995-96 분데스리가 | 1997-98 분데스리가 ▶ |
<colcolor=#000> |
''' 마침내 유럽을 정복하고 환호하는 선수들 ''' |
| 도르트문트 (Borussia Dortmund) | | 유벤투스 (Juventus) |
'''''' | ||||||||||
| 팀 | | ||||||||
대진 | 결과 | 조별 리그 | 대진 | 결과 | ||||||
| 2:1 승 (홈) | 경기일 1 | | 1:0 승 (홈) | ||||||
| 3:0 승 (원정) | 경기일 2 | | 1:0 승 (원정) | ||||||
| 1:0 승 (원정) | 경기일 3 | | 1:1 무 (원정) | ||||||
| 1:2 패 (홈) | 경기일 4 | | 5:0 승 (홈) | ||||||
| 2:2 무 (원정) | 경기일 5 | | 1:0 승 (원정) | ||||||
| 5:3 승 (홈) | 경기일 6 | | 2:0 승 (홈) | ||||||
B조 2위 (4승 1무 1패 승점 13점) | 조별 리그 순위 | C조 1위 (5승 1무 0패 승점 16점) |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녹아웃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
| 4:1 승 | 3:1 승 (홈) | 1:0 승 (원정) | 준준결승 | | 3:1 승 | 1:1 무 (원정) | 3:0 승 (홈) | ||
| 2:0 승 | 1:0 승 (홈) | 1:0 승 (원정) | 준결승 | | 2:0 승 | 2:1 승 (원정) | 4:1 승 (홈) | ||
8승 1무 1패 (20득점 9실점) | 합계 성적 | 8승 2무 0패 (21득점 4실점) | ||||||||
◀ 1995-96 | 결승 | ▶ 1997-98 |
'''''' | ||
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 (뮌헨) | ||
주심: 샨도르 풀 (헝가리) | ||
관중: 59,000명 | ||
| | |
도르트문트 | 유벤투스 | |
감독: 오트마어 히츠펠트 | 감독: 마르첼로 리피 | |
3 | — | 1 |
29', 34' 카를하인츠 리들레 (A. 29' 폴 램버트, 34' 안드레아스 묄러) 71' 라르스 리켄 (A. 안드레아스 묄러) | | 65'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A. 알렌 복시치) |
- | ||
◀ 1996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 1998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
그중에서도 단연 정점에 있는 업적은 1996-97 시즌 달성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다. 도르트문트한테 해당 시즌 대회가 가장 깊이 뇌리에 남았던 것이, 당시 도르트문트는 리그에서 3위에 그치며 3연패에는 실패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도르트문트는 챔피언스 리그 B조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비제프 우치,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25]와 함께 경쟁했다. 조별리그 첫 경기는 홈에서 열렸고 하이코 헤를리히의 멀티골로 비제프 우치에게 2-1 승리를 거두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 다음 경기는 스테아우아 원정이었는데, 여기서 라르스 리켄과 외르크 하인리히, 스테판 샤퓌자가 득점에 성공하면서 3-0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서 열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원정에서는 슈테판 로이터의 결승골로 1-0으로 이겼지만, 홈에서 열린 아틀레티코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하이코 헤를리히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밀린코 판티치의 역전골로 1-2 패배를 당하며 4연승에는 실패했다.
이후 비제프 우치 원정에서는 폴 램버트가 선제골을 넣었으나 되려 두 골을 얻어맞고 2연속 역전패를 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위르겐 콜러가 간신히 동점을 맞추는 득점을 터뜨리면서 결국 2-2 스코어로 경기를 마쳤다. 이후 홈에서 열린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의 최종전은 스테판 샤퓌자의 멀티골을 비롯해서 르네 트레초크, 카를하인츠 리들레, 미하엘 초어크가 득점을 터뜨렸고, 스테아우아도 3골을 넣으며 추격하는 난투극을 벌인 끝에 5-3 스코어로 승리했다. 그렇게 도르트문트는 B조에서 4승 1무 1패라는 최종 성적을 거두며 아틀레티코와 동률을 이뤘으나 골득실에서 밀려 조 2위로 8강에 진출해야했다.[26] 8강에서는 프랑스의 오세르를 상대로 홈에서 카를하인츠 리들레와 르네 슈나이더, 안드레아스 묄러의 득점으로 3-1 대승을 거두었고 원정에서도 라르스 리켄의 쐐기골로 1-0 승리를 기록하며 합계 4-1로 승리했다. 4강에서는 맨유와 맞붙어 홈에서 르네 트레초크의 골로 1-0 승리를 거두고, 올드 트래포드 원정에서도 라르스 리켄의 골로 1-0 승리를 또 기록하며 합계 2-0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그렇게 도르트문트는 아틀레티코나 맨유같은 강력한 우승후보들을 제치고 구단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한 상황이었는데,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열리는 결승전에서 마주친 상대가 하필이면 4년 전인 1992-93 시즌 UEFA컵 결승전에서 본인들에게 패배를 안겨준 유벤투스였기 때문이다. 결승에서 맞닥뜨리게 된 유벤투스는 당시 전 시즌 결승전에서 도르트문트를 8강에서 탈락시켰던 AFC 아약스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던데다, 프랑스 아트 사커의 지휘관인 지네딘 지단까지 팀에 가세한 이후 금상첨화를 이루었기에 당연 1순위 우승후보로 꼽혔던 팀이었다.
때문에 세간에서는 당연하게도 지단이 유벤투스를 이끌고 팀의 3번째 빅 이어를 들게 할 것이라 보았지만, 도르트문트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유벤투스를 상대로 3-1이라는 점수로 승리하며 4년 전 UEFA컵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는 동시에 클럽 역사상 최초로 빅 이어까지 품는 영광을 안았다.[27][28] 또한 그것을 더해 그해 겨울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팀과 격돌하는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브라질의 남미 챔피언 크루제이루 EC를 만났고, 미하엘 초어크와 하이코 헤를리히가 득점을 기록하며 2-0으로 크루제이루를 격파하여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당시의 도르트문트는 인기, 자금력에서 FC 바이에른 뮌헨과 맞설 수 있었던 유일한 클럽이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직후인 1997년에 오트마어 히츠펠트가 감독직에서 물러나 스포츠 디렉터로 자리를 옮겼고, 파르마 AC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네비오 스칼라가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스칼라 감독 체제에서 도르트문트는 1997-98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공교롭게도 그의 옛 팀이었던 파르마를 만나 이를 탈락시켰고, 8강에서는 바이에른 뮌헨과 격돌하게 되었다. 분데스리가 클럽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맞붙은 것은 이 두 구단이 최초였다. 여기서 도르트문트가 연장 끝에 스테판 샤퓌자의 결승골로 뮌헨을 1-0으로 꺾고 준결승에 진출하면서 뮌헨의 대항마라는 입지를 가지게 되었다. 도르트문트는 그 해 챔피언스 리그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리그에서는 10위에 그치는 부진을 보였다.
1997-98 시즌이 종료된 직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정신적 지주 미하엘 초어크가 현역에서 은퇴하고 신임 단장이라는 직책과 함께 행정가로 변모하였다. 동시에 많은 핵심 선수들이 팀을 떠났고, 이들은 대부분 고액의 이적료를 지불한 선수들로 대체되었다. 1998년에 영입된 월드컵과 유로컵 우승자 토마스 헤슬러는 단 1년만 도르트문트에서 뛰었고, 프레디 보비치와 빅토르 익페바(Victor Ikpeba) 같은 선수들은 이전 소속팀에서의 활약을 재현하지 못했다. 이 시기 8천만 마르크[29] 이상이 새 선수 영입에 투자되었지만, 스포츠적 성과는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2.5. 두번째 시련
독일을 넘어 유럽을 점령한 도르트문트의 앞날에는 창창한 빛만 있을 것 같았다. 한두해 반짝이 아닌 꾸준한 성적을 내고 있었고, 열광적인 팬들이 있어 성적에만 집중하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도르트문트는 그대로 리즈 유나이티드와 비슷한 길을 걷기 시작한다. 클럽의 계속된 성공에 고무된 클럽 운영진들은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는데, 바로 독일 축구 클럽들 가운데 최초로 주식 시장[30]에 상장을 시도한 것이다.도르트문트는 2000년 10월 31일 독일 축구 구단 중 최초로 주식시장에 상장되었다. 당시 도르트문트 주식의 발행가는 11유로였고, 클럽은 1,350만 주를 발행하여 순 1억 3천만 유로의 자금을 조달했다. 이후 추가적인 자회사들이 2000년 이후 설립되었다. 보다 투명한 클럽 운영을 위한 도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도전은 또 한 번 구단 경영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무리한 주식 상장으로 구단 재정에 또 한 번 흑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스포츠적으로는 2000-01 시즌을 앞두고 젊은 감독 마티아스 자머가 팀을 맡아 새로운 도약을 이끌었다. 네비오 스칼라가 감독에서 물러난 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미하엘 스키베를 새 감독으로 영입했다. 스키베는 그 전까지 클럽의 유소년 코디네이터와 유소년 감독으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1998-99 시즌 팀을 4위로 이끌며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1999-2000 시즌에는 성적이 하락했다. 시즌 초반 6연승으로 선두를 달리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 휴식기 이후 첫 경기에서 패배한 후 스키베는 경질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전 도르트문트 선수였던 베른트 크라우스가 부임했으나, 그 역시 2개월 만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위기 상황에서 우도 라테크가 현역에서 은퇴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코디렉터를 맡은 마티아스 자머와 함께 시즌을 마무리했고, 팀은 간신히 11위로 시즌을 마쳤다. 2000-01 시즌, 화려한 영입 없이도 팀은 분데스리가 3위를 차지하며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했다. 이 시즌 이후 도르트문트는 다시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고, 얀 콜레르와 마르시우 아모로주를 영입하기 위해 수천만 유로를 지출했으며, 나중에는 에베르통도 영입했다. 이러한 투자는 2001-02 시즌 도르트문트의 6번째 분데스리가 우승으로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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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론 도르트문트는 클럽이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던 시기에도 한 차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01-02 시즌의 일이었는데, 레버쿠젠을 시즌 막바지에 따돌리고[31] 클럽 역사상 여섯 번째 1부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속설을 입증하는데 성공했다.[32][33]
하지만 도르트문트의 영광은 그것이 끝이었다. 2002-03 시즌 최종전을 치르기 전까지 챔피언스리그 직행 티켓을 얻을 수 있는 2위를 지킨 상태라서 최종전 상대인 꼴찌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홈경기에 이변만 없다면 도르트문트가 그대로 2위를 차지하는 것이 유력했으나 예상외로 경기 종반에 동점골을 헌납하며 1-1로 비기고 말았고 2위 자리를 마가트의 유치원 슈투트가르트에 내주며 챔피언스리그 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문제는 2003-04 시즌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벨기에의 클뤼프 브뤼허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면서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챔피언스 리그 수입이 끊겼고, 설상가상으로 독일 최대의 미디어 그룹이던 키르히 그룹이 파산하여 TV 중계권료도 끊기고 만다. 이때 도르트문트는 주식 상장으로 얻은 자금을 단 하나의 목표인 챔피언스 리그 진출만을 위해 선수 영입에 투자한 상태였다. 도르트문트는 고액의 연봉을 받는 선수들로 가득한 팀이 되었지만, 이 선수들 중 다수가 부상으로 고생하며 예상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러한 악재들이 겹치면서 2004년 말에는 정상적인 급여 지급조차 어려워졌다.
게다가 시즌 초반 주축선수들이 대거 부상으로 신음하며 제대로 베스트 라인업을 짜기 어려워 리저브팀과 유소년팀에서 선수를 끌어올려야 했다.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가운데에서도 분전하여 리그 6위로 끝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팬들사이에서도 자머는 대리석과 같다며 경직된 전술구사에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챔피언스리그 진출에도 실패하였기 때문에 여론은 자머에게 좋은 상황만은 아니었다. 결국 2003-04 시즌을 끝으로 자머는 도르트문트 감독직에서 경질된다. 자머의 후임으로 2년 전 UEFA컵에서 준우승의 쓴맛을 안겼던 베르트 판마르베이크가 부임하였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영난을 겪은바 있는 도르트문트는 꽤 현명한 대처를 할 것으로 믿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번에는 문제의 심각성이 더했기 때문이다. 홈구장을 매각해야 했고 선수단의 주급을 모두 20% 삭감해야 하는 등 위험 수위가 달랐다. 더해 토마스 로시츠키, 얀 콜레르, 크리스토프 메첼더 등 몸값이 비싼 선수들을 팔아야 했다. 주식 상장을 위한 무리한 투자는 커다란 적자라는 차가운 현실로 이어졌고, 이는 1990년대 팀의 돌풍을 이끌었던 주축 선수들이 다시 이탈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위기는 장기 회장이었던 게르트 니바움(Gerd Niebaum)과 매니저 미하엘 마이어(Michael Meier)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니바움은 2004년 11월 회장직에서, 2005년 2월에는 KGaA(주식회사)의 경영이사직에서 물러났다. 니바움과 마이어는 이전에 클럽이 9,800만 유로의 부채를 축적했으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존속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인정한 바 있다. 마이어는 2005년 6월 30일 계약이 만료된 후 재계약되지 않았다. 그 후임으로 라인하르트 라우발이 세 번째로 회장직에 복귀했고, 한스요아힘 바츠케가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하여 클럽의 재정 건전화를 위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런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2005년에는 다시 한 번 구단 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을 감수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34] 2005년 3월, 도르트문트의 부채는 1억 1,800만 유로에 달했고, 선수들은 급여의 일부를 포기하는 데 동의해야 했다.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이란 멋드러진 홈구장의 이름이 지역 보험 회사인 지그날 이두나의 이름을 딴 지그날 이두나 파크로 바뀐 것도 막막한 구단의 경영난을 타파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또한 클럽은 트레이닝 시설을 매각하고 재임대하는 방식의 리스백(sale and lease back) 거래를 단행했다. 이 극단적인 조치들 덕분에 도르트문트는 간신히 파산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한동안 도르트문트에는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이는 시즌의 연속이었다. 재정위기 속에서 2004-05 시즌과 2005-06 시즌 연속 7위를 기록하더니, 2006-07 시즌에는 심지어 2부 리그로 추락할 위기[35]에 빠지기도 했으며, 2007-08 시즌에도 13위까지 순위가 떨어졌다. 클럽은 2005년 파산위기를 맞이하고 11유로에 달했던 클럽의 주식 가치는 80% 가까이 폭락했고, 선수 연봉도 20% 삭감해야 했다. 게다가 재정난으로 2006년 팀내 최고 유망주 다비드 오동코어를 레알 베티스로, 핵심 선수인 토마시 로시츠키를 아스날 FC로 이적시켜야 했고 2007년에는 핵심수비수 크리스토프 메첼더를 이적료 없이 레알 마드리드로 넘겨주었다.
하지만 도르트문트 팬들은 열렬한 성원을 꾸준히 보내주었고 구단 역시 뼈를 깎는 재정 개선 노력을 진행했다.[36] 그런 노력이 계속되고 있던 와중, 재도약의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도르트문트는 2007-08 시즌 DFB-포칼 결승전에서 FC 바이에른 뮌헨과 격돌했는데, 아쉽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바이에른 뮌헨이 이미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한 상태라 운 좋게 UEFA컵 출전권을 따냈던 것이다. 오랜만에 UEFA컵 출전권을 손에 쥔 도르트문트는 회생의 실마리를 잡았고, 40세의 젊은 나이에 불과했지만 마인츠에서 주가를 올리던 위르겐 클롭을 초어크가 눈여겨보고 있었다. 결국 2008-09 시즌부터 클롭을 BVB의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본격적인 재기를 노렸다.
2.6. 클롭과 함께, 보루시아! 다시 한 번 일어서다
DEUTSCHER MEISTER 2010-11 분데스리가 챔피언 |
2.6.1. 2010-11 시즌
그 다음 시즌인 2010-11 시즌에는 루카스 바리오스, 카가와 신지, 누리 샤힌, 네벤 수보티치 등 여러 유망주들이 포텐을 터트리면서 10라운드 선두였던 돌풍의 팀 1. FSV 마인츠 05를 꺾어 1위에 오른 뒤 시즌 끝까지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결국 32라운드에서 분데스리가 정상에 도르트문트의 노란 깃발을 꽂으며 7번째 우승을 확정지었다.9년 만의 우승이자, 지옥 같았던 암흑기의 종료를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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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UEFA 유로파 리그에서는 파리 생제르맹 FC, 세비야 FC, FC 카르파티 르비우와 한조를 이뤘지만 1점차이로 세비야에게 밀려 조 3위로 탈락하고 말았다.
2.6.2. 2011-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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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TSCHER POKALSIEGER 2011-12 DFB-포칼 챔피언 | DEUTSCHER MEISTER 2011-12 분데스리가 챔피언 |
2011-12 UEFA 챔피언스 리그 32강에서 아스날, 올림피아코스,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와 조를 이뤄 해볼만하다는 평을 받았으나, 올림피아코스에게 3-1, 마르세유에겐 3-0으로 원정경기에서 모두 참패했다. 아스날과 안방 경기에서 1-1로 비기고 가장 약체로 평가받던 올림피아코스를 안방에서 1-0으로 이겼을 뿐.결국 1승 1무 4패로 조 꼴찌로 탈락했다.
2011-12 시즌 리그에서는 전반기 초반 6경기에 2승1무3패에 그치는 부진을 겪으며 순위가 많이 떨어졌었으나[40] 전반기 막판 11경기 8승 3무 성적으로 FC 바이에른 뮌헨을 맹추격하여 3점 차이가 난 상태에서 전반기를 마쳤다. 거기에 챔피언스리그 탈락으로 유로파리그도 참여하지 않기에 후반기에 바이에른과는 달리 리그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전반기 최종전 프라이부르크 원정에서 4-1 승리를 시작으로 24라운드 홈에서 마인츠를 2-1로 이기기 까지 8연승을 달리며 1위 자리를 바이에른으로부터 빼았았다. 그 사이 바이에른은 묀헨글라트바흐와 레버쿠젠에 패하고, 함부르크와 프라이부르크에 비기는 등 주춤하면서 승점차가 7점 차로 벌어졌다.
연승행진은 의외로 치열하게 잔류를 위한 경쟁을 하고 있던 승격팀 아우크스부르크 원정에서 0-0으로 비김으로써 8경기에서 막을 내렸다. 같은 라운드 바이에른은 홈에서 호펜하임을 7-1로 이김으로써 승점차는 5점으로 좁혀졌다. 26,27라운드에서는 각각 베르더브레멘에 홈에서 1-0 승리, 쾰른 원정에서 6-1 대승을 거두며 승점차를 유지했다. 28라운드 슈투트가르트와의 안방 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4-4로 비겼고 다음날 바이에른이 뉘른베르크 원정에서 추가시간 결승골로 승리하며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의 승점차는 3점으로 좁혀졌다. 29라운드에서 도르트문트는 볼프스부르크 원정에서 3-1로 이기고, 바이에른은 홈에서 구자철이 골을 넣은 아우크스부르크에 2-1로 승리하며 승점차는 여전히 3점. 4월 11일 30라운드 도르트문트 안방경기를 통해 분데스리가의 우승의 향방이 가려지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로벤이 페널티킥을 실축했고, 레반도프스키가 결승골을 넣어 바이에른을 1-0으로 이기면서 승점을 6점으로 다시 넓혔다.[41]
그 후 샬케 원정에서도 2-1로 이기고 그날 바이에른이 홈경기에서 마인츠에게 비기는 바람에 8점이나 승점이 벌어져 사실상 리그 우승이 거의 확정되었다. 결국 한국기준 4월 22일 일요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의 홈경기에서 2-0으로 이기며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남은 경기에서 카이저슬라우테른 원정에서 5-2로 승리했고, 프라이부르크와의 최종전 홈경기에서 4-0으로 이겼다. 분데스리가 최종 기록은 25승6무3패 승점 81점으로 분데스리가 최다승점 신기록을 세웠다.[42] 아울러 5월 12일 베를린에서 열린 포칼 결승에서 레반도프스키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FC 바이에른 뮌헨을 5-2로 격파하고 23년만의 우승을 차지, 더블을 달성했다.
2.6.3. 2012-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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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여름이적시장에서 카가와 신지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떠났으나 그 공백을 묀헨글라트바흐의 마르코 로이스를 영입하여 메웠다. 그리고 지난 시즌 레반도프스키와의 공격수 경쟁에서 밀려난 루카스 바리오스는 광저우 에버그란데로 떠났고, 백업 공격수로 슈투트가르트의 율리안 시버를 영입하였다.
DFL-슈퍼컵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에 1-2로 졌다. DFB 포칼 1라운드는 레기오날리가의 오버노일란트를 상대로 이적생 로이스의 결승골과 페리시치, 쿠바의 골로 3-0으로 이겼다.
2012-13 시즌 개막전인 베르더 브레멘과의 안방경기는 이적생 로이스의 선제골과 마리오 괴체의 결승골로 2-1로 이기면서 첫 시작을 끊었다. 뉘른베르크 원정에서 1-1로 비겼지만 곧이어 레버쿠젠을 안방에서 손쉽게 3-0으로 이기면서 상위권에 도약, 리그 3연패를 향하여 순항하는 듯 했지만, 4라운드 원정에서 3연패로 강등권에 빠져 있던 함부르크의 손흥민에게 2골을 허용하며 2-3으로 함부르크의 시즌 첫 승 제물이자 첫 시즌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로 지난시즌부터 이어오던 분데스리가 31경기 연속 무패가 끊겼을 뿐 아니라 승점 7점으로 4위로 추락했다. 그 후 바이에른 바이에른과 프랑크푸르트가 4연승으로 12점으로 1, 2위를 기록 중인데 5라운드 주중 프랑크푸르트 원정을 난타전 끝에 3-3으로 비겼다. 그 다음 6라운드 묀헨글라트바흐와의 안방경기를 5-0으로 이겼으나 7차전 하노버 96원정을 1-1으로 비기면서 리그 4위를 기록중이다. 7연승의 뮌헨과 승점 9점 차, 레버쿠젠과 하노버가 1점으로 추격 중인 상황.
이 뒤로 리그 2위까지 올라섰으나 26차전까지 1위인 바이에른 뮌헨과 승점차가 17점이나 벌어져서 사실상 리그 우승은 힘들어졌다. 나머지 8경기를 다 이기고 바이에른이 연패하면 모를까. 하지만 25차전까지 21승 3무 1패라는 압도적인 승세를 유지하고 있는 바이에른이 그럴 가능성이 적어보인다. 여담으로 21차전 안방에서 벌어진 함부르크와의 경기에서도 손흥민에게 또 2골을 허용하면서 1-4 참패를 당하면서 2012-13 시즌에 손흥민에게 4골이나 헌납했다.
2012-13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죽음의 조인 D조에 들어가서 레알 마드리드 CF, 맨체스터 시티, AFC 아약스와 한 조에 속해있다. 1차전 조별리그 야약스와의 홈경기에서 1-0승리를 거뒀다. 2차전에 맨체스터 시티와의 원정 경기에서 1-0으로 이기고 있었으나 후반 83분 핸들링 반칙으로 인해 마리오 발로텔리의 페널티킥 동점골로 1-1로 비겼다. 3차전 레알 마드리드와의 홈경기에서는 2-1로 승리하면서 조 선두에 올라섰다.
최근 유로파에서 분데스리가의 강세가 이어지고, 챔스에서 바이에른의 강세가 이어지면서 그 바이에른도 꺾은 도르트문트가 챔스에서 쉽사리 거꾸러지는 걸 보면 도르트문트는 리그 중시라는 인식이 한국에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다. 도르트문트가 챔스에서 약한 이유는 리그 위주라기보단 그냥 스쿼드가 얇아서다. 챔스 선수 명단을 보면 그 주간의 상황을 보면 대개 최선으로 여겨지는 카드를 선택하곤 한다. 다만 스쿼드의 한계상 카드 트러블, 부상 등이 있으면 주중 경기 여건상 체력문제까지 겹쳐 전력이 심각하게 약해지면서 자동적으로 떨어지는 것일 뿐이다.[43]
2012년 10월 25일에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스 조별리그 D조 3차전 홈경기에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선제골과 마르셀 슈멜처의 결승골을 앞세워 짜릿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반 36분 제바스티안 켈이 페페의 패스를 가로채 넘겨준 공을 레반도프스키가 오른발 슛으로 마무리해 기선을 제압했고, 2분 뒤 호날두에게 만회골을 내주었으나, 후반 19분 마리오 괴체의 크로스를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가 쳐낸 것을 슈멜처가 차 넣어 결승골을 만들어냈다.이어 4차전 레알 마드리드 원정경기에서는 2-2로 비겼다. 결국 4승 2무 무패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면서 FC 샤흐타르 도네츠크와 격돌하게 되었다. 2013년 2월 14일(한국시각)에 원정에서 2-2로 비겼고, 3월 6일 안방에서 열린 2차전은 3-0으로 완승을 거두면서 8강에 진출했다.
15일에 가진 8강 조추첨에선 말라가 CF와 맞붙게 되었다. 원정 1차전 경기에서 0-0으로 비기면서 2차전 안방경기가 유리해졌다는 분석이다.
그리고 4월 10일 열린 2차전, 비록 심판의 결정적인 오심들이 많았지만 이번 챔피언스리그 최고의 극장경기를 만들어내며 3-2 승리, 극적으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1차전을 0-0으로 마쳐서 그런지 전반전 초반은 양팀 모두 조심스럽게 풀어나가다가 25분 호아킨 산체스의 선취골이 터지면서 원정골 다득점 원칙에 의해 순식간에 2골이 필요해진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이후 패스들이 번번이 말라가 수비진에 의해 끊기면서 답답한 경기양상이 될 찰나, 전반 40분 레반도프스키의 만회골로 그나마 한숨 돌릴수 있었다. 그리고 벌어진 후반전, 서로가 간간히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으나 그때마다 양팀의 골키퍼들의 선방으로 인해 무산되던 도중, 후반 82분 엘리세우의 골로 인해 말라가가 2-1로 앞서가며 멘탈이 하늘나라로 갈 위기에 처했다. 비기기만 해도 탈락하는 절체절명의 상황, 추가시간이 될때까지만해도 골이 나오질 않으면서 4강의 문이 닫혀가는가 싶었으나 후반 91분, 혼전끝에 마르코 로이스의 만회골이 터지더니 1분만에 산타나의 극적인 역전골이 들어가며 이번 챔스 최고의 드라마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 내에서의 심판의 판정은 매우 난감한 수준이었다. 일단 후반전 도중 이미 경고를 한장받은 마르셀 슈멜처가 드로인 상황에서 상대편 수비수인 헤수스 가메스의 목을 고의적으로 비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였으나 경고누적으로 퇴장은 커녕 오히려 가메스에게 경고가 주어졌고[44], 이후에 오프사이드 상황에서 말라가의 2번째 골이 터졌으며, 결정적으로 도르트문트의 결승골 역시 오프사이드 상황에서 나온것이었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지만 이번 챔스 8강 경기마다 최소한 한두개씩 논란이 될만한 오심들이 나오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어찌되었든 이런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으니 선수단의 사기는 오를대로 오를듯. 말라가만 불쌍하게 됐다. 슈멜처의 명백한 퇴장감인 행동이 오히려 말라가의 옐로카드란 결과가 되었고 3번째 골은 크로스시점 골시점 모두 오프사이드였다.
그리고 4강전 상대는 추첨으로 또 레알 마드리드와 격돌하게 되었다. 조예선에서 1승 1무를 거뒀기에 사기가 오른 도르트문트가 자신있을 듯. 그래도 레알이 조예선과 달리 부상선수들이 많이 복귀하였고, 경기 이틀전 팀의 핵심 선수 중 하나였던 마리오 괴체의 바이에른행이 확정되어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4월 25일 벌어진 안방경기 1차전에서 4골을 터뜨린 레반도프스키의 활약으로 호날두가 1골에 그친 레알을 4-1 완승을 거두고 17년만의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괴체에 이어 레반도프스키까지 바이에른으로 간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마냥 기뻐할 수는 없게 되었다...
2차전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선 수비로 나서면서 팽팽한 경기를 벌이다가 후반 10분 쯤 남겨두고 2골을 실점하여 0-2로 졌지만 끝내 골득실에 앞서 16년만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랐다.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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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 | | ||||||||
대진 | 결과 | 조별 리그 | 대진 | 결과 | ||||||
| 1:0 승 (홈) | 경기일 1 | | 2:1 승 (홈) | ||||||
| 1:1 무 (원정) | 경기일 2 | | 1:3 패 (원정) | ||||||
| 2:1 승 (홈) | 경기일 3 | | 1:0 승 (원정) | ||||||
| 2:2 무 (원정) | 경기일 4 | | 6:1 승 (홈) | ||||||
| 4:1 승 (원정) | 경기일 5 | | 1:1 무 (원정) | ||||||
| 1:0 승 (홈) | 경기일 6 | | 4:1 승 (홈) | ||||||
D조 1위 (4승 2무 0패 승점 14점) | 조별 리그 순위 | F조 1위 (4승 1무 1패 승점 13점) |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녹아웃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
| 5:2 승 | 2:2 무 (원정) | 3:0 승 (홈) | 16강 | | 3:3 무 (원정 다득점) 승 | 3:1 승 (원정) | 0:2 패 (홈) | ||
| 3:2 승 | 0:0 무 (원정) | 3:2 승 (홈) | 준준결승 | | 4:0 승 | 2:0 승 (홈) | 2:0 승 (원정) | ||
| 4:3 승 | 4:1 승 (홈) | 0:2 패 (원정) | 준결승 | | 7:0 승 | 4:0 승 (홈) | 3:0 승 (원정) | ||
7승 4무 1패 (23득점 12실점) | 합계 성적 | 9승 1무 2패 (29득점 10실점) | ||||||||
◀ 2011-12 | 결승 | ▶ 20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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웸블리 스타디움 (웸블리) | ||
주심: 니콜라 리촐리 (이탈리아) | ||
관중: 86,298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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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문트 | 바이에른 뮌헨 | |
감독: 위르겐 클롭 | 감독: 유프 하인케스 | |
1 | — | 2 |
68'(PK) 일카이 귄도안 | | 60' 마리오 만주키치 (A. 아르연 로번) 89' 아르연 로번 (A. 프랑크 리베리) |
Player of the Match: 아르연 로번 | ||
◀ 2012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 2014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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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승전 상대는 FC 바이에른 뮌헨. 영국축구의 심장부인 런던 웸블리에서 독일리그팀끼리 결승을 장식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나오게 되었다. 올해는 바이에른이 압도적으로 리그를 먹었지만 작년과 재작년에는 도르트문트가 제동을 걸었던적도 있고, 다음시즌 마리오 괴체의 이적 등 떡밥거리는 풍부한 매치. [45]올시즌 상대전적은 1무 2패(슈퍼컵, 포칼컵에서 바이에른 승리, 리그 바이에른 홈 경기는 무승부)로 바이에른이 우위지만 경기내용 자체는 대등했다는 평. 일단 챔스 결승에 앞서 양팀은 5월 5일, 도르트문트 홈에서 리그 경기를 펼치게 된다. 이미 바이에른이 우승을 확정지었고 도르트문트도 2위를 거의 굳혔기때문에 양팀다 풀전력으로 나올것 같지 않긴 해도 전초전으로서는 좋은경기가 될듯하다.
5월 26일 웸블리에서 바이에른과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치렀다. 엘 클라시코 더비를 꺾고 올라온 데어 클라시커 더비로 화제를 모은 이 경기에서 양팀 모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주었으나 결과는 2-1 FC 바이에른 뮌헨의 승리였다. 대등한 경기였기에 도르트문트 선수들과 클롭 감독의 아쉬운 마음이 매우 컸을 것이다.
2.6.4. 2013-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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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겨울까지 뛰지못하는 피슈첵과 샬케로 이적한 산타나의 대체자로 센터백과 풀백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소크라티스 파파스타토풀루스를 브레멘에서 영입했다.
또한 괴체의 대체자로 우크라이나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FC 샤흐타르 도네츠크의 헨리크 미키타리안을 영입, 프랑스에서 득점 2위를 차지한 공격수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을 영입하며 공격진을 강화, 나름 성공적인 이적시장을 보내고 있다.
2013-14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선 SSC 나폴리, 아스날, 마르세유와 같은 조를 이뤘다. 1차전 9월 19일에 열린 나폴리 원정에선 1-2로 패했다. 선제골을 먹힌 뒤 클롭 감독은 대기심에게 항의를 하다 퇴장을 당했고 후멜스는 부상으로 교체아웃, 바이덴펠러는 페널티 박스 밖에서 손을 써서 퇴장 당하는 등 여러모로 경기가 안 풀린 날이었다. 막판 나폴리 수비의 자책골이 아니었으면 영패를 당해도 할 말이 없었던 경기.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3차전 10월 23일에 열린 아스날과의 원정경기에서 미키타리안의 선제골과 레반도프스키의 결승골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클롭 감독의 장기인 게겐프레싱이 돋보인 경기였다.
리그에선 9차전까지 바이에른 뮌헨(7승 2무)에 이어 7승 1무 1패로 2위를 달리며 추격 중이다. 다만 바이엘 레버쿠젠이 7승 1무 1패(골득실 차로 3위)로 추격 중이라 이 2팀과 경기 여부에 따라 리그 우승이 가능할 듯하다. 그러나 12차전 볼프스부르크 원정에서 1-2로 역전패하면서 4점차로 승점이 벌어졌다. 게다가 같은 12차전을 손흥민이 3골 1도움 환상적 활약으로 이긴 레버쿠젠과 같은 28점이 되더니만 13차전 바이에른 뮌헨과의 안방경기에서 0-3으로 참패하면서 1위인 바이에른과 승점 차가 7점이나 벌어져 리그 우승은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레버쿠젠이 13차전을 이기면서 2위마저 넘겼다. 14차전 마인츠 05 원정은 3-1로 이겼으나 15차전 안방경기인 레버쿠젠 전에서 손흥민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0-1로 패했다. 이로서 10승 1무 4패로 4위 묀헨글라트바흐와 똑같아졌다. 여기서 불행은 끝나지 않았는데 이 경기에서 미들진이 모조리 박살났다. 스벤 벤더가 발목을 밟혀 먼저 실려나갔고 이후 누리 샤힌이 공중볼 경합 도중에 착지하면서 잘못 발을 디뎌 부상당했다. 여기에 수비수인 소크라티스 파파스토플로스가 후반 막판에 퇴장당했고 경기 도중 레반도프스키가 경미한 부상을 당해 쩔뚝거렸다. 말 그대로 부상병동의 끝판왕[46]. 그나마 골득실차로 3위를 버티고 있긴 하지만 1위인 바이에른과 10점이나 벌어진 상황이라 우승은 힘들어졌다. 레버쿠젠에게도 6점차로 벌어진 상황이다.
리그 후반기 개막전은 아우크스부르크와의 홈경기였는데 1-0으로 앞서다 벤더의 자책골로 동점이 되었고 누리 샤힌의 골로 2-1이 되었으나 2014-15 시즌부터 합류할 지동원에게 동점골을 허용해 무승부가 되었다. 허나 이때 챔스 진출권 경쟁팀인 레버쿠젠과 묀헨글라트바흐가 모두 패해 승점차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챔스 4차전에서는 초반 아스날은 슛팅조차 못날려볼정도로 강하게 압박을 가하여 아스날을 압도했으나 도르트문트 선수 실책으로 인해 외질에게 크로스 타임을 내주었고 이것을 지루가 머리에 맞춘것을 아론 램지가 헤딩으로 우겨넣어 먼저 실점하였고 그 후 단단한 아스날의 수비를 뚫지 못하고 결국 1대0으로 패하여 조별탈락의 위기를 맞게되었다 이 과정에서 레반도프스키의 페널티 논란이있었으나 심판에 따라 불수도 안불수도 있는 수준이었다는 평이고 그전에 레반도프스키가 헐리웃을 하여 심판에게 찍혔다는 평도있다. 나폴리가 마르세유를 잡음으로써 나폴리 전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면 조별 탈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졋다.마르세유 역시 복병이기도 하고 또 안좋은 소식으로 수보티치가 십자 인대가 파열하여 시즌아웃을 당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A매치기간중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슈멜처와 후멜스가 부상당해 사실상 수비진이 초토화되었다. 슈멜처는 최소 3주 결장에 후멜스는 2014년 1월까지 결장이라 매우 뼈아프다. 일단 자유계약으로 긴급하게 센터백 마누엘 프리드리히를 영입했지만 바이에른 뮌헨과의 데어 클라시커와 SSC 나폴리와의 챔스 외나무다리 싸움을 앞두고 날벼락이 아닐수가 없다.
그러나 우려와는 다르게 수비수의 줄부상에도 불구하고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데어 클라시커에서는 마리오 괴체의 활약으로 패했으나 나폴리를 3-1로 완파[47]하면서 순식간에 조 2위로 상승하여 마르세유전을 이긴다면 16강 진출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최종전, 마르세유 원정경기에서 레반도프스키가 선취골을 넣었으나 곧 동점골을 먹혔다. 그리고 얼마 안가 마르세유쪽에서 1명 퇴장을 당해 쉽게 올라가는 분위기가 형성되나 했지만 좀처럼 골을 넣지 못했고, 그렇게 73분까지 답답한 경기가 지속될동안 산파올로에서 나폴리가 아스날을 상대로 선취골을 넣었다는 청천병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급해진 도르트문트는 더 맹공을 퍼부었지만 좀처럼 마르세유의 골문은 열리지 않았고, 점점 유로파리그 진출티켓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으나 후반 86분, 케빈 그로스크로이츠의 극적인 결승골로 극적으로 16강 진출에 성공한다. 도르트문트의 무승부를 바라고 80분대 초반부터 산파올로 경기장에서 천천히 공을 돌리고 있었던 아스날, 나폴리선수들, 특히 나폴리선수들은 순식간에 맥이 빠져버릴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폴리가 추가골을 넣어 2-0 승리를 거뒀지만 경기는 그대로 종료. 종료 5분전만해도 조 3위자리에 있었던 도르트문트는 순식간에 조 1위 16강 진출티켓의 주인이 되어 엄청난 부상자 속출에도 불구하고 2년연속 죽음의 조를 1위로 돌파하는 저력을 보였고, 16강 진출은 했지만 1위에서 2위로 내려간 아스날은 앞으로의 16강 험난한 대진에 한숨을 쉴수밖에 없었으며, 눈앞에서 16강 진출을 놓쳐버린 나폴리는 망연자실할수밖에 없었다. 조 추첨식 종료 후 상당한 죽음의 조로 관심을 모았던 F조였고, 그 명성답게 마지막 경기 종료직전까지도 감히 진출판도를 예상할수 없을정도로 엄청난 혈전들이 펼쳐졌다. 결과적으로 1~3위 3팀이 승점 12점을 획득하며 서로간의 상대전적과 골득실을 따져야하는 상황까지 왔고, 결국 승자는 도르트문트와 아스날이 되었으며 승점 12점을 기록하고도 탈락, 유로파리그에 나가는 비운의 팀은 나폴리가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16강전, 1차전 원정 제니트를 4-2로 이기면서 2차전을 여유롭게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2차전 안방에서 제니트에게 의외의 일격을 맞으며 1-2로 패배했지만 8강 진출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경기 후반에 슈멜쳐가 부상으로 교체되었고 공격의 핵심인 레반도프스키가 경고누적으로 8강 1차전 결장이 확정되어 걱정거리가 생겼다.
8강전은 레알 마드리드와 리벤지 매치를 치르게 되었다.
리그에선 27차전에 무려 25점이나 승점이 벌어진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 최단 우승을 확정지으면서 2위 유지에 매달리게 되었다. 3위 샬케 04와 겨우 1점차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DFB-포칼에선 4강에 진출하여 5위 볼프스부르크와 맞붙게 되었다. 결승에 올라간다면 결승진출이 유력시되는 바이에른과 또 맞붙게 된다.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레알 마드리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0-3으로 패배하며 4강 진출이 많이 어려워졌다. 벤더, 슈멜처, 수보티치, 귄도안, 쿠바 등 주전들의 줄부상에 레반도프스키의 결장으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던 게임이었지만 흔들리던 수비쪽에서는 그나마 후멜스와 바이덴펠러가 분투해서 3실점으로 막았고, 공격쪽은 로이스가 사실상 진두지휘해서 찬스도 많이 만들어냈지만 오바메양이 대부분 날려먹어버렸다.
2차전 경기에서는 전반 초반 레알에게 PK를 허용하며 허무하게 4강의 꿈이 날아가나 싶었지만 디마리아의 킥을 바이덴펠러가 선방하며 희망을 이어가게 만들었고, 강력한 압박끝에 결국 페페의 실수를 놓치지 않은 로이스가 전반 24분 선제골을 득점하다니, 13분후 전반 37분에 로이스가 추가골까지 득점하며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그리고 후반전에는 전반전만큼의 압박은 아니었으나 간간히 오는 공격기회에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그때마다 미키타리안이 번번이 날려먹어버리며 도르트문트 팬들의 억장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결국 더 추가골을 득점하지 못한채 경기는 그대로 종료. 2-0으로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합산 스코어에서 2-3으로 밀려 탈락해 2차전에서 선전한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뒤에는 리가 30라운드에서 비록 조기 리가 우승으로 동기부여가 떨어졌다지만 주전을 총가동한 FC 바이에른 뮌헨을 원정에서 3-0으로 완파하는 저력을 보여줬고, DFB-포칼 4강에서 볼프스부르크를 2:0으로 누르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DFB-포칼 결승에서는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0-2로 지면서 준우승했다. 2년 전과 달리 바이에른의 더블 제물이 되어버린 셈. 바이에른이 오심으로 이긴 결승이었다.
2.6.5. 2014-15 시즌, Danke! 클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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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7. 투헬의 말벌 군단
클롭 감독 사임 발표 후, 토마스 투헬 감독은 바로 후계자로 낙점되었고, 2015-16 시즌부터 도르트문트를 맡게 되었다. 여담으로 클롭 감독과 똑같은 루트(마인츠 감독➡도르트문트 감독)로 왔다. 전술적으로 단조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클롭 감독과 달리, 전술적 다양함을 구사하는 감독이라 다들 많이 기대하고 있다. 다만, 일부에서는 유럽 클럽대항전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다.[48]2.7.1. 2015-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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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7.2. 2016-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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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B-POKALSIEGER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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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8. 과도기
2.8.1. 2017-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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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8.2. 2018-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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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8.3. 2019-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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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8.4. 20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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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8.5. 2021-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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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8.6. 2022-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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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8.7. 2023-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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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2.8.8. 2024-2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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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Dreifaltigkeitsgemeinde, 독일어로 삼위일체 교회를 의미[2] 이 건물이 바로 오늘날 도르트문트 북부 지구에 위치한 드라이팔티히카이츠키르헤(Dreifaltigkeitskirche). "BVB-Gründerkirche"즉, BVB 창단 교회로도 알려져 있으며, 파더보른 대교구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26년까지 팬 교회(Fankirche)로 개조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곳에서는 사회-봉사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클럽의 역사적 뿌리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3] 주로 폴란드, 헤센, 실레시아, 포젠, 동프로이센, 서프로이센 등에서 온 노동자들[4] 대림절 넷째 주일[5] 출처 : http://www.bvb.de/eng/BVB/History/1909, "By the way, the name "Borussia" is leant from the Borussia brewery on the street Steiger Strasse."[6] 도르트문트에서 제일 먼저 생겨난 축구 구단으로 1895년 5월 10일에 창단되었다. 후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회장이 되는 라인하르트 라우발이 바로 이 구단에서 현역으로 축구 선수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7] 지금의 분데스리가[8] Stadion Rote Erde. 현재는 도르트문트 2군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르트문트 1군이 1974년까지 이 곳을 홈구장으로 이용할 당시엔 약 4만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축구 전용구장이었으나 이후 리노베이션을 통해 육상 트랙이 추가된 오늘날의 종합경기장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육상 경기 수용인원은 2만 5천명, 축구 경기 수용인원은 9,999명이다.[9] 실제로는 1951년에 지어졌다[10] 컵대회, 차후 분데스리가로 개편[11] 당시에는 점수가 동률일 시 원정 다득점 원칙이나 승부차기로 진행한다는 규정이 없었고, 재경기로 다음 라운드 진출팀을 정하였다. 참고로 도르트문트와 스포라 룩셈부르크와의 재경기가 유러피언컵 역사상 첫 번째 재경기였다.[12] 다른 한 명은 헬무트 '요켈' 브라흐트(Helmut 'Jockel' Bracht)[13] 이때 준우승을 했던 쾰른은 이듬해 분데스리가 초대챔피언 자리에 올랐다.[14] 최종전 전까지 강등권인 17위였다가 18위 오펜바흐를 3-0으로 잡고 쾰른과의 또다른 단두대매치에서 패한 디펜딩 챔피언 뉘른베르크를 강등시켰다.[15] 이때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11-1의 혹독한 대패를 당했다.[16] 이 경기는 최종전이었는데 묀헨글라트바흐는 쾰른에 골득실에서 뒤진 2위였고 이 경기 대승으로 글라트바흐는 역전 우승의 희망을 품었지만 쾰른 역시 장크트파울리에 5-0 대승을 거두며 준우승했다.[17] 1979-80 시즌에는 DFB 포칼 준결승에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 패배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18] 16년만에 복귀한 유럽대항전에서는 UEFA컵 1라운드에서 레인저스에게 탈락했다.[19] 최종전에서 비겼을 경우 16위는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가 아닌 도르트문트의 몫이었다. 빌레펠트는 그 해 플레이오프에서 1. FC 자르브뤼켄을 상대로 패하여 강등을 당했다.[20] 원정 다득점 규정이 당시에는 적용되지 않은 점이 천만다행이었다.[21] 클뤼프 브뤼허에 1차전 3-0 승리에도 불구하고 2차전에서 연장전 끝에 0-5로 패하며 탈락했다.[22] 결승에서 유벤투스 FC에게 1차전 홈에서 1-3패, 2차전 원정에서 0-3패로 준우승했다.[23] 당시 원화 환산 약 140억 원[24] 1995-96 시즌부터는 분데스리가의 승리당 승점이 2점에서 3점으로 변경된 첫 시즌이었다. 때문에 도르트문트는 분데스리가에서 승리당 승점 2점 시절의 마지막 우승을 달성한 구단이라는 기록과 승리당 승점 3점으로 처음 우승한 구단이라는 기록도 보유하게 되었다.[25]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두 시즌 연속으로 맞붙게 되었다.[26] 그런데 조 1위로 통과한 아틀레티코의 8강 상대가 하필이면 전 시즌 결승전까지 진출해서 준우승을 거두었던 아약스였다. 아틀레티코는 아약스와의 연장전까지 가며 혈투를 벌였으나 결국 3-4로 패배하며 8강에서 탈락했다.[27] 특히 교체 투입된 당시 도르트문트의 유망주 라르스 리켄의 쐐기골이 가장 인상적이였는데, 역습 상황에서 안드레아스 묄러의 킬패스를 받아 멋진 슛을 날리면서 골을 기록하는등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골은 리켄이 이 경기에서 처음 공을 건드렸을때 터진 골이였다.[28] 또한 이 우승은 처음으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한 팀이 우승까지 달성한 마지막 사례로 남아있으며 대회 이름이 UEFA 챔피언스 리그로 변경된 이후로는 유일무이한 사례다.[29] 약 4천만 유로[30] DAX(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31] 시즌 종료를 3경기 남기고 레버쿠젠이 승점 5점차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2연패를 당하며 2위로 미끄러졌다. 이때 레버쿠젠은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그리고 챔피언스리그에서 모두 준우승에 그치며 콩레블을 달성하고 말았다.[32] 마티아스 자머는 선수 및 감독으로 분데스리가 우승을 달성하였다.[33] 해당 시즌 UEFA컵 준우승도 기록했다.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 3:2로 패하여 우승에 실패했다.[34] 이때 FC 바이에른 뮌헨으로부터 200만 유로를 빌리기도 했다.[35] 반 마르바이크 감독이 당초 시즌 후 떠날 예정이었고 메첼더와 켈 등 선수들이 부상으로 아웃된 상황에서도 5승7무5패 9위라는 중위권의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질되었다. 후임 감독은 위르겐 뢰버였는데 감독 부임 후 첫 경기에서 바이에른을 3-2로 잡으며 쾌조의 스타트를 기록하는 듯 했으나 이후 7경기에서 6패를 당하며 17위까지 떨어지자 경질되었고, 얼마 전까지 함부르크의 감독이었던 토마스 돌이 강등위기의 팀을 수습하며 9위로 마감했다. 33라운드 홈에서 열린 샬케와의 더비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라이벌의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가로막았다.[36] 재정 개선 + 꾸준한 성적으로 인해 2013년 현재 도르트문트의 수입은 세계 축구 구단중 10위이며(딜로이트 풋볼 머니 리그 기준) 주급제한을 풀고 유스에 대대적인 투자가 가능할 정도의 수준에 올라왔다. 이렇게 부활한 건 바츠케 회장이 돈을 잘 안 쓰고 쓸 곳에만 쓰며 아낀 것이 컸으며, 초어크 단장이 없는 예산으로도 최대한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기 때문이었다. 여담으로 바츠케 회장은 2014-15 시즌이 시작되기 전 챔스 진출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챔스 보험을 들어놨다고 한다. 여기서도 그의 운영력과 예지력을 엿볼 수 있다.[37] 우승팀볼프스부르크과 준우승팀 바이에른은 7패였다. 5위 함부르크는 11패.[38] 1위는 35실점의 샬케. 도르트문트는 불과 전 시즌인 2007-08 시즌 62실점으로 최다 실점팀의 굴욕을 안았다.[39] 브레멘-레버쿠젠과 막판까지 챔스 경쟁 3파전 양상이었으나 마지막 2경기에서 자신들보다 순위가 아래였던 볼프스부르크와 프라이부르크에게 1무 1패에 그치며 아쉽게 5위를 차지했다.[40] 6라운드 하노버 96 원정경기에서 1-2로 패배한 후 다음 시즌 4라운드 함부르크 원정에서 2-3으로 패배할 때까지 분데스리가 31경기에서 지지 않았다[41] 이때까지 이번 시즌 바이에른전 2경기를 모두 1-0으로 이겼다.[42] 그러나 다음 시즌에 바이에른이 승점 91점을 따내 그 기록을 경신했다.[43] 이는 분데스리가 팀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 혹은 특성으로 볼 수 있다. 겨울철 휴식기는 커녕 박싱 데이가 있어 경기를 계속 하는 EPL은 물론, 프리메라리가, 세리에 A보다도 훨씬 긴 분데스리가의 빈터파우제(Winterpause)로 인해 선수들은 다른 어느나라보다 길고 충분한 휴식기를 갖게 된다.(그래서 분데스리가는 각 팀의 전반기와 후반기 전력차가 상당히 심하다. 전후반기의 팀이 서로 다른 팀처럼 보일 정도.) 게다가 리그 경기, 포칼(컵 경기)을 다 합친 경기 숫자도 적다. 두터운 스쿼드 자체가 애초에 리그 경기에는 필요하지 않은 셈. 재정이 남아도는 바이에른 뮌헨 정도라면 챔스를 위한 스쿼드도 마련할 수 있겠지만 다른 팀들이 그럴만한 여유는 별로 없다.[44] 아마 주심은 가메스가 고의적인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슈멜처를 퇴장시키려 한다고 본듯 하다.[45] 정작 괴체는 부상으로 결승전에 결장했다.[46] 2013년 12월 8일까지 부상당한 선수들은 마르셀 슈멜처, 마츠 후멜스, 네벤 수보티치, 스벤 벤더, 누리 샤힌, 일카이 귄도안, 마르코 로이스 등 주전 선수 중 7명이 나가리되었다.[47] 말이 좋아서 3-1이지 레이나가 없었으면 더 큰 스코어로 털었을 경기였다.[48] 클롭 감독도 초반에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