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라틴어: Mamercus Aemilius Scaurus | |
생몰년도 | 미상 ~ 34년 |
출생지 | 로마 제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아버지) 아이밀리아 레피다(첫번째 아내) 섹스티아(두번째 아내)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21년 |
전임 | 티베리우스 소 드루수스 |
동기 | 그나이우스 트레멜리우스 |
후임 |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
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기원전 56년 법무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내였던 무키아 테르티아의 아들로, 이부형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편에 서서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 대적했고, 기원전 36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 내전에서 패배한 뒤 아나톨리아로 피신할 때 함께 했다. 이후 섹스투스가 체포되어 살해된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편에 서서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 편에 섰다가 패배한 뒤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마메르쿠스는 두 번 결혼했다. 첫번째 아내는 아이밀리아 레피다였다. 20년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전 남편이었던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는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간통을 서슴지 않았고, 재혼한 남편 마메르쿠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사실은 자기 자식이며, 결혼 생활 중에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형제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그녀를 변호했고, 저명한 여성들이 티베리우스 황제를 찾아가 그녀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결국 그녀는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다.
이후 마메르쿠스는 섹스티아라는 여인과 재혼했다. 14년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퀸투스 하테리우스와 함께 티베리우스가 황제의 권력을 얻은 것을 축하하는 연설을 하여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마메르쿠스의 연설을 침묵으로 무시했지만, 하테리우스에게는 적대감을 품고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21년, 전직 법무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1]는 원로원에서 검투사 대회 때 자기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은 젊은 귀족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대해 불평했다. 그는 자기가 이미 술라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전직 법무관으로서 존중받아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마메르쿠스와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및 술라의 여러 친척이 술라를 옹호하고 코르불로를 비방하면서, 논쟁이 심하게 벌어졌다. 그러자 티베리우스의 아들인 소 드루수스가 개입하여 당사자들을 화해시켰고, 술라와 마메르쿠스는 코르불로에게 사과하도록 강요당했다. 이후 그나이우스 트레멜리우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22년, 마메르쿠스는 유니우스 오토와 브루테디우스 니게르와 함께 아시아 총독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속주민 강탈과 황제의 위엄에 대한 모욕 혐의로 고발했다. 실라누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킨토스 섬으로 추방되었다. 32년, 세르빌리우스와 코르넬리우스 투스쿠스는 마메르쿠스 및 여러 원로원 의원을 반역죄로 고발했다. 그중 일부는 트리부누스 밀리툼 한 명의 개입으로 풀려났지만, 티베리우스는 마메르쿠스의 사건을 직접 처리하기로 했다. 타키투스는 황제가 마메르쿠스에 대해 자기에게 여러 차례 좋지 않은 발언을 한 점을 문제삼았다고 밝혔다.
34년, 티베리우스가 마메르쿠스의 사건을 직접 심리했을 때, 근위대장 마크로가 마메르쿠스가 쓴 비극의 일부 구절에 티베리우스에 대한 은밀한 모욕으로 보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마메르쿠스는 목숨을 건질 도리가 없다고 여기고, 아내 섹스티아의 조언에 따라 재판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자살했다. 섹스티아는 그 직후 따라 죽었다.
[1] 네로 시대에 활약한 명장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