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스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힐데브란트는 1915년에 고등학교 졸업 후 제1차 세계 대전 때 육군 야포부대에 입대해 러시아군과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부상당하여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8년에 소위계급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어 군복을 벗은 후 쾰른과 뮌헨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다음 은행에 입사해 은행원으로 일했다.
1922년5월에 나치당에 입당한 힐데브란트는 돌격대에도 가입했는데, 이듬 해 뮌헨 폭동으로 인해 나치당의 당 활동이 금지되자 의용군에서 활동하다가 1928년6월 1일에 재건된 나치당에 복당했지만 그 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에서 일했다. 미국에서 국가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했던 힐데브란트는 1930년에 독일로 귀국해 다시 나치당 활동에 나서 뮌헨 지부장이 되었다.
1931년2월에 친위대에 들어간 힐데브란트는 제1 친위대 지구와 친위대 남방집단 참모장이 되어 요제프 디트리히 사령관의 부관이 되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그는 디트리히의 후임으로 사령관직을 맡기도 했다. 그 후 여러 친위대 지구의 사령관을 돌면서 역임했던 힐데브란트는 1943년4월부터 패전까지 친위대 인종 및 이주본부장으로 취임했다.
전후 미군에게 체포된 힐데브란트는 뉘른베르크 RuSHA 재판에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 후, 폴란드가 폴란드계 유대인 처형관련 혐의로 힐데브란트의 신병을 요구하여 막스 헨체SS소장 및 질서경찰소장과 폴란드로 인계되었는데 폴란드 법정에선 사형을 선고하여 1951년3월 10일에 헨체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