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14 21:11:08

대중음악


서양 음악사의 시대 · 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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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의3. 영향력 및 인기4. 역사5. 음악구조 용어6. 국가별 분류
6.1. 아메리카6.2. 유럽6.3. 아시아6.4. 중동6.5. 주요 인물
6.5.1. 1910년대 ~ 1920년대6.5.2. 1930년대6.5.3. 1940년대6.5.4. 1950년대6.5.5. 1960년대6.5.6. 1970년대6.5.7. 1980년대6.5.8. 1990년대6.5.9. 2000년대6.5.10. 2010년대6.5.11. 2020년대

1. 개요

대중음악(, Popular music)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을 의미한다.

2. 정의

대중음악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 의미가 명확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해 왔으며 시간과 장소, 사람에 따라 그 정의가 다르다.

사전적으로 대중음악은 순수음악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대중에게 중점을 둔 음악을 말한다. 순수음악이 예술성과 심미성에 가치를 두는 데 반하여, 감각적인 대중성과 오락성, 그리고 상업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1] 순수음악은 더욱 긴 시간의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하여, 대중음악은 짧은 시간의 유행성을 가지고 있다.[2][3] 하지만 대중음악은 순수음악의 속성을 계속해서 흡수해 오면서 예술성과 심미성을 얻어나갔고 소위 말하는 예술성은 대중음악을 논하는 데에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대중음악을 가리켜 흔히들 '팝'이라고 부르지만, 완전히 잘못된 사용법은 아니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팝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선 큰 의미의 대중음악이 있고, 작은 의미로는 장르로서의 이 있다. 전자는 Popular music 내지 줄여서 그냥 Pop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후자는 보통 Pop이라고 하지 Popular라고 하지는 않는다. 줄임말이 의미가 축소되면서 고유명사화된 것이다.

3. 영향력 및 인기

영미권의 대중음악은 전 세계 대중음악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현 시대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Luminate에 의하면 전 세계 스트리밍 상위 10,000곡 중 54.9%가 영어 콘텐츠라는 통계를 나올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다. 대중음악은 2010년대에 들어 인터넷유튜브 등의 매체 발달로 인해 세계 최대의 음악 시장인 미국조차도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전 세계적인 파급력과 영향력이 이전보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그러면서 영미 대중 음악은 영어권 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도 막강한 인기를 얻게 된다. 이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는데, 그 첫 문제는 영미권의 대중음악으로 인해 많은 나라들의 음악이 자국에서조차 인기가 없을 정도로 자생력이 소멸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이 이것에 의해 가장 크게 피해를 본 케이스이다. 저 나라들은 유튜브 통계만 봐도 인기가수와 인기 영상 20위권까지 자국 출신 가수는 아예 없거나 1, 2명 밖에 없고 나머지 인기가수들은 전부 영미권 가수들일 정도다. 자국어로 부르는 가수들이 자국 안방에서 영미권 가수들보다 인기가 더 없다는 얘기다. 이것 때문에 이 지역 가수들은 자국어를 버리고 영어로 음악 활동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스웨덴의 ABBA, 프랑스의 다프트 펑크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래서 독일의 람슈타인은 자신들의 노래에 "난 자국어로 노래하지 않아"라는 가사를 직접 집어넣어서 저러한 세태를 풍자한 바 있다. 실제로 위에 언급한 유럽 국가들은 자국어가 버젓이 있어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The Voice, 갓 탤런트 등)에서 대부분 참가자들이 영어로 노래를 부르며, 인기 뮤지션으로 떠도 영어로만 발매하거나 아예 자국을 떠나 미국으로 진출해 버린다.

동아시아권에 비해 영미권 대중음악의 영향력이 유럽에 강하게 투사되는 것은 맞으나, 2021년 7월 10일 기준 프랑스 싱글 차트 Top 100 https://acharts.co/france_singles_top_100 에 따르면 1위부터 4위까지 Soso Maness, Naps, Jul 등 프랑스 아티스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아티스트인 Lil Nas X가 6위에 보이고 있다. 영국 싱글차트에서 2021년 7월 11일 기준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에드 시런의 Bad Habits도 프랑스 싱글 차트에서는 33위로 고전하고 있다. 프랑스어권 음악(프랑스 노래뿐 아니라 프랑스어로 발표한 모든 곡을 포함)도 유튜브에서 상당한 조회수를 확보하고 있다. 조회수가 가장 많은 프랑스어 곡은 2021년 7월 17일 기준 약 8억 2천만 뷰를 기록하고 있는 Papaoutai(2013년 유튜브 업로드)이고, 그 다음이 7월 17일 기준 약 7억 9천만 뷰를 기록하고 있는 Aya Nakamura의 Djadja(2018년 유튜브 업로드)이다. 이는 일본어로 발표된 대중음악 노래 가운데 조회수가 가장 높고, 나무위키에서도 명곡이라고 칭송하는 요네즈 켄시Lemon(요네즈 켄시)(2018년 유튜브 업로드, 2025년 7월 기준 9억 뷰)와 비슷하다.

유럽 국가들은 중남미에 큰 자국어 시장을 보유한 스페인과 포르투갈[4] 자국 대중음악 가수들의 인기 기반이 탄탄한 이탈리아, 러시아, 튀르키예[5]를 제외하면 앞서 말했듯이 자국어로 부르는 노래가 자국에서도 영미권 대중음악보다 인기가 없는 게 현실이다. 아예 독일은 힙합/랩이 차트를 쓸어갈 정도니 말을 다했다. 동유럽 같은 경우 러시아, 튀르키예와 남유럽[6] 쪽에서는 자국 문화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영미팝으로 도배되고 있다.

4. 역사

대표적인 대중음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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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프랭크 시나트라 - I'll Never Smile Again[7] (1940) 빙 크로스비 - White Christmas[8] (1942)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 - Hound Dog[9] (1956) 척 베리 - Johnny B. Goode[10] (1959)
1960년대
밥 딜런 - Like a Rolling Stone[11] (1965) 비틀즈 - Hey Jude[12] (1968)
1970년대
레드 제플린 - Stairway to Heaven[13] (1971) - Bohemian Rhapsody[14] (1975)
1980년대
마이클 잭슨 - Billie Jean[15] (1983) 건즈 앤 로지스 - Sweet Child O' Mine[16] (1987)
1990년대
너바나 - Smells Like Teen Spirit[17] (1991) 휘트니 휴스턴 - I Will Always Love You[18] (1992)
2000년대
비욘세 (Feat. 제이지) - Crazy in Love[19] (2003) 엠아이에이 - Paper Planes[20] (2008)
2010년대
에드 시런 - Shape of You[21] (2017) 릴 나스 엑스 - Old Town Road[22] (2018)
2020년대
위켄드 - Blinding Lights[23] (2019) 해리 스타일스 - As It Was[24] (2022)
기타
처비 체커 - The Twist[25] (1960) 루이스 폰시 (Feat. 대디 양키) - Despacito[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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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910년대 ~ 1940년대

대중음악의 음악적 시초는 학문적으론 중기, 후기 낭만음악과 초창기 근현대 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데 궤를 같이한다. 적어도 현재 존재하는 장르들의 뿌리는 대부분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영국 음악 역시 대중음악의 정의를 내리는 데 있어서 많은 역할을 했다. 프랑스, 독일 등, 발라드 같은 유럽 음악 또한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초창기 대중음악은 오페라낭만주의를 거친 클래식 음악, 혹은 지역 공동체에서 널리 불리던 민요 등에서 보드빌, 뮤지컬 등의 고유한 공연극을 통해 점점 장르로 자생력을 가지기 시작했다.[27]

1910년대대중음악의 “기원”이자, 음악산업이 되고 기술과 결합하며 처음으로 ‘대중시장’을 향해 구조를 재편하기 시작한 시대이다. 이 시기는 눈에 띄는 ‘스타’나 대중적 유행보다, 오히려 산업적 토대와 장르의 씨앗이 만들어진 결정적인 시기라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 틴 팬 앨리(Tin Pan Alley)는 대중음악 산업의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Tin Pan Alley란, 뉴욕 브로드웨이 인근 28번가에 몰려 있던 대중가요 작곡가 및 출판사 집단을 의미하는데, 작곡악보 인쇄 → 피아노용 보급 → 공연 및 판매라는 순환 구조를 가진 초기 음악 산업의 원형이 형성된 곳이다.

클래식 음악과 민속 음악이 ‘작곡가’ 중심이었다면, 틴 팬 앨리 음악은 시장에서 팔릴 음악을 만드는 상품 기획형 음악이었다. 이 시기 음악은 공감 가는 가사,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 춤추기 좋은 박자를 지향했고, 이는 훗날 팝 음악의 ‘레시피’로 계승된다.

어빙 벌린(Irving Berlin)의 “Alexander's Ragtime Band”(1911)은 미국 최초의 대중적 흥행곡 중 하나로, 래그타임을 주류에 편입시키며 향후 재즈의 토대를 마련했고,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은 후일 클래식과 재즈를 넘나들며 '대중과 예술의 다리' 역할을 하는 작곡가로 성장하는데, 이 시기에 커리어를 시작했다. 미국 의회가 주관하는 '역사상 가장 영예로운 음악가'들에게 수여하는 '거슈윈 상'의 유래가 바로 이 조지 거슈윈이다.

장르로 넘어와서, 래그타임(Ragtime)은 재즈의 DNA, 리듬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장르이다. 19세기 말~191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유행한 피아노 중심의 리듬 음악으로, 당김음(syncopation)을 특징으로 한다.

오늘날로 치면, ‘비트를 쪼개는 리듬의 혁신’이자, 단순한 왈츠행진곡과 다른 이질적이고 감각적인 그루브를 만들어낸다. 이 래그타임을 주도한 대표 작곡가로 스콧 조플린(Scott Joplin)이 있다. “The Entertainer”, “Maple Leaf Rag” 등으로 래그타임의 표준을 제시했다.

이들의 곡은 틴 팬 앨리에서 악보로 팔렸으며, 피아노 연주자들이 가정이나 술집, 공연장에서 연주해 유행이 확산되었다. 래그타임은 정확하게 기보된 리듬 음악이지만, 이는 재즈의 초기 즉흥성과 감성으로 전이되며 1920년대의 딕실랜드 재즈(Dixieland Jazz)로 발전한다

그리고 1910년대에 비로소 녹음 기술과 음반 산업이 태동된다. 에디슨 축음기가 보급되며, 음악은 악보가 아닌 ‘소리 그 자체’로 기록되고 소비되는 시대로 진입하면서, 1910년대 후반, 음반은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닌 가정의 문화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1917년, 백인 밴드인 Original Dixieland Jass Band가 발표한 “Livery Stable Blues”는 세계 최초로 상업적으로 녹음된 ‘재즈’라는 이름의 음반이다. 이 음반의 성공은 “녹음 가능한 음악”이 “연주되는 음악”보다 더 넓은 대중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상 첫 사례였다.

언급했듯이, 1910년대는 음악이 점차 가창 중심에서 청취 중심으로 변화하는 시기로 이전에는 피아노밴드를 불러 연주해야 했지만, 음반과 축음기 덕분에 ‘공연 없는 음악’이 탄생한다.

음악의 감상 방식이 시각-참여 중심에서 청각-소비 중심으로 바뀌면서, 현대적 대중음악 청취 방식의 시작이 됐다.

당시에는 미국 내에서 흑인 음악이 백인 사회에 노출될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흑인 민속 음악(Africans Folk), 필드 홀러(Field Holler), 스피리추얼, 블루스의 원형들은 지역적 음악문화에서 차곡차곡 힘을 쌓고 있었다.

흑인 뮤지션들은 당시 백인 음반사에서 정식으로 녹음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으며, 많은 음악이 백인에 의해 왜곡되거나 상업화된 형태로 유통되었다. 그러나 이 비주류의 힘이야말로, 훗날 대중음악의 폭발적인 진화를 가능케 한 원천이 된다.

그리고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일어난 시대로 전쟁은 대중음악에 직접적이고도 이중적인 영향을 끼쳤다. 군가애국가의 대량 생산으로, 전쟁은 음악이 '심리전'이자 '선전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음을 재확인시켜줬다.

미국이 참전한 1917년부터, 틴 팬 앨리 작곡가들은 경쟁적으로 애국적 가사와 전쟁 정서를 자극하는 곡들을 쏟아낸다. George M. Cohan의 “Over There”이 그러한 예시 중 하나이다. 많은 곡들이 전장과 고향을 연결하는 ‘그리움의 정서’를 담아냈고, 이는 음악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감정의 매개로 기능하게 만든 계기가 된다. 이 감정 중심 접근은 훗날 발라드, 컨트리, 소울 등 대중음악의 서정적 전통에 큰 영향을 준다.

유럽에서 복무하던 미군 병사들은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유럽 클래식/샹송/집시 음악 등을 접했고, 미국으로 돌아오며 이질적인 요소들을 미국 대중음악 안으로 유입시켰다.[28] 또한, 이탈리아 이민자들로 인해서 당대 틴 팬 앨리 등에 그들의 영향이 미치는 등, 유럽의 여러 음악 문화가 미국으로 섞인 시기다. 그래서 세계화의 초기 형태가 전쟁을 통해 음악에 퍼졌다고 본다.

그래서 이 시기를 대중음악의 ‘기반공사 시기’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얽히며, 1920년대 이후 대중음악의 구조와 생태계가 급격히 팽창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시기다. 다시 말해, 1910년대는 아직 꽃이 피기 전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그 씨앗은 재즈, 블루스, 록, 팝, R&B, 힙합으로 자라날 모든 음악 장르의 근원이었다.

“1910년대는 아직 ‘스타’도 없고, 뚜렷한 ‘장르’도 없고, ‘라디오’도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라날 토양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어서 1920년대 대중음악사를 깊이 있게 분석해보자. 이 시기는 음악사에서 단순한 '재즈의 시작'을 넘어서, 대중음악의 기초적인 문화적, 기술적, 인종적 구조가 형성된 시기이다. 한마디로, "대중음악이 태어난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첫 주류 장르로 부상한 것은 재즈로, ‘재즈 시대(Jazz Age)’가 오면서 음악이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1920년대는 미국의 금주법 시대(Prohibition Era)와 맞물려, 뉴욕시카고 같은 대도시에서 비밀 클럽(스피크이지, Speakeasy) 문화가 번창하며 음악의 실험과 소비가 급증한다.

재즈는 대부분의 대중음악 장르 사조의 실질적 모태 중 하나로서, 거진 반 세기 가까이 수많은 영향력을 지속했다. 비록, 브리티시 인베이전이 시작된 후로 '직접적인 영향력'은 줄어들지만, 20세기 후반에서도 재즈의 '요소'는 갖은 곳에서 도입되고 사용된다. 뉴올리언스 재즈가 시카고로 이동하면서 본격적인 도시 음악이 되는데, 이 시기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은 즉흥 연주(solo improvisation)와 보컬 스캣(scat singing)을 확립하며, '재즈 = 개인성의 표현'이라는 원칙을 대중화시킨다. 그는 ‘West End Blues’ 같은 명곡을 통해, 재즈를 댄스 음악에서 예술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루이 암스트롱이 뉴올리언스 스타일에 기교와 개인성을 더하면서, 즉흥 연주 중심의 음악 미학이 확립됐다. 그의 음악은 솔로리스트 중심의 대중음악, 나아가 록과 팝, 힙합 같은 대중음악 스타 시스템의 원형을 만든다.

대중음악의 첫 번째 스타로 취급받고 있고, 미국, 나아가 전 세계 문화사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대다수 교과서 근현대사 부분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인물 중 하나로, 근대 미국 사회 문화의 한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이전까진 '민속'이나 '흑인 사회 전용'으로 여겨졌던 재즈는, 백인 청중을 사로잡으며 본격적인 주류 대중음악으로 성장한다이를 계기로 흑인 음악가들이 백인 산업계에 의존해야만 했던 구조적 모순도 고착화되기 시작한다.

한편, 미시시피 델타 지역에서 시작된 컨트리 블루스는 1920년대에 도시화된 클래식 블루스로 변형된다. 베시 스미스(Bessie Smith)는 "블루스의 여왕"으로 불리며, 고통·사랑·절망을 솔직하게 표현한 보컬로 대중의 지지를 얻는다. 이 시기 블루스는 단지 장르가 아니라, 흑인 정체성과 억눌린 감정의 예술적 해방구였다.

블루스와 가스펠은 종교와 세속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후 소울, R&B, 록으로 이어지는 정서적 기반을 형성한다. 블루스는 곧 미국 내 소수자들의 ‘자기 서사’가 되었고, 이는 후대 프로테스트 송과 힙합의 뿌리가 됐다.

음반 산업도 성장하기 시작한다. 1920년대 초반, 축음기와 78RPM 음반이 대중화되면서 음악은 집에서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이 된다. 이때 등장한 개념이 바로 “Race Records”. 흑인 음악가들의 음반을 흑인 시장 대상으로 따로 유통하며, 시장을 인종별로 분리한 것이다. 반면, 흑인 음악의 잠재력을 알아본 백인들은 이를 '재포장'해 팝 시장에 접목, 차별과 수탈의 모순된 구조도 함께 생성된다.

그리고 1920년 KDKA (미국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가 개국하면서, 음악은 듣는 사람의 지갑이 아닌 만 있으면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콘텐츠가 된다. 라디오는 광고 산업의 등장, 음악의 스타화, 지역 문화의 전국화를 가속화한다.

재즈는 과 함께 성장했다. 1920년대에는 이국적이고 격렬한 춤들이 인기를 끌며, 음악은 곧 몸을 휘두르는 도전이자, 개인의 해방 감각이 된다. 이는 곧 청춘 문화, 성 해방, 여성 해방(플래퍼족, Flappers)과 연결되어, 음악이 처음으로 ‘세대의 표현’의 기능을 가지게 된다. 1920년대는 여성 가수가 중심에 선 최초의 시기로, 마 레이니(Ma Rainey), 베시 스미스, 에다 제임스(Ethel Waters) 등은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자기서사를 가진 흑인 여성 주체로 부상했습니다. 동시에 백인 여성 대중문화의 아이콘들 역시 플래퍼(flapper)로 상징되며, 대중음악이 '여성의 시대'를 열기 시작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1920년대는 음악이 '소리'에서 '정체성'이 된 최초의 시기다.”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의 대중음악은 단순한 '재즈의 시대'를 넘어, 대공황 같은 경제적 고통과 기술 진보, 인종과 계급의 긴장, 그리고 대중음악 산업 구조의 확립이라는 복합적 요소들이 뒤섞인 시기였다. 이 시대를 세밀하게 뜯어보면, “대중음악이 진짜로 '대중'의 것이 된 시기”라 평가할 수 있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음악 양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스윙(Swing)은 재즈의 변형으로, 보다 부드럽고 규칙적인 리듬감을 강조하며 춤추기 좋은 형태로 재편된 음악이다.

이는 루이 암스트롱의 즉흥 중심 재즈를 집단적 편곡과 합주 중심으로 전환시킨 흐름으로, 대중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확보한다. 3관 편성(트럼펫·트롬본·색소폰)과 리듬 섹션(피아노·베이스·드럼·기타)의 조화로 이뤄진 '''빅 밴드(Big Band)'가 이 시기 음악의 중심이 된다.

듀크 엘링턴은 단순한 밴드 리더가 아닌 작곡가이자 오케스트레이터로, 그의 작품은 ‘Harlem Air Shaft’, ‘Mood Indigo’ 등으로 대표되며, 재즈를 대중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니 굿맨은 백인 클라리넷 연주자이자 “스윙의 왕”으로 불리는데 흑인 뮤지션들과 함께 무대에 선 최초의 백인 아티스트 중 하나로, 인종 장벽을 넘어선 첫 대중 스타로 평가받는다.

글렌 밀러, 카운트 베이시, 토미 도시, 아티 쇼 등도 모두 이 시기를 수놓은 빅밴드 리더들이며, 이들의 음악은 무도회장과 라디오 방송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930년대는 라디오 황금기로, 미국 가정의 70% 이상이 라디오를 보유했다. 음악은 현장에서 공연되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공공 경험'이 되었으며, 이는 음악의 스타 시스템과 팬 문화를 낳는다. RCA와 NBC 같은 대형 방송사들이 주도하며, 음악 방송이 곧 마케팅 플랫폼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전 시대에는 가창력이 중요한 '성악형' 창법이 주류였지만, 전자 마이크의 보급은 속삭이듯 감성적으로 부르는 '크루닝(crooning)' 창법을 가능하게 했다.

대표 인물은 빙 크로스비(Bing Crosby). 그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보컬은 라디오와 음반 매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보컬 중심 대중음악의 시대를 개척한다. 훗날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등으로 이어지는 '보컬 스타'의 계보는 여기서 시작됐다. 대중문화라는 말을 정립시킨 인물로 20세기 역사상 가장 영항력 있는 음악 인물 중 한 명이자, 20세기 초중반 대중문화를 홀로 정립해나간 전설적인 인물이다.

오페레타, 전통 음악, 스윙 등에 기원을 둔 초창기의 팝 음악, 트레디셔널 팝의 정립에 큰 공헌을 했다. 1930년대 트레디셔널 팝의 시대가 개막하며 기존 클래식 시대에서 대중음악을 메인스트림에 올려놓은 인물 중 하나로, 1930년대에 홀연히 등장해 가수, 코미디언, 배우를 두루 섭렵했으며 역사상 최초의 슈퍼스타, 멀티테이너, 연예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세계 대중문화계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어마 무시하다.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의 미국인에 예술가, 연예인으로 루이 암스트롱,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등과 함께 당당히 선정되었으며 트레디셔널 팝의 특징으로 꼽히는 크루닝(Crooning)은 주도해서 개발한 것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노래라면 White Christmas로 역사상 가장 많이 판매를 한 실물 싱글이다.[29]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미국 사회는 경제적 암흑기에 돌입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음악은 가장 값싸고 즉각적인 위로 수단으로 자리잡는다. 스윙 댄스와 희극적 대중가요는 현실을 잊게 해주는 기능을 했고, 많은 사람들은 라디오를 통해 '다른 세상'으로 도피했다. 음악은 이 시기부터 “현실의 반영”보다는 “환상의 공급자”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같은 시대, 미국 포크송의 리얼리즘적 전통도 강화된다.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는 이 시대 농민·노동자·이주민의 고통을 노래하며, 훗날 밥 딜런 등 프로테스트 송의 선조가 된다. 흑인 음악은 여전히 ‘Race Records’로 분류되어 산업적 차별을 겪었으나, 재즈와 블루스는 백인 관객 사이에서도 확고한 지지를 얻기 시작한다.

1930년대는 영화가 무성에서 유성으로 바뀐 이후,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가 폭발한 시기이다. 프레드 아스테어 & 진저 로저스, 주디 갈랜드, 셔리 템플 등은 음악을 결합한 영상물의 스타가 되었고, 이는 음악의 시각화와 퍼포먼스화를 촉진시켰다.

이 시기부터 음악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본다'는 문화로 이행하게 된다. 이는 훗날 MTV, 유튜브의 시대를 예고한 첫 장면이었다. 즉 1930년대는 감각적인 기교보다는 ‘경험의 공유’를 통해 비로소 대중음악이 잠깐 즐기고 마는 ‘음악 그 자체’를 넘어서 사회적 존재로 자리매김한 시대였다.

1940년대 대중음악사는 한마디로 말하면, 기술, 문화, 인종, 전쟁이라는 거대한 힘들이 충돌하며, 현대 대중음악의 핵심 구조 — ‘가수 중심의 음악’, ‘장르 분화’, ‘인종 간 상호영향’, ‘미디어에 의한 스타 시스템’의 초석이 이루어진 시대이다.

이 시기 전반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의 영향이 강렬했다. 음악은 ‘위로’이자 ‘무기’로 쓰였는데 전시에는 음악이 군인국민을 하나로 묶는 정서적 도구이자, 애국심과 사기를 북돋는 심리전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미국 정부는 라디오공연을 통해 병사들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프로그램(예: “V-Disc”, “USO 쇼”)을 운영한다.

이때 전쟁이 지속되면서, 재즈스윙유럽 병사들 사이에서도 전파되며, 미국식 대중문화의 ‘소프트 파워’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된 시대이다.

스윙 빅 밴드는 1940년대 초반에 그야말로 절정을 맞는다. 글렌 밀러(Glenn Miller), 토미 도시(Tommy Dorsey), 아티 쇼(Artie Shaw) 등은 전시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대중을 위로. 음악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국가적 감정의 해소 수단이 된다. 그리고 재즈계에서 음악을 네다섯번 바꿔놨다는 평론을 받은, 현대 재즈의 분위기를 확립한 마일스 데이비스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다.

그러나 후반기부터 점차 쇠퇴되는데, 전쟁 중 군입대, 물자 부족, 공연 제한 등으로 빅밴드 유지는 어려워졌고, 무엇보다 경제적 부담과 새로운 음악 트렌드(소규모 편성, 보컬 중심)가 부상하면서 빅 밴드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시대에 대중음악 랭킹 시스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생기는데 바로 음악 차트이다. 빌보드는 1936년 최초의 현대적인 음악 차트를 시작했으며, 1940년에 들어서 대중 음악 싱글 차트를 시작하여, 미국 전역에서 인기 있는 곡들의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

빅 밴드 시대가 막을내리고 1940년대 중반부터는, 관객의 관심은 밴드가 아닌 가수(보컬리스트) 한 사람에게 집중되기 시작한다. 이때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 (Frank Sinatra)이다.

팬클럽, 라디오, 영화, 등 멀티미디어 스타 시스템의 첫 모델이 되는 인물로, 1940년대의 미국의 대중문화를 대표하며 미국의 대중음악을 정의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목소리는 우리 세기의 목소리였다"는 극찬을 받은 프랭크 시나트라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가수(보컬리스트) 중 하나로 인식되고, 20세기의 대중음악사 가장 중요한 가수로 평가 받는다.

그는 음악,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모두 정점에 오른 20세기 모든 연예 매체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며, 사후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위대함은 그의 경력에서 잘 드러난다.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장장 반 세기인 50여년간 미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최고의 가수로서 위상을 유지했다.[30]

프랭크 시나트라는 1940년 토미 도시 악단에 들어가 보컬이 되었는데 이때 발표한 "I'll Never Smile Again"이 빌보드 싱글 차트 12주 연속 1위를 하며 돌연 스타덤에 올랐고, 특히 10대 소녀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10대/사춘기 소녀들의 우상이라는 뜻의 바비 삭스 아이돌(Bobby Sox Idol))이라는 별칭을 얻었다.[31] 역사상 최초의 아이돌 현상은 비틀즈가 불러왔으나,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대중음악계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기원은 프랭크 시나트라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기록된 그의 명곡으로는 My Way, Fly Me to the Moon 등이 있다.

동시대에 냇 킹 콜이나 페리 코모 등의 가수도 프랭크 시나트라에 비견할 만한 상업적 성공과 인기를 얻었다. 냇 킹 콜이나 페리 코모는 프랭크 시나트라보다 시대의 아이콘적인 면은 적지만, 차트 성적이나 히트곡 수로만 보면 프랭크보다 월등했다. 국내에 알려진 대표적인 냇 킹 콜의 명곡으로 L-O-V-E가 있다.

토니 베넷과 코미디언 출신 딘 마틴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남성 4중창단들의 활약도 이 당시 돋보였다

이 흐름은 보컬이 ‘리듬보다 감정’을, ‘연주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핵심 존재가 되는 대중가요의 구조를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40년대 후반, 기존 블루스에 재즈의 리듬감, 도시적 감성, 전기 기타 등을 결합한 새로운 스타일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R&B이다. 그리고 재즈계에서 찰리 파커(Charlie Parker),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등이 기존의 스윙 재즈에 반기를 들고, 작은 편성, 복잡한 화성, 빠른 템포, 즉흥 연주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그렇게 시작된 비밥은 청취용 예술 재즈로 진화, 대중성과 결별하게 되지만, 재즈를 고급 음악으로 정착시키고, 훗날 퓨전, 아트 록, 힙합 등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다.

이 시대는 라디오 방송국의 수 폭증한 시대로, 음악의 확산 속도가 증가했는데 그래서 전파를 타고 전국구 스타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음반은 여전히 78RPM 쉘락판이 주류였지만, 1948년 콜럼비아 레코드가 LP(33⅓RPM) 최초 발매, 음악 감상의 형식과 길이 자체를 바꾸는 기술적 전환점이 마련된다.

1940년대는 음악이 무대에서 내려와, 사람의 귀와 마음 속으로 들어간 시기였다. 전쟁은 음악을 필요했고, 사람들은 위로와 리듬을 찾았으며, 보컬은 연주보다 감정을 담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흑인 리듬은 세상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흐름이 바로 1950년대 ‘로큰롤 혁명’을 불러오는 서막이 된다.

4.2.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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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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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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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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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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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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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201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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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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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음악구조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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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국가별 분류

6.1. 아메리카

6.2. 유럽

6.3. 아시아

6.4. 중동

  • 튀르키예: 튀르크체 팝(Türkçe Pop. 해외 명칭은 터키쉬 팝 Turkish Pop)
  • 아랍: 아랍팝(Arab Pop) (이집트레바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 이란: 이라니언 팝(Iranian Pop) 혹은 페르시안 팝(Persian Pop)

6.5. 주요 인물

6.5.1. 1910년대 ~ 1920년대


6.5.2. 1930년대

6.5.3. 1940년대

6.5.4. 1950년대

6.5.5. 1960년대

6.5.6. 1970년대

6.5.7. 1980년대

6.5.8. 1990년대

6.5.9. 2000년대

6.5.10. 2010년대

6.5.11. 2020년대


[1]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연하게도 대중성을 갖고 있는 대중음악의 존재는 클래식이 발전한 형태인 현대음악을 청중들로부터 하여금 멀어지게 만들었다.[2] 대중음악 중에서도 대체적으로 나이가 조금 있는 성인들한테 인기가 많은 더 정적인 대중음악은 그래도 라디오에서 수십년 동안 고정적으로 방송될 만큼 조금은 더 인기가 오래가지만, 청소년들의 관심을 주로 사로잡는 더 동적인 대중음악은 1년만 지나도 라디오 방송에서 사라져 버릴만큼 대부분 인기가 오래가지 못한다. 대중음악처럼 폭발적인 인기는 아니지만 순수음악이 수백년이 지나도 인기를 구사하는거에 비하면 유행성이 참 짧기는 하다.[3] 단 어떤 분야의 경향을 말하기 위해서는 전체 산물을 파악해야 하고 클래식이라 불리는 오래된 음악들 역시 당대에는 존재했으나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는 것들이 많게 마련이고 극히 일부만이 현재 소비된다. 따라서 일부 오래 전해지는 것들만을 포함하여 지속성을 판단하는 것은 일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이기도 하다. 소수는 길게 전해지고 다수는 사멸된다는 점에서 대중음악과 동일하며 역사 자체가 클래식 보다 훨씬 짧아 상대적으로 남는 것이 적을 수 밖에는 없는 점이 더해진 대중음악에 비해 생명력이 길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4] 포르투갈은 희한한 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참가자들이 영어 노래를 부르며 경쟁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하거나 혹은 우승은 못해도 크게 뜬 가수는 꼭 자국어인 포르투갈어로 음반을 내서 자국은 물론 포르투갈어권(주로 브라질)에서 인기를 얻는다. 대표적인 예가 The voice Portugal 4에서 우승한 Fernando daniel으로 수 많은 영어 노래를 부르며 해당 시즌을 우승하였지만 우승 후에는 주로 포르투갈어로 앨범을 발매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Espera, Voltas는 포르투갈, 브라질 등 포르투갈어권에서 굉장히 인기도 많고 유튜브 조회 수도 상당하다. 다만 The Voice 포르투갈 버전도 보면 2020년대에 들어 새 시즌이 나올 때마다 참가자들이 영어 노래보다 포르투갈어 노래를 더 부르며 경쟁하는 모습이다.[5] 유럽의 방송, 음악 협회들과 단체에 유럽 국가 명의로 가입되어 있고 각종 차트에서도 유럽으로 포함시키기 때문에 음악계에서는 유럽 국가로 분류한다.[6] 구유고 연방은 영미팝 노래가 인기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 등 여러 문화가 충돌했던 적이 있던지라 자국의 고유한 음악을 보존하고 있다. 세르비아 음악만 보더라도 전형적인 동유럽풍 노래 같다가도 튀르키예풍 멜로디가 섞여있는 느낌이 아주 많이 난다. 다만 내수시장이 세르비아는 고작 700만이고 구유고권으로 확대해도 2000만 뿐이라 타 유럽 국가처럼 비록 서유럽, 북유럽 국가들 보다는 좀 나아도 결국 자국 음악시장에 영미팝이 강하게 투사되는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7] 프랭크 시나트라의 40년대 대표 히트곡.[8] 1940년대 싱글 역대 판매량 1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실물 싱글(5000만 장).[9] 엘비스 프레슬리의 50년대 대표 히트곡.[10] 롤링 스톤 선정 기타 명곡 1위.[11] 2010 롤링 스톤 선정 명곡 1위,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명곡 1위.[12] 1960년대를 대표하는 비틀즈를 대표하는 명곡.[13]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일곡 중 하나로 꼽히는 레드 제플린의 히트곡.[14] 의 1970년대 대표적인 히트곡.[15] 마이클 잭슨의 80년대 대표 히트곡이다.[16] BBC 선정 가장 위대한 기타 리프 2위. 1980년대를 대표하는 메가 히트곡.[17] 너바나의 90년대 대표 히트곡이다. 대중음악사를 뒤바꾼 노래로, 어클레임드 뮤직에서는 역사상 최고의 명곡 2위에 선정되었다.[18] 1990년대 싱글 역대 판매량 2위(2,000만 장). 역대 여자 가수 싱글 판매량 1위. 세계 실물 싱글 판매량 순위 5위.[19] 비욘세의 데뷔곡이자 00년대 대표 히트곡이다.[20] 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21세기 최고의 노래 1위.[21] 2010년대 싱글 역대 디지털 판매량 1위(4,120만 장). 세계 디지털 싱글 판매량 순위 2위.[22] 빌보드 핫 100 최장 기간 1위 곡.[23] 빌보드 올타임 차트 역대 1위. 전 세계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한 곡으로 꼽힌다. 빌보드 차트 역사상 최초의 90주 차트인을 달성한 곡이자 최장기 Top 5 차트인, 그리고 Top 10에 1년 이상 머무른 곡. 2020년대 싱글 역대 디지털 판매량 1위(중국 제외).[24] 2020년대 장기 1위곡(15주) 중 하나이자 해리 스타일스의 대표 히트곡. As It Was의 프로듀서진이 이 곡이 Blinding Lights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25] 빌보드 올타임 2위 싱글. Blinding Lights의 등장 이전까지 60여 년간 올타임 1위 자리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에 '트위스트'라는 춤을 알리고 유행시킨 노래이다.[26] 2010년대 싱글 역대 디지털 판매량 2위 (3,610만 장). 역대 그룹 디지털 싱글 판매량 1위. 동요를 제외한 유튜브 뮤직비디오 중 조회수 최다.[27]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 0에서 시작했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 사람들이 듣고 즐기는 음악에서 어떤 식으로든 클래식 음악에 뿌리를 두지 않거나, 거치지 않은 음악은 없다시피 한다.[28] 보통 일반인들은 순수히 미국에서 일어난 음악이 대중음악의 토대가 됐다고 하지만, 반만 맞는 이야기다. 전쟁, 이민자를 거치며 받은 유럽 음악의 영향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고 평가된다.[29]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실물 싱글(5,000만 장)[30] 지금으로 보자면 에미넴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롱런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1966년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Strangers in the Night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무려 51세때 발매된 싱글이다. 10년 정도 인기를 유지해도 어마어마하게 롱런했다고 보는 음악계에서 역대급 수준으로 인기를 유지했다. 그의 대표곡으로 한국 대중에게 알려진 곡들 'My Way(1969)'와 'New York, New York(1980)' 등은 전성기가 한참 지난 후반에 발표된 곡들이다. 심지어 사망하기 5년 전인 1993년에 발표한 Duets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2위에 오르는 저력을 보여준다.[31] 바비 삭스는 1940년대의 10대 소녀들 사이에서 유행한 패션 아이템으로, 긴 발목 부분을 한 번 접어 신는 하얀 무지 양말이나 짧은 발목에 레이스가 달린 양말을 바비 삭스라고 불렀다.[32] 소울, Funk, 디스코, 포스트 디스코, 컨템퍼러리 R&B, 네오 소울, Crunk&B, 얼터너티브 R&B 등의 하위 장르가 있다.[33] 블루스 록, 하드 록, 개러지 록, 포크 록, 루츠 록, 펑크 록, 글램 록, 피아노 록, 메탈, 그런지, 슈게이징, 얼터너티브 록 등의 하위 장르가 있다.[34] 갱스터 랩, 붐뱁, G-funk, 크렁크, 팝 랩, 재즈 랩, 더티 랩, 래칫, 트랩, 멈블 랩, 이모 랩, 싱잉 랩 등의 하위 장르가 있다.[35] 흔히 인디 성향이 강한 음악이 이쪽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