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03 03:47:28

흔귀비 대가씨(건륭제)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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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건륭제의 후궁
흔귀비 | 忻貴妃
파일:흔귀비 대가씨.jpg
생몰년도 <colbgcolor=#fff,#1f2023>? 5월 29일 ~ 1764년 4월 28일
시호 흔귀비(忻貴妃)
지위 흔(忻)빈 ⇒ 흔비
대가씨
가계 부친 총독 나소도(那蘇圖)
부군 건륭제
자녀 황6녀, 황8녀

1. 개요2. 생애3. 장례 절차4. 여담5. 대중매체

1. 개요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후궁이다. 만주양황기 기인이다. 하도총독 나수투의 딸이자 장사도선의 손녀이다. 강희제의 후궁인 성비의 당증조카손녀이자 건륭제의 귀비이다.

2. 생애

생년을 알려지지 않았고, 생일은 5월 29일이다.

장쑤성 포정사 유안닝의 아내, 완안씨 시랑 성액지 계실, 후이후루씨 내각의 서자인 푸룽아(福隆亞)의 아내 등 세 자매가 있다. 대가씨에게는 그보다 30살이나 많은 언니가 있었다. 그만큼 대가씨는 나수투 말년에 얻은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강희제 경민황귀비의 친조카로, 아버지 운기위 겸 낭령시위 나수투로 옹정 초년 흑룡강 장군이 되어 승승장구했다.

건륭 18년 7월 20일, 황제는 대가씨를 ‘빈(嬪)’으로 봉하라는 조서를 내렸고, 그녀는 원래 익곤궁에 거주하다가 이후 종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건륭 19년 윤4월 11일, 흔빈의 책봉 의식이 거행되었다. 건륭 20년 7월 17일, 황제의 여섯째 딸을 낳았으나, 딸은 네 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건륭 22년 12월 7일, 여덟째 딸을 낳았으나, 역시 열 살에 요절했다. 건륭 28년 8월 28일, 예빈(豫嬪)과 함께 ‘비(妃)’로 봉해져 각각 예비(豫妃), 흔비(忻妃)라 불리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건륭 29년 7월 4일에 예비와 흔비의 책봉 의식을 거행하기로 관련 부서에서 계획하였다.

건륭 28년 12월 25일, 기쁜 일이 있어 흔비의 생활 예우가 상향되었다. 건륭 29년 2월 초, 황제는 산후 조리를 위한 산파 두 사람을 흔비 곁에 보내 돌보게 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흔비 대가씨는 4월 28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흔비 초제(初祭, 첫 제사)는 관례에 따라 황제가 지명한 대신이 주관하여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건륭제는 직접 장례식에 참석하여 술을 따르고 애도를 표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조정의 업무도 5일간 중단하였다.

대가씨는 생전에 비로 진봉되었지만, 그녀가 남긴 조관은 빈의 조관이다. 기록에 따르면 흔귀비의 훈담비모피는 조관 한 꼭지에 동주를 따라 11알, 무게는 2푼, 무게는 1푼이다. 맨 위의 정주는 한덩어리로 빈의 기준이고, 비는 묘정석이어야한다. 생전에 흔비 책봉례는 하지 않았지만, 건륭 29년 4월에 사망할 때 비의 위치에 맞는 조관은 없었다.

3. 장례 절차

대가씨가 흔비로 진봉한 금책의 금보구는 이미 삼가 조성하였으나, 아직 받지 못했으니 금관 앞에 진설하여 대상분 예치제일까지 금책과 금보를 전례에 따라 교광저장을 녹이는 것이 마땅하다. 견책과 견보는 같은 날 닥나무 덩어리로 태워버렸다. 이밖에 금책과 금보는 이미 글자를 새겨서 바꿀 필요가 없고, 견책과 견보는 귀비 글씨를 더 써야한다. 이는 후대에 이와 유사한 비빈의 장례 절차가 되었다.

흔귀비의 금관은 정안장의 빈소에서 처음 운구되었다. 건륭 30년 2월 22일, 효현황후의 능침이라 불리던 황비아문(훗날 유릉비원침)으로 옮겨졌고, 신빈 배이갈사씨와 복귀인의 금관도 같이 모셨다. 운기위는 흔귀비의 금관을 봉안하고 유릉비원침에 갈때 압류하여 메지도 않았다. 형부가 규례대로 곤장 백 대를 꾸짖고, 그 찰을 차고 감옥 밖에서 두달 동안 보이도록 강요한 후에야 만일에 채찌질하여 처벌하였다.

건륭제 때에는 뒤에 은영이 추가된 것은 모두 실질적인 명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흔비가 귀비의 상을 받은 후, 유릉의 위패를 '흔귀비'라고 적었다. '흔비'가 아니라 '흔귀비'이다. 경사방이 대가씨의 유물을 볼때 흔귀비라고도 했다. 이로써 대가씨는 흔귀비로 추존된 셈이다. 그래서 《昌瑞山万年统志》와 《清皇室四谱》 등 청궁 문서는 그녀를 흔귀비라고도 부른다.

4. 여담

흔귀비가 훙거한 후, 녕하장군 달색은 일찍이 만문 곡절을 올렸다. 「흔귀비가 집에 돌아와 사은절했다.」, 신귀비가 훙거한 날짜와 옥첩의 흔귀비 대가씨가 훙거한 시간은 같은 날이었다. 이렇게 추론하면 「귀향」은 곧 은근한 「사망」의 의미를 뜻한다.

5. 대중매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