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후궁 |
|
청나라 건륭제의 후궁 경공황귀비 | 慶恭皇貴妃 | |||
| |||
생몰년도 | <colbgcolor=#fff,#1f2023>1724년 8월 12일 ~ 1774년 7월 15일(50세) | ||
시호 | 경공황귀비(慶恭皇貴妃) | ||
지위 | 육(陆)상재 ⇒ 육귀인 ⇒ 경(慶)빈 ⇒ 경비 ⇒ 경귀비 | ||
성 | 육씨 | ||
가계 | 부친 육사륭(陸士隆) | ||
부군 | 건륭제 | ||
자녀 | 슬하 자녀 없음 |
1. 개요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후궁이며 한족민인으로, 후에 양황기 포의 제4참령 제2기고좌령으로 기인이 되었다. 소주 평민 육사륭의 장녀이다.2. 생애 초기
옹정 2년 (1724년) 6월 24일에 태어났다.언제 입궁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육씨는 민인 출신으로 팔기 이외의 사람이 수녀선발을 통해 입궁할 수 없었다. 후에 방비 진씨와 녹귀인이 모두 남방(南方)의 염정(소금 전매)과 세무 감독 기관에서 궁정으로 들어온 사실로 미루어 보아, 육씨 역시 당시 봉양관 세무 감독 보복(普福)이 천거해 내정(內廷)에 들어온 여자일 것으로 추측된다. 보복은 건륭 7년(1742년)에서야 이 직책을 맡았는데, 이전에는 육고 사무량을 총괄하는데 그쳤다. 이로 보아 짐작하건데, 육씨는 건륭 7년에서 건륭 12년(1747년) 사이에 입궁한 것으로 보인다.
건륭 13년(1748년) 정월에 이미 육상재로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고, 4월 12일에 나상재와 함께 귀인이 되어 육씨를 육귀인이라 불렀다. 건륭 16년(1751년) 정월 초이틀에 경빈으로 진봉되고, 그해6월 초이틀에 경빈 책봉례가 정식으로 행해졌다.
3. 생애 후기
건륭 24년(1759년) 11월 21일 건륭제는 그녀를 경비로 진봉하고, 12월 18일에 경비 책봉례를 치렀다. 책봉례가 열리기 전인 11월 21일, 건륭제는 경빈, 영빈, 다귀인에게 산호조주 한 접시씩 하사했고, 경빈에게는 추가로 금박쌍동주추를 하사했다.건륭 25년(1760년), 경비는 궁내 관원에게 활계(活計, 수공예품)와 대소 향낭 제작을 지시하고, 태감 유진옥(劉進玉)에게 은 41량을 향주머니 담당자 손씨(孫氏)에게 전달하도록 했으나, 유진옥은 은 26량을 몰래 차용했다. 건륭 26년(1761년), 향낭 제작을 위해 재단된 원단 774점이 지급되었고, 12월 14일, 경비궁의 소태감 수아(壽兒)가 유진옥에게 "경비마마가 활계를 독촉하신다"고 전했다. 유진옥은 순간적인 욕심으로 "활계 담당자 집에 화재가 나서, 외부 상점에서 향낭 원단 60쌍을 구매해 넣어야 한다"고 거짓말했다. 동월 16일 아침, 경비는 수아가 가져온 향주머니 원단이 너무 좁다는 이유로 유진옥을 불러 추궁했다.
건륭 33년(1768년) 5월 21일, 경비가 학칙을 내려 여자 한사람에게는 평상시에 봉한다. 가경제의 어릴적 종두 기록에 따르면 건륭 30년 (1765년) 전에 경비 육씨는 가경제의 양어머니였다. 건륭 33년 10월 6일 경비가 정식으로 경귀비로 책봉되었다.
건륭제는 3년동안 병을 앓은 경귀비를 위해 양의를 찾아다녔지만, 효과가 없자 그녀를 𣈱春園 서쪽에 있는 서화원에 머물게 했다. 건륭제는 피서산장에 도착한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몸이 매우 마음에 걸려 매번 그녀의 근황을 물었다. 경귀비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사람을 보냈다. 건륭제 39년(1774년) 7월 15일 경귀비는 병으로 서화원에서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경귀비가 병으로 사망한 날로부터 닷새 만에 금관이 길안소에서 정안장으로 옮겨지자 효를 입은 황자, 공주, 복진 등이 정안장으로 가서 거상하였고, 15황자는 신무문 안 동쪽 북소화원에서 효를 입혔다. 건륭제 40년(1775년) 10월 26일, 금관은 유릉비원침에 묻혔다.
가경 4년(1799년) 정월 4일, 태상황 건륭제가 그녀를 길러준 은혜와 배려를 기려 육씨를 경공황귀비로 추서하였다. 중국 제1역사기록보관소의 디지털화 시스템은 가경연간 《경귀비에게 경공황귀비유지명세》의 원문을 잘못 봉했다, 기년에는 건륭 39년(1774년)으로 기록되었는데, 원래는 경귀비를 가경 4년(1799년)에 경공황귀비로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