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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키르히 전투


7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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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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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베르크 전투
,1762년 10월 29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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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호크키르히 전투
Battle of Hochkirch
Schlacht bei Hochkirch
<colbgcolor=#ABCDED,#0E0F37>
파일:11-AAA-img199.jpg

▲ 방벽에서 오는 오스트리아 부대를 향해 계속 사격하는 랑겐 부대
시기 1758년 10월 14일
장소

호크키르히
교전국 <rowcolor=black> 오스트리아
(공세)
프로이센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다운 백작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라우돈 남작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레이시
지휘관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프리드리히 대왕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자이틀리츠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키스 공작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모리츠
병력 오스트리아군: 78,000명
- 보병: 50,000명
- 기병: 28,000명

대포: 340문
프로이센군: 30,000명
- 보병: 20,000명
- 기병: 10,000명

대포: 200문
피해 사상자: 7,000명 사상자: 9,100명
대포: 101문
결과 오스트리아의 대승
- 프로이센의 치명적인 패배
- 프로이센의 정예병 대부분 손실 및 수뇌부 대부분 전멸
- 프로이센의 명장 키스 공작의 전사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
3.1. 오스트리아의 작전3.2. 오스트리아의 본격적인 공세3.3. 키스의 전사3.4. 오스트리아의 마을 점령 및 포격3.5. 오스트리아 기병의 돌격3.6. 프로이센의 마지막 반격
4. 결과5.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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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10월 14일 작센의 호크키르히에서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오스트리아군이 승리를 거뒀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전투의 패배 이후 수세에 몰린다.

2. 배경

1758년 8월 25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적을 본국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조른도르프 전투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전투 양상은 매우 팽팽했고,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로 인해 수많은 숙련된 병사들을 상실했다. 그 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군과 연계하기 위해 작센으로 침입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를 무찌르기 위해 작센으로 돌아갔다. 한편, 평소 신중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다운 백작은 베를린 행진은 적의 거센 저항에 직면할 테니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신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재빨리 작센으로 돌아와 9월 10일까지 드레스덴 근처에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동생 하인리히 왕자의 군대와 합세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으로 돌아오자, 레오폴트 요제프는 바우첸의 동쪽으로 9km 떨어진 호크키르히 마을 동쪽에 참호를 파고 방어 진지를 구축하며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일단 적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진지를 치는 건 상책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적이 먼저 공격해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다운 백작은 이를 응하지 않았고 프로이센군의 거듭된 도발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에 10월 10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신중한 다운은 기습 작전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며, 프로이센군을 호크키르히로 진격시킨다.

사실 다운 백작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예상대로 프로이센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경계해 함부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 등이 적이 아군을 무시하며 완전히 방심하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기습을 감행할 호기라고 설득했고, 때마침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이를 축하할 승전보가 필요하다는 건의도 제기되었다. 이에 다운 백작은 고민 끝에 10월 13일 저녁 전쟁 협의회에서 적을 기습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3일 밤에서 10월 14일 새벽에 걸친 기습 작전을 수립, 집행했다.

3. 전투 경과

3.1. 오스트리아의 작전

프로이센군 우측에 위치한 숲이 있었는데, 다운은 그랜저 부대의 지휘관인 레이시에게 히트 앤드 런 작전을 통해, 밤이 되면 캠프파이어, 불, 화약 등을 터트리며, 진격하는 척을 하였다가, 다시 빠지면서, 프로이센군의 피로를 가중시켰다.

또한, 공격 전날 밤에 텐트와 캠프파이어까지 켜두며, 프로이센군이 낚을 수 있도록 기만작전을 수행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는 기점에서 공격을 시작하기로 하며, 호크키르히 전투를 수행한다.

3.2. 오스트리아의 본격적인 공세

10월 14일 새벽 5시, 다운 백작은 모든 군대를 5개로 나누어, 야음을 틈타 프로이센군을 완전히 포위해버린다. 프로이센군 최전방에는 키스 공작의 부대가 있었는데, 완전히 포위되었으며, 숲에서부터 공격이 시작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랜저의 국지적 도발인 줄 알고, 무시해버린다.

오스트리아군 우익에 최정예 부대를 배치한 다운 백작은 중앙과 좌익은 군을 붙들어 두고 있으며, 우익 군이 새벽 기습을 감행한다. 당시에 프로이센군은 숲속에 2개의 대대가 있었으나, 순식간에 그랜저 부대에게 궤멸되어 버린다.

이를 기점으로 숲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프로이센군의 참모들은 공격 규모가 다르다며, 왕에게 말하는 순간 최전선에서 전령이 도착한다. "오스트리아군의 전면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라며, 왕에게 직접 알렸고, 이 순간 프리드리히 대왕이 있는 막사까지 총알이 날라왔으며, 왕의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갔다.

대왕은 "총을 집어라, 맞서 싸워라, 누가 내 말 좀 찾아줘"[1]라고 했으며, 원래 기습이라는 것은 전략적으로 약한 부대가 극복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작전 중 하나였으나, 수적으로 2배 이상 많은 오스트리아군이 수행함으로써, 프로이센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최전방의 키스의 부대는 이미 궤멸한 상황이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대규모 공격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었다.

3.3. 키스의 전사

교회 근처에 있던 키스 공작은 직접 말을 타고 다니며 "분명 이쪽(교회)으로 적의 대규모 병력이 온다. 만약, 이쪽으로 오지 않으면 오스트리아 장군들을 목매달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프로이센군의 패잔병들을 모았고, 키스는 방진을 만들고 돌격을 시켰다. 이렇게 악전고투를 진행하는 와중, 어디선가 날라온 총알이 키스의 심장을 관통해버리며, 즉사했다. 그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해당 소식이 전해졌고, 이 전투는 패배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3.4. 오스트리아의 마을 점령 및 포격

프로이센군은 호크키르히 마을 포대까지 뺏겨버렸으며, 키스 공작은 이 포대를 되찾기 위하여 패잔병들을 모아 돌진을 시켰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고, 오스트리아의 수중에 넘어간다. 순간, 모리츠가 갖고 있던 3개의 연대를 이끌고, 키스가 전사했던 교회 근처로 찾아온다. 그 덕에, 프로이센군은 일시적으로 오스트리아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하였지만, 이를 알아챈 오스트리아군은 5분도 안 돼서 보병 예비대를 돌격시키며,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모리츠가 큰 부상을 입고, 설상가상으로 포로가 된다.

프로이센 주력 부대가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가 됐으며, 오직 자이틀리츠의 부대만 남아있었다.

이 전투의 가장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지대에 오스트리아군이 자리를 잡았으며, 프로이센군은 보급한다고 쉬면서, 이쪽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여기에 오스트리아 포병대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오스트리아군이 가장 중점적으로 키운 포병이 포격을 날리는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투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치명적인 포격이 날라 온다. 프로이센군의 장점은 끝까지 싸운다 였고, 패잔병들이 모여 끝까지 싸웠지만, 이 포격에 궤멸되어 버린다.

3.5. 오스트리아 기병의 돌격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모리츠 분대를 격파하고, 프로이센 후방으로 접근하였으나, 자이틀리츠의 기병대가 순식간에 오스트리아 기병을 격파하였고, 전선으로 나가려고 하였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이 막았다. 이 열세인 상황에서 자이틀리츠마저 전사해버리면, 프로이센군의 수뇌부가 완전히 궤멸해버리기 때문에, 돌격을 막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랑겐 부대가 방벽에서 오는 오스트리아 부대를 향해 계속 사격을 진행하며, 전선이 파도에 쓸리는 것을 막는데 성공한다.

3.6. 프로이센의 마지막 반격

제정신으로 돌아온 프리드리히 대왕은 시가전을 하지 말고 나오라며, 군을 재정비하였고, 호크키르히 마을 한 쪽 끝으로 몰고 가서, 병력을 모아 최대의 방어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의 병력이 아니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이 더 이상 전투가 진행되는 것은 무의미하고, 무리라고 판단하며, 철수를 결정하였다. 철수를 하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이틀리츠에게 엄호를 부탁한다.

4. 결과

새벽 5시에 시작한 호크키르히 전투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10시에 후퇴를 결정하며, 무려 5시간이 진행되었고,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9,100명에 대포 101문을 상실했으며,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7,000명이었다. 또한 오스트리아군은 30개의 깃발과 102문의 야전 대포, 그리고 대부분의 프로이센 텐트와 야영용 가구들을 확보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이 효과적인 기습 작전을 시행할 만큼 발전했음을 인정하고 전장에서 65km 떨어진 보르첸 근처의 도비로 슈츠의 고지로 후퇴했다. 이렇게 해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콜린 전투에 이어 2번째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패배를 안겼으며, 해당 전투로 인해 프리드리히 대왕은 우울증에 빠지게 됐으며, 프리드리히가 가장 사랑하는 여동생인 빌헬미나가 병으로 인해 사망한다.

5. 이후

다운 백작의 휘하에 있는 군사들이 지속적으로 추격을 하자고 건의하자, 추격을 하려고 하였으나, 자이틀리츠가 이끄는 후위 부대를 보고 바로 포기한다.

S자로 길게 포진을 해둔 덕택에, 조그마한 호크키르히 마을에서 5시간 동안 전투를 진행할 수 있었으며, 다운의 군대가 프로이센군에 비해 3배였으나, 추격을 하지 않아, 욕을 많이 먹었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에서 보는 결과론적인 시각일 수 있으며, 당시의 다운은 이렇게 완벽한 기습을 했는데, 프로이센군이 전혀 무너지지 않았으며, 프로이센군이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였다. 보통, 질서 있게 후퇴를 하면 진격하는 속도보다 느려야 하지만, 프로이센군이 후퇴하는 속도가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속도보다 압도적으로 빨랐고, 추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1] 말을 찾아달라고 한 이유는 도망가겠다는 의미가 아닌, 지휘를 하기 위함이었으며, 그만큼 프로이센군에게 상황이 급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