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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너스도르프 전투


7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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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국-프로이센-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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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7월 23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프랑스-작센
라이헨바흐 전투
,1762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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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베르크 전투
,1762년 10월 29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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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쿠너스도르프 전투
Battle of Kunersdorf
Schlacht bei Kunersdorf
파일:Kunersdorff.jpg
<colbgcolor=#ABCDED,#0E0F37> 시기 1759년 8월 12일
장소

쿠너스도르프
교전국 <rowcolor=black>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
(공세)
프로이센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에른스트 기데온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표트르 백작
지휘관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프리드리히 대왕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자이틀리츠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svg 푸트카머
병력 연합군: 59,500명
- 러시아군: 18,500명
- 오스트리아군: 41,000명

대포: 250문
프로이센군: 49,900명
- 보병: 36,900명
- 기병: 13,000명

대포: 140문
피해 사상자: 15,700명 사상자: 18,000명 ↑
포로: 2,000명
대포: 178문
결과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의 승리
- 프로이센의 대부분의 지휘관의 전사 및 부상
-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대왕이 겪은 최악의 패배
- 연합군의 사후수습으로 인한 베를린 진격 실패
영향 란트슈트 전투 발발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
3.1. 전투 초반3.2. 대왕의 무리한 공세와 연합군의 반격3.3. 대왕, 자살을 고려하다
4. 결과

[clearfix]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8월 12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쿠너스도르프에서 프로이센군과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프로이센군의 대패로 끝난 이 전투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겪은 가장 큰 패배였으며, 프로이센은 멸망 위기까지 몰렸다.

2. 배경

1758년 8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혈전을 치른 끝에 가까스로 격퇴한 뒤, 작센으로 침입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기 위해 진군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 지휘관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바우젠 근처로 철수해 프로이센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런 그와 일전을 벌이길 희망했으나 다운 백작이 싸움에 응하지 않자 군대를 적의 진영과 가까운 호크키르히 마을 부근에 배치했다. 이에 부관들이 기습을 받을 수도 있다고 우려하자, 대왕은 다운 백작이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이라 기습을 감행할 리 없다며 무시했다. 그러나 앞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첫 패배를 안긴 바 있던 다운 백작은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 등 여러 장군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10월 14일 새벽 5시에 기습을 감행, 이를 예상치 못한 프로이센군에게 큰 피해를 안겼다. 이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9,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프로이센군은 전장에서 65km 떨어진 보르첸 근처의 도비르슈츠 고지로 후퇴했다. 대왕은 비록 괴멸적인 타격은 피했지만 보유 병력의 1/3을 잃어버렸고, 100여 문의 대포와 막대한 보급물자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나마 1758년 겨울, 영국으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은 덕분에 전력을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기는 했지만, 1759년 봄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이 일제히 프로이센을 향해 쳐들어오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먼저 러시아군 47,000명이 표트르 살티코프 백작의 지휘를 받으며 베를린을 향해 쳐들어왔다. 이에 베를린을 방어하고 있던 카를 하인리히 폰 베델 장군이 요격에 나섰으나 7월 23일 카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한편 프랑스군도 작센군과 연합하여 프로이센과 연합한 하노버를 침공했으나 8월 1일 민덴 전투에서 하노버-영국-헤센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다운 백작은 라우돈 남작에게 기병대 18,500명을 이끌고 신속하게 이동하여 러시아군과 합류하게 했다. 라우돈 남작은 이 명령을 받들어 신속히 이동해 8월 초에 러시아군과 합류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랑스 쪽은 하노버-영국 연합군이 잘 막아주고 있으니 내버려두고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섬멸하기로 결심, 50,000여 대군을 이끌고 출격했다. 이리하여 양군 총합 10만이 넘는 대규모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3.1. 전투 초반

1759년 8월 12일 새벽 3시, 프리드리히 대왕은 행진 명령을 내렸다. 그는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준 로이텐 전투에서 써먹었던 전술을 되풀이하기로 하고 뮐베르크에 일부 병력을 보내 적의 우익을 공격하는 시늉을 해 적의 시선을 우익에 쏠리게 한 뒤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적의 좌익을 공격하고자 했다. 하지만 숲이 워낙 울창했기 때문에 행진은 더디게 이뤄지다가 3시간 후에 마침내 숲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행군하는 바람에, 막상 그들이 도착한 곳은 러시아군의 측면이 아닌 중무장된 적의 전면이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프랑크푸르트에서 5km 떨어진 쿠네르스베르크에 숙영지를 세운 후 오데르 강의 상류 지점에 위치한 계곡 부근에 우익을 배치했다. 이 계곡은 시냇물이 가로지르고 습지가 많아서 적이 측면 공격을 가하기에는 부적절한 위치였기 때문에 측면 공격 전술에 능통한 프리드리히 대왕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기엔 어려웠다. 또한 좌익은 쿠네르스베르크에서 가장 가파른 높이의 주덴버그 언덕에 진을 쳤고, 중앙은 비교적 평탄한 그로스 스피츠버그 능선에 진형을 갖췄다. 러시아군은 진형 주변의 여러 둔덕에 포대를 설치했고 예비대를 후방에 배치했다.

이렇듯 요새화된 러시아군 진형을 발견한 프로이센군은 크게 놀랐다. 게다가 그들은 공격을 위해 군대를 배치할 공간을 살펴봤지만 주변 환경이 일련의 연못과 습지대로 가득해서 군대가 배치되기에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동요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은 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러시아군을 몰아내야 했다. 오전 10시, 프로이센군은 공세를 개시했다. 먼저 핀크 장군이 분견대를 이끌고 트레틴 고지를 공격해 적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 프로이센 주력군은 숲을 헤쳐 지나가며 적의 좌측면으로 극비리에 이동했다. 얼마 후 프로이센군의 첫번째 대대가 숲 가장자리에 나타나자, 살티코프는 단순한 분견대가 기습을 시도하려는 거라고 생각하고 몇 개의 보병대를 파견해 이들을 저지하게 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척탄병 6개 대대를 우익 앞에 2개 대열로 배치했다. 그리고 프로이센 기병대 전체가 좌익 뒤에 집결했고, 주요 프로이센 군단은 러시아 좌익 앞에 편성되었다.

11시 30분, 클라이츠버그에 설치된 프로이센 야전포대와 핀크 장군이 설치한 또다른 야전 포대가 예비 포격을 시작했다. 또한 세이들리츠베르크에는 제3의 프로이센 야전포대가 설치되고 있었다. 이들 3개의 야전포대가 제대로 화력을 퍼붓는다면, 종합 60문에 달하는 대포들이 러시아군이 주둔한 뮐베르크를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야전 포대 중 2개는 러시아 전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폭탄이 닿지 않았고 클라이츠버그의 야전포대는 적의 집중 포격을 받고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좌익에서만 약 100개의 야전 포병대를 구축해두고 있어서 애초부터 프로이센군의 포병대를 압도했다. 하지만 프로이센 포병대는 큰 피해를 입는 와중에도 끝까지 포격을 가해 아군을 엄호했고, 러시아군 보병대는 적의 포격에 아연실색해 상당수가 도주했다.

이윽고 12시 30분, 프리드리히 대왕은 묄베르크 언덕을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프로이센군 척탄병 8개 대대가 일제히 진군해 언덕 위로 기어올랐다. 이에 러시아군이 격렬하게 반격했지만, 프로이센군은 10분 동안 손실을 무릅쓰고 밀어붙여 마침내 언덕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프로이센 기병대를 투입시켜 도주하는 러시아 병사들을 사냥하게 했다면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지도 몰랐지만, 문제는 이 기병대가 좌익의 후방에 집결해 있어서 우익에서 거둔 이 성과를 뒷받침할 수 없었다. 또한 프로이센 경포들을 묄베르크 언덕으로 끌고 가는 것도 너무 오래 걸려서 적의 패주로 얻은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편 살티코프는 적이 자신의 좌익 일부를 돌파했고 병사들이 도주하고 있다는 소식에 급히 전선을 반전시키고 보병 및 포병대를 동원한 새로운 방어선을 조직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러시아군이 새로 정비된 방어선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는데다 지형이 습지대였기 때문에 신속한 기동이 불가능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양산했다.

3.2. 대왕의 무리한 공세와 연합군의 반격

오후 3시경, 대왕의 친동생인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왕자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 중장을 비롯한 많은 장군들은 대왕에게 병사들이 완전히 지쳤다면서 전투를 중지하고 다음날 전투를 재개하거나 철수할 것을 고려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떻게든 러시아군을 무찔러 국가를 수호하고 싶었던 그는 지금까지 거둔 성과가 보잘 것 없다고 여기고, 좌익 기병대에게 그로스 스피츠버그 능선에 있는 러시아군 야전포대를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자이틀리츠의 기병대가 진군을 개시했지만 러시아군의 격렬한 포격으로 진군이 제한된 데다 예비대로 물러서 있던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투입되어 이들의 진로를 저지하는 바람에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최전방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자이틀리츠 중장이 부상을 입고 말았다. 이에 프로이센 기병대는 혼란에 빠졌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일부 분견대가 그들의 측면을 요격하자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자 프로이센 좌익 보병대는 패주하는 기병대를 엄호하는 한편 쿠너스도르프 마을로 진군해 일부 러시아군이 완강히 사수하고 있는 교회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을 장악하고 러시아군의 통신망을 끊었다. 그들은 계속 진격하여 스피츠버그를 공격했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우익을 손수 지휘해 쿠그룬드로 진군했다. 이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스스로 대대를 지휘했고, 피크 장군은 엘레스버그의 언덕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려 했다. 한편 살티코프 장군은 모든 병력을 스피츠버그 근처에 집중시켰다. 러시아 보병대는 이 좁은 지형에 4,5개 대열로 포진했다. 대왕은 어떻게든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쿠그룬드의 도로를 확보하려 했지만, 러시아군은 수적인 우위를 앞세워 거세게 몰아붙였다. 결국 프로이센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그 직후, 피크는 엘레스버그 언덕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몇몇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습격으로 우측면이 공격당하자 그의 군단을 퇴각시켰다.

오후 6시경, 그로스 스피츠버그 전선의 전투는 프로이센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프로이센 잔여 기병대가 재집결에 성공한 뒤 쿠너스도르프 남쪽의 호수를 넘어 그로스 스피츠버그의 러시아군 후방을 공격하려 했지만 러시아군 포병대가 그들에게 포격을 가하자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오스트리아, 러시아 기병대가 그로스 스피츠버그에 도착해 그때까지 공세를 펼치고 있던 프로이센 좌익 보병대를 덮쳤다. 이에 프로이센군 좌익은 붕괴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대열을 이탈하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3.3. 대왕, 자살을 고려하다

파일:img327.jpg

이제 프로이센군 좌익은 완전히 무너졌고, 프리드리히 대왕 본인도 작은 언덕에 고립되었다. 대왕은 퇴로를 확보하고자 그를 경호하고 있던 척탄병들을 투입시켰지만 그마저 실패했다. 급기야 그가 타고 있던 말 2필이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의 패배는 곧 베를린이 함락되고, 프로이센 왕국이 멸망하는 것임을 의미한다고 여겨 큰 절망에 빠졌고, 언덕에 칼을 꽂은 채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바로 그때, 기병대 200명이 달려와 프리드리히 대왕을 말에 싣고 퇴각했고, 덕분에 대왕은 목숨을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 오데르 다리에 이르렀을 때, 대왕은 3,000명 밖에 안되는 병사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그는 수도 베를린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전투가 끝날 무렵 나는 적에게 포획될 위험에 처했고 퇴각을 결심해야했소. 내 코트는 총탄에 의해 구멍이 났고, 내가 타던 말 두필은 적의 총탄에 의해 죽고 말았다오. (중략) 우리의 패배는 끔찍할 정도요. 나에게 남아있는 병력은 48,000 중 3,000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우리 모두는 퇴각을 위해 걸음을 서두르고 있소. 나는 더 이상 내 군대의 지휘관이 아니요. (중략) 이 잔인한 실패로 인해 나는 살아남지 못할 것 같소. 전투의 결과는 전투 그 자체보다 끔찍하다오. 나는 재기를 위한 그 어떤 수단도 가지지 못하고 있소. 왜냐하면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이오. 나는 내 조국의 파멸로 인해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영원한 작별을!

그나마 다행히 흩어졌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돌아오면서 30,000명 가량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상황이 암울한 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후 대왕은 베를린으로 귀환해 적의 침략에 대비하기로 했다.

4. 결과

쿠너스도르프 전투는 프로이센군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그들은 이 전투에서 18,000명 이상의 사상자와 2,000명의 포로, 178문의 대포를 잃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대왕을 충실히 따른 자이틀리츠, 웨델, 핀크, 훌센 등은 부상당했고 푸트카머 장군은 전사했다. 반면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15,7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참패에 완전히 의기소침했고, 한동안 자신의 지휘권을 포기하거나 아예 퇴위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 완승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으로 곧바로 진군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 역시 막대한 손실을 입어서 사후수습이 오래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고, 러시아군은 만성적인 물자 부족 때문에 베를린까지 가기가 빠듯했다. 결국 러시아군은 더이상 진군하지 않고 행군을 멈췄고, 오스트리아군의 총사령관 다운 백작은 소규모 병력을 파견해 프로이센 본국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동생 하인리히 왕자에게 패한 뒤 당분간 프로이센 본토를 노리지 않았다.[1] 덕분에 전력을 추스를 기회가 주어진 프로이센은 이듬해 봄에 반격을 시도하면서 란트슈트 전투가 발발한다.
[1] 대신 그는 작센에 고립된 14,000명의 프로이센군을 막센 전투에서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