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15 18:40:18

주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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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파견된 최초의 외국인 가톨릭 사제
복자 주문모 야고보
周文謨 | Zhōu Wénmó
파일:주문모 야고보.jpg
주문모 신부의 초상화[1]
본명 주문모()
출생 1752년
청나라 소주부 곤산현
사망 1801년 5월 31일
한성부 서부 용산방 새남터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 새남터성지)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종교 가톨릭
사인 참수형 & 군문효수형
직업 사제
세례명 야고보
시복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1. 개요2. 생애3. 조선 선교 활동4. 밀고와 도주5. 다시 한번 오는 기회6. 순교7. 시복8. 기타

1. 개요

청나라 출신의 가톨릭 사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이다.

당시 조선에서 신앙 생활을 이어가던 신자들은, 복자 윤유일 바오로[2]의 활약으로 청나라 교구에 사제 파견을 요청했고, 그에 대한 화답으로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었다.

2. 생애

1752년 청나라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쿤산현(崑山縣)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7세에 어머니를 잃고 8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고모 슬하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과거를 보았으나 계속 낙방하자 20살 때 결혼하였다. 3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지내다가 늦은 나이에 북경교구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3. 조선 선교 활동

동양인인 주문모 신부는 윤유일 바오로의 인도 아래 무사히 조선에 입국[3]하여 포교활동을 하기 위해 최인길 마티아[4]의 집에서 거점을 마련한다.

이와 같은 조건은 한양의 고위 계층들에게 포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으며, 정약종과 같은 남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진산 사건등으로 신해 박해까지 벌어져, 서양 문물에 부정적 견해를 가지던 정조에게는 한양내로 확대되는 천주교를 지켜볼 수 없었다.

4. 밀고와 도주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5]로 순식간에 관계자들이 모두 위험해지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최인길 마티아가 청나라 사람처럼 주문모로 위장하여 시간을 벌었고, 주문모는 당시 조선 천주교인 여회장이었던 강완숙 골롬바[6]의 집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는 모두 순교한다. 이를 을묘박해 라고 부른다.

5. 다시 한번 오는 기회

강완숙 골롬바에 의해 재정비한 조선 천주교는 다시 한번 포교활동에 나섰으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신유박해가톨릭/대한민국 통해 자세히 볼 수 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 천주교인을 4,000명에서 1만명으로 교세를 늘리는 큰 활약#을 하게 된다. 특히 조선 정계에 진출한 남인 정치인에게 많이 포교 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순조의 즉위와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6. 순교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조선의 천주교 박해
정조 15년
(1791년)
순조 1년
(1801년)
헌종 5년
(1839년)
헌종 12년
(1846년)
고종 3년
(1866년)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정약종의 무부무군(無父無君) 사건이 터지며, 조선 천주교에는 박해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를 신유박해라고 부르며, 강완숙 골롬바는 주문모 신부의 신변을 보고하기 위해, 황해도의 바닷길을 이용하여, 주문모 신부를 청나라로 피신시키려 한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피신할 바에는 자수하고자 황해도까지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온다.[7]

조선 조정과 정순왕후 김씨는 청나라인 이자, 사학쟁이인 주문모 신부의 처우를 놓고 고심하게 되나, 결국 제주도 사람으로 위장(!)하여 사형을 내리게 된다.

이에 주문모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써 순교하였다.

7. 시복

그 후 많은 박해를 딛고 버틴 한국 천주교회는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시성식을 무사히 마쳤다. 이후에 기회를 보던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 프란치스코방한과 함께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시복식을 무사히 치름으로써, 주문모 신부는 복자품에 올랐다.

8. 기타

가톨릭평화방송의 드라마 "순교자 강완숙" 에선 차광수가 주문모 신부로 연기했다.

2025년 영화 지충일기에서는 이효겸이 연기했다.

조선에 파견된 최초의 외국인 가톨릭 사제 임에도 불구하고 개인 문서는 여러 선교자들 보다 늦게 작성되었다.
[1] 가화동 성당 공동 주보에 대한 초상화[2]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에 포함되었으며, 당시 역관이었다.[3] 엥베르 주교와 같은 서양인들은 외모가 서양인이라 조선입국부터 애를 먹어야 했다. 그래서 보통 서양인 신부들은 밤에 압록강을 넘거나, 배를 타고 밀입국해야 했다.[4]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에 포함되었으며, 윤유일 바오로 처럼 역관이었다.[5] 이벽의 동생 이석이 가문의 풍비박산 원인을 천주교로 생각했기 때문에 한영익을 통해서 조선 천주교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6]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에 포함되었다.[7] 이때의 모습이 베드로의 순교와 흡사하다고 생각되었는지, 2차 창작에선 쿠오 바디스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