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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루스벤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3대 루스벤 경
패트릭 루스벤
Patrick Ruthven, 3rd Lord Ruthven
성명 패트릭 루스벤
Patrick Ruthven
출생 1520년
스코틀랜드 왕국
사망 1566년 6월 13일 (향년 45~46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배우자 자넷 더글러스, 자넷 스튜어트
자녀 윌리엄, 존, 진
아버지 제3대 루스벤 경 윌리엄 루스벤
어머니 디를턴의 자넷 핼리버튼
직위 제3대 루스벤 경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정치인, 군인. 거친 구혼 시기에 잉글랜드군을 지원했고, 스코틀랜드 개신교 봉기 시기엔 개신교 영주 편에 섰다. 이후 메리 여왕의 신임을 받던 궁정 음악가 다비드 리치오 암살을 주동했다가 잉글랜드로 망명한 뒤 그곳에서 사망했다.

2. 생애

제2대 루스벤 경 윌리엄 루스벤과 디를턴 성의 상속녀 자넷 핼리버튼의 아들이다. 거친 구혼 시기, 패트릭은 잉글랜드군의 편에 섰다. 1548년, 잉글랜드군 사령관 윌리엄 그레이는 패트릭이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판금 갑옷을 입은 하인들과 함께 잉글랜드군이 점령한 예스터 성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아버지가 퍼스의 시장인 점을 이용해 잉글랜드군 사령관인 앤드류 더들리에게 넘겨주고, 그 대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이 거래는 실제로 시행되지 못했다.

1559년 스코틀랜드에서 개신교 영주들이 마리 드 기즈 왕대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개신교 신자였던 패트릭은 이에 가담했다. 1560년 잉글랜드군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협력하는 것을 보장하겠다는 베릭 조약에 서명했고, 아들을 잉글랜드에 인질로 보냈다. 이때 패트릭은 헌팅타워 성에서 잉글랜드 재상 윌리엄 세실에 서신을 보내, 에드워드 6세 치세 때 잉글랜드에서 서로 교제했던 걸 상기시키고, 세실이 "과거보다 더 큰 우호 관계 속에서 이 영역들의 연합을 발표"한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1560년 5월 12일, 반란군 영주 대표들과 함께 에든버러 성에서 마리 드 기즈 왕대비와 회동한 그는 다른 이들보다 모든 면에서 더욱 완고한 태도를 보여 마리를 압박했다.

마리 왕대비가 사망하고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에서 전원 철수한 뒤, 패트릭 루스벤은 스코틀랜드 내 대표적인 개신교 영주로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도 메리 여왕에게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1563년 6월, 스코틀랜드 주재 잉글랜드 대사 토머스 랜돌프는 메리 여왕과 종교적으로 맞지 않는 데다 지난날 어머니에게 가장 강경하게 맞섰던 패트릭이 윌리엄 메이틀랜드의 요청으로 메리 여왕의 추밀원에 합류한 건 놀라운 일이라고 보고했다. 1565년, 그는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메리 여왕의 결혼을 지지한 소수의 귀족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출신의 궁정 음악가 다비드 리치오가 메리 여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신하들이 여왕과 접촉하는 걸 통제하는 등 강력한 권세를 누리자, 패트릭을 비롯한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이 질투심과 적의를 동시에 품었다. 결국 그는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 등과 함께 다비드 리치오를 암살할 음모를 꾸몄고, 리치오와 메리 여왕의 불륜을 강하게 의심하던 단리 경으로부터 협조 약속을 받아냈다.

1566년 3월 9일 토요일 저녁, 다비드 리치오는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의 여왕 만찬실에서 메리 여왕, 아가일 백작부인 진 스튜어트, 크레이크의 로버트 비튼, 아서 어스킨과 함께 만찬회를 가졌다. 그러던 중 패트릭이 이끄는 개신교 귀족들이 궁전에 난입했고, 단리 경은 이들과 함께하면서 근위대가 침입자들을 저지하지 않도록 막아줬다. 그 후 침입자들은 만찬장에 난입해 메리 여왕에게 리치오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여왕은 단호히 거부했고, 리치오는 메리 뒤에 숨었다가 나중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며 여왕의 옷을 움켜쥐었다. 훗날 메리 여왕은 침입자 중 한 명인 패트릭 벨레든이 임신한 자신의 배에 총을 겨눴고, 팔돈사이드의 앤드류 커가 자신을 찌르겠다고 위협했다고 주장했지만, 패트릭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짧지만 격렬한 몸싸움 후, 리치오는 강제로 끌려가서 침실을 지나 인접한 접견실 또는 외홀로 끌려가 침입자들에게 단검에 57번이나 찔려 살해당했다. 그의 시신은 근처의 주 계단으로 던져졌고, 보석과 고급 옷은 벗겨졌다. 여왕과 리치오의 비명이 궁전 밖에 울려 퍼지자, 에든버러 시민 수백 명이 여왕을 구하기 위해 즉각 무기를 들고 홀리루드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여왕은 공모자들에게 협박당했기에 창가로 가서 시민들에게 자기는 건재하니 이만 돌아가라고 권해야 했다.

리치오가 살해된 직후, 메리 여왕은 단리 경과 단둘이서 만난 뒤 그들이 모두 위험에 처해 있으며, 암살을 주도한 자들에게 궁전의 포로로 있게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단리 경은 이에 동의했고, 경비병들이 느슨해진 틈을 타 살인이 벌어진 다음 날 자정에 궁궐에서 탈출하여 던바 성으로 피신했다. 그 후 메리 여왕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제5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의 협력으로 8천 병력을 거느리고 에든버러로 진격했고, 패트릭 등 암살을 주도한 자들은 잉글랜드로 도주했다.

1566년 4월 2일, 패트릭과 모튼 백작은 다비드 리치오의 살인에 대한 증언을 잉글랜드 국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내, 다비드 리치오를 죽인 건 국가와 종교를 위한 최선의 길이었으며, 단리 경도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6월 13일, 그는 런던에서 사망했다. 메리 여왕의 비서 클로드 노 부아셀리에르[1]는 패트릭이 천국에 대한 거짓 환상을 떠올리게 한 악령에게 속은 채 죽었다고 기록했다.

3. 가족

  • 자넷 더글러스(? ~ 1552):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사생아.
    • 진 루스벤: 제2대 메스벤 경이며 계모 자넷 스튜어트가 초대 메스벤 경 헨리 스튜어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헨리 스튜어트의 부인.
    • 윌리엄 루스벤(1541 ~ 1584): 초대 고우리 백작. 계모 자넷 스튜어트가 초대 메스벤 경 헨리 스튜어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도로시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1582년 9월 22일 또는 23일에 자기 성인 헌팅타워 성(당시엔 루스벤 성)에 머물던 15세의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를 납치해 1583년 6월 27일 왕이 세인트앤드루스 성에서 탈출할 때까지 구금하면서 스코틀랜드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제임스 6세가 탈출한 후 왕의 명령을 받든 윌리엄 스튜어트 대령에 의해 체포되었고, 1584년 5월 3일 반역 혐의로 스털링에서 처형당했다.
  • 자넷 스튜어트: 제2대 아솔 백작 존 스튜어트의 딸이자 초대 메스벤 경 헨리 스튜어트의 미망인.

[1] Claude Nau de la Boisseliere, ? ~ 1605, 메리 여왕의 편지를 암호화해 그녀의 추종자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지만, 베빙턴 음모 사건 때 체포된 뒤 수사관들에게 모든 걸 불면서 메리를 배신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