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 ul-Funun دارالفنون 이란공과대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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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보 | ||
<colbgcolor=#fff><colcolor=#000> 개교 | <colbgcolor=#fff>1851년 | |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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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국립대학 | |
소재 | 테헤란 | |
위치 | ||
1. 역사
나스레딘 샤가 재위 중인 1851년 아미르 카비르 재상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대학은 프랑스의 에콜 폴리테크니크[1], 미국의 텍사스 A&M 대학교, 퍼듀 대학교와 설립 목적이 유사하다[2].이 대학은 한 때 혼란한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부침을 겪기도 하였으나 지속하여 규모를 확장하였으며, 팔라비 왕조 시기인 1934년 오늘날의 테헤란 대학교로 재개교하였다[3]. 테헤란 대학교가 처음부터 종합 국립대학인 반면, 이란공과대학은 의과대학과 이공계열 전공만 개설된 단과대학이라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이란공과대학의 표어(Motto)는 'توانا بود هرکه دانا بود ز دانش دل پیر برنا بود', 즉 '지식을 가진 자는 강하며, 지식으로 인해 늙은 마음도 다시 젊어진다.'이다. 당대 카자르 왕조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시대를 앞섰다고 볼 수 있다.
2. 개설 전공
3. 주요 동문
- 세디케 도라타바디(Sediqeh Dowlatabadi): 이란의 저명한 여성운동가.
- 아흐마드 칸 다리아비기(Ahmad Khan Daryabeigi): 이란 해군의 사령관. 카자르 왕조 시기의 해군 장교로서 페르세폴리스함장을 역임했다.
4. 주요 교수진
- 장 밥티스트 르메르(Alfred Jean Baptiste Lemaire): 이란 역사상 최초의 국가(國歌)인 샤의 행복을 작곡했다.
5. 여담
- 이란공과대학에서는 1891년 기준 누적 1,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4].
- 의학부는 1851년 개교 직후부터 존재했다. 즉, 테헤란 대학교의 의과대학은 1851년부터 이란의 역사와 함께 했다고 볼 수 있다.
- 팔라비 왕조 시기인 1930년에는 재정적 기부금이 3만 토만으로 확충되었다[5].
- 카자르 왕조 시기의 이란에서는 여성에 대한 억압적 분위기가 현대 이란보다 훨씬 심각했음에도 이 곳에서 세디케 도라타바디를 비롯한 여성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는 카자르 왕조 시대나 지금이나 이란의 여성들이 중동 타 국가의 여성들보다 교육열이 높다는 사실을 방증한다[6].
- 오스만 제국에서도 오늘날 이스탄불 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다륄퓌눈(Darülfünun)'이 존재했다. 다륄퓌눈 역시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이후 이스탄불 대학교가 되었다. 이 쪽은 1453년을 연원으로 하고 있다.
[1] 이 쪽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육군에서 기술병과 장교를 육성하는 성격이 강하다.[2] 미국의 버지니아 군사대학 역시 장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에 해당한다.[3] 즉, 이 대학은 테헤란 대학교의 전신인 것이다.[4] 경제력이 훨씬 약했던 카자르 왕조 시대를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정도면 대학 졸업자를 꽤 많이 낸 것이라고 봐도 된다. 당시에는 이란의 적수였던 러시아 제국 역시 제국대학 졸업자가 많지 않았는데, 그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처럼 대학을 중퇴한 사람도 나름대로 엘리트 대접을 받았다.[5] 카자르 왕조 시기 및 1932년 이전의 이란에서는 지금의 리알이 아닌 토만을 화폐 단위로 사용하였다.[6] 지금도 이란의 수능 시험인 콩쿠르에서는 여고생들이 수석을 차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