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30 00:14:08

육군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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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신식군대의 장교 육성 역사
2.1. 별기군(1881년)2.2. 연무공원(1888년)2.3. 조선군 훈련대 사관양성소(1895년)2.4. 무관학교(1896년)2.5. 육군무관학교(1898년)
3. 교육 과정4. 역대 졸업자 명단5.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입장6. 동문7. 여담

1. 개요

陸軍武官學校. 대한제국에서 신식 군대의 장교를 교육하던 양성 기관. 사관학교이다. 대한제국 육군의 장교를 공급했다.[1] 임시 정부 같은 경우에도 육군무관학교를 두긴 했다.

통제영학당을 대한 제국의 해군사관학교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통제영학당은 근대적인 사관 양성 학교이긴 했지만 1893년에 생겨 1894년에 사라졌으므로 대한제국 해군의 사관학교는 아니었다. 즉, 대한제국에 해군사관학교는 없었다.[2]

2. 신식군대의 장교 육성 역사

2.1. 별기군(1881년)

1881년 창설된 별기군의 교관이었던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3]는 장교 양성을 위해 사관 생도대를 설치할 것을 조선 왕실에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881년 9월 양반 자제들을 대상으로 사관생도를 모집하기 시작하였으며, 1882년 2월 즈음에는 140명의 사관생도가 교육 중이었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일어난 구식군의 저항인 임오군란으로 사관생도대는 해체된다.
파일:조선 말 별기군.png
청일전쟁(1894) 전후 조선군 모습, 출처 : 르 몽드 일뤼스트레 1894년

2.2. 연무공원(1888년)

1883년 조미 수호 조약에 의거 조선 정부는 미국에 군사 교관 파견을 요청했지만 당시에는 청나라일본의 군대가 한반도에 주둔 중이었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고, 1886년 톈진 조약으로 양 군이 물러가자 1888년 미국은 윌리엄 다이(William McEntyre Dye) 준장[4] 등 4인의 퇴역 장교로 구성된 군사 교관단을 파견하였다. 다만 이들 중에 다이 준장만이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커민즈 대령과 닌스테드 대령, 리 소령[5]은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파일:external/image2.findagrave.com/9743647_137444135782.jpg
윌리엄 다이 준장. 이집트군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턴 DC에서 경찰청장으로 일했는데 1888년 셰리던 장군이 그를 고종에게 교관으로 추천했다.

조선 정부에서는 교관들이 입국하자 연무공원(鍊武公院)을 설치하여 다시 사관생도를 모집하고 훈련을 시작하였는데, 문제는 근대식 편제 및 장교 계급 체계에 정부 각료와 조선군 내에서 일본식이라며 도입에 거부감을 보인 것이다. 근대식 군대 체계가 갑신정변을 이끈 급진개화파들이 일본을 통해 주도적으로 들여온 제도다 보니 갑신정변의 여파로 조선에서 도입을 꺼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연무 공원은 1894년에 일본군청일전쟁 중에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폐지된다. 다만 다이는 1899년까지 고종의 측근에서 군사 업무를 보좌했고 그 해에 미국으로 돌아가 죽었다.

1887년 12월 25일 승정원일기에 연무공원의 개설 사실이 있다. 이듬해인 1888년에 열린다.
○ 전교하기를,
“군사와 관련된 대비는 나라의 중요한 임무로써 또한 형식적으로 하거나 천천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군복을 입은 군사들이 반드시 먼저 무술을 익숙히 한 뒤에야 대오를 정비하고 군대의 위용을 엄하게 할 수 있다. 지난번에 추천한 사람들이 이제 일과(日課)를 정하여 훈련하게 되었으니, 연습 장소를 ‘연무공원(鍊武公院)’이라 부르고, 제반 실행해야 할 규정들은 내무부에서 토의 확정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1889년 2월 1일 승정원일기에 연무공원의 학도 기록이 남아 있다.
○ 또 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의 말로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연무공원 학도(鍊武公院學徒)인 훈련원 첨정 윤경근(尹景根), 선전관 백명기(白命基)ㆍ이병무(李秉武), 출신 한장렬(韓章烈)ㆍ권승필(權承弼)ㆍ박제범(朴齊範)ㆍ송재현(宋在顯)ㆍ김진우(金鎭宇)ㆍ김재영(金在溁), 사용 신덕성(愼德晟), 부사용 김동진(金東振), 한량 이범래(李範來)ㆍ이문환(李文桓)을 모두 본영의 초관(哨官)으로 차하(差下)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뒷날 친일파로 유명해지는 이병무도 연무공원의 학도였다.

1890년 윤2월 26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윌리엄 다이에게 2품 병조참판, 닌스테드에겐 3품 병조참의 직함을 내렸다.
○ 민종식에게 전교하기를,
“연무공원(鍊武公院) 및 통위영, 장위영의 조련이 이미 효과를 거두고 있으니, 교사(敎師)의 여러 해 동안의 노고가 가상하다. 다이[茶伊;Dye, William M.]에게는 특별히 2품의 병조 참판 직함을 더해 주고, 닌스테드[仁是德;Neinstead, F.H.]에게는 특별히 3품의 병조 참의 직함을 더해 주어 조정에서 우대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여주라.”
하였다.

연무공원의 교관들은 통제영학당과 비슷한 업무 과다에 시달렸다. 장교 양성 뿐만 아니라 사병 교육까지 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연무공원 졸업자는 다시 무과를 치러야 무관이 될 수 있었다. 무과의 커트라인이 상대적으로 낮긴 했지만 부담이 있었다. [6]

2.3. 조선군 훈련대 사관양성소(1895년)

연무 공원이 해체되면서 남은 것은 훈련대의 사관 양성소 뿐이었다. 청일 전쟁 중에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기 위해 한성에 주둔하던 친군영과 교전을 벌여 무장을 해제시켰다. 그 후 김홍집 내각을 세워 갑오개혁을 실시하고 일본군 주도하에 새로 군을 편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훈련대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Kusunose_Yukihiko_ca.1913.jpg
훈련대는 일본군 중령 쿠스노세 유키히코(楠瀬 幸彦, 1858년 - 1927년)[7]를 교관으로 두었다. 일본식 교육 제도로 훈련대는 기존의 3군영에서 인원을 징발하여 훈련을 시켰는데 1895년 말까지 6개 대대 7,800명 규모의 상비군을 두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까지는 못 가고 을미사변으로 폐지된다.
○ 군부 주사(軍部主事) 4등에 채장묵(蔡章默), 군무국 마정과원(軍務局馬政課員)에 윤철규(尹喆圭), 겸임 훈련대사관양성소장(兼任訓鍊隊士官養成所長) 2등에 유돈수(柳敦秀), 부관(副官) 5등에 윤철규(尹喆圭)를 임용하였다.
승정원일기 1895-05-20

2.4. 무관학교(1896년)

파일:대한제국_무관학교_장교와_생도의_기념사진.jpg
1896년 무관학교 졸업 기념 사진[8][9][10]
1896년 1월 11일에야 육군무관학교의 전신 무관학교가 세워진다. 사실 대한제국군이란 이름은 아직 아니었지만 일단 신식군의 장교를 양성한다. 아관파천이 일어나 한동안은 유명무실했지만 고종이 환궁한 뒤에 타군의 개입을 받지 않도록 운영한다. 비록 러일전쟁으로 곧 실패하지만 말이다. 이 무관학교는 다섯 명을 임관시켰다. 사관생도는 무관학도라 불렸다.

이 무관학교는 조선군 훈련대의 무관양성소를 대체하는 친일내각이 만들었기 때문에 아래의 육군무관학교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 교관들이 일본인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잠시 운영이 중단되었다가 4월에 입학생 100명을 받아들이고 교두는 참령 이병무가 맡았다. 하지만 곧 이병무는 친위대 제4대대와 제5대대 교련을 맡는다.

1897년 5월 기준 임관자는 19명인데 이름이 전하는 인원은 5명으로 박승환, 민중식(閔仲植), 사재흡(舍在洽), 주시준(周時駿), 황태수(黃台秀)이다.

위치는 경운궁이었다. 일본사관으로 처음에 훈련했으나 이후에 러시아교관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1896년 10월 푸챠타 대령과 러시아교관단이 도착했다.

2.5. 육군무관학교(1898년)

1898년에 정비하여 육군무관학교란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교직원 숫자는 교장 1인에 교관 4명, 조교 10명, 번역관 및 주사 등으로 총 20명 수준으로 사관학교라기엔 다소 작은 규모였다. 1898년 6월에 1기 200명을 모집했는데 1,700명이 지원하였다. 입교일은 다들 며칠씩 차이가 났는데 1기의 임관일이 1900년 1월 19일로 정해진 걸 볼 때 1년 6개월 정도의 교육 기간으로 현재의 3사관학교보다 짧았다.

1899년 11월엔 다시 법령이 바뀌어 교직원이 39명으로 늘어났으며 응시 연령도 낮아졌다. 그리고 현재의 생도대에 준하는 학도대(學徒隊)를 설치하였다. 1900년 1월 19일에 장연창 등 128명의 무관 학교 1기가 졸업 시험을 통과하여 참위로 임관하였다.

1900년 9월에는 다시 관제를 개정하여 교직원을 70명으로 늘렸으며 학도대 밑에 중대 몇 개를 추가해 인원을 늘릴 것을 시사했다. 오늘날의 교육을 맡은 교수부와 훈육을 맡은 생도대처럼 무관 학교의 교육 체계를 교관단과 학도대로 이원화하였다. 교장도 초기에는 영관급이 맡았으나 이 즈음에 가서는 참장[11]까지 상승한다. 다만 국운이 흔들리는 탓인지 무관학교를 이탈하는 인원도 자주 나와 1900년 9월엔 학도 집단 이탈로 학교장 대리인 백성기 참장, 학도대장 이희두 참령, 학도대 중대장 신우균, 민영재, 조의범 정위, 당직 사관 김성계 참위 등이 직위 해제되었다.
파일:별기군 군사훈련.png
훈련 중인 대한제국군[12]

1909년 폐지될 때까지 28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기록에 따라서는 500명을 배출했다는 곳도 있다.[13] 이 중 14명은 한일합방 당시에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다.

1902년 1월 11일과 7월 6일에 대한제국 육군에선 각각 92명[14]과 207명[15]의 신규 참위를 임용하였다. 이들을 합치면 299명인데, 이때 임용되었던 장교 노덕세 등의 기록에는 이 임용을 육군무관학교 졸업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해당 임관 사례에 대해서 좀 더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황태연의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에 따르면 1902년의 이 임관자들은 2회 입학자 중에 1년 3개월 속성과(94명)와 제2과 속성과(209명)였다고 한다. 이들은 1902년에 임관했고 1903년 6월에 180명만이 졸업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나머지 인원은 1904년 3월에 45명이 임관했다.

3. 교육 과정

대한제국군 밑에는 교육 기관으로 육군무관학교, 육군유년학교, 육군연성학교 등이 있었다.[16] 무관학교는 양성 교육을 담당했고 유년학교는 일종의 JROTC 같은 예비 학교였으며 연성학교는 장교나 부사관의 보수 교육을 담당했다. 국방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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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월 훈련대가 폐지되면서 장교 양성 기능은 1896년 11월 11일에 육군무관학교로 넘어갔다. 학도는 18세에서 27세 사이의 청년을 천거(추천)로 선발했다. 교육부가 1904년 2월에 세워지자 교육부의 지휘를 받았으며 이듬해 2월에 교육부가 폐지되자 군부에서 지휘 감독했다. 교육 기간은 6개월에서 1년.

1904년에 육군유년학교가 생기면서 유년학교를 거쳐 무관학교에 들어온 경우는 6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초기에는 한국어로 된 교재가 없어 외국어로 공부했으며 전술학과 화기학, 학술학[17]을 가르쳤다.

교과 과정에 있어서는 무관학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외국어 교육이 전체교육 시간의 42%에 달했고, 전술학은 그 절반에 못 미치는 18%를 차지했다. 근대적 군사학 교재들이 거의 외국어로 쓰여 있었고,당시 근대화에 힘쓰던 조선정부의 개혁 과제 시행을 위해 정치적으로 중요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재의 확보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관학교에서는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의 과목을 중시했다. 원어민 교사를 구해서 생도를 가르쳤으며 어학 능력이 우수한 생도 40명에게는 특별히 하루 1시간 추가 수업의 기회를 주었다.
출처: 국경의 동요―20세기 초 미국의 동양인 이민자 박룡학 연구

4. 역대 졸업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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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입장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는 공식적으로 무관학교를 자교의 전신으로 주장하고 있지 않다. 식민 통치로 단절된 기간으로 인해 육군무관학교 육사의 형성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는 육군사관학교 30년사와 50년사에 공통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육사 21기 출신의 예비역 대령 조승옥은 저서 <육군사관학교: 그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에서 육사의 이러한 주장을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길러낸 인재들은 다시 한국광복군독립군의 군인들을 길러냈으며 그들이 다시 창군기의 인물들을 배출하였다는 것이다. 동시에 무관학교의 마지막 졸업생들 중에서 국군에 재입대한 10명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육사와 무관학교는 연결점이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이 때문에 조승옥 대령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정통성을 연무공원에서부터 소급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중 김경천, 지청천, 신팔균[18]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참가하여 독립군양성에 활약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나중에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국군과 대한제국군의 연결성을 찾을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19]

​우리나라 청년들이 한일합방 이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처음 입교한 것은 1912년(제 26기)이었으며 일제는 그 후 단속적으로 입교시키다가 중일전쟁 후 종전까지는 해마다 입교시켰다. 이들은 일본군 중위때 독립군에 가담한 11기의 노백린[20], 김희선 15기의 유동열[21], 이갑, 23기의 김경천[22], 26기의 지청천[23], 조철호 27기 이동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군으로 복무하다가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24]
제 11기[25] 윤치성[26], 노백린*[27], 김관현[28] 강용희[29], 권승록[30], 권호선[31], 김교선[32], 김규복[33], 김상설[34], 김성은[35], 김형섭[36], 김홍남[37], 김홍진[38], 김희선*[39], 방영주[40], 어담[41], 이기옥[42], 임재덕[43], 장인근[44], 장호익[45], 조택현[46]
제 15기 김기원[47], 김응선[48], 김기원[49], 남기창[50], 유동열*[51], 박영철[52], 박두영[53], 이갑*[54],전영헌[55]
제 23기 김경천*[56]
제 26기 이응준[57], 김준원[58], 신태영[59], 유승렬[60], 안병범[61], 홍사익[62], 이청천*[63], 박승훈[64], 이대영[65], 권영한[66], 민덕호[67],염창섭[68], 조철호*[69]
제 27기 김석원[70], 백홍석[71], 장석륜[72], 장성환, 박창하[73], 정훈[74], 윤상필[75], 유관희[76], 원용국[77], 김인욱[78], 김종식[79], 김중규[80], 남우현[81], 서정필[82], 이강우[83], 이동훈*[84], 이동혁*[85], 이희겸[86], 장기형[87], 장성식[88], 장유근[89]

하지만, 한국광복군 출신들은 1945년 9월부터 미군정의 정책에 불참하던 상태라 창군 작업에 관여하지 않았다.[90] 그래서 일본육군사관학교만주군관학교 출신자들이 창군 멤버가 되었는데, 이들을 미군정에 추천하여 선발한 것이 바로 이응준이다.(만군계는 최선임인 구만주군 원용덕 중령이 담당) 결국 창군의 대표적 주역 이응준[91]을 통해 대한제국군과 대한민국 육군이 연결된 셈이다. 당시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당국은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 제 28호를 공포하고 군정청내 국방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미군정당국은 1946년 1월 8일에는 사설군사단체의 해산을 명한 데 이어, 1월 14일에는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함으로써 군창설을 직접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광복 후, 국군 수뇌부는 한국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원로들로 구성되어있었다. 광복군 계열에서는 중국군 소장으로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92] 장군이 초대 국방부장관이 되었고 일본 육사 15기로 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 장군이 군정 때 초대 통위부장, 중국군 소장이었던 송호성 장군이 국방경비대 사령관[93]이 되었다.

일본군 계열에서는 일본육사 26기 출신인 이응준 장군이 군정청 군사고문을 거쳐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이어 채병덕, 신태영 장군이 참모총장, 국방장관을 맡았다. 만주군 계열에서는 원용덕 장군이 경비대 사령관을 역임하게 된다.

그러나 초대 국방부장관을 지냈던 이범석 장군은 자신이 광복군 출신이었고 국군의 육성에 있어 광복군의 정신을 계승토록 한다는 원칙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한다. 그리하여 초기 국군의 형성과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일본의 교육배경을 가진 일본군계 장교들이었다.

결국, 한국군은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들의 주도하에 기틀을 다지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미군 군사 고문이 자격으로 한국군 창설 작업에 직접 관여한 일본군 최선임이었던 이응준 대좌가 대표적이다. 미군정당시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는 일본군 출신 1명, 만주군 출신 1명, 광복군 출신 1명씩이 학생들을 추천하기로 했다. 일본군 최선임 자격으로 참가한 이응준 대좌는 이때 사위인 이형근 일본군 대위에게 군번 1번을 부여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통위부장에 육군무관학교 출신 유동열[94]을 추천하여 관철 시켰고, 이응준 본인은 대한민국 초대육군참모 총장이 되기도 하는등 창군의 실질적인 주역이 되었다.

6. 동문

7. 여담


역사비평 통권 136호 2021년 가을호에 실린 <국경의 동요 ―20세기 초 미국의 동양인 이민자 박룡학 연구>에 따르면, 베이징 태생의 중국인인 박룡학은 육군무관학교에 3년간 다녔다고 한다.[96] 박룡학의 부모는 북경의 상인으로 1892년에 가족과 조선으로 넘어왔다.

저자인 현명호는 박룡학이 입시 경쟁이 치열했던 1898년 입학(1회)은 아니고, 1900년(2회) 입학자로 추정한다. 추천서를 받아야 함에도 200명 모집에 1700명이 몰렸던 1회와 달리, 2회 모집 무렵에는 예산 부족으로 일부 학생에게 사비로 다니게 하는 등 좀 더 입학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런 불안한 배경 탓에 2회 생도들의 경우 1902년 1월에 대거 이탈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박룡학도 이 시기에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박룡학은 대한제국 여권을 갖고 미국을 방문했으며, 자신의 이름 표기도 한국 한자음에 기반해 적었다.[97] 미국측 자료에 따르면 박룡학은 중국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으며 조사자들에게 한국인처럼 보였단 점에서 오늘날의 구화교[98]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1] 당시 무관학교만으로는 초급 장교 수요가 감당이 되지 않아, 특별임관도 자주 있었다. 승정원일기의 임용 내용을 찾아보면 무관학교 출신이 아닌 장교들의 임용이 자주 있다.[2] 1900년 3월 22일 관보에 실린 원수부 관제 개정안에 따르면 해군대학교의 설립 자체 목표는 있었으나 1904년 이후 무산되었다.[3] 고종 실록에도 등장한다. 高宗 18卷, 18年(1881 辛巳 / 청 광서(光緖) 7年) 6月 20日(庚戌) 2번째 기사 일본인 호리모도 레이조가 우리 군사들의 교사가 된 것을 일본 외무성에 통지할 것을 윤허하다 統理機務衙門啓: “日本敎師堀本禮造, 向因公使所懇, 方留敎場, 鍊習兵士, 而此合有往復於該國外務省。 請撰出書契, 下送萊館。” 允之。[4] 1831년 - 1899. 남북 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했고 미군을 전역한 뒤에 이집트군에서 대령을 지내기도 했다.[5] 주일 미국 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인물이었다.[6] 이때의 전훈 때문인지 뒤의 대한제국은 러시아식으로 다시 군대를 조련할 때 무관학교를 세워 사병들을 교육할 장교단을 초반에 양성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병력을 불려나갔다. 무인에 대한 기피도 군인에 대한 지속적인 급여 인상 등으로 돌파하려고 하였다. 다만 이 기간이 짧아서 고급 장교의 양성까지 이어지진 못했고 그탓에 군대 자체가 대대 이하의 작전수행능력만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7] 을미사변 연루자. 뒷날 초대 가라후토청 장관, 일본군 중장까지 지냈다. 육군대신, 즉 육군 장관을 맡기도 했다.[8] 1896년 7월 12일 촬영. 이 당시는 아직 칭제하기 전이었다.[9] 출처: 독립기념관[10] 사진에 약 140명 이상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졸업자가 5명임을 감안하면 졸업 사진이 아니 입학자 사진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11] 대한 제국군은 지금의 한국군처럼 장성급이 대 - 중 - 소 - 준 4단계가 아니라 정 - 부 - 참 3단계였다. 준장이 존재하지 않았다.[12] 1904년 서울 훈련원에서 유럽 교관에 의해 훈련받고 있는 한국군대라고 한다. 유럽인 교관은 프랑스 하얀 군모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프랑스 교관임을 알 수 있다. 훈련원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27에 있다.[13] 러일전쟁 후 일본의 간섭이 반영되기 전까지 졸업한 인원이 대략 280명대이다. 이후의 졸업자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운데, 이후 졸업자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는 282명이라 보고, 이후 졸업자를 포함한 곳에선 500명대라 보는 것으로 보인다. 1904년 1월 졸업방 이후에 폐교까지 5년이 넘게 학교가 운영되는데 이 시점의 졸업자 명단은 현재 찾기 어렵다.[14] 백명기(白命基), 심상희(沈相煕), 김사석(金思錫), 최진하(崔鎭夏), 남준희(南俊煕), 김동원(金東元), 남기석(南基奭), 장용석(張容奭), 오규영(吳奎泳), 최승학(崔承鶴), 이봉호(李鳳鎬), 한창리(韓昌履), 김종완(金鍾完), 이명규(李明奎), 백충기(白忠基), 권용중(權用重), 강필호(康弼祜), 홍승원(洪承遠), 김우현(金禹鉉), 최진영(崔鎭泳), 송우영(宋禹榮), 박희원(朴希元), 김형두(金炯斗), 김채욱(金采煜), 서병덕(徐丙德), 장규형(張圭炯), 김계환(金桂煥), 이응하(李應夏), 신순희(申舜煕), 김종호(金鍾浩), 최영석(崔榮奭), 김동은(金東殷), 조희용(趙煕庸), 이은로(李殷輅), 서병억(徐丙億), 오천묵(吳天默), 이범서(李範緖), 박태영(朴泰永), 조인순(趙藺淳), 유치남(兪致南), 심상렬(沈相烈), 김인배(金仁培), 이병하(李秉河), 이주태(李柱泰), 오승근(吳承根), 이호진(李浩鎭), 홍순정(洪淳正), 한인복(韓仁復), 김낙규(金洛圭), 최기환(崔琦煥), 조동성(趙東星), 정희찬(鄭煕燦), 박승준(朴勝俊), 이필상(李弼相), 김정현(金晶鉉), 정달진(丁達鎭), 윤원성(尹元成), 김정진(金貞鎭), 김흥종(金興鍾), 피병건(皮秉健), 김기승(金基昇), 이우승(李羽承), 태원엽(太源燁), 목우석(睦祐錫), 김광순(金光淳), 오희영(吳僖泳), 김중희(金重煕), 이세필(李世弼), 홍우록(洪祐祿), 조동겸(趙東謙), 백세기(白世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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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호(任昌鎬)ㆍ송정현(宋定顯)ㆍ정운홍(鄭雲鴻)ㆍ이종성(李鍾聲)ㆍ신난수(申蘭秀)ㆍ이민화(李敏和)ㆍ남태우(南泰祐)ㆍ백남용(白南容)ㆍ신팔균(申八均)ㆍ박준성(朴準成)ㆍ장태진(張泰鎭)ㆍ이건(李𤧣)ㆍ정태직(鄭泰稷)ㆍ이조영(李祖榮)ㆍ김병철(金炳喆)ㆍ박재옥(朴在玉)ㆍ신보균(申普均)ㆍ오문영(吳文泳)ㆍ이현용(李顯用)ㆍ이제정(李濟楨)ㆍ신규식(申圭植), 9품 이각(李珏)ㆍ정석용(鄭錫溶)ㆍ이한승(李漢承)ㆍ홍응수(洪膺秀)ㆍ이덕영(李悳榮)ㆍ이병승(李丙承)ㆍ경두현(庚斗鉉)ㆍ이주응(李周應), 6품 유홍준(兪弘濬)ㆍ이현규(李賢奎)ㆍ심현택(沈玄澤)ㆍ심의성(沈宜性)ㆍ윤병수(尹炳壽)ㆍ김억배(金億培)ㆍ박내양(朴來陽), 9품 원용철(元容鐵)ㆍ이희종(李喜鍾)ㆍ이재환(李載晥)ㆍ이근묵(李根默)ㆍ한백헌(韓百憲)ㆍ유병호(兪炳鎬), 9품 이석응(李碩應)ㆍ유정순(兪政淳), 9품 이제헌(李濟憲)ㆍ신태일(申泰一)ㆍ김균상(金均祥)ㆍ유치원(兪致遠), 9품 오덕선(吳德善)ㆍ김영권(金永權)ㆍ김석하(金錫夏)ㆍ심종협(沈鍾協)ㆍ서상득(徐相得)ㆍ남상응(南相應), 9품 원용갑(元容鉀), 6품 김낙기(金樂基)ㆍ오희선(吳煕善)ㆍ이범승(李範承)ㆍ윤명휴(尹命休), 6품 김선기(金譱基)ㆍ홍유경(洪裕景)ㆍ윤명식(尹明植)ㆍ한기수(韓麒洙)ㆍ김홍식(金鴻植)ㆍ이의풍(李宜豐)ㆍ이장직(李章稙), 6품 신창휴(申昌休)ㆍ이종설(李鍾卨)ㆍ박승희(朴承𨭎)ㆍ변영학(邊永學)ㆍ이종석(李鍾奭)ㆍ이규범(李圭範)ㆍ노덕세(盧德世)ㆍ신가균(申可均), 9품 이충식(李忠植)ㆍ조중우(趙重羽)ㆍ한철회(韓喆會)ㆍ이병갑(李炳甲)ㆍ어영선(魚永善)ㆍ하상우(河相禹)ㆍ최인규(崔麟奎)ㆍ김태응(金台應)ㆍ한승우(韓升愚), 6품 이봉세(李鳳世)ㆍ이충순(李忠純)ㆍ허남(許湳)ㆍ김영각(金永珏), 9품 정인영(鄭仁永)ㆍ이계현(李啓賢)ㆍ홍승렬(洪承烈)ㆍ홍선표(洪璿杓)ㆍ조익호(趙益鎬)ㆍ조재정(趙載鼎)ㆍ최현규(崔顯圭)ㆍ이석영(李錫永)ㆍ이경재(李景載)ㆍ이원성(李源聲)ㆍ조찬현(趙燦顯)ㆍ김선항(金善恒)ㆍ조종완(趙鍾琓)ㆍ오준선(吳峻善)ㆍ한태수(韓泰洙)ㆍ정홍진(鄭鴻鎭)ㆍ오용환(吳龍煥)ㆍ이기종(李起鍾)ㆍ유석규(劉錫圭)ㆍ백남증(白南曾)ㆍ윤영원(尹泳元)ㆍ봉만재(奉萬載)ㆍ최인영(崔麟永)ㆍ허완(許浣)ㆍ엄익선(嚴翼善)ㆍ이철기(李哲基), 9품 안재목(安裁穆)ㆍ노성호(盧成鎬)ㆍ김영련(金永鍊)ㆍ조백희(趙百煕)ㆍ이규병(李圭丙)ㆍ오형근(吳亨根)ㆍ남순희(南舜煕)ㆍ신태윤(申泰胤), 9품 홍석구(洪奭求)ㆍ홍순희(洪淳禧)ㆍ안영수(安映洙)ㆍ윤횡식(尹宖植)ㆍ이민구(李敏九)ㆍ송순영(宋淳永)ㆍ김석빈(金碩彬)ㆍ홍기년(洪基䄵)ㆍ김희상(金煕商)ㆍ장민화(張民和)ㆍ장영근(張榮根)ㆍ김유경(金裕慶)ㆍ정은용(鄭殷鎔)ㆍ정용화(鄭龍和)ㆍ남천희(南天煕)ㆍ조돈경(趙敦慶)ㆍ황승렬(黃升烈)ㆍ박교승(朴敎承), 9품 유한용(劉漢用)ㆍ정광희(鄭光喜)ㆍ구자승(具滋承)ㆍ윤병한(尹炳漢)ㆍ이호정(李鎬楨)ㆍ조동순(趙東洵)ㆍ백남식(白南軾)을 육군 보병 참위에 임용하였다.[16] 유년학교와 연성학교는 일본의 군대 개입 이후에 생긴 학교라서 일본의 의향이 강하게 작용하였다.[17] 독도술을 배우는 지형학이나 기초적인 의학, 승마법 등을 가르쳤다.[18]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그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동천(東天) 신팔균, 경천(擎天) 김광서(金光瑞). 청천(靑天) 지석규(池錫奎)라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남만주 삼천(南滿州 三天)이라고 불렀다.[19] 육군사관학교에 지청천 장군의 흉상을 세워야 하는 근거는 국군의 정통성 확보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20] 상하이에서 사망, 차남 노태준 광복군으로 이어간다.[21] 6.25 전쟁때 납북된다.[22] 연해주로 이동, 무장해제 당해서 소비에트 연방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사망[23] 한국광복군 총사령관[24] 일본육사 출신에서도 독립군 진영으로 뛰어든 사람만해도 한 기수에 많아봤자 2명 밖에 안되었다. 1919년 기준으로 노백린 장군이 40대 중반 유동열 지사가 40세였고 황학수가 42세였다. 그 당시 상당히 고령이었던 것을 보면 독립운동세력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5] 한일합방 이전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도일한 유학생중 21명이 게이오 의숙, 세이조 학교를 거쳐 1898년 12월 육사에 입교, 이듬해 11월에 졸업함[26] 대한제국군 부령[27] 대한제국군 정령, 임시정부 국무 총리 및 초대 군무총장 광복군 출신, 노태준의 친부, 중국에서 사망[28] 대한제국군 정위, 중추원 참의[29] 대한제국군 정위[30] 대한제국군 정위, 일본군 중좌[31] 대한제국군 참위[32] 대한제국군 정위, 중추원 참의[33] 대한제국군 참위[34] 대한제국군 부위, 경무청 경무관, 중추원 참의[35] 대한제국군 부령[36] 대한제국군 정위, 일본군 대좌[37] 대한제국군 정위[38] 대한제국군 참위[39] 대한제국군 정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차장[40] 대한제국군 참령[41] 대한제국군 정령, 일본군 중장, 중추원 참의[42] 대한제국군 정위[43] 대한제국군 참령[44] 대한제국군 정위[45] 대한제국군 참위[46] 대한제국군 참위[47]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중좌[48]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대좌[49]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중좌[50] 대한제국군 참령[51] 대한제국군 참령, 임시정부 초대 참모총장 및 군무총장, 미군정 통위부장[52] 대한제국군 참령, 중추원 참의[53] 대한제국군 참령, 일본군 대좌, 중추원 참의[54] 대한제국군 참령, 독립군[55] 대한제국군 부령[56] 일본군 중위, 독립군, 1942년 러시아에서 사망[57] 일본군 대좌, 육군 중장, 초대 육군총참모장[58] 일본군 대위, 육군 준장. 김기원(15기)의 동생이자 김정렬(54기)의 아버지.[59] 일본군 중좌, 육군중장, 3대육군총참모장, 4대 국방부장관[60] 일본군 대좌. 육군 소장[61] 일본군 대좌, 육군 준장(추서)[62] : 일본군 중장, 육군대학교 35기, B급 전범으로 교수형[63] 일본군 중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64] 일본군 소좌, 만주군 상교, 육군 소장[65] 일본군 소좌, 육군 준장[66] 일본군 중위[67] 일본군 중위[68] 일본군 중위[69] 일본군 중위, 6.10 만세운동 중 체포[70] 일본군 대좌, 육군 소장[71] 일본군 중좌, 육군 소장[72] 일본군 중위, 육군 대령[73] 일본군 대위[74] 일본군 중좌[75] 일본군 소좌[76] 일본군 대위, 육군 대령[77] 일본군 대위[78] 일본군 중좌[79] 일본군 대위[80] 일본군 중위[81] 일본군 중좌[82] 일본군 중위[83] 일본군 중좌[84] 일본군 소위, 3.1 운동중 물고문으로 사망, 건국훈장(애족장)[85] 일본군 중위, 독립군[86] 일본군 중위[87] 일본군 중위[88] 일본군 중위[89] 일본군 중위[90]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정식적인 국가정부와 군대로 인정받아 중국에서 귀국하기를 원했고 미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귀국할 것이면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고 한다.[91] 한국광복군 지청천과 일본육사 동기이다.[92] 이승만과 친했으며 이승만과 같은 전주 이씨로서 왕족의식이 있었다.[93] 지금의 육군참모총장[94]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 기존의 일본육사출신이 많은 육군과 적응하기 쉬웠을 것으로 판단된다.[95] 야구선수 정훈이 아니다[96] 중국인이지만 한국에서 흔한 성씨인 박씨인데, 이때문에 조선에서 넘어간 조선계 중국인일 가능성도 있다. 만주족에도 팔기에 편입한 박씨 때문에 일부 박씨가 있기도 했다.[97] 중국은 근대적인 국적법을 1909년부터 실시했고, 그런 탓에 홍콩은 한동안 도착지주의를 택해서 그냥 국경을 넘어가면 홍콩 사람이 되던 시절도 있었다. 한국의 경우 1890년대부터 호구조사를 새로 실시하며 광무호적이 작성되었지만, 외국인의 호구조사는 통감부 시대에 이르러 이뤄졌기 때문에, 한국어가 유창한 박룡학은 대한제국 여권을 얻는 데 큰 지장이 없었을 것으로 저자는 추정한다.[98] 1992년 한중수교 이전에 한국에 들어온 중화민국 출신 화교들을 말한다. 한중수교 이전에는 F-2 거주자격으로 살던 이들이 화교를 뜻했지만, 요즘은 1992년 이후 들어온 신화교와 조선족, 구화교가 사실상 구분없이 다 화교라고 쓰이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