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한자: 梁性煥
양성환은 구한말의 군인이자 교육가이다. 대한제국군의 장성급 장교인 참장까지 진급했으며 대대장과 연대장, 시위혼성여단장 등을 지냈다.
하세가와는 이튿날인 8월 1일 아침 7시 군부대신 이병무, 시위대 여단장 양성환(梁性煥), 참장 이하 각 연대장·대대장, 기병, 공병대장 등을 하세가와 관저에 긴급 소집해 놓고, 군부대신에게 융희황제의 『군대해산조칙』을 낭독케 하였다.
하세가와는 사색이 된 대한제국 육군 장교들에게 이번 해산대상에서 장교는 제외하여 그대로 존속시킬 뿐 아니라 은사금도 지급할 계획이니 동요하지 말고 병사만 해산시킬 것이니, 8월 1일 10시 훈련원에서 열 예정인 해산식에 ‘군대해산’은 비밀에 부치고 ‘맨손 체조훈련’이 있다는 명목으로 병사들을 총을 휴대하지 말고 집합시키라고 설명하였다.[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하세가와는 사색이 된 대한제국 육군 장교들에게 이번 해산대상에서 장교는 제외하여 그대로 존속시킬 뿐 아니라 은사금도 지급할 계획이니 동요하지 말고 병사만 해산시킬 것이니, 8월 1일 10시 훈련원에서 열 예정인 해산식에 ‘군대해산’은 비밀에 부치고 ‘맨손 체조훈련’이 있다는 명목으로 병사들을 총을 휴대하지 말고 집합시키라고 설명하였다.[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시에 한국군 제대 중에는 시위혼성여단이 최고위급이었기에 군부대 지휘관으로서는 최선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당시엔 오늘날과 달리 군부대신 등의 자리에 군인 계급이 보임되었기 때문에 최선임 군인은 아니었다.
2. 여담
2.1. 독립운동가인가?
19. 양성환梁聖煥 무관학교 출신임은 분명하나[2] 입교, 임관 연도는 불명이다. 계급연도로 보아 1896년 1월 11일 반포된 무관학교관제에 따라[3] 모집되어 1896년 2월 11일 아관망명 이후 러시아인 교관들로부터 속성교육을 받고 1897년 5월 이전에 졸업, 임관된 6명의 사관[4] 중 1인으로 추정된다. 1898년 7월 이미 3대대장 겸 무관학교장으로 보임되었기 때문이다.[5] 1899년 대한제국 친위대 대대장(참령), 1903년 진위대 제4연대장, 시위 제1연대장(부령), 경무사 칙임관을 지냈다. 1904년에 정령에서 참장으로 승진하여 헌병사령관, 혼성여단장을 역임했다.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냈다.
출처: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출처: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황태연은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이란 책 667-668쪽에서 양성환이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 경우에는 구 한국군의 장성급 장교가 무장독립투쟁에 나선 유일한 사례가 될 것이다. 실제로 신흥무관학교 교관 중에는 부교장까지 역임한 양성환이란 인물이 있다. 해당 인물은 양성환 참장과 마찬가지로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신흥무관학교 교장 양성환은 당시 그와 함께 신흥학교에 건너갔던 동료가 위관급이기에, 참장 양성환과 동일인물이라기보다는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신흥무관학교가 개교하던 1910년대에 참장 양성환은 오히려 국내에 체류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사가 몇 개 남아 있다.
1909년 2월 13일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고종에게 1만원을 주고 구입한 주택인 송석원(松石園)과 관련해 송사를 진행하였고, 1913년 2월 21일 총독부 신문인 매일신보에는 국내에서 교육 관련 활동 중이란 기사가 실렸다. 그 사이인 1911년에 양성환이 신흥무관학교로 망명하여 활동하였다가 국내로 다시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신흥무관학교에 있던 동명이인을 혼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2.2. 가족관계
양성환의 아들인 양규열[6]은 단신으로 신흥무관학교로 건너가서 부교장을 지냈다. 이후 일제에 귀순하여 조선으로 돌아왔기에 독립운동가로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나, 양평군 향토사학자들은 그가 딱히 일제에 부역하지는 않았다며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다.다른 아들인 양재훈(梁在薰)은 1909년의 송사 관련되어서 기사에서 존재가 언급된다. 승정원일기를 검색하면 양규열로는 자료가 없으며, 양재훈이 1900년 6월에 육군무관학교 1회 졸업자로 임관하여 참령까지 진급한 내용이 나온다.[7] 양재훈의 경력이 양규열의 것으로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양규열과 양재훈은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있다.[8]
3. 경력
- 1882-03-16(음) 수문장
- 1882-09-14(음) 훈련원 주부
- 1883-06-25(음) 훈련원 판관
- 1883-12-29(음) 훈련원 첨정
- 1885-06-27(음) 친군별영 초관[9]
- 1885-12-29(음) 훈련원 첨정
- 1889-01-30(음) 평해 군수
- 1890-10-29(음) 강원도 중군
- 1894-07-30(음) 모친의 나이가 76세라 군산 첨사 체직 신청
- 1897-11-09 육군 참령 임용
- 1898-07-09 친위 제1연대 제3대대 대대장
- 1898-11-23 수원지방대 대대장
- 1898-12-18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대대장
- 1899-01-16 친위 제1연대 제1대대 대대장
- 1900-09-21 시위 제1연대 제3대대 대대장
- 1901-04-25 진위 제4연대 제2대대 대대장 (의주진위대)
- 1901-08-16 시위 제1연대 제2대대 대대장
- 1902-08-18 친위 제1연대 제3대대 대대장
- 1903-05-12 (육군 부령) 진위 제4연대장 면직 (평양진위대) 및 시위 제1연대장
- 1904-09-22 육군 참장 진급
- 1904-09-27 헌병 사령관
- 1904-09-28 경무사 겸임
- 1904-10-17 위생청결소 사무위원장 및 유행병예방위원장 겸임
- 1904-12-19 위생청결소 사무위원장 및 유행병예방위원장 해임
- 1904-12-31 경위원 총관
- 1905-01-03 임시서리배종무관부관장사무
- 1905-01-04 임시서리배종무관부관장사무 해임
- 1905-01-08 헌병 사령관
- 1905-03-01 군부 참모국장
- 1905-05-21 군부 군무국장
- 1905-06-03 군부협판[10]
- 1905-07-11 군부 군무국장[11]
- 1906-07-28 주전원 경
- 1906-09-30 경성위수사 영관
- 1906-11-25 군부 참모국장
- 1907-02-09 주전원 경
- 1907-04-30 시위혼성여단장
- 1907-09-03 제대 (대한제국 군대해산)
[1] 일본은 이렇게 말해 놓고는 한 달 뒤인 1907년 9월 3일에 1200명이 넘는 장교단을 무보직을 이유로 제대시켰다.[2] 원저주 1250) 참조: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의 망명자들, 119쪽.[3] 원저주 1251) 고종실록, 고종33(1896)년 1월 11일, 칙령 제2호.[4] 원저주 1252) 임재찬,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연구, 20쪽.[5] 원저주 1253) 독립신문, 1898년 7월 25일 관보(7월 12일).[6] 대한제국 육군참령 출신이다.[7] 포병장교로 근무하다가 포병부대가 군축되면서 보병장교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에 임관하여 군기창 등에서도 근무했고 1906년에 참령으로 진급하여 육군무관학교 1기 중에 가장 진급이 빠른 편이었다.[8] 호적상 이름과 족보상 이름이 다른 경우가 자주 있었다. 항렬이 꽤 원칙적으로 지켜지던 당시를 생각하면 호적상 이름과 족보상 이름의 차이일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인다.[9] 대략 중대장급의 보직이다. 위에는 대대장급인 파총이 있다. 2명의 파총 밑에 20명의 초관이 있었다.[10] 사임 상소 올림[11] 사임 상소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