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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혼성여단



1. 개요2. 해산 전야의 쿠데타 시도3. 편제(1907년 4월 30일 기준)
3.1. 여단 본부3.2. 제1보병연대
3.2.1. 제1보병연대 제1대대3.2.2. 제1보병연대 제2대대3.2.3. 제1보병연대 제3대대
3.3. 제2보병연대
3.3.1. 제2보병연대 제1대대3.3.2. 제2보병연대 제2대대3.3.3. 제2보병연대 제3대대
3.4. 기병대3.5. 야전포병대3.6. 공병대
4. 남대문 전투와 해산5. 여담

1. 개요

  • 한자: 侍衛渾成旅團

시위혼성여단은 대한제국군 시위대여단급 부대이다. 대한제국군은 이전에 필요에 따라 여단급 부대인 임시혼성여단을 편성하기도 했지만, 상설여단은 시위혼성여단이 처음이었다.[1]

1905년에 일본은 대한제국군의 1차 군축을 실시하여 대한제국군 진위대를 8개 대대로 줄이고 대한제국군 친위대를 폐지하는 등 군축을 하였다. 시위대도 편제가 줄어들었는데, 1907년 4월 30일이 되면 남은 병력을 모아서 시위혼성여단으로 편제하였다. 군대 해산을 위해 부대를 정리한 것에 가깝다. 초대 지휘관은 양성환(대한제국)이었다.

부대가 창설되고 3개월만에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일어나면서 해체되었다. 당시 시위혼성여단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 소속의 장병들이 주축이 되어 남대문 전투에 참전하였다.

2. 해산 전야의 쿠데타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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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07년7월20일이토.jpg
1907년 7월 20일 경운궁에서 퇴궐하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 주변에 기관총을 장비한 일본군이 삼엄한 경계를 서는 모습을 통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한국 황제 양위로 인한 한국군대의 동요 및 일본군의 조치에 관한 件]

往電第七三號
明治四十年七月二十日 午前二時三○分 發
統監
珍田 外務次官

林 大臣으로부터
어제 19일 오후 한국 國務大臣에 대한 京城의 인심은 한층 더 격앙되었으며, 특히 侍衛隊(近衛隊)는 매우 격분하여 같은 날 한밤중에 궁중에 난입하여 각 국무대신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등 형세가 극히 험악함. 軍部와 法部 양 대신은 궁중을 벗어나 이날 밤 11시경 統監 관저에 이르러 이상의 급보를 전하고는, 아울러 往電 제68호 한국 황제의 위임에 따라, 우리 병력으로 앞에 기록한 각 대신의 보호를 요청하였음. 그에 따라 長谷川 司令官은 곧 우리 주둔군을 왕궁의 각 요소에 배치하고, 때에 따라 적절한 행동을 취하도록 명하였음. 그 후 우리 군대는 동 11시 58분 각각 배치를 완료하였음. 이상을 우선 급히 전보함.
- 1907년 07월 20일자 통감부문서

3. 편제(1907년 4월 30일 기준)

이중에 남대문 전투 전사자는 표시한다. 남상덕 등 견습장교들은 지휘관이나 지휘자로 아래의 편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아래의 편제는 4월 30일을 기준으로 정리했지만, 남대문 전투 시점에선 편제에 변화가 있었다. 7월 1일에 정위 계급인 임재덕[2]이 여단 부관에서 제1연대 제3대대장보로 옮겼기 때문이다.
육군 보병 정위 조원하(趙元夏)를 시위 혼성여단사령부 부관에 보하고, 육군 보병 참령 남기창(南基昌)을 시위 보병 제1연대 제2대대장에 보하고, 육군 보병 정위 임재덕(林在德)을 시위 보병 제1연대 제3대대장보(侍衛步兵第一聯隊第三大隊長補)에 보하고, 육군 보병 참령 조중만(趙重萬)을 시위 보병 제2연대 제2대대장에 보하고, 육군 보병 참령 전우기(全佑基)를 진위 보병 제1대대장에 보하고, 육군 보병 참령 김현대(金顯大)ㆍ이용승(李容昇)ㆍ조영규(趙寧奎), 육군 보병 정위 고청룡(高靑龍), 육군 보병 부위 김종구(金鍾九)를 육군연성학교부(陸軍硏成學校附)에 보하였다.
승정원일기 1907년 7월 1일

7월 20일 근처에 있었던 쿠데타 시도가 결국 미수에 그친 뒤에 임재덕은 면직되었다. 특이한 점은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에 9월 3일에 장교단이 제대 조치되었는데 9월 16일에 임재덕은 다시 보병 정위로 임용되었다. 이후 별다른 보직 없이 군부에 속했다가 육군무관학교 교관을 지내다가 1908년에 참령으로 진급했다. 1909년 7월 31일엔 예비역으로 전역했고 경술국치 즈음인 1910년 8월 28일에 태극장을 서훈받았다.

3.1. 여단 본부

  • 시위혼성여단장 참장 양성환
  • 참모관: 참령 박영철(朴榮喆)
  • 부관: 정위 임재덕(林在德)[3], 부위 유면수(劉冕洙)

3.2. 제1보병연대

  • 제1보병연대장 보병 정령 이근형(李根馨)
  • 보병 참령 신창희(申昌煕)[4]
  • 부관 정위 유철영(柳哲永) / 기관[5] 보병 참위 태영선(太永善)

3.2.1. 제1보병연대 제1대대

  • 제1대대장: 보병 참령 박승환
  • 부관: 보병 부위 임철재(任哲宰)
  • 군의관[6]: 군의 김수현(金守鉉)
  • 향관[7]: 군사 박제호(朴齊浩)
  • 중대장(4중대): 보병 정위 최우상(崔禹相)ㆍ사재흡(舍在洽)ㆍ정면섭(丁冕燮)ㆍ안준호(安晙鎬)
  • 소대장(16소대): 보병 부위 이기범(李起範)ㆍ백남필(白南弼)ㆍ장용석(張容奭)ㆍ안봉수(安鳳洙)ㆍ백충기(白忠基)ㆍ신석환(申奭煥)ㆍ김낙규(金洛圭), 보병 참위 김유경(金裕慶)ㆍ남상익(南相翊)ㆍ김동현(金東鉉)ㆍ오희선(吳煕善)ㆍ한규호(韓圭祜)ㆍ신석규(申錫圭)ㆍ오문영(吳文泳)ㆍ신보균(申普均)ㆍ맹도영(孟道永)

박승환이 자결하자 제2보병연대 1대대와 함께 남대문 전투에 참여했던 부대다. 장교 이상 전사자가 알려진 게 없어 전투에서 피해는 2연대 1대대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3.2.2. 제1보병연대 제2대대

  • 제2대대장: 보병 참령 김현대(金顯大)
  • 부관: 보병 부위 이주완(李柱浣)
  • 군의관: 이등군의 장홍섭(張鴻燮)
  • 향관: 일등군사 현덕호(玄德鎬)
  • 중대장(4중대): 보병 정위 이규진(李圭振)ㆍ김병엽(金炳曄), 김상열(金相說)ㆍ태유선(太有善)
  • 소대장(16소대): 보병 부위 이창영(李昌永)ㆍ김존성(金存性)ㆍ서상기(徐相琦)ㆍ최대영(崔大永)ㆍ홍천희(洪天憙)ㆍ이민화(李敏和)ㆍ우종현(禹鍾鉉)ㆍ이승녕(李升寧), 보병 참위 이인영(李仁永)ㆍ이희태(李煕台)ㆍ김낙기(金樂基)ㆍ이응구(李應九)ㆍ유홍준(兪弘濬)ㆍ이태승(李台承)ㆍ장민화(張民和)ㆍ윤태훈(尹泰勳)

7월 1일에 대대장인 김현대가 육군연성학교로 보내졌고 남기창(南基昌)이 대대장을 맡았다.

3.2.3. 제1보병연대 제3대대

  • 제3대대장: 보병 참령 이용승(李容昇)
  • 부관: 보병 부위 이범서(李範緖)
  • 군의관: 이등군의 손창수(孫昶秀)
  • 향관: 이등군사 김병승(金炳升)
  • 중대장(4중대): 보병 정위 김창석(金昌錫)ㆍ이석기(李錫祺)ㆍ김학소(金學韶)ㆍ김영국(金永國)
  • 소대장(16소대): 보병 부위 심상팔(沈相八)ㆍ현환(玄桓)ㆍ심상희(沈相煕)ㆍ신봉균(申鳳均)ㆍ임영선(林榮璿)ㆍ이현규(李賢奎)ㆍ신태열(申泰說), 보병 참위 민윤식(閔潤植)ㆍ박내양(朴來陽)ㆍ유치원(兪致遠)ㆍ이범승(李範承)ㆍ조재정(趙載鼎)ㆍ이학래(李學來)ㆍ정은용(鄭殷鎔)ㆍ오준선(吳峻善)ㆍ윤대식(尹戴植)

당시 가장 반일 성향이 강한 대대로 여겨졌다.

남대문 전투 당시엔 대대장 자리가 공석이었고[8], 여단의 부관이었던 정위 임재덕이 7월 1일부터 대대장 대리를 하고 있었다. 쿠데타를 위해 임재덕을 일부러 대대장 자리에 배치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 시위 보병 제1연대 제3대대장(侍衛步兵第一聯隊第三大隊長) 육군 보병 정위(陸軍步兵正尉) 임재덕(林在德), 군부 교육국 교무과장(軍部敎育局敎務課長) 육군 보병 참령(陸軍步兵參領) 이갑(李甲)의 본관을 면직하였다.
7월 21일에 임재덕은 군부 교육과장인 이갑과 함께 면직되었다. 날짜를 보면 쿠데타 시도가 미수에 그침에 따라 그에 따라 면직된 것으로 보인다.

3.3. 제2보병연대

  • 제2보병연대장: 보병 정령 조철희(趙轍煕)
  • 보병 참령 박정환(朴晶煥)
  • 부관: 보병 정위 유강렬(劉康烈)
  • 기관: 보병 참위 정희찬(鄭煕燦)

일본의 전문에서 평양연대란 이름으로 지칭되었다. 평양진위대는 애초에 대한제국군 진위대에 속했고 이 시점에는 제7진위대대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지칭한 이유는 알 수 없다.

3.3.1. 제2보병연대 제1대대

  • 제1대대장: 보병 참령 이기표(李基豹)
  • 부관: 보병 부위 김사윤(金思允)
  • 군의관: 이등군의 박희달(朴煕達)
  • 향관: 일등군사 추광엽(秋光燁)
  • 중대장(4중대): 보병 정위 오의선†ㆍ황태수(黃台秀)ㆍ민중식(閔仲植)ㆍ권중협
  • 소대장(16소대): 보병 부위 문경선(文敬善)ㆍ홍원표(洪元杓)ㆍ이재탁(李在鐸)ㆍ마경환(馬景煥)ㆍ정인택(鄭寅宅)ㆍ남태우(南泰祐), 보병 참위 이한승(李漢承)†ㆍ이준영†ㆍ이규병(李圭丙)†ㆍ어영선(魚暎善)ㆍ임필호(林弼鎬)ㆍ장태진(張泰鎭)ㆍ장세정(張世禎)†ㆍ노덕세†ㆍ이원태(李源台)ㆍ이창인(李昌仁)

남대문 전투 당시 가장 큰 전사자를 낸 부대다. 남상덕 등이 견습사관으로 이 부대에 속했다.

1대대 1연대와 합쳐 57명의 사병 전사자도 발생하였다. 사병 최고 계급 전사자는 특무정교(원사)인 고희순과 김순석(金順錫)이었다.

3.3.2. 제2보병연대 제2대대

  • 제2대대장: 보병 참령 조중만(趙重萬)
  • 부관: 보병 부위 신규식(申圭植)
  • 군의관: 이등군의 김현승(金顯承)
  • 향관: 이등군사 이석진(李錫璡)
  • 중대장(4중대): 보병 정위 장행원(張行遠)ㆍ이의영(李宜榮)ㆍ원형상(元亨常)ㆍ정관수(鄭觀秀)
  • 소대장(16소대): 보병 부위 오직선(吳直善)ㆍ태원엽(太源燁)ㆍ이호진(李浩鎭)ㆍ유근수(劉根洙)ㆍ오윤근(吳潤根)ㆍ이장녕(李章寧)ㆍ이규범(李圭範)ㆍ최영순(崔永舜), 참위 이의풍(李宜豐)ㆍ권중관(權重寬)ㆍ김영권(金永權)ㆍ이택기(李宅基)ㆍ김수연(金壽演)ㆍ김영각(金永珏)ㆍ이승욱(李承旭)ㆍ김용진(金容鎭)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보병대의 전신인 근위보병대대가 만들어졌다.

3.3.3. 제2보병연대 제3대대

  • 제3대대장: 보병 참령 홍창걸(洪昌杰)
  • 부관: 보병 부위 강문경(康文璟)
  • 군의관: 삼등군의 이제규(李濟奎)
  • 향관: 이등군사 한인수(韓仁洙)
  • 중대장(4중대): 보병 정위 김인성(金仁成)ㆍ최욱재(崔旭載)ㆍ김상태(金相台)ㆍ유석규(劉錫奎)
  • 소대장(16소대): 보병 부위 이준섭(李俊燮)ㆍ이준태(李俊泰)ㆍ백윤민(白潤民)ㆍ이제정(李濟楨)ㆍ이만섭(李萬燮)ㆍ오승근(吳承根)ㆍ김사석(金思錫)ㆍ김병철(金炳喆)ㆍ송순영(宋淳永), 보병 참위 이병찬(李秉纘)ㆍ오봉근(吳鳳根)ㆍ유병찬(兪炳瓚)ㆍ유한용(劉漢用)ㆍ김균상(金均祥)ㆍ이장한(李長漢)ㆍ조원희(趙瑗煕)

3.4. 기병대

  • 기병대장: 기병 참령 유동열(柳東說)
  • 군의관: 이등군의 김달식(金達植)
  • 향관: 이등군사 김명훈(金明薰)
  • 수의관: 삼등수의(三等獸醫) 차윤문(車潤文)
  • 기병소대장: 기병 부위 이은상(李殷相)ㆍ오경근(吳景根)ㆍ이병훈(李丙薰), 기병 참위 박정화(朴正和)ㆍ이범흥(李範興)

3.5. 야전포병대

  • 야전포병대장: 포병 참령 박두영(朴斗榮)
  • 군의관: 이등군의 허균(許均)
  • 향관: 이등군사 이창균(李昌均)
  • 수의관: 삼등수의 김현택(金賢澤)
  • 포병소대장: 포병 부위 김인호(金麟浩)ㆍ박기영(朴基永), 참위 홍은섭(洪恩燮)ㆍ정준헌(鄭駿憲)

3.6. 공병대

  • 공병대장: 공병 참령 김기원(金基元)
  • 군의관: 이등군의 김성집(金性集)
  • 향관: 삼등군사(三等軍司) 김종복(金鍾復)
  • 공병소대장: 공병 정위 최병주(崔秉柱), 부위 이강년(李康年), 부위 이규홍(李圭弘)ㆍ김석빈(金碩彬)ㆍ서용순(徐容淳)

4. 남대문 전투와 해산

남대문 전투 당시에 시위혼성여단에선 장교 전사자 11명 등 68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부상자가 100명에 포로가 516명에 이르렀다.
시위 제1연대 제1대대 중대장 육군 정위(侍衛第一聯隊第一大隊中隊長陸軍正尉) 최우상(崔禹相), 육군 정위 사재흡(舍在洽)ㆍ동(同) 정면섭(丁冕燮)ㆍ동 나호(羅鎬), 시위 보병 제1연대 제1대대 중대부 육군 부위(侍衛步兵第一聯隊第一大隊中隊附陸軍副尉) 이재영(李載榮), 육군 부위 신석환(申奭煥)ㆍ동(同) 김낙규(金洛圭)ㆍ동 안봉수(安鳳洙)ㆍ동 백충기(白忠基)ㆍ동 백남필(白南弼)ㆍ동 장용석(張容奭), 육군 참위 오현영(吳顯泳)ㆍ동 신보균(申普均)ㆍ동 맹도영(孟道泳)ㆍ동 오희선(吳熙善)ㆍ동 박두환(朴斗桓),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중대장 육군 정위 민중식(閔仲植), 육군 정위 황태수(黃台秀),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중대부 육군 부위 문경선(文敬善), 육군 부위 이재탁(李在鐸)ㆍ동 이교상(李敎相)ㆍ동 김병철(金炳喆), 육군 참위 임필호(林弼鎬)ㆍ동 어영선(魚暎善)은 본관을 해면한다.

특히 이를 주도했던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의 장교들은 1907년 8월 20일에 해면되었다.

같은 해 11월 18일 관보에 부하들의 망동을 통제하지 못했단 이유로 징계를 받았던 장교들의 사면 명단에 이들 대부분이 포함되었다. 관보 명단

5. 여담


[1] 시위대나 친위대가 최대 편제일 때 연대를 2개씩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단급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연대가 원수부에 속했고 연대들을 총괄하는 별도의 사령부나 지휘부가 있지는 않았다.[2] 임재덕은 1900년에 임관했고 노백린, 어담, 김성은 등과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군인이었다.[3] 7월 1일에 보병 정위 조원하(趙元夏)가 부관으로 왔고, 임재덕은 시위대 1연대 3대대의 대대장 대리로 갔다.[4] 따로 보직이 명시된 건 없으나 부연대장의 역할로 추정된다.[5] 군기(軍旗)를 관리하는 장교.[6] 군의관. 1등군의는 대위, 2등군의는 중위, 3등군의는 소위다.[7] 재정장교. 1등군사는 대위, 2등군사는 중위, 3등군사는 소위다.[8] 대대장인 이용승은 7월 1일에 육군연성학교로 인사 조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