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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초대 제8독립방공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포크리시킨 Алекса́ндр Покры́шкин | Alexander Pokryshkin | |||
| | |||
| 본명 |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포크리시킨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Покры́шкин Alexander Ivanovich Pokryshkin | ||
| 출생 | 1913년 3월 19일[1] | ||
| 러시아 제국 톰스크현 노보니콜라옙스크 (現 러시아 시베리아 연방관구 노보시비르스크주 노보시비르스크) | |||
| 사망 | 1985년 11월 13일 (향년 72세) |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 재임기간 | 초대 제8독립방공군 사령관 | ||
| 1959년 ~ 1968년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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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자매 | 5남 1녀 중 2남 | ||
| 배우자 | 마리야 | ||
| 자녀 | 아들 알렉산드르[2] 딸 스베틀라나[3] | ||
| 학력 | 페름 항공기술자학교 카차 고등항공조종사학교 M.V.프룬제 대학교[4] 보로실로프 고등군사대학교[5] | ||
| 복무 | 노농적군 공군 | ||
| 1932년 ~ 1946년 | |||
| 소비에트 연방 공군 | |||
| 1946년 ~ 1985년 | |||
| 소비에트 연방 방공군 | |||
| 1959년 ~ 1985년 | |||
| 최종 계급 | 항공원수 (소비에트 연방 공군) | ||
| 주요 참전 | 독소전쟁 | ||
| 주요 서훈 |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6회) 수훈십자장 소비에트 연방 영웅 (3회) 수보로프 훈장 2등급 (2회)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2회) 카를 마르크스 훈장 | ||
| 격추 이력 | 59기 | }}}}}}}}} | |
1. 개요
소련의 군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 파일럿 중 3번째로 우수한 에이스로 꼽힌다.[6]2. 생애
19세기 말 시베리아로 이주한 노동자 가정의 여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가정을 이끌기 위해 석공, 지붕 수리공, 난로 수리공으로 일하다 건설 현장 사고로 장애인이 됐고, 1934년에 장남이 사망하자 정신적으로 무너져 자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크리시킨은 학업에 몰두하면서 오전에는 삼촌을 따라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항공기에 대해 공부했다. 어렸을 때부터 항공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덕분에 여러 학위를 취득했다.2.1. 입대
1932년 6월 17일 노농적군에 자원입대했다. 1933년 제3페름항공기술학교를, 1934년 보로실로프 적군공군기술학교를 졸업한 뒤 12월부터 북캅카스 군관구 제74보병사단 항공통신부대 기술정비병으로 복무했다.포크리시킨은 조종사가 되고 싶어 비행학교로 보내달라는 신청서를 39장이나 작성했지만 뛰어난 정비병인 포크리시킨을 놔주고 싶어하지 않은 지도부에 의해 비행학교에 가지 못했다. 포크리시킨은 포기하지 않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주 업무를 하면서 크라스노다르 비행 클럽에서 조종 기술을 배웠다. 1938년 겨울 휴가 때는 상관 몰래 1년 과정의 민간 조종사 프로그램을 단 17일 만에 이수하기도 했는데 이는 1938년 11월 먀스니코프 카차 고등항공조종사학교에 입학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년 뒤 1939년 11월 우등 성적으로 졸업한 포크리시킨은 소위 계급으로 임관하고 오데사 군관구 소속 제55전투기연대에 배치되었다. 이 연대는 키로보그라드에 주둔하다가 1940년에는 벨치 근처의 신구레니 비행장(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재배치되었다. 1941년 봄 연대의 절반은 I-16, I-153에서 당시 최신 기종 MiG-3로 재무장했다.
2.2. 독소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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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후반의 포크리시킨 |
포크리시킨의 첫 공중전은 비극으로 끝났는데,제211폭격연대의 Su-2를 독일 공군 소속 기체로 착각하고 격추해버린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항법사였던 세묘노프가 사망했다. 군사 재판감이지만 전쟁 발발의 혼란 때문에 사고를 조사하고 범인을 찾을 여유도 없어 사건은 그대로 넘어갔다.
"임무를 수행하러 가고 있었는데, 두 대의 MiG-3가 우리 무리에 합류했어. 전투기와 함께 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좋았지. 그런데 갑자기 MiG 중 한 대가 정확한 사격으로 우리 비행대장을 격추하더니 곧바로 내 비행기를 공격했어. 나는 기체를 좌우로 흔들어 우리 식별 표지를 보여줬고, 다행히 그것이 도움이 되었지..."
수년 후, 합동군사참모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동기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말해주었다. 우리 무리에는 소비에트 연방 영웅을 3회나 받은 알렉산드르 포크리시킨도 있었다. 그는 내게 이야기를 한번 더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거 나였어." 포크리시킨이 당황하고 괴로워하며 말했다.
"사샤, 농담하는 거지?"
"농담이라니! 전쟁 초기에 정말로 Su-2를 격추한 적 있었어. 나에게도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지. 수호이 항공기에 대해 몰랐어. 그것들은 전쟁 직전에 부대에 배치되었고, 생김새가 완전히 특이해서 파시스트 비행기라고 생각한 거야..."
항공원수 이반 프스티고
수년 후, 합동군사참모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동기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말해주었다. 우리 무리에는 소비에트 연방 영웅을 3회나 받은 알렉산드르 포크리시킨도 있었다. 그는 내게 이야기를 한번 더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거 나였어." 포크리시킨이 당황하고 괴로워하며 말했다.
"사샤, 농담하는 거지?"
"농담이라니! 전쟁 초기에 정말로 Su-2를 격추한 적 있었어. 나에게도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지. 수호이 항공기에 대해 몰랐어. 그것들은 전쟁 직전에 부대에 배치되었고, 생김새가 완전히 특이해서 파시스트 비행기라고 생각한 거야..."
항공원수 이반 프스티고
1941년 6월 26일 정찰 비행 중 Bf 109를 격추해 첫 승리를 거두었다. 7월 3일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둔 그는 전선 후방에서 독일 대공포에 피격되어 격추된 뒤 나흘 동안 걸어서 부대로 복귀했다. 복귀했을 땐 다리가 부어 걸을 수도 없을 지경이라 곧장 의무대로 이송되었다. 이때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공중 전술 노트'를 쓰기 시작한다. 돌아온 후 10월 5일에도 정찰 비행 중 격추당해 추락한 뒤 후퇴중이던 소련군 패잔병들을 이끌고 전투를 치르며 부대로 복귀했다.
처절한 전쟁 초기를 보내며 포크리시킨은 소련 공군 전술이 구식이란 것을 깨닫고 자신의 전술 아이디어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고, 늘 자신과 동료들이 참여한 공중전의 모든 세부 사항을 꼼꼼히 적은 뒤 상세하게 분석했다.[7] 부대는 끊임없이 후퇴하는 극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싸웠고 이에 포크리시킨은 훗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1941~1942년에 싸우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전쟁을 모른다.
저런 말이 나올 만큼 포크리시킨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았다. 격추 당한 것 외에도 총알이 좌석 오른쪽을 관통하여 어깨 벨트를 찢거나, 왼쪽으로 튄 총알이 턱을 베면서 계기판이 피로 뒤덮인 적도 있었다.
41년동안 남부 전선에서 활동하며 몰도바 방어 작전, 티라스폴-멜리토폴 방어 작전, 돈바스 방어 작전, 로스토프 방어 작전, 로스토프 공세 작전에 참여했다.
동년 겨울, 진흙과 폭우로 동료 2명이 이륙하다 추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출격을 강행한 뒤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기갑부대 위치를 포착하는 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쳐 레닌훈장을 수여받았다. 포크리시킨은 연대에서 최고의 정찰 조종사로 평가받으며 정찰 임무에서는 교전 금지 명령을 받았지만 탄약을 남기고 돌아오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한 포크리시킨은 기회만 생기면 전투에 뛰어들었다.
1941년 11월 중순까지 190회의 출격을 수행했다.[8] 1941년 6월부터 12월까지 개인 격추 2대, 공동 격추 1대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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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MiG-3 앞에서 |
1942년 3월 14일 연대장 이바노프는 포크리시킨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추천서에 서명했다. 추천서에는 개인 격추 4대, 공동 격추 3대, 연대 최고의 정찰 조종사라고 쓰였다.
1942년 8월, 포크리시킨은 비행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8월 말 연대는 부대 재편성과 신형 기종으로의 기종 전환 훈련을 위해 후방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Yak-1을, 이후에는 무기대여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받은 P-39N를 익히기 시작했다.
한편 포크리시킨은 7월 31일부터 새로 부임한 연대장 니콜라이 이사예프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9] 이사예프는 소련 전투기 전술이 구식이라는 포크리시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종 전환을 하면서 생긴 공백 기간에 포크리시킨을 직위 해제해 연대에서 쫓아내고 당에서 제명까지 시켰다. 공식적인 사유는 식당에서 싸움을 일으켰다는 것이었고[10] 이때 앞서 올라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추천도 철회했다. 포크리시킨은 이 기간동안 전술 개발에 매진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행히 사단장과 사단 정치장교가 이 일에 대해 알게 되고 포크리시킨을 지원하면서 직위 해제와 제명은 없었던 것으로 되돌아갔다.
1942년 한 해 동안 포크리시킨은 돈바스 방어 작전과 캅카스 전투 방어에 참여하며 개인 격추 1대, 공동 격추 1대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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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에어라코브라로 기종 전환한 포크리시킨 |
곧 이 전투기가 내 몸의 일부이자 의식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포크리시킨의 회고록 中
기종 전환을 완료하고 전선에 복귀하기 전날 포크리시킨은 트빌리시에서 LaGG-3와 모의 전투를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는 LaGG-3가 외국 기체보다 성능이 좋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고 전선군 사령부와 흑해함대 항공대 사령부가 관람에 참가했다. 정정당당한 성격의 포크리시킨은 모의전의 의도를 알면서도 봐주지 않았고, 결과는 포크리시킨의 승리로 끝났다. 낙담한 엔지니어에게 포크리시킨은 무장만 좀 딸릴 뿐이지 LaGG-3도 괜찮았다, 조종사의 숙력도 문제였다며 위로해줬다. 괜히 하는 말은 아닌게 상대는 시험비행 조종사들이었고 포크리시킨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었다. La-5와 La-7에 좋은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포크리시킨의 회고록 中
4월 8일, 조종사들은 전선으로 복귀하여 즉시 쿠반 공중전에 뛰어들었다. 1943년 4월 9일, 포크리시킨은 호출 부호 "흰색 100"을 받고 기체에 번호 100이 새겨진 '에어라코브라'를 타고 나간 첫 출격에서 Bf 109를 격추했다.
쿠반 공중전에서 독일의 유명한 전투기 부대들을 상대로 포크리시킨은 숙련된 전사이자 전술의 대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943년 4월 한 달 동안에만 10대의 독일 전투기를 격추해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수여 후보에 올랐다.
포크리시킨이 고안해 낸 새로운 전술과 전투 대형, 개선된 지상 항공 통제 시스템 덕분에 6월 소련 공군은 전투 목표였던 제공권 탈환에 성공하며 이 전투로 어마어마한 경험치와 숙련도도 쌓게 된다.
대부분의 출격에서 포크리시킨은 가장 어려운 목표인 '적 편대장 격추'에 집중했다. 1941~42년의 경험을 통해 그는 편대장을 격추하는 것이 적의 사기를 단숨에 꺾고, 기지로 회항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1943년 4월~6월에 일어난 쿠반 공중전 기간 동안 개인 격추 22대를 기록했다. 단순히 싸울뿐만 아니라 동료와 부하들에게 습득하고 개발한 전술을 가르치면서 부대는 '포크리시킨 학교'로 불렸고, 그의 많은 제자들또한 에이스로 거듭났다. 쿠반 공중전을 기점으로 포크리시킨은 전 연방에 이름을 떨치는 영웅이 되었고 명성은 연합국과 독일에도 퍼져나갔다. 쿠반을 기점으로 독일에서는 소련 에이스=포크리시킨으로 각인되었는지 이때 포로로 잡힌 독소 조종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독일 조종사도 모두 포크리시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1943년 5월 24일, 첫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고 불과 3달 뒤인 8월 24일에 두번째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1943년 11월부터는 제16근위전투기연대의 부연대장을 맡았다. 1943년 한 해 동안 쿠반 공중전 외에도 미우스 공세 작전, 돈바스 공세 작전, 멜리토폴 공세 작전, 크림반도 독일군 봉쇄 작전에 참여했다.
1943년은 포크리시킨의 최고의 해였다. 이 한 해동안 개인 격추 38대를 기록했다. 1943년 말까지 총 550회의 출격을 수행했고, 137회의 공중전을 벌여 53기의 항공기를 격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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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동료들과 함께 |
1944년 5월 초부터 제2우크라이나전선군에 소속되어 다시 전투에 참가했고, 7월부터는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에 소속되어 활약했다. 1944년 6월 포크리시킨은 대령으로 진급하고 제9근위전투기사단의 사단장을 맡으며 법적으로 개인 출격이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몰래 출격하는 사단장들이 많았고 격추한 건 당연히 부하의 몫으로 넘겨줬는데, 포크리시킨또한 그러했다. 사단장을 맡으면 출격 기회가 더 줄어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거부한다면 자신을 괴롭히던 이사예프가 사단장이 될 수도 있어 어쩔수없이 승낙해야만 했다.[12]
1944년 8월 19일, 550회의 출격과 53회의 공식 격추 기록을 달성한 포크리시킨은 세 번째 소비에트 연방 영웅을 수여받았다. 이로써 그는 소련 역사상 최초의 3회 연방 영웅이 되었다.
1944년 11월 제16근위전투기연대는 La-7로 기종변환을 하게 됐는데 훈련 비행 중 연대 에이스 알렉산드르 클루보프가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사고의 결정적 원인은 폭우로 생긴 활주로의 웅덩이였는데, 착륙 중 바퀴가 웅덩이에 걸리면서 기체가 전복되어 조종사가 깔려 사망했다. 문제는 클루보프가 포크리시킨이 제일 아끼던 친구였던 것이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포크리시킨은 죽어가는 클루보프를 품에 끌어안고 처음으로 부하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내 인생에서 클루보프는 너무나 큰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가장 친한 친구들 중 그 누구도 이 상실을 메울 수 없었다.
알렉산드르 포크리시킨
알렉산드르 포크리시킨
사샤 포크리시킨은 이제 대령이고 사단장이지만, 제게는 여전히 사샤일뿐입니다. 그는 진정한 전우니까요.
클루보프가 사고 2일 전 인터뷰에서 한 말
이 사고로 포크리시킨은 La-7 기종 변환을 취소했고 비행을 허가한 당시 제16근위전투기연대 연대장 레치칼로프를 원망했다.클루보프가 사고 2일 전 인터뷰에서 한 말
1944년 한 해 동안 야시 지역의 공중전과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에 참여했다. 7월 16일 포크리시킨은 44년 처음이자 생애 마지막 격추 기록 2건을 달성했는데, 그의 부하와 전우들에 따르면 이후와 1945년에도 여러 대를 개인 격추했지만 전부 동료들의 몫으로 넘겨 기록되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 포크리시킨 대령은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하부 슐레지엔 공세, 상부 슐레지엔 공세, 베를린 공방전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1945년엔 아예 비행 금지 명령을 받았지만 그의 정비사였던 일리야 구르비치에 따르면 전쟁 마지막 날까지 정기적으로 비행했으며 공중전이 줄어들자 비행기에 100kg 폭탄 거치대를 설치하라고 명령하고 폭격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1945년 1월, 사단은 폴란드-독일 국경을 넘었으나 퇴각하는 독일군이 자신들의 비행장을 모두 파괴해버린 탓에 쓸만한 비행장이 없었다. 게다가 봄이 오면서 땅이 녹아 질척해지는 바람에 이착륙도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 포크리시킨은 포장된 고속도로를 비행장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제2항공군 소속 전투기 조종사들은 항공 역사상 세계 최초로 고속도로를 이착륙에 대대적으로 사용했으며, 이 이례적인 도로 비행장의 첫 시험 비행은 포크리시킨이 직접 수행했다.
포크리시킨의 제9근위전투기사단은 '베를린'이라는 명예 칭호를 받고 세 개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5월 9일 다음날 전투 계획을 짜고 선잠에 들었던 포크리시킨은 온갖 화기가 발포되는 시끄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 당직사관에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전화를 걸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대답에 포크리시킨은 한동안 멍하니 온갖 탄약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창밖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창문을 열어 공중으로 권총 몇 발을 쏘며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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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6월 24일 승전 열병식에서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기수를 맡았다 |
2.3. 전후
1945년 7월 학업을 위해 프룬제 군사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는 본인의 선택이었다. 많은 조종사들이 공군대학교에 진학했지만 포크리시킨은 공군 전술은 이미 실전에서 완성했으니 공군과 지상군의 합동 작전을 깊이 연구하고 싶어 육군대학교로 갔다. 에이스 파일럿인 포크리시킨은 이 대학교에서 땅을 기어다니고 참호를 파는 기초 보병 훈련부터 배워나갔다. 이곳에서 또다른 에이스 조종사인 블라디미르 라브리넨코프와 친하게 지냈는데 라브리넨코프의 회상에 따르면 포크리시킨이 포격 시험에서 정확한 계산으로 모든 포탄을 정중앙에 정확히 명중시켜 조종사라고 은근 무시하던 육군출신 학생들의 코를 눌러줬다고 한다. 포크리시킨은 학업 중에서도 비행하지 않으면 실력이 녹슨다고 꾸준히 비행했으며 반에서는 반장을 맡고 어디서나 리더를 도맡았다.프룬제 군사대학 졸업이 얼마 남지않은 날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 바실리 스탈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바실리 스탈린은 포크리시킨을 자신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싶다며 사무실로 초대했다. 약속 당일 정확한 시간에 도착한 포크리시킨은 한시간 넘게 바실리를 기다리다가 "현재 축구선수들을 만나러 가셨다."라는 말을 전해 듣고 벌떡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바실리 라인은 빠른 출세가 보장된 자리였지만 집에 돌아온 포크리시킨은 아내에게 "그 패거리는 나랑 맞지 않아."라며 혀를 찼다.
이후 1948년 3월 크림반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포크리시킨 부부는 우연히 라브렌티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를 만났다. 세르고는 "바실리 스탈린이 모스크바 군관군 사령관으로서 잘 해낼 거라 보시냐."라고 물었고 포크리시킨은 "내 의견이 궁금하다면 말해주지. 그런 거대한 부대를 지휘하려면 대학교육과 풍부한 경험이 필수적인데, 그는 둘 다 없네."라고 대답했다. 보복이 두려웠던 아내는 차에 타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며 대체 무슨 짓을 한거냐고 절망했지만 포크리시킨은 태연하게 말했다. "뭘 걱정해? 아무도 그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니 나라도 내가 생각하는 진실을 말해줘야지."
이러한 행동들은 당연히 바실리 스탈린의 심기를 거슬렸고, 그 결과 포크리시킨 대령의 진급은 인위적으로 밀리다가 스탈린이 사망한 후인 1953년 8월에야 비로소 항공 소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복무지도 요직에서 밀려나 1949년 르제프에 위치한 방공군 제33방공전투기군단의 부군단장으로 발령받았다. 이때 포크리시킨의 첫 소비에트 연방 영웅 추천서를 써줬던 전 연대장 이바노프가 포크리시킨을 찾아왔다. 이바노프는 부상을 입은 뒤 방공군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부하의 자금 횡령 사건에 휘말려 불명예를 입고 강등에 가까운 전출을 반복하다 강제 예편을 당하는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포크리시킨은 정신적으로 무너진 이바노프를 돌봐주다[13] 자신의 방공군 군단 작전국 부국장으로 이바노프를 데려갔다. 이바노프는 이후 6년동안 복무하며 다시 어깨를 당당히 피고 훈장도 수여받았다.
1951년 6월부터는 제88방공전투기군단 군단장으로 복무했다. 1955년 2월부터는 북캅카스 방공군 부사령관을 맡았다. 장군이 된 포크리시킨은 여전히 비행하기를 좋아했고 특히 야간 비행에 푹 빠졌다. 그의 MiG-17 호출 부호는 전쟁에서 쓰이던 '100번'이었다.
경력을 위해 꾸준히 합동군사지휘참모대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포크리시킨을 견제하던 특정 인물들의 방해로 입학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 1955년에서야 방공군 총사령관이 된 비류조프 원수의 도움으로 합동군사지휘참모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포크리시킨은 우리 조원 중 가장 연장자였다. 그의 식견은 이미 장관이나 총사령관, 국가 지도자급의 최고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교수들의 작전 설계가 실전과 맞지 않다며 당당히 반박한 적도 있었다. 이에 학교장 바그라먄 원수는 "교수진보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학생들에게 배울 점도 많다."라며 항공 작전 설계를 포크리시킨의 자문을 받아 수정했다.
동기 이반 프스티고
관용차가 없어 대중교통을 타고 학교에 등하교 했는데 트램에서 사람들이 휘황찬란한 훈장을 보고 비웃는 소리를 듣기 싫어 훈장을 떼고 다녔다. 이 모습을 본 동기들이 어떻게 3회 영웅에게 차 하나 못내주냐며 대신 당에 따져 관용차를 지급받을 수 있었다.동기 이반 프스티고
1957년 합동군사지휘참모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58년 1월부터 제52방공전투기군 사령관을 지냈다. 1959년 8월부터는 키예프 방공군 사령관이자 키예프 군관구 방공군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1961년 2월 부대 명칭이 변경된 후에도 제8독립방공군 사령관직을 유지했다. 포크리시킨은 이 시기에도 조종간을 놓지않고 1963년까지 비행을 계속했다.
정치력이 없고 정치를 할 생각도 없던 포크리시킨은 밥그릇 싸움 견제를 받아 내내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들을 전전했다. 이런 사태는 이미 먼 과거, 1944년 8월 연방 최초로 세번 째 소비에트 연방 영웅을 받았을 때 군단장 우틴 항공 소장이 포크리시킨에게 경고한 바 있었다.
축하하네, 사샤! 자네는 이 칭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하지만 내 말 명심하게. 이 세개의 별은 곧 가시관이 되어 평생 자네를 찌르게 될 거네...
1968년 7월 소련 방공군 부총사령관에 임명되어 3년간 복무했다.
1972년 1월부터는 DOSAAF 중앙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1981년 11월부터는 소련 국방부 총검사단 군사 고문관을 역임했다. 본인은 계속 일하고 싶어했지만 건강악화로 결국 은퇴생활을 시작했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던 포크리시킨은 회고록 집필과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1985년 11월 3일 인생의 끝이 다가왔음을 느낀 포크리시킨은 퇴원하고 집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려 했지만 전날인 11월 2일 밤에 마지막으로 받은 불필요한 시술에서 쇼크에 빠져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아내 마리야에 따르면 포크리시킨은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메며 9일동안 침대에서 몸부림치며 부하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끊임없이 내렸다고 한다.
1985년 11월 13일 오전 11시 30분 포크리시킨은 모스크바에서 향년 72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포크리시킨의 명성이라면 크렘린 벽 묘지에 갈 수도 있었지만 유해를 화장하고 싶지 않았던 아내의 고집 끝에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2000년 1월 아내 마리야도 타계한 뒤 유언에 따라 합장되었다. 합장할 때 유족들은 1942년 둘이 처음 만난 다케스탄 땅의 흙과 1943년 포크리시킨이 영웅으로 태어난 쿠반 땅의 흙 두 줌도 같이 넣었다.
3. 진급 이력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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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기 주코프 (중), 이반 코제두브 (우)와 찍은 사진 |
- 금성메달 3회 수훈자 3인방 중 하나다. 나머지 둘은 이반 코제두브 항공원수, 세묜 부됸니 원수. 같은 전투기 조종사인 코제두브는 포크리시킨을 선배로 대우하며 그의 전술을 잘 배웠다고 말하고 다녔고, 포크리시킨의 장례식과 묘비 개관식에도 참여했다.
- 회고록으로는 전투기의 날개(Крылья истребителя), 전쟁의 하늘(Небо войны), 전투에서 스스로를 알라(Познать себя в бою)[14] 총 3권이 있다. 아내 마리야에 따르면 '베를린으로 가는 길', '낯선 하늘에 홀로', '알렉산드르 클루보프에 대하여', '사랑 이야기'라는 제목의 4권의 미완성 원고가 더 있었다고 한다.
- 포크리시킨을 괴롭혔던 이사예프는 전후 포크리시킨의 윙맨이이었던 골루베프에게 찾아가 "이제 그만 나를 용서해주고, 내 명예를 회복시켜줬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포크리시킨이 한 대답은 "그 사람은 직접 올 수도 없는 건가?"였다.
- 그리고리 레치칼로프와 1939년부터 쭉 같은 연대에서 복무했지만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성격 차이로 같은 부대 전우 이상으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고 클루보프 사고 사건 이후로는 더욱 악화됐다. 사후 출판된 마지막 회고록에서 포크리시킨은 레치칼로프가 격추 욕심을 부리다 편대원들을 버린 사례들을 여러 건 서술하며 실력은 좋았으나 지휘관의 자질은 없었다고 레치칼로프를 비판했다.
5. 둘러보기
[1] 구력 기준 6일[2] 해양생물학자[3] 미술이론학자[4] 現 러시아 지휘참모대학교[5] 現 러시아 합동군사참모대학교[6] 이반 코제두브, 그리고리 레치칼로프에 이어 3위[7] 이는 이반 코제두브도 마찬가지로, 착륙하자마자 공책을 꺼내 방금 있었던 공중전을 복기하고 분석했다고 한다.[8] 그중 144회의 출격은 적 지상군 공격을 위한 공습 임무.[9] 기존 연대장 빅토르 이바노프는 부상을 입은 뒤 후방부대로 전출되었다.[10] 실제로 패싸움이 있었고 포크리시킨도 참여했었다. 이사예프는 싸움을 포크리시킨이 주도했다고 조작했다.[11] 참전 소련 조종사들이 독일 주파수로 직접 들었으며, 이 문구는 포크리시킨 선전의 대표 문구가 되었다.[12] 이후 이사예프는 부사단장이 됐는데 여전히 포크리시킨을 싫어하고 음해를 해대서 결국 다른 부대로 전출시켰다.[13] 아내에게 집에 있는 날카로운 물건은 모두 치우라고 말할 정도로 이바노프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14] 생전 완성, 사후 출판.
분류
- 1913년 출생
- 1985년 사망
- 노보시비르스크 출신 인물
-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자
- 소련군 병과원수
- 독소전쟁/군인
- 에이스 파일럿/제2차 세계 대전
-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2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3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4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5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6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7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8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9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10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6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7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9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최고회의 10기 연방의회 부위원
- 소련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1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2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3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4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5기 중앙위원회 위원
- 러시아 지휘참모대학교 출신
- 러시아 연방군 총참모부 사관학교 출신
- 소비에트 연방 영웅
- 카를 마르크스 훈장
- 수훈십자장
- 수흐바타르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