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11 17:04:35

상하이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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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上海大韓民國臨時政府廳舍
파일: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jpg
위치 상하이시 황푸구 마당로 306통 4호
1. 개요2. 상세3.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해청사의 흔적들
3.1. 김신부로 22호3.2. 하비로 460호3.3. 하비로 321호
4. 보경리 4호 청사

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중국 상하이시에 두었던 정부청사이다.

2. 상세

현재 상하이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부터 상하이를 떠나는 1932년까지 사용한 건물이며 일명 보경리청사라고도 불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 상하이 조계 내부에서 여러 차례에 건물을 옮겨 다니며 정부를 꾸려 나갔다. 그러나 초기부터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상황에서 1926년 임시정부 노동국총판을 역임한 안창호를 중심으로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출처 이 단체의 도움으로 1926년에 정부청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출처

건물은 1993년 대한민국 정부와 상하이시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공동조사를 진행하여 임시정부가 사용한 건물임을 확인하고 일제강점기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현재는 상하이시 황포구 인민정부의 관리 하에 황포구 문물 보호단위 제17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뜬금없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에도 상하이임시정부청사를 재현한 건물이 존재한다.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에 일강김철기념관과 함께
상하이임시정부청사가 그대로 재현 되어있다. 1886년 함평에서 출생한 김철은 신한청년당에 참여하여 이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교통총장 직무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마당로 306통 4호(보경리청사)는 김철 선생의 명의로 임대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함평에 상하이임시정부청사가 재현되어 있다.
파일:일강 김철.jpg파일:함평임시정부청사 건물.jpg
▲ 왼쪽 일강 김철 선생, 오른쪽 함평에 재현된 상하이임시정부청사

3.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해청사의 흔적들

3.1. 김신부로 22호

1919년 4월 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임시정부의 제1차 의정원 회의가 열렸던 임시정부의 최초 청사이다. 일부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곳은 의정원이 위치한 곳이기 때문에 정부청사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현재는 지번이 '서금2로'로 바뀌어 있다.

3.2. 하비로 460호

1919년 4월 17일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임시정부 청사이다. 하비로 460호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일주일 후에 마련한 청사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곳에 청사를 두고 활동했는지는 파악할 수 없으며 머물렀던 기간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3.3. 하비로 32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해청사 건물로 보창로 309호라고도 불린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에는 임정 요인이나 한인 동포들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정부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내무총장으로 안창호가 부임되고 미국 한인 동포들의 자금 지원으로 마련한 2층 양옥집 형태의 건물이다. 당시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쑨원의 집무실 맞은편에 위치하였다. 이곳에서는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성정부, 대한국민의회 간 통합 회의가 열렸었다.출처
파일:임정청사.jpg파일:화이하이중루 651호.jpg
▲ 왼쪽 하비로 321호 청사와 오른쪽 화이하이중루 651호 건물

하비로 321호 청사는 현재 모두 철거된 상태이며 그 자리에 상점 건물이 들어서 있다. 현재 주소로는 화이하이중루(회해중로) 651호 부근이다.

4. 보경리 4호 청사

파일: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jpg

이 청사는 임시정부가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상하이를 떠나기까지 약 6년 동안 사용했던 상하이 시기의 마지막 건물이다. 마당로 청사는 1925년에 건축된 것으로, 3층으로 된 12호 연립주택 중 4호를 임차하여 사용하였다. 임시정부가 떠난 이후에는 중국인 4~5세대 20여 명이 거주하였고, 이 과정에서 각 층에 칸막이를 설치하였고, 여닫이문이 새로 만들어지는 등 내부의 변형이 있었다.

1991년 들어 청사의 복원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해 12월 13일, 삼성물산 전무를 대한민국측 대표로 하여 상하이시 노만구 문물보호소장과 복원 원칙 협정을 체결하였다. 1992년 8월 24일에 이뤄진 한중수교 이전이였기 때문에 민간외교 차원에서 진행한 것이었다. 보수에 필요한 경비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30만 달러를 제공하기로 하였는데, 비용의 전부를 삼성물산에서 성금 형태로 지원하였다. 중국정부는 대한민국이 제시한 전시와 건물 복원 등에 대한 의견을 수용하기로 동의하였다.

1992년 7월, 대한민국이 중국에 청사의 보수 및 전시에 관한 지침서를 통보하며 본격적으로 복원공사가 추진되었다. 쌍방의 업무 분담이 있었는데, 한국은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전시하는 자료의 제공과 고증을 맡았고, 중국은 건물 건축과 전시에 필요한 집기류와 가구 수집을 담당키로 하였다. 당초 거주 주민의 이주는 1992년에 끝내고 동년 9월에 복원을 완료할 계획이었으나 주민 이주가 원만하지 못해 공사도 지연되었다.

1992년 11월 주민 이주를 마치고 보수공사에 착공하여 1993년 3월 25일 보수공사와 전시를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인 4월 13일역사적인 개관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1년 12월, 건축물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전시물도 완전히 교체하여 재개관하여 현대에 이른다.

주소는 马当路304号/택시로는 马当路自忠路이다.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10호선 신톈디역에서 내려 6번출구로 나와 신톈디 쪽으로 100m 정도 걸으면 된다. 도로가 옆 건물 외벽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판이 걸려있고 작게나마 이정표가 있어 길치가 아닌 이상 찾기 쉽다.
신톈디 구역 바로 옆에 있으며 평범한 중국의 서민 주택가이지만 2010년대 이후 신톈디가 확장되면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인해 청사로 부터 불과 몇십 미터 옆에 명품매장과 카페와 갤러리가 줄지어 있다. 몇 년 후면 임정 건물 둘레까지 확장할 가능성이 크다. 막상 들어가보면 많이 협소하고 다른 명소보다 볼 것이 적은 편이지만, 그나마 그것도 꾸준히 확장하고 관리를 해서 그 정도이다. 좌우의 집 3채 정도를 박물관으로 확장했는데, 100년 전 당시 임시정부 청사는 그 집들 중 1채였다.
무엇보다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서 얼마나 막심한 고생을 겪으면서 살았을지 절실히 마음에 와닿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 공사를 위해 기부금을 받는데, 100위안(한화로 2만 원이 조금 안되는 정도다.) 이상 내는 경우 이름도 새겨준다고 한다. 탕수육 하나 값이니 원한다면 100위안을 준비해서 가도 괜찮다. 다만 2016년 기준으로 보수공사가 이미 완료되었는지 더 이상 눈에 띄게 기부금 모집을 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2020년 1월 기준 보수공사는 이미 완료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