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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생애 | ||
| 재위 시기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바이에른 계승 전쟁 · 폴란드 분할 · 7년 전쟁(동맹의 역전) | ||
| 정책 | 의무교육 · 징병제 · 중상주의 | ||
| 가족 관계 | 가족 관계 아버지 카를 6세 · 어머니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 · 배우자 프란츠 1세 · 차녀 마리아 안나 · 장남 요제프 2세 · 4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 6녀 마리아 아말리아 ·3남 레오폴트 2세 · 10녀 마리아 카롤리나 · 11녀 마리아 안토니아 | ||
| 기타 | 오스트리아 · 헝가리 · 합스부르크 가문 · 신성 로마 제국 · 프리드리히 대왕 · 문명 5 · 다둥이 · 여장부 · 성 이슈트반 왕관 · 쇤브룬 | 
1. 개요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주 및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업적을 정리한 문서.2. 의무교육 실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을 거치며 마리아 테레지아는 손상된 국익과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내정 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전국에 초등학교를 설치해 의무교육을 실시한 것이었으며 덕분에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크게 성장했다.[1]또 일반 징병제를 채택, 전국민의 병역을 의무화하고 농민 출신이라도 급료를 받게 해서 병사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 2세를 무척 증오했지만, 공사 구분이 확고해 개인을 떠나서 합스부르크 제국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적국인 프로이센 왕국을 배우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즉위 초기부터 크나큰 고난과 절망을 안긴 일생일대의 숙적이자 원수였지만 동시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절치부심 끝에 한 명의 위대한 명군주로 성장하고 오스트리아가 유럽을 대표하는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 아버지 카를 6세를 능가하는 멘토와 스승 역할까지 의도치 않게 겸한 셈.
3. 근대화 도입 및 농민 보호
적국 프로이센이 100년 전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 시절에 시행한 조치들을 뒤늦게나마 오스트리아에 도입함으로써 근대 국가로서의 틀을 만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의 오스트리아의 지방 행정은 충성 서약을 받은 봉건 귀족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각 왕국 / 공국에 중앙에서 임명한 총독을 내려보내고, 중앙 관청을 설립하여 각 지방에 존재했던 신분제 의회를 국가 조직에서 배제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을 제외한 모든 지방을 크라이스(Kreis)라고 불리는 행정 단위로 구분하여 중앙집권을 안정화시키고, 지주의 횡포로부터 농민을 보호했다.4. 행정과 사법, 군사 체제 정비 및 개혁
행정과 사법의 영역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한편, 대법원을 설치하고 <테레지아 법전>을 편찬하여 오늘날 오스트리아 민법의 기초를 닦았다. 새로운 조세 제도를 통해 귀족과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했으며[2], 오스트리아에 드디어 제대로 된 일반징세대장이 도입되었다. 예수회로부터 대학에 관한 감독 권한을 빼앗아 고등 교육을 국가의 의무로 만드는 동시에, 빈 의대를 설립하였다. 초등 의무 교육 외에도 중학교에 해당하는 실업학교를 설치했으며,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인 시범학교를 도입했다. 또한 비너노이슈타트에 자신의 이름을 딴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세워 장교들이 체계적인 군사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테레지아 사관학교는 세계 최초의 사관학교이며 오늘날까지도 오스트리아 연방군의 핵심적인 군사교육기관으로 기능하고 있다.5. 경제 부흥
슐레지엔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경제 부흥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기본적으로는 중상주의에 입각해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독점 기업을 불허하였고, 길드 규약을 철폐했다. 그 결과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섬유 공업이 크게 번성하였다.6. 보헤미아 왕관령 해체
보헤미아 왕국의 경제적 발전과는 별개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 귀족들에 대한 증오와 원한을 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보헤미아 왕국은 아버지 카를 6세와 약속한 국사조칙을 깨뜨리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사촌 형부인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카를 알브레히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및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한 최악의 반역자이자 적국의 부역자들에 불과했다.마리아 테레지아는 1743년 5월 12일 프라하에서 열린 보헤미아 국왕 대관식에서 성 바츨라프 왕관(Svatováclavská koruna)을 쓰며 주권 여왕으로 즉위했고, 얀 네포무츠키를 기리는 축제에 참석한 뒤 프라하에 1달 이상 머물다 베네쇼프, 타보르, 체스케부데요비체를 거쳐 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보헤미아에서 여흥을 즐긴 것과 별개로 1749년 빈의 보헤미아 궁정 사무국(Böhmische Hofkanzlei)을 오스트리아 궁정 사무국(Österreichische Hofkanzlei)에 통합시켜 보헤미아 왕관령을 사실상 해체시켜버렸다.
보헤미아 왕관령의 실권을 사실상 오스트리아 빈 정부에 종속시키는 한편 자신을 기꺼이 여왕으로 인정하며 굳건한 충성을 맹세한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을 우대해주었다. 이로써 보헤미아 정부는 독립성을 상실하여 합스부르크 가문과 독일계 관료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했고, 킨스키 가문, 롭코비츠 가문, 리히텐슈타인 가문 등 보헤미아 왕국의 주요 귀족들은 독일인 또는 독일계 체코인으로서 체코 정체성이 아닌 독일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국가 행정과 군대 개혁, 특히 교육의 질적 향상은 체코인에게 나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와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은 장남 요제프 2세와 함께 체코에서도 위대한 군주로 여겨지나 3남 레오폴트 2세의 후손들인 손자 프란츠 2세와 고손자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비롯한 후대의 군주들 역시 마리아 테레지아와 같은 길을 따르며 합스부르크 가문을 두 번이나 배신[3]한 보헤미아 왕국보다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을 향한 우대 정책을 펼쳤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 군주들의 천대를 받은 보헤미아 왕국은 경제적 중요성과 오스트로슬라브주의라는 친 합스부르크 정책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강한 후원을 받는 헝가리 왕국을 넘어서지 못했다. 보헤미아 국정은 빈의 호프부르크에서 처리되기 시작했지만 보헤미아 왕관령은 법적으로 1918년까지 존속했다.[4]
7. 이민 정책
독일인 이주 정책을 통하여 오늘날의 슬로바키아인 헝가리 왕국 북부와 헝가리 왕국 동부 및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에 위치했던 지벤뷔어겐 대공국의 광공업을 크게 증진시켰다. 여기에는 언제 반항할지 모르는 헝가리인을 약화시키는 의도도 있었으며 세르비아인 등을 헝가리 왕국 남부의 군사국경지대로 이주시켜 대튀르크 전쟁 등 계속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공백이 생긴 지역의 인구를 채웠다. 여기에 더해 상재가 뛰어난 남편 프란츠 1세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경제 부흥 프로젝트에 크게 협조했는데, 적국인 프로이센을 상대로 막대한 거금과 폭리를 취한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8. 여관 및 매춘부 탄압
마리아 테레지아가 시행한 정책 중 가장 불필요하고 전근대적인 정책. 동시에 최악의 실책으로 꼽힌다. 모든 여성이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동맹의 역전 당시 함께 동맹을 맺었던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을 혐오했다.[5]그 정도가 지나친 나머지 여성의 술집과 여관 취직을 금지시켰고, 여성은 밤길을 다닐 수 없도록 하는 통금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매질을 가하고 머리카락을 모두 삭발하게 하거나 온몸에 타르를 칠했다. 또한 매춘부를 매우 혐오해 감화원을 설치해 이들을 격리 수용했는데 이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런 어머니의 교육적 영향을 받아 루이 15세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과 갈등을 빚었고, 이게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퍼지자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뒤 바리 부인과 화해할 것을 지시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다.
9. 공동 통치기
남편 사후 1764년 황제선거에서 이미 독일왕으로 선출되어 대관식을 치른 장남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고, 삼남인 레오폴트가 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군주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작위인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보헤미아 국왕이 모두 마리아 테레지아였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모자의 공동 통치기가 시작되었다.[6] 오스트리아 대공위는 남녀 구성원 가리지 않고 다 갖고 있는 지위인 데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과 아들에게 오스트리아 대공이라는 공동 통치자의 지위를 주었지만 앞서 말한 작위 덕분에 실질적인 선임 통치자로서 재임했다.마리아 테레지아는 공동 통치자이며 후계자인 요제프 2세와는 심한 모자 갈등을 빚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제프 2세의 전제적 계몽주의는 여러 관계 없는 국가들이 결혼동맹에서 온 동군연합으로 묶인 느슨한 체제의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보아 아들의 행동에 항상 제동을 걸었고, 요제프 2세는 어머니를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로 보았다. 서로 폐위시키겠다는 협박을 한 적도 있다.[7] 자세한 내용은 요제프 2세 참조.
남편은 알아서 재정 분야를 제외하곤 모두 아내에게 일임했고, 아들 요제프의 영토 확장 및 팽창 정책과 개혁 조치는 우려 섞인 시선으로 경계했지만 모두 막지는 않았으며 군제 개혁과 교육 정책에는 모자의 뜻이 일치했다.[8] 다만 사법 개혁과 교회 개혁이나 종교 정책에서는 태클을 걸어서 요제프 2세는 단독 통치자가 되어서야 자신의 구상을 펼칠 수 있었다. 전형적인 합스부르크 가톨릭 도덕 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와 달리 당대의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계몽전제군주를 꿈꿨던 요제프 2세는 항상 대립했고, 요제프 2세의 개혁 조치에는 보수적인 시각으로 태클을 자주 걸어 계몽군주라는 세평이 무색한 면도 있었다. 특히 종교적으로는 이러한 면이 두드러지는 편이었다.
9.1. 폴란드 분할
폴란드 분할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가 폴란드 왕위를 획득하고 전 국토를 병합하려 하자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끌여들여 분할을 제안했다.마리아 테레지아는 악마와도 같다며 지독히도 혐오하던 불구대천의 원수 프리드리히 2세와 손을 잡았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평소 철저한 도덕주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장을 뒤집어버리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실 폴란드 분할을 오스트리아에서 주도한 것은 본인이 아니라 아들 요제프 2세와 재상 카우니츠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그간의 정책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우려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위해 침묵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그 여자'라는 무례한 호칭으로 부르면서 "그 여자는 울고 또 울었지만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모두 철저하게 취했다."고 비꼬았다.[9]
두 차례의 전쟁 후 유일하게 남은 공적인 프랑스와의 동맹도 결과적으로는 그다지 시원찮았다. 오스트리아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로스바흐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패퇴하고 일찍 독일 전역에서 이탈하자 슐레지엔을 빼앗는 대가로 프랑스에 벨기에를 할양한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1777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 때 또 한 번 프로이센과 충돌했을 때 미국 독립 전쟁을 후원하던 프랑스는 파병을 거부했다.
10. 관련 문서
[1] 이미 적국인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 초등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했으며, 농사 짓는다는 핑계로 신민들이 이를 회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초등교육을 의무화했다. 즉, 이 정책도 프로이센 따라하기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 교육개혁의 책임자였던 펠비거의 학제 발표를 보면 "양성 청소년 교육을 시행한다."라고 규정이 있었다. 즉, 여성들 또한 교육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여성들을 탄압했다는 평을 주로 듣는 가운데 의외인 부분.[2] 프랑스 왕실이 귀족과 성직자에게 면세특권을 계속 부여하다가 프랑스 대혁명이 난 것을 보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다.[3] 사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싸운 횟수나 반란의 심각성을 살펴보면 헝가리인이 체코인보다 훨씬 심했다. 특히 1848년 헝가리 혁명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오스트리아 제국이 공중분해 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4] 엄밀히 말해 합스부르크 제국 내 보헤미아 왕국의 입지 약화는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에서 비롯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존속하던 시절에는 보헤미아 국왕 자체가 1명의 선제후였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갖는 영향력이 상당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빈 회의의 결과 독일 연방으로 대체되면서 정치적 중요성을 잃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종속국 수준으로 전락했다.[5] 한때 퐁파두르에게 'cousin'이라고 쓴 다정한 편지를 보냈다는 추문이 있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단 한 번도 퐁파두르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었다.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와 뒤바리 부인의 기싸움만 봐도 알 수 있듯 당대 예법으로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체면이 깎이는데 편지를 썼을 리가 없다.[6] 반면 토스카나 대공국을 물려받은 레오폴트는 피에트로 레오폴도라는 이름으로 단독 통치를 시작했다.[7] 물론 아들 많다고 후계자를 입맛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도 국사조칙이라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승계했고 유럽 국가의 왕위 계승은 현직 왕이라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훗날 손자 프란츠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는 프란츠 2세) 시절 승계자 페르디난트는 신체 장애에 정신지체까지 앓던 폐인이었지만 다른 이를 세우는 것에 대한 '논의'조차 꺼내지 못했다.[8] 영토 문제에 있어서 아들의 팽창 정책인 제1차 폴란드 분할(1772년)이 개시되기 전에도 오스트리아 단독으로 1769년에 제국 내 위치한 폴란드 왕국령의 월경지를 침략하여 무단으로 합병하였는데, 이때에는 마리아 테레지아도 아들의 뜻에 동의했다.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몰다비아 공국의 부코비나를 합병하는 것은 소극적인 찬성을 했다.[9] 막상 본인도 1713년 국사조칙을 멋대로 깨놓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키고 슐레지엔을 뜯어간 데다, 먼저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였으면서 유독 마리아 테레지아만 콕 집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모두 철저하게 취했다니 뭐니로 물고 늘어지는 건 명백한 내로남불이다. 다만 프로이센-폴란드는 원래 숙적이었지만, 2차 빈 포위전에서 구원받은 오스트리아가 통수를 친 건 조금 말이 나올 일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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