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7 14:48:59

오스트로슬라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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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슬라브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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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민족 분포를 나타낸 지도.

1. 개요2. 상세


1. 개요

오스트로슬라브주의(Austroslavismus)[1]오스트리아 제국슬라브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개념으로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로 부르기도 한다. 1846년 카렐 하블리체크 보로프스키(Karel Havlíček Borovský 1821~1856)가 러시아 제국이 중심이 되는 범슬라브주의에 반대하며 처음 제안했으며,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에 의해 구체화되어 19세기 중반 체코인 자유주의 세력의 민족권리 증진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2]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다른 슬라브족, 특히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의 지지를 받았다.

2. 상세

오스트로슬라브주의는 독일인(오스트리아인) 지배층이 지배하지 않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내에서 세력이 고만고만한 슬라브 민족의 평화로운 협력을 구상했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는 민족단위체 원칙(Prinzip der Nationalitäten)에 따른 8개의 지방군 편성을 대안으로 제시했으나 이는 프라하에서 1848년 혁명이 제압당한 후 지지를 상실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1867년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전환되었으나 이는 헝가리인에게만 준주권을 부여했을 뿐 슬라브 민족은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협상의 대상이 아님을 천명한 꼴이었다. 1880년대에 들어 헝가리인의 가혹한 마자르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오스트로슬라브주의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오스트로슬라브주의는 1918년 제국이 몰락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오스트로슬라브주의의 강력한 옹호자로서 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슬라브계와 함께하는 개혁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를 알게된 범슬라브주의의 옹호자 러시아 제국세르비아 왕국의 정보국은 1914년 사라예보에서 대공의 암살을 비밀리에 계획해 사라예보 사건을 일으켰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이러한 계획은 조카 카를 1세에게 계승되었으나 카를 1세에게는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실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한편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체코국부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헝가리인의 슬라브 차별이 계속 되는 것을 지켜보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전쟁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과 접선한 마사리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억압받는 슬라브 민족이 해방되어야한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는 윌슨이 카를 1세가 재편하려 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과 오중 제국#을 거부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생제르맹 조약트리아농 조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1] 독일어: Austroslawismus[2] 체코인은 강압적으로 가톨릭을 강요하고 독일인을 다수 이주시켜 독일화하려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반감이 강했고, 합스부르크 가문도 30년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반항한 체코인을 딱히 신뢰하지 않았다.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구체화한 팔라츠키도 최종적으로는 체코인이 홀로 서기를 바랬지만 19세기 중반 제국주의의 시대에서 독립해 나가봐야 범게르만주의를 내세우는 프로이센 왕국범슬라브주의를 앞세우는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가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니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차악을 선택한 것에 가까웠다. 실제로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했지만 주데텐란트 독일인과의 갈등 끝에 나치 독일에게 당한 뮌헨 협정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화되어 소련에게 프라하의 봄으로 수모를 겪었던 것을 고려하면 팔라츠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