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독일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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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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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 1918년[2] | ||
위치 | 중동부 유럽 갈리치아 | |
수도 | 렘베르크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공용어 |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독일어 | |
역사 | 1772년 성립 1918년 해체 | |
통화 | 굴덴, 크로네 | |
성립 이전 | 폴란드-리투아니아 | |
해체 이후 |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폴란드 제2공화국 |
1. 개요
1772년부터 1918년까지 갈리치아와 볼히니아[3]에 존재했던 합스부르크 제국 산하 왕국이다. 중세의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을 재건한다는 명분으로 세워졌다.갈리치아-로도메리아는 우크라이나어로는 할리치나볼린(Галичина-Воли́нь), 폴란드어로는 갈리치아보윈(Galicja-Wołyń)에 해당하는 지역의 라틴어 지명이다.[4]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라는 이름은 축약된 국호이며, 정식 명칭은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 및 크라쿠프 대공국과 오시비엥침[5]과 차토르의 공국들이다. 오시비엥침 공국과 자토르 공국은 중근세 폴란드에 실제로 존재한 행정 구역 단위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멸망하면서 공국은 소멸되었으나 이름에만큼은 남게 되었다.
독일어: 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 mit dem Großherzogtum Krakau und den Herzogtümern Auschwitz und Zator[6]
폴란드어: Królestwo Galicji i Lodomerii wraz z Wielkim Księstwem Krakowskim i Księstwem Oświęcimia i Zatoru[7]
우크라이나어: Королівство Галичини та Володимирії з великим князіством Краківським і князівствами Освенцима і Затору[8]
2. 역사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당시 분할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이 병합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려 근거를 찾다가, 중세 헝가리 국왕이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일대[9]의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점을 들어 이 지역을 이른바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으로 명명하였다. 그러나 로도메리아(볼히니아)는 2차 폴란드 분할 와중에 러시아 제국 측으로 넘어가면서 이름과 다르게 볼히니아까지 아우르지는 못했다.이 지역은 폴란드에서도 극도로 농노제가 우세한 지역이었다. 합스부르크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행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무려 전체 인구의 70%가 농노(…)였다.[10] 때문에 귀족들의 힘이 막강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멸망하면서 지위를 한순간에 잃은 이들 폴란드인 귀족들의 불만이 증대되자 합스부르크 왕조는 지역 지주 귀족들과 세습 행정관들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하여 그들을 오스트리아 귀족 사회에 편입시켰으며, 교회, 귀족, 도시 시민(부르주아)의 영방신분(Landstände)으로 구성된 중세적 신분의회인 Landtag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정치적 실권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으며 란드탁 회의는 거의 요식행위였다. 이 지역의 정치적 실권은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독일인 총독이 가지고 있었다.
1804년부터 1867년까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이었으며, 부코비나 공국이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 편입되기도 하였다.[11] 1867년부터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이었다.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는 크라쿠프 대공국이 속해 있었다.
1848년 혁명 당시 이 지역 주민들은 빈에 의회를 수립하고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해달라고 청원했으나 묵살되었다. 그러다 1868년 대타협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편되자 의회가 세워졌고 자치권도 획득했다. 1868년에는 폴란드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어 학교와 공식 행정에서 폴란드어를 사용하고, 독일어는 철도 등 다른 지역과 연결되어야 하는 곳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도록 바뀌었다.
의회의 상원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가톨릭 교회,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 주교들 및 주요 대학 총장들로 구성되었으며 하원은 전통적인 지주 귀족, 부르주아, 도시 시민,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의회의 의석 분포를 계급별 인구비례에 맞추지 않아 정치적 실권은 지주와 부르주아에게 있었으며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농민 대표단은 전체의 절반에 불과했다. 1914년 말에 선거법이 개혁되어 인구비례에 따라 다시 의석이 재분배되었으나,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실행되지는 못했다.
나중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개혁안에 따라 폴란드인이 다수인 서갈리치아와 우크라이나인의 비중이 높은 동갈리치아로 분할하는 계획이 있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후 해체됨에 따라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3.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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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갈리치아 스타니슬라비우의 농촌 초가집 | 갈리치아의 장례 풍경 |
농업 역시 중세의 삼포농업에 머물러 있었으며 유럽 내 다른 지역에서는 이제는 상식이 된 4윤작법(밭을 4분해서 보리, 클로버, 밀, 순무 순으로 심는 농법)이 알려지지 않아 지력 회복을 자연적 회복에 의존해야 했기에 한번 수확한 이후 지력 회복을 기다리느라 몇년 동안 땅이 황무지로 버려지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이러니 농업 생산량은 바닥을 기었고 당연히 아사자가 속출할 수밖에… 심지어 바닥에도 위아래가 있다고, 폴란드인이 주로 거주하는 서부 갈리치아는 계몽군주인 요제프 2세가 기초적인 산업화를 위해 팔츠 지역 독일인들을 전략적으로 이주시킨 덕분에 어느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까지는 성장했으나 여기서조차 소외된 루테니아인 거주지인 동부 갈리치아는 말 그대로 바닥에도 밑바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역이었다.
당연히 루테니아인들은 자기들을 소외시키고 지들끼리 해먹는데다가, 오스트리아에게 받은 자치권을 가지고 폴란드어를 공용으로 지정해 자기들에게 폴란드어 사용을 강요하는 폴란드인들을 증오했으며, 이 지역 민족주의자들은 동부 갈리치아를 별도의 구성국으로 떼어내는 것이 소원이었다. 다만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강제적인 러시아화를 추진하는 러시아를 더 증오해 합스부르크에 충성심이 높았으며 1차 대전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구상한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안에는 이들이 주장한 동갈리치아 분할도 포함되었으나, 사라예보 사건으로 그만…
그나마 제염업과 유리 제조업이 전통적으로 있던 제조업이었는데, 문제는 소금과 유리 생산을 위해 필요한 칼륨을 얻기 위해 숲이 무분별하게 파괴되었고 반대급부로 도시에서마저 석탄이 아닌 전통적인 바이오매스에 의존하던 이 지역 특성상 당연히 난방 문제가 생겼다. 지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녹화사업을 추진했으나 그다지 잘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크라카우와 렘베르크 양대 도시만큼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렘베르크는 제국의 전통[12] 덕분에 빈과 더불어 수많은 민족들이 비교적 조화롭게 살아가는 동네가 되었고,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제2의 고향쯤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서갈리치아에는 19세기 말에 석유가 발견되어, '폴란드의 바쿠'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석유 정제업이 융성했다. 이 유전들이 최고의 생산량을 발휘하던 시기의 오스트리아는 세계 4위의 석유 생산국이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동맹국 국가들이 쓸 수 있었던 사실상 유일한 유전이기도 했다. 동맹에 항복했던 루마니아 왕국의 플로이에슈티 유전은 영국군이 후퇴하면서 파괴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워낙 가난한 지역이어서, 이 지역 청년들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군에 적극적으로 입대했다. 여기에 더해 20세기 초가 되면서 러시아와의 긴장이 높아지자 제국 정부는 이 지역에 군수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철도가 건설되는 등 어느정도 투자가 이루어졌으나, 이 지역은 제국이 망할 때까지 여전히 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4. 여담
- 현대 폴란드와 과거 폴란드 제2공화국 지역 중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학문 수준이 높은 편에 속한다. 과거 독일령이던 서부와 러시아령이던 동부는 농노, 소작농이 대부분이던 반면 갈리치아-로도메리아는 독일령과 러시아령보다 사정이 나았기 때문이다. 다만 카르파티아산맥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지리적으로 고립된 특성상 산업화는 늦었다.
-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를 편입시켜 합스부르크 가문 황제가 폴란드 국왕을 겸하는 방식으로 폴란드 왕국을 완전부활시키려 했다. 그러나 역시 폴란드인이 거주하던 독일 제국의 반대로 최종적으로는 무산되었다.
[1] 위 지도에는 크라쿠프 대공국이 포함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검은색 선으로 구분되어 있다.[2] 1807년부터 1815년까지는 바르샤바 공국.[3] 다만 볼히니아는 명목상의 영토였으며 실제로는 러시아 제국령이었다. 즉, 갈리치아만 실질적 영토.[4] '로도메리아'라는 이름은 볼히니아 지방의 역사적 중심지였던 볼로디미르볼린스키(Володимир-Волинський)에서 유래했다. 중간을 쏙 빼먹었다[5] 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6] 갈리치엔 로도메리엔 왕국 및 크라카우 대공국과 아우슈비츠 차토르 공국들[7]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 및 크라쿠프 대공국과 오시비엥침 자토르 공국들[8] 할리치나 볼로디미리야 왕국 및 크라키우 대공국과 오스벤침 자토르 공국들[9] 오늘날 폴란드의 동부와 남부 영토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다.[10] 여기서도 루테니아인은 폴란드인에 비해 농노의 비중이 더 높았고 정치적, 계급적으로 상류층이 차지하는 비율도 현저히 뒤떨어졌다. 이러니 당연히 농노제 폐지 이후에도 이 지역의 정치적 여론은 주로 폴란드인들이 주도했다[11] 부코비나가 포함된 국가
[12]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법률상 자유주의 등의 사상을 강하게 탄압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했지만, 오랜 다민족 국가로서의 역사로 인하여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것'들에는 관대한 국가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심각한 탄압을 받지는 않았다. 이런 형식적으로는 권위적인 통제와 실질적으로는 느슨한 집행 방침이 공존했던 것을 당대인들은 '슐람페라이(Schlamperei)'적 관행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