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26 02:37:41

남조선국방경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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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green><colcolor=white> 남조선국방경비대
南朝鮮國防警備隊
Korean Constabulary Reserve
조선경비대
朝鮮警備隊
Korean Constabul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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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비대 모표[1]
설립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
1946년 6월 15일 조선경비대로 개칭[2]
해체 1948년 12월 15일[3](총 2년 11개월)
통치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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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산하조직 조선경비대 항공부대[5]
후신 대한민국 육군, 대한민국 공군
파일:조선경비대.jpg
조선경비제1연대
1st Korean Constabulary REGT[6]

1. 개요2. 역사
2.1. 「국방경비대」명칭 논란2.2.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제1대대 소요사건2.3. 경찰과 경비대 간의 대립2.4. 남조선국방경비대 숙군과 14연대2.5. 여수·순천 10.19 사건
3. 장비 및 무장4. 편제5. 상징6. 계급7. 역대 사령관8. 규모9. 비판 및 논란
9.1. 제주 4.3 사건 진압 및 학살9.2. 국군의 뿌리 논란
10. 기타11. 관련 문서

1. 개요

미군정 시기(1945. 9. 9.~1948. 8. 15.) 경찰 예비대 형식의 미군정 산하 준군사조직,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 이전이므로 어떠한 군대를 조직할 수 없었고 오로지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만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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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다른 몇몇 국가에서는 경찰이 특정 지역의 경찰력을 뜻한다. 반면 미국에서 경찰은 특정 지역의 경찰이거나, 경찰이 책임지는 지역을 담당하는 경찰을 말함.

2. 역사

미군정 당국은 1945년 10월 경찰을 보완할 목적으로 11월 13일, 군정 법령 제 28호에 따라 경찰과 육군, 해군 부서들로 구성된 군사국을 총괄, 통제할 국방부[7]를 설치하였고 1946년 1월 15일, 준군사조직으로 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가 창설되었다.

1945년 11월경에는 군사단체가 60개를 넘을 정도였다. 미 군정은 이들이 상황을 어지럽힌다 판단하여, 훗날 대한민국 해군이 될 해방병단을 제외한 모든 사설 무장단체들을 해체시키고 1945년 12월 5일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를 열었다. 이 학교는 지휘관이나 참모가 될 수 있는 장교들을 교육하기 위한 곳으로 당시 입학자 상당수는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8]

태릉에 있던 舊 일본군 지원병훈련소[9]에서 660명의 병력으로 출발하였다. 이러한 결정의 이면엔 당시 존재하던 많은 수의 비공식적 도는 사설군사단체에 대한 미군정의 우려가 작용했다. 미군정은 특히 그런 단체들 중 가장 강력한 조선인민공화국조선국군준비대에 주목했다. 1946년 1월 미군정의 지시를 받은 국립경찰과 미 헌병부대는 서울에 있는 조선국군준비대의 본부와 양주군에 있는 그 훈련학교를 습격하여 해산시켰다.

2.1. 「국방경비대」명칭 논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이 '국방' 명칭과 그 숨은 뜻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1946년 6월 15일, 미군정은 국방경비대의 명칭을 조선경비대로 바꾸었다. 아울러 국방부는 경무부로 군사국은 경비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10]

이러한 이름 바꾸기가 말해 주듯이 국방경비대라는 명칭을 둘러싼 논란은 처음부터 뜨거웠다.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제1기생들이 주고 받은 대화를 음미해보자.
김종오 : 군정청에서는 법령대로 건국정부의 국군이 될 모체를 만들기 위해 국방군을 창설하고 4만 5천 명의 장병을 모집하려고 했다네. 그런데 소련과 영국이 반대를 했다는 거야. 그래서 미국 정부는 국방군이 아닌 경찰예비대를 편성하기로 방침을 바꿨다는 걸세
민기식 : 뭐야? 경찰? 아니 그럼 우린 군인이 되는 게 아니라 경찰이 된단 말인가?
김종오 : 그런 셈이지. 임무 또한 국토방위가 아니라 국내 치안으로 한정이 된다고 하더구만 모집인원도 4만 5천에서 2만 5천으로 대폭 줄이고.."
민기식 : 그렇다면 우린 뭐지? 경찰통역관이 된단 말이 아닌가? 응? 경찰통역관이 되려고 이 고생을 했단 말여?"

민기식이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여러 가지 소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김종오가 들은 정보가 사실임이 나중에 증명되었다.

이른바 우리 국군의 모체가 되는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뒤로, 지원병을 모집할 때의 정식 명칭은 '국방경비대'가 된다.국방경비대원 모집기사

군정청은 조선경찰예비대(Korean Constabulary Reserve)를 창설하기로 하겠다고 공표했으나 그것을 국역하는 과정에서 국군 창설을 주장하던 주도세력들이 우리의 자존심을 허락하지 않는다하여 국방경찰예비대라는 명칭에서 '찰'(察)과 '예'(豫)를 빼고 남조선국방경비대(南朝鮮國防警備隊)라 호칭한 것이다. 그거야 말로 녹피(鹿皮:사슴가죽)에 가로왈(曰)이었다. 군정청에서 트집을 잡아도 국방경비대는 약칭이라 하여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11]

2.2.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제1대대 소요사건

"이따위 경비대 해산시켜라!"

"빨갱이 노랭이같은 놈 몰아내라"

"대대장부터 물러나라"

"보급품 팔아먹은 놈 잡아내라"

유해준(한국광복군 제2징모분처 출신) 부위(중위)는 대원들에게 "차려!"하고 "해산!" 구령을 내리자, 대원들은 대대장실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은 난동을 주도한 5, 6명의 대표를 미군정 재판에 넘겨 처벌하고 대대장 채병덕 참령(소령)과 중대장 정일권 정위(대위)를 다른 부대로 전출시키며, 보급품 부정처분과 관련된 장교 2명을 파면시킴으로서 일단락이 되었다.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 제1대대에 입대한 사람들은 이미 일본군 등에서 군대 경험을 쌓고 학력도 비교적 높은 우수자원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장교가 되는 줄 알고 경비대에 들어 온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장교들을 매우 비판적인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부대원들 눈에는 줏대도 없이 미군의 방침만을 충실히 따르는 장교(노랭이같은 놈) 일본제국주의 지휘통솔을 일삼은 장교, 부정부패한 장교, 그리고 사상이 온건하지 못한장교(빨갱이같은 놈)등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장교들에게 경비대의 앞날을 맡길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일으킨 것이 제1연대 제1대대 소요사건이다.

부대원들은 일본군만주군 출신 장교들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특히 일본군에서 고참병의 모진 기합에 시달렸던 대원들은 경비대에 입대해 일본군의 기합을 다시 받게 되니 울화통이 터졌다. 여기에다가 사용되는 언어만 우리 것일뿐 소총으로부터 피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일본군 것이요. 장교도 일본군, 만주군 출신인데다 내무생활도 일본군 방식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앞으로 어떤 군대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회의를 하게 되었다.

대원들은 만주군 출신들을 특히 불신했다. 만주군 출신 가운데는 좌익 성향이 농후한 장교가 있는가 하면, 보급품을 횡령하는 파렴치한 장교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신이 정일권 정위에 대한 폭행 사건으로 폭발한 것이다. 정일권 정위(대위)가 좌익이거나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만주군 출신 장교의 선임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대장 채병덕 참령(소령)은 일본군 병기 소좌 출신으로 소총 기술자 정도에 불과한데다가 주체 의식이 없고 미군정이 사상의 자유를 허용한 불편부당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보았다. 채병덕 장군이 참모총장으로 6.25 전쟁 초기 보여준 무능으로 인한 작전 실패를 이들은 이미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만주군에 비해 한국광복군 출신 유해준 부위는 달리 보였다. 해방 전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독립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독립군이었다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고 그를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였다. 그러한 독립군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경비대원들 앞에 독립군 후예인 광복군 출신이 나타났으니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가 대원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래서 유해준 부위가 지휘하는 부대는 통솔에 잘 따르고 군기가 스스로 지켜졌으며, 비교적 단결된 분위기였다.

그런데 소요사건 때 대원들이 다른 출신들 장교들 말은 듣지 않았는데, 한국광복군 출신의 유해준 부위(중위)가 하는 말에는 순순히 복종하자,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은 유해준 부위(중위)가 배후에서 난동을 조종한 것으로 오해한다. 이 사건 이후 유해준은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각종 모함과 음해에 시달려야 했다고 증언한다.

제1연대 소요사건을 통해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 창군과정에서 군대의 이념을 확립하지 못하였다는 점, 미군정의 불편부당만 추종해 경비대에 좌익분자를 축출하지 못한 점, 일본군 통솔방식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 신생 조국의 군대로서 정통성을 확립하지 못했다.

제1연대 소요사건에 이어 태릉 육사에서는 제2기 생도들이 생도대장을 구타한 하극상 사건이 발생했다(1946.12) 생도대장이 걸핏하면 생도들에게 체벌을 가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일본군 출신 중대장은 "이놈, 이 새끼"라는 폭언은 물론 생도들을 구타하기까지 했다. 일본군대의 악습이 태릉에까지 전파된 것이다.[12]

이 사건의 여파로, 일본군 색채가 농후한 조선국방경비대에 독립군 출신을 기용하게 되는데, 총사령관으로 한국광복군 제 5지대장 출신 송호성(宋虎聲) 준장[13]이 부임하게 된다.

2.3. 경찰과 경비대 간의 대립

경비대가 경찰예비대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이후 경비대와 경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갈등의 한 요인이 되었다. 조선국방경비대마저 당시 온 사회를 휩쓸던 좌우 갈등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기에, 이는 두고두고 터져 나올 갈등과 분쟁을 예비해 둔 셈이었다. 1947년 6월까지 전라남도 영암군에 일어났던 경찰과 경비대 간의 대립(Police-Constabulary Rivalry)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다.
경찰과 경비대 간의 대립(Police-Constabulary Rivalry)

조선국립경찰(Korean National Police)과 국방경비대(Korean Constabulary) 사이의 대립이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1947년 6월 초에서는 심각한 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양측의 심각한 대립은 경비대원 한 명이 전라남도 영암(Yongam)경찰서에 구금되어있는 자신의 동료-그곳에서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당한-를 구출하려다 실패했을 때에 일어났다.
경비대 장교는 즉시 경비대원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175명을 동원하여, 무장한 채 트럭 네 대에 나눠 타고 영암으로 출발했다. 영암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은 먼저 신북(Shin Buk)파출소에 멈췄다. 그곳에서 근무하던 7명의 경찰관은 상대가 숫자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알고 도망쳤다. 경비대원들은 경찰서 내부를 부수고, 근처 경찰의 숙소를 확인한 후, 신북과 영암 사이에 있는 덕정(Tuk Chung)파출소에 들렀다. 거기서 근무하던 경찰관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도망치고, 나머지 한 명은 붙잡혀 구타당했다.
영암으로 가는 길에 경비대는 경찰을 찾으려고 집집마다 뒤졌다. 어떤 경찰관은 경찰서로 가던 길에 붙잡혔다. 당시 자고 있던 경찰은 이불에서 끌려 나와 심하게 구타당했다. 그런 후 담장에 세운 후 총을 쏘아 중상을 입혔다. 그 외 에도 여러 명이 체포되었는데, 그들 모두 심하게 구타당했다.
트럭 한 대에 타고 있던 경비대원들은 나중에 경찰서 뒤로 차를 몰고 가고, 두 대는 전방으로 갔다. 네 번째 트럭은 집과 도로 봉쇄선을 찾으려고 마을 안에 머물고 있었다. 영암경찰서는 마을 맨 끝에 위치해있었다. 나팔수가 신호를 보내자 경찰서 공격이 시작되었고, 총격이 개시될 때를 기다리던 경찰관들도 대응 사격을 시작했다. 경찰들은 수류탄 5개를 던지기도 했다. 경비대는 무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첫 번째 공격이 실패 후 재반격을 할 수 없었다. 이후 그들은 방어에만 치중했다. 고위급 장교가 개입한 후 총격은 잦아들었다.
전체적으로 경비대원 167명과 경찰 163명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경비대원 2명, 경찰 1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다수는 구타를 당했다.
영암사건은 남한에서 두 세력 사이에 벌어진 여러 심각한 충돌의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에는 산발적인 공격에 대한 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심각한 사태는 없었다.
모든 상황은 주로 군인은 행정 당국의 영향력을 넘어서 있다는 동양적 개념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찰과 경비대 간에는 누가 “제1의 권력”인지 혹은 누가 사회적, 공적 영향력에서 우위에 있는지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조선경비연대(Korean Constabulary Regiments) 3대 및 4대 고문(Advisor) 루스 대위(Captain Clarence C. De Reus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비대원들이 지속적으로 의문을 가졌던 것은, 그들이 왜 경찰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왜 자기들이 통행금지 규정을 지켜야 하는지, 또한 그들이 익히 들어왔듯이 장차 조선 군인이 될 자신들이 왜 민간인들과 같은 법을 준수해야 하는가 등이었다."

경비대의 이러한 권위적인 태도에 대해 설명하며, 국내경비부(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 참모장 김상겸(Kim Sang Kyum) 대령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들은 전시와 일제 시기에 군인의 역할을 목격했다. 군인들은 일반 대중의 존경을 받았으며, 이 젊은 군인들은 그러한 태도를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군인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사람들을 상대로 그러한 태도를 모방했다. 심지어 50년 전 대한제국이 존재할 때도 군대는 정부 내에서 가장 강한 권력이었다. 결국 젊은 군인들은 군의 우월성 말고는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광복절 전날이던 1945년 8월 14일, 일제 치하인 당시 조선에서는 군 초소가 곧 경찰서였다. 해방되기 전, 일본 군경은 경찰이나 경찰 관료를 체포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군인들은 그들이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과 경비대원들이 각 조직의 개별적인 권한을 이해하게 되면, 그들 간의 분쟁은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관계 개선을 위하여 경찰-경비대 모임이 조직되었다. 그래서 경찰과 경비대원이 손을 잡고 있는 선전물이 게시되었다. 긍정적인 신호는 그들이 1948년 10월 여수(Yosu) 폭동 진압에서 훌륭하게 협력한 것이었다
파일:external/blogimg.ohmynews.com/1033711864.jpg
조선국군준비대처럼 독립 직후 한반도에는 훗날 정규 국군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이던 무장집단이 많았다. 그 구성도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 팔로군, 국부군, 광복군, 만주군 등 출신 성분이 다양했다. 오랜 통치로 인하여 조선인 일본군으로 복무한 사람이 20만명에 달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영어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일정한 교육을 거친 뒤에 소위로 임관하였고 영관이나 장관급 장교가 없는 당시 한국군의 특성상 빠르게 진급했다. 영관급은 특례로 몇몇만 임관했다. 일본경찰예비대미 육군 고문관을 지휘관으로 두고 모든 최초 입대자가 이등경사 계급을 받은 것과는 차이 나는 점이다.

미군정 초기에 미국소련과의 갈등을 피했다. 그래서 한반도 남부에 정규군 대신 기존의 경찰[14]에게 치안을 맡겨두었고 이는 조선경비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경찰예비대였기 때문에 군사훈련이 아니라 폭동진압훈련 등 경찰과 비슷한 훈련을 했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장교들이 대부분 일본군만주군 출신들이었기에 실제로는 군대식으로 훈련이 치러졌다.[15] 사실 미 군정도 일단은 눈 가리고 아웅식으로 만든 것이라서[16] 1947년에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소련관계가 틀어지자 조선경비대가 1948년대한민국 육군으로 탈바꿈하는 걸 묵인했다. 차후 1949년 10월 1일에는 육군 항공대가 대한민국 공군으로 독립하게 된다.

2.4. 남조선국방경비대 숙군과 14연대

남조선국방경비대 정보처장 백선엽남로당 첩자들을 노출하지 않고서는 군부를 정화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용하면서도 대규모적인 정보수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여수의 제 14연대를 가장 위험한 부대로 여기면서 그들이 지리산 게릴라 작전 지역을 구축하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좌익에 대한 사찰은 제 1연대(태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연대장 이성가 소령은 부대 안에 침투하고 있는 좌익인사를 색출하고자 김창룡 소령을 정보주임으로 발탁했다. 김창룡은 함남 영흥 출신으로 만주로 건너가 관동군 헌병대 대공 사찰 담당자로 활동하다가 8.15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그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3기의 우수생으로 졸업한 뒤, 소령에 임관되었다. 그의 별명은 Snake Kim이었다.

제 14연대는 여수읍 신월리의 옛 일본 해군 비행기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초대 연대장 이영순 소령은 한 달 남짓 근무하다가 1948년 6월 18일 자로 전출되고, 제주도 제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소령이 부임하였으나 좌경 군인으로 의심받던 그도 곧 경질되어 7월 15일 오동기 소령이 부임했다. 오동기는 평소 군 장교의 부패를 개탄하면서 군대의 개혁을 외쳐 오던 터였다.

병사들의 반찬에 들어가는 고춧가루는 빨간 물감을 들인 톱밥이었다. 오동기는 부임하자마자 송호성 사령관이 독점하고 있던 군대 부식의 납품을 공개 입찰로 바꿔 부식의 질을 높이고, 장교들에게 편중되어 있던 부식비의 배정을 모든 장병들에게 균등하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상인과 장교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그에게 혁명의용군 음모라는 누명을 씌우는 빌미를 제공했다.[17]

그 뒤 송호성은 육군 총사령관에 올랐으나 6.25 전쟁 초기 북한으로 넘어가버렸다. 한 나라의 전직 육군 총사령관이 적국으로 넘어가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관계자들은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주장을 하지만, 육군 총사령관이 퇴각을 못하여 적의 포로가 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여기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이승만 계열에서 이 사건을 계기로 김구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작업으로 확산시키려 한 데 있었다. 최능진 외 2명에 관한 혁명의용군 사건의 공판은 1949년 1월 21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시작되었다. 사건의 연루자들은 최고 책임자 서세충, 정치 재정 책임자 최능진, 14연대 책임자 오동기, 경비대 책임자 김진섭, 강원도 원주 동원 책임자 안종옥, 춘천 동원 책임자 박규일 등으로 발표되었다. 이들은 1947년 12월 하순부터 1948년 9월 22일까지 10회 걸쳐 밀회하면서 원주와 춘천부대 병사 200명과 14연대의 응원을 얻어 서울로 진격하여 정부를 전복할 계획이었다는 것이었다.[18]

윤치영 내무부장관의 보고에 따르면, "오동기는 한국문제가 UN에 상정되자 남한 정부를 파괴할 목적으로 좌익계열의 선동과 음모 아래 소련 혁명 기념일(11월 7일)을 계기로 행동을 전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19] 그러나 사실은 오동기가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은 아니었고 연루자 가운데 몇몇이 입대할 때 그가 보증을 서 준 것이 빌미가 되었다. 오동기가 연루시킨 것은 그가 한국광복군 출신으로 열렬한 김구 추종자였기 때문이다.

1948년 9월 28일, 송호성의 소환을 받고 서울로 올라온 오동기는 바로 구속되었다. 취조의 내용은 최능진과 관련하여 정부 전복과 반란을 음모했으므로 사건의 주모자로서 내용과 배후를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동기 소령은 최능진을 한 번도 만나본 사실이 없다고 대답했다가 박원일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다[20] 박원일은 본디 조선공산당 경기도당 청년부장과 박헌영의 비서를 역임했으나, 해방 뒤에는 살 길을 찾아 경찰에 투신하여 좌익 탄압에 앞장섰다가 남로당 특수대원의 손에 죽었다. 노선을 바꾼 사람이 더 지독하다.

오동기 소령이 구속되어 10년 형을 언도받은 뒤, 일본군 출신 박승훈 중령이 10월 7일 자로 14연대장에 부임해왔다. 연대장이 정부 전복의 혐의로 구속된 어수선한 상황에서 14연대는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서 1대대가 제주도 토벌 작전에 출동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10월 19일 오후 8시에 여수항을 출항하라는 전문 지시를 받았으며, 이에 따라 상륙용 주정(L. S. T.)에 선적작업을 시작하였다.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는 <한국전쟁사>에서 한국전쟁 전 국군의 수가 9만 8000명이었다고 서술했다. 숙청된 군인의 수는 4375명(장교 242명, 사병 4133명)으로 추정된다. 전체 국군의 5%에 해당하는 수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제거된 군인만 1667명이다.

1946년부터 1950년 1월까지 군인 4910명이 불명예제대했다. 숙군이 본격화하자 불명예제대자 수는 껑충 뛰었다. 1947년 181명, 1948년 1693명, 1949년 2440명, 1950년 53명이 군복을 벗었다.

2.5. 여수·순천 10.19 사건

10월 19일 오후 9시 30분 무렵이 되자 제 14연대의 장교들이 반란은 일으켰다. 연대 주임상사였던 지창수는 군대 안에 침투해 있던 좌익들과 함께 부대에서 제주도 출병을 위한 장교들의 환송 회식하는 자리에서 16명의 장교를 사살했다.[21] 당시 14연대의 3개 대대에는 일제 무기 대신에 M1 개런드 소총이 지급되어 있었는데, 파견명령을 받은 대대가 M1 개런드 소총과 M1919 브라우닝 기관총을 모두 거두어 제주도로 가려 했기 때문에 당초에 지창수의 파벌에게는 무기가 없었다.

이들이 봉기할 당초에 추종한 사람들은 40여 명이었다. 반란 당시 지창수는 "우리는 제주도 출동에 앞서 이들 악질 반동 경찰과 일본군을 타도해야 하며, 나아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병에 반대한다."고 병사들을 선동했다. 오동기 연대장의 체포와 다가오는 숙군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제 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토벌 작전이라고 하는 마음내키지 않는 명령에 불복하여 선제공격을 하기로 했다.

10월 20일 오전 3시에 여수경찰서를 습격 점령한 제 14연대 대원들은 오전 5시가 되자 그 수가 2000명 정도 증가했다. 여수를 장악한 뒤 순천쪽으로 확대해 나아갔다. 이들에게는 제주도 토벌을 위해 미군의 M1 개런드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가 새로 지급된 직후였기 때문에 화력이 막강했다.[22] 오전 9시 30분부터 시작한 제 14연대와 군경의 교전이 오후 5시쯤 끝나면서 순천경찰서는 제 14연대에 의해 점령된다.

10월 21일 오전 8시 쯤에 유치된 죄수 20여 명을 석방하여 경찰에게서 노획한 무기를 그들에게 제공했다. 그들은 무장게릴라 인민군를 편성하여 사령부를 경찰서에 인민위원회를 민족청년단 사무소에, 인민재판소를 군청에 각각 설치하는 한 편, 각 공무원과 경찰 가족, 우익 정당, 청년 단원 400여명을 검거하여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그들 가운데 간부급은 총살형을 당했고 나머지 100여명은 23일 국군의 진격으로 사형 집행 직전에 구출되었는데, 순천경찰서장 양계원의 총살형이 가장 처참했다.[23]

10월 21일 오후 3시에 여수를 점령한 제 14연대는 여세를 몰아 우익 요인과 경찰관 가족을 살해하고, 순천의 경찰서, 군청, 읍사무소, 한국전력회사, 은행 등 공공기관을 접수하고 간판을 내걸었다. 그들은 자칭 계엄령을 선포하여 순천재판소를 인민재판소로 개칭하여 재판을 시작했다.[24] 재판인 민간인들이 진행했다. 경찰관, 관리, 지방지주, CIC의 첩보원들이 인민재판에 회부되었으며, 벌교에서는 한 자리에서 67명이 처형되었다.[25]
파일:부역자 처벌을 위해 시민들을 집결시킨 모습.jpg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압 후, 부역자 처벌을 위해 여수시민들을 집결시킨 모습

미국 군사고문단이 진압사령관 원용덕에게 넘겨준 작전은 'F4 작전'으로서, 찾아서, 묶어둔 뒤에, 공격하여, 끝낸다.(Finding, Fixing, Fighting, Finishing)는 뜻이었다.[26] 4F작전의 하수인은 세칭 백두산 호랑이라 불리우는 김종원이었다. 전직 관동군 헌병 출신이었던 그는 여수 시민들을 공설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영문도 모르는 시민들은 날씨와 농사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김종원은 시민들에게 팬티만 입힌 상태에서 총살하거나 철사로 손가락을 묶어 오동도 앞바다에 밀어 넣었다. 자신이 차고 있던 일본 군도로 직접 피의자의 목을 베고 한 자리에서 7~8명을 처형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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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불타 초토화된 여수 시가지

초토화 작전으로 여수·순천 10.19 사건은 종식되었지만, 이때부터 무서운 보복과 살육이 전개된다. 물 빠진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즉결처분 되었으며, 정체불명의 편지가 배달했다는 이유로 배달부가 처형되었다. 목포, 해남, 완도, 진도 지역에서 민간인들이 바다에 실려 가 돌에 매달린채 수장된다.[28]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에게 음식을 제공한 여성동우회의 한 회원은 "호박 잎 하나 건네준 죄"로 잡혀갔다.[29] 종산국민학교에서는 125명을 처형하여 묻어버렸다. 민중들 사이에서도 해묵은 감정을 이유로 처형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여자들의 국부를 막대기로 쑤시기도 했다.[30] 군번이 260×××로 시작되는 군인들도 처형되었는데 14연대의 병력의 군번이 260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수·순천 10.19 사건에서 제주도로 출동거부한 제 14연대와 교전과 숙군으로 남조선국방경비대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전환작업은 1948년 11월 30일로 미루어진다. 법률 제 9호로 공포된 「국군조직법」과 12월 7일 대통령령 제 37호로 공포된 「국방부직제령」에 따라 12월 15일 통위부는 국방부로, 남조선국방경비대대한민국 육군으로 정식 편제가 된다.

3. 장비 및 무장

미군정 당시만 해도 최우선적으로 경찰이 미군으로부터 장비를 먼저 받았었고 조선경비대는 창설의도가 경찰예비대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조직이었기 때문에 장비와 총기의 지급이 경찰에 비하여 상당히 늦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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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일본 제국 육군[31]해산하면서 남겨진 군복과 총기들로 무장이 되었다. 38식 소총의 생산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미 생산한 물량도 많았기에 종전까지 99식 소총 모두 사용된다. 무궁화 모양의 모장이 아니면 각반까지 완비해 전형적인 일본군 보병을 연상시키는 사진도 일부 남아있을 정도였다. 2차대전 당시 미군 아이크 재킷을 상의나 조선경비대만의 군모를 채택하는 등 혼착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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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역시 38식 소총, 99식 소총, 일본 군도가주류를 이루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몇개월 전인 1948년 4월 제주 4.3 사건진압과 여수·순천 10.19 사건과정에서 조선경비대도 점점 미군장비를 지급받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M1 개런드, M1 카빈, M1911,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27대, 57mm M18 무반동포 140정, 2.36인치 바주카 1,900문, M3 105mm 경곡사포 91문이며 전차는 한 대도 없었다.

4. 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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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10.19 사건당시 국군 배치도

서울과 8도에 하나씩 모두 9개 연대가 창설됐다.

그 첫 번째가 바로 태릉에서 창설된 1연대였다. 1연대의 창설 중대장으로 일본군 소좌 출신의 채병덕이 임명됐다. 2연대는 충남 대전 비행장에서, 3연대는 전북 이리에서, 4연대는 전남 광산에서 창설됐다. 5연대는 경남 부산, 6연대는 경북 대구, 7연대는 충북 청주, 8연대는 강원 춘천, 9연대는 제주였다.

각 연대는 모병을 거쳐 편성을 완료하기까지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걸렸다. 1연대 창설 1년 후에 국방경비대는 총 1만8000여 병력을 가진 군대로 성장했다.

간부와 사병을 따로 모집했다. 간부는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많았고, 사병은 각 지역에서 모병했다. 미군정은 정치적 중립이란 원칙을 세웠고, 인적 구성은 친일여부가 아니라 군사적 능력과 미군정에 대한 충성도 등을 우선시했다.

예컨데 1연대 A중대(現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비호여단) 중대장은 채병덕 정위로 총 인원은 187명이었고 경비대 사령관은 미 육군 중령인 존 마샬이었다. 창설 인원은 태릉에 있던 일본군 지원병훈련소에 주둔했다.#

1946년 6월 15일엔 조선경비대로 개칭된 뒤 9월에 첫 한국인 지휘관인 이형근이 사령관 대리로 임명된 뒤 이듬해인 1947년 2월 1일 한반도 남쪽을 각각 담당할 제1, 2, 3여단이 동시에 창설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9월 1일에 국방부 산하로 들어가고 9월 5일에 대한민국 육군이 되었다. 11월 3일부턴 국방부 산하에 대한민국 육군본부가 탄생하였다. 또한 이 와중에 뒷자리 여단들도 창설되었고, 기존 여단의 연대들이 차출되어 기간(基幹)부대가 되기도 했다.

참고로 마지막 국방경비대 출신 제대자는 현지임관 출신으로 1983년 10월 31일에 전역한 최갑석 2군 부사령관과 이명구 제38사단장. 당시는 12.12 쿠데타 세력이 군부를 장악하고 있어 육군참모총장은 육사 10기 출신 황영시(1951년 임관)였다.

5. 상징

파일:남조선국방경비대모표.png <nopad> 파일:국방경비대 제1연대기.jpg <nopad> 파일:국방경비대 제14연대기.jpg
<rowcolor=#fff> 모표 제1연대기[35] 제14연대기

타 부대의 마크는 불명이다. 제1연대의 깃발처럼 그대로 승계된 경우도 존재한다.

6. 계급

처음엔 대한제국군의 정부참을 따랐으나 계급이 어렵다고 1946년 12월 1일 대중소로 바꾸었다. 처음엔 장성급 호칭이 없었으나 1947년 2월에 손원일송호성이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생겼다. 관련글
구분 개편 전[36] 개편 후[37]
장성급 장교 없음 대장[38]
중장
소장
준장[39]
영관급 장교 정령
부령
참령
대령
중령
소령
위관급 장교 정위
부위
참위
대위
중위
소위
하사관 대특무정교
특무정교
정교
특무부교
부교
참교
특무상사
일등상사
이등상사
일등중사
이등중사
하사
사병 일등병사
이등병사
일등병사
이등병사

7. 역대 사령관

직책 대수 인물 재임기간
경비대 총사령관[40] 1대 미합중국 육군 중령 존 마샬(John T. Marshall) 1946. 1. 15-1946. 2. 5
2대 미합중국 육군 대령러셀 베로스(Russell D. Barros) 1946. 2. 5-1946. 8. 15
사령관 대리 남조선국방경비대 참령 이형근(李亨根)[41] 1946. 9. 28-1946. 12. ?
3/4대 남조선국방경비대 중령 송호성(宋虎聲)[42] 1946. 12. ?-1948. 8. 15
5대 남조선국방경비대 대령 이응준(李應俊)[43] 1948. 8. 15-1948. 12. 15
경비대 육군사령관[44] 1대 원용덕[45] 1946. 1. 15-1946. 12. 13
2/3대(총사령관 겸직) 송호성 1946. 12. ?-1948. 11. 20
4대 이응준 1948. 11. 20-1948. 12. 15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관[46] 1대 손원일 1946. 6. 15-1948 8. 15
경비대 항공대 사령관[47] 1대 최용덕 1947. 7. ?-?

8. 규모

1946년 1월 15일에 처음 문을 열었을 땐 187명 규모였고 한국인 가운데 최고계급자가 정위(대위)였다. 다만 곧 이응준이 대령(정령)으로 임관한다.

1948년 12월 7일에 보병 5개 사단(15개 연대) 규모였으며 장교 1,403명, 부사관/병이 49,087명으로 50,490명 규모였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육군의 상한선은 65,000명으로 증가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전엔 규모를 계속 키워 94,974명에 8개 사단(22연대) 수준이었다.

9. 비판 및 논란

남조선국방경비대의 논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 스스로 던져 보아야 한다.
남조선국방경비대가 군대인가? 아니다, 경찰예비대, 미소공동위원회 소련군정의 항의와 눈치를 보고 삼팔선 이남 비정규 치안유지조직으로 만들어졌다. 미군정조차 이들을 군대라고도 주장하지 못했다.
남조선국방경비대대한민국 정부의 군대인가?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부터이다.
그렇다면, 남조선국방경비대가 미군인가? 아니다.
남조선국방경비대가 한국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는가? 아니다. 미군정 치하의 미군장교들의 뱀부계획 (BAMBOO計劃)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미 제24군단의 헌병참모인 쉬크(Lawrence E. Schick) 준장이 취임했다.

9.1. 제주 4.3 사건 진압 및 학살

1948년 제주 4.3 사건 당시,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진압 작전에 투입된다. 제주도 주둔 제 9연대(박진경 대령 암살로 송요찬 부임)와 부산 주둔 제 5연대의 1개 대대가 파견되어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 경찰력만으로는 사태 해결에 한계를 느끼자 미군정남조선국방경비대를 투입하게 된 것이다. 제주 4.3 사건/전개 참조

이 과정에서 여수 주둔 제 14연대[48]출동 집단 거부로 여수·순천 10.19 사건로 이어지게 된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육군 전환과정은 1948년 12월로 연기된다.

9.2. 국군의 뿌리 논란

일반적으로 준군사조직내무군 등 전통적 용례를 제외하고는 '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정규군과는 별도의 편제를 갖추고 독립성이 높다. 경찰이나 경비 조직에 포함되어 있다. 한국광복군조선의용군은 '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남조선국방경비대는 '대()'라는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군대로 볼 수도 없고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군정과 국제사회의 눈치 때문에 미군정조차 '군()'이라 인정하지 않았다.[49]

조선경비대가 우리 군의 뿌리인지 논란은 다시 미군정 경찰과 경비대 간의 대립을 다시 상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상황은 주로 군인은 행정 당국의 영향력을 넘어서 있다는 동양적 개념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찰과 경비대 간에는 누가 “제1의 권력”인지 혹은 누가 사회적, 공적 영향력에서 우위에 있는지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조선경비연대(Korean Constabulary Regiments) 3대 및 4대 고문(Advisor) 루스 대위(Captain Clarence C. De Reus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비대원들이 지속적으로 의문을 가졌던 것은, 그들이 왜 경찰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왜 자기들이 통행금지 규정을 지켜야 하는지, 또한 그들이 익히 들어왔듯이 장차 조선 군인이 될 자신들이 왜 민간인들과 같은 법을 준수해야 하는가 등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군인이 되고자 하는 조선경비대 대원들이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있어선 안될 문민통제를 뛰어넘는 마인드 문제였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은 공식적으로 정치 개입이 금지되어 있다.[50]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의 정치적 중립 위반으로 1961년 5.16 군사정변, 1979년 12.12 군사반란그리고 2024년 12.3 비상계엄 쿠데타와 내란과 같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그와 같은 일이 많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문민통제의 범위를 넘어서는 남조선국방경비대를 계승하느냐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을 가진 민주주의 군대였건 의병-독립군-한국광복군계보를 잇는 국군으로 계승하느냐 논란이 지속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2023년 9월 7일 국방부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은 국방경비대사관학교라는 입장을 재차 확인했다군 "육사 전신은 국방경비사관학교…국군 뿌리는 독립·광복군"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육사는 1945년 설립된 군사영어학교를 모체로 해 국방경비대사관학교, 조선경비대사관학교를 거쳐 1948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로 정식 출범했다"고 밝혔다.이는 이종섭 국방부장관의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을 재확인한 것이다. 다만 전 대변인은 "이는 육사의 전신, 육사에 한정해 말씀드린 것"이라며 "국군의 정신적 뿌리, 토대는 한국광복군·독립군에 있다"고 밝혔다..

2023년 9월 6일 이종섭 국방부장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육사의 정신적 뿌리는 신흥무관학교인가, 국방경비사관학교인가?’라는 질문에 “국방경비사관학교로 보고 있다”라고 답한 이종섭 국방부장관의 답변에 대항하여 2023년 9월 15일 이종찬 광복회장은 국군의 원조는 일제의 머슴을 하던 이들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한국광복군 창군 기념식에서 ‘국방경비사관학교가 뿌리’ 발언 비판

2025년 8월 15일 MBC 뉴스"광복군은 해산한 적 없다"‥우리 군의 뿌리는 광복군에 따르면 ..한국광복군 대원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이른바 '복원선언'을 하고 귀국했었다. 그런데 이 복원 선언이 광복군의 해체로 왜곡돼, 한국광복군이라는 우리 군의 뿌리가 사라진 것처럼 여겨져 왔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학예연구관인 양지선은 "조국의 국군으로 귀속됨을 선언한다고 되어있거든요, 광복군이...그렇기 때문에 이거는 국군의 전신으로 보아야 한다.

10. 기타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제 29화에서 제주 4.3사건 당시 남조선국방경비대와 경찰간 교전하는 장면이 있다.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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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상징은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의 가문인 전주 이씨를 상징하는 문양인 이화문(李花, 오얏꽃)이다. 이는 대한제국 황실을 계승했다기보다 이승만전주 이씨 (양녕대군파)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도쿄에서 3박 4일 머무르면서 1945년 10월 14일에 이미 도쿄에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2차례 회담, 맥아더의 주선 하에 존 리드 하지 장군을 만났고 10월 16일 고국에 귀국하게 된다. 1945년 10월 20일 중앙청에서 미군정이 마련한 「이승만 연합군 환영식」을 가지게 된다. KBS 2008.9.6. 방영했던, KBS 한국사전 – 이승만 제2부의 영상 11분, 34~37분 보면 맥아더의 보증과 승인하에 이승만의 귀국을 보증했다. 『맥아더의 메모장』을 보면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이라 명시하며 예우했다. 당시 중국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과는 아무런 협의가 없는 상태에서 남조선국방경비대가 만들어졌다. 한국광복군의 상징 무궁화였고 남조선국방경비대는 디자인이 많이 다른 이화문을 그대로 쓰고 있다.[2]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 측이 '국방' 명칭과 그 숨은 뜻에 대해 문제를 제기되어 '국방'이란 명칭을 삭제[3] 남한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8년 9월 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대한민국 육군으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여수·순천 10.19 사건에서 제주도로 출동거부한 제 14연대와 교전과 숙군으로 실제로는 12월로 미루어진다. 그래서 제도적으로는 1948년 11월 30일 법률 제 9호로 공포된 「국군조직법」과 12월 7일 대통령령 제 37호로 공포된 「국방부직제령」에 따라 12월 15일 통위부는 국방부로, 남조선국방경비대대한민국 육군으로 정식 편제가 된다. 여기서는 제 4대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에 이어 제 5대 육군 총사령관 이응준 장군의 임기 마지막이 12월 15일이기에 이 날을 해체일로 잡는다.[4] 미군미군정 소련군소련군정에 의한 분할점령상태, 이 당시엔 남한이든 북한이든 정통성 있는 정부가 없는 무정부 상태였다.[5]대한민국 공군의 전신이다.[6] Regiment, 즉 연대의 약칭이다.[7]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로 65, 서울브라운스톤남산아파트 자리[8] 당시 미군정은 군사영어학교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 한국광복군 출신들이 균등하게 참여하기를 바랬으나 상당수의 한국광복군 출신들이 미군정에 부정적이라 소규모만 참여하였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였지만, 중공과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지리적으로도 사회주의권과 인력풀이 있는 지역과 가까웠기에 충원과 지원이 쉬웠다. 그런 그들도 군 경력자가 절실하여 일본군 출신들을 받아들여야 했는데, 특히 북한 공군 조직은 일본군 출신들이 대다수였다. 이는 일본군 출신들이 소수였던 남한의 공군과는 대조되는 현상이었다.[9] 현재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574, 육군사관학교자리[10]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일월서각, 1986), 109~110쪽 ; 송광성 『미군점령 4년사:우리나라의 자주, 민주, 통일과 미국』(한울 1995), 107쪽; 박영수, 『운명의 순간들 : 다큐멘터리 한국근현대사』(바다출판사, 1998), 296~297쪽[11] 유현종, 『장편소설 백마고지 : 김종오 장군 일대기』(을지출판공사, 1985), 91~92쪽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1권』, 인물과 사상사, 2006, 210~211쪽[12] 조승옥,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 그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글씨앗, 2024, 421~423쪽[13] 6.25 전쟁 초기에 납북[14] 해방 직후에 23,000명 규모였다. 상당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속의 경찰이 그대로 인수되었다.[15] 아예 백선엽각개전투 등을 시킨 탓에 경찰처럼 훈련하라는 미국 고문관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16] 북한의 경우는 조선인민군의 역사란에 잘 설명되어 있지만 이미 더 본격적으로 정규군을 창설할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17] 출처 : 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 1998, 366~367쪽[18] 동아일보 1949. 1. 23.자[19] 국회속기록, 1949.10.27.[20] 한국전쟁사(1), 1967, 485쪽[21] 제임스 하우스먼의 증언, 1995, 173쪽[22] 백선엽, 군과 나, 1989, 340쪽[23] 세계일보, 1948. 10. 28.[24] 국회속기록 1949. 10. 27.[25] G-2 Weekly Summary, No. 169, 1948[26] 제임스 하우스먼의 증언, 184쪽[27] 『 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169, 213, 311쪽[28] 『 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 16, 288, 229, 258쪽[29] 순천시사, 1997, 818쪽[30] 『 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 289~323쪽[31] 조선 주둔 일본군은 1945년 9월초부터 1948년까지 점진적으로 해산하면서 일본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32] 1948~49년 사이 대구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반란군 외는 제3보병사단 제22연대로 합병시켰다. 참고로 대구 10.1 사건 수년 후에 일어나서 별개의 사건이다.[33] 정확히는 제10연대를 기간연대로 제8사단이 창설되었고, 이후에도 제8사단 예하에 있었지만 2017년 11월 30일에 해체됐다.[34] 다만 (구)수도사단으로 승격될 때 현 수도사단의 전신인 수경사로 보냈기에 좀처럼 언급되지는 않는다.[35] 수도사단 예하 제1보병연대의 호랑이 마크이다. 실제로도 제1보병연대의 전신이다.[36] 1946. 1. 15. ~ 1946. 11. 30.[37] 1946. 12. 1. 이후[38] 최초의 대장 진급자는 1952년에 진급한 백선엽이었다. 1946년에 소위로 임관해서 6년 만에 대장 진급.[39] 최초의 준장 진급자는 손원일과 송호성이며 중국 중앙군 소장 출신인 김홍일특별임관으로 준장으로 임관했다.[40]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현재의 합참의장이나 국방참모총장이라 볼 수 있다. 아니면 중국이나 북한총참모장과 비교할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보다는 통합군사령관에 더 가깝다.[41] 1920-2002. 일본군 대위 출신으로 한국군 군번 1번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1번을 받은 걸로 채병덕과 사이가 나빠졌다. 이유는 채병덕도 1번을 노리고 있어서. 5대 총사령관을 지낸 이응준의 사위이다. 최종 계급은 한국군 육군 대장이다.[42] 1889-1959. 김구의 측근으로 육군 창설 후 사단장 등을 지내다가 김구의 암살 이후 납북된 뒤에 조선인민군 여단장 등을 지내다가 1954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유배됐다.[43] 1891-1985.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군 대령(대좌)으로 근무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최종계급은 한국군 육군 중장이다.[44] 현재의 육군참모총장에 상당한다.[45] 1908-1968. 만주군 중령(중교)이었다. 만주군에선 군의관이었다. 최종계급 한국군 육군 중장.[46] 현재의 해군참모총장에 상당한다.[47] 현재의 공군참모총장에 상당한다.[48] 제주도가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독립되기 이전엔 전라남도에 속해있었고 제주도 주민과 전라남도 도민과 동질의식이 있었다.[49] 조선경비대를 군대로 창설되면 미군이 한반도에서 쫒겨나갈 수 있었기에..[50] 대한민국 헌법 제5조 제2항(국군의 사명), 군인복무기본법 제33조(정치운동의 금지), 군형법 제94조(정치 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