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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colcolor=#fff> 김해 구산동 고분군 金海 龜山洞 古墳群 | |
소재지 |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20번지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
면적 | 3,663㎡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시대 | 가야시대 |
위치 | |
1. 개요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가야의 고분군.2. 상세
김해 일대에서 흔치 않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가야 멸망기의 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조성 연대는 7세기로 보고 있다. 현재는 2기만 남아 있지만 조성 당시에는 훨씬 많은 무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1기가 조사되었는데, 당시 지명을 따서 이 무덤을 삼산리 1호분이라고 불렀다. 다만 이때 조사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2기 중 동쪽에 위치한 봉분은 1호분(구산동 63·64번지), 서쪽의 수로왕비릉에 인접한 봉분은 2호분(구산동 70번지)으로 지정했다. 처음에는 규모가 크고 상태가 좋은 1호분이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삼산리 1호분이라고 봤지만, 2024년 조사결과 지금의 2호분이 삼산리 1호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봉분의 규모는 직경 14m, 잔존 높이 4m 가량이었으며, 내부는 이미 도굴되었지만 2호분에 딸린 무덤인 배장묘에서 나온 토기를 통해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다. 조사팀은 1, 2호 무덤 사이에서 3기의 무덤을 더 발견했는데, 이에 따라 사적 범위 재지정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이한 점은 2호분의 천장석에서 후대에 남긴 붓글씨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글은 1951년 3월 시굴하였으나 유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끝부분에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와 서울대 교수 등이 함께 했고 고분 인근 김해농고 학생 30명도 참여했다고 적혀 있다. #
원래 구산동 일대의 A 고분군과 대성동 21-2번지 일대의 B 고분군이 함께 사적 75호로 지정되어 있었다가, 1999년 B 고분군이 '김해 구산동 백운대 고분'이라는 이름으로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면서 분리되었다. 백운대 고분은 무덤 2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1기는 1997년에 부경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했다.
3. 사적 제75호
김해시 동북쪽에 있는 분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무덤들로, 수로왕비릉에서 동북쪽으로 100∼500m 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 2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데 1기는 규모가 매우 크고 다른 1기는 절반정도 남아 있는 상태이다. 무덤의 안은 관을 넣는 방(현실)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쌓아 둥글게 무덤의 형태를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현재 2기만이 확인되고 있지만, 원래는 더 많은 무덤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견된 유물만으로는 무덤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으나, 무덤의 구조로 보아 김해 지방에서는 시대가 가장 늦은 무덤 중 하나로 생각된다.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많지 않은 굴식돌방무덤이면서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내에 있어, 이 지역의 무덤을 연구하고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무덤들이다.
현재 2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데 1기는 규모가 매우 크고 다른 1기는 절반정도 남아 있는 상태이다. 무덤의 안은 관을 넣는 방(현실)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쌓아 둥글게 무덤의 형태를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현재 2기만이 확인되고 있지만, 원래는 더 많은 무덤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견된 유물만으로는 무덤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으나, 무덤의 구조로 보아 김해 지방에서는 시대가 가장 늦은 무덤 중 하나로 생각된다.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많지 않은 굴식돌방무덤이면서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내에 있어, 이 지역의 무덤을 연구하고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무덤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