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부소산성 扶餘 扶蘇山城 Busosanseong Fortress, Buyeo | |||
분류번호 | 대한민국 사적 제5호 | ||
위치 |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로 31 (쌍북리)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면적 | 1,022,558㎡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제작시기 | 백제시대 | ||
관리자 (관리단체) | 부여군 |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 <colbgcolor=#000><colcolor=#fff> 한국어 | 백제역사유적지구 | |
영어 | Baekje Historic Areas | ||
프랑스어 | Aires historiques de Baekje | ||
국가·위치 |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15년 | ||
등재기준 | (ii)[1], (iii)[2] |
<colbgcolor=#008080> 부소산성 전경 |
부소산성 일대의 위성사진[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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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남도 부여군에 위치한 부소산의 산성.700년 백제 왕조의 마지막 수도. 부소산성 일대는 당시엔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이라고 불렸다.
2. 조사 내용
백제 사비기 수도의 배후산성이다. 편의상 사비성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웅진시기 공산성[4]과는 달리 배후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소산성 자체만을 사비성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그래서 이전에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던 부소산성 남쪽의 관북리 유적이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는데 관북리 유적이 바로 수도 사비의 주요 왕궁 시설들로 추정되는 건물의 터들이 발견된 유적이었다.
사실상 사비성의 주요 시설이 관북리 유적에 있기 때문에 부소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될 때도 관북리 유적과 함께 지정되었다.
2.1.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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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 부소산성의 성벽과 사용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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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 부소산성의 남벽의 판축 |
특히나 부소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도 주요한 거점으로써 재사용하면서 아예 신라가 쌓은 구간이 있는데, 편축기법[5]을 사용하여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면석의 뒷채움부 판축양상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기본적으로 토성과 석성이라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뒷채움부만 보더라도 사질계의 밝은색 점토로 비교적 대충 채워 넣었기에 백제와 신라의 축성기법은 눈에 띄게 다르다.
백제가 시종일관 토성만 쌓지는 않았다. 토성에 가깝지만 성벽의 외면에 석성처럼 돌을 쌓은 경우도 꽤나 많다. 가장 가까운 사례라면 바로 부소산성과 연접한 부여 나성이 대표적이다. 체성부 자체는 토성의 축조방식에 충실하지만 외면만 가공한 돌을 면석으로 삼아 쌓아 올렸다. 단순히 면석만 대략 가공하여 쌓은 것은 아니었다. 발굴해보니 면석+잡석 뒷채움+토축체성부 구조로 쌓았음을 알 수 있었다.
2.2. 관북리 유적
관북리 유적에서는 특히 이중 주춧돌을 사용한 대형 건물지를 비롯한 다양한 건물지와 연못(蓮池), 전형적인 백제식 대형목곽고 등 저장시설이 있던 흔적이 나왔다. 하지만 관북리 유적의 유구들이 비교적 양이 적고 위계가 있는 유구라고 해봐야 이중 주춧돌 건물지 말고는 없다. 관북리 유적이 왕궁 터로 추정하긴 하지만, 완벽한 궁전의 건물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아서 다소 아쉽다.3. 사비 도성
이 성은 사비천도 이전부터 있었다고 추정한다. 부소산성 내에서 발굴된 기와에서 대통(大通)이란 중국 양나라 연호의 명문이 나왔는데, 대통은 527~529년에 사용했다. 그런데 사비천도는 538년에 했다. 무덤에 묻힌 유물들이야 다시 꺼낼 일이 없으므로 해당 연대가 빼박 유적과 유물의 연대가 될 수 있지만 기와는 527년에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538년 천도하며 다시 쓱 옮겨서 쓰면 그만이기 때문에 연대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없다.기와의 연대를 신용하거나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웅진 천도 당시의 도성의 면모를 보더라도 이곳 부소산성을 비롯한 사비도성의 유적들을 살펴보면 계획적으로 천도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성왕의 사비 천도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이전 도읍인 웅진은 실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역시 475년 고구려 기습남침(?)에 수도가 함락되면서 어쩔 수 없이 천도해야 했던 정황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이야 치수방재가 체계화되었지만 과거에는 치수는 주요한 문제였다. 공주 구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제민천은 범람과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공산성 자체도 왕궁의 여부가 문제시될 정도로 왕성으로서는 문제가 있는 형태인 데다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웅진을 택한 것은 지방세력의 영향력이 덜한 곳이었기 때문이며 웅진기 내내 백제 왕권의 제 1 과제는 귀족층과의 주도권 싸움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웅진기의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노력한 동성왕과 무령왕에 이어 성왕은 그러한 일련의 과정의 첫 발로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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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 사비도성의 계획성 |
또한, 사비도성의 북쪽과 동쪽으로는 나성(羅城)을 두어 도성으로서 구성을 갖추었고, 도성 내부는 일상생활의 공간으로 구성하고 나성의 동쪽 바깥으로는 망자의 공간으로 능산리 고분군을 비롯한 사비기 석실 고분군들이 위치하고 있다. 능산리 고분군도 장축방향의 축선은 남북방향이다. 몇가지 도성의 구성요소들은 웅진기 시절에서도 일부 확인되는 점들을 통해보면 사비로의 천도는 매우 계획적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본다면 부소산성, 그리고 제반 도성과 관련된 시설은 성왕 대의 기록인 538년 천도 당시에 축조한 것이라기보다는, 진작부터 계획을 세워 축성하다가 538년을 즈음하여 이미 완성된 곳으로 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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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 관북리 유적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 |
4. 기타
부소산성은 매표소에서 2,000원을 내야[6] 들어갈 수 있다. 내부에는 삼천궁녀가 투신한 것으로 알려진 낙화암이 있다.관북리 유적 내부에는 구 국립부여박물관이 있던 건물이 남아 있으며, 국립부여박물관이 신축 이전한 이후 부여군문화재사업소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사비도성 가상체험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의 외관이 독특한데, 김수근이 디자인한 건물이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나치게 일본풍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더 상세한 내용은 각 문서에 서술되었다.
부여여자고등학교 재학생들이 종종 올라가고는 한다. 교내에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내려갈 때도 그 길을 통한다. 요금을 지불하지 않고 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교내를 통해서 올라간다.
5. 관련 유적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서나성과 남나성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4] 공산성 자체도 궁성인지 배후성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5] 자연지형과 경사를 활용하여 쌓는 방법으로, 자연경사면을 성벽의 바깥쪽이 되는 부분에 돌을 쌓아서 성벽으로 삼고 돌과 자연경사의 공간을 흙으로 채운다. 쉽게 말해 한쪽만 성벽이 있는 구조라고 보면 된다. 편축의 반의어는 협축이라고 하는데,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성벽의 형태들이 협축이다.[6] 부여군민, 청양군민, 공주시민은 무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