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5 06:29:37

그리스도론

1. 개요
1.1. 출발점1.2. 목적1.3. 장소1.4. 주체
1.4.1. 교회 (칼 바르트의 견해)1.4.2. 믿음1.4.3. 기도1.4.4. 기법
1.5. 방법론
1.5.1. 상승적 그리스도론1.5.2. 하강적 그리스도론
1.6. 그리스도론의 내용 구분1.7. 그리스도론의 우선적 목적들
1.7.1. 성자가 성부 하느님과 더불어 갖는 고유한 관계1.7.2.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성부와 누리는 일치1.7.3.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맺는 관계1.7.4. 그리스도와 실재의 의미1.7.5. 그리스도와 악
1.8. 현대에 당면한 다양한 어려움
1.8.1. 사실에서 신앙으로1.8.2. 연속성의 문제1.8.3. 하느님의 현존을 간직한 교회1.8.4. 믿음의 단일함과 다원주의1.8.5. 그리스도와 타 종교들 간의 관계
1.9. 그리스도론에 대한 접근1.10. 정의
2. 성경의 그리스도론
2.1. 하느님 나라의 선포
2.1.1. 세례자 요한2.1.2. 예수의 세례2.1.3. 예수의 새로움2.1.4. 결정적 사건2.1.5. 구약의 약속들과 희망들2.1.6. 바실레이아2.1.7. 도래한, 도래하고 있는, 도래할 왕국2.1.8. 하느님 나라의 신학적, 종말론적, 구원론적 내용2.1.9. 하느님 나라의 수취인들2.1.10. 진복팔단(眞福八端)2.1.11. 결론
2.2. 기적들
2.2.1. 치유와 구마2.2.2. 기적, 이적, 표징2.2.3. 기적들이 자리한 생생한 맥락2.2.4. 근본적인 문제들2.2.5. 신약에 있어서 기적의 다양한 의미2.2.6. 결론
2.3. 권위에 대한 주장과 정체성에 대한 칭호들
2.3.1. 암묵적 그리스도론
2.3.1.1. 예수의 권위와 자유2.3.1.2. 자기 승인2.3.1.3. 거룩한 제도들과의 관계2.3.1.4.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태도2.3.1.5. 하느님과의 관계
2.3.2. 명시적 그리스도론
2.3.2.1. 예수와 사도들 간의 관계2.3.2.2. 스승에 대한 칭호
2.3.3. 하느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예수
2.4. 죽음 직전 예수의 자의식
2.4.1. 갈릴래아의 위기2.4.2. 성전 입성2.4.3. 백성들과의 대면2.4.4. 최후의 만찬
2.4.4.1. 역사적 틀2.4.4.2. 사화들2.4.4.3. 행위와 말씀

1. 개요

그리스도론 / Christology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개인적인 생애와 관련된 사실들을 전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가 선포하는 보편적 진리[1]에 대한 해명을 통해 예수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에 대해 설명하고 그 고백의 근거를 밝히는 기독교 신학의 한 분야다.

그리스도론이 다루는 대상은 총 3가지 인데, 첫 번째 대상은 예수로서, 이 고유한 이름이 가리키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다룬다. 두 번째 대상은 메시아로서, 그리스도론은 예수가 구세주로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안에서 이룬 역할에 대해 다룬다. 세 번째 대상은 성자[2]로서, 그리스도론은 예수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해 주는 두 위격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 다룬다.

유대교인들의 신앙이 야훼를 향하듯이,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지향하는 대상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서 그에게 의지하여 그의 방식에 따라 믿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 점이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구별해주는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특별한 예언주의와 지혜의 형태를 구현했으며, 기도하는 사람, 신뢰와 순명, 친밀하고도 기쁨 가득한 태도를 갖는 가운데 자신을 구약 성경과의 연속선상에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예수가 하느님과 가졌던 관계는 새롭고 유일했다. 예수는 이미 하느님을 알고 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말하는 자의 권위에 힘입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예수에게 신앙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 예수와 당시 종교적 상황 사이의 단절, 그리고 당대 이스라엘인들 편에서 그를 거부한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강한 인격적 태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훗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성자의 고유한 아들 됨이자 동일본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지닌 이런 고유한 신적 아들 됨에 대해 신앙으로 응답하는 사람을 말한다.

1.1. 출발점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이자 지속적인 기준점은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역사다. 그리스도의 역사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는 가운데 그가 전한 메시지와 이룬 행적 그리고 그의 운명, 사람들의 결정을 수용한 그의 태도를 포함한다. 여기서 "예수의 운명"이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삶의 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외부에서 강제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존재와 자유를 선사하고 내면에서부터 인도한다. 즉, 외부에서 인간에게 오는 모든 것은 그에 대해 인간이 제시하는 응답과의 연관 아래서 내면에서부터 인간의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운명 지으며" 그리스도는 이러한 성부의 "파견/위임"을 받아들이고 응답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규정한 상황의 틀 안에서 성부가 맡긴 사명을 구현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실재, 즉 현세적 실재와 영원한 실재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구성한다. 그리스도는 인간 조건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가르침, 그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론이 다루는 우선적인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역사에는 외적인 차원내적인 차원이 있다. 먼저 인간은 외적 측면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된다. 반면, 자신을 드러내는 자기 계시라는 내적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도 있다. 이런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또 한편으로 그리스도론은 역사이자 역사를 초월하는 그리스도, 바로 그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신학의 한 분야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개인적인 의식을 그리스도인의 것으로 삼는 데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1.2. 목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라는 실재를 파악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자연스럽게 이런 작업에는 하느님, 인간, 세계에 대한 이해가 어우러져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의 영원한 성자로 제시된다. 성자는 강생[3]하여 성부와 성령을 계시하며 두 위격을 인간의 역사 안에서 견인한다.

그리스 교부들은 그리스도론이 다루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용어를 사용했다. 테올로기아[4]오이코노미아[5]가 그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에게 맡겨진 인류 구원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운명은 우리 인간의 운명을 이해하게 해 주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는 자신의 저작 <교회사>[6]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하고자 하는 담화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오이코노미아, 테올로기아와 함께 시작된다. 사실, 교회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쓰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오이코노미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 오이코노미아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성하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적인 삶'이라는 지평에 두었으며 그의 역사를 성부, 성령으로부터 시작하는 '하느님의 역사'로 이해했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삼위일체 하느님, 즉 성부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인류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은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변화 - 테올로기아 - 이자 인간이 시간 가운데 이루는 변화 - 오이코노미아 - 이다. 만일 이 점이 검증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단순히 유대인들이 저지른 일련의 사건 또는 일반적인 신화 정도로 축소되고 만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가 성부, 성령과 맺는 영원한 관계, 그가 성부로부터 위임받은 구원 사명, 일정한 시간과 장소 안에서 그가 취한 현세적인 조건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다음의 3가지 요소는 불가분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 두 번째, "나를 위해 계신 그리스도". 세 번째, "당시 그곳에 계셨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구원적인 사명을 위해 강생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드러났으며, 이러한 그의 사명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역사에 자신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류를 삼위일체의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 널리 전해 주고, 그들 안에 내면화한 성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존재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자 동시에 "나를 위해 계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중세기 말에 있었던 그리스도론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왜곡과 축소에 직면해서, 개신교는 "나를 위한 그리스도", 즉 예수는 형이상학적인 수수께끼이기 전에 먼저 인간을 위한 복음 그 자체라는 사실을 회복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드러난다: "나의 예수", "나의 구속주", "나의 의로움". 이는 그리스도가 베푼 호의를 깨닫고 삶 속에서 그것을 구현하려는 원의가 강하게 드러난다.

강생한 성자의 인격은 구원의 가능성을 위한 바탕이 된다. 사실, 인간 구원의 요체는 사랑으로 계시되고 사람들이 맞아들인 하느님, 인간을 화해시키고 성화[7]시키는 바로 그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구원이고, 구원은 하느님에게 달려있다. 인간 존재가 지닌 원의는 자신이 지닌 획득 능력과 불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가 지닌 수용하기 위한 요청은 자신의 능동적인 잠재적 능력과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만이 그런 인간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체적인 창조된 인성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바라는 상태를 선취[8]하며, 새로운 인류의 근원적 원형[9]이 된다. 또한, 그리스도는 최종적인 아담이며 생기 가득한 영이고 부활한 인류의 맏물이다.

1.3. 장소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그를 알려주는 가까운 장소는 무엇일까? 인간은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해 말해주는 여러 작품과 유적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무엇보다도 그를 구속주로 전해 주는 사람들, 즉 교회 안에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단순히 역사를 통해 지속된 게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를 살아있는 분으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통해 지속되었다. 이러한 믿음은 믿는 이들의 증언과 삶을 통해 전해졌는데, 이는 단순히 가르침이나 모법이 양적인 차원에서 많이 전수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기준점을 바탕으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총체적인 신앙이 옮겨 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스스로 발생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 각각의 새로운 신자와 더불어 탄생한다. 하느님은 믿음과 세례를 통해 인간 안에 새로운 실재를 만든다. 세례받은 각각의 신자는 신앙의 역사에 있어 새로운 출발점이며 그 편에서 절대적인 시작이 된다. 그리스도는 그 안에서 활동하고, 그로부터 출발해서 신자 각각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앞서 있었던 모든 신자들을 잇는 상속자이며 이와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하느님 면전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자신이 절대적인 시작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교회는 외적인 증언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가 인격적으로 현존하는 곳이자 그러한 현존이 공동체적으로 구현되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교회에서는 각 개인의 심리적인 회상보다 그리스도가 친히 제정한 공동체적이고, 성사적인 기억이 작용한다. 또한 그 안에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면화하고 구현하며 널리 전하는 작용 주체로 사도[10]와 성령이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교회는 창조된 세계 전체의 구원을 완성해 줄 미래를 지향한다. 전례는 그리스도교를 구성하는 실재들을 현실화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실재들을 대변해준다. 전례가 아니라면, 성경은 공허한 실재에 불과하고 생기도 없으며 효과도 내지 못할 것이다. 또 반면, 성경이 아니라면, 전례는 맹목적인 것이 될 것이며 해석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다.

교회는 분명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고 구현되며 숙고되는 정당하고 필수적인 장소다. 하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와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대상은 아니다. 교회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데 있어 출발점이자 규범이 되는 기준이다. 그러나 믿음의 내용과 궁극적인 기준은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중적인 기준을 갖게 된다. 하나는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중개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가 보여주는 직접성이다. 교회가 하는 중개는 발견법적[11], 해석학적[12]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신자 공동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공동체는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대로 살아온 공동체이자[13]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상 곳곳에 퍼져서 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 살아가는 공동체다[14]

1.4. 주체

그리스도론의 주체는 신앙 그 자체다. 즉 그리스도론의 주체는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이 교회는 성령과 동일한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다양한 지체로 이루어진 공동체이자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은총과 은사를 통해 강화된다.

오랜 세월을 통해 그리스도론이 견지해 온 단일함과 다양함은 그리스도의 신비 그 자체에 기인한다. 사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충만함을 드러내는 분이자 우주 전체를 화해하는 분이며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의 이해 가능성을 벗어나는 존재다. 그러나 오직 교회의 총체적인 믿음만큼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이해하고 표현 할 수 있다.

교회의 단일함은 성경이 정경으로 통일되는 데 있어 기원이 되었으며 교의를 하나로 모을 수 있게 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믿는 신비가 지닌 단일함과 이 신비를 탐구하고 해명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다양한 전망을 통합하는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해 주었다. 신학자는 여러 직무와 은사가 동시에 공존하는 교회와 친교를 나누는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며, 교회 안에는 사도로서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 치유의 은사, 조력자의 은사, 방언의 은사 등이 있다. 이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하며 그의 몸을 건설하기 위해 질서 지어져 있다.

교회, 믿음, 기도, 기법은 그리스도론을 작업하는 주체와 이 주체가 성찰하고자 하는 대상, 즉 살아 있는 그리스도 간에 실제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이 4가지 차원은 그리스도에게 실제적인 현존을 가능케 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은 그를 단순한 개념, 일종의 사물 또는 교의적인 정식이 아닌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하도록 중개하는 분으로 말할 수 있다.

1.4.1. 교회 (칼 바르트의 견해)

칼 바르트는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문제가 되는 대상과 활동 영역에 현존하고 익숙한 자만 이 앎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학문의 주체가 교회라는 사실이 그러한 학문의 질과 연관된 교의[15] 개념과 관련해서 어떤 한계나 편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교의가 언급하는 대상과 활동[16]이 위임된 공동체이자 영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교의의 주체로 여기는 가운데, 교의를 배우든 가르치든, 교의를 다루는 곳은 다름 아닌 교회라는 영역이라고 말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교회 밖에 자리하는 가운데 교의에 대해 다루려는 사람은 교의라는 대상이 자신에게 이질적이라는 점을 즉시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첫걸음을 띤 후 방향을 잃거나 실패의 원인을 대면하게 된다 해도 결코 놀랄 필요가 없다. 우리는 교의에 있어서 우리가 다루는 대상과 친밀해야 한다. 이는 제대로 교의에 접근하려면, 교회의 삶과 친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 바르트, <교의학 개요> 中

1.4.2. 믿음

믿음은 그리스도론을 수행하려는 주체에게 요청된 내적 조건이다. 그것은 그런 연구를 하기 위해 공동체로 하여금 공식적으로 수용하도록 법률적으로 강제하거나 위탁하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지성'[17]과 그리스도의 '성령'[18]이라는 선물을 통해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와 객관적으로 일치하게 해 준다. 이와 더불어 믿음은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에게 속한다.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지성에 빛을 더해 주며 의지를 강화하고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

반면 몇몇 현대 신학자들이 상기한 바 있는 후기 스콜라주의의 명제에 따르면, 믿음이 없어도 신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에 대한 계시를 수용하지 않은 채, 그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믿지도 않은 채, 그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하느님을 비인격적인 대상으로 축소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학은 오직 믿음과 사랑과 희망 가운데 이어지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인식의 결과를 통해 생겨난다.

믿음 없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와 연관된 일련의 사실과 관념, 요청과 제도에 대한 논리적인 일관성을 가리키는 단순한 개념적 구조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확실함과 새로운 객관적 생명을 소유하리라는 점을 보증해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인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때 비로소 충만이 소유하게 될 실재를 '미리 맛보는 것'을 '믿음'으로 보았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이십니까?"라는 객관적 질문은 이제 다음과 같은 주관적인 열쇠와 함께 우리에게 다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마태오 복음서 16장 15절

1.4.3. 기도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자 동시에 믿음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이 믿음은 사랑의 말과 대화로 바뀐 믿음을 의미한다. 기도는 신학을 가능케 하는 가까운 조건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그 근간이 성부와의 친교에 있으며 그 친교의 중심이 기도라고 한다면, 그리스도는 이 기능을 통해 그분을 성부로 인정하고 그분의 계획을 받아들였다.

유비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의식과 기도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리스도교적인 기도는 다음과 같은 2가지 근본적인 표현을 갖고 있으며 이 둘은 서로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는 전례 거행이다. 성찬례, 또는 예배는 교회의 삶에 있어서 성사적인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선사한 최고의 선물이자 인간을 위한 모든 은총의 원천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인 기억이자 공동체적인 기념으로서의 성찬례, 또는 예배는 각 개별 신자들의 삶 속에서 연장되고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동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각 신자들의 개인 기도에서 이루어진다.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부터 앙리 드 뤼박, 콩가르, 라너, 발타사르, 디트리히 본회퍼, 라칭거, 쿨만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에 있어서 원천으로 언제나 기도와 전례를 가리켰다.

1.4.4. 기법

그리스도론은 혼(魂)[19]을 원하지만 동시에 그에 걸맞은 기법도 필요로 한다. 기법은 연구 대상을 이성적인 차원에서 세밀히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식의 총체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실성, 보편성, 구원하는 힘, 신적 조건이 어떻게 해서 상상 가능한 실재인지, 또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고 왜 중요한지 잘 보여 준다. 교회성, 합리성, 동시성은 진정한 신학자가 갖춰야 할 요건이다. 방법론은 대상에 대한 인식을 지향하지만 동시에 대상을 규정하기도 한다. 모든 실재에 도달하려면 그에 맞는 개별적인 길이 필요하다.

모든 학문이 연구하는 대상에 적합한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론을 갖고 있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 위한 학문적 접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의식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의식 또한 모든 세대에 자신의 고유한 수준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시간 밖에" 있어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도 역사 안에 자리매김한 인간 조건에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고려하는 가운에,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과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20]

1.5. 방법론

그리스도론을 위한 방법론은 다양하다. 각각의 학자는 그리스도의 역사와 신비가 지닌 개별적인 측면에서 출발할 수 있지만, 이를 바탕으로 여타 모든 측면을 비롯해 그러한 측면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후대의 그리스도론은 이미 신약 성경을 통해 제공된 진로를 채택했다. 그것은 상승적 진로하강적 진로를 말한다.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공적인 등장과 함께 시작되며, 그를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교하는 분, 병자를 치유하는 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소개하는 가운데 전개되고, 부활과 더불어 끝난다. 마태오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는 연대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구약 성경에 대한 호소와 예수에게 부여한 칭호들에 있어서 동일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 두 복음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 그가 하느님과 더불어 갖는 관계, 무엇보다도 메시아로 등장한는 모습, 부활을 통해 주님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관련한 하느님의 행위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주요 사건 가운데 드러난다: 잉태, 세례, 부활.

그러나 만일 3개의 공관 복음만 있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특별히 호의를 보인 사람, 유대인이었지만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그 본성이 변화되어 신화[21]된 사람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를 비롯한 다른 서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또 다른 비전을 제시해주고, 우리는 이를 통해 그리스도가 성자이자 하느님 영광의 광채로서 하느님의 본질을 보여주는 모상[22]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필립비서로마서하강적이고 강생적 특징을 지닌 그리스도론을 담고 있으며, 이는 복음서에 담긴 여러 사화에 비해 수십 년 앞선다.

이처럼 신약 성경이 지닌 단일함은 이 2가지 그리스도론적인 전망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적 전망에서 그리스도론에 대한 연구는 상승적이며 발생적으로 점진적인 방법론을 강조하며, 그러한 전망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이 방법론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관련된 첫 번째 이론적 표현, 기원이 되는 공동체, 사용된 범주들에 대한 조사로부터 그리스도론은 시작한다. 이 방법론은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관련해서 첫 번째 제자 그룹과 교회가 거쳐 간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한다. 이 방법론의 출발점은 '예수의 역사'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역사와 그에 대한 믿음의 역사는 엄연히 다르다. 믿음은 부활과 함께 시작하지만, 예수의 역사는 그보다 30년 전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여러 학자에 따르면, 이 방법론은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이해를 지향한다. 점진적인 이해 또는 진화적인 이해가 그것이다.

점진적인 이해는 이미 그 기원에 성경의 진술과 교회의 체험이 있다고 주장한다.[23] 이러한 언명[24]과 체험은 후대의 신학적 언명에서 개념적으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남으로써 명료하게 될 실재를 씨앗의 형태로 간직하고 있다.

반면, 진화적인 이해[25]는 새로운 실재가 고안되었다고 본다. 즉, 유다적인 이해의 지평에서 본 예수-메시아가 그리스의 여러 신비 종교와 접촉함으로써 신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전망에서 예수는 믿고 예배를 드려야할 신적 존재, 이교의 여러 신이나 군주들에게 부여하는 일련의 칭호로 불리는 신적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위의 2가지 이해는 상승적 그리스도론에 대한 해석들이다. 하나는 예수의 역사성을 진지하게 취하는 정당한 이해로, 그의 생애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사실과 그의 부활에 대해 사도들이 견지해 온 희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는 교회의 실제적인 믿음을 그리스의 종교에 기원을 둔 산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망은 예수가 자신에 대해 가졌던 자의식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기원에 관한 공동체 의식과 단절되어 있다.

하강적 그리스도론은 삼위일체의 신비로부터 시작된다. 이 전망의 출발점은 강생에 있다. 이 과정에서 성령은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준비하며 그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인간의 마음속에 내면화하는 가운데 완성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한 교부[26]을 비롯해 후대의 토마스 아퀴나스, 칼 바르트, 발타사르는 이러한 하강적 그리스도론을 대표하는 탁월한 대변자들이다.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교부들[27]을 비롯해 후대의 여러 학자 가운데 판넨베르크, 라너는 상승적 그리스도론을 대변한다.

종합하여 정리해보자면, 상승적 그리스도론은 '예수학'으로 축소될 위험을 안고 있으며, 하강적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유다 혈통을 비롯해 그를 둘러싼 가정과 사회 그리고 심리와 관련된 모든 결정적 요소와 더불어 그의 인간적인 삶을 진지하게 반아들이지 않은 채, 초월적 질서의 영역에 머물 위험을 안고 있다. 따라서 이 2가지 범주를 유의하며 상승적 그리스도론과 하강적 그리스도론을 완성할 수 있다.

1.5.1. 상승적 그리스도론

상승적 그리스도론은 유대인인 예수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더불어 사람들을 해방하는 활동을 시작했으며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을 직면했다. 또한, 그는 병자를 치유하고 사람들을 통합했으며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를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은 이러한 이론적 메시지와 그에 따라 이루어진 역사 활동에 대한 추인[28] 이후에 일어났다. 그의 죽음은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를 의미한다. 반면, 그의 부활은 그에 대한 하느님의 승인을 의미한다. 상승적 그리스도론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 내포한 구원적 내용과 혁신적 파괴를 조금은 덜 강조한다.

1.5.2. 하강적 그리스도론

하강적 그리스도론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차원에서부터 시작해서 강생의 빛 아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세계에 동화되는 가운데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는 우리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붙잡아 주며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했다. 또한, 그는 인류의 죽음을 짊어지는 가운데 인류를 죄의 권세로부터 구해냈다. 강생은 신화적인 동시에 구원적인 특징을 갖는다. 사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그를 위해 마련한 목적에 인간이 이르려면, 죄로 인해 부패한 그 본성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은 강생한 그리스도의 존재 의의가 하느님과 세상 간의 일치라는 점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그의 존재 의의가 거의 "성취되었음"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하강적 그리스도론은 그의 죽음을 오직 죄를 위한 대속이라는 범주 아래에서만 바라보게 하는 유혹으로 기울어져 있다. 따라서 그의 부활이 지닌 구원적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강생에 대한 존재론적인 해석에 보다 더 집중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더욱 일관되고 체계적인 하강적 그리스도론에 대한 작업[29]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업적이자 수난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생애가 지닌 다양한 신비에 대한 광범위한 진술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1.6. 그리스도론의 내용 구분

그리스도론의 내용은 방법론과 연관되어 나뉜다. 어떤 부분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의 2가지 논제를 엄격히 구분하는 분할이 그렇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업적에 관한 것이다.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론구원론이다. 이러한 용어들이 아니라면, 형이상학적으로 "어떤 하느님"이 인간인지 규정하는 점을 다루는 진술에 머물고 말아 버린다. 그게 아니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가 문화, 윤리리, 철학, 종교와 관련해서 새로운 또는 다른 세상에 무엇을 전해 줄 수 있는지 다루는 데 국한되고 말아 버린다. 첫 번째 경우는 그리스도론의 지성주의적인 해석 방식이며, 두 번째 경우는 기능주의적인 해석 방식이다. 그러나 기능주의적인 해석 방식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만 봉사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질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또 2가지 해석 방식 모두, 원초적 핵심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할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의 선상에서 제시한 그리스도론의 내용에 대한 구분은 상당히 단순하다. 이러한 구분은 여러 공의회의 규범적인 해석과 신학자들의 해설을 바탕으로 성경의 여러 증언을 통해 제시된 것으로,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들 간의 연광성을 심화시키고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은 이 방법론을 따르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 바탕이 되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중심 주제, 즉 예수의 역사, 예수의 인격, 예수의 사명을 분명히 제시하고자 해야 한다.

1.7. 그리스도론의 우선적 목적들

그리스도론 분야에는 도달해야 할 본질적이고도 영속적인 목적들 또는 과제들이 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여타 모든 주제에 빛을 전해 준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모든 세대가 지닌 독특한 감수성, 새로운 문화적 지평, 상이한 역사적 맥락과 연관된 목적들도 있다. 하느님의 신비나 그리스도의 신비는 언제나 모두 독특한 시각 아래 감지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그러한 신비가 간직한 의미를 늘 충만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론이 분명히 해결해야 하는 주된 문제는 대표적으로 아래 5가지가 있다.

1.7.1. 성자가 성부 하느님과 더불어 갖는 고유한 관계

이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성부를 향해 바친 기도, 자녀적인 순명, 사명에 대한 헌신, 성부와 더불어 누린 상호 간의 앎과 사랑 그리고 권위와 판단은 그리스도론을 구성하는 주요 교의 주제와 역사를 잇는 접점들이다. 이에 관한 여러 공의회의 일관된 주장은 예수가 경험한 실재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교회의 의식은 그가 지녔던 역사적인 의식과 연속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유일신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도 유일신론을 급격히 위격화했다는 점도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성을 통해 하느님의 절대적인 현존을 실현하였으며 성부 하느님과의 근본적인 관계를 확고히 했다.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주제들, 그리스도의 신성, 동일 본질, 선재와 같은 주제들이 해명된다.

1.7.2.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성부와 누리는 일치

예수의 역사는 세례를 받던 순간, 성부 하느님이 그를 메시아로 지명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그는 성령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예언자로 인정받았고, 결국에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성부에게 봉헌하며 사명을 완수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과 성령의 활동 그리고 성자의 희생 가운데 드러나는 성부의 개입 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몇몇 학자들은 소위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적 신학[30]의 틀 안에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자기실현과 그리스도의 죽음 사이의 연관성을 규명하려 했다. 또한, 같은 선상에서 성령의 주도적인 역할과 영원불변한 하느님이 고통을 받았다는 점도 부각시키려 했다.

반면, 어떤 학자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조성되었으며" 역사는 하느님 존재의 일부를 구성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망은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현재의 일부 신학적 성찰은 영지주의로 기우는 듯이 보인다.

1.7.3.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맺는 관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된 보편적인 구원에 대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운명이 모든 사람의 결정과는 독립적으로 그러한 결정에 앞서 모든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에 앞서 그의 자유를 결정하는 그 무엇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운명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운명에 깊이 어우러져 들어간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서 그리스도론에서는 '단체적 인격성'과 '대리'라는 개념에 호소한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결코 수단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언제나 목적으로 존중받아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대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 때문에 죽을 수는 없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주체의 자주성에 초점이 맞춰진 이런 인간학적 개념을 그리스도에 의해 이룩된 보편적 구원의 의미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인간학적 노선 주위에는 '이타성', '대리', 타인에 대한 '책임'같은 개념에 바탕을 둔, 그리고 '관계 안의 존재', 이웃을 '책임진 존재'라는 개념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인간학적 노선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이 지닌 이런 구조적인 요청을 최고로 실현하였다. 이러한 전망에 따르면, 우리는 형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그를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으로 간주된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가진 이웃에 대한 관계는 "~반대하는 실존"이 아니라 "~을 향한 실존"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계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의 성공이나 자주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이탈하며 다른 사람을 돕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림으로써 그 생명을 구원받는 새로운 사람이다.

1.7.4. 그리스도와 실재의 의미

그리스도론은 역사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역사의 중심에는 예수의 구체적인 모습이 자리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이야기를 통해 제시되고 설화적이며 해석학적인 그리스도론에 의해 해명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실현되는 모든 질서, 즉 하느님, 우주, 인류, 이웃, 미래, 존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미가 드러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인간에게 실제적이고 복합적인 구원을 이뤄내는 이로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론이 여전히 유효하려면 신학, 인간학, 형이상학을 포함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나야 한다.
  • 존재의 근원에 사랑이 있다.
  • 실재는 신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 미래는 화해와 완성에 대한 약속이지 위협적인 불확실함의 심연이 아니다.
  • 인간의 내밀한 본성은 '그리스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러한 본성은 그리스도 안에 기초 지어져 있으며 그분에 따라 만들어졌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충만함을 발견하도록 운명 지어졌다.

1.7.5. 그리스도와 악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는 모든 종류의 악(惡), 즉 육체적, 도덕적, 사회적 악을 모두 접했다. 병자들을 치유하고 죄인들을 자비로 대하는 그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당시의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해서 보인 행동이었다. 세상 안에 있는 악, 근본적인 악, 개인적인 소외, 사회적인 소외, 폭력, 극단적인 고독 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런 배경 아래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통해 자신의 피조적[31] 조건을 받아들이고 자기 존재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했다. 동시에 자신의 자유를 충만히 행사했으며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자신의 아들 됨을 실현했다. 또한, 자신의 생명을 인류를 위한 중재 기도로 봉헌하는 가운데 모든 죄인과 형제적으로 연대했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최고의 힘으로 계시하는 가운데 죽음을 향해 자신의 자유를 내어놓고 성령이 인간 내면에 선사하는 선물과 함께 죄와 죽음을 극복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기쁘고 온전히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자유롭게 하는 실재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실존의 부정적인 측면(악)을 넘어서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대면해야 한다. 그가 전한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이를 믿는 사람은 생명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악, 죄, 인간의 부족함과의 연관 속에서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선사한 충만함과의 연관 속에서 보게 해 준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 가장 본질적인 요소다. 악의 실체가 드러난 것과 죄에 대한 승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서 유래하는 결과다. 그러므로 악과 죄 그리고 죽음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인 부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근본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8. 현대에 당면한 다양한 어려움

오늘날 그리스도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1.8.1. 사실에서 신앙으로

"역사적 형태로 이루어진 우연적인 진리는 결코 이성적 형태로 된 필연적 진리를 입증할 증거가 되지 못한다. (⋯) 바로 이 점이 내가 가능한 한 있는 힘을 다해 시도해 봤지만 넘어서지 못하는 저주받은 구덩이다."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Writings 中
레싱은 사실에서 신앙으로, 나자렛 사람 예수에서 그리스도로, 역사에서 교의로 넘어가는 것이 큰 어려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있어 온 어려움이며,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간은 초월과 역사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 '인간 존재 구조'를 받아들일 때에만 하느님이 이 세상에 드러낸 당신에 대한 계시와 현존의 표징들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역사에서 출발해서 신앙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역사 안에 선사한 당신 자신에 대한 다양한 표징 속에서 그분에 대한 계시를 읽어내야 한다.

1.8.2. 연속성의 문제

초세기의 여러 공의회가 정식화한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정의들과 신앙에 관한 초기 증언들 간에 과연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신앙에 관한 초기 증언들은 구원을 사건으로 묘사하며 그리스도를 구원 역할과 더불어 제시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적, 신적 본질에 대한 언명들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에 대한 묘사는 정의로, 사건에서 존재로, 이야기에서 논증으로 가야 할 필요에 직면했다. 결국 교회는 광범위한 차원에서 개념을 전이시키거나 메시지를 새로운 그릇에 담는 작업을 하게 됐다. 이 2가지 문화[32] 사이의 연속성을 입증하고 이러한 이행 과정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를 밝히는 것은 난해하지만 동시에 중요한 일이다. 또 이러한 작업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맥락에서 복음이 간직한 진리를 보존할 수도 있다.

개념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성경의 여러 자료와 공의회의 정의들 간의 동질성은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실재를 아는 사람은 이 둘이 서로 깊이 일치한다는 사실, 두 문화가 제시한 분이 유일하고도 동일한 그리스도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1.8.3. 하느님의 현존을 간직한 교회

교회 없이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은 있을 수 없고, 구속력 있는 사도적 권위[33] 없이 그리스도교의 교회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교회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자유로부터 탄생한 열린 공동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각 개인의 위치를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갖는 권위와 연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율법에 직면해서 그리스도가 선포한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 획득해야 할 마지막 보루라고 여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그리스도의 법'과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인격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따라서 몇몇 텍스트나, 일부 공의회의 결정 사항만 선호하면서 그리스도론을 구성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실재가 본래와 다르게 전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선사받은 것이다. 일정한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결정과 활동 그리고 그분의 말씀과 구체적인 요청들은 인간의 자유에 있어 절대적인 한계를 대변한다. 구체적이면서도 특별한 이 진리에 머무는 것, 심지어 그와 관련된 여러 정식에 충실한 것은 우리에 앞서 우리 밖에서부터 선사되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설정한 게 아니라 하느님이 선사하고 그리스도의 사도로부터 교회에 전수되어 온 구원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함께 구성하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으며, 그의 권위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해석된다. 하느님의 선물이자 빛인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진리에 대면해서 갖는 태도를 식별하고 심판하는 기준이 된다.

1.8.4. 믿음의 단일함과 다원주의

신약 성경 27권 중, 그리스도에 관한 유일한 복음서는 4권이다. 이를 고려해 볼 때, 상황은 변증법적이며, 이 모든 것은 유일한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신약 성경의 단일함은 바로 그리스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획일적인 단일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실재들이 서로 양립 가능하다는 사실, 즉 다양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전망에서는 그리스도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다양한 모델 또는 패러다임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직 한 분의 그리스도만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가 이기주의와 불순명을 위한 빌미가 돼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복음에 더욱 잘 응답하고 형제들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1.8.5. 그리스도와 타 종교들 간의 관계

그리스도와 세계의 여러 종교들 간의 관계에 대한 해답은 3가지 노선에서 접근되었다.
  • 배타주의: 칼 바르트, 헨드릭 크래머를 비롯해 근본주의 개신교 신학자들이 이 노선을 대표한다.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 포용주의: 드 뤼박, 칼 라너를 비롯해 대부분의 가톨릭 신학자들이 이 노선을 대표한다. 물론 이들 간에는 다양한 입장 차이가 있긴 하다. 이들은 진리 안에 살고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이 있으며, 모든 구원은 그리스도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확증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인간은 이를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는 가운데 식별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안에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에게 향하기 때문이다.
  • 구원적 다원주의: 존 힉을 비롯해 소위 종교 다원주의 이론을 표방하는 학자들이 이 노선을 대표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각자 자신의 지역과 시대를 위해 구원을 제시한다. 이들은 예수를 거룩하고 정당한 모든 이름을 지닌 보편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으로 본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노선인 구원적 다원주의는 신약 성경의 여러 본문과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와의 관계가 배제된 그리스도에 대한 흔적, 강생한 말씀[34]으로부터 분리된 강생하지 않은 말씀의 활동에 대한 흔적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1.9. 그리스도론에 대한 접근

그리스도론과 관련해서 오늘날의 가톨릭적인 성찰은 다음 3가지로 드러난다: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인의 체험, 그리스도론과 사회적 실천, 그리스도론과 학문적 근거.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에게 접근할 수 있는 상이한 방식 또는 관심도 드러난다.
  • 신비전수적 접근: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앎을 증진시키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심화하며 키워 나가기 위한 접근 방식이다.
  • 역사적 접근: 이는 다음과 같은 3가지 기준에 따른 것이다. 우선, 교육적인 기준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드러내기 위한 보다 효과적인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그다음으로, 선교적인 기준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려 주기 위한 삶의 증거와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정치적인 시준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는 복음이 간직한 인간 해방이라는 풍요로운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해 이론적인 토론의 장을 열고 역사적인 실천을 통해 이를 구체화해야 한다.
  • 이론적 접근: 우선적으로 신앙이 지닌 객관적인 풍요로움을 소개하는 가운데, 인류에게 지극히 무상적인 그리스도의 실재와 그의 진리를 이해하고자 시도하는 접근 방식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것 때문에 신앙을 강제해선 안 되며, 신앙에 있어서 지성이 먼저 오고 그다음에 기술적 또는 비판적 이성이 뒤따라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앙은 개별적인 문제와 상황을 넘어서 있으며 인간을 진리와 연결해주고, 그를 최종 목적으로 개방시켜 준다.

1.10. 정의

그리스도론은 신자들이 공동체 내에서 역사적인 합리성과 학문적 방법을 통해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이다. 그리고 이 선상에서 그리스도를 인류가 몸담고 사는 구원적 또는 비구원적 상황과 연관 짓는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상황의 중심에서 자신을 구원의 복음으로 선포했으며, 보편적인 진리의 성격을 갖는 로고스이며, 동시에 구체적인 역사 안에 존재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론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과제가 있다.
  • 해명: 그리스도의 근원적인 역사와 지속성, 그리고 사건, 이념, 경험, 약속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실재와 그 내용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 정초: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구체적인 삶을 바탕으로 입증하는 가운데, 진리와 구원에 대한 요구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 역사화: 복음의 의미, 그것이 내포한 역동적 힘과 가치를 각각의 시대를 특징짓는 정신과 더불어 재해석하고 표현하며 그러한 정신과 연결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역사 안에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론은 자신의 한계와 과제들, 하느님의 신비에 직면한 인간 이성의 경계도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하느님은 구체적인 역사의 경계를 넘어 오지만, 결코 어떤 학문이나 증명으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자유가 직면한 경계, 또한 인간 예수의 자유가 직면한 경계를 직시해야 한다.

2. 성경의 그리스도론

2.1. 하느님 나라의 선포

2.1.1. 세례자 요한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활동하던 당시에 처음으로 자신을 공적인 차원에서 드러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러한 정화 예식은 당시 여러 종교를 비롯해 이스라엘의 신앙 실천에 통상적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근본주의적 노선을 실천하고,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시행되던 종교 활동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정화를 위한 욕조를 크게 늘렸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실천하던 세례는 새로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윤리적인 예식주의에서 마음의 회개를 향한 전이를 의미했으며,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을 향한 호소이기도 했다.

예수는 세례를 받는 가운데 요한의 염려와 권고를 함께 나누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요르단강에서의 이 사건 이외에,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개인적 관계가 오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들 간에 부정할 수 없는 관계가 있었고,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무관심도 있었다는 정도만을 알 수 있다.

2.1.2. 예수의 세례

예수의 세례[35]는 구원 사건을 암시하는 상징과 음성을 유도하는 가운데 구약 성경의 신현[36]을 상기하는 용어들과 함께 묘사되었다. 공관 복음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버전들은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측면을 강조하거나 공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이 예수로 하여금 성부에게 내적으로 순응하게 해 준 반면, 하늘에서 울린 성부의 음성은 군중 앞에서 그를 확증해 준 것이다.

성령은 세례, 도유와 함께 인간 예수의 메시아적인 형성과 그에 대한 자격 부여를 점진적으로 시작했다.[37] 또한 성령의 도유는 교부들의 그리스도론에서 열쇠가 되는 중심 주제였지만, 4세기를 기점으로 예수에 대한 양자[38] 입양적 이해의 위험에 직면하며 포기되었다. 예수가 성령에 의해 도유된 자라는 것은 하느님이 그의 인성을 형성하고 그의 의식을 비추며 의지를 강하게 해 주고, 그가 받은 사명을 실현할 수 있도록 권위를 부여해 준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관 복음과 달리 요한 복음서는 처음부터 성령의 작용과 머무름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 편에서 성령의 파견에 대해 강조했다.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서가 각각 강조하는 측면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릴 수 있다.
  • 공관 복음: 예수의 인간적인 역사성, 실제적인 상황, 성령의 작용 아래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연속적인 실현.
  • 요한 복음서: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의 수위성.

2.1.3. 예수의 새로움

예수의 설교에 있어서 중심 주제이자 새로운 측면은 인간의 역사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데에 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관념은 예수의 설교 전체를 특징지으며, 그가 행하거나 그에게 벌어진 모든 사건 사이를 연결하는 개념으로 드러난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구원 역사의 한 국면에 종지부를 찍으며 또 다른 국면을 시작하게 해 준다. 그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자들의 활동이 유효했지만,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 된 것이다.

2.1.4. 결정적 사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들은 청취자들은 이제 결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은 은총의 때이지만, 동시에 모험의 때이기도 하다. 또한 그 순간에 있는 것은 큰 특전이다. 그 순간이 하느님 계획의 정점이자 약속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예수는 사람들에게 2가지 요청을 드러낸다. 기뻐하는 것, 그리고 회개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것을 선물로 받는 모든 특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게 될 위험을 수반한다. 따라서 극단적인 제공은 그 자체로 극단적인 위기 또한 수반한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인간에 대한 심판을 동반한다.

2.1.5. 구약의 약속들과 희망들

하느님 나라가 점진적, 종말적으로 세워질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기쁜 소식은 계약의 주체인 이스라엘 백성의 필요와 기대 그리고 각 개인의 내면을 암시하는 굵직한 비유를 통해 표현된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에서 미래를 위한 약속으로 선포된 모든 것이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실현됐다고 전한다.
  • 야훼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 구원이 도래할 것이다.
  •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다.
  • 하느님의 영이 기름 부음 받은 자와 모든 사람 위에 부어질 것이다.

하느님은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준다. 마르코마태오는 예수가 전한 메시지의 초점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맞췄던 데 반해, 루카는 예수의 위에 머무는 성령의 선물에 초점을 맞췄다.

2.1.6. 바실레이아

그리스어 표현인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바실레이아 투 테우)는 '하느님의 나라'로 번역되며, 여기서 '바실레이아'라는 용어는 다양한 번역이 허용된다. 왕으로서의 하느님의 자격 또는 왕으로서의 위엄, 수하들에 대한 왕권 또는 통치권의 행사, 왕권이 행사되는 환경 또는 왕국. 역동적이고 공간적인 이 2가지 측면은 예수의 설교에 담겨 있으며 여러 비유를 통해 묘사되고 있다. 위의 3가지 의미 가운데 근본적인 것은 두 번째인 통치권이다.

예수가 전한 통치권 행사의 내용은 세례자 요한과 달리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무조건적인 제공에 있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와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며, 커다란 특전과 행운으로 체험된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 나라는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2.1.7. 도래한, 도래하고 있는, 도래할 왕국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서의 정식들은 그 나라가 시간과 갖는 관계를 정확히 규정함에 있어 불규칙한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는 2가지 핵심적인 동사가 있다. ἤγγικεν[39], 그리고 ἔφθασεν[40]이 그것이다. 첫 번째 동사는 근접성, 즉각성을 가리키는 데 반해, 두 번째 동사는 갑작스런 도착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2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이미 실현된 사건으로, 따라서 역사 내에 현존하는 사건이라는 해석(실현된 종말론), 그리고 예수 역시 일부분에 불과한 개방된 계획으로, 그를 훨씬 넘어서는 계획이라는 해석(실현 중에 있는 종말론). 왜냐하면 그 왕국에는 그리스도의 미래 공동체가 포함되어 있으며 우주 전체를 향해 확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루돌프 불트만의 견해대로, 하느님 나라는 수용을 요청하는 말 속에 담겨 있는 개인적인 호소로, 결단을 요구하며 개인을 신앙 앞에 또는 그에 대한 거부 앞에 두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실존적 종말론). 또 아니면 하느님 나라는 예수가 염두에 두었던, 그러나 자신의 실패와 더불어 사라져버린 곧 있게 될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선포였을지도 모른다(후속적 종말론)[41].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에 대한 표징들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그 충만한 실재는 나중에서야 감지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전의 모든 역사는 미래의 충만함을 지향해 온 것이다. 그래서 풀러[42]예기적(豫期的) 종말론에 대해 말했다. 또한 플로롭스키[43]와 헌터[44]시작된 종말론에 대해 말했다. 카라구니스[45] 같은 경우에는 잠재적 종말론에 대해 말했다.[46]

이런 상이한 해석들은 예수의 신비에 있어서 결정적이지만 아직은 최종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실재가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 정향되어 있으며 그 미래와 더불어 추인되고 완성될 것을 고대한다. 복음 사가들은 종말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광채가 이미 기적을 통해 선취되었고, 예수의 부활에서 실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요청받는다. 창조된 세계 전체가 하느님 자녀의 영광을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과 구원된 인류 전체를 성부에게 내어드릴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는 충만하게 실현될 것이다.

2.1.8. 하느님 나라의 신학적, 종말론적, 구원론적 내용

하느님 나라의 실제적인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예수는 그것을 분명히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설교, 기적, 관계, 우정과 더불어 그 나라를 실현해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내용은 3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신학적 내용, 종말론적 내용, 구원론적 내용.

우선 '하느님 나라'라는 이 비유는 각각의 복음 사가들에게 있어 다양한 의미의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마태오에게 있어서 이는 중심적인 관념을 대변한다. 마르코에게 있어서 이 왕국은 성자의 인격 자체를 가리킨다. 반면, 루카에게서는 예수 안에서 인류에게 제공된 커다란 새로움으로서의 영(Spiritus)의 관념이 우세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내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비유의 빛 아래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비유를 통해 설명했으며, 그것은 다양한 가능성과 요청들을 가리킨다. 이 모든 것은 베커[47]가 하느님 나라 개념의 '그리스도론화'라고 부른 것을 공고히 해준다. 이는 이미 공관 복음에 있으며 요한에 의해 명시화 되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는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 어떤 과정의 주체로서: 도달하고, 다가오며 길을 만들기 위해 '강요한다'.
  • 다른 실재들을 변화시키는 사건의 중심으로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물이나 진주를 발견한 사람에게서 일어나듯이
  • 이스라엘에게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이 선물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했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했다.
  • 역사 내에서 씨앗, 누룩, 겨자씨의 방식으로 스스로 부과되는 긍정과 성장의 과정으로서.
  • 선물이자 동시에 그에 해당하는 결실에 대한 요청으로서.
  • 이미 역사를 변화시키고 있는 힘으로서: 기적은 하느님 나라가 현재화되고 있음을 입증한다.
  • 세상 종말에 인자와 함께 도래하게 될 실재로서

이러한 표현들은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에게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 내용 역시 하느님이라고 언급하면서 끝맺게 해 준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시간과 연관되어 있으며 인간을 새로운 가능성과 요청 그리고 위험 앞에 놓아둔다. 여기서 핵심적인 측면은 신학적인 새로움으로, 종말론적인 새로움, 인간 마음의 변화, 하느님이 등장한 방식에 따라 삶을 일치시켜야 할 요청은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자연의 결과도 아니고 문화의 산물도 아니다. 또한 우주적인 평화의 나라를 말하거나 목적성을 띠는 나라 또는 이미 실현된 유토피아를 말하지도 않는다. 예수가 설교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계획으로부터 유래하는 영적인 과정이지 단순히 인간 의식의 성숙에 의해 이뤄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자신의 완성을 향해 진행되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자유를 통합하는 시작된 실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재와 미래, 인간과 하느님, 마음과 사회를 모두 포괄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으며,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다.

하느님이 계시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결정적으로 내어준다는 사실로 인해, 역사는 자신의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충만함에 이르며 은총 선물과 그에 대한 요청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주석학자들은 예수의 설교에서 어떻게 신학과 종말론이 연관되는지 토론한 바 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가 하느님에 대한 독자적인 체험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거기서부터 역사를 향한 구원의 봉헌이 유래한다고 보았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예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과 자녀적인 호소를 하도록 부추긴 하느님의 긴급한 종말론적 개입에 대해 확신했다. 쉬르만[48], 예레미아스[49], 스힐레벡스[50]는 첫 번째 명제를 제안했으며, 메르클라인[51], 트릴링[52], 쉴로서[53] 같은 경우는 두 전망이 서로 불가분리적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가운데 첫 번째 명제의 색채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하느님, 하느님 나라, 그리스도라는 실재들은 서로 동일시되지 않지만 서로를 내포하고 있으며, 불가분리적이다.

하느님 나라라는 실재는 예수 안에서 표현되고 주어지며 인격화되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예수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명시적으로 예수와 동일시되지는 않는 불완전하거나 부분적인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에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교회는 그 세상 안에서 예수가 친히 맡겨 준 임무로 인해 그 나라를 대변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것, 그와 맺는 인격적인 관계와 거리가 먼 실재와 동일시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 밖에서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 장소, 시간 또는 개념은 더 이상 있을 수 없고, 예수 바깥에 머무는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없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마르코 복음서 4장 11절

하느님 나라라는 실재는 예수 자신과 교회를 포함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라는 실재를 제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일으켰다. 따라서 하느님은 예수 안에서 최고의 인간적인 희망을 완성시켰으며 부분적으로나마 구원을 선취했다. 이것은 시간적인 발생이 아니며 그렇다고 사회적, 정치적 실존의 형태와 관련 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와 관련해서 단지 미래를 향해 언제나 긴장 속에 있는 충만한 실현의 시작이라고 말해야 한다. 역사가 개방되어 있고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한, 하느님 나라가 결정적으로 도래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코린토 1서 15장 28절

2.1.9. 하느님 나라의 수취인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마태오 복음서 11장 5절
광범위하고 복합적인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의 수취인들은 "가난한 이들"이다. 영원한 생명을 향한 인간의 개방성, 충만함을 향한 열망은, 인간의 나약함과 허물 그리고 궁핍함에 대한 인정을 넘어,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의 말씀과 인격에 담긴 구원의 후광을 인식하도록 적합하게 준비해 준다.

예수가 전한 여러 비유에서 하느님 나라는 우연히 발견한 값진 보물이자 진주로, 수고를 들여 정복해야 할 장소로, 초대받은 잔치로, 받을 만한 상급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언제나 감탄과 감사로 받는 선물이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가 전하는 사랑의 봉헌에 응답하는 가운데 하느님이 결정적으로 실제적인 존재가 될 때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의 기도와 자녀적인 체험에 참여하는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의 자녀'가 된다. 인간은 오직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2.1.10. 진복팔단(眞福八端)

진복팔단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 예수의 인격과 동일한 복합성은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작용 방식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초상화이자 인간 실존 형태에 대한 긍정이기도 하다.
  • 진복팔단은 하느님이 이미 현재 선사하는 실재에 대한 선포이자 주어진 방식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위해 미래에 완성될 실재에 대한 선포다.(신학적 내용)
  • 진복팔단은 예수를 따른 이들을 위한 은총과 사랑의 체험이다. 예수는 종이 되는 사명을 피하지 않고 많은 이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 부활함으로써 '복된 분'으로 선포되었다.(구원론적 내용)
  • 진복팔단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한 행동을 살고 이루라는 권고이다.(윤리적 내용)
  • 진복팔단은 예수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모험을 대면하였던 방식을 회상하면서 규정하는 것이다.(그리스도론적 내용)
  • 진복팔단은 하느님의 계획에 힘입어 이 세상의 태도와 그 권력을 뒤집어엎는 역설적이고도 혁명적인 제안이다.

2.1.11. 결론

예수는 하느님이 은총이자 치유 그리고 역사 안으로 들어왔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이제 하느님은 예수의 인격과 활동 가운데 섭리적이고 사랑 가득한 아버지로 활동하고 계시된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약속과 기다림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는 가운데 자신의 메시지를 그런 약속과 기다림의 틀 안에 두었다. 그의 생애는 실현되고 있는 비유이며, 예수 자신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비유다.

모든 역사적 상황은 하느님 나라의 사절인 그리스도의 빛 아래 드러나고 해석된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은 그가 구원자이자 구속주임을 알게 된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세상에 대면하여 자녀로서의 자신 지위와 자유 책임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들 안에 하느님을 실현해 준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은총이자 동시에 드라마와 같다. 이제 그리스도 앞에서 죄가 드러나며, 그럼으로써 빛이 어두움을 넘어서게 된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온 빛으로 정의할 때 의도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빛은 심판이다. 하지만 예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만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그 말씀은 인간을 하느님의 충만한 부성으로 인도해 준다. 그러나 이를 거부한다면, 그 말씀은 심판이 되며, 인간은 다시금 피조물이라는 무한한 고독 속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은 선포되는 지복, 행복과는 반대로, 단죄하는 심판이 된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요한 복음서 12장 48절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요한의 개념, 구원이라는 바오로의 개념과 병행한다. 비록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 본질적으로는 종말론적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의 업적을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고 구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하느님 나라가 영원한 생명과 구원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오직 시간의 마지막에 경험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믿는 이들이 이미 하느님 나라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카라구니스, <Kingdom of God> 中

하느님 나라라는 비유는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다음의 3가지 차원을 포괄한다: 과거(예수 안에서 드러남), 현재(그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의 여러 성사에 참여하는 가운데 소유하게 되는 담보로서), 미래에 대한 희망(세상을 완성하게 될 충만함으로서).

2.2. 기적들

2.2.1. 치유와 구마

예수의 공적 활동은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고 기적을 행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는 이와 동일한 과제를 사도들에게 위임했으며, 후에 사도들을 통해 교회로 전해지게 된다.

신약성경은 예수가 이룬 기적 행위를 3가지 용어로 제시했다: 'δυνάμεις(뒤나메이스)[54], τέρατα(테라타)[55], σημεῖα(오에메이아)[56]. 이렇게 해서 다음의 3가지 차원이 분명하게 구분된다.
  • 놀라움과 감탄을 일으키는 경이로움, 기적으로 감지되는 사실.
  • 어떤 사람이 일반 사물의 일상적 과정을 바꿀 수 있는 행동을 이루기 위해 가지고 있는 권능에 대한 표현.
  • 기적을 이루고 자기 존재를 새로운 방식으로 방향 짓도록 인도하는 이의 참된 정체성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표징.
예수의 활동에 지속적으로 동반하는 이 3가지 전망은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으며, 하느님은 이를 통해 예수를 자신이 보낸 이로 보증해준다.

2.2.2. 기적, 이적, 표징

  • 마르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보증하는 사건으로 기적에 대해 묘사한다.
  • 마태오: 기적이 내포한 가르치는 힘을 강조해서 제시했다.
  • 루카: 예수의 연민 가득한 애정을 강조했다.
  • 요한: 거의 언제나 표징들(σημεῖα)에 호소했다. 그에게 기적은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제자들이 그를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로 알고 믿게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한 복음서 2장 11절

2.2.3. 기적들이 자리한 생생한 맥락

복음서들은 예수의 기적을 총체적으로 소개했으며 이런 의미에서 기적을 양식화하고 보편화하는 가운데 집약해서 보여 주었다. 반면, 각 개별 기적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면에서 지나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복음 사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예수가 이룬 사실들, 했던 말들, 그리고 그의 운명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면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자신이 이룬 기적, 치유, 구마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던 것일까?

기적은 하느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도래했으며, 예수가 모든 사악한 힘을 쫓아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고한 증거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12장 28절
이런 의미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언, 교회와 일치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빙성을 보여 주는 표징으로 기적을 평가했다. 하지만 기적들을 추인하는 요소는 우선적 요소에 비해 부차적이다. 기적을 추인하는 우선적 요소는 기적이 내포한 역동적, 구원적 실재를 사람들에게 통교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은 이미 실현되고 있는 구원적 실재인 한에서 예수를 신뢰하게 해 주는 동기가 된다. 기적은 예수 안에서 우리 가운데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가 구현되는 것을 표현하는 가운데 예수를 오셔야 할 바로 그분과 동일시했다. 메시아로서 예수의 정체성, 하느님 나라의 도래, 하느님의 구원을 야기하는 표징들은 유일한 하나의 실재를 구성한다.

2.2.4. 근본적인 문제들

기적들과 관련해서 오늘날 다음의 2가지 물음이 제기된다. 1. 정말 그 기적들이 일어났을까? 2. 그게 가능한 일일까?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다음 2가지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
  • a) 기적 사화들은 목격 증인들에 의해 편집된 공증적인 행정록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편집된 텍스트들이다. 교회는 성령의 작용 아래 예수에 대해 기억했다. 성령은 사도들을 통해 계속해서 기적을 이뤄냈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현재에 대한 체험은 그리스도에 대한 총체적인 이미지를 제공하기 위해 하나로 모아졌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권능이 작용하는 이로 소개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사안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다루지 않았다.
  • b) 이와 비슷한 사실들을 배제하는 원천 자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행 문서의 빛 아래 비춰 보면, 기적을 이루지 않은 예수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가 이룬 기적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가운데 두드러져 드러나는 기적들은 구마와 치유가 있다. 악의 세력과 질병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자유와 품위에 대한 상실을 최고로 표현한 상황인데, 예수는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해방시킴으로 그들의 지배권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예수가 이룬 기적들은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이 이룬 업적과 기적의 연장으로 이해된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이 교회의 삶 속에서 이룰 것을 미리 앞서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적 사화들은 예수가 어떻게 자신을 신뢰한 사람들의 육체적, 심리적, 영적인 삶을 변화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는 질병이나 악마에 사로잡히는 것에 대한 이론을 정식화하지 않았고, 교회 또한 기적에 대한 이론을 명확히 진술하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의 자비로운 태도와 병자를 치유하기 위한 개입은 그의 치유 능력이 그 인격과 연결되어 있음을 입증한다. 기적들은 개별적인 악들에 대한 승리로서 구체적인 순간과 장소에서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응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늘날의 인간들이 지닌 범주에 따라 복원될 수 없으며, 그 세계에서 직접 우리가 속한 세계로 이전될 수도 없다.

하지만 예수의 치유와 변모시키는 능력은 육체적, 심리적, 종교적 질서에서 계속 작용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치유되고, 재기하며, 자신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라는 최고의 품위와 자유 그리고 형제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우선적인 과제를 회복시켜 준다.

기적은 자연 법칙에 대한 위반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은총을 통교하기 위해 이룬 자연 법칙에 대한 의미심장하고 역동적인 확장으로 이해된다. 하느님은 인간의 손 안에 피조물인 이 세상을 맡겼으며, 이 세상은 구체적인 어느 순간에 인간을 위한 계시의 표징이자 은총의 도구로서 창조주에 의해 높이 들어 올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기적은 하느님의 창조적 능력에서, '순종하는 능력'에서, 피조물의 수용 능력에서, 인간이 창조주께 드리는 신뢰에서 유래한다. 기적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지고함에서 유래하는 결실이다.

기적은 통상적인 인간의 삶과 자연의 흐름을 깨는 가운데 이를 갑자기 변화시키는 것으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 또는 부르심으로 감지된다. 따라서 기적이 기적으로 인정되려면, 자연의 흐름을 비롯해 인간 문화에서 오는 업적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사건이 되게 해 주는 특별한 조건들이 검증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근본적인 기적[57]은 기원에 따라 그리고 그것이 지닌 보편적인 특징과 영속적인 의미에 따라 그 이후의 가능한 기적들과 구별된다. 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은 이를 받는 사람에게 있어서 분명하며, 비록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증될 수 없거나 그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모든 진리와 의미를 보존할 수 있다. 기적과 사적 계시는 이를 받는 사람에게 있어 특별한 선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승인할 의무가 없다.

2.2.5. 신약에 있어서 기적의 다양한 의미

  • a) 기적은 하느님의 업적이다.
신약 성경은 기적의 창시자를 하느님으로 여긴다. 만일 기적이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인간을 향한 선함을 드러내지 않는 사건이라면, 그것이 경탄할 만한 것이라 해도, 진정한 의미의 기적, 즉 하느님의 업적으로 간주될 수 없다.
  • b) 기적은 그리스도에 대한 실현이다.
기적은 예수의 의식과 자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적은 예수의 인격을 실현하는 사건으로 그의 마음을 드러내며 무한한 자비를 보여준다. 하느님이 기적의 원천이라면, 예수는 기적을 구현하는 분이며, 기적은 예수가 하느님의 계시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임을 입증한다. 사실상 기적과 예수의 인격을 따로 분리해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c) 기적은 인간을 위한 표징이다.
기적의 우선적 목적은 인간을 전율케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가 하느님과 더불어 대화하도록 촉구하며 신적 의식을 통교하도록 준비시키는 데 있다. 기적은 수취인 자신에게 달려 있는 특별한 과정 속으로 수취인을 인도한다. 구체적인 사람들을 향해 있는 기적들은 모든 시대에 있어 고유하며 그 시대와 조화를 이룬다.
  • d) 기적은 창조의 자연 법칙을 넘어선다.
기적은 창조된 존재 안에 신적 권능이 새롭게 쇄도해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또 다른 효과들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기적은 자연 법칙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자연이 자신의 본질적 사명을 보다 잘 완수할 수 있게 해 주는 신적 실재의 증진을 의미한다. 그 사명이란 인간이 더욱 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일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은총의 고유한 목적을 구현할 수 있게 된다.
  • e) 기적은 인류의 종말론적 운명을 선취한다.
기적은 하느님 안에서 완성된 인간의 삶이 어떠할지 예견하게 해 주는 섬광과도 같다. 어떤 의미에서 기적은 하느님의 결정적인 자기 통교를 증거하고 그 유효성을 확인하며 이를 앞당겨 실현한다. 또한 기적은 은총과 영광의 표징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역사적 개입의 결과이므로, 그것은 초본성적인 실재이다.
  • f) 기적은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기적은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보증해 주며 이로써 그를 믿게 해 준다. 기적은 예수의 말씀이 일으키는 효과를 입증해 주며 세상에서 성부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성부로부터 직접 받은 권위에 힘입어 말하고 행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추인해준다.

기적은 인간이 고대해 마지않는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인류를 미리 보여 주는 표징으로서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는 이미 예수의 부활을 통해 미리 충만하게 선포되었다. 부활은 기적을 이해하게 해 주는 또 다른 중요한 해석의 열쇠다. 실제로 부활은 죽음과 질병, 죄로 인해 손상된 인류가 지닌 한계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로서의 하느님의 강력한 활동을 절대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미래 인류의 원형이다.

2.2.6. 결론

예수는 기적의 빛 아래에서, 겸손한 의사요, 기적을 행하는 강력한 분이다.

한편으로 기적은 신앙을 전제로 하며 또한 신앙을 요청한다. 다른 한편으로 기적은 신앙을 가능케 하며 신앙을 양육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고 그리스도론이 없는 이른바 '그리스도의 치유'라는 것은 단순한 마술에 불과하며 인간에게 부적절하다. 기적과 신앙은 늘 서로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칙은 갈릴래아에서 있었던 예수의 시간에 유효했듯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수의 시간에도 유효하다. 그러나 기적은 인간을 사로잡고 강요하는 절대적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기적은 그로 하여금 신적 실재를 향해 개방하게 해 주는 무엇이다. 기적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해 주는 매개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를 설교자이자 의사로 제시했으며, 이는 아우구스티누스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 중심 주제였다.

2.3. 권위에 대한 주장과 정체성에 대한 칭호들

2.3.1. 암묵적 그리스도론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격과 사명을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2가지 극단적인 입장이 제시되었다.

우선, 역사 실증주의는 예수의 정체성이 여러 복음서와 사람들이 그에게 부여하는, 또 그 자신이 부여하는 정식과 칭호에 의해 표현된다고 보았다. 이 전망에서 예수의 메시지와 교회의 그리스도론 사이에는 전적인 상응 관계가 있게 된다. 반면, 역사적 회의론은 복음서들을 부활 이후에 교회가 정성을 들여 만든 텍스트로 보았다. 따라서 교회에 의해 제안된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설교와는 불연속적인 관계에 있다. 더 이상 설교하는 주체를 하느님 나라를 설교한 그 주체와 동일하게 보지 않는 것이다.

최근 수십 년간 제3의 길이 모색되었는데, 이는 예수의 자의식과 교회가 그에 대해 말하는 것 사이의 연속성을 설정하는 데에 목표를 둔다. 이 전망은 "암묵적 그리스도론" 또는 "간접적 그리스도론", "구현되고 있는 그리스도론", "실현 중인 그리스도론"에 대해 말한다.

예수는 자신에 대해 장엄한 언명을 선언하지 않았다. 그는 명시적으로 신학이나 인간학 또는 그리스도론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위해 하느님을 대면하며 살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교에서부터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받은 사명을 지극히 충실하게 완수했다. 그러므로 그의 인격과 그가 받은 명령에 대한 암묵적 개념은 그가 설교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 기도하고 우정을 맺으며 이웃을 대하는 방식, 미래를 대면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활의 빛과 성령의 인도 아래 예수의 자의식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교회는 신약 성경에 담겨 있는 그에 관한 다양한 이름과 칭호들, 그리고 신경에 담긴 다양한 정식과 교의적 정의들을 통해 그러한 예수의 자의식을 표현한다.
2.3.1.1. 예수의 권위와 자유
예수의 공적인 활동을 특징짓는 요소에들에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드러나는 권위와 권력가들, 제도들, 상황들을 대면함에 있어 예수가 지녔던 자유를 들 수 있다. 예수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정당함의 근거, 자기 활동의 바탕, 자기 행동의 기준을 스스로 간직한 인물로 소개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새로움, 권위, 그리고 신용이라는 독특함이 담겨 있다.

예수의 권위는 예수와 공적인 권위자 사이에서 대비되어 드러나는 첫 번째 요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권위의 기원에 대해 해명하는 걸 거부했다. 그가 견지한 이 독특한 입장은 그 시대의 유력한 인물들[58] 그리고 그들의 정당함과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진다. 예수는 그 시대의 전통적인 모습 가운데 그 어느 것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예언적 소명에 대한 체험이나 랍비로서의 자격 또는 특별한 지혜나 어떤 예외적인 신비 체험에 호소하지 않았다. 예수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남는 모든 것은 오직 그의 인격에 바탕을 둔 그의 자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2.3.1.2. 자기 승인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이 그 자체로 고유한 정당함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거기에는 이사야 예언자의 경우처럼 어떤 신현(神顯)에 대한 흔적이나, 어떤 결정적인 내적 체험이 전혀 없다. 예수의 인격적인 권위는 그가 많은 담화를 하는 방식에서 표현된다. 그는 '아멘'이라는 말을 권위를 지닌 정식으로 개방적인 상태에 두었다. 또한 "아멘, 아멘"이라는 중복된 표현이 마태오 복음서에서 30번, 요한 복음서에서 25번, 마르코 복음서에서 13번, 루카 복음서에서 6번 드러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나'라고 하는 강조 표현이 선행하는 가운데 표현 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다." 이 표현은 탈출기에 소개된 야훼의 자기현시, 자기 신원 확인에 대한 반향처럼 드러나고 있다. 쉴리어[59]는 예수의 이런 말씀과 행동 안에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론을 통해 발전하게 될 근원적인 씨앗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2.3.1.3. 거룩한 제도들과의 관계
예수는 유대교의 여러 종교 제도와 관련해서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었다. 그는 인간적인 전통에 직면해서 하느님의 본래 뜻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외적인 정결 대신 내적 지향의 순수함을 요구했다. 안식일에 관한 논쟁에서는 예수의 이중적인 태도가 강조되어 드러나고 있다.[60]

예수는 성전, 예배와 관련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했다. 그는 성전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이를 진부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의 인격과 사명을 위해 상대화했다. 특히 요한 복음서는 예수의 육신을 새로운 인류를 위한 성전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모세에 의해 주어진 율법의 측면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이다.

예수는 여러 구체적인 상황에서 율법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율법과 단절된 관계를 드러냈다. 어떤 경우 그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규정을 언급하며 율법을 추인했다. 그리고 율법 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반면, 또 다른 경우 그는 새로운 해석과 함께 율법을 변경했다.[61] 또 어떤 경우 그는 대조적이고 변증법적인 극복을 제안하기도 했다.[62]
2.3.1.4.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태도
예수가 세운 새로운 사회적 관계는 권위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가져다주며 이를 표현한다. 이러한 관계는 당시의 종교적, 법적 체계에서 소외되고 그 체계 밖에 있는 사람들[63]을 품어 안는다. 예수가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선함과 관대함을 드러내는 인격적인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하고 선사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이 가장 소외되고 길 잃은 자녀, 죄인들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의 태도는 그러한 하느님의 특징적인 모습을 계시한다. 즉, 하느님의 특징적인 모습은 성자의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돌아온 탕자에 대한 비유는 예수가 계시하려 한 하느님에 대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 죄인들과 우정을 맺고 식탁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며 용서하는 모습 역시 권위가 담긴 행동이자 말씀이며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서로를 내포하는 가운데 예수의 진면목을 해석하게 해 준다.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행동은 우선적으로 신학적이며 구원론적인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서 사회적, 윤리적 특징은 부차적으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예수는 결코 죄를 진부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는 죄인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전해 주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초대하는 가운데 그로 하여금 자신을 대면하게 했다.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태도에는 그의 정체성과 권위에 대한 의식이 동시에 표현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2.3.1.5. 하느님과의 관계
예수는 지상의 삶 동안 하느님과 순명, 충실함, 기도로 특징 지어진 관계를 견지했다. 그는 특히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거나 자신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근본적인 선택을 해야 할 순간에 성부에게 기도했다. 여러 복음서들은 '아빠'[64]라는 아람어로 예수와 성부 간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분위기를 집중적으로 표현했다. 이 용어는 그 이전의 전통에서는 상당히 드물었지만, 이는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예수의 의식에 대한 표현으로 교회 안에 정착되었다. 이는 예수가 성자로서 성부와 갖는 유일한 관계를 추인하는 표현으로, 성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직접적인 관계성을 보여준다. 후대의 그리스도론이 성자와 관련해서 언급하게 될 것은 예수의 기도와 말씀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아빠'는 그리스도론 전체에 있어서,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와 하느님 사이 상호 간의 앎 그리고 하느님을 계시하기 위한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는 행함의 질서가 아닌 존재의 질서에 속하는 범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러 복음서를 통해 증언된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이런 상호 간의 앎과 사랑 그리고 계시를 설명하기 위해, 신학은 '동일본질'(consubstatia)이라는 용어에 호소했다. 이는 성부와 성자 간에 있어 본성의 절대적인 동등함을 의미한다. 오직 하느님과 더불어 존재, 앎, 뜻을 공유하는 자만이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계시하는 이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의 생명을 공유하는 자, 하느님만이 절대적인 구속주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여러 가지 말이 아니라 사실들을 통해 규정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말이나 정의에 호소할 필요 없이, 그가 맺는 다양한 관계로부터 출발해서 그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가 사람들과 더불어 맺었던 다양한 관계의 빛 아래 그의 자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맺었던 관계들에 대한 검토는 동시에 신학적이며 역사적인 관심을 간직하고 있다. 즉, 그것은 예수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며, 이와 동시에 왜 그가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려 준다.

2.3.2. 명시적 그리스도론

모든 저자들은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 그리고 행동에 담겨 있는 암묵적 그리스도론을 인정함에 있어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명시적 그리스도론, 즉 예수 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명시적으로 선언함과 동시에 예언자적이고 메시아적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엄한 주장을 담고 있는 칭호들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명시적 그리스도론을 발견할 수 있는가?
2.3.2.1. 예수와 사도들 간의 관계
만일 예수가 메시아이며 성자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배제한다면,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공생활을 보내며 살았다는 점을 상상하기 힘들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삶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그들을 향한 메시지가 내포한 분명한 내용과 권위를 요청하며 동시에 그들을 파견한 분과 그에 해당하는 권위에 대한 인식도 요청한다. 제자들을 자신의 협력자로 여긴 예수는 자신의 신비를 전적으로 감추어 둘 수만은 없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서 15장 15절

진정한 우정은 운명과 사명 그리고 인격을 공유하는 가운데 형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시적인 그리스도론을 요청해야 한다. 명시적이라고 한 것은 예수의 인간적 성장이 그리스도론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명시적인 것은 여러 가지 사실들이 그리스도론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들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명시적인 그리스도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지연되고 점진적이라 해도, 예수의 사명과 그의 여정 그리고 사도들이 그의 인격에 통합되는 과정과 연관된 명시적인 그리스도론을 요청해야 한다. 여기에는 예수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여러 가지 사건과 그러한 자의식을 해석하게 해 주는 그의 말씀들이 기여했다. 행함과 말씀이 배제된 예수에 대한 계시는 입증되지도 완성되지도 않은 채 남을 수밖에 없다. 말씀이 배제된 사실들은 혼자서는 걷어 낼 수 없는 철저한 어둠 속에 잠길 수밖에 없다.
2.3.2.2. 스승에 대한 칭호
그리스도에 관한 칭호들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해야 한다.
  • a) 예수 편에서 스스로에게 직접 부여한 칭호.
  • b) 다른 사람들이 예수에게 부여한 칭호.
  • c) 그의 고유한 사명의 빛 아래 이 모든 칭호를 다시 해석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칭호.

예수는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진 칭호들을 사용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그러한 칭호들을 재해석해서 받아들였다. 더욱이, 구약 성경에 제시된 여러 칭호들 정도로는 그의 정체성을 비롯해 그의 사명이 실현되는 방식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유대교 개념들을 투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65] 그렇다고 교회가 사용한 이후의 개념들을 예수에게 투사하는 것이나, 어떤 기준에서 예수가 그러한 개념에 '적합한지' 묻는 것도 의미가 없는 시도이다.

예수는 자신이 "성자라고 하는" 개인적이고도 내밀한 앎에 힘입어 구약 성경을 읽는 가운데 자신에 대한 이해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자신에 대해 투사된 기대와 희망에 대해 "같은 형태"의 대답이 되는 걸 원치 않는 가운데, 메시아적 비밀, 예언자적 비밀, 지혜 문학적 비밀을 행사했다.

몇몇 학자들은 예수가 몇 가지 칭호들을 자신에게 직접 적용했다는 점을 부인한다. 반면 또 다른 학자들은 그렇게 적용했다는 점을 배제하지 않으며 어떤 경우든 그러한 칭호들이 내포한 함의에 따라 그가 살았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된 칭호들은 다음과 같다: 메시아, 야훼의 종, 사람의 아들, 성자, 하느님의 아들.
  • a) 메시아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설립하면서, 즉 구원을 시작하면서 객관적으로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한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의 어떤 측면을 부정하는 모습을 암시하지 않기 위해 필요에 따라 '메시아', '그리스도', '왕'이라는 칭호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이러한 칭호를 고통스럽고 겸손한 내용,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의 운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지어 말했다.
예수가 열혈당원들의 혁명 운동에 가담했을 것이라는 아이슬러[66]와 브랜든[67]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68] 물론 그들의 혁명 운동과 예수 사이에는 내용에 있어 어느 정도의 유사함이 있다. 그러나 열혈당원들이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했던 것에 반해, 예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다.
  • b) 야훼의 종
예수가 야훼의 종이라는 칭호를 자기 자신에게 직접 부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적인 정체성을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종종 침묵과 행동의 결과를 통해 이를 더 잘 드러낼 수도 있다. 예수라고 하는 존재는 종의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 주며 이를 실현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존재의 빛 아래 예수를 "하느님을 위한 인간이자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쉬르만(Schürmann)은 예수의 운명과 그 존재의 뿌리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으로 "~을 위한 적극적 존재"[69]라는 표현을 고안해냈으며, 이 표현에는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기 위한 선재 개념과 신적 존재 개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 c) 사람의 아들
공관 복음은 82번이나 예수의 입에 사람의 아들(人子)이라는 칭호를 두었다. 이는 그의 자아와 동일시되는 강조 형태로 드러난다. 다른 사람들은 이 칭호를 결코 그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이 표현이 담고 있는 정확한 의미는 복합적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고, 다니엘서 7장에 등장하는 위엄 있는 인물을 상기시킬 수도 있다.

예수는 봉사자로서 모든 사람들을 동반하고 죽음 가운데 그들과 연대한 다음, 그들의 심판관이 될 것이다. 그가 재판석에 좌정하는 것은 외부에서 판결을 내리는 제3자의 권리 주장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심판하는 분이 드러내는 사랑과 진리에 대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신이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이들과 함께 그들의 역사를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선취하며 그들을 대리하고 대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지위를 박탈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공동 책임을 지고 그들에게 힘을 복돋아 줌으로써 하느님 자녀로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많은 표징들과 명시적인 칭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해 온전히 다 보여 주지는 못한다. 또한 그것이 예수와 관련해서 교회가 나중에 알게 된 모든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 주는 것도 아니다. 그의 정체성은 부활과 성령 강림을 통해 충만하게 계시되기 전까지는 어두움 속에 남아 있었다. 예수의 태도와 메시지 그리고 명시적인 말씀들이 교회가 견지하는 명시적 그리스도론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순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증언들은 구약 성경의 전망이라는 틀에서 그것이 내포한 최소한의 가치로 인도되지만, 동시에 훗날 교회에 의해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을 미리 앞서 보여 주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복음서들을 전해 준 교회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증거에 의해 움직였다. 즉, 하느님 나라를 설교한 예수와 교회가 부활하신 분으로 선포한 그리스도는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러 본문들의 빛 아래 이런 연속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노력은 교회가 "또 다른 예수"를 만들 수도 있었다고 하는 의혹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합당한 것으로 사료되는 이런 의심을 서로 분리된 본문들에 대한 주석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전체 공동체를 위해 근본이 되는 본문으로서의 복음서를 이해함으로써 그러한 의심을 극복할 수 있다.

2.3.3. 하느님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예수

다양한 제도와 사람들, 이스라엘의 거룩한 율법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 그리고 경이로운 표징들은 당시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표현된 것을 넘어서는 권위에 대한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는 선조들(모세), 규범적인 지혜(솔로몬), 거룩한 장소(성전) 앞에 자신을 두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권위를 결코 명시적으로 정당화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런 의식, 하느님의 권위와 심판을 보증하는 보증인(대리자)으로 행동하였다. 예수는 청중 앞에서 오직 하느님만이 취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하느님을 대신하지 않고, 자신 안에서 자신을 통해 호라동하는 하느님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하느님의 행동'이었다.

교회는 하느님과 예수 간에 있는 이러한 구원적 행동의 일치를 '본성의 일치'로 표현했다. 사도행전은 구약 성경에서 오직 야훼께 유보된 표현과 칭호 그리고 구원적인 효과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다. 바오로는 하느님 아버지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은총과 평화라는 메시아적인 선물들을 귀속시키는 가운데 거의 모든 자신의 서간을 시작했다. 복음 사가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가운데 개입하는 하느님의 구원적인 현존과 연관된 가치가, 예수가 지상의 삶을 거치는 동안 이룬 각각의 행동에서 똑같이 선취된 것으로 보았다.

2.4. 죽음 직전 예수의 자의식

2.4.1. 갈릴래아의 위기

예수의 삶은 갈릴래아에서의 활동[70]과 예루살렘에서의 수난[71]이라는 2개의 극(極)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복음 사가들은 지리적 요소와 신학을 통합해서 제시했다. 그들은 예수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2개의 공간과 2가지 차원 사이의 간격에서 다양한 담화와 의견을 통해 예수의 사명에 대한 완성을 특징짓게 될 고통과 폭력에 대한 강렬한 직감으로서의 예수의 메시아적 의식을 보여 주었다.

갈릴래아에서 머무는 시간은 2개의 계기를 포함한다. 우선, 기적으로 인해 흥분한 군중의 열정적인 수용, 그 다음으로 그들이 실망한 채 멀어지는 순간이 그것이다. 마르코가 제시한 종합적 내용은 특히 예수의 밀도 깊은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곳에서 예수의 명성이 퍼져 나가고 많은 군중이 그의 곁에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중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지극히 특징적이며, 모든 복음 사가는 이 사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은 이 사화를 성찬례의 전조로 본 반면, 마르코는 군중을 향한 예수의 연민 어린 행동으로 보았다. 이때 군중은 예수를 민중 봉기를 지휘할 인물, 정치적 메시아와 동일시하려는 유혹을 가졌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가 군중이 자신을 억지로 데려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갔다는 말로 이 사화를 마무리한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는 어쩔 수 없이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내포한 의미를 명시적으로 보여줘야 했다. 그의 사명이 지향하는 목적은 이스라엘을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시 일으키고 통합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동포들이 이를 잘못 해석함으로써 이 사명이 위협받게 되자 그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홀로 있어야 할 필요를 느꼈으며 이와 동시에 진심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그 권위를 대면해야 할 필요도 느꼈다.

이 시기에 다음과 같은 3가지 새로운 상황이 조성된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을 보다 강도 있게 가르쳤으며, 수난에 대한 예고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고, 거룩한 변모 사건이 있었다. 부활 사건 이후 편집된 그의 죽음에 대한 설교는 그의 생애에 있어 결정적 전환점이 된 죽음과 관련해서 예수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교회의 증언과 통합시켜 준다. 거의 감정이 배제된 이 예리한 주장들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신빙성과 이를 통한 예수의 의식 또한 보장해준다. 그러나 이는 후대 신학에서 제시될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루카는 베드로의 고백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예수의 초대, 그리고 거룩한 변모 간에 엄밀한 연관성을 설정했다. 부활의 선취로 이해되는 변모 사건이 내포한 의미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하느님 편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신현으로서의 의미와, 그 사건에 함께한 사도들과 관련해서 예수를 추인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루카는 예수의 운명을 '탈출' 그리고 '승천' 개념과 함께 특징지었다. 해방을 향한 탈출 그리고 영광을 향한 승천은 수난에서 그리고 수난을 통해 실현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2.4.2. 성전 입성

파스카 축제 즈음해서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떠나 성전으로 갔다. 예수가 이 거룩한 도시에 개선하는 자로 입성하는 것은 민족적인, 정치적인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파스카 축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억과 공격적인 희망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예수는 성전에서 상징적인 행위를 하였는데 이는 실현되고 있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예언자들이 하던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갖는 중요성은 예수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기성 종교 제도에 대항해서 이 일을 했다는 데 있다. 성전은 이 제도를 대변하는 최고의 상징이자 의미심장한 장소였다. 표징으로 드러난 이 행위는 여타 수많은 담화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해석이 제시됐다.
  • 혁명적 해석: 예수가 성전에 대한 종교적, 민족적 정화를 위해 개입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권력에 대항하는 항쟁을 선동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 도덕적/개혁적 해석: 예수는 상인들의 침입에 저항하면서 하느님의 집에 거룩함을 회복시키려 했다. 성전은 다시금 기도의 장소로 복원되어야 했다.
  • 보편 구원적 해석: 성전은 중재와 용서의 장소에서 도둑들의 소굴이 되었으며,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배타주의를 거슬러 모든 사람에게 성전을 열었다. 그는 이방인들로부터 성전을 정화한 게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 성전을 개방하였다.
  • 종말론적 해석: 성전 정화는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도가 끝났다고 선언하는 권위 있는 행동이었다. 이제 새로운 성전은 예수의 인성이며, 하느님을 향한 예배는 하느님이 선사하는 성령과 진리에 응답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위에서 혁명적 해석을 제외한다면 다른 3가지 해석들은 같은 실재를 드러내는 다양한 모습으로 간주할 수 있다. 예수는 구원 제도들이 지닌 본래적인 의미, 그것이 지향하는 보편적인 목적,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인격 안에서 실현되는 것에 호소하는 가운데 이 제도들을 대했다.

2.4.3. 백성들과의 대면

적대자들이 예수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예수는 그들이 세례자 요한을 거부한 사실을 제시했다. 당시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리고 예수는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자신을 예언자적인 연속선상에 두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는 살인을 저지른 포도원 지기 비유[72]에 대해 전하는 가운데 그들을 향해 거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러한 상황은 매우 위중했다. 왜냐하면 이 경우 파견된 이는 마지막 사람이기 때문이다. 포도원 지기 비유는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 상속자로 소개한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운명과 예수의 사명은 서로 동일시되어 드러나고 있으며 백성의 지도자들은 생명과 죽음을 결정 짓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러므로 한편에서는 예수의 자의식이 드러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 동기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딜레마는 근본적이다. 이전의 모든 역사를 예수와 연관 짓고 그의 권리 요구를 받아들이며 그를 인정하거나 아니면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론의 미래를 위한 결정적 표현인 '성자'라는 용어가 등장함으로써 이 비유의 중요성은 더해 간다. 이 용어가 예수로부터 직접 유래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의 자기이해와 교회에 의해 표현된 해석 간의 확실한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시대 유다이즘에 대한 최고 전문가인 찰스워스[73]는 '하느님의 아들'이란 메시아의 칭호가 초대 공동체에 의해 창안됐다는 견해는 불가능하며, 초기 그리스도론과 신약 성경의 신학도 예수와 함께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2.4.4.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은 새로운 실재를 세우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다. 이 새로운 실재는 봉헌된 그의 삶에서부터 자유롭게 솟아나왔으며 미래를 규정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맺은 계약이라는 선행 형태에 이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약'이 맺어지게 된다.

2가지 표징이 예수의 공생활과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 표현을 마감한다. 그때부터 침묵과 수난은 말씀과 행동 대신에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행위는 모든 형식적 선언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예수는 말씀만으로 자신의 구원 계획을 선언한 게 아니라 자신의 생애와 더불어 이 계획을 실현했다. 구원론은 그의 행적에 내포되어 있다.
2.4.4.1. 역사적 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한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 거행이라는 틀 안에 들어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해방 행위에 대한 기억이자, 계약에 대한 기념이며, 메시아에 대한 고대이고, 종말론적 왕국에 대한 선취다. 또한 이 만찬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이라는 맥락 안에 있다. 다시 말해 최후의 만찬의 모든 사건과 그 이후 이어지는 사실들은 파스카적인 틀과 제자의 배반이라는 2가지 근본적인 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바오로의 전승이나 요한의 전승은 모두 이 2가지 계기를 연결시키고 있다.

공관 복음은 예수가 한 최후의 만찬을 파스카 만찬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이 일은 니산달 14일에 있었으므로, 예수는 니산달 15일, 즉 파스카 축제일에 십자가에 못 박혔을 것이다. 이렇듯 중요한 날에 있었던 중대한 처형은, 비록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라 해도, 아주 위중한 경우에 일어나곤 했다. 반면 요한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 만찬이 아니라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가 파스카 축제의 준비일인 14일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사가는 거기서 다른 의미를 읽어 들였다. 즉, 축제 저녁에 봉헌하도록 정해진 어린양들을 성전에서 도살하는 바로 그 시간에 파스카의 새로운 어린양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자들은 최후의 만찬이 파스카 만찬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아무튼 파스카 축제의 상황과 그 반향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한 최후의 만찬을 이해함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2.4.4.2. 사화들
마태 26, 26-29과 마르 14, 22-25은 본래 수난 사화에 상응하는 듯이 보이며 상당히 역사적인 관심을 담고 있다. 다른 한편에는 1코린 11, 23-29과 루카 22, 19-20이 있는데, 이 텍스트들은 전례적인 기원과 축제를 거행하려는 의도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성찬례 거행에 수반되는 사화들로서 성찬례가 내포한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 같다.

예수의 말씀에 대한 축자적 내용만 재구성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하다. 교회는 이 텍스트들의 진실을 예수의 말씀 자체에 대한 복원과 구술적인 반복이 아니라 이 텍스트들의 객관적인 의도에 맡겼다. 이 객관적인 의도는 직접적인 증언들에 대한 신빙성과 성령의 활동 그리고 사도들의 권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문자와 어구 그 자체만 보면, 이 사화들은 최후의 만찬을 유다적인 파스카와의 연속선상에 두고 있으며 교회의 성찬례를 앞서 취하고 있다. 예수가 한 마지막 식사는 파스카 이전에 그가 죄인들, 소외된 이들, 세리들과 한 식사 그리고 훗날 부활한 후에 제자들과 더불어 하게 될 식사를 통해 연장되는 일련의 식사에 있어서 최고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최종적인 완성에 대한 선취로서 사람들과 더불어 음식을 먹고 운명을 나누는 것은 생명에서 죽음으로 확장된다. 예수가 자신의 생애 동안 나눈 우정과 용서 그리고 호의는 죽음에 대한 승리를 지향하는 가운데 죽음 안에서 지속적으로 선사되고 있다.
2.4.4.3. 행위와 말씀
최후의 만찬 예식은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행위, 음식, 가재도구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예수는 몇 가지 최소한의 요소들을 바꿨으며 거기에 최고의 실재를 도입해 넣었다. 즉, 자신의 인격적인 실존을 빵과 포도주에 결합해 음식과 음료수로 바꿨다. 여기서 드러나는 커다란 새로움은 행위와 말씀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며, 열쇠가 되는 요소들은 쪼개진 빵과 흘린 피로, 이는 몸과 피를 담고 있는 실제적인 상징들이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이제 예수는 닥쳐오는 죽음에 직면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폭력으로 쪼개지고 부어지기 전에 성부를 향한 찬미에 자신을 모아들이며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주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쪼개진 몸과 땅에 스며들 정도로 흘린 피를 선취하는 말씀이다. 또한 그것은 예수의 죽음을 희생이자 계약으로 제시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예수는 사람들의 배반에 대해 성부가 자신에게 맡겨 준 일을 완수하기 위해 자유로이 의식적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가운데 응답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과된 운명을 그저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식탁을 주재하고 축복을 선언하는 가장으로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운명에 참여하게 했으며 그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보여 준 그 사랑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중재의 바탕이 되게 했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몸과 피, 즉 자신의 인격을 내어 주었다.

[1] λόγος(로고스)[2] Filius[3] 降生, 신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4] θεολογία,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더불어 맺는 관계[5] οἰκονομία,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시간 안에서 이룬 업적[6] Historia ecclesiastica[7] 聖化[8] 先取, 남보다 먼저 가짐[9] 原型, 본보기가 되는 형태[10] 이는 그리스도교 교파마다 차이가 있다.[11] 교회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소다.[12] 교회는 우리에게 객관적인 해석을 위한 조건들을 제공해 준다.[13] 동시적 특성[14] 공시적 특성[15] 성서와 성전에 기초를 둔 믿을 교리를 의미하는 용어로서 교회가 그리스도께 받은 권한으로 신자들에게 믿으라고 가르치는 진리들.[16] 이는 엄밀히 말해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다.[17] νους(누스)[18] πνεύμα(프네우마)[19]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 믿음, 기도[20] 이를 동시성이라 부른다.[21] 神化[22] Imago[23] 아빠, 퀴리오스, 예배 등[24] 참이나 거짓의 값이 확정될 수 있는 논제.[25] 바우어, 부쎄, 종교 역사학파 등[26] 아타나시우스, 키릴로스[27]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테오도레투스, 요한 크리소스토모[28] 지나간 사실을 소급하여 추후에 인정함.[29] 예를 들어,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3부[30] 헤겔, 위르겐 몰트만, 융엘, 에브도키모브, 발타사르, 뒤렐 등[31] 被造的[32] 기능적이고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문화, 형이상학적이고 개념 중심적인 문화[33] 이는 몇몇 개신교에서는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34] Logos[35] 이 사건에서 은총이 본성을 만나고 신적 사명이 위임되고 있다.[36] 神顯, 하느님의 나타남[37] 사도 10, 37-38 참고[38] 養子[39] 엥기켄, "가깝다", "곧 온다"[40] 에프타센, "갑자기 도래했다", "현재한다"[41] 알베르트 슈바이처[42] Charles E. Fuller, 침례회 목사[43] Georges Florovsky, 러시아 정교회 사제[44] Archibald Macbride Hunter, 애버딘 대학교 신학부 교수[45] Chrys C Caragounis, 룬드 대학교 신약학 교수[46] 카라구니스의 "Kingdom of God" 참조.[47] Karl Josef Becker, 독일의 추기경[48] Heinz Schürmann, 독일 가톨릭 신학자[49] Joachim Jeremias, 독일 루터교회 신학자[50] Edward Schillebeeckx, 벨기에의 도미니코회 신학자[51] Helmut Merklein, 독일 가톨릭 신학자[52] Wolfgang Trilling,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53] Marianne Schlosser,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54] 기적[55] 이적[56] 표징[57] 예수의 기적과 사도 시대의 기적[58] 랍비, 예언자, 현자, 신비가 등[59] Heinrich Schlier,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60] 원칙에 대한 준수, 인간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안식일이 내포한 우선적 의미[61] 율법을 모든 이에게 확장하는 가운데 이웃 사랑에 대한 의무를 보다 철저히 제시했다. (루카 10,25-37)[62] 순전히 율법적인 정의에 비해 훨씬 큰 정의를 요청하며 자신의 말을 옛 율법에 대립해서 제시했다: "~라고 하지만, 나는 ~라고 말한다." (마태 5-7)[63] 세리, 죄인, 이방인, 창녀[64] abba[65] 예수의 새로운 면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66] Robert Eisler,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박식가[67] S. G. F. Brandon, 영국의 성공회 사제[68]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몇몇은 그쪽 출신이었을 수도 있다.[69] proexistenia activa[70]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교와 기적들[71] 재판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72] 마르코 복음서 12장[73] James H. Charlesworth,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