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5 01:38:42

고개(전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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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高開
(? ~352)

전연의 인물. 자는 불명. 기주(冀州) 발해군(勃海郡) 수현(蓚縣) 출신. 고첨의 장남.

2. 생애

모용외의 거듭된 설득에도 끝까지 전연에서 관직을 받지 않았던 아버지와는 달리, 고개는 연왕 모용준 재위기에 출사하여 창려(昌黎)태수를 지냈다.

영녕 2년(351년) 4월, 갈족후조 정권이 무너지고 염민염위가 들어서자, 발해 사람 봉약(逄約)이 수천 호를 거느리고 염위로 귀순하여 발해태수에 임명받았다. 염민은 여기에 더 나아가서 후조의 발해태수였던 유준(劉準)을 유주(幽州)자사로 삼고, 발해에서 나름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리던 호족 봉방(封放)도 인정해주면서 방약, 유준, 봉방으로 하여금 각기 발해를 통치하게 하였다. 이에 연왕 모용준은 오재장군 봉혁에게는 방약을 토벌토록 하고, 고개에게는 유준과 봉방 토벌을 맡겼다. 다만 고개가 발해에 이르렀을 때, 유준과 봉방은 아무런 저항없이 항복하여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 고개는 태원왕 모용각의 참군으로 배속되었다.

영화 8년(352년) 4월, 태원왕・보국장군 모용각을 따라 염민 정벌에 참여하였다. 모용각은 상산(常山) 방면으로 들어가던 염민군의 뒤를 쫓아 염대(廉臺)에서 따라잡고 전투를 하였는데, 10번 싸워 10번 모두 이기지 못하였다. 당시 염민의 군사들은 대부분 보병이었던 반면에, 전연군은 대부분 기병이었기에, 염민은 더욱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고자 인근 숲 속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때 고개가 모용각에게 말했다.
"염민이 숲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그를 제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속히 경기병을 보내 적에게 보이게 하고, 못 이기는 척 후퇴하여 적을 평지로 유인한 뒤에 전군을 들어 공격해야 합니다."
모용각은 고개의 계책을 따랐고, 과연 염민은 유인책에 걸려들어 평지로 뛰쳐 나왔다가 전연군에게 패하여 결국 사로잡혔다. 그러나 고개는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였다.

고개의 동생 고상(高商)은 강직하고 의연한 성정에 학문을 좋아하여 연왕 모용준 시기에 범양(范陽)태수를 지내고 있었는데,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피를 통하며 통곡하였다. 이 때문에 지팡이 없이는 걷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자, 연왕 모용준은 그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참지 못하였고, 이내 좌우를 향해 말했다.
"자고로 형제의 우애 중 이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고상을 오늘부로 창려태수에 삼겠노라."
그러자 고상은 눈물을 흘리며
"신의 형이 이 군(郡)에서 사망하였으니, 신은 차마 이곳에 부임하지 못하겠습니다."
라 하였다. 이를 들은 모용준은 요서태수로 고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