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30 09:53:12

호조 다카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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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싯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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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제14대 싯켄
호조 다카토키
北条高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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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1304년 1월 9일 ~ 1333년 7월 4일 (향년 29세)
재임기간 제8대 싯켄
1316년 ~ 1326년

1. 개요2. 생애
2.1. 싯켄에 오르다2.2. 출가와 분열2.3. 막부와 함께 최후를 맞다
3. 평가4. 대중문화

1. 개요

가마쿠라 막부의 제14대 싯켄(執權)이다.

후임인 사다아키와 모리토키는 모두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마지막 싯켄으로 불리우며, 가마쿠라 막부의 최후를 함께했다.

2. 생애

가겐 원년 12월 2일(1304년 1월 9일), 제9대 싯켄인 호조 사다토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셋째였지만, 맏형 기쿠주마루와 둘째 형 긴주마루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사실상 도쿠소(得宗, 호조 집안의 최고 권력 계승자 일족) 가문의 적자로 간주되었다.

엔쿄 2년(1309년), 7세의 나이로 원복(성인식)을 치렀다. 가마쿠라 연대기(鎌倉年代記)에 기록은 있으나, 구체적인 진행 과정에 대한 사료는 없다. 하지만 가마쿠라 연대기(鎌倉年代記)와 겐지 3년기(建治三年記)에 나온 선례를 고려할 때, 다카토키 역시 막부의 고쇼(御所)에서 당시 쇼군이었던 모리쿠니 친왕을 주례자로 삼아 원복을 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상적으로 당시 원복을 치를때는 주례자의 이름 중 하나를 받아 편휘(偏諱)로 삼는 관례가 있었다. 다카토키의 경우, 주례자이자 쇼군인 모리쿠니 친왕(守邦親王)의 이름자인 모리(守)나 쿠니(邦)에서 글자를 따온게 확인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선조로 여겨지는 다카모치 왕(平高望王)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쇼군이 아니라 조상의 이름을 따온 점에서 볼때 당시 싯켄 도쿠소 가문의 위상과 더불어 당시 이름을 통한 혈통과 정통성 과시가 정치 전략 중 하나였음이 드러나는 부분.

2.1. 싯켄에 오르다

오초 원년(1311년), 다카토키가 9세가 되던 때 부친 호조 사다토키가 사망하였다. 사다토키는 임종에 앞서, 너무 어린 아들을 보좌할 후견인으로 장인인 아다치 토키아키와 내관령(內管領) 나가사키 엔키를 지명하였다.

너무 어린 나이였던만큼 싯켄에 바로 오르긴 어려웠던 상황이라 나가사키 엔키는 1316년까지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나 호조 마사무라(政村) 계열의 방계 인물들을 일종의 임시 싯켄으로 올리며 다카토키가 성장할 때까지 본인이 대신 막부의 최고 실권자로써 정국을 장악했다. 이 사이 다카토키의 교육을 전담하면서 공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1316년, 다카토키가 사다토키가 싯켄이 됐던 나이인 14살이 되자 싯켄으로 있던 13대 호조 모토토키(北条基時)가 스스로 퇴임하면서 가마쿠라 막부의 제14대 싯켄 자리에 올랐다. 이 무렵에는 나가사키 엔키는 고령으로 일선에서 물러났고 그 아들인 나가사키 다카스케가 막부 내에서 강력한 권세를 행사하고 있었다.

다카토키의 재임기에는 막부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걸 알리듯 각지에서 반막부 무장 세력, 이른바 악당(悪党)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오슈에서는 북방의 에조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고, 안도씨(安藤氏)의 난도 발생하였다. 또한, 쇼추 원년(1324년)에는 고다이고 덴노가 막부 전복을 기도한 쇼추의 변(正中の変)이 발생했으나, 다카토키로선 다행이도 교토에 주둔한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1]가 이를 사전에 탐지하여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덴노의 측근인 히노 사네아사를 사도(佐渡)로 유배했고, 그 외 가담자들에게도 처벌을 내렸다.

한편 다카토키는 이미 고인이 된 니치렌(日蓮)의 제자인 니치로(日朗)에게, 막부 궁중에서 다른 불교 종파들과 논쟁을 벌이도록 명했다. 그러나 노령이었던 니치로 대신, 그 문하생인 니치인(日印)이 이를 맡아 수행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318년 12월 20일부터 1319년 9월 1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소위 가마쿠라 궁중문답(鎌倉殿中問答)이 개최되었다. 당시 쇼군이었던 모리쿠니 친왕 역시 여기 크게 관심을 가졌는데 결과적으로, 니치인은 논쟁에서 모든 종파의 주장을 논파하는 데 성공하였고, 다카토키는 이를 치하하며 법화종(題目宗)의 포교를 허용하였다.

2.2. 출가와 분열

그러던중 쇼추 3년(1326년) 3월 13일, 호조 다카토키는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해 24세의 나이에 집권직을 사임하고 불가에 귀의하였다(법명은 스우칸(崇鑑)). 그 직후, 후계자를 둘러싼 격렬한 정치적 대립이 벌어졌다. 다카토키의 서자 호조 구니토키가 성장할 때까지 렌쇼[2]가나자와 사다아키(金沢貞顕)[3]를 임시 집권자로 세우려는 나가사키파와, 동복 동생 야스이에(泰家)를 정식 집권자로 추대하려는 아다치파가 충돌한 것이다. 이 정권 계승 다툼은 이른바 가랴쿠의 소동(嘉暦の騒動)으로 불린다.

결국 3월 16일, 사다아키가 일단 집권에 취임했지만, 야스이에와 아다치파의 거센 반발로 인해 10일 만인 26일에 사임하고 4월 24일, 아카하시 모리토키(赤橋守時)[4]가 타협안 형식으로 집권에 오르면서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이 갈등의 이면에는, 다카토키의 서자 구니토키를 지지하는 나가사키파와, 다카토키의 정실가를 배경으로 야스이에를 미는 아다치파 간의 계파 대립이 있었다. 게다가 다카토키 본인 또한, 야스이에가 집권할 경우 자신의 직계 혈통이 도쿠소(得宗) 계통을 잇지 못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야스이에의 집권을 막기 위해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후 다카토키는 병세에서 회복되었으나, 겐오 원년(1331년)에 권력을 되찾기 위해 나가사키 다카스케(長崎高資)를 제거하려 했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다카토키는 이 음모에 대한 관여를 부인하여 처벌은 면했지만, 밀명을 수행했던 측근들은 유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다카토키조차 다카스케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같은 해 8월, 고다이고 천황이 다시 막부 전복을 기도하며 가사기산(笠置山)에 들어가 농성하였고, 가와치국에서는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거병하여 겐오의 난(元弘の乱)이 발생하였다. 막부는 군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였고, 1332년 3월, 고다이고 덴노를 오키 제도로 유배보내고, 지묘인통 출신의 고곤 덴노를 새로 옹립하였다.

2.3. 막부와 함께 최후를 맞다

겐오 3년/쇼쿄 2년(1333년) 윤2월, 고다이고 덴노가 오키 제도에서 탈출하여 호키국 후나카미산(船上山)에서 다시 거병하였다. 이에 막부는 고다이고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호조 일족인 나고에 다카이에(名越高家)와 시모츠케국 출신 고케닌인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교토로 파견했다.

하지만 4월, 다카이에는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가 이끄는 덴노군에게 전사하였고, 다카우지는 곧 고다이고 덴노 측으로 배신하여 5월 7일, 교토의 로쿠하라 탄다이를 함락시켰다. 그 이튿날인 5월 8일, 간토 지역에서는 코즈케국 출신 고케닌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하여 막부군을 잇달아 격파하고 가마쿠라로 진했다.

5월 18일, 닛타의 군세가 가마쿠라에 돌입하자, 막부군은 수일간 저항했으나, 5월 22일, 끝내 방어선이 돌파당했고 가마쿠라 내부까지 덴노군이 침입해왔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다카토키는 가사이가야 히가시쇼지(葛西ケ谷東勝寺)로 퇴각한 후 일족 및 측근 가신들과 함께 집단 자결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30세, 만 29세의 나이였다. 한편 그 이후 다카토키의 둘째아들인 호조 도키유키스와 요리시게 등의 도움을 받아 가마쿠라 막부 재흥을 꿈꾸며 나카센다이의 난을 일으켰지만 다카우지에게 금방 진압당하며 이 시도마저 철저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그래도 사망으로부터 33년이 지난 조지 5년/쇼헤이 21년(1366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고 다카토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 무로마치 막부 제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주도 아래, 정사위하(正四位下)로 추증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남조와의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무로마치 막부가 가마쿠라 막부의 정통 무가정권을 계승했다는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포석으로 이해된다. 최후의 싯켄인 다카토키를 일정 부분 명예 회복시킴으로써, "우리는 단순한 반란자가 아니라 무사의 정통을 이은 정권이다."라는 메시지를 대내외에 각인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3. 평가

후대 문헌의 영향으로 보통 무능하고 방탕한 암군(暗君)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태평기(太平記)는 다카토키에 대해 평하며 투견과 덴가쿠(민속 연희)에 몰두하며 정사를 등한시하고, 보통 불길한 의미로 해석되는 별똥별을 보고 기뻐 춤추는 장면, 호조 가문의 수호신인 벤자이텐의 가호가 부친 사다토키 대에 끊어졌다는 전설 등을 곁들여,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은 필연이었다는 인식을 강조한다. 태평기 외의 문헌에서도 비슷한 평가가 반복되며, 특히 덴가쿠에 대한 몰두는 정치적 무책임의 상징처럼 소비되어 왔다.

메이지 시대 이후의 일본 역사 교과서와 근대 가부키극에서도 이런 평가가 반복적으로 인용되면서, 다카토키는 일본 대중의 머릿속에 무능한 지도자로 자리잡게 되었으나, 최근에는 이 평가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아버지 사다토키때부터 싯켄이 정무에 손을 놓으면서 막부의 세가 기울고 있었고, 그마저도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면서 다카토키 역시 이로 인해 국정을 직접 배우거나 스스로 익힐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자리에 오른 점, 한창 나이에 일찍 출가를 감행해야할만큼 어린 시절부터 계속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점, 여러 문헌이 겐무 신정 또는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다카토키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린 모습으로 묘사한 흔적이 발견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막부를 파탄낸 주역이라기보다는, 이미 구조적으로 기울어진 체제 속에 떠밀려 등장한 무력한 망군의 싯켄 느낌이 아니냐는 쪽으로 최근 재해석되는 편.

다만 다카토키가 체제를 지탱할 정치력이나 결단력을 갖추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고, 나가사키 가문을 비롯한 측근 가문들이 막부 내 주요 요직을 독점하고 싯켄을 대신해 권력을 농단한 것도 사실이나 이들 역시 어디까지나 호조 가문의 당주인 다카토키의 권한 아래 임명되고 움직였던 존재들인 만큼 다카토키를 일종의 바지사장으로만 보는 시각은 온당하다고만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 정치적 평가와 별개로, 불교와 예술 분야에서는 다소 긍정적인 측면도 지적된다. 다카토키는 선승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등과 활발히 교류하며, 선 사상(禪思想)과 불화(佛畵)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였고, 직접 선사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진지한 열정을 지녔다. 관련 후원 기록도 다수 남아 있어, 정무에는 무력했을지라도, 불교적 정신세계와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후원에 있어서는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4. 대중문화

  • 1884년 처음 공연된 가부키 《호조 9대 명가의 공적》(北条九代名家功)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기존의 암군 이미지를 뒤틀어 고독하면서도 우둔한 심층 심리를 재해석해 일본에서는 현대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당시 배우는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郎).
  • 역사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다시 쓴《태평기》에서도 근대의 재해석을 받아들여 병약한 몸에 만사에 허무감을 느끼는 인물로 그려지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NHK 대하드라마에서도 같은 인물로 연기된다.
  • 마츠이 유세이의 만화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에서는 주인공인 호조 도키유키의 아버지로 나오나 병약하고 눈은 맛이 가서 잔도 제대로 못 들고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는 등 기존의 통념보다 더 상태가 안좋게 나온다. 실제 역사대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모반 이후 막부군이 대패하자 가신들과 함께 도쇼지에서 자결하는 것으로 나온다.

[1] 조큐의 난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조정측의 움직임을 항상 감시하고 제어하기 위해 설치한 직책이다.[2] 부싯켄에 해당하는 직책이다.[3]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아버지 아시카가 사다우지의 처남으로 여동생이 사다우지의 정실이기도 했다. 다만,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경우 생모가 교토 우에스기 가문 출신의 측실이다.[4] 이 사람의 여동생이 무려 아시카가 타카우지정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