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2 21:13:04

겐무 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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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무 신정 |
建武の新政
파일:니시키노미하타.svg 파일:일본 황실.svg
니시키노미하타 십육엽팔중표국
1333년~1336년
성립 이전 해체 이후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남조
수도 <colbgcolor=#fff,#191919>헤이안쿄(平安京)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천황
천황 고다이고 천황
언어 중세 일본어
문자 한자, 가나 문자
종교 대승 불교, 신토
종족 일본인
통화 료(両)
주요 사건 1333년 천황 통치권 회복
1336년 아시카가 정권에 밀려나 신정 종료

1. 개요2. 역사
2.1.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2.2. 신정 내의 내분2.3. 남북조시대의 시작

1. 개요

겐무 신정([ruby(建武, ruby=けんむ)]の[ruby(新政, ruby=しんせい)])은 고다이고 덴노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리고 친정에 나선 일본의 정권이다. 겐무는 고다이고 덴노의 연호로, 이는 중국 후한의 광무제가 찬탈자 왕망을 타도하고 한나라를 복원하며 사용한 연호 '건무'(建武)에서 따온 것이다. 고다이고 덴노는 광무제처럼 스스로도 무사정권 이전의 '덴노 친정' 체제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닌 ‘역사적 정통성의 복원’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새로운 정치는 미래의 선례가 될 것”이라며 당당히 포부를 밝히고, 이 정치체제를 ‘신정’(新政)이라 명명하였다.

겐무 신정은 불과 3년, 학자에 따라서는 1~2년 만에 막을 내렸기에 오랜 세월 무로마치 막부 성립 과정의 과도기적 일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후 메이지 유신을 통해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덴노 중심의 국가가 부활하면서, 겐무 신정은 메이지 정부로부터 역사적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전례로서 재조명되었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 일본사에서는 하나의 독립된 시대로서 ‘겐무 신정’이 엄연히 인정받고 있다.

2. 역사

2.1.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 이르러, 막부 내부에서는 권력투쟁이 격화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원나라의 일본 원정과 같은 외침이 이어지며 정국이 어지러워졌다. 이로 인해 막부의 통제력은 약화되었고, 이에 반막부 세력은 점차 세력을 키워갔다.

이러한 혼란을 기회로 본 다이카쿠지통고다이고 덴노헤이안 시대처럼 덴노와 귀족이 주도하는 정치체제의 복원을 이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덴노 계승의 일원화[1]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목표로 삼았다.

고다이고는 1324년 정중의 변, 1331년 원홍의 변을 일으켜 막부를 타도하려 하였으나, 두 차례 모두 사전에 발각되었고, 그 결과 오키섬에 유배되었다. 한편, 막부는 다이카쿠지통에 대항하는 지묘인통의 고곤 덴노를 옹립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고다이고 덴노의 이상에 공감한 반막부 세력들이 점차 결집하면서, 조정과 전국적으로 막부에 대한 반발이 확산되었다. 1333년, 이런 분위기를 직감한 고다이고 덴노가 오키섬에서 탈출하여 호키노쿠니에서 다시 거병하였다.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파견해 진압에 나섰으나, 다카우지는 오히려 고다이고 덴노 편에 서서 막부 타도를 외쳤다. 동시에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기습하여 호조씨 일족을 멸문시킴으로써, 가마쿠라 막부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뒤, 고다이고 덴노는 자교토로 귀환하여 막부와 관백을 폐지하고 덴노 친정 체제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2.2. 신정 내의 내분

이후 고다이고 천황은 의욕적으로 천황의 친정을 선포하고 새로운 정치를 펴보려고 했지만, 겐무 신정은 오래 갈 수가 없었다. 겐무 신정에 동참한 세력들은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천황의 친정이라는 체제에 일치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다카우지와 모리요시 친왕은 서로의 공을 내세우며 크게 반목했다. 고다이고 천황은 일단 모리요시 친왕을 정이대장군에 임명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려 했다.

그러나 논공행상의 과정에 있어서도 귀족인 공가와 승려들이 상을 많이 받았고 상대적으로 무사들이 소외되면서 무사들의 불만은 점점 쌓여갔다. 더욱이 고다이고 천황은 성급하게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으려면 천황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치를 발표하면서 무사들이 반발하였고 더욱 혼란은 심화되었다.

2.3. 남북조시대의 시작

결국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우선 자신을 경계하고 있던 모리요시 친왕을 제거하기로 하고, 모리요시 친왕이 다카우지를 친다는 명목으로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천황에게 고변했다. 이에 고다이고 천황은 모리요시 친왕을 다카우지가 있던 가마쿠라로 유배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는 다카우지의 계략이었다.

한편 호조씨의 잔당들은 자결한 호조 다카토키의 아들 호조 도키유키와 그를 보호해온 스와 요리시게를 중심으로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 가마쿠라로 쳐들어왔다(나카센다이의 난). 다카우지는 이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수중에 있던 모리요시 친왕을 살해하고 겐무 신정에 반기를 들 것을 선언했다.

1336년 7월 4일 미나토강 전투에서 천황군이 대패하고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전사하면서 신정은 그 순간에 끝났다고 봐도 된다. 다카우지는 교토로 입성하였고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도망쳐, 이로써 신정은 3년여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아시카가는 고곤 천황의 남동생인 고묘를 천황으로 옹립하여 북조가 성립되었고,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에서 자신이 진짜 천황이라고 주장하며 버텼다. 그리하여 일본은 교토의 북조와 요시노의 남조로 분열되어 60여 년 동안 내전을 치르는 남북조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1] 당시 황위를 놓고 다이카쿠지통과 지묘인통이 대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