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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치아 마티니 레이싱 | ||
헨리 파울리 토이보넨 (Henri Pauli Toivonen) | ||
생년월일 | 1956년 8월 25일 | |
사망 | 1986년 5월 2일 | |
출신지 |
Jyväskylä | |
데뷔 | 1975년 1000 레이크 랠리 | |
활동 기간 | 1975년~1986년 | |
소속팀(WRC) | 탈보 (1980~1981) 오펠 (1982~1983) 포르쉐 (1984) 란치아 (1985~1986) | |
주요 경력 | 드라이버 월드 챔피언 : 0회 랠리 우승 : 13회 포디엄(시상대) : 36회 단일 스테이지 우승 : 185회 랠리 참가 : 40회 | |
코드라이버 |
안테로 린드크비스트(Antero Lindqvist)
유하 파야넨(Juha Paajanen)
유하니 코르호넨(Juhani Korhonen)
필 볼랜드(Phil Boland)
폴 화이트(Paul White)
프레드 갤러거(Fred Gallagher)
유하 피로넨(Juha Piironen)
닐 윌슨(Neil Wilson)
세르지오 크레스토(Sergio Cresto) |
1. 개요
핀란드 출신의 랠리 드라이버로, 아버지와 동생 또한 레이싱 드라이버였다.서킷 레이싱에서 경력을 시작했지만, 당시 서킷의 안전 문제에 대한 가족의 우려로 랠리로 전향했다.
이후 특출난 실력과 재능을 발휘하며 활약했으나, 안타깝게도 사고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2. 선수 경력
헨리 토이보넨은 다섯 살에 운전을 배웠으며, 가족과 주변의 랠리 인맥에도 불구하고 서킷 레이싱에서 경력을 시작했다.카트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투어링카로 전향해 핀란드 컵에서 우승했고, 이후 포뮬러 비로 옮겨 첫 시즌에 스칸디나비아 챔피언십 라운드에서 한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포뮬러 슈퍼 비로 올라가 유럽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주목받았고, 1977년에는 포뮬러 비 클래스 핀란드 챔피언에 올랐다.
하지만 서킷 레이싱의 안전 문제에 대한 가족의 우려로 그는 결국 풀타임 랠리 드라이버로 전향했다.
당시 핀란드 법에 따라 신규 운전자는 시속 80km 이상 속도를 낼 수 없어, 그는 19세가 될 때까지 공식 랠리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1975년, 헨리는 코드라이버 안테로 린드크비스트와 함께 개인적으로 1000 레이크 랠리(현재의 핀란드 네스테 오일 랠리)에 참가하며 WRC 데뷔전을 치렀다.
심카 랠리 2를 몰고 출전했지만, 36번째 스페셜 스테이지에서 섬프 손상으로 리타이어했다.
이후에도 서킷 레이싱에 집중했지만, 2년 뒤 다시 WRC 무대에 복귀해 1977년 1000 레이크 랠리에서 크라이슬러 어벤저를 타고 5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1978년, 그는 유럽 랠리 챔피언십과 WRC 2라운드인 아크틱 랠리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이 대회는 1979년에 공식 출범하는 드라이버 챔피언십의 전신이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아리 바타넨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마르쿠 알렌보다 7분 이상 앞섰다.
토이보넨은 시트로엥 소속으로 두 차례 WRC에 출전했으며, 비록 두 대회 모두 완주하지는 못했지만 인상적인 주행을 선보였다.
이후 개인 포르쉐 팀이 1000 레이크 랠리 출전을 위해 차량을 제공했고, 크라이슬러는 롬바르드 RAC 랠리 차량을 지원했다.
비록 자국 대회에서는 엔진 고장으로 리타이어했지만, 영국의 RAC 랠리에서는 9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그는 핀란드 랠리 챔피언십의 노르딕 랠리에서 첫 랠리 우승을 거두었다.
1979년에는 영국, 핀란드, 유럽 대회를 포함한 15개의 랠리에 출전하며 경험을 쌓았고, 피아트 131 아바스와 포드 에스코트 RS를 타고 WRC 이벤트에도 참가했다.
비록 두 대회 모두 리타이어했지만, 특히 고향 대회에서는 선두권의 페이스를 따라잡는 뛰어난 주행을 보였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그는 1980년 시즌을 앞두고 팩토리 팀인 탈보 컴피티션과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2.1. 탈보
헨리 토이보넨이 주요 자동차 제조사의 워크스 팀에서 활약한 첫 시즌은 시험대와도 같았다.그는 1월 북극 랠리에서 우승하며 시즌을 산뜻하게 시작했지만,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에서는 단 네 번의 이벤트에서만 탈보 선빔 로터스를 운전했다.
그의 과감하고 공격적인 주행 스타일은 인상적이었지만, 종종 사고로 이어지기도 했다.
더 나은 성과를 위해 팀은 시즌 중 세 명의 다른 코드라이버와 토이보넨의 호흡을 시험했고, 그중 린드크비스트와 함께한 산레모 랠리에서는 5위에 올랐다.
그러나 1000 레이크 랠리에서는 11번째 스페셜 스테이지에서 사고로 리타이어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11월, 토이보넨은 데이빗 화이트와 짝을 이뤄 롬바르드 RAC 랠리에 출전했고, 예상을 뒤엎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대회 전까지만 해도 토이보넨과 탈보 팀 모두 우승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그는 준우승자 하누 미콜라를 무려 4분 이상 따돌리며 전문가들과 팬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그의 나이 24세 86일로, 이는 WRC 역사상 최연소 우승 기록이었으며, 이 기록은 2008년 스웨덴 랠리에서 야리마티 라트발라가 22세 313일로 우승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1]
이 활약은 토이보넨과 탈보 모두에게 또 한 해의 계약으로 이어졌다.
1981년 시즌, 그는 더 많은 WRC 이벤트에 참가하게 되었고, 새 코드라이버 프레드 갤러거를 영입했다.
토이보넨은 후륜구동 그룹 2 차량인 선빔 로터스로, 사륜구동 아우디 콰트로와 그룹 4 차량들을 상대로 경쟁해야 했다.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르투갈과 산레모 랠리에서 2위,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5위를 기록하며 드라이버 챔피언십 종합 7위에 올랐다.
이와 함께 팀 동료 가이 프레퀼린과 함께한 활약 덕분에 탈보는 제조사 부문 챔피언이라는 값진 성과를 거뒀다.
또한 그는 브리티시 오픈 랠리 챔피언십과 아우디 스포츠 인터내셔널 랠리의 마지막 라운드에 참가해 우승을 거두며 활약을 이어갔다.
2.2. 오펠
헨리 토이보넨은 데이비드 리차즈가 공동 관리하는 로스만스 후원을 받는 오펠 팀으로 이적한 후, 아리 바타넨, 발터 뢸, 지미 맥레이[2]와 팀을 이루었다. 1982년 포르투갈 랠리에서 오펠 아스코나 400으로 랠리를 리드하며 우승 후보들을 놀라게 했지만, 결승선 5개 스테이지를 남기고 리타이어했다. 그 후 WRC 대회에서 총 4번 더 출전해 아크로폴리스 랠리와 RAC 랠리에서 두 번 시상대에 올랐다. 또한 유럽 랠리 챔피언십에서는 4개 랠리 중 3번 포디움을 차지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1983년에는 오펠 만타 400을 몰고 그룹 B 규정에 맞춰 활동했으며, 브리티시 오픈 랠리 챔피언십과 유럽 랠리 챔피언십에서 첫 시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프랑스 Mille Pistes 랠리에서 우승했지만, 그룹 B 차량 금지로 우승 트로피만 받았다.
2.3. 포르쉐
1984년, 헨리 토이보넨은 오펠 팀을 떠나 푸조의 새로운 월드 랠리 챔피언십 팀인 푸조 탈보 스포츠와 계약을 맺으며 리드 드라이버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로스만스 후원을 받는 포르쉐 팩토리 팀과 계약하고 포르쉐 911 SC RS를 몰고 유럽 랠리 챔피언십에 출전하기로 결정했다. 이 팀은 오펠에서 그의 전 상사였던 데이비드 리처드가 설립한 Prodrive에 의해 운영되었다.토이보넨은 포르쉐와 함께한 유럽 시즌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두 번의 리타이어와 3위, 2위로 시작했지만, 5연속 랠리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이탈리아의 카를로 카포네를 제치고 챔피언십을 선도했다. 그 후, 그는 월드 랠리 챔피언십을 위해 란치아와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란치아의 체사레 피오리오 감독은 카포네가 유럽 타이틀을 원했기 때문에 토이보넨을 WRC 대회에 출전시키고 중요한 ERC 라운드에 출전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토이보넨의 타이틀 캠페인은 허리 부상으로 중단되었다. 예상보다 긴 휴식이 필요했고, 이로 인해 몇몇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그는 결국 카포네에 이어 챔피언십에서 2위를 차지했다.
토이보넨은 란치아 마티니와의 WRC 계약에 따라 5개의 이벤트에 출전했다. 그는 제한된 테스트 후 포르투갈에서 란치아 037을 몰았고, 선두로 나서 몇 차례 가장 빠른 스테이지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리타이어는 클러치 파손이 아닌, 그의 실수로 발생했다. 그리스에서 리타이어한 후, 그는 고향인 1000 레이크 랠리에서 3위를 차지했다. 이 세 경기가 그의 유일한 WRC 출전이었고, 이후 산레모와 RAC 랠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산레모 전에 마르쿠 알렌이 란치아와 재계약을 맺었고, 피오리오 감독은 토이보넨과 로스만 포르쉐 계약 상황을 고려해 2년 계약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결국, 토이보넨은 1985 시즌을 위해 본격적으로 란치아 드라이버가 되기로 결정했다.
토이보넨은 1985 시즌을 위해 본격적인 란치아의 드라이버가 되기로 결정하였다.
2.4. 란치아
1985년 시즌은 헨리 토이보넨에게 어려운 시작을 맞이한 해였다. 그는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코스타 스메랄다 랠리에 출전하던 중 란치아 037을 몰고 벽돌 벽에 충돌해 심한 허리 부상을 입었으며, 목의 척추 3개가 부러졌다. 그 후 5월, 투르 드 코르세의 네 번째 스페셜 스테이지에서 이탈리아 드라이버 아틸리오 베테가가 사고로 숨지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베테가는 토이보넨의 친구이자 팀 동료였기에, 그의 죽음은 토이보넨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토이보넨은 8월 1000 레이크 랠리에서 부상에서 복귀해 4위로 경기를 마쳤고, 산레모 랠리에서 3위를 차지하며 란치아 037과 함께한 마지막 대회를 마쳤다. 037은 후륜 구동 방식의 차량으로, 푸조와 아우디의 고성능 차량들에 비해 성능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토이보넨의 주행 스타일에 맞지 않았고, 푸조 440마력, 아우디 500마력에 비해 란치아 037은 325마력에 불과해 성능 면에서 뒤처졌었다.
시즌 마지막 대회인 RAC 랠리에서는 란치아 델타 S4가 첫 출전을 했고, 토이보넨은 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마르쿠 알렌은 56초 뒤진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1985년 시즌 동안 토이보넨은 WRC 대회에 4번 출전해 종합 6위라는 커리어 베스트를 기록했다.
1986년 시즌은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시작되었다. 토이보넨은 새로운 코드라이버 세르지오 크레스토와 함께 우승을 차지하며 우승 후보로 떠오르게 되었다. 티모 살로넨과 하누 미콜라가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해 란치아의 좋은 성적을 이어갔다. 흥미로운 점은 토이보넨의 아버지, 파울리 토이보넨이 20년 전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상대의 실격을 통해 우승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파울리 토이보넨은 아들의 우승을 통해 "이제 토이보넨의 이름이 깨끗해졌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스웨덴 랠리에서는 엔진 고장으로 선두에서 물러났고, 포르투갈 랠리에서는 호아킴 산토스가 포드 RS200을 제어하지 못하고 관중을 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관중 3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쳤으며, 이를 계기로 토이보넨을 비롯한 모든 팩토리 팀 드라이버들은 대회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토이보넨은 란치아 델타 S4를 포르투갈 랠리 중에 서킷에서 테스트했으며, 1986년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6위를 차지할 수 있는 랩 타임을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 인해 그룹 B 차량들이 F1 차량을 서킷에서 추월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게 되었다.
3. 사망
1986년 투르 드 코르세는 코르시카 섬 주변의 좁고 구불구불한 산악 도로에서 열리는 세계 랠리로, 5월 1일 목요일에 시작되었다. 토이보넨은 목이 아프고 독감에 시달리며 고생하고 있었으나, 스웨덴에서 차를 리타이어한 뒤 마지막 세 번의 랠리에서 챔피언십 선두를 잃고도 운전을 계속 고집했다. 팀은 포르투갈에서 비극적인 사고로 기권했으며, 토이보넨은 케냐 사파리 랠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여러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약물을 복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토이보넨은 스테이지 우승을 거듭하며 1017km에 달하는 랠리에서 큰 차이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1차전이 끝난 후, 그는 투르 드 코르세와 같은 랠리에서 차량이 너무 빠르고 강력해 다루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그는 600마력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매우 피곤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우려는 다른 그룹 B 차량을 운전하던 다른 드라이버들 또한 공감했다.
2차전인 5월 2일 금요일, 18번째 스테이지 7km 지점인 코르테-타베르나에서 토이보넨의 델타는 가드레일이 없는 좁은 왼쪽 코너에서 도로를 벗어나 곤두박질쳤다. 차는 협곡 아래로 추락하며 나무에 부딪혔고, 알루미늄 연료 탱크가 나무에 의해 파열되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은 사고 후 몇 초 안에 일어났으며, 토이보넨과 그의 코드라이버인 세르지오 크레스토는 이미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었다.
이 사고로 인한 화재는 너무나 강렬해, 케블라 강화 플라스틱 복합재로 제작된 델타 S4는 그 후 자동차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전소되었다. 토이보넨과 크레스토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토이보넨은 아내 에르야(1982년 결혼)와 아들 마르쿠스, 딸 알라 두 자녀를 남겼으며, 크레스토는 아이가 없는 독신이었다.
토이보넨의 사고는 가까운 곳에 목격자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스테이지 아래쪽에 있던 한 관중이 사고 장면을 테이프에 담았으나, 영상만으로 사고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샬은 주변에 없었고, 결승선에 도달한 다른 랠리 크루는 충돌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토이보넨의 팀은 그가 예정대로 결승선을 통과하지 못한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결승선에 도달한 후, 다른 팀은 검은 연기를 봤다고 전했다.
응급 차량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차체의 일부만 남아 있었다. 란치아의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은 자동차가 완전히 전소되어 충돌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이 사고로 그룹 B는 몇시간 후 완전히 폐지되었고, 야심차게 준비중이던 그룹 S또한 취소된다.
4. 여담
- 랠리 드라이버가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일부 서킷 레이싱 이벤트에 참가하여 유럽 내구 챔피언십 이벤트에서 성공적으로 우승했으며 영국 포뮬러 3 챔피언십 팀 소속으로 몇 번의 레이스에 참가했다.
- 월드 랠리 아카이브의 명예의 전당은 그를 "가장 논란이 많은 랠리 시기의 아이콘"으로 선정했다.
- 전직 랠리 드라이버이자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여성 레이싱카 드라이버인 미셸 무통은 토이보넨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첫 번째 레이스 오브 챔피언스을 조직했다.
- 헨리 토이보넨 기념 트로피는 지금도 매년 개인 종목 우승자에게 수여된다. 토이보넨의 이름을 딴 또 다른 트로피는 헨리 토이보넨 그랜드 어택 트로피로, 데스 오델이 주관하는 푸조 랠리 챌린지에서 "젊은 핀란드인이 보여준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드라이버"에게 수여된다고 한다.
- 그의 동생인 해리는 2002년에 레이싱 경력을 그만두었고, 이로서 토이보넨가의 40년 레이싱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 토이보넨의 카트는 훗날 포뮬러 원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을 두 번이나 차지한 미카 하키넨의 부모가 구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