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20 20:07:00

헨리 아이슬리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헨리 아이슬리 경
Sir Henry Isley
이름 헨리 아이슬리
Henry Isley
출생 미상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사망 1554년 2월 22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탑
형제 토머스 아이슬리
직위 켄트주 보안관

1. 개요2. 생애

1. 개요

잉글랜드 왕국기사, 군인. 토머스 와이엇의 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체포 후 참수되었다.

2. 생애

아이슬리 가문은 켄트주의 저명한 지주였다. 헨리는 브레스테드의 선드리지 영지를 소유했고, 형제 토머스 아이슬리는 메이드스톤 인근 빈터스 파크를 소유했다. 헨리는 1542년과 1550년에 켄트 보안관으로 임명되었고, 1542년에는 켄트의 턴브리지, 노스프리스, 해들로 영지의 수석 집사를 맡았으며, 노스프리스 공원의 모든 사슴의 사냥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또한 켄트주 지주이자 개신교 신자인 조지 하퍼, 토머스 컬페퍼, 토머스 와이엇 등과 두터운 인맥을 다졌다.

1553년 메리 1세 즉위 후 제인 그레이를 추종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새 정권에 충성하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메리 1세가 스페인의 왕자 펠리페와 결혼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펠리페가 이대로 여왕의 남편이 된다면 개신교도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거라고 판단하고, 이를 막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1554년 1월 22일, 헨리는 토머스 와이엇의 부름을 받고 앨링턴 성에서 주요 공모자 30명이 모인 전쟁 회의에 참석했다. 1월 25일, 토머스 와이엇은 반란을 일으켜 메이드스톤을 접수했고, 헨리는 형제 토머스와 함께 분견대를 일으켜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1554년 1월 27일 와이엇이 로체스터를 첩수했을 때, 헨리는 병사 500명을 이끌고 세븐오크스를 접수했다. 그러나 다음날 로체스터로 가서 와이엇과 합류하러 갔다가 메리 1세를 충성파 보안관인 로버트 사우스웰에게 로텀에서 격파당해 60명이 포로로 잡히고 본인은 햄프셔로 도망쳤다.

토머스 와이엇의 난이 진압된 후, 왕실은 그에게 100파운드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는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결국 체포되어 런던 탑에 보내졌고, 2월 22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참수형에 처해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