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38><colcolor=#fff> 프레더릭 브라우닝 Frederick Browning GCVO, KBE, DSO, C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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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프레더릭 아서 몬태규 브라우닝 경 Sir Frederick Arthur Montague Browning | |
출생 | 1896년 12월 20일 |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켄싱턴 | ||
사망 | 1965년 3월 14일 (향년 68세) | |
영국 콘월 메네빌리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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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군인 | |
복무 | 영국 육군 (1915~1948) | |
학력 | 이튼 칼리지 영국 육군사관학교 | |
최종 계급 | 중장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1. 개요
영국의 군인.2. 생애
켄싱턴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프레더릭 헨리 브라우닝이다. 이튼 칼리지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1915년 졸업해 소위로 임관했다. 척탄연대 4대대에 배치되었으며 보빙턴에서 훈련받은 후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근위사단 제1근위여단으로 배속되었다.[1] 초창기 참호병에 시달렸으나 회복후 이프르 전투, 캉브레 전투에 참가했으며 1918 독일군 춘계공세를 버티고 미군의 증원 후 백일 공세에 참가해 훈장을 수여받았다.종전 후 대프니 듀 모리에와 결혼했으며 1924 올림픽 육상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했으나 탈락했다. 2차 대전 당시 준장으로 진급해 영국 공수부대 설립에 기여했다. 이후 부대원들을 양성하고 장비를 도입, 전술을 연구했다.[2]
횃불 작전 당시 첫 실전에 투입되었으며 공을 세우며 해럴드 알렉산더에게 인정받아 바스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연합군공수사령부가 설립되며 제1공수군단장이 되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장성인 제임스 M. 개빈, 레이 바커에게 너무 영국군 주도로 간다고 비판받았다.
마켓 가든 작전당시에도 제1공수군단장이였으며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무모한 전략에 회의적인 생각을 했고 그 결과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정작 그 역시 패전의 책임을 스타니스와프 소사보프스키에게 돌리는 추태를 보여줬다. 마켓 가든 작전 이후 버마 전선에 배치되어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1948년 중장으로 예편했고 196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