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9 23:04:30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

<colbgcolor=white><colcolor=#dd0c39> 프란치셰크 동브로프스키
Franciszek Dąbrowski
<nopad> 파일:1000089667.jpg
출생 1904년 4월 1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사망 1962년 4월 24일 (향년 58세)
폴란드 인민공화국 크라쿠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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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군인
복무 폴란드 해군
폴란드 인민군
복무 기간 1923년 ~ 1950년
최종 계급 중령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생애

1. 개요

폴란드의 군인이다.

2.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군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1921년 사관생도학교에 입교해 1923년 소위로 임관했다. 여러 보직을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았고 1935년 대위로 진급했다.

당시 단치히 자유시의 베스테르플라테 요새의 군수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88명의 폴란드군이 주둔했으나 독일의 국제 연맹 탈퇴 이후 205명으로 확대편성되었다.

독일군이 베스테르플라테 반도에 함포 사격하기 시작하며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었고 독일 해병대가 상륙하자 침착하게 기관총, 박격포로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공격이 계속되었고 잘 막아내었으나 독일군은 지원 예상로를 차단하고 있었으며 주둔군 사령관 헨리크 수하르스키 소령은 신경증과 독일군의 압박에 항복을 제안했다. 이에 동브로프스키 대위가 반대하며 방어전을 계속이어나갔다. 9월 6일까지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하지만 9월 7일 물자부족과 지원군 당도의 가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항복했다. 폴란드군의 전사자는 15명이였다.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하지만 수감과정에서 결핵이 생겼고 폴란드 인민군 소속으로 중령까지 올랐으나 결핵이 악화되어 1950년 전역했다.

게다가 귀족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계산원으로 일하던 도중 해고되는 등 사회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집과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자신의 지병인 폐렴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겨우 좁은 아파트를 얻고 신문판매원으로 일하다가 1956년 전쟁영웅들을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이미지가 회복되었고 보상금을 받았다. 자신의 회고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회고록의 내용에 관련되어 논란이 생겨 다시 소외되었고 1962년 크라쿠프에서 지병인 결핵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