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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 | ||
| 위치 | 남아메리카 대륙 등지 | ||
| 수도 | 쿠스코, 리마 |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 국가 원수 | 스페인 국왕 | ||
| 민족 | 스페인인, 잉카인 등의 아메리카 원주민 | ||
| 언어 | 스페인어, 케추아어 등 기타 원주민 언어 |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 통화 | 스페인 레알 | ||
| 국가 | 국왕 행진곡 | ||
1. 개요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세운 식민지인 누에바카스티야와 누에바톨레도를 합쳐서 만들었다. 본래 현재 남아메리카의 스페인어권 지역 전부를 포함하는 남미 유일의 스페인 부왕령이었지만 18세기에 두 부왕령이 분리되어 나갔다. 수도는 리마이다.2. 상세
부왕령[1]이라는 개념은 전근대 스페인 특유의 행정 개념으로 여타 유럽 국가들의 봉건제와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중세 레콩키스타 시대 당시 중세 스페인의 왕들은 특정한 수도 내 궁전에서 왕이 머무르는 방식이 아닌 무어인이나 바이킹 등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전략적 요충지에 주둔하면서 국정을 살피고, 왕이 당장 관할하기 힘든 지역의 내정을 대신 책임지는 부왕을 두었는데, 이러한 연유에서 부왕이 주둔하거나 관할하는 지역은 국내외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동되곤 했다. 15세기 이래 이탈리아 방향으로 팽창한 아라곤 왕국은 직접 관할하기 힘든 해외 영토에 사르디냐 부왕령, 시칠리아 부왕령을 두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 역시 레콩키스타를 마무리 짓는 과정에서 북부 갈리시아 지방에 별도의 갈리시아 부왕령을 설치하는데 이 부왕령 제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개척한 서인도 제도 식민지에 새로 부왕령을 설치하면서 식민지로 확대되었다.페루 부왕령은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스페인 제국의 누에바에스파냐와 함께 두 부왕령 중 하나였다. 페루 부왕청이 관할하였다. 페루라는 말의 어원은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으나, 스페인인 콩키스타도르들은 파나마 이남 지역들을 모두 다 페루라고 지칭했고 이는 페루 부왕령이라는 타이틀로 이어졌다.
1580년에서 1640년 사이에 스페인 제국이 포르투갈을 지배하면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무의미해졌다. 본래 부왕의 임기는 종신제였으나, 여러 폐단이 발생하며 5년 임기제로 바뀌었다. 18세기 광산업과 직물 생산이 몰락하면서 페루 부왕령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보르본 왕조 시대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과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모두 페루 부왕령에서 분할한 영토이다)이 설치되면서, 리마의 중요성이 떨어졌고 경제성 있는 안데스 산맥간 교역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옮아갔다.
19세기 초 각지의 독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에스파냐 제국의 다른 영토와 마찬가지로 결국 페루 부왕령도 해체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 운동으로 옛 페루 부왕령 영토에 오늘날 페루,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가 들어섰다.
3. 역사
스페인이 페루를 정복한 후, 카를 5세는 콩키스타도르들에게 아델란타도(Adelantado)[2]를 부여하였다. 이렇게 스페인 정부는 자치를 부여했지만, 콩키스타도르들 간 갈등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1542년 11월 20일 카를 5세는 페루 부왕령을 신설하였다. 부왕령은 설립되었지만, 새롭게 온 부왕 블라스코 누네즈 벨라는 콩키스타도르들 간의 갈등을 막을 수 없었다. 애초에 곤살로 피사로는 블라스코 부왕을 대대적으로 무시하였다. 결국 블라스코 부왕은 곤살로 피사로에게 살해당했다. 부왕이 암살당하자 스페인 정부는 깜짝 놀랐다. 이에 카를로스 1세는 본국에서 곤살로와 그의 추종 세력을 토벌할 부왕으로 페드로 데 라가스카를 파견하였다. 페드로 데 라가스카 부왕은 하키하우하나 전투에서 곤살로 피사로를 대패시켰고, 곤살로는 국왕에 반기를 든 죄로 참수당했다.이후 페루 부왕령이 본격적으로 설립되었지만, 이 지역을 광범위하게 시찰한 부왕 프란시스코 알바레스 데 톨레도 가 도착할 때까지 부왕령의 조직은 40여년 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부왕령이 시작된 지 40여년이 지났지만 조세 시스템 조차 없었고, 이를 위한 인구 조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톨레도는 놀랐다. 그래서 톨레도는 부왕령 전체에 관리를 파견해 종합적인 실사를 실시하게 하였고, 이를 토대로 조세 납부 가능 인구 수를 파악한 후 레두 치오네스(reducciones)를 실시하였다. 이는 대략 500가구 단위로 원주민을 특정 마을에 집단적으로 거주시킨 제도였다. 이를 통해 정확한 조세 부과가 가능해졌다. 또한 미타 제도를 통해 원주민 노동 분배를 제도화 해서 포토시 은광과 우앙카벨리카 광산에 원주민 노동력을 적절하게 파견하였다. 또한 영국 사략선의 약탈을 막기 위해 해안 요새를 강화하고 함대를 건설하는데 집중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페루 부왕령은 국가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톨레도의 정책은 원주민이 감소하고, 외부에서 온 사람이 늘어나면서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1640년부터 포토시 은광의 채굴량이 감소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런 가운데에 페루 부왕령은 남부에 위치한 마푸체족에 대한 원정을 실시하였다. 이 원정은 별 다른 실익을 얻지 못했고, 부왕령의 재정은 악화되었다. 더욱이 프랑스에서 온 밀수품, 영국과 네덜란드 해적, 그리고 사략선이 판을 치자 이들을 막기 위해 더욱 재정은 악화되었다.
18세기 초에는 부르봉 왕조가 스페인에 들어서며 개혁 정책이 추진되었고, 그 일환으로 페루 부왕령의 영토는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1717년에는 콜롬비아 지역을 중심으로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이 설치되었고, 1776년에는 남부 지역의 통치를 위해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새로 생기면서 페루 부왕령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루는 여전히 식민 체제의 중심지로 남았으며, 리마는 종교, 교육,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1780년에는 토착 엘리트였던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 즉 투팍 아마루 2세가 식민 체제에 저항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으나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이후에도 원주민과 크리올들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9세기 초 유럽에서의 나폴레옹 전쟁과 스페인의 혼란은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 운동에 불씨를 당겼고,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 마르틴 같은 인물들이 주도한 남미 독립 전쟁이 격화되면서 페루에서도 독립의 열망이 확산되었다. 1821년 산 마르틴이 리마에 입성하며 독립을 선언하였고, 1824년 아야쿠초 전투에서 스페인군이 최종적으로 패배하면서 스페인의 식민 통치는 종식되었다. 이로써 약 300년에 걸친 페루 부왕령의 역사는 막을 내리고, 페루는 독립 국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