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20 14:57:35

페로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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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20대 샤한샤
𐭯𐭩𐭫𐭥𐭰 |페로즈 1세
파일:페로즈 1세.jpg
제호 한국어 페로즈 1세
중기 페르시아어 𐭯𐭩𐭫𐭥𐭰
영어 Peroz 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484년
재위 기간 459년~484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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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20대 샤한샤. 외적에게 전사한 최초의 샤한샤이다.

2. 생애

페로즈는 중세 페르시아어로 승리를 뜻한다. 파르티아어로는 파로즈(Pērōž), 신 페르시아어로는 피루즈(Pīrūz)로 표기되며, 그리스어로는 페로지스(Περόζης)로 번역된다. 이 이름은 3세기의 쿠샨-사산 왕조의 군주 페로즈 1세 쿠샨샤에 의해 사용된 바 있었다. 야즈데게르드 2세의 아들로, 457년 부친이 사망한 뒤 레이에서 샤한샤를 칭한 형 호르미즈드 3세에 맞서 미흐리드 가문의 라힘 미흐란의 추대를 통해 제국 북동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아랍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형제간의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그들의 어머니인 데낙이 크테시폰에서 나라를 통치했다고 한다. 459년, 그는 백훈족의 도움을 받아 호르미즈드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단독 샤한샤가 되었다. 호르미즈드 일가는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형제간의 내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캅카스의 아르사쿠니 가문 통치자 바체 2세는 이 때를 틈타 독립을 선언하고, 야즈데게르드 2세의 강요로 받아들였던 조로아스터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복귀했다. 이에 페로즈는 백훈족이 다리알 협곡을 통과하여 캅카스를 침공하도록 하였고, 이로 인해 캅카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바체 2세는 페로즈의 누이이자 자신의 어머니와 딸을 페로즈에게 돌려주기로 하고, 사산 왕조를 계속 섬기기로 하였다. 한편, 페로즈는 451년 아르메니아 봉기 때 야즈데게르드 2세에게 체포된 뒤 옥고를 치르고 있던 아르메니아 귀족 일부를 석방했다.

461년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 7년 연속으로 극심한 가뭄이 발생해 수많은 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페로즈는 세금을 일부 면제하고, 창고를 열어 식량을 골고루 나눠줬으며, 대규모 토지 소유자가 거둬들인 식량을 대중과 공유하도록 강제하는 등 여러 대책을 마련했다. 많은 도시가 이 재난으로 인해 황폐해지고 인구가 감소했기 때문에, 페로즈는 도시를 재건하는 사업을 단행하는 한편 유랑민들을 수용할 3개의 새 도시를 건설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재정이 위태로워져서 동로마 제국 황제에게 자금을 빌려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페로즈는 모든 신민이 조로아스터교를 믿게 하고자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박해했던 부친과는 달리, 기독교를 억압하지 않고 신앙의 자유를 줬다. 그는 니시비스에 주교 바르 사우마에게 국경 방위군을 감독하고 사산 왕조와 동로마 제국 국경의 경계를 강화하기 위한 회의에 참여하게 하였다. 특히 동로마 제국 내 정교회네스토리우스파간의 갈등이 극렬한 점을 활용하여, 네스토리우스파 신자들을 적극 수용하여 제국에 맞서게 하였다. 그 결과,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란과 중앙아시아의 유력한 기독교 종파로 자리잡았다.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했다. 처음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자금을 빌릴 만큼 사이가 양호했다. 그러나 460년대 중반, 동로마 제국의 장성 아르다부리우스가 비밀리에 사산 궁정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반란을 일으킬 때 그들의 원조를 받기로 한 정황이 발각되었다. 레오 1세는 즉각 아르다부리우스를 해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하고, 시리아의 칼리니쿰 요새를 포함한 국경 방비를 강화했다. 또한 캅카스 방비를 위해 사산 왕조에게 황금을 지불하던 관행을 중단했으며, 니시비스를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이로 인해 양국간 감정은 매우 좋지 않았지만, 동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정벌에 집중해야 했고, 사산 왕조는 동쪽의 유목민족에 대항해야 했기에 서로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474년 즉위한 제노가 황금 지불을 재개하면서, 양국간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백훈족의 일파인 키다르 인들이 쿠샨-사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불을 공략한 이래, 사산 왕조는 이들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매년 공물을 바쳐야 했다. 야즈데게르드 2세는 이를 굴욕적으로 여기고 공물을 바치길 거부하고, 그들을 몰아내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의 지원을 받고 집권한 페로즈 1세는 공물을 다시 바치기로 했고, 키다르왕 쿤카스에게 결혼 동맹을 맺자고 하였다. 쿤카스는 페로즈의 누이동생과 결혼하길 희망했고, 페로즈는 이에 응해 여자를 보냈다. 그러나 그 여자의 정체는 페로즈의 누이동생이 아니라 하녀였다고 한다. 쿤카스는 이 속임수를 나중에 눈치챈 뒤, 페로즈에게 군사 전문가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페로즈가 300명의 인사들을 보내자, 쿤카스는 이들을 죽이거나 신체를 훼손한 뒤 사산 왕조로 돌려보냈다.

페로즈는 이에 분노하여 에프탈인 등 다른 백훈족과 동맹을 맺고 466년 키다르인을 정벌해 승리를 거두고, 토카리스탄을 잠시 장악하였으며, 발흐에서 금화를 주조했다. 키다르인들은 이 패배 후 쇠락하였고, 나중에 에프탈인들에게 정복되었다. 이후 에프탈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토카리스탄을 도로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자, 페로즈는 이들이 너무 커지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474년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구르칸 산맥에서 적을 추격하던 중 매복 공격을 받고 퇴로가 끊겨버렸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에프탈의 통치자는 샤한샤와 그의 군대가 자신의 우위를 인정하고 그 앞에 절한다면 살려보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페로즈는 사제들을 불러모아 어찌할 지 논의했다. 사제들은 매일 해가 뜨는 방향으로 엎드리는 전통에 따라,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엎드리라고 조언했다. 페로즈는 그 말에 따라 해가 떠오르는 시간대에 맞춰서 통치자 앞에 엎드려 절했다. 이를 통해 겉으로 보기엔 에프탈 군주에게 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태양을 향해 절한 셈이 되었다. 에프탈은 만족하여 그들이 조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해줬다. 이후 페로즈는 에프탈의 침략을 막기 위해 탈라칸 시를 비롯한 여러 영토를 넘기고, 노새 20마리에 금화를 잔뜩 실어서 바쳤으며, 아들 카바드 1세를 인질로 보내야 했다. 시리아 역사가 요수아에 따르면, 페로즈는 에프탈을 향한 두번째 원정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고, 동로마 황제 제노에 의해 구출되었다고 한다.

482년, 조로아스터교를 강요하는 아르메니아 총독에 대항하여 이베리아 왕 바크탕 1세가 전쟁을 선포했다. 이와 동시에 아르메니아인들은 바한 마미코니안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아르메니아 총독 아드후르 구슈나프는 반란군에게 패해 전사했고, 바한은 사하크 2세 바그라투니를 새 총독으로 세웠다. 페로즈는 진압군을 보내는 한편, 샤푸르 미흐란이 이끄는 또다른 군대를 이베리아로 파견했다. 사산 왕조군은 482년 여름 아르메니아-이베리아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사하크 2세 바그라투니와 바한의 동생 바삭이 전사했다. 바크탕은 이베리아를 잃고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라시카로 도주했다. 바한은 잔여군을 이끌고 타리크 산으로 숨어서 유격전을 벌였다. 샤푸르 미흐란은 이들에게 연이어 패배하다가 크테시폰으로 소환되었고, 바한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드빈을 탈환했다.

483년, 자르미르 하자르우스트 휘하의 사산군이 드빈을 포위했다. 바한은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온 뒤, 동로마 제국 국경 인근의 산속으로 이동했다. 그는 사산 왕조군이 동로마 제국과의 충돌을 회피하려고 추격하지 않기를 바랬으나, 자르미르는 야간 행군 후 그들을 급습하여 상당한 포로를 확보했다. 바한은 가까스로 탈출한 뒤 산맥 깊숙이 숨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사산 왕조의 지배에 불복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 지배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483년, 페로즈는 에프탈에게 복수하고자 5만 내지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모았다. 그는 동생 발라시를 크테시폰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국내 행정을 맡긴 뒤, 에프탈로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에프탈 왕 아흐순와르는 사절을 보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대는 일찍이 서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나와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소. 우리는 적대적인 의도로 국경을 넘지 않도록 하였소."

그러나 페로즈는 묵살했고, 바흐람 5세가 옥소스 강 근처에 세운 기둥을 파괴했다. 알 타바리에 따르면, 페로즈는 기둥을 50마리의 코끼리들과 300명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끌고 가게 하였고, 자신은 기둥 뒤로 걸어가면서 평화 협약을 어기지 않은 척 했다고 한다. 그렇게 국경을 넘은 사산 왕조군은 박트라에 도달하였고, 에프탈은 산속으로 후퇴했다. 484년 초, 페로즈는 산속에 숨은 에프탈인들을 격멸하고자 진격했다. 아흐순와르는 큰 도랑을 파서 관목과 나무 줄기로 숨기고, 그의 군대를 그 뒤에 배치했다. 이후 그들을 향해 돌격하던 사산 기병대들은 도랑 속으로 떨어져 즉사했고, 에프탈인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기가 꺾인 적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페로즈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여러 설이 제기된다. 도랑에 빠진 뒤 진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악하다가 죽었다는 설, 도랑에 끼어있다 굶어죽었다는 설, 도랑에서 빠져나왔지만 야생동물에게 잡아먹혔다는 설 등이 제기된다. 또한 시신을 확보한 에프탈 왕이 성대하게 장례를 치른 뒤 페르시아로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시신을 끝내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후 에프탈은 자불리스탄 일대를 공략하고 사산 왕조의 본거지인 메소포타미아 일대까지 약탈했다. 이때 수크라가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에프탈을 축출한 뒤 샤푸르 미흐란 등과 함께 발라시를 샤한샤로 선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