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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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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4444> [ruby(左, ruby=さ)][ruby(派, ruby=は)][ruby(社, ruby=しゃ)][ruby(会, ruby=かい)][ruby(党, ruby=とう)] | 좌파사회당
영어 명칭 Left Socialist Party of Japan
창당일 1950년 1월 16일
해산일 1955년 10월 13일
활동시기 1945년 ~ 1996년
이념 사회주의 (일본형 사회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 (노농파 다수, 강좌파 소수)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부)[1]
혁명적 사회주의 (단일혁명론)[2]
정통 마르크스주의 (일부)[3]
트로츠키주의 (소수)[4]
사회민주주의 (소수)[5]
성향 좌익 ~ 극좌[6]
주요 정치인 사키사카 이츠로[7]
스즈키 모사부로
사사키 고조
나리타 도모미[8]
아스카타 이치오
이시바시 마사시[9]
도이 다카코[10]
오카자키 히로미
정당
연관 정당



(일부)

1. 개요2. 역사
2.1. 일본사회당 창당 초기 (1945년~1951년)2.2. 사회당 좌파에서 좌파사회당으로 (1951년~1955년)2.3. 자민당의 등장과 안보투쟁의 좌절 (1955년~1960년)2.4. 구조개혁론을 좌절시키다 (1960년~1969년)2.5. 좌파 독주 속 계속된 당세 축소 (1969년~1977년)2.6. 몰락 (1977년~1993년)
3. 성향4. 여담5. 같이 보기

1. 개요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정당이다. 그 외의 시기에는 일본사회당 당 내 좌파 계파를 가리켰다.

사회당 좌파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정확히는 정당으로서 좌파사회당은 그대로 '좌파사회당'이라고 하고, 사회당 당 내 좌파계파라는 의미는 '사회당 좌파'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편이다.

2. 역사

2.1. 일본사회당 창당 초기 (1945년~1951년)

1945년 일본사회당이 창당되었을 당시에는 사회대중당 계열이나 일본노농당 계열 등 비교적 온건한 사회당 우파 세력이 당 집행부를 주도하고 있었고, 좌파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사회당 우파 출신의 가타야마 데쓰 총리와 그와 연정한 아시다 히토시 총리 시절 내각이 사회당 우파를 중심으로 운영되자, 사회당 좌파는 이에 비판적인 당내 야당 역할을 자주 맡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권 기반을 약화시키고 사회당이 정권을 잃은 원인이 되었지만 그러나 아시다 내각 말기에 쇼와전공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당 우파 노선을 비판해온 좌파의 정책적 식견이 재평가되었고, 모리토·이나무라 논쟁[11] 이후 1951년 사회당 우파의 아사누마 이네지로 대신 사회당 좌파의 스즈키 모사부로가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좌파의 발언권이 점차 강화되었다.

사실 사회당 좌파로서는 일대기적인 전환이었는데 2년전만 하더라도 우파에 의해 사상 검증을 강요당하던 좌파가 이제는 우파에게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을 갖췄다는 뜻이기 때문. 그래도 이때까지는 1950년 10월 1일 좌우 확대위원회를 개최하고 양 계파 지도부가 직접 나서 분열 방지와 당내 조정 시도에 나서는 등 분당까지는 가지 않기 위해서 양쪽 모두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2.2. 사회당 좌파에서 좌파사회당으로 (1951년~1955년)

하지만 1951년(쇼와 26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미일안전보장조약 체결 찬반 문제가 당 분열 문제를 다시 심화시켰다. 사회당 우파는 강화조약 찬성-안보조약 반대를 내세웠고 좌파는 두 조약 모두에 반대했다. 결국 이 문제로 좌파 주도의 소련·중국을 포함한 전면 강화(全面講和) 요구와 우파 주도의 동구권을 제외한 자유주의 진영 국가들과만 체결하는 다수강화(多数講和) 수용을 둘러싸고 다시 한번 극한의 논쟁에 들어가 결국 분당에 들어가고 말았다.

좌우 양파 모두가 공식적으로는 일본사회당을 자칭했기 때문에 엄연히 말하면 좌파사회당(左派社会党)이란건 편의상 또는 학술상으로 붙이는 호칭이었고, 이때문에 국회에서도 분당을 선택한 양당을 대기실 번호로 구분했는데, 분열 직후 우파는 단순히 일본사회당, 좌파는 일본사회당 제23대기실로 불렸다.

좌파사회당 위원장에는 직전 사회당 서기장이었던 스즈키 모사부로가, 서기장에는 노미조 마사루가 취임했으며 당시 일본 내 최대 노동조직이었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의 지원을 받아 당대 기준으로는 가장 조직 위주의 선거를 전개했기 때문에 ‘조직의 좌사’라고 불렸다. 비무장 중립론을 주장하며 재무장에 반대했고, 역코스(逆コース)에 반대하며 호헌(護憲)을 내세워 여성과 화이트칼라층을 중심으로 지지를 모았다.

분열 직후 좌파사회당은 16석에 불과했으나, 1952년 총선에서 54석으로 늘었고, 1953년 총선에서는 72석으로 증가해 우파사회당을 추월했다. 1955년 총선에서는 단독으로 89석까지 의석을 늘려 사회주의 진영 내 좌파 우위 체제를 확립했다. 하지만 일본민주당의 등장으로 보수 진영이 분열되자 총평의 압력도 있어 1955년(쇼와 30년) 10월 13일, 재집권을 노리고 좌우 사회당은 다시 통합되었고(사회당 재통일), 좌파사회당 위원장이었던 스즈키 모사부로가 통합된 사회당의 위원장으로 복귀했다.

2.3. 자민당의 등장과 안보투쟁의 좌절 (1955년~1960년)

하지만 사회당 재통일은 오히려 보수진영을 자극해 1955년 11월 15일 자유민주당의 등장을 촉진하고 말았다. 공룡 여당의 등장과 함께 반대급부로 통합된 사회당이 의회 내 제1야당으로서 중핵이 되었는데 이때부터의 정치 체제를 55년 체제라고 부른다. 위원장 스즈키 모사부로를 비롯한 좌파 지도부는 사회당이 명실상부한 계급적 대중정당으로서 노동계급과 농민, 중소영세사업자층을 결집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굳게 유지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당내에는 여전히 노선 차이가 존재했다. 좌파는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흐름을 바탕으로 비무장 중립 노선을 고수하며 혁명적 대중투쟁을 주요 수단으로 상정했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우파가 내세우는 의회주의 노선과의 조율이 불가피했다. 이 시기 일본사회당은 안팎으로 재집권이 점점 요원해지는 가운데 자민당 장기집권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를 둘러싸고 위기감이 퍼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9년 지방 선거와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자, 그 원인을 두고 좌우파 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되었다. 결국 니시오 스에히로를 주축으로 한 우파 세력 일각이 중간파와 손잡고 사회당을 탈당하여 1960년 1월 민사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단순한 파벌 분열을 넘어, 사회당 좌파의 과격한 계급 투쟁론과 현실성 없는 비무장 중립론에 반대하며 보다 온건하고 의회주의적인 민주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려는 이념적 분화의 결과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탈당은 사회당 내에서 좌파의 세력이 오히려 더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같은 시기, 기시 노부스케 내각은 미일 신안보조약 개정을 강행 추진하며 일본 현대사에서 드문 대규모 시민운동인 안보투쟁을 촉발했다. 기시 내각이 야당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조약 개정안을 국회에서 강압적으로 처리하려 하자, 국민적 분노가 폭발하며 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사회당 좌파와 총평은 전후 최대 규모의 총파업과 대중집회를 통해 재무장과 미일 군사동맹 강화를 저지하려 했고, 당시 좌파 주도의 사회당 지도부는 이를 계급대중정당으로서 존재를 확인하는 최대 기회로 보았다. 그러나 결국 안보조약 개정안은 그대로 성립되었고, 대중투쟁은 큰 실패로 끝났다.

안보투쟁의 실패는 사회당 좌파 내부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혁명적 총파업론과 비무장 중립론이 현실 정치에서 실제 권력 획득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자각이 확산되었다. 반대로 학생운동과 급진파 노동운동은 더욱 과격해져 사회 문제로 대두했지만, 좌파 지도부는 이들을 통제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오히려 일본공산당은 극단화되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사회당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세력을 키워갔다. 이때부터 일부 당내 현실파는 의회 내 점진적 개혁으로 현실 정치에서 자민당을 대체해야 한다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기 시작했고, 이 변화는 곧 터져 나올 구조개혁 논쟁의 중요한 전조가 되었다.

2.4. 구조개혁론을 좌절시키다 (1960년~1969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좌파 출신으로 서기장에 취임한 에다 사부로를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은 1960년부터 당내 우파 잔류파와 손잡고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조개혁론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사회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현실정당론을 주장하며 과거식 계급 투쟁과 혁명을 강조하던 기존의 좌파 노선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줬다.[12]

하지만 이러한 구조개혁론은 에다와 같은 스즈키파 출신의 사사키 고조와 친소련파 사회주의협회(社会主義協会) 등 당내 정통 좌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사회주의협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하여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혁을 주장했고, 구조개혁론이 자본주의를 온존하려는 기회주의적 발상이라고 거세게 비판하고 나왔다. 거기에 총평과 사회당 좌파의 당시 지도자였던 사키사카의 비판까지 더해져 이런 구조개혁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은 당초 의도와 달리 수십 년간 일본사회당 내의 고질적인 파벌 갈등과 이념 대립을 재현하는 씨앗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당 좌파 내 나리타 도모미와 같은 좌파적 구조개혁론자들과 연합해 이를 강행하려 했고 1961년 당대회에서 구조개혁론을 당론으로 승인한데 이어 1962년 에다 비전을 발표해 상당한 대중적인 관심을 모았다. 실제로 당시 자민당에서조차 에다 비전에 일본 국민들이 큰 호응을 일으키자 이에 긴장해 새로운 보수적 비전이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사회당 좌파에서는 니시오 스에히로가 이끄는 민사당의 에다 비전 지지 선언을 계기로 맹공에 나섰다. 결국 1962년 당대회에서 에다 비전이 인정받는데 실패하면서 에다 사부로가 쓸쓸히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으며, 이 빈자리를 나리타 도모미가 채웠지만 나리타는 1977년까지 자리를 지키면서도 오히려 사사키파, 사회주의협회파와 같은 사회당 좌파에 포섭되어 사회당의 좌경화를 방치하였다.

1964년 발표된 '일본에서의 사회주의로의 길'(日本における社会主義への道)이라는 충격적인 문건이 사회당 좌파와 사회당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렸는데, 구조개혁파의 강렬한 저항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폭력혁명론을 수용하는 일은 가까스로 저지되었지만 대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식적으로 수용하는 희대의 사건이 터진 것. 비록 이 문서는 당의 강령으로 채택되진 않았지만 사실상 사회당 좌파가 장악한 사회당에서는 강령적 문서로 기능하였고 1966년 한번 더 사회당 좌파의 주도로 좌경화되면서 당이 호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만 매몰된 저항정당으로 추락, 제1야당으로서의 대중적 신뢰를 상실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 영향으로 1969년 열린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일본사회당이 무려 44석을 잃는 대참패를 당했다. 반대급부로 새롭게 등장한 종교정당인 공명당이 22석을 올려 원내 4당 자리에 올랐고, 공산당도 사회당이 왼쪽으로 질주한 덕에 상대적 온건파 이미지를 얻어 10석을 늘리는데 성공했다.

2.5. 좌파 독주 속 계속된 당세 축소 (1969년~1977년)

대규모 의석 감소를 겪은 일본사회당은 재정난에 직면했다. 의원 수에 따라 지급되는 입법 사무비가 줄면서, 당 본부 직원 1/3에 해당하는 67명이 해고되는 등 조직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당 외부 사회당 좌파 활동가들의 좌경화를 심화시키는 한편, 당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악순환을 일으켰다.

특히 도쿄 등 기존에 강세를 보이던 도시 지역에서의 지지 기반 상실이 두드러졌다. 당시 일본 사회는 고도 경제 성장과 급격한 도시화를 겪으며 국민 생활 수준이 빠르게 향상되고 있었고, 국민들은 이념보다는 실질적인 경제적 풍요와 안정, 그리고 복지 확충과 같은 생활 밀착형 정책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념적 투쟁에 매몰된 사회당 좌파는 이러한 사회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고, 대중의 요구를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데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대 후반을 강타한 전공투 운동 등 신좌익 세력의 폭력적 투쟁은 일반 대중에게 좌파 전반에 대한 혐오감과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좌파가 장악한 사회당은 이러한 신좌익의 과격성에 대해 명확히 비판하지 않고 모호한 태도를 보이거나 심지어 옹호하기도 했다. 이는 과격파와 사회당이 동일시되는 역풍을 맞아, 사회당의 대중적 신뢰를 크게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세가 급격히 기울자, 당내에서는 자민당 일당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선 논쟁이 더욱 격화되었다. 에다 사부로를 비롯한 구조개혁파는 당의 위기를 극복하고 집권 가능한 정당으로 변모하기 위해 공명당, 민사당과의 연대를 통한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 구성을 주장하는 사공민 노선(社公民路線)을 제안했다. 그러나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을 비롯한 사회당 좌파 주류는 공명당과 민사당을 개량주의로 비판하며 사공민 노선을 강력히 거부했다. 대신 이들은 선거에서 일본공산당과 손잡는 사공 공투(社共共闘) 노선을 견지했다.

사공 공투는 주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혁신 단체장을 다수 탄생시키는 데 성공하며 공해 문제 해결이나 지역 정치 차원에서 복지 정책 확충 등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정 내지 의회 차원에서 연대로 이어지기에는 공산당과의 이념적 거리가 너무 컸고 사회당의 이념적 경직성이 너무 강했다. 오히려 중도층 유권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결과적으로 사회당을 만년 야당의 틀에 가두고 국정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회당은 다소 의석을 회복하는 듯했지만 득표율 측면에서는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했다. 좌파의 교조적인 이념 노선과 고질적인 계파 갈등은 계속해서 당을 약화시켰고, 새로운 시대적 과제에 대한 실효적인 정책 제안을 어렵게 만들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은 소련과 중국 등 동구권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국제적인 사회주의 조류와도 괴리되었다. 이는 일본 내에서도 사회당의 이념적 위치를 모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13]

특히 1976년 중의원 선거 이후, 당내의 계파 갈등이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터져 나왔다. 에다 사부로가 당 지도부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제명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반발한 에다를 비롯한 일부 세력들이 사회시민연합이라는 별도의 정당을 만들어 탈당하면서 당의 세력 누수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곧바로 선거 결과로 이어졌다.

그 결과 1977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은 단 27석에 그치는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이후 1979년 통일지방선거에서는 주요 지방자치단체 수장마저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사회당은 제1 야당으로서의 위상을 점차 상실했고, 공명당, 일본공산당 등 새로운 정치 세력의 약진 속에 다당화 현상에 휩쓸려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이 시기는 일본사회당이, 그리고 사회당 좌파가 이념적 순수성 논쟁에 매몰되어 대중적 신뢰를 잃고 쇠퇴의 길을 굳히게 된 결정적인 시기로 기록된다.

2.6. 몰락 (1977년~1993년)

1977년, 에다 사부로가 탈당 후 비극적으로 사망하고, 이어 열린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대패하면서 당내 구좌파의 정치적 입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좌파의 대부 역할을 담당하던 나리타 도모미 당 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당내 권력의 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 잔존하던 우파 세력은 좌파 내에서도 친중(親中) 노선을 견지한 일부 인사들과 전략적으로 제휴하였다. 그 결과, 좌파의 조직적 기반이자 이념적 구심체 역할을 하던 사회주의협회(社会主義協会)의 정치 활동이 제한되었고, 학술·이론 활동만을 허용받게 되면서 좌파 진영은 사실상 당 내외의 활동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더불어 1980년대 학생운동의 쇠퇴와 맞물려 외부 대중 조직과의 연결 고리도 급속히 약화됐다.

이후 아스카타 이치오이시바시 마사시가 당 위원장직을 맡으며, 당의 이념 노선과 정책 강령에 대한 본격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다. 1986년 사회당이 발표한 '일본 사회당 신선언'(日本社会党の新宣言)은 이러한 재정립의 상징적 조치였다. 이 선언은 사회당이 전통적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결별하고 유럽형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의 이행을 천명한 것이며, 냉전 체제의 종식과 동유럽 공산권의 몰락이라는 국제적 흐름을 반영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선 전환은 당내외에서 거센 반발에 직면하였다. 여전히 당내에는 자위대 위헌론, 미일안보조약 파기, 주일미군 철수 등의 강경 노선을 고수하는 구좌파 세력이 건재했고, 사회당의 오랜 기반이었던 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의 입장 또한 정치적 현실과 괴리된 강경 이념 노선과 결을 같이하고 있었다. 총평은 이후 1989년 해산되며 연합(連合)으로 재편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회당과의 관계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 시기의 좌파의 노선 전환과 정치적 타협을 상징하는 인물이 도이 다카코였다. 그는 사회당 내 우파 신계파인 ‘새로운 흐름의 모임(新しい流れの会)’ 출신이었지만, 자위대 군축 및 안보조약 폐지 등 좌파 아젠다에도 일정 부분 공감하는 노선을 보였다. 이러한 성향 덕분에 좌우 간 충돌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절충형 지도자로 평가되었고, 1986년 9월 이시바시의 후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도이는 선명한 화법과 대중적 개성으로 지지층의 호응을 이끌었고, 호헌·군축 등을 매개로 공명당, 민사당, 사민련과의 협력을 주도하여 복수 야당 간의 선거 연합을 성사시켰다. 그 결과, 나카소네 내각과 다케시타 내각의 연속 퇴진을 유도하는 등 일정한 정치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1989년 제15회 참원선에서는 사회당이 사공민 연합의 틀 안에서 개선 의석을 두 배 이상으로 확장하며 참의원 개선 1당에 등극하고 자민당의 참의원 과반을 붕괴시키는 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정권교체로의 전환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90년 제39회 중원선에서는 자민당이 체제 선택을 선거 프레임으로 내세우자 사회당 좌파가 유지하던 이념적 경직성(자위대 폐지, 미일안보조약 파기 등)이 다시 부각되었고, 여기에 더해 도이 위원장의 독단적 리더십 스타일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며 사회당은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 이로써 1989년 참의원 승리의 여세를 바탕으로 한 정권교체 시도는 좌절되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91년의 PKO(국제평화협력법안) 처리 국면이었다. 자위대의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파견 여부를 둘러싼 논의에서 사회당은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내부 분열을 드러냈고, 이로 인해 사공민 연합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사회당 좌파의 마지막 정치 실험은 이 시점을 기점으로 종료되었다고 평가된다.

이후 당 지도부는 본격적으로 우파로 재편되었다. 도이의 후임 위원장으로는 명백한 사회당 우파 성향의 타나베 마코토가 선출되었고, 그 뒤를 이어 야마하나 사다오,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차례로 위원장직을 맡으며, 당내 좌파는 지도부에서 사실상 축출되었다. 특히 무라야마가 1993년에 위원장이 되던 시점에는 사회당 내부에서 과거의 좌·우파 구분은 실질적 의미를 상실하였고, 대신 현실적 연립 정치를 수용하려는 실용주의 흐름이 지배하게 되었다.

3. 성향

복지국가 건설, 계급협조론에 기반한 사회당 우파와 달리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정치 변혁을 추구했다. 하지만 폭력적 투쟁이 아닌 민주적인 평화혁명 방식을 지향(평화혁명론)했으며, 공산당식 민주집중제 역시 거부했다. 이는 기존 공산주의 모델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또한 유럽형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는데, 유럽형 사민주의가 친제국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이며, 지나치게 자본과 타협한다고 보았다. 초국적 계급 연대를 포기했고, 심지어 자국 노동자조차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사회당 좌파는 더욱 투쟁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이며, 노동자 중심의 마르크스주의적 일본형 사회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후 일본의 평화헌법, 특히 제9조 수호에 대해서 매우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이들은 자위대 위헌론을 주장하며 일본의 재무장과 군사력 증강에 강력히 반대했고, 비무장 중립 노선을 외교 정책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러한 입장은 냉전 시대 이념 대결 속에서 일본의 군국주의 회귀를 막으려는 정치적 명분으로 기능했다.

또한 안보투쟁은 물론이고 전공투와 이후 신좌파 학생운동과 깊은 연관을 맺었으며, 나리타 투쟁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들은 신좌파의 과격 폭력 성향마저 옹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로 인해 신좌파의 폭력성을 비난했던 일본공산당이 상대적으로 온건 좌파로 보일 정도였다고 평가된다.

외교적으로는 친미·친서방 노선을 견지했던 사회당 우파[14]와 달리 북한중국에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북 성향의 일본공산당과는 달리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와도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외교 노선은 냉전 시대 국제 정세 속에서 독자적인 반제국주의적 입장을 표명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적 순수성 추구는 한계를 드러냈다. 고도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 속에서 대중의 요구를 흡수하지 못했고, 과격한 투쟁 노선에 대한 거부감은 좌파가 주도한 사회당이 저항 정당으로 전락하고 대중적 신뢰를 잃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4. 여담

5. 같이 보기


[1] 1960년대 이후 사회주의 협회는 점차 좌경화되어 레닌주의적 성격을 띄었다.[2]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사회를 반봉건 지주제 사회로, 전쟁 이후의 일본 사회를 미국의 신식민지로 보아 반미 부르주아 혁명을 우선적으로 일으키는 2단계혁명론을 주장한 공산당과 달리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이 부르주아 혁명을 성취했으므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보았다[3] 주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을 견지했다.[4] 68운동 당시에 전학공투회의에서 유입되었다.[5] 새로운 사회당을 만드는 모임은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성격에서 벗어나 유럽형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의 전환을 추구했다. 이 파벌에 속한 대표적 인물로는 1983년부터 1991년까지 사회당 부위원장을 지낸 야마모토 마사히로 등이 있다.[6] 다만 1980년대 이후로는 우파사회당 출신인 도이 다카코 등의 영향으로 극좌적 성향이 약해졌다.[7] 向坂逸郎. 일본의 유명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일본사회당의 주요한 이론을 제공하였다.[8] 본래 구조개혁파에 속한 우파사회당 계열 인사이지만 위원장 재직 도중에는 당내 친중파에 포섭되었다.[9] 도이 다카코와 더불어 좌파사회당의 대표적인 우파 인사로, 사회장 위원장 재임 중인 1984년 "사회당 신선언"을 발표하여 일본사회당을 유럽형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개편하려는 노력을 하였다.[10] 좌파사회당 내 대표적 우파로, 본래 우파사회당에다 사부로의 파벌에 있었으며 1980년대 사회당 좌파로 포섭된 이후로도 당의 상대적 우경화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않는 모습을 보였다.[11] 1949년 제4차 당대회에서 온건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모리토 다쓰오와 농민운동가 출신의 좌파 이론가인 이나무라 준조가 벌인 논쟁으로 1948년 정권 상실 이후 사회당이 대중정당을 목표로 해야하는지 계급정당을 목표로 해야하는지로 벌인 노선 투쟁이다.[12] 엄밀히 말하면 구조개혁론 역시 유로코뮤니즘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당 우파와 같은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이라 보긴 어렵다. 물론 좌경화가 심하게 진행된 사회당 좌파 입장에서는 별 차이가 없어보였다는게 문제다.[13] 1972년 핑퐁외교를 시작으로 미-중 관계개선이 시작되자 친중파와 친소파가 분리되서 또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14] 물론 좌파에 비해 그렇다는거지 사회당 우파가 뚜렷이 친미-친서방인지는 의견이 갈린다. 대표적인 예시로 사회당 우파의 대표적 인물인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대표적인 친중파였다.[15] 정의당 청년 당원 모임 모멘텀 전 대표이자 <일본 자본주의 논쟁사>의 번역자 김동윤[16] 정확히는 에다 사부로 계열 구조개혁파로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