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존 모브레이 John Mowbray |
출생 | 1286년 9월 4일 |
잉글랜드 왕국 모브레이 남작령 | |
사망 | 1322년 3월 23일 (향년 35세) |
잉글랜드 왕국 요크 | |
아버지 | 로저 모브레이 |
어머니 | 로헤사 드 클레어 |
배우자 | 알리나 드 브라오스 |
자녀 | 존 모브레이 |
직위 | 제2대 모브레이 남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에드워드 2세를 따라 스코틀랜드 왕국과 대적했고, 디스펜서 전쟁 시기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휘하에서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맞섰지만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생포된 뒤 처형당했다.2. 생애
1286년 9월 4일생으로, 아버지는 초대 모브레이 남작 로저 모브레이고, 어머니는 제6대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의 딸 로헤사 드 클레어다. 1297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11살에 불과했기에 제2대 브라오스 남작 윌리엄 드 브라오스의 후견을 받았다. 1298년, 윌리엄 드 브라오스의 주선으로 그의 큰알 알리나와 결혼했따. 그녀는 서식스의 브램버 및 여러 영지, 그리고 웨일스의 고워 영지의 상속녀였다. 존의 상속 재산에는 노스요크셔와 노스링컨셔에 있는 모브레이 가문의 부유한 부지가 포함되었다. 여기에는 서스크, 커크비 멀시드, 버튼인로스데일, 호빙엄, 멜튼 모브레이, 엡워스, 엑스홀름 섬 등이 있었으며, 주요 거점은 엑스홀름 성이었다.1306년 5월 22일, 윈체스터에서 귀족 가문 대표자 300명과 함께 웨일스 공 에드워드 왕자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리고 6월 1일 아직 미성년자였음에도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그의 영지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1307년 8월 26일, 새 국왕 에드워드 2세는 노샘프턴에서 첫 회의를 소집했고, 존은 모브레이 남작으로서 처음으로 소환되었다. 이후 그는 1321년 7월까지 의회에 정기적으로 소환되었다. 1308년 2월 25일, 존은 에드워드 2세의 대관식에 참여했다.
1311년 존의 친할머니인 마거릿 뷰챔프의 두번째 남편인 로스 레스트랭이 사망했다. 막거릿은 제9대 워릭 백작 윌리엄 드 뷰챔프의 장녀이자 상속녀였으며, 존은 그녀로부터 베드퍼드셔, 버킴엄셔, 캠브리지셔, 켄트에 있는 뷰챔프 가문의 부유한 영지를 물려받았다. 이는 모브레이 가문의 토지 소유지에서 가장 큰 폭의 증가였다.
이렇듯 잉글랜드 남부와 웨일스에서 영지를 주로 획득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주로 잉글랜드 북부에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자주 참여해 북부 남작의 직무를 맡았다. 1301년 초 웨일스 공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칼라일로 갔고, 1306년 에드워드 1세의 마지막 스코틀랜드 원정에 동행했으며, 1308년 8월과 이후 몇년 동안 스코틀랜드를 상대하는 군사 작전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1312년 7월 10일 요크 백작령과 도시의 수호자로 선임되었고, 7월 30일 500마크의 수당을 받았다. 그는 1314년, 1315년, 1316년에도 요크의 수호자로 선임되었다. 1313년 8월 2일 칼라일 변경 수호자로 선임되었고, 1315년 1월 9일에도 다시 이 직책을 맡았다.
존이 1314년 6월 23~24일 배넉번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1314년 12월 26일 요크 대주교, 더럼 주교와 함께 1315년 1월 3일에 열릴 요크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스코틀랜드가 휴전을 거부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1315년, 그는 군사 작전 비용에 대한 보상으로 요크 대주교로부터 50마크를 받았다. 3월 23일, 존은 뉴캐슬과 노섬벌랜드 주의 대장이자 수호자로 선임되었고, 8월에는 군사 작전을 위해 북부에 머물라는 지시를 받았다. 1313~1316년 형사 사건을 심리하는 사법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지만,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자주 동원되었기에 거의 불참했다.
1316년 8월과 9월, 그리고 1318년 12월에 요크셔 서부 지역의 군사 사령관으로 선임되었고, 1317년 9월 18일 스카버러 마을의 수호자로 임명되었고 며칠 후에는 스카버러 성의 관리인이 되어 1319년 1월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 1317년 9월 몰튼 성과 저택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고, 군대를 동원해 성을 재건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1317년 11월 30일 에드워드 2세로부터 국왕으로 이름으로 소유하게 될 엑스홀름의 관리임으로 임명되었고, 1319년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의 수행원으로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1319년 2월 6일 항복을 원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영접할 권한을 받았고, 5월 15일에는 왕실에 대한 빚을 갚는 것을 연기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공직 활동에 전념하는 동안, 존의 개인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1316년 파운틴 수도원장이 사냥하던 중 니더데일에 있는 자기 영지를 침범했다고 항의했고, 1319년 5월 24일 랭커스터셔에 있는 키트비 수도원에 기부했으며, 멜튼 교회를 개조했다는 사실만 전해진다.
존은 에드워드 2세의 통치 초기에는 왕에게 충성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1312년 7월 31일, 요크 백작령의 관리인이었던 존은 왕의 총애를 받는 피어스 개버스턴이 살해된 사건을 막지 못한 혐의로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8월 15일에는 반란이 일어날 경우 도시를 점령할 권한을 받았다. 그에게 헨리 퍼시를 체포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건 그가 요크 근처의 칼트레스 숲에 대한 관리권을 놓고 헨리 퍼시와 갈등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체포는 이뤄지지 않았고, 1313년 10월 16일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 개버스턴 살해에 연루된 귀족들이 화해하기로 한 리크 조약이 체결되면서 체포령이 취소되었다.
이후에도 에드워드 2세의 충실한 신하로 활동하던 그였지만, 에드워드 2세의 총애를 받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심각한 갈등을 벌이기시작했다. 1316년 초, 존은 장인 윌리엄 드 브라오스에게 베드퍼드셔에 있는 하우네스, 스토트폴드, 윌링턴 영지의 종신 신탁권을 부여하도록 왕의 허가를 받았다. 이 영지는 뷰챔프 가문의 상속 재산의 일부로서 그에게 주어졌다. 같은 해, 브라오스는 존에게 서식스 땅에 대한 권리를 부여했지만, 웨일스 변경 지방에 있는 고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아마도 브라오스는 고워를 다른 영주에게 팔고 싶었을 것이다. 고워는 나중에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에게 넘어갔고, 존 모브레이가 험프리를 대신해 고워를 관리했다.
그런데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고워와 인근의 글래모건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들었다. 그는 존 모브레이가 왕의 정식 허가 없이 고워의 경영권을 넘겨받았다는 이유로 당장 왕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모브레이는 웨일스 변경 지방의 관리에 한해서는 왕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고, 헤리퍼드 백작을 비롯한 웨일스 변경 지방의 주요 영주들은 존 모브레이 편을 들었다. 이에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는 왕에게 웨일스 변경 영주들이 왕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들 멋대로 영지 관리권을 거래하니, 이는 명백한 불충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1320년 10월에 열린 의회에서 고워를 몰수하기로 하고,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게 이 땅을 맡기기로 했다.
이에 분노한 존 모브레이, 험프리 드 보훈, 그리고 웨일스 변경 영주들은 자기들 영지로 물러난 뒤 반기를 들 준비에 착수했다. 1321년 1월 30일, 왕은 모브레이를 포함한 영주 29명에게 정치적 목적으로 함께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무시당했다. 이후 존 모브레이는 헤리퍼드 백작, 로저 모티머,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함께 글래모건에 있는 데스펜서의 소유물을 황폐화했다. 그 해 7월, 랭커스터 백작은 왕이 디스펜서 가문에 현혹되었기에 정의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폰트프랙트 수도원에서 북부 귀족 의회를 소집해 디스펜서 가문 타도를 천명했다. 이리하여 디스펜서 전쟁이 발발했다.
반란군 귀족들은 런던으로 진군해 왕을 압박했고, 에드워드 2세는 이에 굴복해 8월 19일 의회에서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부자를 추방한다고 선언했다. 8월 20일, 존 모브레이를 포함한 반군 귀족들은 사면되었다. 그러나 그 해 가을 왕당파 귀족들을 규합한 에드워드 2세는 내전을 재개하기로 했고, 11월 12일 존 모브레이 등 여러 귀족들이 돈캐스터에서 모이는 걸 금지했다. 1322년 1월, 에드워드 2세는 휴 르 디스펜서 부자를 불러들인 뒤 웨일스로 진군해 모티머 가문을 항복시켰다. 한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티크힐을 포위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여기에 로버트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지원을 받으려 했다가,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이 반발해 대거 이탈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존 모브레이는 헤리퍼드 백작 등 다른 몇몇 귀족과 함께 랭커스터 가문에 충성을 다했다. 그는 티크힐 포위 공격에 참여했고, 주변 지역을 철저히 약탈했다. 이후 랭커스터군과 함께 왕실군의 추격을 피해 남하했다. 1322년 3월 16일, 랭커스터군은 아우어 강을 건너려 시도했지만, 스코틀랜드 서부 변경 사령관 앤드류 하클레이에 의해 버러브리지에서 차단되었다. 이어진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헤리퍼드 백작은 전사했고, 랭커스터 백작, 존 모브레이, 그리고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는 생포되었다. 그들은 폰트프랙트 성으로 끌려갔고,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을 선고받았다. 랭커스터 백작은 즉시 참수되었고, 존 모브레이와 로버트 드 클리퍼드는 요크로 압송되어 3월 1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존의 유해는 3년 동안 쇠사슬에 묶인 채 요크에 전시된 뒤 요크의 도미니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알리나 드 브라오스(1290 ~ 1331): 제2대 브라오스 남작 윌리엄 드 브라오스의 딸. 남편이 처형된 후 아들 존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가 자유를 얻기 위해 고워를 디스펜서 가문에 양도하는 데 동의하고, 서식스 영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이후 리샤르 드 페샤일과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