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정덕수(丁德秀) |
생몰 | 1923년 5월 26일 ~ 2012년 11월 18일 |
출생지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좌연리 |
사망지 | 부산광역시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정덕수는 1923년 5월 26일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좌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0년 모친과 함께 일본 구주 탄광에서 광부로 종사하던 형들을 찾아 일본을 건너갔다.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오사가 시립 유도 제2공업학교 응용화학과 3년에 편입되어 졸업한 뒤 규슈에 있는 전화제유회사 연구실에 시험을 거쳐 취직이 되어 분석실에 근무했다.그러나 1년도 안 되어 조선인이란 이유로 쫓겨난 뒤 실의에 빠졌던 그는 동양공업회사에서 화공(畵工)을 모집하는 것을 알고 응시하여 최고점을 받아 합격통지서가 왔으나 역시 조선인이란 이유로 합격취소를 당했다. 그는 이에 반감을 품고 1941년 2월 강연중, 조성인(趙成寅) 등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이들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또한 그는 조성인과 독립운동의 투쟁방법에 관하여 의논하고 항일결사 개진대(改進隊)를 결성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그에 따른 운동방침을 정하였는데, 즉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피폐해진 일제에 미·영·소가 참전하게 되면 일제의 패망은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이때를 이용하여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달성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같은 계획아래 그는 동지포섭에 힘을 쏟았으며, 동년 8월에는 강연중과 함께 그의 활동조직으로서 항일결사 조선독립청년당(朝鮮獨立靑年黨)을 결성하고 당령으로 추대되었다. 조선독립청년당의 서약과 당칙, 당령은 다음과 같다.
서약
제1조,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조선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
제2조, 우리는 동지 정덕수를 조선독립청년당 당령으로 삼고 그의 지휘를 따른다.
제3조, 조선독립청년당 당칙은 절대로 이를 준수한다.
당칙
제1조, 당원은 절대로 당령의 명령에 복종한다.
제2조, 당원은 당령의 허가를 받지 않고 탈당할 수 없다.
제3조, 당원은 매월 당비 30전을 납부한다.
제4조, 입당자는 당령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5조, 당칙 제1조 및 제2조에 위반하였을 경우에는 엄벌에 처한다.
제6조, 당원으로서 그 본분을 잊고 배신 행위를 하고 당의 운동을 방해하거나 또는 하려는 자는 최고의 벌에 처한다.
강령
제1조, 당령은 당원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이를 지배한다.
제2조, 당령은 당 사무 및 당원의 행동에 대해여 책임을 진다.
제1조,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조선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다.
제2조, 우리는 동지 정덕수를 조선독립청년당 당령으로 삼고 그의 지휘를 따른다.
제3조, 조선독립청년당 당칙은 절대로 이를 준수한다.
당칙
제1조, 당원은 절대로 당령의 명령에 복종한다.
제2조, 당원은 당령의 허가를 받지 않고 탈당할 수 없다.
제3조, 당원은 매월 당비 30전을 납부한다.
제4조, 입당자는 당령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5조, 당칙 제1조 및 제2조에 위반하였을 경우에는 엄벌에 처한다.
제6조, 당원으로서 그 본분을 잊고 배신 행위를 하고 당의 운동을 방해하거나 또는 하려는 자는 최고의 벌에 처한다.
강령
제1조, 당령은 당원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이를 지배한다.
제2조, 당령은 당 사무 및 당원의 행동에 대해여 책임을 진다.
이후 정덕수는 조직확대에도 노력하여 하부조직으로서 대판내 우유배달클럽 및 신문배달클럽과 유도(酉島) 제2공업학교·관서공업학교·대판공업학교 등에 학생클럽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1941년 10월 조직이 발각되면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2년 8월 31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이후 귀국한 그는 교편과 군속으로 근무했으며, 서예와 서양화가로서 활동하다가 2012년 11월 18일 부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덕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1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