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b0000> 동로마 제국 황손-룸 술탄국 부마 Ἰωάννης Τζελέπης Κομνηνός 요안니스 콤니노스 | |
생몰년도 | 1112년 ~ 미상 |
부모 |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이리니 |
형제 | 마리아 콤니니 안나 콤니니 조이 콤니니 안드로니코스 1세 |
아내 | 레본 1세의 딸(이혼) 메수드 1세의 딸 카메로 |
1. 개요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의 황손이자 룸 술탄국의 부마. 역사 기록에 남은 유일한 무슬림 로마 제국 황족이다. 또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오스만 가문의 시조로 지목되기도 하였다.2. 생애
2.1. 초기 생애
1112년에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삼남이자 카이사르인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와 이리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이름을 제외하고는[1]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크게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키예프 루스의 페레미슬 공작 볼로다르의 딸이라는 것이다. 원초 연대기에 볼로다르 공작의 딸이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조지아 왕국의 명군 다비트 4세의 삼녀 카타라는 것이다. 카타가 동로마 제국의 고귀한 가문에 시집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어린 시절에는 알렉시오스 1세 사후 요안니스 2세와 안나 콤니니의 다툼에서 황제를 지원하며 줄을 잘 탄 아버지가 세바스토크라토르[2]가 되면서 안정되고 유복한 황족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1130년, 그의 나이 18세에 아버지가 제위 찬탈 음모를 꾸미면서 인생이 뒤집혔다. 요안니스 2세가 룸 술탄국과 전쟁을 하러 나간 사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몰래 꾸민 음모였으나, 이미 요안니스 2세는 자신의 체제를 굳힌 후였기 때문에 황제의 측근들이 금세 음모를 발각했고, 결국 이사키오스는 아들들을 데리고 황급히 야반도주했다.
2.2. 길고 긴 망명길
요안니스는 제위 찬탈을 도와줄 세력을 찾기 위해 방랑하기 시작한 아버지를 따라 제국 동쪽 각지를 전전했다. 우선 다니슈멘드 왕조의 지도자 에미르 가지를 찾아가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곧 명목상 제국의 봉신이나 육로가 끊겨서 반독립 상태로 할거하던 할디아의 지배자 콘스탄티노스 가브라스를 찾아가 그곳에 머무르며 콘스탄티노스의 호의를 샀다. 형만큼은 아니지만 명민했던 이사키오스와 두 아들의 노력으로, 1131년에 요안니스 2세의 공격을 방어하고 나아가 이사키오스를 제위에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다니슈멘드 왕조-할디아 테마-룸 술탄국 간의 삼각동맹이 체결되었다.그 다음 해인 1132년에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3]의 공작 레본 1세에게 옮겨갔다. 레본 1세는 삼부자를 크게 환영해 주었다. 요안니스는 특히 레본 1세에게 잘 보여서, 그의 딸과 결혼하고 아다나 일대의 영지를 받아 아르메니아 귀족 행세도 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레본 1세의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이사키오스를 얻었다. 그러나 레본 1세와 삼부자는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곧 서로 알게 되었고, 환대해준 것이 무색하게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사키오스와 레본 1세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때마침 이들을 고깝게 본 아르메니아 귀족들까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자 결국 삼부자는 룸 술탄국의 술탄 메수드 1세에게 의탁하기 위해 도망갔다. 요안니스는 아내와 영지를 모두 버리고 아버지, 형과 함께 떠났다.
아버지가 성지 순례를 명분 삼아, 십자군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러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사이 요안니스는 룸 셀주크 메수드 1세의 궁정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레본 1세를 사로잡았던 매력을 십분 발휘해서 메수드 1세 및 튀르크 귀족들이 자신과 아버지에게 호감을 갖게 했다. 하지만 아무리 튀르크인들과 결속을 강화해도, 갈수록 상황은 악화되어 갔다. 여러 동맹처를 찾아도 요안니스 2세의 제국은 흔들리는 커녕 점점 전성기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1134년에 에미르 가지가 사망한 직후에 요안니스 2세가 다니슈멘드 왕조를 공격, 1135년에 주력군을 대파해서 불구로 만들어 버렸다. 1136년에는 안티오키아 정벌을 단행해서 안티오키아를 수복했으며, 그 과정에서 레본 1세를 상대로 무력 시위를 감행해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급격히 위축시켰다. 이 과정에서, 이미 다니슈멘드와 동로마 사이에서 시달리다 이사키오스가 중개한 동맹 덕분에 숨 돌릴 기회를 얻었던 룸 술탄국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1138년 즈음 되면, 그 동안의 고생이 무색하게 삼부자를 위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 줄 동맹은 한 곳도 남지 않았다. 제국 내의 이사키오스파 귀족들도 모두 황제에게 굴복했다. 결국 삼부자는, 1138년에 2차 안티오키아 공성전 후 돌아오던 요안니스 2세를 찾아가 간절히 용서를 빌었다. 이에 요안니스 2세는 반색하며 그들을 반겨 맞았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의하면 황제는 안티오키아를 되찾은 것보다도 동생과 조카들이 돌아온 것에 더욱 기뻐했다고 한다.
2.3. 술탄의 부마가 되다
그렇게 요안니스는 다시 동로마 제국의 황족이 되었으며, 1139년에는 황제의 다니슈멘드 왕조 토벌에 종군하였다. 제국군은 약체화된 다니슈멘드 왕조의 방어를 쉽게 뚫고, 수도 네오카이사레아를 포위했다. 그런데 공성전 중, 사건이 일어났다.요안니스 2세는 군대를 살펴보던 중, 어느 명성 높은 라틴인 기사가 말을 잃어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곁에 있던 요안니스에게, 그의 고급 순혈 아랍마를 기사에게 주라고 명했다. 그런데 오만한 성격의 요안니스는 바르바로이 따위에게 자기 말을 주기 싫어서, 황명을 거부하고는 기사에게 자신과 결투해서 말을 쟁취하라고 도발하려 했다. 이를 본 황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겁먹은 요안니스는 말을 줬으나, 그날 밤 다른 고급마를 잡아 타고 야반도주해서 네오카이사레아에 들어갔다. 제국을 배신한 것이다. 다니슈멘드 왕조의 지도자이자 에미르 가지의 장남인 멜리크 메흐메드 가지는 요안니스를 환대했다. 요안니스는 멜리크 메흐메드 가지에게 제국군의 약점을 모조리 누설했고, 이를 유용하게 활용한 멜리크 메흐메드 가지는 요안니스 2세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진노한 요안니스 2세 황제는 요안니스의 아버지 이사키오스를 파플라고니아 테마의 헤라클리아 폰티카라는 곳에 유배시켰다.
도망간 요안니스는 다니슈멘드 왕조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더 안정적인 국가인데다가 인맥도 있던 룸 술탄국으로 이동, 그곳에 망명해서 메수드 1세에게 다시 한번 환대받았다. 그는 다시는 동로마 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순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메수드 1세의 딸과 결혼해 룸 술탄국의 부마가 되었다. 후대의 역사가 마카리오스 멜리세노스에 의하면 그녀의 이름은 카메로였다.[4] 부마가 되면서 금은보화와 넓은 영지를 받았으며, 학식이 뛰어나고 아랍어가 능통해 뭇 튀르크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역사에 남지 않았다. 언제 죽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아내 카메로가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1세의 이코니온 공격을 방어하는 데 참여했지만 요안니스가 언급되지 않아 그 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누일 1세는 이코니온을 1146년, 1176년 총 두번 공격했기 때문이다. 1146년 싸움 전에 죽었다면 34살이 되기 전에 죽은 것이므로 요절한 것이지만, 1176년 싸움 전에 죽었다면 64살이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당대 평균 수명 즈음에 죽은 것이다.
문서명에도 들어있는 그의 별칭 '첼레페스'는, 룸 술탄국 부마가 된 후 그가 튀르크인들에게 불린 칭호 '첼레비'를 그리스어로 표기한 것이다. 첼레비는 영어의 Sir 처럼 신분이 높은 남성을 부를 때 흔히 쓰는 경칭이었다.
3. 가족관계, 후손 문제
첫 아내 레본 1세의 딸은 이름을 전하지 않는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이사키오스를 얻었다. 그의 행적은 전혀 전해지지 않으며 다만 1184년에 고문을 받다가 고문치사를 당했다고만 남아있다. 심지어 고문치사를 당했다는데 누구에게 고문치사를 당했는지도 남아있지 않다.두 번째 아내인 룸 술탄국의 공주 카메로와의 사이에서의 자식은, 공교롭게도 요안니스가 죽은 후 300여 년 후에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는 오스만 가문의 전승을 통해 후대의 로마인인 마카리오스 멜리세노스가 기록한 것만 남아있다. 오스만 가문 측에 의하면 요안니스는 카메로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오스만 황실 시조 쉴레이만샤라는 것이다. 즉, 요안니스를 오스만 황실의 조상으로 두며 나아가 오스만 황실은 콤네노스 왕조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정작 마카리오스 멜리세노스에게도 미심쩍은 기록이라고 비판당했으며, 근현대의 여러 역사가들 역시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 기록대로라면 쉴레이만샤가 66세에 아들 에르투으룰을 낳는 것이 되는데, 무슬림 튀르크인인 쉴레이만샤가 66세에 후계자를 보는 것은 너무 확률이 낮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중세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기록을 제법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학자도 많다. 대표적으로 <비잔티움 연대기>를 저술한 현대 영국의 유명 역사가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새로운 기록을 발굴해, 요안니스는 쉴레이만샤의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라고 주장했다. 요안니스는 카메로와의 사이에서 쿠탈미쉬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 쿠탈미쉬가 곧 다른 전승에서 쉴레이만샤의 아버지라고 지목되는 튀르크 귀족 '카야 알프'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이다. 현재 학계의 주목을 받는 설이나, 이 설 역시 수도 이코니온에서 태어났을 쿠탈미쉬가 왜 동방으로 가서 오우즈 튀르크의 카이으 부족 족장이 되었는지 설명하지는 못해,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단, 기록을 비판하는 학설 쪽에서도 부계로든 모계로든 오스만 가문의 선조 중 요안니스가 있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단, 오스만 황실 자체가 요안니스의 부계 직계 후손인가 아니면 방계 후손인가를 놓고 논의 중인 것이다.
요안니스가 오스만 황실의 조상이라는 이야기는 메흐메트 2세가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을 무너뜨린 뒤 흘린 이야기인데, 이는 명백히 실제 콤니노스 가문이 다스리던 트라페준타 제국을 겨냥한 것이었다. 즉, 로마인들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메흐메트 2세 역시 콤니노스 가문 사람이니 모레아의 팔레올로고스 가문이나 트라페준타 제국의 콤니노스 가문에 눈 돌리지 말라는 프로파간다였던 것이다. 정작 메흐메트 2세는 로마의 유산을 잇는 것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서 국가 차원에서 해당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은 잠시로 그쳤고, 이슬람으로 개종해서 출세한 그리스인 귀족들이 오히려 이 이야기를 더 적극적으로 퍼뜨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