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다하루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오 사다하루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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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PB 일본 시리즈 우승반지 | |||||||||||||||||||||||||||||||||||||||||||||||||||||||||||||||||||||||
1961 | 1963 | 1965 | 1966 | 1967 | 1968 |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
NPB 일본 시리즈 우승감독 | ||
1981[1] | 1999 | 2003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감독 |
2006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 |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 결번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rowcolor=#ccac00> No.1 | No.3 | No.4 |
오 사다하루 | 나가시마 시게오 | 쿠로사와 토시오 | |
<rowcolor=#ccac00> No.14 | No.16 | No.34 | |
사와무라 에이지 | 카와카미 테츠하루 | 카네다 마사이치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000> |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4번 타자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49c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永沢富士雄) | (伊藤健太郎) | (中島治康) | (筒井修) | (前川八郎) | |
1936夏 | 1936夏-1943 | 1936夏-1948 | 1936秋 | 1937秋 | |
<rowcolor=#f49c00>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水原茂) | (川上哲治) | (青田昇) | (木暮力三) | (中村政美) | |
1937秋 | 1939-1958 | 1943-1952 | 1943 | 1943-1944 | |
<rowcolor=#f49c00>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스다 히로시 (須田博) | (近藤貞雄) | (川畑博) | (黒沢俊夫) | (小松原博喜) | |
1944 | 1944 | 1944 | 1946 | 1947 | |
<rowcolor=#f49c00>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平山菊二) | (宇野光雄) | (南村不可止) | (手塚明治) | (宮本敏雄) | |
1948 | 1951-1953 | 1951-1952 | 1953-1954 | 1955-1961 | |
<rowcolor=#f49c00>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
(樋笠一夫) | (藤尾茂) | (柏枝文治) | (与那嶺要) | (長嶋茂雄) | |
1955 | 1955-1961 | 1955 | 1958 | 1958-1974 | |
<rowcolor=#f49c00>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
(坂崎一彦) | (国松彰) | (王貞治) | (池沢義行) | (森昌彦) | |
1959-1962 | 1960-1968 | 1962-1980 | 1963 | 1964-1965 | |
<rowcolor=#f49c00> 제31대 | 제32대 |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
(相羽欣厚) | (吉田勝豊) | (田中久寿男) | (高倉照幸) | (森永勝也) | |
1965 | 1965 | 1967 | 1967 | 1967 | |
<rowcolor=#f49c00> 제36대 |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柴田勲) | (末次利光) | (柳田真宏) | (張本勳) | (淡口憲治) | |
1969 | 1970-1975 | 1974 | 1976-1979 | 1976 | |
<rowcolor=#f49c00>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제45대 | |
(ジョンソン) | (シピン) | | (ホワイト) | (中畑清) | |
1976 | 1978-1979 | 1979-1980 | 1980-1982 | 1981-1988 | |
<rowcolor=#f49c00>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제49대 | 제50대 | |
(トマソン) | (松原誠) | (原辰徳) | (スミス) | (クロマティ) | |
1981 | 1981 | 1982-1995 | 1983-1984 | 1984-1990 | |
<rowcolor=#f49c00> 제51대 | 제52대 | 제53대 | 제54대 | 제55대 | |
(呂明賜) | (駒田徳広) | (吉村禎章) | (ブラウン) | (ブラッドリー) | |
1988 | 1988-1992 | 1990-1998 | 1990 | 1991 | |
<rowcolor=#f49c00> 제56대 | 제57대 | 제58대 | 제59대 | 제60대 | |
(モスビー) | (バーフィールド) | (岡崎郁) | (大久保博元) | (落合博満) | |
1992-1993 | 1993 | 1993 | 1993 | 1994-1996 | |
<rowcolor=#f49c00> 제61대 | 제62대 | 제63대 | 제64대 | 제65대 | |
(広沢克実) | (松井秀喜) | (マック) | (清原和博) | (石井浩郎) | |
1995-1998 | 1995-2002 | 1996 | 1997-2005 | 1997-1999 | |
<rowcolor=#f49c00> 제66대 | 제67대 | 제68대 | 제69대 | 제70대 | |
(高橋由伸) | (マルティネス) | (ペタジーニ) | (小久保裕紀) | (李承燁) | |
1999-2014 | 1999 | 2003-2004 | 2004-2006 | 2006-2008 | |
<rowcolor=#f49c00> 제71대 | 제72대 | 제73대 | 제74대 | 제75대 | |
(二岡智宏) | (阿部慎之助) | (小笠原道大) | (ラミレス) | (長野久義) | |
2006 | 2007-2019 | 2007 | 2008-2011 | 2011-2016 | |
<rowcolor=#f49c00> 제76대 | 제77대 | 제78대 | 제79대 | 제80대 | |
(村田修一) | (ロペス) | (ボウカー) | (アンダーソン) | (セペダ) | |
2012-2017 | 2013-2014 | 2013 | 2014-2015 | 2014 | |
<rowcolor=#f49c00> 제81대 | 제82대 | 제83대 | 제84대 | 제85대 | |
(大田泰示) | (坂本勇人) | (中井大介) | (亀井善行) | (ジョーンズ) | |
2014-2015 | 2015~ | 2015 | 2015 | 2016 | |
<rowcolor=#f49c00> 제86대 | 제87대 | 제88대 | 제89대 | 제90대 | |
(クルーズ) | (マギー) | (ゲレーロ) | (岡本和真) | (丸佳浩) | |
2016 | 2017-2018 | 2018 | 2018~ | 2020 | |
<rowcolor=#f49c00> 제91대 | 제92대 | 제93대 | 제94대 | 제95대 | |
(中田翔) | (吉川尚輝) | (キャベッジ) | (大城卓三) | (増田陸) | |
2022 | 2025 | 2025 | 2025 | 2025 | |
<rowcolor=#f49c00> 제96대 | |||||
(岸田行倫) | |||||
2025 | |||||
1) 연도는 해당 선수가 4번 타자로 1경기 이상 출장한 해. 2) 볼드체는 일본야구전당 헌액자.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0F8F2D> | 센트럴 리그 역대 최우수선수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코즈루 마코토 쇼치쿠 / 외야수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 투수 | 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 투수 |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 투수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 투수 |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외야수 |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 투수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아키야마 노보루 타이요 / 투수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내야수 |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 투수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내야수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내야수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내야수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내야수 |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 투수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외야수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내야수 |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 외야수 | 에나츠 유타카 히로시마 / 투수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외야수 | 에나츠 유타카 요미우리 / 투수 | 나카오 타카요시 주니치 / 포수 |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 내야수 |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 내야수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랜디 바스 한신 / 내야수 |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 투수 | 야마쿠라 카즈히로 요미우리 / 포수 | 카쿠 켄지 주니치 / 투수 |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 외야수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 투수 | 사사오카 신지 히로시마 / 투수 | 잭 하월 야쿠르트 / 내야수 |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 포수 |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 투수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토마스 오말리 야쿠르트 / 내야수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외야수 |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 포수 | 사사키 카즈히로 요코하마 / 투수 |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 투수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외야수 |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외야수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외야수 | 이가와 케이 한신 / 투수 |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 투수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카네모토 토모아키 한신 / 외야수 |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 외야수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요미우리 / 내야수 | 알렉스 라미레즈 요미우리 / 외야수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와다 카즈히로 주니치 / 외야수 | 아사오 타쿠야 주니치 / 투수 |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 포수 |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외야수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투수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야마다 테츠토 야쿠르트 / 내야수 | 아라이 타카히로 히로시마 / 내야수 | 마루 요시히로 히로시마 / 외야수 | 사카모토 하야토 요미우리 / 내야수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투수 |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내야수 | 무라카미 쇼키 한신 / 투수 | 스가노 토모유키 요미우리 / 투수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수위타자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36秋 | 1937春 | 1937秋 | 1938春 | 1938秋 | ||
나카네 스스무 나고야군 / .376 | 마츠키 켄지로 오사카 / .338 | 카게우라 마사루 오사카 / .333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345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361 | ||
<rowcolor=#ffffff>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338 | 키토 카즈오 라이온군 / .321 |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310 | 이시이 마사유키 도쿄쿄진군 / .286 | 이시이 마사유키 도쿄쿄진군 / .300 | ||
<rowcolor=#ffffff> 1944 | 1946 | 1947 | 1948 | 1949 | ||
오쿠무라 토시아키 킨키닛폰 / .369 | 카네다 마사야스 오사카 / .347 | 오시타 히로시 토큐 / .315 |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 .306 | 코즈루 마코토 다이에이 / .361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362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377 | 니시자와 미치오 나고야 / .353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347 |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361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338 |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338 |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343 | 타미야 켄지로 오사카 / .320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34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34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53 | 모리나가 카츠야 히로시마 / .307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41 | 에토 신이치 주니치 / .323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에토 신이치 주니치 / .336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44 | 나카 토시오 주니치 / .343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26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45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25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320 |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 .329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55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32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319 |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 .355 |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 .358 | 미즈타니 지츠오 히로시마 / .348 | 펠릭스 미얀 타이요 / .346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 .369 | 후지타 타이라 한신 / .358 | 나가사키 케이이치 타이요 / .351 | 마유미 아키노부 한신 / .353 | 시노즈카 카즈노리 요미우리 / .334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랜디 바스 한신 / .350 | 랜디 바스 한신 / .389 | 시노즈카 카즈노리 요미우리 / .333 쇼다 코우조 히로시마 / .333 | 쇼다 코우조 히로시마 / .340 |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 .378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짐 파치오렉 타이요 / .326 |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 .340 | 잭 하웰 야쿠르트 / .331 | 토마스 오말리 한신 / .329 | 알론조 파웰 주니치 / .324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알론조 파웰 주니치 / .355 | 알론조 파웰 주니치 / .340 | 스즈키 타카노리 요코하마 .335 | 스즈키 타카노리 요코하마 .337 |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 .369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킨죠 타츠히코 요코하마 / .346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333 |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 .343 | 이마오카 마코토 한신 / .340 | 시마 시게노부 히로시마 / .337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344 |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 .351 |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346 | 우치카와 세이이치 요코하마 / .378 |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 .322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358 | 초노 히사요시 요미우리 / .316 |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 .340 | 토니 블랑코 DeNA / .333 | 맷 머튼 한신 / .338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카와바타 신고 야쿠르트 / .336 | 사카모토 하야토 요미우리 / .344 | 미야자키 토시로 DeNA / .323 | 다얀 비시에도 주니치 / .348 |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 .335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사노 케이타 DeNA / .328 |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 .317 |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318 | 미야자키 토시로 DeNA / .326 | 타일러 오스틴 DeNA / .316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오시타 히로시 토큐 / .339 | 오시타 히로시 토큐 / .383 | 이이지마 시게야 다이에이 / .336 | 오카모토 이사미 난카이 / .318 | 래리 레인즈 한큐 / .337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332 | 토요다 야스미츠 니시테츠 / .325 |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 .331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314 | 스기야마 코헤이 난카이 / .323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344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36 | 잭 브룸필드 킨테츠 / .374 | 잭 브룸필드 킨테츠 / .335 |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 .366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320 | 에노모토 키하치 도쿄 오리온즈 / .351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36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36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33 나가부치 요조 킨테츠 / .333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83 | 에토 신이치 롯데 / .337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358 | 카토 히데지 한큐 / .337 | 하리모토 이사오 닛폰햄 / .340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백인천 타이헤이요클럽 / .319 | 요시오카 사토루 타이헤이요클럽 / .309 | 아리토 미치요 롯데 / .329 | 사사키 쿄스케 킨테츠 / .354 | 카토 히데지 한큐 / .364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레론 리 롯데 / .358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26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25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32 | 부머 웰즈 한큐 / .355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67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60 | 아라이 히로마사 킨테츠 / .366 | 타카자와 히데아키 롯데 / .327 | 부머 웰즈 한큐 / .322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니시무라 노리후미 롯데 / .338 | 히라이 미츠치카 롯데 / .314 | 사사키 마코토 다이에 / .322 | 츠지 하츠히코 세이부 / .319 |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85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42 |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56 |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45 |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58 |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43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스즈키 이치로 오릭스 / .387 | 후쿠우라 카즈야 롯데 / .346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340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360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358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와다 카즈히로 세이부 / .322 | 마츠나카 노부히코 소프트뱅크 / .324 | 이나바 아츠노리 닛폰햄 / .334 | 릭 쇼트 라쿠텐 / .332 | 츠치야 텟페이 라쿠텐 / .327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니시오카 츠요시 롯데 / .346 | 우치카와 세이이치 소프트뱅크 / .338 | 카쿠나카 카츠야 롯데 / .312 | 하세가와 유야 소프트뱅크 / .341 | 이토이 요시오 오릭스 / .331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363 | 카쿠나카 카츠야 롯데 / .339 | 아키야마 쇼고 세이부 / .322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352 | 모리 토모야 세이부 / .329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요시다 마사타카 오릭스 / .350 | 요시다 마사타카 오릭스 / .339 | 마츠모토 고 닛폰햄 / .347 | 톤구 유마 오릭스 / .307 |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 .314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안타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36秋 | 1937春 | 1937秋 | 1938春 | 1938秋 | ||
후지이 이사오 오사카 / 40개 | 마츠키 켄지로 오사카 / 70개 | 버키 해리스 고라쿠엔 / 62개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50개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56개 | ||
<rowcolor=#ffffff>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116개 | 키토 카즈오 라이온군 / 124개 |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105개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111개 | 이시이 마사유키 도쿄쿄진군 / 89개 | ||
<rowcolor=#ffffff> 1944 | 1946 | 1947 | 1948 | 1949 | ||
오쿠무라 토시아키 킨키닛폰 / 48개 | 카네다 마사야스 오사카 / 152개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137개 오시타 히로시 토큐 / 137개 |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 174개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187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191개 | 고토 츠구오 오사카 / 155개 |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163개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162개 |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172개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147개 요시다 요시오 오사카 / 147개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160개 | 요나미네 카나메 요미우리 / 160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3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0개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1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8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1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63개 | 쿠와타 타케시 타이요 / 161개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콘도 카즈히코 타이요 / 152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63개 | 후지타 타이라 한신 / 154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7개 |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56개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38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55개 |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 138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52개 | 마츠바라 마코토 타이요 / 157개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이노우에 히로아키 주니치 / 149개 | 하리모토 이사오 요미우리 / 182개 | 와카마츠 츠토무 야쿠르트 / 158개 | 마츠바라 마코토 타이요 / 164개 | 오시마 야스노리 주니치 / 159개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타카하시 요시히코 히로시마 / 169개 | 짐 라이틀 히로시마 / 157개 | 타오 야스시 주니치 / 174개 | 타오 야스시 주니치 / 161개 | 타오 야스시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 166개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랜디 바스 한신 / 174개 | 랜디 바스 한신 / 176개 | 카를로스 폰세 타이요 / 159개 | 짐 파치오렉 타이요 / 165개 |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 166개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짐 파치오렉 타이요 / 172개 | 노무라 켄지로 히로시마 / 170개 | 짐 파치오렉 한신 / 159개 | 후루타 아츠야 야쿠르트 / 161개 와다 유타카 한신 / 161개 | 노무라 켄지로 히로시마 / 169개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노무라 켄지로 히로시마 / 173개 | 알론조 파웰 주니치 / 176개 | 루이스 로페스 히로시마 / 170개 | 이시이 타쿠로 요코하마 / 174개 |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 192개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 168개 | 이시이 타쿠로 요코하마 / 171개 | 시미즈 타카유키 요미우리 / 191개 |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 189개 | 시마 시게노부 히로시마 / 189개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202개 |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192개 |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 204개 | 우치카와 세이이치 요코하마 / 189개 |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 186개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맷 머튼 한신 / 214개 | 맷 머튼 한신 / 180개 | 사카모토 하야토 초노 히사요시 요미우리 / 173개 | 맷 머튼 한신 / 178개 | 야마다 테츠토 야쿠르트 / 193개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카와바타 신고 야쿠르트 / 195개 | 키쿠치 료스케 히로시마 / 181개 | 마루 요시히로 히로시마 / 171개 호세 로페스 DeNA / 171개 | 다얀 비시에도 주니치 / 178개 | 오오시마 요헤이 주니치 / 174개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오오시마 요헤이 주니치 / 146개 | 치카모토 코지 한신 / 178개 | 사노 케이타 DeNA / 161개 오카바야시 유키 주니치 / 161개 | 나카노 타쿠무 한신 / 164개 마키 슈고 DeNA / 164개 | 나가오카 히데키 야쿠르트 / 163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 160개 | 키즈카 타다스케 난카이 / 130개 |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153개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146개 | 래리 레인즈 한큐 / 184개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163개 로베르토 바르본 한큐 / 163개 | 사사키 신야 타카하시 / 180개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154개 | 카츠라기 타카오 다이마이 / 147개 | 카츠라기 타카오 다이마이 / 163개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170개 |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180개 |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160개 | 히로세 요시노리 난카이 / 187개 | 도이 마사히로 킨테츠 / 168개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56개 | 에노모토 키하치 도쿄 오리온즈 / 167개 | 도이 마사히로 킨테츠 / 147개 | 조지 알트만 도쿄 오리온즈 / 170개 | 나가부치 요조 킨테츠 / 162개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176개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154개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169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152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156개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히로타 스미오 롯데 / 148개 | 후지와라 미츠루 난카이 / 159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165개 | 후쿠모토 유타카 한큐 / 171개 | 카토 히데지 한큐 / 163개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레론 리 롯데 / 175개 | 후지와라 미츠루 난카이 / 157개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150개 | 스티브 온티베로스 세이부 / 153개 | 부머 웰즈 한큐 / 171개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부머 웰즈 한큐 / 173개 | 부머 웰즈 한큐 / 173개 | 아라이 히로마사 킨테츠 / 184개 | 타카자와 히데아키 롯데 / 158개 | 부머 웰즈 오릭스 / 165개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짐 트라버 킨테츠 / 150개 | 사사키 마코토 다이에 / 158개 | 사사키 마코토 다이에 / 164개 | 이시이 히로오 킨테츠 / 147개 | 이치로 오릭스 / 210개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이치로 오릭스 / 179개 | 이치로 오릭스 / 193개 | 이치로 오릭스 / 185개 | 이치로 오릭스 / 181개 |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 178개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182개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195개 | 마츠이 카즈오 세이부 / 193개 | 타니 요시토모 오릭스 / 189개 | 마츠나카 노부히코 카와사키 무네노리 다이에 / 171개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와다 카즈히로 세이부 / 153개 | 오오무라 나오유키 소프트뱅크 / 165개 | 이나바 아츠노리 닛폰햄 / 176개 | 쿠리야마 타쿠미 카타오카 야스유키 세이부 / 167개 | 나카지마 히로유키 세이부 / 173개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니시오카 츠요시 롯데 / 206개 | 사카구치 토모타카 오릭스 / 175개 | 우치카와 세이이치 소프트뱅크 / 157개 | 하세가와 유야 소프트뱅크 / 198개 | 나카무라 아키라 소프트뱅크 / 176개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아키야마 쇼고 세이부 / 216개 | 카쿠나카 카츠야 롯데 / 178개 | 아키야마 쇼고 세이부 / 185개 | 아키야마 쇼고 세이부 / 195개 | 아키야마 쇼고 세이부 / 179개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146개 | 오기노 타카시 롯데 / 169개 | 시마우치 히로아키 라쿠텐 / 161개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163개 | 타츠미 료스케 라쿠텐 / 158개 |
최다안타는 1994년부터 공식 타이틀로 시상했다.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홈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36秋 | 1937春 | 1937秋 | 1938春 | 1938秋 |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2개 야마시타 미노루 한큐군 / 2개 후루야 쿠라노스케 나고야킨코군 / 2개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4개 마츠키 켄지로 오사카 / 4개 | 타카하시 요시오 고라쿠엔 / 6개 | 버키 해리스 고라쿠엔 / 6개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10개 | ||
<rowcolor=#ffffff>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
츠루오카 카즈토 난카이군 / 10개 |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9개 | 핫토리 츠구히로 나고야군 / 8개 | 후루카와 세이조 나고야군 / 8개 | 후루카와 세이조 이와모토 아키라 카토 쇼지 나고야군 / 4개 | ||
<rowcolor=#ffffff> 1944 | 1946 | 1947 | 1948 | 1949 | ||
카나야마 지로 산교군 / 3개 | 오시타 히로시 세네터스 / 20개 | 오시타 히로시 토큐 / 17개 | 카와카미 테츠하루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 25개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46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코즈루 마코토 쇼치쿠 / 51개 |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 32개 | 스기야마 사토시 나고야 / 27개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27개 | 아오타 노보루 요쇼 / 31개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마치다 유키히코 코쿠테츠 / 31개 | 아오타 노보루 타이요 / 25개 | 아오타 노보루 타이요 / 22개 사토 타카오 코쿠테츠 / 22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29개 | 쿠와타 타케시 타이요 / 31개 모리 토오루 주니치 / 31개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후지모토 카츠미 오사카 / 22개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28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8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0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55개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2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8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7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9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4개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7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39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8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51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9개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타부치 코이치 한신 / 43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49개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50개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44개 |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 48개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44개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43개 |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 35개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36개 오오시마 야스노리 주니치 / 36개 |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 37개 우노 마사루 주니치 / 37개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랜디 바스 한신 / 54개 | 랜디 바스 한신 / 47개 | 릭 란셀로티 히로시마 / 39개 | 카를로스 폰세 타이요 / 33개 | 래리 패리시 야쿠르트 / 42개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34개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37개 | 잭 하웰 야쿠르트 / 38개 |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 34개 | 타이호 야스아키 주니치 / 38개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 39개 | 야마사키 타케시 주니치 / 39개 | 드웨인 호지 야쿠르트 / 38개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34개 |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44개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42개 |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39개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50개 |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 40개 타이론 우즈 요코하마 / 40개 | 터피 로즈 요미우리 / 45개 타이론 우즈 요코하마 / 45개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아라이 타카히로 히로시마 / 43개 | 타이론 우즈 주니치 / 47개 | 무라타 슈이치 요코하마 / 36개 | 무라타 슈이치 요코하마 / 46개 | 토니 블랑코 주니치 / 39개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 49개 |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31개 |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31개 |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60개 | 브래드 엘드레드 히로시마 / 37개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야마다 테츠토 야쿠르트 / 38개 | 츠츠고 요시토모 DeNA / 44개 | 알렉스 게레로 주니치 / 49개 | 네프탈리 소토 DeNA / 41개 | 네프탈리 소토 DeNA / 43개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31개 |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39개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39개 |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56개 |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41개 |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33개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 43개 | 오시타 히로시 토큐 / 26개 | 후카미 야스히로 니시테츠 → 토큐 / 25개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36개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31개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35개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29개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30개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23개 |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 25개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 32개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29개 나카타 요시히로 한큐 / 29개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44개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52개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41개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42개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34개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35개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38개 |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41개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44개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41개 |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41개 |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43개 | 클라렌스 존스 킨테츠 / 38개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도이 마사히로 타이헤이요클럽 / 34개 | 클라렌스 존스 킨테츠 / 36개 | 레론 리 롯데 / 34개 | 바비 미첼 닛폰햄 / 36개 | 찰리 매뉴얼 킨테츠 / 37개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찰리 매뉴얼 킨테츠 / 48개 | 토니 솔레이타 닛폰햄 / 44개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44개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32개 |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40개 | 부머 웰즈 한큐 / 37개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52개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50개 | 아키야마 코지 세이부 / 43개 |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44개 |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49개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세이부 / 42개 |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세이부 / 39개 |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세이부 / 41개 |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42개 |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35개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코쿠보 히로키 다이에 / 28개 | 트로이 닐 오릭스 / 32개 | 나이젤 윌슨 닛폰햄 / 37개 | 나이젤 윌슨 닛폰햄 / 33개 | 터피 로즈 킨테츠 / 40개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 39개 | 터피 로즈 킨테츠 / 55개 |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55개 | 터피 로즈 킨테츠 / 51개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44개 페르난도 세기놀 닛폰햄 / 44개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마츠나카 노부히코 소프트뱅크 / 46개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32개 | 야마사키 타케시 라쿠텐 / 43개 |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46개 |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48개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T-오카다 오릭스 / 33개 |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48개 |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27개 | 미첼 아브레우 닛폰햄 / 31개 | 나카무라 타케야 에르네스토 메히아 세이부 / 34개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37개 | 브랜든 레어드 닛폰햄 / 39개 |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소프트뱅크 / 35개 |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47개 |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43개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아사무라 히데토 라쿠텐 / 32개 | 스기모토 유타로 오릭스 / 32개 |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41개 | 아사무라 히데토 라쿠텐 / 26개 그레고리 폴랑코 롯데 / 26개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 26개 | 야마카와 호타카 소프트뱅크 / 34개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출루율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 ||||
<rowcolor=#ffffff>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76출루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75출루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72출루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63출루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46출루 | ||
<rowcolor=#ffffff> 1972 | 1973 | 1974 | 1975 | 1976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49출루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80출루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94출루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36출루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57출루 | ||
<rowcolor=#ffffff> 1977 | 1978 | 1979 | 1980 | 1981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72출루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247출루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220출루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240출루 |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 243출루 | ||
<rowcolor=#ffffff> 1982 | 1983 | 1984 | 1985 | 1986 | ||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 232출루 타오 야스시 주니치 / 232출루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234출루 |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 231출루 | 랜디 바스 한신 / .428 | 랜디 바스 한신 / .481 | ||
<rowcolor=#ffffff> 1987 | 1988 | 1989 | 1990 | 1991 |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435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418 | 워렌 크로마티 요미우리 / .449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416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473 | ||
<rowcolor=#ffffff> 1992 | 1993 | 1994 | 1995 | 1996 | ||
토마스 오말리 한신 / .460 | 토마스 오말리 한신 / .427 | 토마스 오말리 한신 / .429 | 토마스 오말리 한신 / .429 |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 .431 | ||
<rowcolor=#ffffff>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 .444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421 |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469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438 |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466 | ||
<rowcolor=#ffffff>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461 |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 .401 | 그렉 라로카 히로시마 / .425 |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 .430 | 후쿠도메 코스케 주니치 / .438 | ||
<rowcolor=#ffffff>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434 | 우치카와 세이이치 요코하마 / .416 | 아오키 노리치카 야쿠르트 / .400 | 와다 카즈히로 주니치 / .437 | 토리타니 타카시 한신 / .395 | ||
<rowcolor=#ffffff>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 .429 |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455 |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419 | 야마다 테츠토 야쿠르트 / .416 | 사카모토 하야토 요미우리 / .433 | ||
<rowcolor=#ffffff>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
타나카 코스케 히로시마 / .398 | 마루 요시히로 히로시마 / .468 |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 .453 |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427 | 스즈키 세이야 히로시마 / .433 | ||
<rowcolor=#ffffff> 2022 | 2023 | 2024 | 2025 | 2026 | ||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458 | 오오야마 유스케 한신 / .403 | 도밍고 산타나 야쿠르트 / .399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
<rowcolor=#ffffff>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440 | 잭 블룸필드 킨테츠 / .396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426 | 대릴 스펜서 한큐 / .423 | 에노모토 키하치 도쿄 오리온즈 / .439 | |
<rowcolor=#ffffff>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439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437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421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467 | 에토 신이치 롯데 / .408 | |
<rowcolor=#ffffff> 1972 | 1973 | 1974 | 1975 | 1976 |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443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448 | 하리모토 이사오 토에이 / .452 | 대릴 스펜서 킨테츠 / .394 | 카토 히데지 한큐 / .376 | |
<rowcolor=#ffffff> 1977 | 1978 | 1979 | 1980 | 1981 | |
카토 히데지 한큐 / .401 | 사사키 쿄스케 킨테츠 / .398 | 카토 히데지 한큐 / .437 | 쿠리하시 시게루 킨테츠 / .412 |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431 | |
<rowcolor=#ffffff> 1982 | 1983 | 1984 | 1985 | 1986 |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428 | 스티브 온티베로스 세이부 / .419 | 스티브 온티베로스 세이부 / .443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481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487 | |
<rowcolor=#ffffff> 1987 | 1988 | 1989 | 1990 | 1991 | |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428 |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429 | 마츠나가 히로미 오릭스 / .431 | 키요하라 카즈히로 세이부 / .454 | 시라이 카즈유키 닛폰햄 / .428 | |
<rowcolor=#ffffff> 1992 | 1993 | 1994 | 1995 | 1996 | |
키요하라 카즈히로 세이부 / .402 | 츠지 하츠히코 세이부 / .395 | 이치로 오릭스 / .445 | 이치로 오릭스 / .432 | 이치로 오릭스 / .422 | |
<rowcolor=#ffffff>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
스즈키 켄 세이부 / .431 | 카타오카 아츠시 닛폰햄 / .435 | 이치로 오릭스 / .412 | 이치로 오릭스 / .460 |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 .434 | |
<rowcolor=#ffffff>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467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473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464 | 마츠나카 노부히코 소프트뱅크 / .412 | 마츠나카 노부히코 소프트뱅크 / .453 | |
<rowcolor=#ffffff>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
터피 로즈 오릭스 / .403 | 나카지마 히로유키 세이부 / .410 | 나카지마 히로유키 세이부 / .398 | 알렉스 카브레라 오릭스 / .428 | 이토이 요시오 닛폰햄 / .411 | |
<rowcolor=#ffffff>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
이토이 요시오 닛폰햄 / .404 | 에스테반 헤르만 세이부 / .418 | 이토이 요시오 오릭스 / .424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469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446 | |
<rowcolor=#ffffff>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426 | 야나기타 유키 소프트뱅크 / .431 | 콘도 켄스케 닛폰햄 / .422 | 콘도 켄스케 닛폰햄 / .465 | 요시다 마사타카 오릭스 / .429 | |
<rowcolor=#ffffff> 2022 | 2023 | 2024 | 2025 | 2026 | |
요시다 마사타카 오릭스 / .457 |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 .431 |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 .439 |
1962년부터 퍼시픽리그에서 최고출루율 시상을 시작했으나 1984년까진 출루율이 공식 기록이 아닌 퍼시픽리그에서만 쓰이는 지표였으며 당시 계산법엔 희생플라이가 반영되지 않았다. 센트럴리그는 1967년부터 1984년까지 최고출루율이 아닌 안타+사사구 갯수를 합친 최다출루수 타이틀을 시상했다. 이후 1985년부터 출루율이 일본프로야구 공식 지표로 반영되며 계산법에 희생플라이가 분모로 들어감과 동시에 양대리그 모두 최고출루율 타이틀을 시상했다. 이 때문에 1984년까지의 출루율 기록은 현행 계산법보다 높게 나오며 시즌 출루율 기록도 1985년 이후부터의 기록만 반영한다.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타점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단일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tablewidth=100%> 1936년 ~ 1949년 | ||||
<rowcolor=#ffffff> 1936秋 | 1937春 | 1937秋 | 1938春 | 1938秋 | ||
후루야 쿠라노스케 나고야킨코군 / 23점 | 카게우라 마사루 오사카 / 47점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37점 | 카게우라 마사루 오사카 / 31점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38점 | ||
<rowcolor=#ffffff>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75점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67점 |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57점 |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쿄진군 / 60점 | 아오타 노보루 도쿄쿄진군 / 42점 노구치 아키라 세이테츠군 / 42점 | ||
<rowcolor=#ffffff> 1944 | 1946 | 1947 | 1948 | 1949 |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25점 | 츠루오카 카즈토 그레이트링 / 95점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71점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108점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142점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코즈루 마코토 쇼치쿠 / 161점 |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 105점 | 니시자와 마치오 나고야 / 98점 | 후지무라 후미오 오사카 / 98점 | 스기야마 사토시 주니치 / 91점 와타나베 히로유키 오사카 / 91점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79점 | 미야모토 토시오 요미우리 / 69점 | 미야모토 토시오 요미우리 / 78점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92점 | 모리 토오루 주니치 / 87점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후지모토 카츠미 오사카 / 76점 | 쿠와타 타케시 타이요 / 94점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85점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12점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19점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04점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16점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07점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25점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15점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 105점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01점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20점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14점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07점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96점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23점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24점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118점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113점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112점 |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 103점 |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 95점 | 하라 타츠노리 요미우리 / 103점 | 키누가사 사치오 히로시마 / 102점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랜디 바스 한신 / 134점 | 랜디 바스 한신 / 109점 | 카를로스 폰세 타이요 / 98점 | 카를로스 폰세 타이요 / 102점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116점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102점 | 히로사와 카츠미 야쿠르트 / 99점 | 래리 시츠 타이요 / 100점 | 히로사와 카츠미 야쿠르트 / 94점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 94점 | 타이호 야스아키 주니치 / 107점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에토 아키라 히로시마 / 106점 | 루이스 로페스 히로시마 / 109점 | 루이스 로페스 히로시마 / 112점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100점 | 로버트 로즈 요코하마 / 153점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108점 |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127점 | 마츠이 히데키 요미우리 / 107점 |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 124점 | 카네모토 토모아키 한신 / 113점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이마오카 마코토 한신 / 147점 | 타이론 우즈 주니치 / 144점 | 알렉스 라미레스 야쿠르트 / 122점 |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 125점 | 토니 블랑코 주니치 / 110점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알렉스 라미레스 요미우리 / 129점 | 아라이 타카히로 한신 / 93점 | 아베 신노스케 요미우리 / 104점 | 토니 블랑코 DeNA / 136점 | 마우로 고메스 한신 / 109점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하타케야마 카즈히로 야쿠르트 / 105점 | 츠츠고 요시토모 DeNA / 110점 | 호세 로페스 DeNA / 105점 | 블라디미르 발렌틴 야쿠르트 / 131점 | 네프탈리 소토 DeNA / 108점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97점 |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113점 |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134점 | 마키 슈고 DeNA / 103점 |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86점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벳토 카오루 마이니치 / 105점 |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87점 |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86점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86점 |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 97점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야마우치 카즈히로 마이니치 / 99점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95점 |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 100점 | 카츠라기 타카오 다이마이 / 85점 | 카츠라기 타카오 다이마이 / 95점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 103점 | 야마우치 카즈히로 다이마이 / 112점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04점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35점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15점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10점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97점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00점 | 조지 알트만 도쿄 오리온즈 / 100점 |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101점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129점 |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120점 |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 101점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101점 |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109점 | 나가이케 아츠시 한큐 / 96점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카토 히데지 한큐 / 97점 | 카토 히데지 한큐 / 82점 | 레론 리 롯데 / 109점 | 바비 마르카노 한큐 / 94점 | 카토 히데지 한큐 / 104점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찰리 매뉴얼 킨테츠 / 129점 | 토니 솔레이타 닛폰햄 / 108점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99점 | 미즈타니 지츠오 한큐 / 114점 | 부머 웰즈 한큐 / 130점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146점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116점 | 부머 웰즈 한큐 / 119점 | 카도타 히로미츠 난카이 / 125점 | 부머 웰즈 한큐 / 124점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세이부 / 106점 이시미네 카즈히코 오릭스 / 106점 |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세이부 / 92점 짐 트라버 킨테츠 / 92점 | 부머 웰즈 다이에 / 97점 | 랄프 브라이언트 킨테츠 / 107점 | 이시이 히로오 킨테츠 / 111점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이치로 오릭스 / 80점 타나카 유키오 닛폰햄 / 80점 하츠시바 키요시 롯데 / 80점 | 트로이 닐 오릭스 / 111점 | 코쿠보 히로키 다이에 / 114점 | 나이젤 윌슨 닛폰햄 / 124점 | 터피 로즈 킨테츠 / 101점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 110점 | 나카무라 노리히로 킨테츠 / 132점 | 터피 로즈 킨테츠 / 117점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123점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120점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마츠나카 노부히코 소프트뱅크 / 121점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100점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100점 | 야마사키 타케시 라쿠텐 / 108점 | 터피 로즈 오릭스 / 118점 |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122점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코야노 에이이치 닛폰햄 / 109점 |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116점 | 이대호 오릭스 / 91점 | 아사무라 히데토 세이부 / 110점 | 나카타 쇼 닛폰햄 / 100점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124점 | 나카타 쇼 닛폰햄 / 110점 | 알프레도 데스파이네 소프트뱅크 / 103점 | 아사무라 히데토 세이부 / 127점 | 나카무라 타케야 세이부 / 123점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나카타 쇼 닛폰햄 / 108점 | 시마우치 히로아키 라쿠텐 / 96점 |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90점 | 콘도 켄스케 소프트뱅크 / 87점 | 야마카와 호타카 소프트뱅크 / 99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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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91db><tablebgcolor=#0091db> | 일본프로야구 역대 1루수 베스트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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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940 | 1947 | 1948 | 1949 | |||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쿄진군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센트럴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니시자와 미치오 주니치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니시자와 미치오 나고야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니시자와 미치오 주니치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 후지모토 카츠미 오사카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콘도 카즈히코 타이요 | 후지모토 카츠미 오사카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 후지타 타이라 한신 |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랜디 바스 한신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래리 패리쉬 야쿠르트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오치아이 히로미츠 주니치 | 짐 파쵸렉 한신 | 히로사와 카츠미 야쿠르트 | 타이호 야스아키 주니치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토마스 오말리 야쿠르트 | 루이스 로페스 히로시마 | 코마다 노리히로 요코하마 |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로베르토 페타지니 야쿠르트 | 조지 아리아스 한신 | 타이론 우즈 요코하마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아라이 타카히로 히로시마 | 타이론 우즈 주니치 | 우치카와 세이이치 요코하마 | 토니 블랑코 주니치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크레이그 브라젤 한신 | 쿠리하라 켄타 히로시마 | 토니 블랑코 주니치 | 토니 블랑코 DeNA | 마우로 고메즈 한신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하타케야마 카즈히로 야쿠르트 | 아라이 타카히로 히로시마 | 호세 로페즈 DeNA | 다얀 비시에도 주니치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무라카미 무네타카 야쿠르트 | 제프리 마르테 한신 | 호세 오수나 야쿠르트 | 오오야마 유스케 한신 | 오카모토 카즈마 요미우리 | |
<rowcolor=#ffffff> 2025 | 2026 | 2027 | 2028 | 2029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퍼시픽 리그 ] {{{#!wiki style="margin-bottom: -10px" {{{#555555,#aaaaaa | | ||||
<rowcolor=#ffffff> 1950 | 1951 | 1952 | 1953 | 1954 | |
이이다 토쿠지 난카이 | 카와이 코조 한큐 | ||||
<rowcolor=#ffffff>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
스기야마 코헤이 난카이 | 에노모토 키하치 마이니치 | 오카모토 켄이치로 한큐 | 스탠리 하시모토 토에이 |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
<rowcolor=#ffffff>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
에노모토 키하치 다이마이 | 에노모토 키하치 오리온 | ||||
<rowcolor=#ffffff>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타카키 타카시 킨테츠 | 에노모토 키하치 오리온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에노모토 키하치 오리온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
<rowcolor=#ffffff>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
오오스기 카츠오 토에이 | 카토 히데지 한큐 | 클라렌스 존스 킨테츠 | |||
<rowcolor=#ffffff>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
카토 히데지 한큐 | 사카기바라 준이치 닛폰햄 | 카토 히데지 한큐 | |||
<rowcolor=#ffffff> 1980 | 1981 | 1982 | 1983 | 1984 | |
레온 리 롯데 | 사카기바라 준이치 닛폰햄 | 오치아이 히로미츠 롯데 | 부머 웰즈 한큐 | ||
<rowcolor=#ffffff> 1985 | 1986 | 1987 | 1988 | 1989 | |
리처드 데이비스 킨테츠 | 부머 웰즈 한큐 | 키요하라 카즈히로 세이부 | 부머 웰즈 오릭스 | ||
<rowcolor=#ffffff>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
키요하라 카즈히로 세이부 | 짐 트레버 킨테츠 | 키요하라 카즈히로 세이부 | 이시이 히로오 킨테츠 | ||
<rowcolor=#ffffff>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
훌리오 프랑코 롯데 | 카타오카 아츠시 닛폰햄 | 필 클라크 킨테츠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
<rowcolor=#ffffff>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마츠나카 노부히코 다이에 | ||
<rowcolor=#ffffff>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
훌리오 줄레타 소프트뱅크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닛폰햄 | 알렉스 카브레라 세이부 | 알렉스 카브레라 오릭스 | 타카하시 신지 닛폰햄 | |
<rowcolor=#ffffff>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
알렉스 카브레라 오릭스 | 코쿠보 히로키 소프트뱅크 | 이대호 오릭스 | 아사무라 히데토 세이부 | 에르네스토 메히아 세이부 | |
<rowcolor=#ffffff>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
나카타 쇼 닛폰햄 | 긴지 라쿠텐 |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
<rowcolor=#ffffff>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나카타 쇼 닛폰햄 | 브랜든 레어드 롯데 | 야마카와 호타카 세이부 | 톤구 유마 오릭스 | 야마카와 호타카 소프트뱅크 | |
<rowcolor=#ffffff> 2025 | 2026 | 2027 | 2028 | 20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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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다하루의 기타 직책 역임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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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No.1 | |
<colbgcolor=#ffc800><colcolor=#0000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 | |
오 사다하루 | 왕전즈 王貞治, Sadaharu Oh | Wang Chen-chih[2] | |
출생 | 1940년 5월 20일 ([age(1940-05-20)]세)[3] |
도쿄부 도쿄시 혼조구 (現 도쿄도 스미다구) | |
국적 |
[4] |
신체 | 177cm | 79kg | O형 |
포지션 | 1루수[5] |
투타 | 좌투좌타[6] |
학력 | 스미다구립 나리히라 소학교 (졸업) 스미다구립 혼조 중학교 (졸업) 와세다 실업학교 고등부 (졸업)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9~1980) |
지도자 | 요미우리 자이언츠 플레잉코치 (1976~1980) 요미우리 자이언츠 조감독 (1981~1983)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1984~1988)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1995~2008)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6)[7] |
프런트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단장 (2005~2008)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최고고문 (2008)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 (2009~) |
기타 | NPB 커미셔너 특별 고문 (2009~) |
1. 개요
일본에서 활동한 중화민국 국적의 전 야구선수이자 전 야구감독. NPB 통산 최다 홈런, 타점, 득점, 볼넷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8] 현재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프로야구단의 회장. 현역 시절 포지션은 1루수.중국/대만 출신 인물들의 이름을 원음이 아니라 한국식으로 읽는 것이 대세였던 60~70년대에 전성기를 보내며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아직도 대한민국식 독음인 '왕정치'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2. 어린 시절
도쿄에서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는 중화민국 국적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1940년 5월 10일에 태어났다.아버지는 저장성 출신의 중국인 왕사복(王仕福, 왕쓰푸 / 오 시후쿠, 1985년 사망)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인 오 토미(王登美, 2010년 사망, 무려 108세까지 장수했다.)이다. 어머니 집안에서 외국인인 왕사복과의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혼인신고도 못 한 상태로 자식을 낳아서 출생 당시에는 어머니의 본래 성인 토즈미(當住)를 따랐으나[9], 2차대전 패전 이후 정식으로 혼인하고 성도 아버지 성으로 바꾸었다.
맏형 테츠히로, 큰누나 유키에, 작은누나 준코, 같은 날에 태어난 쌍둥이 누나 히로코(1세 3개월에 사망), 막내 요시코(몇개월만에 사망) 등 6남매였으며 막내로 자랐다. 호적에는 1940년 5월 20일 출생으로 등록했는데 부모가 '이 아이는 오래 살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부모가 출생신고를 미뤘기 때문이고 오 사다하루도 자서전에서 '몸이 아파 부모님이 상당히 걱정하셨다. 3세가 될 때까지 서있지도 못했는데 4살이 되자 강해졌다'고 말했다.
왕사복은 원래는 돈을 번 뒤에 본토로 돌아가 큰아들은 의사[10]로, 작은아들인 오 사다하루는 전기 엔지니어로 키울 생각이었다고 하나, 국공내전으로 중국이 1949년에 완전히 공산화되자 일본에 정착했다고 한다.[11]
3. 선수 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 No.1 |
오 사다하루 / 왕전즈 (王貞治, Sadaharu Oh / Wang Chen-chih) |
와세다 실업고를 졸업하고 195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계약금 1800만엔 연봉 144만엔을 받으며 입단했다. 계약금은 지난 해에 대졸로 입단한 나가시마 시게오와 같은 액수이자 당시 일본프로야구 최고 입단 계약금이었던 만큼 그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첫 해엔 타율 .161, 7홈런에 삼진을 많이 당하는 등 프로에 적응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팬들로부터 그의 성을 딴 "왕, 왕, 삼진왕"이라고 야유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아라카와 히로시[12] 코치가 그를 전담 지도하면서 타격 스킬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13] 특히 그를 상징하는 외다리(一本足, 잇폰아시) 타법을 이 시기에 터득했다. 그렇게 피나는 훈련 끝에 오 사다하루는 1962년 38홈런으로 센트럴리그 홈런왕에 등극하며 본격적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1964년에는 이후 50년 가까이 깨지지 않을 단일시즌 홈런 기록인 55홈런을 쳐내며 신화나 다름 없는 지위에 오른다. 22년 동안의 현역 생활 동안 수위타자 5회[14], 홈런왕 15회[15]13년 연속으로 수상한 것 역시 일본프로야구 최장 연속 기록이다. 1975년에야 라이벌 한신 타이거스의 타부치 코이치가 홈런왕을 차지하며 오의 연속 홈런왕 기록 연장을 저지했는데, 오는 다음해인 1976년과 1977년에 홈런왕을 탈환하며 통산 기록을 15회로 늘렸으나 이후 야마모토 코지나 카케후 마사유키 등이 대두하면서 은퇴할 때까지 홈런왕을 다시 차지하진 못했다.], 타점왕 13회[16]8년 연속으로 수상한 것도 마찬가지로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장 연속 기록이다.], 삼관왕 2회[17]에 빛나며 일본프로야구의 지배자로 등극했다.
확실히 오 사다하루는 일본 야구에서 홈런하면 떠오르는, 일본 리그에서 몬스터급 기록을 남겼던 전설적인 거포이다.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은 행크 아론(755홈런)을 넘어선 기록이고[18] 일본에서는 오를 "세계의 홈런왕"이라 부를 정도이지만, 당시의 미국과 일본 야구의 레벨 차이와 당시 일본 구장들의 평균 거리와 미국 구장의 평균거리가 거의 10미터 가깝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들어 미국 쪽에서는 그다지 인정하고 있지는 않다.[19][20]
개인 통산 756호 홈런을 기록하며 환호하는 모습. 이 홈런으로 행크 아론의 기록을 깨고 세계 통산 홈런 1위로 올라서게 되었다.[21] |
1977년 9월 3일, 코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vs 야쿠르트 스왈로즈 戰에서 오 사다하루가 756호 홈런을 쳐서 행크 아론의 기록을 깨는 장면. 당시 투수는 스즈키 야스지로[22].
행크 아론과의 홈런 더비 |
거기다 이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이었던 코라쿠엔 구장은 당시에도 심각하게 악명 높았던 타자친화 구장으로, 공식적인 좌우 펜스가 91m/88m(러키존 시절)에 중앙 120m였는데 실제로 측정한 결과는 그보다 훨씬 작을 정도로 홈런이 나오기 쉬웠다.[24] 더군다나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배트 규정이 강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압축배트를 쓰는 선수들이 꽤 있었다고 하며 오 사다하루도 압축배트를 사용했다.[25] 여담으로 베이브 루스가 홈런을 마구 쳐내던 양키 스타디움도 좌타자들을 위해 당겨놓았기 때문에 오른쪽 펜스까지의 거리가 메이저리그에서도 짧은 편이라고 까였는데, 그마저도 97m로 코라쿠엔 구장과 10m 가까이 차이가 난다.
다만 오 사다하루의 기록의 가치에 대해 논할 때는 1970년대 당시에는 지금처럼 교통/통신이 발달되어있지 않아서 국가 간 야구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26]. 그리고 그나마 프로 리그라도 있던 일본이 당시 미국이나 쿠바 같은 곳을 제외하고는 가장 야구의 수준이 높았다. 미국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일본프로야구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백인천이 40살이 넘는 나이에도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서 타율 .412에 장타율 7할 4푼을 기록했고, 90년대까지만 해도 한일 슈퍼게임에서 밀렸을 정도로 과거에는 국가 간 레벨차이가 극심했다.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기록에는 국적과 인종의 차가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개인 박물관에 오 사다하루의 방망이를 받아 보관하였다. 즉 홈런 개수만으로 오 사다하루의 역량이 메이저의 유명한 강타자보다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오의 기록이 평가절하될 이유는 없다. 오 사다하루는 같은 조건에서 뛰었던, '슬러거' 소리를 들었던 선수들보다도 2배, 3배에 가까운 홈런 수치를 기록하며 넘사벽의 위업을 달성했다. 심지어 은퇴하는 해에도 30홈런을 쳤는데, 그의 뛰어난 기량과 함께 그 정도의 꾸준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을 철저한 자기관리도 엿볼 수 있게 하는 기록.
입단 후 은퇴하기까지 22년간 시즌 통산 868홈런[27]을 쳐냈으며, 시즌 외의 기록[28]까지 합치면 1000개 이상의 홈런을 쳐낸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13년 연속 홈런왕, 8년 연속 타점왕, 8년 연속 40홈런을 치며 기복도 없었던 것은 물론 통산 슬래시라인도 .301/.444/.634 OPS 1.080 [29]로 말 그대로 일본프로야구를 지배하는 타자로 군림했다. 당시 나가시마 시게오와 ON타선을 구축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9년 연속 우승(1965~1973)을 이끌었다. 당연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오 사다하루가 현역 시절 달고 있었던 등번호 1번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30]
통산 루타수는 무려 5862루타로 이 기록 역시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이다. 기록 자체는 스즈키 이치로가 2017년에 미일 통산 기록으로 넘어섰다.[31]
4. 연도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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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e5a1d> 연도 | 팀 | 시합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AR |
1959 | 요미 우리 | 94 | 222 | 31 | 7 | 1 | 7 | 18 | 25 | 3 | 24 | 72 | .161 | .262 | .316 | .569 | 0.0 |
1960 | 130 | 502 | 115 | 19 | 3 | 17 | 49 | 71 | 5 | 67 | 101 | .270 | .375 | .448 | .823 | 3.3 | |
1961 | 127 | 471 | 100 | 25 | 6 | 13 | 50 | 53 | 10 | 64 | 72 | .253 | .358 | .444 | .802 | 4.7 | |
1962 | 134 | 586 | 135 | 28 | 2 | 38 | 79 | 85 | 6 | 72 | 99 | .272 | .376 | .565 | .941 | 8.4 | |
1963 | 140 | 609 | 146 | 30 | 5 | 40 | 111 | 106 | 9 | 123 | 64 | .305 | .452 | .640 | 1.092 | 11.3 | |
1964 | 140 | 599 | 151 | 24 | 0 | 55 | 110 | 119 | 6 | 119 | 81 | .320 | .456 | .720 | 1.176 | 10.8 | |
1965 | 135 | 575 | 138 | 19 | 1 | 42 | 104 | 104 | 2 | 138 | 58 | .322 | .490 | .666 | 1.156 | 11.3 | |
1966 | 129 | 549 | 123 | 14 | 1 | 48 | 111 | 116 | 9 | 142 | 51 | .311 | .495 | .715 | 1.210 | 11.6 | |
1967 | 133 | 566 | 139 | 22 | 3 | 47 | 94 | 108 | 3 | 130 | 65 | .326 | .488 | .723 | 1.211 | 10.4 | |
1968 | 131 | 580 | 144 | 28 | 0 | 49 | 107 | 119 | 5 | 121 | 72 | .326 | .475 | .722 | 1.197 | 10.9 | |
1969 | 130 | 576 | 156 | 24 | 0 | 44 | 112 | 103 | 5 | 111 | 61 | .345 | .472 | .690 | 1.162 | 11.2 | |
1970 | 129 | 553 | 138 | 24 | 0 | 47 | 97 | 93 | 1 | 119 | 48 | .325 | .476 | .713 | 1.189 | 11.9 | |
1971 | 130 | 565 | 120 | 18 | 2 | 39 | 92 | 101 | 8 | 121 | 65 | .276 | .435 | .597 | 1.032 | 8.6 | |
1972 | 130 | 572 | 135 | 19 | 0 | 48 | 104 | 120 | 2 | 108 | 43 | .296 | .435 | .654 | 1.089 | 7.6 | |
1973 | 130 | 560 | 152 | 18 | 0 | 51 | 111 | 114 | 2 | 124 | 41 | .355 | .500 | .755 | 1.255 | 11.9 | |
1974 | 130 | 553 | 128 | 18 | 0 | 49 | 105 | 107 | 1 | 158 | 44 | .332 | .532 | .761 | 1.293 | 10.9 | |
1975 | 128 | 523 | 112 | 14 | 0 | 33 | 77 | 96 | 1 | 123 | 62 | .285 | .451 | .573 | 1.024 | 6.1 | |
1976 | 122 | 536 | 130 | 11 | 1 | 49 | 99 | 123 | 3 | 125 | 45 | .325 | .479 | .725 | 1.204 | 8.5 | |
1977 | 130 | 570 | 140 | 15 | 0 | 50 | 114 | 124 | 1 | 126 | 37 | .324 | .477 | .706 | 1.183 | 8.0 | |
1978 | 130 | 566 | 132 | 20 | 0 | 39 | 91 | 118 | 1 | 114 | 43 | .300 | .436 | .611 | 1.048 | 5.8 | |
1979 | 120 | 506 | 116 | 15 | 0 | 33 | 73 | 81 | 1 | 89 | 48 | .285 | .415 | .565 | .980 | 4.6 | |
1980 | 129 | 527 | 105 | 10 | 0 | 30 | 59 | 84 | 0 | 72 | 47 | .236 | .342 | .462 | .803 | 2.5 | |
NPB 통산 (22시즌) | 2831 | 11886 | 2786 | 422 | 25 | 868 | 1967 | 2170 | 84 | 2390 | 1319 | .301 | .446 | .634 | 1.080 | 180.4 |
빨강색은 NPB 역대 1위.
5.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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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No.89 |
오 사다하루 / 왕전즈 (王貞治, Sadaharu Oh / Wang Chen-chih) |
은퇴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후지타 모토시 감독 휘하에서 조감독을 맡으며[32] 감독 수업을 받은 뒤 1984년부터 5년 동안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직을 맡았다. 그러나 V9 시대 이후로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에 대해 구단에서 나날이 압박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에서[33] 취임 기간 동안 A클래스는 계속 기록했을지언정 리그 우승은 불과 1번(1987년)[34]에 그친 탓에 결국 1988년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고[35], 이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을 맡을때까지 야구해설가, 평론가의 길을 걸었다.[36]
1994년, 퍼시픽 리그에서 한창 막장가도를 달리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직을 제의받은 오 사다하루는 처음엔 요미우리 와의 관계 때문에 취임을 망설였지만 다이에의 GM 네모토 리쿠오가 "거인이란 집안은 이미 장남인 나가시마가 대를 이은 셈이다. 당신은 차남이니 부담 가질 필요가 있는가?" "이제 시대는 나가시마 vs 오 사다하루 의 라이벌전을 원한다" 라고 간곡히 설득하여[37] 결국 오는 다이에 감독직을 받아들였다. 다이에의 수장이 된 오는 3년 간 필사의 리빌딩 끝에 1998년 무려 20년 만에 A클래스(리그 3위 이상)를 달성한 후 1999년에 후쿠오카 이전 이후 처음이자 35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했고, 이후 감독직에서 용퇴하는 2008년까지 일본시리즈 2회 우승, 퍼시픽리그 3회 우승, 9년 연속 A클래스(3위 이상)를 기록하며 팀을 퍼시픽 리그의 최강팀으로 환골탈태시킨다. 그리고는 2006년에 위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체력적인 문제로 더 이상 팀의 지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2008년 시즌을 끝으로 현장을 떠났다.
처음엔 계속되는 저조한 성적으로 지쳐가던 팬들에게 온갖 비난[38]을 듣기도 했지만, 그런 비난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점차 성적을 끌어올린 끝에 오랫동안 리그 바닥을 해맸던 호크스를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최강팀으로 만들어 낸 덕분에 감독 초창기에 들었던 비난 이상으로 팬들의 지지를 이끄는 데 성공했고, 현재의 호크스 팬들에게 오 사다하루 감독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감독 마지막 해인 2008년에 꼴찌로 시즌을 끝내며 감독 생활을 아쉽게 마무리지었지만[39] 그럼에도 그 동안의 업적들이 워낙 크다 보니 평가가 변하진 않았다.
현재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구단 회장과 NPB 커미셔너 특별고문으로 있다. 그리고 소프트뱅크 구단의 프런트 수장으로서 2010년대 최강팀으로 군림한 소프트뱅크 왕조를 이룩함으로써 선수, 감독, 프런트로서 모두 성공한 거의 유일한 야구인이 되었다. 현재도 드래프트 현장에 직접 참여하며 왕성히 활동 중이다.
5.1. 초대 WBC 우승 감독
WBC 1회 대회 때 일본 감독을 역임하여 일본을 WBC 초대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WBC 1회 대회 감독 지명 당시 상당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고, '대만인에게 일본팀의 감독을 맡길 수 없다'라는 비판도 들었지만 결국 우승을 해냈고, 요미우리 시절 동료였고 동갑내기 절친인 장훈은 "지금까지 왕짱(애칭)을[40] 비웃은 바보들은 전부 머리를 밀고 사죄하라!"라는 명언 아닌 명언을 남겼다.(사실 장훈 옹은 다이에 호크스의 3년 리빌딩 시절 때 이 말을 처음 했다.)6. 통산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84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30 | 67 | 54 | 9 | 3위 | - |
1985 | 130 | 61 | 60 | 9 | 3위 | - | |
1986 | 130 | 75 | 48 | 7 | 2위 | - | |
1987 | 130 | 76 | 43 | 11 | 우승 | 일본시리즈 패배 | |
1988 | 130 | 68 | 59 | 3 | 2위 | - | |
통산 | 650 | 347 | 264 | 39 | 0.568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95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130 | 54 | 72 | 4 | 5위 | - |
1996 | 130 | 54 | 74 | 2 | 6위 | - | |
1997 | 135 | 63 | 71 | 1 | 4위 | - | |
1998 | 135 | 67 | 67 | 1 | 3위[41] | - | |
1999 | 135 | 78 | 54 | 3 | 우승 | 일본시리즈 우승 | |
2000 | 135 | 73 | 60 | 2 | 우승 | 일본시리즈 패배 | |
2001 | 140 | 76 | 63 | 1 | 2위 | - | |
2002 | 140 | 73 | 65 | 2 | 2위 | - | |
2003 | 140 | 82 | 55 | 3 | 1위 | 일본시리즈 우승 | |
2004 | 133 | 77 | 52 | 4 | 2위[A] | PO 제2스테이지 패배 | |
2005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136 | 89 | 45 | 2 | 2위[A] | PO 제2스테이지 패배 |
2006 | 81[44] | 45 | 34 | 2 | 3위 | PO 제2스테이지 패배 | |
2007 | 144 | 73 | 66 | 5 | 3위 | CS 제1스테이지 패배 | |
2008 | 143[45] | 64 | 76 | 3 | 6위 | - | |
<colbgcolor=#ffea92> 통산 | 1857 | 968 | 854 | 35 | 0.531 | ||
총계 | 2507 | 1315 | 1118 | 74 | 0.540 |
7. 플레이 스타일
앞서 말했듯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 외다리타법으로 유명하며 한때 이승엽의 주 타법이였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외다리 타법으로 스타일을 바꾼 것은 일반적인 타격폼으로는 프로에서 투수들이 던지는 공에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워서 투수가 투구를 시작할 때부터 바로 공을 때려낼 수 있는 자세에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고 한다. 다만 이 자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축이되는 왼쪽 다리만으로 투수의 투구동작 내내 온 몸의 하중을 버텨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자세는 아니라는 점에서 타고난 신체조건과 특유의 타격폼을 유지하기 위한 본인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1루수로서의 수비능력 역시 리그 최고. 시즌 수비기회 연속 무실책 991회(1980년 4월 25일~10월 10일)를 기록, 1루수로서의 센트럴 리그 기록을 기록할 정도였다.[46] 1972년 골든글러브(당시 명칭은 '다이아몬드 글러브')가 처음 생긴 이래로 은퇴하는 1980년까지 9년 연속으로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47] 다만 이와는 별개로 일본프로야구 1루수 최다 실책 보유자(165개)이기도 한데, 수비가 나빴다는 증거가 아니라 주전으로 활약한 기간이 길었다 보니 그만큼 누적이 많이 쌓인 것이다.
8. 시즌 55홈런 저지 논란
그의 '한 시즌 55홈런' 기록 등 워낙 일본 야구계에 남긴 영향이 크다 보니, 이 기록을 경신하려는 선수, 특히 외국인 선수에게는 여러가지 불이익이 있었다. 일본 야구계 일각에서조차 오 사다하루의 기록이 이런 식으로 유지되는 것을 두고 일본 자민당의 장기집권 체제인 55년 체제를 본떠 "55호 체제"라 불렀을 정도였다. 대표적인 피해자로는 한신 타이거스의 랜디 바스, 긴테쓰의 터피 로즈, 세이부의 알렉스 카브레라 등이 있다. 특히 랜디 바스는 1985년 시즌 2경기를 남겨두고 55개에 1개 모자란 54홈런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하필 그 2경기의 상대가 오 사다하루가 이끄는 요미우리라 노골적인 견제를 받으며 55홈런 달성에 실패하였다.[48]2013년 오랜만에 그의 기록에 도전한 이가 등장했는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그 주인공으로 8월달 월간 18홈런을 쳐내면서 이미 30경기 넘게 남은 시점에서 50홈런을 돌파했다. 더불어 9월 15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홈경기에서 56호와 57호 연타석홈런을 작렬시키면서 오 사다하루 기록은 49년만에, 이승엽의 아시아 기록은 10년만에 모두 갈아치웠다. 그리고 60호 홈런까지 치면서 아시아 처음으로 60홈런에 도달했다. 위에 열거한 사례들에서처럼, 2013년에 기록을 달성할 즈음 발렌틴을 상대하는 투수들이 그에게 볼넷만 주는 등 홈런을 칠 빌미를 주질 않자 국내 야구 팬덤에서도 "그따위 기록 하나가 신성하다고 볼로 보내버리냐"는 악평을 많이 들었다. 이 당시 국내외적으로 쓴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그에 대해 모 구단 투수코치가 기록을 빼고 생각해도 타율이 .340에 OPS가 1.200 이상인 타자한테 정면승부가 먹혀들겠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박으로 비난을 잠재웠다.[49]
발렌틴 이후로도 비외국인 선수로서[50] 사상 최다 시즌 홈런 기록은 계속해서 유지되어 왔으나 2022년 10월 3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무라카미 무네타카가 시즌 56호 홈런을 쏘아올리며 오랫 동안 유지되어 왔던 시즌 홈런 1위 기록은 58년 만에 마침내 완전히 종언을 고했다.
9. 기타
- V9의 주축타자답게 일본시리즈 통산 홈런 1위 등 여러 기록을 썼으나 정작 일본시리즈 MVP는 단 한 번도 수상한 적이 없었고 우수선수상도 1963년에 딱 1번 수상했다. 다만 1979년까진 일본시리즈에서 우수선수상 이외에도 타격상, 기능상 등 다양한 상[51]을 시상했는데 이 중 타격상을 1번(1972), 기능상을 6번(1965~66, 1968, 1970~71, 1973) 수상했다.
- 역시 일본 야구계의 대스타였던 장훈과는 매우 친한 사이다. 같은 1940년생에 프로 데뷔 동기(1959년)이고 여기에 프로 데뷔 전부터 많은 구단의 스카우트 표적이 된 것과 국적 문제 등의 공통점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쪽의 하리모토 이사오(장훈), 동쪽의 오 사다하루'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주목받았으며 잡지를 통해 오의 존재를 알게 된 장훈은 오를 라이벌로 삼았다. 장훈은 '오와 내가 다른 건 계약금과 월봉 뿐'이라고 생각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프로 데뷔 시절부터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친분을 쌓아 현재까지도 절친한 관계라고 한다.[52] 오가 선수 시절 딱 한번 요미우리 구단에 대든 적이 있는데, 1979년 시즌 종료 후 열린 납회식에서 3,000안타를 눈 앞에 둔 상황에서 롯데 오리온즈로 트레이드되는 것이 확정된 장훈이 구단 오너인 쇼리키 토오루[53]에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고 인사하자 오가 곧바로 "하리모토(장훈)가 쿄진에서 3,000안타를 칠 수 있게 해주십시오!"고 구단주에게 직소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미 롯데와도 합의된 사안을 뒤엎자는 소리를 듣자 쇼리키는 "자네 술 취했나?"라며 불쾌해했는데, 그러자 장훈이 오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이제 쿄진에서 내가 할 몫은 없다. 롯데로 가겠다"라고 말하면서 사태를 일단락지었다. 이런 깊은 인연 덕택인지, 오가 팬들의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실시한 리빌딩이 성공해 호크스가 1999년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하자 장훈은 지상파 방송에 출연해 "그동안 왕짱(애칭)을[54] 욕한 놈들은 모두 머리를 밀고 사죄해라!"라고 대차게 일갈했다고 한다.
- 1977년에 신설된 국민영예상의 초대 수상자다. 2020년까지 26명, 1개 단체 밖에 받지 못 한 문화/스포츠 관련 최고 등급의 상훈인만큼 일본의 국민적 영웅[55]으로 인정받았다.
- 그런 스타인 만큼 그에 대한 기사도 많고 방송출연, 책 등 미디어 활동도 활발했으며 광고도 많이 찍었다.
- 1994년 일본야구전당에 헌액되었고, 2015년 1월에는 대만 야구 명예의 전당(臺灣棒球名人堂)의 2번째 헌액자로 선정되었다.
- 2010년 7월 3일 후쿠오카 돔에 '오 사다하루 베이스볼 뮤지엄'이 개관했다. 현역 시절 쓰던 유니폼 등의 도구들이나[56] 수상받은 각종 트로피 및 상패 등이 전시되어 있으니 만약 후쿠오카 돔에 갔다가 시간이 남으면 한번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입장료도 1천엔으로 크게 비싸지는 않다.
-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좌완투수 중 하나인 스티브 칼튼의 각성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1968년 당시 칼튼이 소속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일본 선발팀과의 경기에서 오 사다하루와 칼튼이 맞붙었는데, 오가 홈런을 치자 칼튼은 다음 타석에서 그를 위협하려고 처음으로 몸쪽 슬라이더를 던져 봤다고 한다. 이때 오 사다하루가 어깨 쪽으로 날아오는 슬라이더를 보고 몸을 뒤로 피했는데 공의 궤적이 휙 변해 스트라이크 존에 꽂히는 걸 본 칼튼은 '내가 멋진 슬라이더를 가졌구나'라고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고 이후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트레이드로 이적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다.
- 요미우리 감독 시절에 주니치 드래곤즈와 벤치 클리어링이 잦았는데, 카리스마로 유명한 오 사다하루였지만 당시 성질머리로는 야구계 제일로 소문났던 주니치 감독 호시노 센이치가 오 사다하루 앞에서 주먹을 쥐어보이며 '저랑 맞짱뜨실 생각입니까?'란 식으로 도발을 하자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도 해서 당시 팬들이 조금 실망했다는 카더라도 있었다. 실제 상황을 설명하자면 <돌격!! 크로마티 고교>의
무단도용모티브로 유명한 요미우리의 워렌 크로마티가 빈볼을 맞자 빈볼을 던진 상대 투수 미야시타 마사미를 주먹으로 가격했고[57], 벤클이 터지자 호시노가 오 사다하루에게 주먹을 쥔 제스쳐를 취하며 "아무리 그래도 투수를 주먹으로 때리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항의한 게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생전에 극렬한 안티 요미우리 이미지로 유명했던 호시노였으나 나가시마 시게오나 오 사다하루 같은 대선배들에겐 굉장히 깍듯했다.
- 홈런을 치고도 절대로 세레머니를 하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때 홈런을 치고 환호하던 사다하루의 모습을 지켜본 형 테츠히로(鉄城)가 “홈런을 맞은 상대방의 심정을 생각해 봐라"라고 꾸짖었고 그 꾸짖음에 느끼는 바가 있었기에 그 이후로 세레머니를 자제했다고 한다. 그러나 딱 한 번, 행크 애런의 통산 홈런 기록을 경신하는 756호 홈런을 쳤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환호를 했다고 한다. 현역 시절 항목의 두 팔을 벌리고 웃으면서 홈으로 들어오는 사진이 바로 그 환호다.
- 팬서비스에 가장 충실했던 선수로도 꼽힌다. 현역 시절에도 팬들의 요청에 인상을 찌푸린 적이 없었으며, 팀 동료였던 도이 쇼조는 "오가 사인을 안하고 연습만 했으면 1000홈런 이상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사인도 성실하게 하고 홈런도 성실하게 쳐서 기록과 기억 모두 가져간 남자가 됐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또 다른 일화로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을 맡을 당시 신인 시절의 코쿠보 히로키가 팬들의 사인 요구에 힘들다며 "경기 전에는 악수나 사인 요청을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오 사다하루가 "바보 같은 녀석, 너에게 부탁하는 팬의 용기를 생각해라!"라고 불호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어릴 때 코라쿠엔 구장 앞에서 퇴근하는 쿄진 선수들에게 싸인을 요구했는데, 다른 선수들은 본 척도 안하고 지나갔으나, 요나미네 카나메 선수가 미소를 띄며 싸인을 해 주었고, 이 요나미네를 보고 감명을 받아 나중에 스타가 되면 웬만해선 팬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잘 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고령인 현재도 팬들의 사인 요청에는 기분 좋게 응하지만 최근 유명인의 사인을 받아서 인터넷 경매에 내놓는 세태를 의식한 듯 사인을 하면서 "난 (현역 시절부터) 하도 사인을 많이 해서 내 친필 사인이라고 해도 워낙 흔하기 때문에 인터넷 경매에 내놔봐야 1엔의 가치도 없단다."라고 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박용택이 이 분을 벤치마킹 한 모양이다
- 아직도 입만 떼면 현역들의 나약함을 까면서 "우리 때 선수들이 더 대단했다"면서 "너희들 중에 오처럼 통산 800홈런 칠 수 있는 선수 있어?", "우리가 현역 때 기량이면 지금 현역 너희들하고 붙어도 다 쳐바름"이라고 주장해대는 NPB의 원로급 및 올드비
꼰대들이 꽤 있는 데에 대해 정작 본인은 "그 때와 지금은 구장의 크기도 달라지고 야구 수준에 차이가 있다. 현역 때의 내가 그 모습 그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에 온다면 그 때처럼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인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면서 현대의 야구가 발전해 있음을 인정하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다만 "그 때와 지금은 경제력, 장비, 시설, 기술, 훈련법 등 모든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만큼 소년 시절부터 지금 시대의 영양 섭취, 훈련법, 야구 이론 공부 등으로 내가 트레이닝을 한다면 지금 현역들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충분히 그런 자신감을 가질 만한 스펙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고, 감독-회장으로 구단 업무 현업에 오랜 기간 종사하며 야구의 발전상을 세밀하게 지켜본 위치에 있는만큼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당시 야구의 국제교류가 거의 없던 시절이지만 각종 국제대회나 올스타전에 1타로 선발된 덕에 스프링캠프, 친선전 등을 포함해 공식기록으로만 통산 110경기 338타석이나 미국과 시합을 했다. 이정도면 1시즌의 2/3 정도의 기록. 이 338타석에서 25홈런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풀타임을 뛰면 40홈런도 가능하단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상대한 미국도 선수들의 수준도 높아서 폄하할 기록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은 미일 친선경기가 주로 메이저리거들의 일본 원정으로 치러지다보니 구장 크기가 작은 일본 야구장에서 경기가 벌어졌고, 오 사다하루는 당시에 압축배트를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의 수준을 폄하할 이유는 없지만 미일 친선경기의 활약만 보고 그가 메이저리그에 갔었어도 거기서 홈런왕 경쟁을 할 수 있었으리라 보기는 힘들다. 미국이 지금은 (특히 내구성에 민감한 투수들은) 마이너리거나 내보내지만 당시는 야구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국제교류 자체가 드물어 겸사겸사 해외여행도 가 볼수 있는 기회고 하다 보니 에이스들도 많이 가서 돈 드라이스데일, 톰 시버 등등 당대 MLB 레전드 투수들을 상대로 낸 기록. 덕분에 당시엔 미국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일본 야구선수였다.
- 톰 시버가 평하기를 메이저리그에 와도 25~30홈런은 칠 만한 타자라고 평했고. 다른 투수들도 공통적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할 타자라며 왕을 추켜세웠다. 별로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6,70년대 메이저리그는 극심한 투고타저여서 저 정도 성적이면 충분히 슬러거로 인정할 수 있다.[58]
- 선수 시절 요미우리에서는 유일한 도쿄 토박이였다.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에 있는 와세다 실업고를 나왔을 정도. 다이에로 안 갔으면 요미우리에서만 선수, 코칭 스탭을 보낸 자이언츠 맨으로 남을 수 있었다.
- 파랜드 스토리 6에 등장하는 허그의 최종무기가 오즈 배트(Oh's bat)인데 그 오가 바로 이 오 사다하루이다.
- 그의 이름을 딴 소행성도 있다.(61189 Ohsadaharu)
- 높은 성의 사나이(드라마)에서도 라디오 뉴스에서 언급된다. 이 세계관에서도 슈퍼대스타인 것은 같은 모양이다.
- 1966년에 결혼해서 딸 셋을 낳았고 첫 부인이 2001년에 사망했는데 이듬해에 누군가가 첫 부인의 유골을 훔친 후에 다이에 구단에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한 사건이 있었다. 구단과 오 모두 이 협박에 단호히 거절하면서 유골을 결국 돌려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018년에 후쿠오카의 고급 식당 여주인이랑 재혼했는데, 호크스 감독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고 한다.
- 딸 3명의 이름에 모두 理(다스릴 리)자가 들어가 있다. 부부별성을 채택하는 대한민국, 중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여성이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르기 때문에, 결혼해서 성씨가 바뀌어도 오(王) 가문의 피를 이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里에 王을 붙인 理를 붙였다고 한다.
- 2020 도쿄 올림픽 개막식에 선수시절 요미우리를 함께 이끈 나가시마 시게오, 후배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성화 봉송자로 나섰다. 80이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마쓰이의 부축을 받고 이동해야할 정도로 거동이 힘든 나가시마와는 다르게 상당히 건장한 모습으로 나왔다.[59]
- 중화민국 훈장을 두 차례 수여받은 바 있다. 그는 엄밀히 말하면 대만 출신이 아니지만 대만(중화민국) 국적자로써 타이중, 타이난, 가오슝의 명예시민으로 예우받고 있다. 신주 시립 야구장은 건립 당시 신주 현립 왕정치 야구장으로 정식 명명될 계획이었으며[60], 1991년 이래 왕정치배 전국청소년야구대회가 개최되는 등 대만에서도 꽤 존경 받는 야구인이다.
- 2024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오 사다하루 데이에서 친구인 장훈과 같이 도쿄돔에 나왔는데 많이 핼쑥해진 모습으로 우려를 샀던 장훈과는 달리 건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 괴짜가족에서 숫자 1을 경렬히 사랑하는 인물인 난바 완 캐릭터로 패러디 되었다.
- 2025년 6월 3일 나가시마 시게오가 사망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결번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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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1년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에는 조감독이었다.[2] 표준중국어 병음으로는 Wáng Zhēnzhì. 한국 한자음으로는 왕정치.[3] 이건 호적상 생일이고 실제 생일은 열흘 빠르다고 한다.[4]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과는 별개로 아버지가 중화민국 국적 보유자였기 때문에 그 역시 아버지를 따라서 중화민국 국적을 받았다. 국공내전 이후로는 중화민국의 영역이 대만과 일부 도서로 축소됨에 따라 중화민국 국적자를 대만인으로 호칭하나 국공내전 이전에 중화민국 국적을 갖고 해외로 이주한 경우엔 '중국 = 중화민국'으로 인식하여 자신을 대만인이라고 여기지 않고 중국인으로 여긴다. 오 사다하루 역시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한다고 WBC 출정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5] 입단 당시엔 투수였으나 프로에 입문하자마자 바로 타자로 전향했다.[6] 원래 좌투우타였다가 학창시절 좌투좌타로 전향. 우타석에서 쳤던 이유는 오른손잡이로 강제 교정을 시키던 아버지에게 혼날까봐라는 뒷이야기가 있다.[7]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8] 혹자는 오 사다하루를 홈런 기록을 세웠고 NPB를 바꾼 대스타이며 동시에 리그 최고의 명문팀을 왕조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베이브 루스와 비견하며 경쟁력있는 성적에도 불구하고 일찍 은퇴하고, 선수 시절 엄청난 스타성을 가지며 일본 대중문화의 상징이 된 나가시마 시게오를 조 디마지오에 비견하기도 한다. 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 시게오 모두 요미우리 선수이며, 루스와 디마지오 모두 양키스 선수라는 점도 비슷하다. 단, 요미우리의 오 사다하루가 나가시마 시게오보다 살짝 더 후배이지만, 양키스의 루스는 디 마지오보다 까마득한 선배이다.[9] 2차대전 당시에는 집안 전체가 토즈미 성을 칭하기도 했다.[10] 10살 터울의 형인 테츠히로는 게이오기주쿠대학으로 진학해 의사가 되었다. 2008년 사망.[11] 절친 장훈의 1990년대 인터뷰에 의하면 오 사다하루에게 귀화압력이 상당했으나, 그는 이를 모두 거부했고, 영주권 취득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무언가의 재류자격을 갱신해가며 일본에 거주한다고 한다.(영주자의 하위호환인 정주자일 가능성이 농후)[12] 아라카와와의 인연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는데 아라카와가 마이니치 오리온즈 소속 선수시절 중학생이던 오 사다하루가 왼손잡이임에도 우타석에서 치는걸 보고 좌타석으로 바꾸길 권유하기도 했다. 오 사다하루 이전의 제자는 에노모토 키하치가 있다.[13] 오 사다하루의 관련 사진을 찾아보면 방 안에서 진검을 휘둘러 아라카와 코치가 떨어뜨려 주는 종이를 베는 훈련을 하는 이미지도 있다.[14] 1968~70, 1973~74.[15] 일본프로야구 최다 기록이며 1962년부터 1974년까지[16] 일본프로야구 최다 기록. 1971년부터 1978년까지[17] 1973~74. 특이 사항으로 이 두 시즌 모두 단일시즌 출루율 5할-장타율 7할-OPS 1.250을 넘겼으며 특히 1974년에 기록한 OPS 1.293, 158볼넷, 고의사구 45개는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 기록이다.[18]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통산 홈런 1위는 배리 본즈지만 금지약물을 복용했기 때문에 기록 자체를 공식적으로 부정하진 않지만 사실상 인정해주진 않는다. 그 점을 제외해도 배리 본즈의 통산 홈런 기록도 762개로, 868개를 친 오 사다하루와 무려 100개 넘게 차이난다.[19] 두 나라 야구의 격차가 어느 정도 줄어든 지금은 미국에서도 미일 통산 기록을 쳐주기는 하지만(마츠이 히데키의 500홈런, 스즈키 이치로의 4000안타라든지) 그건 그 선수가 그만큼 야구를 오래했다는 것을 인정하는거지 일본 야구가 미국 야구와 대등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20] 1978년 10월 말에 신시내티 레즈가 일본 원정을 가서 오 사다하루, 장훈 등이 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일본 올스타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다른 구단의 혼성팀 등과 17경기를 개최해 14승 2패 1무를 기록했는데, 이때 신시내티의 스파키 앤더슨 감독은 일본의 최강 구단이 메이저리그에 온다면 소속 지구(당시 메이저리그는 양대리그 모두 12개 구단/동, 서부 지구 각각 6구단 체제였다.)에서 4위나 5위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으며 자기 팀의 조지 포스터나 자니 벤치가 일본에서 뛴다면 일본 야구장은 펜스 거리가 매우 짧기 때문에 60~65홈런을 칠 수 있고 어쩌면 70홈런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당시 신시내티는 28개의 홈런을 친 반면 일본 팀들은 11개의 홈런을 치며 미국 야구와 일본 야구 사이에 파워의 격차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는데, 오 사다하루도 홈런 2개에 그치며 리그에서의 위력을 그다지 발휘하지 못했다. 오는 최종전을 앞두고 스파키 앤더슨을 찾아가 자신의 부진한 퍼포먼스에 대해 사과하며 자신이 3월부터 매 경기마다 휴식 없이 출장하다 보니 지친 상태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21] 뒤의 공중부양하는 인물은 장훈. 스즈키 이치로가 완벽한 점프라며 좋아하는 사진으로도 유명하다.출처[22]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야쿠르트 스왈로즈,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뛰며 통산 81승 54패 52세이브 548탈삼진 평균자책점 3.68을 기록했으며, 1984년과 1985년엔 2년 연속으로 퍼시픽 리그 최다 세이브를 기록했다.(다만 당시 구원왕 수상 기준이 세이브 포인트였기 때문에 구원승이 적어서 타이틀 수상엔 실패했다.) 이 시즌엔 상술한 756호 홈런을 맞고 곧바로 강판당해 패전투수가 되기도 했지만 팀을 구단 사상 첫 리그 2위로 이끌며 14승 9패, 72탈삼진, 방어율 3.67의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23] 1974년 행크 아론의 성적은 20홈런 타율 .268/출루율 .341/장타율 .491로, 나이를 감안하면 꽤 준수하긴 했지만 40홈런을 밥먹듯 때리던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24] 다만 당시 일본프로야구의 홈구장들은 코라쿠엔 구장만큼은 아니어도 그라운드가 작았던 야구장들이 많았다. 아래의 오 사다하루와 다른 선수들의 통산 홈런 기록에서 볼 때, 이는 당시 리그의 선수들이 대체적으로 지금에 와서는 지극히 좁아보이는 규모의 그라운드도 넘기기 힘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통산 400승을 달성한 카네다 마사이치의 기록이 미국에서도 인정받았던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작은 야구장에서 선수생활을 했단 점도 있다.[25] 배트를 갈라 속을 파내고 대나무 코어를 집어넣고는 다시 붙여 만든 압축 배트. 이 때문에 이후 일본 야구에서 자주 대나무 압축 배트를 볼 수 있었다.[26] 다만 이건 프로야구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아마야구 국제대회는 당시에도 수시로 열렸다. 또 아마야구에서는 미국이 독보적인 세계 최강도 아니었다. 프로야구는 서로 교류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낀 것.[27] 역대 2위인 노무라 카츠야(657홈런)와 200개 이상 차이난다. 여담으로 현역 마지막 홈런을 허용한 선수가 훗날 KIA 타이거스 투수코치를 역임한 칸베 토시오다.[28] 일본시리즈 29개, 올스타전 13개, 미일 올스타전 23개, 시범 경기 93개[29] 통산 장타율, OPS 모두 일본프로야구 역대 1위이다.[30] 영구결번 자체는 오가 감독에서 물러난 직후인 1989년에 지정되었다.[31] 참고로 한국 선수 중 통산 최다 통합 루타수는 이승엽의 5394루타다.[32] 당시 요미우리는 후지타 감독, 오 수석코치와 V9 당시 카와카미의 참모로 활약한 마키노 시게루 수석코치 체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3명의 실권자가 있다 하여 삼두정치라 불렸는데, 1983년 시즌 종료 후 후지타가 오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고 마키노도 지병인 방광암이 악화되어 수석코치를 사임하면서(마키노는 이듬해인 1984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 체제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이 감독-조감독-수석코치 체제는 오가 다이에 감독을 역임하던 1998~2000년에도 오 감독, 쿠로에 유키노부 조감독, 코가 히데히코 수석 겸 투수코치 체제로 재현되기도 했다.[33] V9을 이끈 카와카미 테츠하루가 용퇴하고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으로 취임한 1975년에 요미우리는 구단 사상 처음으로 최하위로 추락하는 굴욕을 겪었고, 다음 해인 1976부터 2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최하위의 굴욕을 어느 정도 만회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선 과거 V9의 단골 상대였던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2번 모두 패퇴한 데 이어 그 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같이 리그에서 약체로 평가받던 구단들이 강팀으로 도약하며 리그 우승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결국 팬들의 지지를 받던 나가시마를 해임시키고 후지타 모토시를 신임 감독으로 취임시키는 강수를 둔 1981년에 닛폰햄 파이터즈와 맞붙어 V9 이후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으나, 그 이후엔 일본시리즈에 나갈 때마다 퍼시픽리그를 넘어 1980년대 일본프로야구를 상징하는 강호로 도약한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번번히 패퇴하는 바람에 코칭스태프들이 그만큼 더욱 구단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34] 일본시리즈에선 함께 요미우리의 V9을 이끌었던 모리 마사아키가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2승 4패로 패배했다. 여담으로 이 해 일본시리즈 5차전은 코라쿠엔 구장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경기였다.[35] 여담으로 감독 퇴임 당시 요미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서 "감독이 사임한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사실상 오의 자진 사임을 압박한 데 이어 후임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던 후지타 모토시까지 미리 발표하는 짓을 저질렀다. 퇴임이 확실하긴 했어도 시즌이 채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런 식으로 차기 인선을 발표한 것이 아직 현직 감독인 오에게 얼마나 실례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하필 차기 감독이 이미 1기 감독 시절 나가시마 해임 건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뤘던 그 후지타였다 보니 팬들도 "나가시마에 맞먹는 레전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비난했지만 구단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36] 사실 1992년에 닛폰햄 파이터즈의 감독 취임 제안을 받았으나, 당시 후지타 모토시 감독의 경질설이 돌자 요미우리 감독 복귀를 염두에 두고 거절했다.(결국 닛폰햄은 오사와 케이지를 감독직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오 사다하루가 요미우리 감독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고, 결국 3년 뒤인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 취임을 선택하며 요미우리 원클럽맨을 넘어 팀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자신의 지위를 버리게 된다.[37] 여기에 위에 얘기한 감독 사퇴 및 선임과정서 벌여놓은 요미우리의 무례를 얘기하며 오 사다하루를 자극했다는 얘기도 있다. 둘은 2000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와 다이에의 감독으로서 정면대결해 ON 시리즈를 실현시켰으며, 이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가 우승했다. 2001년 시즌 종료 후 나가시마가 '종신 명예감독'으로 감독직을 은퇴하고 하라 타츠노리가 요미우리의 감독이 되며 ON은 다시 맞붙지 못하게 되었다.[38] 대표적으로 1996년 5월 9일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일본생명 구장 원정 경기에서 패배한 직후 연패에 분노한 팬들이 버스에 날계란을 투척한 사건이 있다. 자세한 것은 일본생명 구장 항목 참고.[39] 8월 종료 시점에서 리그 2위를 차지했으나 시즌 막판인 9월 한 달 동안 분위기를 잘못 타는 바람에 연패를 거듭해서 꼴찌로 추락했다. 무엇보다 이때는 위에도 나와있지만 고령에 위암 수술 후 건강 악화가 겹쳐 감독 일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40] 'ワンちゃん.' 王의 원어 발음에서 따온 별명으로, 통상적인 뜻으로 멍멍이다(...).[41]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공동 3위.[A] 정규시즌 순위는 1위였지만 플레이오프에서 2위 팀에게(2004: 세이부/2005: 롯데) 패퇴하면서 플레이오프 승리팀을 리그 우승팀으로 간주하는 규정에 따라 순위가 강등되었다.[A] [44] 암 치료로 인해 55경기 결장[45] 컨디션 저하로 인해 1경기 결장[46] 이기록도 2009년 같은 요미우리 직속후배인 이승엽이 깨버렸다.[47] 여담으로 센트럴리그 1루수 골든 글러브는 오 사다하루 이래로 한신 타이거스의 후지타 타이라, 짐 파치올렉이 각각 1981년과 1992년에 수상한 것을 빼면 1993년까지 오를 포함해 나카하타 키요시(1982~88, 통산/연속 7회), 코마다 노리히로(1989~91, 1993~1999로 통산 10회) 3명의 요미우리 주전 1루수들이 독점하다시피 수상했다. 코마다는 1993년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한 이후에도 1999년까지 계속해서 1루 골든글러브를 독점했다.[48] 오 사다하루는 투수들이 랜디 바스와 정면 대결을 할 시 1구당 10만엔이라는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리겠다고 하였다.[49] 과거 KBO리그의 홈런왕 장종훈 역시 비슷한 일화를 남겼다. 당시 타율1위/홈런1위/타점1위/장타율1위에 출루율 리그 2위를 달리고 있던 장종훈 상대로 상대팀 투수들이 계속 볼질을 하자 팬들의 비난이 나왔는데, 모 코치진 역시 이에 대해 "그럼 어디다 던지라고?"라며 항변했었다.[50] 오 사다하루는 중화민국 국적을 계속 보유 중이지만 그는 일본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나왔기 때문에 일본 프로야구의 규정에 따라 외국인 쿼터에 포함되지 않고 일본 국적 선수와 동등한 취급을 받는다. 이러한 로컬 룰은 이후 J리그 등 일본 내 다른 프로리그에도 적용 되었다.[51] 1980년 일본시리즈부터 전부 우수선수상으로 일체화되었다.[52] 오 사다하루가 장훈의 히로시마 집에 놀러와서는 장훈의 어머니가 끓여준 수제비를 먹고 목욕까지 한 뒤에 자고 간 적이 있다고 한다.[53] 요미우리신문 창업자 쇼리키 마츠타로의 장남.[54] ワンちゃん. 일본어 위키 항목의 메인에도 걸려있는 별명으로 성씨인 王의 원어 발음에서 따온 별명인데, 다른 뜻으로 멍멍이가 있다.[55]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았지만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를 대만인/중국인이라 여기지 않는다. 바비 발렌타인이 2005년 일본시리즈를 우승했을 때 최초의 외국인 감독의 우승이라 말했을 정도.[56] 행크 애런의 기록을 넘기는 756호 홈런을 쳤을 때 사용한 방망이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57] 크로마티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 둘은 훗날 방송에서 화해했고 미야시타 본인이 운영하는 가게 홈페이지에도 자기 소개란에 벤클 당시의 영상을 걸어놨다(...)[58] 장훈도 '우리 시대 때 메이저 리그에 통할 사람은 왕정치밖에 없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59] 다만 나가시마는 오 사다하루보다 4살 더 많은 걸 감안해야 한다.[60] 하지만 총통 장제스가 사망하면서 추모의 의미로 타오위안 국제공항 등 개장 직전이었던 각종 시설의 명칭이 중정으로 변경되면서, 이 때 개장한 야구장도 중정야구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