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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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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하성군 시절3. 즉위4. 목릉성세(穆陵盛世)5. 종계변무와 기축옥사6. 임진왜란 시기7. 후계 문제8. 대여진 정책(여진 정벌)9. 목릉


1. 개요

조선의 제14대 국왕 선조의 생애를 설명하는 문서.

2. 하성군 시절

1552년(명종 7) 11월 11일 한성부 인달방에서 덕흥군하동군부인의 3남으로 태어났다. 하동군에서 따와 하성군이 되었다. 하성군이 태어난 도정궁은 덕흥군이 어린 시절 부왕 중종에게서 하사받은 집인데 터가 안 좋다는 말을 들었는지 공사가 끝나가던 즈음 우물물이 안 나온다는 핑계를 대면서 집을 바꿔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중종은 우물이 잘 나오는데 별말을 다한다며 무시하고 집을 마저 지었다. 나쁜 터인 줄 알았더니 미래의 왕이 태어난 것이다.[1] 다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나쁜 터인 건 맞는데 이후 나라가 뒤집어 까졌다.

덕흥군은 하성군이 8살이 되기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하성군은 숙부인 명종의 지시로 중종의 장남이자 서백부인 복성군의 양자로 들어간다.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이유도 있어 사망한 덕흥군을 대신하여 조카 3형제에게 많은 정을 주어 자주 궁궐로 불렀는데 특히 하성군을 총애하였다. 광해군일기선조 행장에 따르면 명종이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을 궁궐로 불러 익선관을 벗고 조카들에게 써보라고 하자 나머지 둘은 명종이 권하는 대로 별 생각없이 써보았는데 하성군만 국왕만 쓸 수 있는 익선관을 어떻게 자신이 쓰겠냐면서 극구 사양하였다고 하며, 이에 감탄한 명종이 "이 관을 네게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화가 기록된 광해군일기의 선조 행장은 선조 즉위 이후의 기록이고 명종실록에 이 일화가 수록되지 않은 정황을 고려하면 주관적인 미화일 가능성도 있다.

1565년 9월 15일 명종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신하들은 후계자 지명을 서둘렀다. 의식이 없는 명종 앞에 신하들이 모여 영의정 이준경이 말을 꺼냈으나 명종은 대답이 없었다. 2일이 지난 17일에도 명종이 깨어나지 않자 신하들은 인순왕후와 후계자 문제를 논의했다. 인순왕후는 평소에 명종이 총애하던 하성군에게 간호를 맡겼다. 조선에서 왕의 간호는 세자의 업무이기에 이는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낙점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명종이 의식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나자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문제는 수면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명종도 후계자를 논한 행위를 문제삼지 않았다. 선조 시절에 정철광해군을 세자로 내세우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진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신하가 왕의 후계자를 택하는 것은 '택군'이라 하여 역모에 준하는 처벌이 내려지는 중범죄이다. 이준경의 건의를 책망하지 않고 넘어간 점이나 양자를 들이라는 상소를 올린 선비인 김택에게 벼슬을 준 점을 감안하면 명종은 하성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걸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히지만 명종이 진심으로 하성군을 후계자로 인정하였는데 공개적으로 지명하지 않은 것인지 하성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만 아직 자신의 나이가 많지 않으니 조금만 기다려서 중전에게 아들을 얻으면 세자로 삼고 그렇지 않을 때 하성군에게 물려주자는 차선책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조실록과 그 행장에는 1565년 병이 깊어진 명종이 하성군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고 하나 이렇게 중요한 내용이 명종실록에 없다는 점이 의심을 불러온 것이다. 후대의 추정으로는 하성군을 공식적인 후계자로 확정짓는 행위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에 암묵적으로만 동의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결국 명종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요절했으나 당시에 이를 미리 예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시 명종은 30대로 자식을 기대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에 하성군을 후계자로 선포한 뒤 명종이 아들을 낳으면 후계 문제는 심각하게 복잡해진다.

2년 후인 1567년 6월 28일 명종이 다시 위독해지자 인순왕후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내정한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인순왕후는 을축년의 일에 따라 덕흥군의 3남인 하성군으로 결정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하성군이 명종을 간호한 일을 말한다. 인순왕후도 당시의 일을 계기로 하성군이 후계자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도 인순왕후의 결정을 수용한 점을 감안하면 신하들 사이에서도 하성군이 적합하다는 생각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성군의 아버지인 덕흥군은 이미 고인이고 어머니인 하동군부인도 하성군이 즉위하기 1달 전에 사망했다. 게다가 하동군부인의 친정 역시 권세가 큰 가문이 아니고 아직 하성군도 혼인하지 않은 몸이므로 처가 문제도 없었으므로 척신들이 발호할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반감도 적었다. 그리고 하성군은 중종의 서장자인 복성군의 양자이다. 중종의 적자인 인종과 명종이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복성군의 양자가 서열상으로도 가장 높다. 복성군의 처가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지만 복성군의 아내도 이미 고인이어서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마땅한 선택지도 없었다. 중종의 손자 중에서 적자는 덕흥군이 낳은 3형제와 덕양군의 아들인 풍산군이 전부였다. 가장 많은 아들을 둔 해안군은 적자가 없고 서자만 두는 바람에 덕흥군은 하원군만 남겨두고 하릉군과 하성군을 이복형들의 양자로 보냈다. 이걸로도 모자라 금원군 슬하인 영양군과 봉성군은 3촌 조카가 아닌 5촌 종질들 중에서 양자를 들였다. 하원군은 덕흥군의 장남이고 풍산군은 덕양군의 장남이므로 양자로 데려올 수 없으므로 남은 후보군은 하릉군과 하성군이고 심지어 하릉군은 이 당시에 작위조차 하릉군이 아니었다.(명종 21년 8월 26일) 하성군을 중종의 막내아들인 덕흥군의 막내아들로만 인식하면 하성군이 범접하지 못할 자리에 올라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경쟁자가 적었고 조선의 종법을 감안하면 하성군에게 더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지 못한 상태로 즉위하기에 차라리 어린 후계자를 옹립해서 성년이 되기 전까지 군주의 역량을 기르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으니 선호되는 측면도 있었다. 세자로 책봉된 막내아들인 의안대군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도 하성군과 다르지 않은 상황으로 추정된다.

명종이 승하하자 하성군이 즉위하였다. 즉위가 끝나고 선조의 즉위에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 투서가 밀려들었는데 이준경이 이미 대행대왕(명종)께서 정한 일인데 무슨 공이냐고 반문하면서 투서를 모두 모아서 불태웠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선조는 경복궁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이 되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270년을 방치되었다가 고종의 치세에 수렴청정의 방식으로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각계의 반대와 원성에도 불구하고 복원했지만 정작 고종 본인이 스스로를 황제로 격상시켰음을 선포한 곳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이었고 고종의 아들인 순종도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에서 즉위하였다.

선조는 조선 최초로 왕의 서자의 혈통으로 왕이 되었다. 그동안 장남은 아니어도 왕비나 세자빈이 낳은 적자가 후계자에 올랐다. 성종은 삼촌인 예종보다 먼저 후계자로 지명된 의경세자의 아들이라 자신의 자리에 뒤늦게 오른 셈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삼촌인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을 무시할 수 없었으나 3살이라 너무 어려서 왕위는 성종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적통 문제를 따지면 성종에게 위험이 될 소지가 있어서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인수대비안순왕후보다 높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계유정난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세조중종도 원래 대군이었다. 적장자 출신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이 전부고 그마저도 연산군, 현종, 숙종을 제외하면 재위 기간이 10년 미만이다. 물론 선조도 서자는 아니고 엄연히 덕흥군의 적자이니 서자 출신인 왕은 광해군이 최초이다.

3. 즉위

선조는 왕이 되기 정말 어려운 위치였다. 선조의 부친인 덕흥군중종의 8남, 그것도 서자들 중 막내이며, 선조 자신은 덕흥군의 3남이자 막내였다. 그런데, 원래 명종이 9남으로서 막내아들이지만 왕비 소생이므로 적차남이라고 간주한다면, 단순히 중종의 막내아들인 덕흥군의 막내아들이라고 생각이라 계승권에서 가장 멀어보이지만 당시 중종의 손자들 중 적자는 덕흥군이 낳은 3형제와 덕양군의 적장자인 풍산군 이종린, 이 4명이 전부였다. 게다가 정통성이 있는 4명 중에서 하성군은 중종의 서장자인 복성군의 양자였기에 왕실 족보를 따지면 선조가 남은 왕손들 중 왕위 계승권이 제일 앞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선 역사에는 방계승통의 전례가 없었다. 성종의 경우 선대 왕 예종의 조카이기는 하지만 성종은 예종의 형이자 요절한 의경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방계승통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자리에 뒤늦게 올랐을 뿐이다.[2]

즉위 후 나이가 어려서 양모이자 법적으로 모후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인순왕후는 수렴을 단 1년 만에 그쳤다. 이를 보아 총명하다 할 만 했다. 즉위 초기에는 낭비를 줄이고 쇠락한 훈구파 대신 사림파를 끌어들여 부족한 정통성을 잡는 한편 명종 대에 외척의 전횡이 심했던 내정을 장악하고 조광조의 관례가 된 그간의 폐정을 회복시키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묘사화조광조가 밀려난 후 무시되었던 방납의 폐단을 비롯한 각종 사회모순 해결을 위해 민생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사림 세력들을 상호 견제시켜 정계를 장악했다.

즉위 2년 만인 1569년(선조 2년) 송영종의 예를 들어 아버지 덕흥군대원군으로,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했다. 그러나 바로 그 송 영종의 예 때문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키지는 못했다. 선조는 자신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자신의 맏형 하원군과 그 후손들을 정1품으로 세습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그런 예가 없다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3] 조선 예법상 덕흥군은 이젠 선조에게 종친 숙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후사로 왕위를 이었으므로 법적이나 종법상 아버지는 명종이었기 때문에 친부모라 하더라도 한낱 '군'에 불과한 덕흥군과 하동부대부인의 제사상에 절을 할 수도 없었다.[4] 실록에서 즉위 40년차에 다시 생부에 대한 추숭 떡밥이 여럿 나왔지만 별 논의 없이 무산되기도 한다.

다만 총명하였다고 할지라도 1567년 즉위 당시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그것도 왕위 계승자로서 제대로 된 후계자 수업도 없이 즉위하여 아직 제왕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면은 분명 있었다. 오랜 기간 왕조가 이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였으나 제대로 이를 고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명종의 후사(後嗣)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척신 집안의 일원인 대비 인순왕후의 지명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에 적어도 인순왕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4. 목릉성세(穆陵盛世)

즉위 직후 율곡 이이를 통해 심의겸인순왕후의 작은 아버지로 부패한 척신 심통원을 파직시키는 등 단호한 면모는 보였지만, 사림붕당이 크게 대두되면서 파당(동인VS서인) 갈등 문제도 새롭게 수면 위로 부각되었다.

무엇보다 사대부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명종 대에 역적으로 몰려 숙청된 윤임을 사면 복권시켰다. 그 이후 윤임의 5남 윤흥신이 무과에 급제해 다대포 첨사가 되었고, 그 윤흥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과 싸우다 부하들과 함께 부산 다대포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 시기의 치세는 선조의 능인 목릉을 따서 "목릉성세(穆陵盛世) 또는 "목릉지치(穆陵之治)"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사실 목릉성세는 한문학의 융성을 뜻하는 용어로 선조 이후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흥기했다는 사실에 바탕해서 나온 표현이다.[5] 따라서 엄밀히 말해 당대의 정치와 백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이전 시기에 비해서 민생이 확실히 나아졌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6] 무엇보다도 그것에 선조가 기여한 부분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명종 대의 사단칠정논변이 명종의 업적은 아니지 않은가? 민간주도 성격의 선조 대에 성리학 발전은 가령 흔히 정조의 업적으로 여겨지는 정부주도 성격의 정조 대에 문예부흥과 그 주체부터 다르다고 하겠다. 즉 인재들이 많았던 배경을 타고난 천운을 맞아서 그것에 무임승차한 셈이다.

5. 종계변무와 기축옥사

1588년 명나라 측에서 태조 이성계를 간신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대명회전을 마침내 제대로 고쳤다.[7] 사대를 했던 조선 왕실과 성리학 유학계의 너무나 오랜 숙원으로, 이른바 '종계변무'라고 한다.[8] 다만 학계의 평가[9]는 의외로 거의 혹평 일색에 가까운데 별 실리 없는 명분에 집착한 것에 불과했다는 대중적 평가와 의외로 통한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심지어는 한 술 더 떠서 여건이 어떻든 결국 <조훈조장(祖訓條章)> 기사 그 자체는 손도 못댔으니까 아예 실패했다는 견해까지도 있는 판국이다.[10] 자세한 내용은 종계변무 평가 문단을 참고하라.

정치 분야에서는 선조의 치세 때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어 격렬한 정치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덜 다듬어진 면이 있던 선조도 왕으로서 감각을 기른 중기 이후 상당한 정치적 수완으로 신하들을 편가르고 이용했다. 이러한 선조의 정치적 수완이 악용된 것을 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정철과 합작하여 몰아간 정여립의 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로 선조는 정언신, 김우옹, 이발, 백유양, 정개청, 최영경을 왕의 권력을 위협할 권신이나 국정을 농단하여 나라를 망칠 간신으로 생각하여 죽이거나 쫓아냈다. 사화라는 딱지가 붙진 않았으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동인계 유림이었고 피해 규모는 4대 사화를 합친 것보다 크며 친국을 자주 실시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실상 선조가 옥사를 주도한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11]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복종'하는 신하들은 많았으나 '충성'하는 신하들은 드물었으며, 이 점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에 대한 하극상이 일어난 점을 볼 때 선조가 정권 장악에 능했음은 사실이나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선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위 후 11년에 걸처 원상제와 비슷한 형태로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려 증폭시킨 공안 사건[C]이었고 실제 선조의 입김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이러한 방식은 생산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올바른 정치 기술이 아닌 정권 그 자체의 획득이 목적인 정치 술수 및 공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D]

가령 기축옥사의 주요 연루 인물이자 호남 사림을 이끌었던 정개청은 본인이 “권신이나 간신이 아니며 차라리 조정에서 들어와 관리를 생활한 다음 감옥에 가두는 것이 낫다”고 결백을 주장했으나 모진 고문으로 끝내 사망했다. 그의 자산서원은 추종자들에 의해 꾸준히 재건되었으나 효종숙종 때 반대파 서인 측에 의해 지속적으로 훼철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우득록>에 따르면 "남쪽 선비 중 곤재를 추종했다 하여 옥에 가둔 자가 50여 명, 귀양 보낸 자가 20여 명, 금고된 자가 400여 명이었다" 며 후폭풍이 굉장했음을 밝히는 내용도 있다. 자산서원의 훼철은 영조 때에도 있었다. 이들은 여러 대가 거듭되고도 서인의 경계 대상으로 찍혀 누명이 벗겨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옥사의 핵심 연루 인물들은 후대에도 괴로움을 겪었다. 이 옥사로 인해 사망한 사람만 수백명 가량으로 가히 조선 역사상 최대규모의 옥사라 할만했으며 정확히 백명이 죽었던 그 악명 높은 갑자사화의 몇 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옥사를 주도해 정적들을 제거한 정철 등 22명은 평난공신에 올라 권세를 떨쳤지만 <송강연보>에 따르면 정철은 오래지 않아 세자 책봉(건저 문제)과 관련해 류성룡이산해 등과 함께 광해군을 건저하려다가 정철만 제대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다. 선조는 정철에게 미운 털을 박기 무섭게 입장을 급선회하여 자신이 조정에서 관리로 추천받지 않으면서 권간이라는 이유로 옥사 당시에 희생된 최영경에 대해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정국도 반전되어 선조 후반기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당에 올라섰으며 이들은 서인의 처분 수위를 다루는 과정에서 남북으로 분당된다.

기축옥사는 그 규모면에서건 성격면에서건 오로지 선조를 위해서 자행된 조선 최대의 최악의 사법살인이라 할만하다. 정철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통념과는 달리 옥사 초반에는 추국장에 본인이 스스로 나서서 이발의 10살짜리 어린 아들과 팔순의 늙은 노모를 고문하고 죽여가면서(선조수정 24년 5월;선조수정 24년 5월) 수십일 동안이나 옥사를 지휘하며 친국했고 이후에는 정철을 그리고 옥사 후반에는 이양원을 내세워서 수백인을 죽여가면서 수년을 끌었다. 무려 임진왜란 일년 전까지도 말이다.(선조수정 24년 5월)

6. 임진왜란 시기

많은 유림들이 억울히 피를 흘린 기축옥사로 인해 서인동인 사이에서 더 치열해진 당쟁이 3년째 진행되던 1592년에 조선 역사상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임진왜란이 벌어졌다.

전쟁 발발 전 신립에 의해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육상전에 주력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축성을 비롯한 실제 전쟁 대비도 이에 역점을 두어 이루어졌다.[14] 하지만 당초 조정의 예상을 벗어난 너무나 많은 왜군의 대규모 외침에 전면 패주 상황이 계속되었다. 왜군의 북진 소식에도 선조는 이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신임하는 신립에게 육군 주력을 넘겨 왜군을 잘 격퇴해 쫓아내주리라 기대하고,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본래 신립이 끌고 갈 수 없는 경군 8천여까지 지휘권을 주어서 전장으로 보냈지만 신립의 무모한 지휘로 인해 참패했다.[15] 수도 한양을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조는 즉시 몽진을 결정하고, 평안도 영변부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권의 일부 권한을 일부 위임하여 조정의 절반인 분조를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듯 넘겨줬다.

이때 실록은 선조에 대해 아주 시니컬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회의 중에 혼자 사라져서는 점을 치고 있었던 정황이라든가, 한양에서 도망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종친들에게 "나는 여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몇 시간 후에 도주를 한다든가, 자기만 강을 건너고는 배를 가라앉혀 자기를 따라오며 고생하던 신하들을 버린다든가 하는 내용들이 마치 슬랩스틱을 곁들인 블랙코미디처럼 묘사된다.

그리고 선조는 부랴부랴 개성부평양부를 거쳐 영변을 거쳐 의주목으로 급하게 몽진길에 오른다. 파천 자체는 여요전쟁이나 여몽전쟁 때 고려 왕실처럼 전쟁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합리적인 전쟁 수행을 위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택하며 결국 여요전쟁을 승리로 이끈 성군 현종과 달리 선조의 파천은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욕을 대차게 먹고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조선의 국토와 만백성을 버리고 자기 안위만 챙기고자 명나라로 튀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 나라와 백성을 버린다면 관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 것이고 스스로 일어난 의병도 와해될 공산이 크다. 물론 왕이 잡히면 패전은 기정사일이지만 문제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도망가고자 했다는 것.

한양을 떠난 선조는 급기야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는데 파천 직후인 개성에서부터 윤두수가 갑자기 왕은 전쟁이 터지면 군대를 모아 반격을 해야하며 왕이 요동으로 떠나지 않으면 신하들이 따를것이라고 선조를 상대로 직접적으로 조선을 지킬것을 주장하는 기록을 보아 이미 한양을 떠난 직후나 혹은 한양을 떠나기 전부터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을 지난 후에 영변에서는 선조가 대놓고 요동으로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다가 명에 망명한다고 요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명은 조선군을 지휘하는 선조가 타국으로 도망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과 너무나 빠른 선조의 도망 속도 때문에 혹시 조선이 일본과 내통해서 명을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가경의 의심을 하게 되고, 이에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고[16] 압록강의 배를 요동 쪽으로 철수시켜서 거부 의사를 완강히 표했다.[17] 거기에다 붕당을 막론한 신하들의 결사적인 반대에 결국 선조의 명나라 망명은 무산되었다. 특히 영변대도호부에서 왕실과 종묘사직과 신주에 대한 모든 권한을 세자인 광해군에게 떠넘기고 본인은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하였기에, '종묘사직과 왕실을 지키기 위해 도주하였다'는 명분도 사라지면서, 사실상 한 나라의 왕이자 어버이가 자신의 안전만을 지키기 위하여 백성과 나라, 자식들마저 일신에 버린 것이라는 비판을 크게 받게 되었다.[18] 특히 그냥 내준 평양성의 함락은 두고두고 왜군에게 전략적 거점을 내어준 실책이 되었고, 명군을 동원하고도 수개월 이상을 소비해야 했다.

백성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궁성의 창고가 약탈당했다는 실록 기사가 존재하고. 서애 류성룡의 문헌인 징비록에 따르면 '남대문 안 창고'가 약탈, 방화당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왕자인 임해군순화군은 왕족으로서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기는커녕 각지에서 온갖 횡포와 민폐만 끼치고 다녔다. 결국 함경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그들을 잡어들어다가 바쳤을 정도.[19] 이쯤 되면 당시 왕실의 평판이 밑바닥까지 실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0]

물론 선조 자신도 당연히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군사력을 가진 의병이 지방 정치세력과 결합, 반란군을 일으켜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내심 우려했다.[21] 임진왜란 말기에 우려한 대로 1596년엔 종실 출신이 벌인 이몽학의 난이 터졌을 때 굶주림으로 지치고 불만이 많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규합해 수천 명으로 세를 불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난민이 속출하고 민심이 불안한 전시라서 가능했던 거고, 흩어지는 속도는 더 빨랐지만 선조를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고, 편집증이 매우 심해졌다. 이는 곧 이순신의 각종 고문과 백의종군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전쟁이 한참인 시기임에도 이순신을 가차없이 숙청한 점이다. 숙청으로 유명한 한고제와 그 이오시프 스탈린도 적어도 강력한 적을 앞두고 전쟁을 하던 시기에는 숙청하지 않았고 한신이나 게오르기 주코프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들은 더 중용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후임으로 선발한 원균의 무능력을 파악하지 못한 점은 선조의 큰 실책이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지명한 원균의 형편없는 지휘로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대패하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한다. 이 부분은 선조도 할 말이 없었는지 이순신에게 보낸 교서에서 "나도 사람인지라 실수하였고 뭐라고 할 말이 없다."고 인정할 정도. 사실 이건 선조만의 잘못은 아닌데 원균이 자기합리화에 아주 능숙한 사람이라 선조는 물론이고 많은 신하들도 원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다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한 원흉이 선조이다. 막바지에야 상황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출진하지 않으려 버티던 원균에게 "안 나가면 사사로이 자신도 절대 용서 못한다"고 죽일 듯한 협박까지 했기 때문이다.[22] 그러나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하늘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이에 대한 책임 회피는 전후 논공행상에 이어져 조선 수군을 녹여버린 일본 국가유공자 원균 따위를 억지로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시켰으며 이것이 1980년대 원균 옹호론(역사왜곡)의 시발점이 된다. 원균정론으로 원균옹호론을 처음 부각시켰을 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조 옹호였으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추증할 때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 라고 했으며 이것은 "도움을 청한 것도 공"→"나는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음"→"나도 공이 있다!" 이러한 식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7. 후계 문제

임진왜란 발발 후 평안도 의주목까지 몽진하는 와중에 광해군영변부에서 왕세자로 책봉하였고 그에게 분조를 맡겨 황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만약을 대비하도록 했다. 사실 장남 임해군이 차남 광해군보다 왕위 계승에서 우선 순위이긴 하지만, 임해군이 취미삼아 백성들을 살해할 정도로 워낙 싸이코패스적 기질의 광패한 망나니인지라 사회적 인식이 나빴고 그로 인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분조를 맡은 광해군은 자신의 위치에 맞게 역할을 잘 수행해 냈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선조가 세자를 질시하게 된다. 그래서 아들 광해군을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보았고, 임진왜란 중에도 잦은 양위 소동을 벌였으나 당연히 생전 양위하지는 않았다. 이전에 태종이 쓴 것과 비슷하게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상(上)이 200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軍臨)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聰明)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奉行)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間爭)하여 반드시 승락(承諾)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왜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환도한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중국의 조사(詔使)가 공관(公館)에 있으므로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조사가 돌아간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세자(儲宮)가 어려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월을 끌며 말을 바꿔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치 어린아이가 서로 희롱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사리(事理)인가. 당시에 세자의 나이가 이미 약관(弱冠)이었고 학문도 고명(高明)하였으며 덕망도 이미 성숙하였으니 대위(大位)를 이어받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난을 평정하고 화를 종식시켰을 것인데, 계속 어린 세자(沖嗣)라고 하였다. 옛부터 약관의 어린 세자가 언제 있었던가.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5번째기사[23]
잦은 양위 소동에서 드러난 변덕과 견제, 이후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 영창대군의 탄생까지 겹치면서 세자 광해군으로선 아버지와의 사이가 한층 더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진 않았다. 조정 당파 중에서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건 소북 그중에서도 류영경의 탁소북에 국한된다. 나머지 대북, 청소북, 서인, 남인은 모두 광해군을 지지했다. 전란 기간 중 신하들에게 전위 권유를 받았을 정도로 선조의 권위가 취약했던지라 전란을 통해 충분히 능력이 검증된 세자를 교체할 힘이 없었고 나이(20살 이상)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할 명분도 없었다.[24]선조 승하 당시 영창대군 나이는 겨우 만 2살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서자라는 것도 당시 종법 해석으론 별 문제가 안 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16세기에 이미 사대부 사이에서도 적자가 태어나 양자를 파양하고자 하는 소송은 기각하는 판례가 형성되었고[25] 왕가의 법도대로 광해군이 서자이건 차자이건 정식 왕세자로 옹립된 이상 군신명분이 세워져서 영창대군은 태어난 순간 신하가 되기 때문에 한번 세워진 명분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게 그 당시 성리학 종법 제도로 왕가는 물론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널리 받아졌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리 정통성이 강하다 한들 군국 대사를 처리해야 할 군주에 2살짜리를 옹립하는 것은 선조나 인목왕후는 물론 류영경의 소북에서도 불가능한 걸 알고 있었다.[26][27]

결국 이런 양위 소동에 제대로 열받은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은 선조에게 양위 소동을 두고 류영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양위 소동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선조를 의도적으로 돌려까는 상소다. 이 상소를 읽은 선조는 빡쳐서 정인홍을 귀양보낸다. 결국 선조는 양위 소동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 세자의 지위까지 흔들어가면서 벌인 쇼라는 것을 선조가 직접 인증해버렸다.

음모론 중에는 위험을 느낀 광해군이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계축일기 등에 등장한 이른바 "찹쌀밥 독살설". 간신히 몸을 회복하던 선조가 찹쌀밥을 먹고 그날 바로 승하했기 때문이다.[28] 이런 음모론 때문에 당시 어의자 국왕 주치의였던 허준까지도 졸지에 국왕 살해범으로 왜곡되기도 했지만 이런 모함에 낚이지는 말자. 당대에 이미 헛소리 취급받고 있었다. 당장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세력도 이 주장은 믿지 않았다. 그야말로 "찹살 떡밥" 정도이다.

선조가 때때로 왕자 이의(후일의 영창대군)를 왕세자로 바꿔볼까 잠깐 방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과 왕세자의 갈등 구도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을 뿐더러 대군으로도 책봉하기 불가능한 나이 차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선조는 죽기 며칠 전에 장성한 광해군을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교지까지 완성해 영의정 류영경에게 건냈다. 류영경은 이를 자신의 집에 몰래 빼돌린 채 선조가 입장을 번복해주길 빌며 시간을 끌다가 끝내 적발당했다. 결국 사사된 이후 대역죄로 부관참시에 처해진다.

반면 더 지능적인 핍박이었다는 반박도 불가능하지 않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세자라는 명분은 표면적으로 지켜주는 대신 꾸준한 질책과 선위파동으로 대비전 궁녀가 동궁을 무시할 만큼 권위를 불안정하게 했는데, 그 결과는 결국 폐모살제란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다. 인조 대까지 이어지는 선조 소생 왕자 수난시대의 씨앗은 선조가 뿌렸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29]

8. 대여진 정책(여진 정벌)

"선조 대왕께오선 북로(北虜, 여진족)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선조의 대표적 치적 중 가장 많이 간과되고 있는 치적이다.

선조대는 여진족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으로 인해 대규모 침입이 잦아졌고, 이에 대응하여 여진 정벌도 마지막으로 빈번히 이루어진 시대였다. 특히 조선의 지배로부터 이탈하여 반란을 일으킨 번호(藩胡)에 대한 응징이 주된 목표가 되었다. 1583년(선조 16년)에는 함경도 경원부(慶源府)의 니탕개 등이 2~3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일으켜 경원부와 아산보(阿山堡)를 함락시키는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 6진이 위협을 받게 되자, 조정에서는 현지에 증원군을 파견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그러나 이는 정벌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는 방어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약 10년 전에 발생한 이 니탕개의 난은 신립을 보내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방어에 성공한 선조는 북병사 이제신과 장수들을 보내 금득탄 등 여진족 소굴 700여 개를 무자비하게 초토화시켰다.

1587년(선조 20)에는 녹둔도에 설치한 둔전을 여진족이 습격하여 국경을 지키는 조선의 국경수비병을 죽이고 백성들을 포로로 납치해 끌고 가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렇게 여진족들이 기습적으로 녹둔도를 습격하여 조선인 10여 명을 살해하자, 선조는 2천 5백여 명의 경장사와 토병 군대 등을 보내 여진족 수급(머리) 380여 급을 베고, 여진족 산채 200여 채를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

녹둔도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북방병마절도사 이일은 11월에 우후(虞侯) 김우추(金遇秋)에게 400여 기를 주어 강을 건너 추도(楸島)의 여진족을 치게 하여, 3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어서 이듬해인 1588년(선조 21)에는 본격적으로 녹둔도를 공격한 여진족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1월 14일에 함경도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50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시전부락(時錢部落)을 향해 진격, 15일에 장막 200여 채를 태우고 380명의 목을 베는 등 전과를 거두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바로 왜란 뒤의 여진족 정벌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혼란스러운 조선의 상황을 틈타 노략질을 감행했던 여진족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그 세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더니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조선의 국내정세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여진 정벌은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곧바로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이 약체화된 틈을 타서 함경도의 변경을 수차례 공격하고 약탈하였는데, 특히 두만강 건너의 여진족 추장 이라대(伊羅大)·역수(易水) 등은 먼 곳에 사는 홀라온과 연결하여 조선의 변경을 활발히 침공했다. 이에 대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 정현룡(鄭見龍)은 군사 1,325명, 항왜 25명을 동원하여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30]

함경도 지역에 이렇게 빈번한 여진 정벌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으로 변경의 수비가 약화된 상황에서는 번호의 이탈 및 여진족의 침입을 완전히 근절하기 어려웠다. 특히 무산 부근에 있던 노토(老土) 부락은 1598년(선조 31년) 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선조와 조정은 이들을 토벌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 즈음 1599년(선조 32년) 함경 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 의견을 15개항으로 정리해 올리자, 선조는 이에 대해 크게 칭찬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천명하게 된다. 사헌부가 2차례에 걸쳐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노토 토벌에 대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1600년(선조 33년) 4월 14일에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31]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 현감 이괄, 회령 부사 조경(趙儆), 길주 목사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여진족이 철저하게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잘 타지 않은 가옥들은 도끼로 때려부쉈다. 야산으로 도망간 여진족은 위에서 바라만 보고 울부짖었고, 여진족이 파묻은 곡식까지 쌍그리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고 곳곳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수일은 후에 올린 장계에서 '매우 장쾌(壯快)했다'라고 평했다. 이를 통해 아주 오랜만에 대규모 여진족 집단에 큰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에 투항하고 복속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정세는 조선이 정벌로써 통제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누르하치에 의한 여진족 통일 전쟁이 격화되면서 그 여파가 조선에 미치게 된 것이다. 1600년대 초반 경쟁하던 누르하치와 홀라온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번호를 끌고 가고자 했는데, 이 중 홀라온은 더 나아가 1603년(선조 36년) 조선의 변경을 직접 군사적으로 습격하였고, 1605년(선조 38년) 3월에는 동관진(潼關鎭)을 함락시키기까지 했다. 동관진을 약탈한 홀라온의 본대는 본거지로 퇴각하였으나, 300여 기는 건가퇴(件加退)에 남아 있었고, 원래 있던 1천여 명의 여진족과 함께 조선의 북변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이를 징벌하기 위해 북병사 김종득(金宗得)은 현지의 병력을 징집하여 4월 1차로 이항(伊項)과 우허(牛虛) 부락을 공격하여 80여 명을 죽였고, 5월 2차로 함경도의 포수·사수(射手) 3천 명과 번호 탁두(卓斗)가 거느린 여진족 기병 3백 기를 이끌고 건가퇴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과의 접전에서 위기에 몰려 우후 성우길(成佑吉)의 활약으로 적 50여 명을 죽이고 간신히 후퇴에 성공하였으나 정군(正軍)으로서 전사한 자만 213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함경 감사 서성(徐渻)이 파직되고 김종득은 유배되는 등 처벌을 받았다.

이후 1607년(선조 40년) 누르하치가 홀라온 세력을 격퇴한 이후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여진족을 자신의 본거지로 이주시킴으로써 조선은 울타리가 되어주던 번호를 상실한 채로 강대해진 후금의 누르하치 세력을 상대하게 되었다. 물론 선조는 이후에도 대규모의 병력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 뒤로는 움직임이 없었고, 그렇게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복속 여진족인 번호들은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이후 여진족을 정벌하는 것이 아닌 방어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9. 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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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목릉 선조릉.jpg
목릉 전경
그 이듬해인 1608년, 재위 42년째 되는 해에 선조는 5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끝마친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목릉(穆陵). 원래는 의인왕후 박씨의 능역이었다가 선조도 이 곳으로 이장된 것이다.

의인왕후의 능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의인왕후의 장지를 찾던 도중 지관이 현대의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명당을 꼽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사대부들이 특히 존경하던 인물인 포은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도 차마 이 곳에 의인왕후의 무덤을 쓰지 못하고 동구릉 경내에 모셨다는 야사이다. 계비 인목왕후도 죽어 여기 묻힘으로써 동역이강릉의 형태로 묻혀 있는데, 1986년부터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6년 비공개가 완전 해제되어 관람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동구릉의 능들은 능침 앞까지 올라가 볼 수 없고 왕릉 언덕 밑의 정자각 쪽에서 구경해야 하지만 목릉은 동구릉의 능들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였다. 2015년에 변경되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은 능침 앞까지 못 올라가게 막아 놓았고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능은 인목왕후의 능 뿐이다.

목릉 능역 안으로 들어가면 능이 3개가 있는데 선조의 능은 능역 홍살문 기준으로 맨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능 뒤편에 의인왕후의 능이 있고 맨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위 사진에서는 왼쪽에 있는게 선조의 능이고 오른쪽에 있는 게 의인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목릉의 석물들은 조선 왕릉 중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하는데 목릉이 조성된 인조병자호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데다가 우수한 석공들을 구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보면 목릉의 석물들은 크기만 컸지 다른 능들의 석물보다 균형이나 조형미 같은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목릉의 석물에서는 총탄 자국도 볼 수 있으며 이는 한국 전쟁 때의 흔적이라고 하는데 살아서도 전란을 겪은 것도 모자라 죽어서도 끝내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카카오맵 리뷰 별점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32] 관리가 안 되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니고, 선조가 워낙에 평가가 안 좋은 왕이다 보니, 그 국민적 감정이 평점에 방영된 탓이다.


[1] 덕흥군 저택 공사에 당시 중종실록의 기사에서는 여러 폐단을 낳았다고 한다. 덕흥군 뿐만 아니라 당시 중종 서출들의 저택 공사에 폐단이 많아 대간들이 상소로 여러 번 지적할 정도였다.[2] 사실 위로 세조의 장손이자 의경세자(덕종)의 장남 형 월산대군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실세였던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에 그 권세에 힘입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3] 그러나 결국 후대에 덕흥대원군 봉사손들은 경술국치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으며 종친부 군 작위를 대대로 세습한다. 조선 말 효종의 자손이 희소해진 상황에서 이들은 선조 가문의 적통 계파로서 우대받았으며 철종 시절 봉사손이었던 이하전의 경우 안동 김씨 세도의 경계를 사서 사사되기도 했다.[4] 대원군은 왕의 생부라서 인정(人情)상 예우하는 것이지 그 지위가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에 임금이 신하에게 절 할 수 없기 때문이다.[5]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Ⅲ. 문학 > 1. 한문학 > 2) 사림파의 한문학 > (1) 목릉성세와 성정미학[6] <선조 대 당쟁의 양상과 전개 양상 : 이이를 중심으로>[7] 명나라가 처음 편찬을 시작했을 시기에도 이인임과 이성계의 관계를 모르지 않았겠지만 그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정말 나빴기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악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은 이후에 새로운 기록들이 추가되어서 재간행될 때마다 이를 수정하고자 하였으나 명나라는 과거 이유가 있어서 기록한 것이라니, 재간행이 이미 완료되었다느니 하는 핑계로 유야무야 흘리듯 넘겨 버렸었다.[8] 명나라 기록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 권력을 휘어잡은 간신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걸 무려 200여 년 뒤에야 이자춘의 아들이라고 바로잡은 일이다. 그러므로 이를 왕실의 종(宗)사와 계(系)통에 대한 무(誣)함을 변(辨)호했다는 의미로 종계변무(宗系辨誣)'라고 한다. 선조 사후, 광해군은 종계변무를 명분 삼아 부왕의 신위를 불천위(不遷位)로 지정하였으며, 이로 인해 선조의 신위는 5대가 지나더라도 종묘 정전에 자리를 영원히 보존하는 세실(世室)이 되었다. 사실 즉위 기간이 짧거나 반정으로 쫓겨난 왕이 아닌 이상, 조선조 임금의 웬만한 신위는 거의 다 세실로 지정되어 있긴 하다.[9] <조선시대 대중국 역사변무의 의미>, 252, 260[10] <조선전기 朝·明 관계에서의 宗系 문제>, 215, 216, 219-220[11] 선조수정 선조 24년 5월[C] <선조대 ‘동서분당’ 전개의 초기 양상 : 이이를 중심으로>[D]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14]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격렬한 반대로 수군 전폐론은 없어졌지만 부산진과 다대포의 경상 좌수군이 바다가 아니라 각 성에서 항전한 점, 경상좌수사 박홍이 2천 병력으로 동래산성으로 간 점 등을 보면 경상좌수영에 한해서는 이루어진 듯하다.[15] 신립이 전쟁 발발 전부터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과 당시 조선군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조총의 위력을 전혀 무시한 채로 과거의 니탕개의 난의 경우처럼 평지에서 싸울 수 있다고 오만했다. 그리하여 신립은 오만한 자신감에 고무되어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산악지형의 조령(지금의 문경새재)을 버리고 사방 뻥뚫려 있는 충청도 충주 탄금대 평야지대에서 기마 전술로 펼치다가 왜군의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 의한 조총 전술로 탄금대 전투에서 거의 전멸당한다. 그러고 탄금대 절벽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한다.[16] 100명이라 함은 작은 고을의 수령 쯤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다.[17] 명나라 입장으로서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게 수 차례 자신들은 명을 치는 길을 빌려주고 지원하라고 압박을 해왔었다. 수나라, 당나라, 거란, 여진, 몽골의 외침에 맞서 선전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구려, 신라, 고려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조선에 대해 명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조선의 군사력을 경계해왔다. 이러니 강군의 조선이 일본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는 것을 명나라는 당연히 믿지 않았던 것이다. 이전 왕조인 고구려는 국력이 강해지기 전 관구검이 이끄는 고작 1만 병력에게 수도까지 털린 적이 있고, 고려 역시 카다안의 침입이 발생했을 때 여요전쟁에서 보여준 모습은 잃어버린 상태로 쿠빌라이 칸한테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느냐?"는 식으로 디스 당한 적이 있으며, 명나라 또한 영락제 이후 토목의 변을 시작으로 가정제만력제등 막장 황제들로 인해 국력이 약해져 본인들 역시 만만히 보던 왜구에게 남부 지역을 유린당한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의심은 합리적인 의심이 아닌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명나라 조정의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18] 이때 정철과 류성룡은 심지어 진지하게 선조에게 명나라로 도망갈 거면 선위하라며 하야요구를 하려하였는데 이 둘다 선조의 불같은 성격을 아는지라 선조에게 별 말 못하고 '신들이 못나서 나라가 이꼴입니다.'라고 사죄하고 도망치며 조선 역사상 최초의 신하에 의한 하야요구는 없던 일로 돌아갔다.[19] 이들은 정문부가 이끄는 함경도 의병에게 변절(순왜)을 이유로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20] 다만 이후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거나 서얼이긴 하지만 전주 이씨 왕족 출신인 이몽학이 이몽학의 난을 일으킬 만큼 세력을 키운 걸 보면 선조와 임해군,순화군같은 망나니 왕자 개개인이 민심을 잃은 거지 조선왕실자체가 민심을 잃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애초에 그랬다면 조선왕조가 이후에도 300년을 더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21] 일단 조선부터가 대홍건적, 대왜구 전쟁에서 공을 세운 변방의 장수 이성계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나라다.[22] 물론 선조 입장에서는 빡칠만 했다. 애초에 원균이 먼저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 부산에 있는 왜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근자감 넘치는 장계를 올렸다. 막상 그렇게 통제사가 되고 한다는 소리가 '왜군의 수가 엄청 많아서 전투를 하기엔 여력이 부족하다, 육군의 지원이 필요하다' 등이니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23] 요약하자면 "열심히 나라 멸망시키고 갑자기 왕 그만하겠다는데 아주 훌륭한 생각이다. 근데 왜들 시답잖은 핑계로 말렸냐. 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매우 안타깝다" 라는 뜻이다. 보다보다 열받은 사관의 심정이 드러난다.[24] 이런 일을 억지로 벌이면 어떻게 되는지는 비슷한 시기 도요토미 히데츠구 숙청이 여실히 보여준다. 권위가 흔들리던 선조와 달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권위와 실권 모두 꽉 잡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지만, 결국 이 참사로 민심 이반이 일어나고 어린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조처를 하지 못해 외부의 적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기회를 주었다.[25] 서강대학교 계승범 역사학 교수[26] 그러니 이후 문제삼은 살제에서 폐모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은 어디까지나 광해군이 지고 가야할 책임이자 숙명이다.[27] 영창대군의 옹립의 꾀했던 류영경도 어디까지나 영창대군이 성장할 때까지 선조가 살아주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였지 2살짜리를 바로 왕위에 올릴 생각은 아니였다.[28] 광해 즉위년 2월 1일 중초본[29] 모후를 폐비하여 연산군이 괴물이 될 씨앗을 만든 성종과, 모후를 승격했다가 폐출해 신임옥사를 저지를 명분을 제공한 숙종에 비하면 선조는 양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종은 세자(연산)에게 폐비의 자식이라 홀대하지 않았고, 숙종은 대리청정으로 승계가 확정되면서는 세자(경종)의 면을 깎지 않았다. 그 결과 연산군도 경종도 계비인 모후는 폐하지 않았고 이복동생도 죽이지 않아 왕위 승계에는 차질이 없었다. 반면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의 최대 위협자가 바로 자신보다 젊은 인목대비라는 시각을 갖도록 조장했다. 광해군은 폐모살제를 하지 않아도 될 명분은 확보했으나, 폐모살제를 반드시 해야한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선조의 작품이었다.[30] 선조 27년 10월 11일[31] 곤양 군수로 이순신 아래서 백의종군 했다. 효종의 북벌을 상징하는 무인 이완의 부친.[32] 선조왕릉의 카카오맵 별점은 왜 1.4인가 (이명지의 IT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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