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7 11:25:02

삼성 라이온즈/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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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시즌별 성적
1990 시즌 1991 시즌 1992 시즌
파일:samsung_lions_logo_1989.png {{{+1 KBO 리그 1991 시즌 {{{#FFFFFF }}} 삼성 라이온즈 }}}
<rowcolor=#FFFFFF> 순위 승차 승률
3 / 8 70 1 55 11.0 0.560

1. 스토브리그
1.1. 코칭스태프 이동1.2. 선수 이동1.3. 신인 지명1.4. 기타
2. 정규 시즌3. 포스트시즌
3.1. 준플레이오프3.2. 플레이오프
4. 선수별 개인 성적
4.1. 투수4.2. 타자
5. 수상 및 기록6. 시즌 총평7. 여담

1. 스토브리그

1.1. 코칭스태프 이동

전년도 한국시리즈에서 1번도 못 이기면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정동진 감독이 물러났고, 투수진 강화를 목적으로 '투수 조련사'로 이름난 김성근 감독을 영입했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2군의 김명성과 김광웅 코치를 해임했는데 이에 반발한 손상대, 천보성, 함학수 코치가 사임했다. 손상대는 OB 베어스로, 함학수는 빙그레 이글스로 옮겨갔고 천보성은 미국 연수를 떠났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천보성은 삼성과는 완전히 등을 졌다.

빈 배터리코치 자리에는 해태 타이거즈에서 활동했던 재일 한국인 김무종을 영입했다. 마티 코치와의 계약도 해지하며 대신에 이선희를 데려왔다.

이외에 김성근 사단 중 한 명인 박용진 前 태평양 돌핀스 2군 감독과 태평양 돌핀스에서 매니저로 있던 이철성을 2군 코치로 데려오고, 구단 직원으로 일하던 손상득이 2군 배터리코치를 맡게 됐다.

1.2. 선수 이동

1990년 시즌 후 오명록, 이성근, 최동원 등이 은퇴했다. 재일교포 송광훈도 방출돼 귀국했다.

한편 당시 김성근 감독은 베테랑을 중용했던지라 타팀 방출 선수를 데려왔다.

1990년 12월 22일에 OB 베어스에서 트레이드 대상으로 내놓은 윤석환조범현을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왔다. 윤석환의 경우엔 성준과 정윤수를 대신할 좌완 마무리로, 조범현은 이만수와 백업 박정환이 건재했음에도 윤석환을 위해서 데려왔다.

1991년 1월 15일에는 강영수가 OB 베어스 신경식을 상대로 트레이드됐다. 좌타 및 1루수 보강이 그 목적. 16일에는 지난 1988년 MBC 청룡에서 방출된 후 미국 독립리그에서 활동하던 최홍석을 입단시켰고, 17일에는 대주자감으로 이용하려고 롯데 자이언츠허규옥을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왔다[1]. 1월 22일에는 태평양 돌핀스에서 방출된 이광길을, 2월 1일에는 LG 트윈스에서 방출된 최일언을 추가로 데려왔다.

1.3. 신인 지명

  • 포지션은 지명 당시 기준.
  • ※표시는 지명권 포기 등으로 입단하지 않은 선수.
이름 포지션 경력 계약금
1차 이영재 포수 경주고 - 동국대 2300만원
2차 1라운드 윤용하 외야수 동산고 - 동국대 2000만원
2라운드 이창근※ 포수 인천고 - 인하대 -
3라운드 손정우※ 내야수 경주고 - 영남대 -
4라운드 조기흠※ 내야수 북평고 - 인천전문대 -
5라운드 장인태※ 투수 경북고 - 영남대 -
6라운드 이상범 투수 대구고 600만원
7라운드 이창대※ 외야수 경북고 - 한양대 -
고졸 연고 김상태 포수 대구고 1000만원
문기영 외야수 경주고 600만원
손영철 투수 경주고 1900만원
신동주 외야수 포철공고 1200만원
유인재 투수 대구상고 600만원
장재영 내야수 포철공고 600만원
전상렬 외야수 대구상고 600만원
최형현 포수 포철공고 1000만원
허삼영 투수 대구상고 1600만원

1.4. 기타

1990년 말 류영수 2군 감독을 포함해 이상목, 김인철, 이상훈, 박용준, 정존수, 이규창, 박규대, 정경훈, 박인구 등이 미국 교육리그에 참가했다. 이 때를 시작부터 한동안 삼성은 유망주들을 미국 교육리그에 파견했다.

2군 리그가 시작된지 불과 1년만에 삼성은 3군 체제까지 꾸릴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결국 무산됐다.

2. 정규 시즌

떠오르는 기대주 김상엽이 페이스 조절 실패로 6승을 올리는데 그쳤고, 류명선은 경기 중 발등에 타구를 맞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김성래, 이종두가 부상으로 많이 결장했고, 류중일강기웅도 부상에 시달리면서 타선을 비롯해 수비에서도 공백이 생겼다.

하지만 김성길을 선발, 계투,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기용하는 등[2] 김성근 감독은 특유의 변칙적인 투수 운용을 펼치면서 70승 1무 55패로 3위를 차지했다.

3. 포스트시즌

3.1. 준플레이오프

1991년 준플레이오프
롯데 자이언츠 VS 삼성 라이온즈
경기 일시 경기장 원정 경기 결과 중계방송사
1차전 9월 22일 (일) 14:00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X 롯데 3 : 8 삼성 O KBS1
2차전 9월 23일 (월) 14:00 사직 야구장 X 삼성 2 : 10 롯데 O MBC
3차전 9월 25일 (수) 18:00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롯데 3 : 3 삼성 KBS1
4차전 9월 26일 (목) 18:00 X 롯데 2 : 10 삼성 O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KBO 준플레이오프/1991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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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플레이오프

1991년 플레이오프
삼성 라이온즈 VS 빙그레 이글스
경기 일시 경기장 원정 경기 결과 중계방송사
1차전 9월 29일 (일) 14:00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 X 삼성 0 : 3 빙그레 O MBC
2차전 9월 30일 (월) 18:00 X 삼성 1 : 2 빙그레 O KBS1
3차전 10월 2일 (수) 18:00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X 빙그레 1 : 3 삼성 O MBC
4차전 10월 3일 (목) 14:00 O 빙그레 10 : 3 삼성 X KB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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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수별 개인 성적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성적.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 투수는 이닝이 많은 순서대로, 타자들은 타수가 많은 순서대로.

4.1. 투수

  • 우완
  이름 경기수 선발등판 이닝 세이브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7 김성길 52
(1위)
14 188
(8위)
16
(4위)
12 18
(2위)
3.30 164 64 94
33 류명선 27 14 127⅓ 11 4 4 3.18 97 77 84
12 이태일 31 21 126 10 10 3 4.64 137 31 31
30 김상엽 36 11 99⅓ 6 6 7
(7위)
4.62 87 73 62
11 최일언 32 9 96⅔ 9 6 0 4.47 100 56 56
77 이상훈 17 2 42⅔ 1 0 0 5.91 54 23 21
67 김인철 16 1 33 1 1 0 7.91 41 23 17
48 손영철 3 1 14 0 0 0 0.64 10 6 8
29 홍성연 7 0 13⅓ 0 0 1 7.43 21 3 11
18 최현준 5 0 12 0 1 0 0.75 10 3 2
71 이상범 3 0 3⅓ 0 0 0 10.80 2 7 1
  • 좌완
  이름 경기수 선발등판 이닝 세이브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4 성준 28 24 148⅔ 8 4 1 2.97 141 56 59
47 박용준 29 21 95⅔ 6 9 2 4.70 107 46 27
31 정윤수 37 7 80⅔ 1 2 2 5.02 100 38 37
27 윤석환 16 1 29 1 0 0 6.52 29 12 13
28 이문한 8 0 19 0 0 0 6.63 22 6 4

4.2. 타자

  • 포수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22 이만수 118 378 .317
(5위)
102 18 0 17
(7위)
74
(6위)
51 6
26 박정환 63 102 .216 22 4 0 2 15 6 0
25 조범현 51 61 .262 16 3 0 1 10 11 0
16 이영재 1 1 .000 0 0 0 0 1 0 0
  • 내야수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21 신경식 126 460 .309
(7위)
142
(2위)
15 3 7 57 71
(8위)
20
(9위)
7 김용국 126 403 .295 119 21 1 7 58 55 4
1 류중일 90 344 .285 98 14 4 5 45 59 19
3 박승호 106 302 .245 74 21 0 10 65 37 0
24 김용철 108 268 .250 67 8 0 15 46 32 2
6 강기웅 68 228 .303 69 14 3 6 26 30 10
56 정경훈 87 200 .260 52 7 1 0 25 35 12
2 최해명 42 96 .250 24 3 0 1 6 13 1
5 김성래 30 51 .157 8 1 0 3 5 7 0
38 이광길 37 37 .216 8 3 0 1 4 4 1
15 이종옥 6 12 .000 0 0 0 0 0 0 0
44 이규창 6 4 .000 0 0 0 0 0 0 0
13 박홍철 3 1 1.000 1 0 0 0 0 0 0
  • 외야수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8 허규옥 102 304 .234 71 5 7
(6위)
2 25 46 19
45 강종필 111 258 .264 68 7 3 8 29 42 15
4 장태수 89 178 .292 52 3 2 4 32 33 2
10 정성룡 77 132 .295 39 8 0 5 12 22 2
9 윤용하 67 102 .274 29 10 0 6 21 18 1
40 이종두 21 76 .342 26 6 0 5 19 20 9
39 이현택 33 70 .186 13 4 0 3 9 14 0
37 김종갑 33 46 .283 13 3 1 0 4 10 1
20 김정수 46 25 .120 3 1 0 0 3 10 1
19 구윤 7 11 .273 3 1 0 0 1 2 0
35 나광남 22 8 .125 1 0 0 0 1 7 1
43 박인구 12 6 .000 0 0 0 0 0 3 0
61 박규대 9 6 .000 0 0 0 0 0 1 0
32 최홍석 5 6 .000 0 0 0 0 0 0 0
  • 투수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7 김성길 1 1 .000 0 0 0 0 0 0 0
30 김상엽 1 1 .000 0 0 0 0 0 0 0

5. 수상 및 기록


6. 시즌 총평

시즌 전에는 해태, LG 등과 함께 우승후보로 꼽혔다.

4월, 개막 후 5연승행진과 함께 선두경쟁을 펼쳤지만, 4월 26일 대구 LG에서 당시 타격 전부분 수위권을 달리던 이종두가 부상으로 사실상 시즌아웃[3]되면서 불안감을 야기한다. 그렇지만 4월 26~28일 대구에서 펼쳐진 전년도 우승팀 LG와의 3연전을 스윕함과 동시에 단독 1위로 치고나가면서 나름 기대감도 높였고, 마침 4월 27일 경기에서는 이만수가 KBO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 600타점을 돌파하는 기쁨도 누렸다.[4]

5월, 3~5일 당시 선두다툼 중이던 해태와의 대구 3연전을 스윕패당하게 되는데,[5][6] 이 시리즈에서 김상엽이 2패[7]를 떠안으면서 그 해 부진의 시작을 알렸고, 3연전 직후 5월말까지 2군에 머물게 된다. 그나마 류명선이 에이스역할을 대신하면서 리그 다승왕 경쟁까지 펼치게 되지만, 5월 23일 롯데와의 경기도중 상대타자의 강습타구에 맞아 부상 이탈하게 된다.[8] 대신, 2군에 있던 김상엽이 다시 1군에 복귀해 5월 30일 잠실 OB전에 선발 등판하지만 1회부터 대량실점하면서 무너지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가게 된다.[9] 5월에는 특히 선수들 부상소식이 많았는데, 앞선 류명선 외에도 키스톤콤비인 강기웅류중일이 부상으로 5월 내내 나란히 공백기를 가진다.[10] 또한 외야수 이현택[11][12]이 5월 19일 잠실 LG전에서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아웃된다.

6월초에 강기웅류중일은 복귀하지만, 김상엽류명선은 공백기를 가지고 팀도 고전하게 된다. 다만 이 시기, 철저히 무명이었던 좌투수 박용준[13]과 외야수 강종필이 투타에서 맹활약하기 시작하고,[14] 당시 신인이었던 외야수 윤용하도 프로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팀에 조금씩 활력을 불어넣게 된다. 그리고 6월 23일 사직구장에서 펼쳐진 올스타전에서 이태일이 우수투수상을 받게 되는데, 이는 팬들에게 위안거리로 작용한다.[15]

7월, 김성근 감독은 기존 선발투수였던 김성길중무리마무리투수 전환을 결정하면서 승부수를 던진다.[16] 이에 김성길은 7월 2일~6일까지 5경기 연속 세이브[17]를 기록하면서 기대에 부응한다.[18] 그리고 김상엽은 7월 5일 인천 태평양전,[19], 류명선은 7월 12일 대구 해태전[20]을 통해 복귀하게 되었고 팀도 서서히 상승세를 타게 된다. 특히 7월 14일 대구 해태전에서 선동열을 상대로 김용철박승호이 각각 홈런을 기록하면서 선동열을 무너뜨린 장면은 백미.[21][22] 다만, 7월 26~28일, 당시 2위다툼을 펼치던 빙그레와의 청주 4연전[23]을 1승 3패로 마감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었다.[24]

8월 들어서도 삼성의 상승세는 계속되면서 빙그레와 치열한 2위다툼을 이어나가게 된다. 특히 (김성근 감독이 직접 데려왔지만) 시즌내내 부진으로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던 내야수 이광길이 이 시기에 끝내기안타를 기록하면서 반짝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도 있다. 그리고 8월 16~18일 LG와의 대구 3연전을 2승 1패의 위닝 시리즈로 마감하면서 2위 자리를 수성함과 동시에 1위 해태를 2게임차로 바짝 쫓게 되면서 선두탈환의 기대감도 높였다. 그 다음 주중 OB전은 1승 1패를 기록하고, 정확히 1위 해태와 2.5게임차에서 8월 24일~26일 해태와 운명의 광주 3연전을 가지게 된다.[25] 그렇지만 충격의 스윕패를 당하면서 선두탈환은 완전히 물건너가게 되고, 이 과정에서 빙그레에게 2위 자리마저 넘겨주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8월 27~29일 태평양과의 인천 3연전마저 1승 2패의 루징 시리즈로 마감한다. 사실 1991시즌 전체를 돌이켜봐도 8월말 부진이 삼성에게 있어 가장 아쉬운 순간이라 할 수 있다.

9월, 2위 빙그레와의 경기차는 점점 벌어지게 되면서 시즌 3위 자리는 고착화되고, 팀 수뇌부 또한 본격적으로 준플레이오프에 대비한 경기운영을 펼치게 된다.[26]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규시즌 3위를 기록했다. 특기할 사항들도 있는데, 9월 7일 대구 롯데전 더블헤더에서 김성길하루에 2승을 기록한 점이다.[27] 그리고 정규시즌 마지막경기인 9월 17일 대구 해태전에서 이만수가 개인통산 200호 홈런을 기록하기도 하는데, 개인 200호 홈런은 당시 KBO 역사상 처음이다.[28]

이후 삼성은,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승리하지만 빙그레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패배해 최종순위 3위가 확정된다.

1991시즌 아쉬운 대목으로써

투수진 관련 첫번째는, 전년도 팀에이스였던 김상엽의 정규시즌 부진이다. 그나마 포스트시즌에서는 부활했고, 특히 빙그레와의 플레이오프 대호투[29]로 다음시즌 희망을 가지게 된다. 두번째로는, 김상엽 대신 에이스역할을 해 주던 류명선이 시즌 중 잔부상을 시달리게 되고,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4차전 선발등판을 제외하면) 포스트시즌에 전혀 등판하지 못한 점도 팀에게는 큰 손실이었다. 세번째로는, 좌투수 성준이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극심한 부진을 겪은 후유증으로,[30] 좌타자가 주력이었던 빙그레[31]와의 플레이오프에 제대로 등판하지 못한 점도 뼈아팠다.[32] 네번째로는, 전년도 특급 불펜이었던 좌투수 정윤수가 전년도 혹사후유증으로 시즌 내내 부진에 시달린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당시 고졸 3년차 좌투수 박용준이 7월말까지 (선발승으로만) 6승을 기록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나 싶었지만,[33] 8월 이후 단 1승도 기록하지 못하고 부진에 빠지면서 시즌을 마감한 점이다.[34][35][36]

타선 관련 첫번째는, 구윤, 김성래, 이종두, 이현택 등이 부상으로 인한 장기이탈로 팀타선에 공백이 생겼던 점이다.[37] 두번째로는 전년도 지명타자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던 박승호가 에이징커브 영향으로 전년도만큼 활약하지 못했던 점도 뼈아팠다.[38] 세번째로는, 전년도 2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강기웅이 시즌 중 잔부상에 시달리면서 공백기가 길었던 점도 꼽힌다. 네번째로는, 김성근 감독이 취임하면서 데려온 옛 제자들 중 (신경식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친 선수가 없었다는 점이다.[39] 마지막으로, 타선 전체가 전반적으로 노쇠했다는 점인데, 허규옥(1956년생), 김용철(1957년생), 장태수(1957년생), 박정환(1957년생), 박승호(1958년생), 이만수(1958년생) 등 30대 중반 타자들이 (이만수를 제외하면) 모두 에이징커브를 겪으면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그나마 이들 중 이만수김용철의 정규시즌 활약은 괜찮은 편이었고,[40] 특히 김용철은 포스트시즌 들어서도 (엘리미네이션 게임이었던)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6회에 역전결승홈런을 때려내면서 활약을 이어간다.[41]

결국 그 해 전천후 활약을 펼쳤던 투혼의 김성길, 트레이드 된 후 바로 핵심적 활약을 펼친 신경식, 8월말까지 리그 수위타자 경쟁을 펼쳤던 이만수 등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팀은 최종순위 3위로 시즌을 마감한다.

훗날 김성근 감독은 회고록에서, 삼성시절 본인과 선수단(특히 고참선수들) 간의 어느 정도 알력이 있었고, 삼성선수단 내부의 파벌 또한 존재했음을 언급한 바 있으나... 그것이 우승실패 책임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삼성팬들의 의견 또한 만만찮은 실정이다.

7. 여담

  • 1991시즌 당시 삼성에서 뛰었던 선수들 중, 훗날 KBO 1군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경우도 몇몇 있다.
    • 류중일 : 삼성 라이온즈 감독(2011~16년), LG 트윈스 감독(2018~20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 이만수 : SK 와이번스 감독(2012~14년).
    • 조범현 : SK 와이번스 감독(2003~06년), 기아 타이거즈 감독(2008~11년), KT 위즈 감독(2013~16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 허삼영 : 삼성 라이온즈 감독(2020~22년).
.
  • 1991시즌 당시 삼성 2군에 있었던 선수들 중에, 훗날 선수로써 뒤늦게 잠재력을 발휘한 경우나, 선수 외적인 특기를 발휘한 경우가 많이 있다.
    • 김인철 : 1990시즌 입단, 선수생활 중간에 타자로 전향, 이후 2007시즌까지 저니맨으로 선수생활.
    • 김정수 : 삼성 라이온즈 프런트. 특히 2001년부터 2015년까지 15년간 삼성의 1군 매니저로 재직했는데, 이는 KBO 매니저 최장수 기록이다.
    • 나광남 : KBO 심판.
    • 신동주 : 1991시즌 입단, 1997시즌 백인천 감독의 팀 리빌딩 과정에서 잠재력 폭발, 이후 2006시즌까지 삼성과 기아를 오가며 선수생활.
    • 이광길 : 프로팀 코치, 최강야구 코치,[42] 해설위원.
    • 이문한 :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롯데 자이언츠 운영부장.
    • 이상훈 : 1990시즌 입단, 1999시즌 두산으로 트레이드 이후 팀의 핵심 불펜요원으로 자리잡음, 이후 2004시즌까지 저니맨으로 선수생활.
    • 이영재 : KBO 심판.
    • 전상렬 : 1991시즌 입단, 1997시즌 한화로 트레이드 후 조금씩 경기출전기회 얻음, 1999시즌 두산으로 트레이드 후 선수로써 완전히 자리를 잡고, 이후 2009시즌까지 선수생활.
    • 정경훈 : 1990시즌에 입단해서 1994시즌까지 삼성에서 활약. 사실 정경훈은 삼성 시절에도 나름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었던 내야수였지만 큰 스포트라이트까지는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1995시즌 한화로 트레이드된 후 출전한 올스타전에서 올스타전 MVP[43]를 수상함으로써 야구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44] 아쉬운 점은, 그 이후에는 선수로써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은퇴하게 된 점이다.
    • 정성룡 : 1984시즌 입단 후 삼성에서는 9시즌 동안 후보선수였지만, 1992시즌 후 해태로 트레이드되고 나서 주전 지명타자 자리 차지+해태의 1993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헌.
    • 최해명 : 은퇴 후 아마야구 지도자 과정 중, 투수 구창모(후에 NC 입단)를 발굴하고, 일종의 후견인 역할까지 맡음.
    • 허삼영 : 삼성 라이온즈 전력분석원, 삼성 라이온즈 감독.

  • 전상렬허삼영대구상고 동기생으로 고교졸업 후인 1991년에 나란히 삼성에 입단하게 된다. 둘 다 삼성선수 시절에는 철저히 무명이었지만, 훗날 둘 다 한국야구사에 이름을 남긴 케이스이다.
  • 삼성의 1991시즌 개막전 상대는 롯데였는데,[46] 당시 롯데의 신인선수였던 박정태, 전준호는 대구 삼성전에서 본인들의 프로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47][48][49]
  • 1991년 7월 14일 대구 해태전에서, 이른바 이중 오더 소동이 일어난다. 이는 현재까지도 김성근 감독의 흑역사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 1991시즌 후 11월에 일본에서 펼쳐진 제1회 한일 슈퍼게임에,[50] 삼성 선수로는 김용국, 류중일, 이만수 3명이 한국 대표팀 선수단에 발탁되었다.[51] 그리고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김성근은 한국 대표팀 투수코치로 발탁되었다.[52] 한편, 재일동포 투수 김성길이 그해 좋은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국적 등 문제로 한국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한동안 논란이 일기도 했다.[53] 그 외 1루수 신경식도 그해 좋은 성적을 기록해 대표팀발탁이 기대되었지만, 1루수 부문에 김성한(해태), 김민호(롯데), 김형석(OB) 등에 밀려 발탁되지 못했다.[54]
  • 1991시즌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에서, 정규시즌 기준 이만수의 성적이 장채근(해태)보다 훨씬 좋았음에도, 장채근한국시리즈 MVP+우승 프리미엄+한일 슈퍼게임 주전포수 등의 경력으로 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이는 20**년 현재까지도 골든글러브/역대 수상 논란 사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1] 당시 허규옥은 부상으로 은퇴까지 고려했었지만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고 2년 더 활동하고 은퇴했다.[2] 참고로 김성길은 이 해 188이닝을 던졌는데 그는 이 때 30대 중반의 노장이었다.[3] 7월에 잠시 복귀하지만 몇경기만 뛰고 최종 시즌아웃된다.[4] 마침 이 경기는 KBS 지상파를 통해 생중계되었다.[5] 3연전 첫경기는 금요나이트라는 이름의 KBS 지상파 중계였다.[6] 해태는 이 3연전을 계기로 리그 단독선두로 치고나갔고, 시즌 종료 때까지 단 한번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게 된다.[7] 5월 3일 경기 : 구원패, 5월 5일 경기 : 선발패. 2경기 다 투구내용도 최악이었다.[8] 이후 7월 12일 해태전에서야 1군 복귀.[9] 이후 7월 5일 태평양전에서야 1군 복귀.[10] 이 시기 정경훈최해명이 대체 내야수로 나서게 된다.[11] 1964년생으로 1987년에 삼성에 입단한 선수이다. 특히 전년도인 1990시즌에 타율 0.249에 홈런 8개를 기록하면서 주전 외야수 한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1992년 5월에 쌍방울로 트레이드된다.[12] 1990시즌 당시는 리그가 120게임 체제에 극심한 투고타저 시즌이라, 한시즌 개인홈런 8개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당장 팀선배 박승호가 1990시즌에 홈런 20개로 리그 홈런순위 3위를 차지했다(1위는 장종훈 : 28개, 2위는 이만수 : 26개).[13] 광주일고 출신의 1970년생 투수로, 1989년 삼성에 입단했다. 이선희 당시 투수코치의 회상에 의하면, 김성근 감독이 따로 박용준의 특별 개인지도에 나설 만큼 김성근 본인이 애정을 쏟은 투수였다고 한다.[14] 박용준은 6~7월 선발투수로 6승을 기록하지만, 8월 이후 1승도 거두지 못하는 부진에 빠지면서 아쉬움을 남긴다(박용준 부분은 하단에 추가서술). 한편 강종필은 8월말까지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치다가 시즌 막판에 접어들면서 부진에 빠지게 된다.[15] 그 외 김용국, 신경식, 이만수 등도 올스타전에 참가했다.[16] 사실 김성길은 4~6월에도 (선발투수를 주 포지션에 두고) 가끔씩 마무리투수 혹은 중무리투수로 등판했다. 그렇지만 7월 시작부터 시즌 종료때까지는 단 한차례(9월 13일)만 선발등판을 가진다.[17] 5경기를 휴식일없이 연달아 등판하면서 세이브를 기록했다는 의미로, 20**년 현재까지 KBO 신기록이다.[18] 그리고 시즌 종료까지 김성길에 대한 혹사는 이어진다.[19] 7이닝 1실점 승리투수.[20] 5이닝 1실점 노디시전.[21] 선동열이 KBO 기준 한경기 2피홈런을 허용한 경기는 본 경기가 유일하다.[22] 김성근 감독의 이중오더 사건이 발생한 것도 본 경기이다.[23] 더블헤더 포함.[24] 4연전 첫경기가 특히 아쉬웠는데, 2대0 삼성 리드상황, 그리고 선발투수 류명선이 7회 2아웃까지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다가 장종훈에게 동점 2점홈런 허용 후, 연장 10회에 후속투수 김상엽이 끝내기 희생타를 허용하면서 패배한다.[25] 만약 이 3연전을 모두 승리한다면 선두탈환이 가능했던 상황.[26] 9월 13일 대구 빙그레전에서는 (지난 두달간 구원투수로만 뛰던) 김성길을 선발등판시켜 5이닝을 소화하게 함으로써, 선발투수로서의 재적응도 시킨다. 그리고 실제로 김성길은 빙그레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 선발등판해 1실점 완투승을 거두기도 한다.[27] 2승 모두 구원승이다.[28] 여담으로, 이날 삼성 원년코치 출신의 임신근 당시 쌍방울 코치가 경기장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별세한다.[29] 2차전 9.1이닝 2실점, 4차전 6회까지 2실점(7회에 대량실점했지만).[30] 1차전ㆍ3차전에 선발등판했지만, 1차전 5회 1아웃까지 3실점 후 강판, 3차전 1회 2아웃에서 김민호에게 2점홈런 허용 직후 조기강판.[31] 이정훈-이중화-이강돈-강정길 등이 좌타자.[32] 마지막 4차전에 가서야 패전처리로 등판. 참고로 4차전은 삼성이 3대10으로 대패했고, 그 경기에서 성준은 삼성의 마지막 투수였다.[33] 5월 29일 잠실 OB전에서 데뷔 첫 승을 완투승으로 장식했고, 이후 두달 동안 선발투수로 6승을 수확했다. 특히 6월 15일 대전 빙그레전에서 당시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소문난 빙그레 타선을 상대로 2실점 완투승을 거두는 장면은 백미.[34] 포스트시즌 엔트리에도 들지 못했다. 그해 삼성이 포스트시즌에서 만난 롯데와 빙그레 모두 좌타자 위주 타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좌투수 박용준의 공백이 더욱 아쉽게 다가왔다.[35] 롯데는 전준호-김응국-김민호-이종운-조성옥 등이 좌타자.[36] 빙그레는 이정훈-이중화-이강돈-강정길 등이 좌타자.[37] 구윤, 김성래, 이종두, 이현택 모두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도 제외된다.[38] 특히 빙그레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 4회 무사 만루 상황에 대타로 출전해 병살타를 기록하는 장면(팀은 그 상황에서 단 1득점)은 그날의 승부처였다.[39] 조범현, 이광길, 최홍석 등등. 이는 투수 쪽의 윤석환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나마 최일언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괜찮은 활약을 펼쳤다.[40] 이만수는 그해 8월까지 리그 수위타자를 다툴 정도였고, 김용철은 시즌 홈런 15개로 이만수(17개)에 이어 팀내 홈런순위 2위에 OPS도 0.8을 돌파했다. 단, 김용철은 박승호와 플래툰으로 뛰는 바람에, 타석수 자체가 많지는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41] 그렇지만 이후 빙그레와의 플레이오프에서 김용철은 부진을 거듭했고, 특히 2차전 1대1 동점상황 연장 10회 1사 만루에서 (송진우 상대) 삼진으로 물러남으로써 아쉬움을 더했다. 팀 또한 이후 무득점과 함께 2차전 경기에서도 패배.[42] 대표적인 김성근 사단 중 한명이다.[43] 일명 미스터올스타.[44] 참고로 삼성소속 선수가 올스타전 MVP를 수상한 사례는 (20**년 기준으로) 1985년 김시진이 유일하다.[45] 전상렬2005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과 대결하지만, 이때는 삼성이 우승한다.[46] 날짜는 1991년 4월 5일, 장소는 대구.[47] 박정태, 전준호 모두 개막전에 선발출전했다. 특히 박정태는 롯데의 개막전 1번타자를 맡았다.[48] 전년도인 1990시즌에는 롯데의 투수 박동희가 대구 삼성전에서 본인의 프로 데뷔전을 가진 바 있다. 더 멀리 올라가면, 1985시즌에는 해태의 투수 선동열이 대구 삼성전에서 본인의 프로 데뷔전을 가진 바 있다. 박동희ㆍ선동열 둘 다 당시기준 각각 최고계약금을 받고 프로에 입단했던 선수였던 관계로, 프로 데뷔전 자체가 큰 화제를 모았다.[49] 이후 1994시즌에는 롯데의 투수 강상수가 개막전으로 펼쳐진 대구 삼성전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앞선 언급한 박동희ㆍ선동열이 모두 프로 데뷔전에 구원등판했던 것과는 달리 강상수는 무려 개막전+대구 삼성전+프로 데뷔전에 선발등판하게 된다(결과는 패전투수).[50] 총 6차전까지 펼쳐진 대회이다.[51] 류중일은 1~6차전 내내 유격수 주전, 김용국은 1~3차전은 3루수 백업을 맡다가 4~6차전은 3루수 주전, 이만수는 1~6차전 내내 포수 백업을 맡았다.[52] 당시 한국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감독 김응용, 투수코치 김성근김인식, 타격코치 강병철로 구성되었다.[53] 이후 1995년 제2회 한일 슈퍼게임에서는 팀후배 김상엽이 그해 좋은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한국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했고(발탁불발이유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논란이 일기도 했다.[54] 1991 한일 슈퍼게임 당시, 1루수 주전은 김성한에 백업은 김민호가 맡았다. 한편, 김형석은 1루수와 외야수를 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