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5-03 09:11:33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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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1. 개요2. 유비군
2.1. 익주2.2. 형남2.3. 기타
3. 서량4. 익주(舊유장)5. 동오
5.1. 조정5.2. 군부
6. 조위
6.1. 조씨 일족6.2. 조정6.3. 군부6.4. 기타
7. 형북


1. 개요

본 문서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그 행적을 서술한다.

2. 유비군

주인공 유비의 세력권. 동오와 함께 얻은 형남 삼군에서 시작해 세력을 키운 다음 한중을 차지, 한중을 기반으로 해 다시 서량에 영향력을 뻗치고는 형남과 한중에 있는 주력군 대부분을 동원해 입촉한다. 즉 213년 기준 현재 세력권은 한중과 형남. 익주 북쪽인 파군과 서량 일대도 점령하거나, 동맹을 통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17년 기준으로는 형남은 2군 분할되었지만 대신 익주를 정복하면서 기존 한중과 형남을 먹고 있을 때보다 세가 더 불었다. 거기다 중원의 반조조 인사들도 지속적으로 넘어오고 있어 형남의 군세 강화에 나름 보탬이 되고 있다.

세력으로서의 목표는 당연히 조조 격파와 한실 부흥으로 이를 위해 제갈량이 세운 융중대를 대전략으로 삼고 있다. 입촉 직전의 동원력은 한중에서 2만. 형남 2군에서 3만. 익주에서 7~8만 명 가량이다.[1][2] 조위 혹은 동오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3만여의 병력이 형남에 남겨졌다. 서량 전쟁 시점에선 원정군으로만 최대 5만을 동원했다고 나온다.[3] 특히 직접 순찰을 나온 조조를 습격하기 위해 기병만 2천기를 보내는 저력을 선보이기도 한다.

서량 전쟁이 종전된 이후 동오측에서는 유비군의 총동원력을 15만 이상으로 판단했다. 다만 국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익주가 고립된 지형이라 7~8만 이상의 동원은 가성비가 떨어진다.

익주 정복 후 조조의 역적 짓에 저항하는 이들을 받아들여 모병군을 편성하고, 수송선을 위주로 200척이 넘는 대선을 건조해 수군 양성에도 노력하고 있다.[4] 서량 전쟁 이후에는 익주의 경제력과 서량의 군사력을 더한다 해도 조조의 정예 철기에 맞서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에 서량 기병과 파촉 강노병을 조합해 맞서려고 계획중이다.

내부 계파는 유관장 삼형제를 필두로 거병 초기, 객장 시절에 합류한 이들[5], 형주계[6], 익주계[7]로 구성된다.

2.1. 익주

한중을 먼저 차지하고 서량에서 마초 구원에 성공한 뒤 관우, 장비를 소환하고 위연을 한중태수로 배치한 후 입촉을 시작했다. 임상대치 이후 유장의 항복을 받아 근거지를 성도로 옮겼으나 북벌의 중심지로는 거리가 먼 성도보다는 3주를 잇는 교통 요지 한중이 적합하기에 익주가 안정화되면 다시 한중으로 치소를 옮길 예정이다.

원 역사에서 조조가 장로를 정벌한 이후 한중 백성들을 몽땅 이주시키는 바람에 유비가 점령 이후 한중을 처음부터 재개발하느라 시간과 돈이 빨려들어 형주 쪽 움직임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었고, 결국 유비 생전에는 개발이 안 되서 제갈량 시기에 가서야 군사도시로 자리잡는데 여기서는 한중을 먼저 차지한 덕분에 즉시 전력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마초가 이끄는 반조조 군벌을 지원하거나 상용으로 넘어온 악진군을 영격하는데 유용하게 써먹었다.

입촉 직후부터 유비의 후원 아래 익주인들이 주도하는 대대적인 개발 사업이 추진되어 원 역사에선 촉한 말기에나 안정 되는 남중 지역도 일찌감치 수혜를 입을 전망이며 형주계와 익주계의 대립도 유비라는 중재자 아래 없거나 원역보다 크게 완화될 전망이다.

유비는 융중대 실행 시 한중의 수로를 이용해 상용-양양으로 이어지는 북벌을 계획하고 수군을 대거 양성한다. 서량 전쟁 이후로 익주계 장수들이 북중국을 지배하는 조조군을 격파한 승전에 고무되어 유씨 왕조를 익주에서 다시 세울 계획을 지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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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통
    유비군의 책사. 정략과 군략 양측에 뛰어나 빙의 직후라 정신없는 유비 대신에 군사 작전 시에 총지휘를 담당한다. 본래 유비의 명령대로 입촉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으나, 유비가 전략을 바꿔 한중 정벌을 주장하자 그쪽이 마음에 든다면서 바로 찬동한다.[8][9] 한중 공략에서 전황을 읽고 공격을 정하는 등 활약하고 이후 서량 진출에도 유비의 책사이자 군사 지휘관으로 동참한다.

    자기 눈으로 전장을 봐야 하는 현장파 책사라서 아직 전투 중인데도 말을 몰고 적진 가까이 가는 등 위험한 면모를 보여서 유비가 늘상 호위를 붙여놓는다. 원 역사에서 어이없이 유시에 맞아 죽은 이유도 마음이 급한 데다가 이런 성향의 탓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담백한 성품으로 상용 전투에 종군할 군사로 법정을 추천하며 먼저 양보해주었다. 상용에서 귀환한 유비가 본격적인 익주 정벌을 시작하자 다시 종군을 시작. 정예 병력으로 빠르게 친다는 전략을 완벽히 성공시키며 부성, 백마관, 낙성을 연달아 함락시킨다.

    성도 정복 이후 유비가 유파를 불러 회의하는 자리에서 동탁의 사례를 우려해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직백오수전 발행 이야기를 끊어버리지만 이어진 회의에서 유파가 보다 상세한 근거로 논의를 전개하자 수긍한다. 군사제도 논의에서는 법정이 제안한 병호제를 지지했으며 손권이 조만간 배신할 것이라는 유비의 예견에 법정, 황권과 함께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다.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찾는데 익숙한 참모들 생각에는 손권이 조조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는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 한중 도착 후 진군로를 두고 회의할 때는 기산도를 밀었다.[10]

    유비의 의중대로 야곡도->위수 도하에 성공하자 법정과 합을 맞춰 장안을 직공하는 척 하며 진창을 치는 기만전술을 펼친다. 두 참모의 기만 전술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유비조차 긴가민가 할 정도. 진창 공방전에서는 법정이 전선에 가있는 동안 후방에서 유비를 보좌한다. 유수구의 역병 확산에 더해 황권과 관우가 조홍을 격파하고 지원오자 환호성을 지르며 승리를 확신한다. 북원 대치가 승리로 끝나고 유비의 막료들이 칭왕을 요청할 때 형주계 대표로 나섰다. 이후 법정이 앞장서서 유봉을 폐할 것을 제안하자, 형주에서 함께 고생한 만큼 대놓고 찬성하진 못하나 유비가 끝내 거절하자 법정에게 힘을 보태 유비를 설득하려다 실패한다.

    북벌에서도 유비를 보좌하며 후음의 난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일단 상용의 호족들을 달래는 동안 장군 1명을 보내서 그들을 지원하자고 말해 유비가 마초를 파견하게 한다. 법정과 함께 유비군의 작전을 전담해 호수, 부방을 치는 척 하며 조홍군을 끌어들여 평야에서 요격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징집 보병으로 기병 전력에서 압도하는 위군에 상대하기 위해 수레와 궁노수를 활용한 포진을 고안하는데 주어진 상황이 동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제갈량의 팔진도와 유사한 진형이 나왔다.

    조홍군을 격파하고 10개월의 대치 중에도 분명 조조 세력에 변고가 있을거라 버텼으나 끝내 포기하려던 찰나 홍수로 인한 양번 포위 성공을 듣자 환호한다. 이후 우금군의 침수까지 들려오자 유파의 말대로 유비의 천자 즉위를 지지한다. 완성을 구원한 후 제갈량이 우금군 포로들의 처우를 묻자, 공명이 그런 것도 알아서 못하고 묻냐고 화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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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충
    유비군 장수. 형주목 유표의 중랑장으로 조조에게 형주가 넘어간 이후 형남 공방전 때 유비 산하로 들어온 인물. 노장임에도 병력을 이끌고 앞장서서 한중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이후에도 서량의 기성에 일꾼으로 위장 잠입해 마초의 가족들을 구해내는 활약을 보인다. 천성이 선량한지 악행을 저지른 호족들과 조조군을 상대할 때 유독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입촉에서도 앞장서서 군을 이끌며 여러 성을 떨어뜨린다.

    입촉 이후 익주인들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으며 서량 전쟁에서도 유비를 수행한다. 진창성을 치기로 갈 시점에 주장으로[11] 원역사 한중 공방전에서 함께 한 법정과 절묘한 호흡으로 적장 하후연을 참수한다. 이후에도 서황이 두 번 속을 인물이 아님을 눈치채고, 진창성 입구를 차단해 조조군의 항전 가능성을 끊는다. 진창이 함락된 후 유비는 관우와 황충을 나란히 세워 위상을 확실하게 세워줬다. 조조의 본대가 당도하자 유비에게 병력 1만을 받아 법정과 함께 오장원을 지킨다.

    굉장한 명궁으로 화재현장의 난장판 속에서도 언뜻 보이는 실루엣으로도 활을 쏘아 준수한 명중률을 보이고, 제대로 쐈을 때는 막는 것이 아니면 빗나갈 일이 없다. 때문에 유비는 군을 맡길 때 궁노병 부대를 주로 맡기는 일이 많다. 물론 오호대장으로 구분되는 만큼 근접전도 뛰어나서 비록 지쳤다곤 하지만 하후연의 호위들을 앞장서서 쓰러뜨리며 돌파해 하후연의 목을 직접 벴다. 유비의 촉한왕 등극 이후 후장군에 임명된다.

    218년 유비의 북벌에도 종군. 유비군 좌익 1만 8천 명을 법정과 함께 지휘해 절묘한 타이밍의 위협 사격으로 적군의 간격을 메꿔서 장비의 기병대가 조위군을 밀어버리게 돕는다. 완성 구원전에서도 장비, 마초와 함께 조홍군의 목책에 대한 공세에 참여하여 주령과 맞선다. 승리 이후 완성에서 재정비해 남하, 양번에 합류한다. 이후 8천 병력으로 은서의 5만 대군을 요격하는 역할을 맡는다. 장비가 도발해 끌어낸 은서군 3만 5천에게 열세로 도망치는 척 하다가 재집결해 후방에서 단숨에 공격, 신병이 많은 은서군이 맞서지 못하고 밀리자 그대로 붕괴시켜 사상자만 수만에 달하는 대승을 거둔다.
  • 위연
    형주 출신의 유비군 장수. 뛰어난 무예와 전술안을 가진 맹장으로 어지간한 무인이나 병사 몇 명 정도는 혼자서도 가볍게 참수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호전적인 성격으로 한중군 정벌에 활약하고는 마초가 유비군이 서량에 들어오는 걸 거부하자 유비가 미리 준비한 보군 2천을 데리고 마초를 끓리겠다고 호언장담할 정도.[12] 이후 기성에 황충과 함께 잠입해서 반란을 일으킨 호족들을 베어버리고 마초의 가족들을 구한 뒤 유비와 마초의 원군이 올 때까지 기성을 지켜낸다. 서량에서 귀환한 후 유비가 익주를 정벌하는 동안 한중을 지킬 장수로 낙점된다.[13] 한중에 도착한 유비군 수뇌부가 진군 방향을 두고 진창도와 야곡도를 두고 씨름할 때 자오도를 제안했다가 장비를 위시한 상관들에게 한 소리 듣고 바로 꼬리를 내린다.

    그대로 유비에게 합류해 서량으로 출진하여 유비가 북원을 점령할 도하 부대를 보낸다고 하자 직접 자원해서 부대를 지휘해 도하한다. 도하한 후 뒤늦게 달려온 오환 정찰병 2백기를 격파하고, 왕이 부재한 오환족이 주력군을 보내지 못한 사이에 진지를 설치해 그대로 북원을 점령해버린다. 이후 북원 방비 임무를 맡아 진창성에는 함께 가지 못한다. 공세지향적이고 과감한 시도를 즐기는 점은 나이들어서와 같지만 하늘 같은 상관들이 우르르 줄 서 있는 시절이라 언성 높아지면 끽소리도 못 하는 신선한 모습을 보여준다. 유비의 북벌 시기에도 유비 휘하에서 종군하며 신야 전투에서 군의 우익을 지휘한다. 완성 구원전 이후에는 왕평과 함께 완성에 남아 완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다.
  • 유봉
    유비의 양자. 형주에 있다가 두 숙부와 함께 한중에 들어온다. 법정은 그를 상용에서 관우를 보좌할 부장으로 천거하나 원 역사의 행적이 찜찜했던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서량 전쟁 이후 법정이 다시 그를 상용에 보내자고 제안하지만[14] 유비는 원 역사에서 그 결과가 좋지 않았음을 알아 일축시킨다. 이때 유비는 양자라도 아들이라면서 정치적 이유로 치워버릴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자르는데 원 역사에서의 맹달과의 문제도 그렇고, 유봉의 최후는 정치적인 이유로 상용에 쫓아낸 것에서 생긴 불협화음이 원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15] 이후 상용에는 장완과 방덕이 가기로 결정되면서 원 역사의 치워지는 엔딩을 피했다.[16] 이후 유비의 북벌 때 유비 휘하에서 종군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 관평
    관우의 아들. 상용으로 출병한 아버지를 보좌해 보병대를 지휘한다. 이후 오랫동안 등장이 없다 완성 구원전에서 결전을 앞두고 긴장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 요화
    관우의 부장으로 등장. 처음에는 주창이었는데 정사 베이스면서 왜 연의에서나 나오는 가상인물을 등장시켰냐는 지적에 요화로 수정되었다.[17] 다만 요화는 한중 공방전 당시 합류했기에 이 시점에 오랫동안 관우의 부장을 했다는 서술과 함께 등장한 것은 오류다. 차라리 조루였으면 기록이 없어 작가가 얼마든지 이력을 창작할 수 있어 오류가 아니었을 텐데 아쉬운 부분.[18] 이후 북벌 초기에 황권이 한중에 머무르고 있다고 언급하며 완성 구원전에서 관우를 보좌한다.
  • 왕평
    파군으로 진군한 관우와 인연이 닿아 유비군에 사관한다. 이후 위연과 함께 완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는다.
  • 풍습, 부융, 장남, 조융
    원 역사에선 이릉대전에서 전사하는 유비군 2세대 장수들. 시작 시점에선 부장으로 잡다한 역할을 수행한다. 지휘력은 검증되지 않았으나 무예와 용맹은 다들 뛰어나서 소규모 단병접전에선 탁월한 면모를 보이며 하후연의 기병대에 기습당했을 때도 방통의 지휘 아래 악착같이 버텨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후 입촉에도 종군. 부성부터 낙성까지 주요 전투에 쭉 종군하며 공을 세운다. 풍습은 관우, 장비를 보좌해 성도를 위협하는 별동대로 활약하고, 부융은 방림과 광한을 공격하는데 투입되는 등 꾸준히 지휘 경험을 늘려가고 있다. 장남은 서량 전쟁에 종군해 진창 공방전 당시 황충을 보좌하며 전장에서 싸우고 진창성을 공략한다.
  • 상총
    형주에서부터 유비를 섬긴 무장. 218년 남양 원정에 종군. 풍습과 함께 무당과 서성 사이에 위치한 양현에 주둔하며 한중에서 서성을 거쳐 전달되는 물자 보급 임무를 맡는다.
  • 오란, 뇌동, 진식
    유장 휘하에서 유비 측으로 넘어온 항장들. 원역사에서는 셋 다 한중 공방전에서 적은 병력으로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가 오란, 뇌동은 전사하고 한중에 이릉까지 거치며 구사일생한 진식만 제갈량의 북벌 시기까지 살아남아 음평, 무도 병합에 공을 세웠다. 이민족 기병을 지원받은 염행이 공세를 시작하자 선발대를 이끌고 먼저 떠나게 된 황권의 부장으로 임명된다. 유비는 원역에서 죽거나 패했던 셋을 내보내기 망설였으나 익주 출신 중에 주장급인 황권과 장임을 빼면 이 위치에 들어갈 다른 사람이 딱히 없고 원역사처럼 불리한 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에 믿고 내보낸다. 서량 전쟁 막바지 조조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자 감격해서 서로 얼싸안았다고 한다. 이후 북벌에서도 종군하지만 장료의 기습을 받아 오란은 죽게 되고 뇌동 역시 죽을 뻔 하지만 타이밍 좋게 장비가 개입하며 아슬아슬하게 살아남는다.
  • 방림
    방통의 아우. 장리천 전투 당시 형과 함께 유비를 보좌했으며 입촉때는 부융과 함께 군마 2천을 끌고 광한에 고립된 황권에게 낙성 함락 소식을 전하며 항복을 권한다. 낙성과 달리 성곽의 견고함이나 방어 시설이 열악한 광한성을 서둘러 공격하는 대신 천천히 옥죄는 전술을 택하는데 하필 손권이 유비의 뒤통수를 치면서 계획이 어그러진다.
  • 법정
    유비와 협력하는 익주의 참모. 방통과 달리 위험하겠다 싶으면 즉시 뒤로 빠지는 성격이다.[19] 유비가 한중을 차지하고 서량에 간 동안 혹시 모를 유장의 배반에 대비해 백수관을 지키고 있었으며 유비가 한중으로 돌아온 후에 익주 정벌 논의를 위해 불러들인다. 이때 악진이 장로를 데려오기 위해 상용으로 오자 상용에 파견할 장수로 관우를 추천했으며 방통의 양보로 상용으로 가 유비를 수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후 상용 전투에서 관우에게 밀리는 척하면서 함정을 파는 악진의 움직임을 즉시 파악하고 보병대를 이끌고 대응해 무승부를 이끌어낸다. 상용에서 귀환한 뒤 입촉에 동행해 방통과 함께 군사참모로 활약하는데 이때 낙성을 앞에 둔 유비에게 정예 기병대를 샛길로 침투시켜 성도 인근 동주병 소유의 전답들을 초토화시켜 싸우지 않고 낙성을 무너뜨리는 계책을 알려주나 관우가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자 한 발 물러선다.

    보복 정신의 소유자로 유명한 것과 별개로 자신이 유비군에 갓 임관한 외부인사임을 잘 알고 있어 기존 유비군 중진들, 특히 최고참 관우와 마찰 빚을 일은 최대한 피한다. 관우, 장비가 별동대를 이끌고 떠난 뒤에 황충과 함께 낙성 공략에 참여했고 입촉 성공 이후에 군사 정책 논의에서 조조의 청주병을 본딴 병호제를 지지하며 기존의 동주병을 병호로 발전시킬 것을 조언하나 유비는 그것이 효율적인 대책임을 알면서도 거부한다. 서량 원정에도 참여했으며 진군로를 두고 갑론을박할 때 진창도를 제안했다.[20]

    유비의 의중에 따라 야곡도로 나아간 다음에는 방통과 협력해 군략을 총괄하며 진창성 전투에서는 원역사의 한중 공방전에서 함께 활동했던 황충과 움직인다. 원역사의 한중 공방전과 같은 차륜전으로 하후연, 서황과 격전을 벌이던 중, 조조의 발목이 묶이고 위수를 따라 원군이 들어오자 승리를 확신한다. 이후 일부러 물러나는 척해서 하후연을 끌어낸 다음 완벽한 역공으로 하후연을 참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조조군의 본대가 서량으로 향하자 황충과 함께 오장원에 파견되어 가후, 조창과 대치하며 가후가 조장한 삼보의 난 때문에 굶어 죽을 뻔한 경험이 있던 덕에 가후에게 악감정이 있어 그와 치열한 설전을 벌인다. 물론 가후는 알 게 뭐냐는 태도로 법정의 항의를 씹었다.

    종전 후 유비와 익주계 신하들의 한중왕 등극 상언 후에는 유봉을 상용에 보내자는 제안을 한다.[21] 상용은 기름지나 좁고 고립된 땅이라 움직임이 제한될 수밖에 없기에 사실상 유봉을 유비군의 중심에서 치우자는 말이었고, 원 역사의 비극이 반복될 가능성을 걱정한 유비는 안 된다고 못 박는다.

    북벌에 참가해 방통과 함께 유비군의 작전, 전술을 도맡는다. 방통과 머리를 맞대고 징집된 파촉 보병들로 기병 전력에서 우세한 위군을 대응하기 위해 고민한 결과 제갈량의 팔진도와 거의 유사한 지형을 고안해냈다. 황충과 함께 좌익에 배치되었고 조위 기병이 관우의 중군에 붙들려 늘어지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틈을 만든 뒤 강노수들로 엄호해 장비의 기병대가 난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신야현 전투 이후엔 조위군이 14만의 대군으로 포위 후 장기전에 나서면서 압박해오자 결국 완성에서 밀려나면서도 조위에 반드시 변고가 생길 터이니 버텨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비를 지탱한다. 홍수로 인한 제갈량의 북진 이후 활로가 열리자 완성을 구원하는 건 힘 승부로 나가자고 조언한다. 이후 완성 전투 승리 후 양번에 합류, 조홍군과 장안군이 합세해 견제해오자 유비의 정보대로 신병이라면 잡아야 한다고 판단, 황충과 함께 요격해 대승을 거둔다.
  • 장완
    유비 휘하의 문관. 본래는 유비의 익주 정복 이후 두각을 드러낼 인물이나 이번에는 유비의 한중 정복에 따라와 행정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비는 장완의 존재를 안 이후 빨리 승진시켜 중하게 쓰고 싶어했지만 주변이 반발할 것을 우려해 위험천만한 기성 주둔을 자원하도록 유도한다. 그러자 유비의 기대대로 마초의 속내를 파악해 먼저 방통에게 보고했고, 이후에도 마초군에 종군하며 의견을 올려 활약한다.

    유비의 평가에 따르면 현령처럼 '심심한 일거리'보다는 실수하거나 늦으면 죽는 전쟁 보급처럼 스릴 있는 일이 적성에 맞는 인재라고 한다.[22] 장리천 전투에서 마초에게 조언하면서 그에게 인정받아 전투 이후엔 빈객으로 초대되어 책사 역할을 맡게 된다. 마초의 말에 따르면 장완이 없으면 천수군의 일처리가 안될 정도라고 하니 원 역사에서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고 있다.

    서량 전쟁 이후 굴복하지 않고 있는 방릉의 괴기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비가 상용으로 파견한다. 원역사에서도 상용 수로를 이용한 전략을 구상하기도 했던지라 보내놓으면 일을 잘 처리할 것이라 판단한 것. 213년에 서량에 파견되어 마초의 책사 겸 행정가 노릇을 하면서, 마초군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지지 않도록 잘 지탱하고 서량 전쟁이 벌어진 3년 동안의 행정도 잘 처리한 인물이라서 법정과 방통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만 군사를 받아 방덕과 함께 방릉으로 파견되어 어렵지 않게 괴기를 사로잡고 방릉에 계속 주둔하면서 유비의 원정군에게 지원할 물자를 비축했다. 본대가 도착한 다음에도 방덕과 함께 움직이며 축양현을 접수한다.

    219년 8월 장마의 직전에 상관들과 같이 퇴각 진언 행렬에 동참한다. 그러나 여기서 원역사의 성미가 나왔는지 몇 시간도 못 견디고 같이 있는 상관들은 전부 다 버티는데 혼자 화장실 간다고 나가면서 분위기를 깨버렸다.[23] 이에 상관들이 죽일 기세로 노려보자 쫄아서 횡설수설하다가 "비가 많이 내린다" 라며 가을 장마의 소식을 알린다.
  • 습정, 뇌공
    유비 휘하의 문관. 뛰어난 행정가로 이 둘과 휘하의 장완 등을 비롯한 서기들 덕에 유비는 마초와는 달리 행정적으로도 서량을 잘 흡수하고 있다. 다만 경험과 인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지라 둔전 등의 업무는 잘 진행되지 못했으나 장리천 전투를 계기로 많은 강족과 저족이 합류하면서 둔전 업무는 순조롭게 진행될 여지가 생겼다. 여담으로 습정은 역사가 습착치의 조부인 만큼 죽서기년을 보고서 바로 그 가치를 알아챘다.
  • 반준
    형주의 유력 인사. 제갈량에게 영릉 태수를 맡길 만한 인물로 학보와 나란히 추천받으나 오나라에 투항하는 그의 행적이 마음에 걸린 유비는 대신 등지를 파견한다. 임상 대치가 마무리 된 후 미방, 부사인과 함께 유비를 따라 입촉한다. 장사, 계양을 양도하며 형주에 필요한 일손은 줄었는데, 성도를 점거한 뒤 익주 전체를 관할하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셋은 자신들을 입촉 대상으로 지목한 것에 의혹을 품진 않았다. 관우전과 여몽전의 기술이 달라 적극적 배신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는 부사인과 달리 반준은 적극적 배신자는 아님이 유력하고 문무 양도에 뛰어난 인물이라 무난하게 관직 생활을 할 것으로 보인다.
  • 미방, 부사인
    강릉, 공안을 수비하던 유비군 장수들. 미방은 미축의 동생이므로 유비와 사돈이고, 부사인은 관우가 아끼는 측근이다. 원 역사상 둘의 배신에는 여러모로 의견이 갈리는데 유비는 상황에 떠밀렸을 뿐이라 여기면서도[24] 아예 익주로 데려가 배신의 싹을 잘라 버린다. 끝이 안 좋긴 했으나, 어쨌든 유비군에서 한 개 성이나 수천 단위 병력의 군사, 행정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이들이라서 무난하게 관직 생활을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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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예
    유장 정권에서 일하던 관료. 유파를 잇는 경제 관련 전문가로, 촉한 시대 그의 활약을 알고 있는 유비는 장예를 불러 촉금 생산량을 늘리라고 명한다. 장예는 익주-동오의 수요로는 공급을 늘려봤자 팔 곳이 없다고 진언했지만, 원 역사에서 조조가 말년에 사치를 유행시키면서 조위가 이후 수십년간 촉금에 막대한 돈을 쓴다는 걸 알기에 걱정하지 말라면서 생산량 증대를 실행시킨다.
  • 비시, 옹무
    비시는 중급 관료인 독군종사. 옹무는 하급 관료인 주부. 고급 관료인 유파와 셋이서 각자의 위치에서 정세를 논하고 형,익,량주의 힘을 모을 방법을 고안해볼 것을 지시받는다. 원역에서는 유파와 함께 유비에 칭제를 반대한 신하들로 유파는 처벌을 피했으나 비시는 좌천, 옹무는 목숨을 잃었다. 이후 유비에게 촉한왕을 칭하자고 제안하나, 익주천자를 꿈꾸던 주변의 분노어린 시선을 받고 대범한 유파와 달리 겁에 질린 모습을 보였으나 유비가 이를 받아들이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 포원
    익주 최고의 대장장이. 유비가 직접 쇠뇌와 원융노의 대량주문을 넣자 지원만 충분하면 1년 내에 원하는 물량을 맞출 수 있다 말한 뒤 제갈량이 그린 원융노 설계도를 보고 감탄한다. 유비의 북벌에도 따라와서 여남의 호족들을 움직이기 위해 쓰일 관인을 만든다.
  • 장로
    한중을 장악한 오두미도 교주. 본래 유언의 지원을 받아 한중을 장악했음에도 유언의 뒤를 이은 유장과 대립하며 자치를 하고 있다. 당시 명사들은 익주의 군사력이 만만하지 않은데도 장로가 밀리지 않는 걸 보고 장로가 상당한 강병을 보유했다고 착각했으나 사실 유장이 동주병을 동원하지 못해서 2급 전력만 쓰다 보니까 밀린 것이다. 장로는 군벌보다는 교주로서의 성격이 강해서 종교서적을 편찬하거나 백성들에게 재정을 풀어 복지를 제공하는 등의 종교활동에 바빠서 그다지 눈여겨볼 정예군이 거의 없었다.[25] 이 사실을 미래지식으로 아는 유비의 급습으로 인해 패해서 한중을 빼앗기고 상용으로 도피한다.

    이후 당시 한중군민 대부분이 오두미도 교도인 것을 의식한 유비가 민심을 얻기 위해 장로를 달래서 한중군에 돌아오게 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비는 간옹이 파견해 설득을 진행하고, 찬탈에 집중하느라 유비에게 시간 쏟아부을 여유가 없었던 조조는 장로를 움직여 상용에서 한중을 찔러보려 하면서 일종의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었다. 그러나 조조가 곧 장로를 끌어들이기보다는 악진과 군사를 보내 강제로 데려오려 하면서 위기에 처했고 이에 유비가 급히 상용으로 향하게 된다. 조조, 유비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관망하려는 신씨 형제의 견해를 지지하며 아들 장성을 유비측에 볼모로 보내 일단 적대하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서량 전쟁이 유비의 승리로 끝나자 성도로 와 의탁하겠다는 뜻을 전달하고 신탐과 함께 가솔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들어온다. 직접 나가 환대한 유비는 장로가 편찬 중이던 도교 경전 편찬 사업을 계속하게 해줄 것을 약속하고 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할 수 있는 성도로 데려간다.[26]
  • 장위
    장로의 동생. 오두미도 대좨주. 고령인 형 장로를 대신해 한중의 군사를 지휘하고 있다. 유비군이 쳐들어오자 2만 병력으로 양평관을 틀어막았으나, 사관계층이 부족하고 정병이 부족했던 탓에 유비군의 기습을 막지 못하고 퇴각한다.[27] 이후 정군산에서 군세를 정비하려 했으나 추격해온 황충에 의해 패배하고 도망치다가 포로가 된다.
  • 양앙
    장로 휘하의 장수. 제대로 된 정병이 없는 한중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병력을 이끌고, 병법을 아는 장수라고 한다. 그래서 유비가 붙인 별명이 오두미도 팔라딘. 그러나 유비의 한중 급습 당시 유비가 익주를 노릴 거라 생각한 장로에 의해 수천 병력과 같이 마초를 도우러 북상한 상태여서[28] 한중이 넘어가는 동안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량에 발이 묶인다. 이후 유비가 서량에 진입하자 유비와 대면하게 되며 유비는 한중군민들의 편지를 주면서 양앙을 포섭한다.

2.2. 형남

유비가 적벽대전 이후 주유를 위시한 동오의 지원을 받아 얻은 땅. 인구가 많은 북부는 조위의 영역에 있으나, 유비가 기반을 다지고 여러 인재들을 모은 중요한 지역이다. 원 역사처럼 손유간 분란이 될 소지가 높은 땅인데 유비(곽선호)는 익주를 오롯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조조 사망에 맞춰 익주와 형주에서 동시 진격하기까지 몇년만 붙들고 있으면 된다 여기며 영영 자기 것으로 만들 생각은 최소한 217년 시점까지는 하지 않고 있다.

형주 절반 가량만 차지한 상태에서 관우, 장비, 유봉을 한중으로 소환하여 전력이 더 줄었다. 전력이 줄어든 상태에서 지리적 이점을 거머쥔 손권이 언제든 쳐들어 올 수 있고, 이걸 격파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함을 아는 유비는 최대한의 대비책을 마련한다.

거리상 동오의 대군이 닿기 전에 구원이 불가능한 장사와 계양 방어는 포기,[29] 형주 서남쪽 끝의 영릉엔 심지 굳은 등지를, 익양 끝의 임상현으로 이어지는 개울에 보루를 세우는 등 대비를 철저히 했다. 결국 215년에는 원 역사보다 동오쪽에 가까운 임상에서 벌어진 임상대치로 동오의 공세를 격퇴하면서 원 역사보다 대등한 상황에서 상강을 경계로 장사, 계양군을 분할하고 후일을 대비하여 쇠사슬 작전 등을 입안했다.

218년이 되어 시간이 정말 촉박해지자 등지를 비롯한 형남의 유능한 인적 자원들을 전부 강릉 방면으로 소집한다. 한수와 장강을 통제할 수 있는 강릉만 지키면 형남 4군은 언제든 수복할 수 있고 반대로 강릉을 빼앗기면 무릉이나 영릉을 아무리 잘 지켜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 반조조 귀순자들을 받아들여 5만 가량으로 군사를 늘리긴 했으나 정예병은 2차례에 걸쳐 익주로 파병 되어 떠나 버렸고 손오를 대비하느라 수군의 질적 향상에 힘쓰다보니 조위와 회전을 벌여 승리할 능력은 심하게 부족하다. 반면 수군은 육군을 포기한데다 내정 전문가인 제갈량이 형남을 관리하고, 유비가 여론전에 힘쓰면서 반조조 세력 귀순자를 많이 받아들여서 굉장히 강력해졌다. 유비의 북벌 당시 4만 5천의 대군을 전부 수군으로 투입했으며, 제갈량이 수송선까지 동원해 수를 늘린 걸 감안해도 조위의 양번 수군, 강하 수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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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운
    관우와 장비가 한중으로 소환되면서 형남에서 제갈량을 보좌할 무관으로 선임된다. 이후 임상대치 때 유비와 재회하여 마침 임상으로 직접 파견된 관우를 대신해 유비를 보좌했다. 인재가 부족한 유비군에서 모병, 훈련, 호위, 감찰에 손부인에게 납치당한 아두 구출작전까지 온갖 실무를 다 도맡아 수행하며 혹사당하고 있었는데 임상 대치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대별산맥 인근에 숨은 반 조조 인사들을 훈련 시키라는 지시까지 받는다.[30] 이후 서량 전쟁 시기에는 망명 인사와 반군들을 받아들여 형남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자 일부 업무를 진도에게 넘긴 뒤 소수 병력으로 형북 양양성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게 되어 몇번 양양성을 찔러보지만 조인의 방어가 너무 굳건해서 지상군 단독으로 꺾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제갈량에게 전달한다. 유비의 촉한왕 등극 이후 정남장군에 임명된다. 유비가 남양에 진입해 조조군과 결전에 돌입한 사이 진도와 함께 정병 2만으로 양양의 조인 견제에 나서나 형주 육군이 질적으로 열악하고 수도 적기에 오래 싸우진 못하고 퇴각했다.

    수군을 지휘해 양양 공략에 나선 제갈량과 양동으로 상군을 이끌고 조조군의 후방을 우회. 조루의 몽충 함대를 요격하는 조조군의 측면을 습격해 성밖의 조위군을 무너뜨린다. 이후 번성에 맹공을 퍼부으며 공세적 방어를 위해 정예병력을 대동해 출성한 조인과 격돌하다 우금의 원군이 오자 일단 물러난다.
  • 진도
    관우와 장비가 한중으로 소환되면서 형남에서 조운과 함께 제갈량을 보좌할 무관으로 선임되었으며 조조를 피해 도망오는 여남군 유민들을 동향 출신의 지식과 인맥으로 위장 귀순이 아닌지 조사하거나, 군에 받아들여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는다. 유비의 촉한왕 등극 이후 진서장군에 임명된다. 유비의 북진에 맞춰 조운과 함께 양양을 견제한다. 제갈량이 직접 수군을 지휘해 양양 공략에 나서자 조운과 함께 육군을 지휘해 양동 작전에 돌입. 눈앞의 함대를 상대하느라 온 정신이 쏠린 조조군의 측면을 쳐서 양양성 밖에서의 저항을 일소한다. 이후 계속 번성을 포위하다 동오의 통수 소식을 전해지자 제갈량과 함께 원군을 이끌고 강릉으로 향한다.
  • 등지
    장래 촉한의 중신이 되는 인물. 죽서기년 발굴을 위해 위나라 땅인 하내군에 가야 하기에 유비가 비밀리에 불러내어 밀정 임무를 맡긴다. 도적떼와 부딪히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31] 인원 손실 없이 임무를 완수해냈다. 이때의 공과 외교, 군사 양쪽에 능하다는 점을 고려해 상용에도 동행, 신씨 형제와 유비 사이를 오가는 사자 역할을 맡는다.

    상용에서 돌아와 익주 정벌에 나서기 직전, 동오의 형남 공격에 대응할 담력 있는 지휘관을 물색하던 유비는 원역사에서 익양대치 당시 항복해버린 학보를 대신해서 마침 공도 세운데다 남양 출신이기까지 한 등지를 영릉 태수로 파격 승진시킨다.[32] 이후 유비가 등지에게 딱 한 달만 버티면 항복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당부하자, 등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릉을 지켜낼 것을 다짐한다. 태수가 된 후 유비의 지시대로 군사 훈련 및 성을 수리하는 일을 철저히 챙겨 영릉 사람들의 반발에 부딪히던 중 여몽이 쳐들어오자 사람들을 잘 다독여 성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조위 내부의 반란과 손권의 배신이 멀지 않은 218년. 영릉태수에서 강릉으로 전임된다. 북벌 시점에서 제갈량이 연 회의에 참가해 마속의 동오 내 권력투쟁으로 인한 배신 가능성 부정에 감탄하며 믿어버린다. 물론 등지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상당수 마속에게 호응한 것을 보면 등지가 호구라서가 아니라 그만큼 마속의 말이 그럴 듯 했기 때문.

    유비의 북벌 시점에서는 강릉을 수비하고 있으며 동오의 통수 소식이 전해지자 과거 임상대치의 경험을 기반으로 버티면 원군이 올 것이라 믿고 제갈량이 준비한 쇠사슬과 쇠막대를 배치하며 방어 의지를 다진다.
  • 학보
    형남의 유력 인사. 반준과 함께 영릉태수 직을 맡을 만한 인물로 제갈량이 추천하나 익양 대치를 대비하던 유비는 (적극적 배신은 아니지만)오나라에 투항하는 반준과 학보 대신 등지를 파견한다.
  • 요립
    장사태수. 익주와 남군 방면으로 주력군이 차출되어 치안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 밖에 없었던 장사군에서 어렵사리 2천 군사를 모아 여몽측에 맞서보려 했으나 훈련이 전혀 안 된 오합지졸이라 금새 흩어져 버렸다. 주력군이 다 빠진 상황에서 성을 못 지키는 게 당연함을 아는 유비는 죄를 청하는 그를 질책하는 대신 관우와 함께 임상현을 수복하게 한다. 이때 진짜 쌓인게 많았는지 수복전에 의욕적으로 참여해 임상성 성문에 대놓고 나서서 당장 문 열라고 외쳤다고. 이렇게 수복한 덕인지 서량 정세가 흔들려 이뤄진 타협으로 임상성이 동오에 넘어가게 되자 분함을 숨기지 못한다. 사서에서는 모난 성격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유비는 그렇게 된 게 순전히 천성이 못 되어서라기보단 평판 꼬이고 승진 경쟁에서 밀린 스트레스 탓도 있다고 봐서 일부러 임상 수복에 동행시켜 공을 세우게 하고 체면을 살려줬다.
  • 마량
    제갈량의 의형제나 다름없는 사이고 마씨 집안이 형주의 명사 집안이라 자연스럽게 등장. 제갈량처럼 동오 정계의 상세한 흐름까지는 엿보지 못하지만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고 성급하게 계책을 내는 아우를 제지한다. 직접 양양 공략에 나선 제갈량을 보좌한다. 만총의 극렬한 저항에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너무 서두른 게 아닌가 걱정했으나, 곧 제갈량이 준비한 조운과 진도의 별동대가 조위군을 격파한다.

    박식하고, 언변이 뛰어나고, 인품도 좋아서 전투 시에는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고 안심시키는 역을 주로 한다. 번성 공방전에서도 홍수는 한고조와 하늘이 내리는 심판이라면서 아군을 독려하다가 우금의 급습으로 물러나게 되자 '너무 갔나' 하고 후회하지만 직후 한수의 범람으로 우금군과 번성이 동시에 박살이 나는 광경을 보고는 말을 잃는다. 빗소리가 사람 목소리처럼 들려서 어안이벙벙해하다 벼락이 치자 화들짝 놀라는 것은 덤.
  • 마속
    빙의하지 않은 그냥 마속이라 언과기실하다. 동오의 배신을 우려해 소수의 별동대로 양양을 견제하는 선에 그치려는 제갈량에게 대호족이자 일족이 손씨에게 해를 입은 적 있는 육손이 군권을 쥔 것을 근거로 합비에서 참패한 손권이 호족들에게 국정 주도권을 빼앗겼으니 형주를 공격할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동오 내부의 사정을 모르는 대다수 촉한인들에겐 그럴싸해보이는 설명이나 형 제갈근을 통해 동오 내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던 제갈량은 믿지 않고, 그럼에도 육손의 서신을 통해 진의를 읽어보겠다며 미련을 보이나 이것이 선을 넘기 직전이라는 것을 눈치챈 형 마량이 제지한다. 이후 홍수로 인해 수로가 열리자 제갈량과 유비의 진의를 파악하곤 자신의 짧은 식견을 민망해하며 뒤통수를 벅벅 긁는다.
  • 비의
    제갈량의 측근관료. 마속의 설명에 공감하며 사병을 세습하는 동오에서 손권이 군부 통제력을 상실했다면 형주를 공격하는 건 불가능 할 거란 주장에 힘을 실는다.
  • 조루
    유비군 수군도독. 유비의 북벌 때 대홍수로 생긴 새로운 수로를 통해 양번을 습격한다. 만총이 보루에 발석거와 궁수들을 올려 저항하는 바람에 잠시 애를 먹지만 조운과 진도가 이끄는 육군이 정확한 타이밍에 양동을 걸어줘 승리를 쟁취한다. 여담으로 이름이 이름인지라 깃발이 비에 젖어 축 늘어졌다는(...) 이름을 이용한 개그가 나온다.
  • 첨안, 진봉
    유비령 형주군의 장수들. 유비의 남양 진출 당시 빨리 출병해야 한다는 마속의 말에 힘을 실었으며 이후 대홍수로 물길이 열려 형주군 선단이 출진하자 도독 조루의 부장으로 참전해 양번 수군을 전멸시킨다. 이후 홍수로 언덕에 고립되어 고통받는 우금군을 흔들기 위해 가까운 곳에서 고기를 구워 먹으며 냄새를 풍기고 1잔만이지만 술도 마시며 그 과정서 남는 음식을 조금이지만 쪽배에 실어보내는 사악한(?) 심리전술을 펼친다.

2.3. 기타

  • 노석
    조조 산하의 오환왕.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서량에 와서 미현에 주둔하며 유비군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태원군에 있는 아내가 그리운 나머지, 몰래 아내를 만나러 가는 대형 사고를 쳤다. 이는 원역사에서도 있었던 일로, 이를 아는 유비는 이 기회를 노려 위수를 건넜고 왕이 없는 오환족 수천 명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이후 원역사대로 양습이 파견한 군대에 쫓기다가 장비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 과정서 노석을 쫓던 조조군 도위 장경이 죽은 탓에 조조 산하로 돌아가는 건 물건너 가버렸고 결국 같이 왔던 오환 기병들과 함께 유비에게 귀순한다.[33]
  • 진거
    여남의 호족. 숙부가 원소의 문객으로 관도대전 당시 원소의 지시를 받고 조조의 후방을 어지럽혔다. 원가가 패망한 후 숙부는 책임을 지고 자결했고 조조는 겉으로는 용서했으나 관원들을 보내 감시를 멈추지 않았다. 관원들이 찾아올 때마다 금품과 접대를 요구하는 바람에 가산을 탕진하고 나앉을 지경에 이르자 반란을 결심, 217년에 대별산맥을 타고 형남의 제갈량에게 귀순한다. 이때 어찌나 열받았던지 제갈량을 접견한 자리에서 유수구 일대의 역병은 하늘이 역적에게 내린 벌이라며 증오를 감추지 않았을 정도. 그래도 위장 귀순을 우려한 제갈량은 진도에게 뒷조사를 맡겨 하인들까지 전부 조사한 다음 받아들였다.
  • 진저
    예주 영천군에서 군을 일으켜 유비에게 협조한다. 곽현신이 압송되어가자 그를 압송하는 군졸들을 물리치며 구한다.
  • 곽현신
    예주의 명사. 경기, 위황, 길비의 난에 연루되어 허도로 압송되었으나 진군을 비롯해 인맥이 여러 갈래라 다채롭게 구명을 놓았기에 점잔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본인은 조조를 배신할 마음이 전혀 없었으나 진저의 반군이 들이닥쳐 관병들을 죽이고 유비의 이름을 부르짖자 살기 위해 반강제로 유비측에 가담한다.
  • 등애, 석포
    여남 산하의 관리로 재직하면서 곽현신을 압송하던 중 여남 현지에서 거병한 진저에게 붙들리며 죽을 위기에 놓이나 반란군 속에 자기 사람을 만들어서 보험으로 삼고 싶었던 곽현신이 급히 끼어들어 제지해준 덕에 둘도 재빨리 장단을 맞춰서 유비군 산하로 편입된다.

3. 서량

관도대전에 승리한 조조 산하에서 통치되다가 마초가 이끈 관중제장의 난을 통해 독립을 꾀했으나 결국 패배해 조조에게 굴복한 지역. 병주, 유주와 함께 후한 초기 시절부터 유명한 기병 산지로 이민족 병사들과 부대끼면서 쌓인 군사력이 강점이나 경제력이 부족하고 대대로 자립성이 강해 이곳을 통치하기 위해선 반드시 유력 토호들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이미 패배한 마초를 포기하고 조위파로 돌아선 호족들도 많고 한수처럼 양측을 오가며 이득을 탐하는 군벌들이 많기 때문에 그 강력한 군사력을 온전히 모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유비는 혹여 조조가 공세를 가해오면 무리하게 야전을 벌이지 말고, 성을 이용해 수비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면서 그동안 달려올 한중의 유비군과 협격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일단 마초는 기성에 머무는 한편 서량에서 천수군 다음가는 요충지인 상규성을 유비군에게 넘겨주며 방어 체계를 구축한다. 이후 한수가 죽고 염행이 서량으로 돌아오자 유비가 관우를 파견했고 그 결과 위수 북쪽의 군현들은 모두 조조를 지지하게 되었지만 기성과 상규 근처의 호족들은 계속 유비와 마초를 지지하며 안정적인 기틀은 마련된 상태였는데 서량 전쟁을 통해 조조의 영향력을 다시금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며 그 과정서 조조군이 호족들을 학살하고 주민들을 강제이주 시켜버리면서 유비에 대한 지지도가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유비군은 관우, 장비, 조운 같이 우수한 기병 지휘관들이 포진해 있음에도 기병 전력이 열세해 이를 살리기 힘들었는데 서량과 연대해 우수한 군마를 제공 받게 되면서 숨통이 틔였다. 그리고 이런 군마들은 군마 한 마리가 아쉬운 손오와의 외교에도 쏠쏠한 역할을 하며 손권 역시 유비가 건네준 서량 군마 덕에 전장에서 살아남기도 했다.

215~217년에 벌어진 서량 전쟁의 무대로, 조조의 친척인 하후연, 오자양장 서황을 진창에서 포위하고 대파하면서 결국 승리해 조조군을 서량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물력이 소모되고 조조군이 퇴각 직전 위수 북쪽 호족들을 대거 살해하고 그들이 관할하던 민호를 병주로 강제 이주시켜 매우 큰 피해를 입는다.
  • 마초
    서량의 반 조조 군벌. 211년 관중제장의 난 당시 서량연합군 5~10만을 이끌었으나,[34] 한수를 비롯한 다른 군벌들이 마초를 견제한다고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전력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위수 전투에서 끝내 조조에게 패배했다. 그 후 2년 만에 재차 거병해 1만 병력을 몰아 위강과 하후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고 천수군을 점령한다. 그러나 양부를 비롯한 친조조파 서량 호족들이 대적하며 들고 일어나자 그들과 끝없는 싸움을 벌이다가[35] 몰려서 후퇴하게 된다. 본래는 이 시점에서 기성의 조구에 의해 가족들을 잃고 서량에서 쫓겨났으나, 유비가 원군을 보내준 덕에 가족들을 구한 데다 친조조 호족 연합까지 격파하며 서량을 평정할 기회를 얻게 된다. 유비에게 아내와 자식들의 목숨을 구원받는 엄청난 은혜를 받은 데다 노성 전투에서 패하며 하나의 세력으로서는 아직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대등한 동맹 같지만 실제로는 유비에게 서서히 종속되어 가는 중이다.[36] 여담으로 유비는 마초를 실패한 버락 오바마에 비유했다.[37] 유비가 마초를 처음 만났을 때의 평에 따르면 강족 혼혈이라 백인처럼 생긴 걸로 유명했던 아버지 마등처럼 마초도 혼혈 티가 확 나는 미남이라고 한다.

    이후 장완을 책사로 두고 서량을 재차 평정하던 중 유비가 익중 정벌에 나설 낌새를 보이자, 한중의 유비군이 빠지면 자신의 후방과 명분이 불안해지기에 급하게 한중까지 와서 자신의 병주 우회를 통한 장안 공세 계획을 밝힌다.[38] 이에 유비가 위연을 한중에 남겨 원호하겠다는 답을 해주자 안도하며 두 아들을 한중에 남겨두고 떠난다. 자신을 믿지 못해 인질을 남기는 거라 생각한 유비는 좋은 말로 거절했으나 이내 마초가 자신에게 아들들을 맡기는 진의가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임을 깨닫고 받아들인다. 이후 기성에 웅거한 채 상규성의 관우와 연계하여 한수의 세력을 대부분 흡수한 염행과 위수를 경계로 대치하다 진창 공방전 이후 북원에서 조조군 본대와 대치하던 유비에게 합류한다.[39] 이후 유비 산하의 최정예인 장비와 같이 조조군의 예봉을 꺾으러 출격한다. 이들의 돌격은 조조측 친위기병의 재빠른 대응으로 막혔으나 여론전으로 다시 조조를 흔든 끝에 조조가 퇴각하고 서량을 완벽히 수복하자 감격해 눈시울을 붉힌다.

    종전 이후 진창성을 경계로 조조군을 막기로 하는 것으로 확정된 이후 밤중에 익주계, 형주계와 같이 유비를 찾아가 한중왕 등극을 마지막으로 지지한다. 명목상으로는 대등한 관계인 마초까지 유비의 한중왕 등극을 지지하는 것으로 의견일치를 보여준 것. 유비의 촉한왕 즉위 이후 좌장군에 임명된다. 양양 원정이 시작되자 본인과 주력군을 데리고 한중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게 된다. 후음의 난이 터지자 유비의 명에 의해 완현으로 향하여 남양태수 동리곤과 종자경을 포로로 잡는데 성공한다.[40] 이후 조홍군의 선봉대인 곽회와 남양 북측에서 교전하다가 퇴각해 유비의 주력군에 합류, 신야현 전투 중에 황충과 법정이 열어준 틈으로 장비를 이어서 돌격해 조위군을 무너뜨렸다. 완성 구원전에서는 장비, 황충과 함께 관우의 돌입을 위한 틈을 만드는 역할을 맡아 공세를 진행하며 그 과정에서 전예와 맞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량 기병의 기세가 꺾여가 사실상 붙들어두는데만 목적을 두던 찰나 관우가 달려오며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관우를 도와 전예군을 완전히 박살낸 뒤 장비와 합류해 장합을 몰아붙인다.
  • 마대
    마초의 종제이자 부하 장수. 한중을 점령한 유비에게 사신으로 와서 양앙군의 장졸 가족들에 의한 처우를 보장받고 군량 지원을 요청해 승낙을 받았다. 이후 서량 호족들의 배신으로 가족들이 다 죽었다고 절망하던 차에 유비군이 지원을 와서 가족들을 구해줬다는 이야기를 듣자 진심으로 감격한다. 이후 유비의 익주 점령 뒤 서량의 현 상황을 보고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북원 대치 이후 드디어 서량에서 조조군이 물러나자 눈시울을 붉히는 마초를 방덕과 함께 위로한다.
  • 방덕
    마초 휘하의 장수. 마초 못지않은 맹장으로 유비가 욕심 내고 있는 인재이다. 일단 유비가 마초를 서서히 종속시키고 있는 만큼 방덕도 자연스럽게 유비에게 편입될 것으로 보인다. 북원 대치 이후 서량에서 조조군이 물러나자 눈시울을 붉히는 마초를 마대와 함께 위로한다. 이후 장완과 함께 방릉으로 파견되어 괴기를 사로잡는다. 이후 유비의 북벌을 위해 동삼군에서 군량을 모으며 진격로를 정비한다.
  • 조구
    반마초 파벌 호족. 마초가 천수군을 점령한 이후 끌어들여 부관으로 삼아 기성을 맡겼으나, 사실 친조조 파벌이었기에 양부의 반란으로 마초가 출병하자 거병해 마초의 일가를 전부 죽여버리려 했다. 그러나 황충과 위연이 매복한 유비군과 같이 반격하면서 같이 거병한 호족 대표는 전부 죽고 본인도 몰리고서도 저항하다 황충의 활에 맞아서 죽는다.
  • 양부
    반마초 파벌의 맹주 호족. 조조가 직접 찍어서 자기 파벌로 만든 호족으로 직전 량주자사 위강의 패배 시 마초가 살려줬음에도 사촌 강서와 조조파 호족들을 모아 마초를 배신했다. 기성의 마초를 노성까지 끌어내어 야전을 벌이고 사촌형제 7명이 전사하고 자신도 중상을 입은 끝에 다른 호족들의 가세로 끝내 마초를 몰아냈으나 정작 자기 가족이 있는 역성은 유비가 점령해 가족들을 포로로 잡아버렸고, 기성에도 황충과 위연이 잠입해 마초의 가족들을 구해냄은 물론 조구 파벌을 참살해버리며 일이 제대로 꼬인다.

    이를 전혀 모르고 7천 명이 넘는 대규모 호족연합군을 데리고 천수군의 치소인 기성을 공격했으나 황충과 위연이 버티는 사이 달려온 마초와 유비가 후방을 휩쓴 탓에 패배하고 포로가 된다. 그 시점에도 조조를 향한 충성을 유지했으나, 유비가 조조가 위공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승상이야말로 한실을 위한 충신"이라는 양부의 논리를 박살내버리자 "위공께서는 할 만큼 했다"고 말을 바꾸는 추태를 보여준다. 결국 양부가 답이 없다고 여긴 마초와 유비는 양부를 처형한다. 사실 양부 입장에서는 기성 전투에서 일족이 몰살당하다시피 했는데 이제 와서 일족을 다 죽인 마초와 화해하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하다. 애초부터 양부는 조예 시절까지 조위에 충성하면서 조예에게 온갖 충언을 아까지 않았던 골수 친조조파-조위 충신이기도 하니 일찍부터 한실에 대한 기대는 버렸다고도 볼 수 있다. 원 역사의 양부는 조예 시기 구경에 오를 정도로 출세하나, 끝내 조예가 자신의 충언을 무시하자 화병으로 죽은 인물로 여기서는 조예가 즉위하기도 전에 죽었으니 원 역사보다 빨리 죽은 셈.

    또한 원 역사에서 마초를 반역도라 비난하다 죽었던 양부의 고모는 여기서도 마초를 반역자라 비난했으나 유비가 의대조 사건과 조조의 협천자의 위선을 꼬집자 말문이 막혀서 비웃음을 사며 연금당했다. 왜 그렇게 되냐면 양부 고모의 논리대로 조조가 충신이라면 헌제가 외척인 동승에게 몰래 조조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의대조 사건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 원 역사에서는 마초가 이를 알지 못해 그냥 말없이 죽여버리지만 여기서는 의대조 사건의 당사자인 유비가 있다 보니 완벽하게 카운터를 쳐서 양부의 고모를 데꿀멍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 한수
    서량 제2의 군벌. 마등, 마초 시절부터 서량군벌 연합의 실세로 군림한 노회한 인물이다. 211년 관중제장의 난 당시 마초를 맹주로 추대했으나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멋대로 굴며, 다른 호족들과 서량인 장병들을 충동질해 마초의 패배에 단단히 일조했다. 그 탓에 213년에 다시 거병한 마초도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마대가 유비를 불러오기 그렇다면 한수라도 부르자고 충고했음에도 한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마초 동맹이 위수 아랫쪽을 장악했을 무렵에 하후연과 장합의 맹공을 받게 되고[41] 한수의 능력으로는 하후연과 장합을 막는 게 불가능 하다는 걸 알고 있던 유비-마초 동맹이 구원을 위해 출전하나 유비가 하후연의 기습에 당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정치질을 멈추지 않는다.

    유비군이 최대한 많은 주민들을 대피시켰고, 장합의 유도에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주변의 여론을 의식해 일부러 서쪽으로 가서 주민들을 구출하자는 주장을 하거나, 유비군을 도우러 가야 한다는 마초의 움직임도 계속 반대하다가, 혹여 마초와 유비군이 비어있는 마을들의 재산을 탈취할까봐 걱정해 합류했다. 하후연을 몰아낸 후에도 자신의 세력을 빼앗길 수 없다는 고집에 유비를 최대한 빨리 내쫓으려 한다. 평가에 의하면 아예 무능한 놈보다 더 악질인, 알면서 저지르는 유형. 마초와 함께한 관중제장의 난 당시부터 곧 독이 되어 돌아올 선택지를 뻔히 알면서 여론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쫓거나, 여론을 얻기 쉬운 선택지만 고르는 식으로 관중제장의 파멸을 초래했다. 이것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도 극혐 캐릭터로 낙인찍힌 상태. 그러나 유비는 그렇다고 섣불리 죽이려들면 무슨 부작용이 날지 모른다며 참았고, 거기다 2년 뒤에는 사망하기 때문에 유비는 2년만 참으면 된다며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임상대치가 진행되던 시점에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조조는 염행을 조문 사절 명목으로 파견해 한수의 세력을 흡수하고 하후연, 장합의 지원 아래 다시 서량을 뒤흔들려 한다. 결국 역사대로 사망한 뒤 그의 세력 대부분은 염행이 흡수하게 된다.
  • 염행
    한수의 사위.[42] 일찌감치 조조에게 귀순해 허도에서 작위를 받고 안락하게 지내고 있다가 한수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에 의해 2천 병사를 받아 서량으로 파견된다.[43] 젊은 시절 마초와 일기토를 벌여 죽일 뻔한 일화가 유명한데 제갈량은 이 일화를 거론해 마초가 염행을 두려워하니 미염공이 나서 도와줘야 한다고 관우를 살살 녹여 놓는다. 장안의 하후연의 지원을 받으며 서량으로 돌아와 한수의 세력을 대부분 흡수하고 경고 삼아 송건 같은 소군벌들도 토벌하는 등 순조롭게 위수 북부 지역을 장악하지만 마초와 관우가 버틴 기성, 상규 장악에는 실패했고 이후로도 둘과 위수 일대에서 대치한다. 유비는 216년 4월에 있을 조조의 위왕 즉위를 명분 삼아 216년 연말에 염행을 칠 계획을 세우게 되고 이에 조조 측에서 먼저 오환족을 비롯한 이민족 기병 수천을 지원해 마초와 관우를 압박했으나 유비군이 출병해 북원이 함락되면서 후방이 끊기고 전황이 역전된다.

    서량의 민속놀이[44]나 다름없는 맹주 암살을 잘 아는 염행은 조홍을 찾아와 북원이 함락되어 서량 호족들이 동요 중이니 자신을 호위할 비서량 출신 병사 2백 명을 내달라[45] 요청하나 곽회가 서량인을 이끌어야 할 염장군이 서량의 동포를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신망을 잃을 것이라며 훼방을 놓자 자기 목숨을 운에 맡기는 처사에 분노해 멱살잡이를 시전하지만 곽회가 제대로 된 논리로 설득하자 납득한다. 그러나 진창 공방전에서 패하고 이어지는 북원 대치에서 조조군이 아무것도 못한채 물러나면서 사실상 서량에서의 영향력을 포기한 탓에 기껏 모은 세력을 거의 다 잃게 되고, 이후 유비의 북벌 때 조홍 휘하에 종군한다. 조홍이 신야에서 유비에게 패할 때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완성의 후음을 구원하러 온 유비군과 싸울 때는 장합, 전예, 주령에게 차례에서 밀려 후방에 대기중이었다. 관우가 전예의 보병대를 부수고 난입해오자 돌격대장인 관우만 죽이면 된다고 조홍을 설득하나 관우의 실력을 아는 조홍은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그가 자원해서 나선다. 그 마초와 일기토를 벌여 죽일 뻔 했던 실력자에 서량에서 관우와 비슷한 유형의 돌격대장을 많이 처리해본 만큼 자신이 있었고 완성에 근접한 순간 긴장이 풀어질 거라 예상하고 기습까지 성공시켰으나 전예군을 돌파하고도 전혀 지치지 않은 관우의 무력은 염행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46]이었고 결국 염행은 단 1합만에 죽고 만다. 이때 쓰러지면서 자신에게 실전 기회를 안 준 조홍을 탓하는데 독자들은 상대가 상대라 풀 컨디션으로도 못 이겼을 것이라며 추하다 평하는 중. 다만 다음화에서 관우 역시 가슴팍에 구멍이 뚫린 전포를 보고 간담이 서늘해하는 묘사를 통해 염행의 저 말이 마냥 허언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 국연, 장석, 전악
    한수 휘하에 있다가 염행에게 흡수된 위수 북부의 서량 호족들. 염행이 조조를 뒷배로 복귀하자 순순이 그를 따라 남부의 마초를 압박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 벌어진 서량 전쟁이 유비-마초 동맹의 승리로 기울어가자, 상사로 모시던 염행을 이상한 눈빛으로 봐서 염행은 공포에 질렸다. 결국 위수 수전과 진창 전투가 조조군의 대패로 끝난 이후 조조군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는다. 국연은 두어달 정도만 말을 들어주다 그 이후엔 이길 게 분명한 유비와 마초 측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으나, 조조 측이 밀서로 먼저 선수를 쳤고 유비와 마초가 차지할 서량의 호구를 줄이기 위한 의도로 연회에서 모조리 참살당한다.

4. 익주(舊유장)

후한 13주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주. 풍족하고 크지만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낙양에서 내려온 유언의 뒤를 이어 유장이 통치하고 있다. 유장이 외부 진출을 하지 않은 데다가 폐쇄적인 곳이다 보니 외부에선 이 곳의 정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장의 친위부대인 동주병은 유비가 바짝 경계할 정도로 정예병이나 익주 토병들의 전투력이나 사기는 평범하다.

유비의 공세 방식이 원역보다 훨씬 치명적으로 바뀌면서 부각되지 않았던 동주병들의 약점도 드러나고 있는데 잘 훈련되었다곤 하나 결국 보병이라 기병에게 전략적 우위를 양보할 수밖에 없고, 지방 호족 군대나 이민족들과 싸워본 경험 밖에 없는 동주병 지휘관들은 대기병전, 패배 후 재수습 등 실전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갈고 닦을 수밖에 없는 부분에 대한 노하우가 부족하다.[47] 근거지가 성도 인근이고, 그 주변에도 험한 관문이 많다보니 미묘한 관계인 익주 호족들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싸우기 보단 근거지 인근 관문에서 지키면 된다는 생각에 퇴각이란 선택지를 너무 쉽게 고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문제점.

성도 주변의 자기 소유 토지에만 관심이 있었던 동주병들과 달리 익주 호족 출신들은 강동의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지방민으로서 갈망을 품고 있다. 능력으로 중원의 명사들에 뒤지지 않는다 자부함에도 늘 중원에 밀려 뒷전이었던 자신들의 실력과 명성을 천하에 떨쳐보고 싶고, 익주가 중화의 중심이 되어 역사를 벌이는 걸 보고 싶어하는 것. 황권 같은 경우는 유비가 선양을 받아 아예 익주에서 떨쳐 일어난 천자가 탄생하길 은근히 바랄 정도.[48]

유비는 북벌에 나서면서 지면 죽을 것이고, 이기면 그대로 중원을 재건해야 하기에 익주의 천자가 되어줄 순 없다고 생각하나, 어떻게 되든 간에 익주의 자치권만은 지켜줄 힘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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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순
유장의 아들. 부성에 일부 정병을 데리고 출진해 유비군을 가로막는다. 유비는 마지막 여론 조성용으로 어차피 조조가 찬탈에 성공하려면 군사를 가진 유씨들은 전부 죽거나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설득하지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결국 전쟁이 시작된다. 장임, 유괴 등과 함께 부성에서 유비를 상대하나 유장의 늑장 대처로 수적, 질적으로 다 밀리며 당해내지 못하고 동주병들만 수습해 퇴각한다. 퇴각로에서는 장비의 허장성세에 넘어가 지체되는 유비의 친위부대에 따라 잡혔고 장임과 동주병들의 분전으로 간신히 백마관에 도착했으나 농성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쉴 틈 없이 달려든 유비군에게 백마관마저 내줘버린다. 이후 낙성 전투 중에도 전선을 지휘하는 장임에게 묻지도 않고 패잔병들을 받아들이는데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낙성 수비군의 군기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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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도
    유장의 책사. 한중 전투 이후 유비에게 유장의 답례품인 촉금 1만필을 전하며 한중을 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당연히 유비가 핑계를 대며 거부하자 유비의 속내를 읽고, 유장에게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고 진언한다. 관우, 장비가 기병대를 이끌고 성도 인근에 침입하자 부금과 상존을 지지해 요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우, 장비가 이끄는 정예 기병 1,500기를 상대로 겨우 보병 6천 명만 딸려주려는 유장을 설득해 간신히 1만 명을 내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으론 부족하고 동주병 3만 전원을 내보내는 게 올바른 계책임을 본인도 알지만 이를 유장에게 납득시키는 건 무리였다.
  • 장임
    익주 토착 가문 출신 지휘관. 황권, 엄안과 뜻을 같이 해 부성에 전력을 모아 영격해야 한다 주장하나 유장은 들어주지 않는다. 부성을 지키던 유순을 수행했고 부성에 이어 백마관마저 떨어지자 유순의 안위를 위해 후위를 자처했다. 포위해서 사로잡거나 죽일 수 있었으나 황권처럼 그의 능력을 탐낸 유비의 배려로 남은 병사들과 함께 무사히 돌아간다. 장임과 엄안은 정사에는 기록이 거의 없어 작가가 창작할 수 있는 범위가 넓은데 본작의 장임은 익주 토박이와 동주병을 통틀어 황권 다음으로 유능하게 묘사된다.

    이후 광한을 지키러 간 황권과 역할을 나눠 낙성 방어를 실질적으로 이끌게 된다. 유비는 하필 방통이 죽었던 낙성에 유능한 장임이 자신이 살려준 덕에 배치된 것에 당황하며 법정을 앞세웠다. 사기가 떨어진 동주병을 수습해 어떻게든 낙성을 사수하려 노력하나 기량이 떨어지는 유순, 냉포와 호흡이 전혀 맞지 않아 고생했고 결국 성을 빼앗긴다. 광한성에 갇힌 황권을 대신해 강경론을 주도하며 유비가 형주에 가 있는 3개월 동안 성도에서 나가 장비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유장은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 사이 유비가 돌아오며 유장이 항복하자 원역사와 달리 끝까지 저항하다 처형되지 않고 자연스레 유비 휘하에 편입되어 황권과 함께 주요 정책 회의에 참여한다. 서량 전쟁에선 뒤에 남았다 후발대를 이끌고 유비군에 합류하는데 이때 전력 질주를 해서 시의적절하게 도달해 유비의 칭찬을 들으며[49] 이후 작전 회의에서 익주 사람이 뜻을 모으면 강하다는 걸 보여줄 기회라는 유비의 말에 좌장군의 뜻을 따르겠다며 호응하고 진창 공성에 앞장선다. 이후 북원 대치가 끝나고 조조군이 물러나자 익주가 서량과 힘을 합쳐 중원의 대군을 물리쳤다며 감격한다. 형북 동삼군의 신속 소식까지 전해지자 황권, 오란, 뇌동 등과 함께 유비의 한중왕 등극 여론을 주도해 등극을 촉구하는 행렬의 최선두에 선다.
  • 엄안
    익주 토착 가문 출신 지휘관. 황권, 장임과 뜻을 같이 해 부성에 전력을 모아 영격해야 한다 주장하나 유장은 들어주지 않는다.
  • 양회, 고패
    백수관을 지키던 익주 무장들. 서량 출병을 위해 원역처럼 참수하는 대신 돌려보냈다. 유비가 한중을 점거하고 서량, 상용을 오가는 동안 백마관을 지키고 있었다. 유비가 부성을 공격하며 익주 정벌의 신호탄을 울리자 익주 토착민들로 구성된 보병 4천을 이끌고 구원하려다 장비가 이끄는 정예 기병의 습격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고 양회는 장비와 일기토를 시도했다 단 5합만에 목이 떨어진다.
  • 유괴, 냉포, 부금, 상존
    동주병 주요 지휘관들로 등장한다. 굴러들어온 돌이고, 동주병과의 알력으로 발생한 조위의 난을 겪어봤다 보니 멀리 나가기 보단 근거지인 성도 주변을 지키면서 싸우려는 성향이 강하다. 관우와 장비가 기병 1,500기를 이끌고 성도 인근을 흔들자 부금과 상존은 군심이 이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나가 싸워야 한다 주장하지만 군사적으로 무능한 유장은 한참 망설이다 성도에 남은 병력의 3분의 1인 1만 명만 딸려준다. 전원 보병인 군사들로 오환과 서량 출신 기병에 맞서기 위해 수레와 궁노수를 동원해 애를 썼으나 대기병전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해 무너진다.

    부금과 상존은 원 역사에서 겨우 곽준과 수백이 지키는 가맹관을 1만 명으로 1년간 넘지 못하고 격파 당한 일로 졸장 취급 받는데 본작에서는 무능한 유장이 아무 대책을 못 내놓는 상황에서 가맹관을 공격해 허를 찌를 정도로 전략적 식견은 있는 장수들로 재해석 되었다. 문제는 짚어낸 바를 실행하는 전술적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 상존은 전열을 수습하기도 전에 단기로 자신을 죽이러 달려든 관우에게 호위병들과 함께 목이 떨어졌고 부금은 간신히 살아서 낙성으로 도망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로 인해 가뜩이나 후방 걱정으로 낮았던 낙성 수비군의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져 버린다.
  • 이엄
    남양 출신 망명인사. 유종이 조조에게 투항할 때 익주로 넘어온 굴러들어온 돌로 벗이나 동문들이 대거 유비 쪽에 사관한 터라 유장 입장에선 애초에 믿을 수 없는 인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장은 그에게 일군을 맡겨 면죽관을 구원하게 한다. 동주병은 정예이나 지휘관들은 관문에 의지해 방어전은 할 수 있어도 야전에서 유비군을 영격하기에는 자질이 모자란 인사들 뿐이고, 군재가 뛰어난 황권과 장임은 익주 토박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어 맡길 만한 인사가 이엄 뿐이었기 때문.[50]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유비측 인사들의 집중적인 회유를 받아 면죽관에 도달하자마자 투항해 버린다. 이후 유비의 북벌에 합류한 지휘관 중 1명으로 언급된다.
  • 장송
    익주 토박이 호족. 유비와 내통하던 인물로 본래 유비의 형주 복귀 뻥카에 낚여서 서신을 썼다가 걸리는 바람에 죽었으나, 여기선 유비가 이중 낚시를 한 덕에 살았다.[51] 이후 유비와 싸워야 하는 현실을 부정하고픈 유장의 심리를 이용, 조위의 난을 언급해 부성에 전력을 집중하자는 황권의 헌책을 거부하도록 은근슬쩍 돌려놓는 활약을 한다.

    유비가 한중과 서량에서 싸울 때까진 약속한 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장송 쪽에서 유비를 끌어들인 건 자신의 죄라고 순순히 인정한 데다, 성도 인근 관문을 지키면서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자는 발상은 익주 사람이라면 흔히 할 법한 생각이라 황권도 배신자로 몰아붙이지 못하는 상태. 낙성이 함락되고 성도가 전쟁터가 되는 게 확실해지자 유장에게 항복을 권해 피해 없이 전쟁을 매조지 짓고 유비 세력 안에서 입지를 다지려 했으나 유장이 장송의 생각보다 훨씬 무능한 인간이라 장송이 설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투항해버렸다. 당연히 장송도 유비 세력에 편입되었고 유비 휘하에서 도강언 보수나 경제 회복 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원래 역사에서는 적벽대전 이전 유장의 명으로 조조한테 칭신의 의사를 밝히러 갔다가 푸대접을 받고 돌아온 뒤 유비를 찾아가 익주 정복을 권유한 인물이다.

5. 동오

손유동맹을 유지하는 양주의 세력. 200년대 후반부터 적벽대전-남군 공방전-유수구 전투까지 조조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이는 조조측 사정 때문에 말미암은 것인데 차근차근 찬탈 작업을 진행중인 조조는 장기간 조정을 비우거나, 적벽 이후 다시 패배해 권위가 하락하는 일을 지양해야 했다. 큰 피해 없이 명분 챙겨서 빠르게 복귀할 수 있는 WWE 상대가 필요했는데 주요 세력 중 조조의 본거지인 기주 업성에서 가장 가까우며 기병 전력이 약해 반격을 통한 전과 확대에 한계가 분명한 동오는 가장 적절한 상대였다.

과거 형주 공방전 이후 남형주의 남군 일대를 유비에게 빌려줬으나 이는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이라 언제든 마찰이 될 수 있다. 압도적인 수군 전력에 파구의 물길을 쥐고 있어 유비측은 동오가 한 번 칼자루 거꾸로 잡기로 마음 먹으면 급소에 베이고 생각해야 하는 처지. 유비는 장사와 계양군까지야 빼앗기더라도 무릉, 영릉이라도 지켜서 형익병진에 필요한 안전성을 확보하려 한다.[52]

임상대치 결과 215년에 장사와 계양을 얻기는 했으나, 유비는 그 후 입촉 완료와 서량 전쟁을 통해 서량을 확보하면서 다시 힘의 차이가 벌어진다. 이후 손권은 손유동맹 해체 노선을 기정사실화 한다. 유비 역시 동오의 배신을 확신하고, 형남에 남은 주요 전력을 대부분 강릉 방면으로 모은다.

진나라 시절부터 중원 국가에게 피를 본 강동 호족 연합국으로서 다시는 중원의 부속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강한 열망이 있다. 이 감상은 동오 내에 소속한 인물이 아니면 알기 힘든 것으로 유비군 내에선 미래인이 빙의한 유비를 제외하면 가장 동오와 연관이 많은 제갈량만이[53] 형주 사령관으로 수년간 대치를 하면서야 확신할 정도다.

5.1.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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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소
    손가의 원로대신. 적벽대전을 앞두고 항복을 권한 일로 발언권이 많이 약해진 상태임에도 옳다고 믿는 일에는 간언을 아끼지 않는다. 진무의 애첩을 순장하려는 손권을 유학자로서 저지하려 하나 자신들의 사병을 끌고 와 저택을 포위해 버린 고옹과 육손에 의해 저지당한다. 서주 출신이라 강동 토착 호족들 사이에서 묘하게 겉도는 인상이 있으며, 사병도 없어서 손가의 총애에 의존해야 하기에 세력에 한계가 명확하다. 임상 대치 이후 손권이 조조의 남하를 두고 유비를 질투하자, 일단은 유비와 힘을 합해야 조조를 막을 수 있다면서 말린다. 손오의 중신이나 한실에 대한 미련도 없다고는 못할 인물이라,[54] 손권이 사실상 한실의 멸망을 앞당기는 행위를 하자 반대는 하지 않으나 씁쓸한 표정을 한다. 여몽의 말로는 장소 같은 인물들의 수도 강동에 적지 않다고.

    유비의 북벌에서 완성이 구원되고 천하가 뒤흔들리자 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대장군 지위를 보고 조조가 적을 상대할 때 주는 함정이라고 눈치채나[55] 강동의 분위기가 어떤 억지로든 유비를 박살내야 한다고 경색되자 결국 말을 삼간다.
  • 고옹
    손가의 대신. 오의 사성이라 불리는 거대 호족 고씨의 일원. 난세 도래 이전에 부친이 풀 채찍으로 모욕당하는 걸 본 이후로 강동의 독립을 염원해왔다. 순장을 반대하려는 장소를 반강제로 붙들어 세운다. 적벽 당시 장소와 같이 항복을 주장했던 인물이나, 어디까지나 강동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 그랬을 뿐 중원 왕조에 예속되지 않는 강동의 독립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인물로 이를 위해 손권이 다소 비열한 짓을 해도 용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비의 촉한왕 자칭 소식을 듣고는 그 이면에는 적절한 명분과 정치적 사정을 고려한 안배가 있음을 눈치채고 분노한 손권을 달랜다.
    호족명사인 가문의 재력을 이용한 정보망으로 손권을 설득하는데, 손권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정보력과 통찰력이 상당하다.
    완성 구원전 이후 유비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이어가는데 강동의 자립을 바라는 입장에서 유비가 한 왕조를 재건하면 강동의 자립은 물건너 가는데다 과거 아버지가 겪은 수모 탓에 한 왕조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기 때문.
  • 제갈근
    제갈량의 형이다. 방통은 손권이 제갈근을 내세워 협상해오면 제갈량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나, 제갈량의 충성심을 잘 아는 유비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원 역사보다 빨라진 익양대치를 앞두고 유비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어 형주 일부라도 즉시 내놓으라는 손권측 의사를 전하나 결렬된다.[56] 임상대치가 끝난 후 손권군의 깃발과 갑옷을 빌릴 때 유비측과 동행하며 유비의 블러핑에 힘을 실어주고 손권이 동맹으로서 유비의 입촉을 도와줬다는 명분을 세운다.
    동생 제갈량과의 대화를 통해 오나라의 정치적 성향을 알려줬다.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형제인만큼 늬앙스를 통해 동오 조정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고.

5.2. 군부

  • 노숙
    손유동맹을 추진한 동오의 대도독. 유비가 계속 손권의 심기를 거슬러 면목이 없는 상황이었으나[57], 유수구 전투가 시작되고 유비가 한중에 진출해 서량까지 연결되면서 장안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자 안도하며 이를 속히 조조군에 퍼뜨려 그들을 동요시키자는 계책을 제시한다.

    노숙 본인은 헌제를 끼고 있어 선양받을 수도 없고, 유씨 종친도 아닌 손권이 황제가 되기 위해선 반 조조 토템으로 쓸모 있는 유비와 당장 싸워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나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면 너무 강해진다며 반발하는 강경파들의 여론에 손권이 동의하면서 본의아니게 익양 대치를 이끌게 된다. 기왕 벌어진 일 유비와 제갈량이 부드럽게 장사와 계양군을 포기해주길 원했으나 유비의 2만 군대가 몰려오자, 어쩔 수 없이 감녕을 보내서 익양을 막게 한다. 그러나 감녕이 패하고 여몽도 천릉성 공세를 실패해 육로로 연결된 임상에서 관우와 대치하는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지리한 대치 중에 조조가 염행을 서량에 파견한 것을 계기로 장사, 계양을 넘겨 받는다.

    217년 유수구 대치 와중에 전염병에 걸려서 결국 몇달 못가 사망한다. 손권은 노숙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곧 그의 권세를 이어받을 도독이 없다는 것에 안도하는데, 노숙은 중원 3대 부자로 칭해질 정도의 부+강동 최고의 명가인 여강 주씨의 지지+자타가 인정하는 능력을 겸비해 손권에게 정면에서 반대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58]만일 노숙이 후계자를 지명했다면 주유에게서 이어진 강동 호족들의 지지가 그대로 이어져서 손권도 존중해야 했겠으나, 그게 없었기 때문. 결국 노숙은 평생 손오를 위해 헌신하다 죽었음에도 "주유보다는 덜 건방지다"[59] 라는 평가나 들으며 자신을 계속 비난해온 엄준이 후계자에 앉는 등 주군에게 헌신을 부정당한다. 다행히도 엄준 본인이 대도독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 판단해 거절함으로서 여몽이 후임 대도독에 취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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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대
    익주로 파견된 유비를 만나러 온 동오의 사절. 유비에게 조조를 견제해 줄 것을 부탁하러 왔으나 빙의의 여파로 아직 몸을 제대로 못가누는 유비를 보고 정말 아픈 것임을 깨달아 당황한다. 이후로도 손권의 사신이 되어 양측을 뻔질나게 오간다. 동오의 형주 공격에도 참전하나, 장사군의 치소 임상을 지키던 중 다른 현을 점령하러 갔다가 관우가 일군을 몰고 빠르게 공격하는 역 빈집털이를 해오는 바람에 허무하게 임상현을 다시 뺏긴다.
  • 육손
    손가의 장수. 강동 명가 육가의 가주. 선대 손책에게 가문의 사람들을 많이 잃었는데도 강동의 독립을 위해 손가를 지탱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18년에는 여몽과 함께 형주 육구에 주둔하며 그의 명령대로 유비군을 도발하나 형남에 있는 게 제갈량인 탓에 먹히지 않는다. 거기다 제갈량이 항의 서신을 직통으로 건업에다 보내는지라 손권의 결정을 모르는 서생과 관료들이 명분도 없는데 왜 먼저 시비를 트냐며 현재 쓰는 도발 전략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여몽에게 전파한다.
    여몽이 218년에 유비군을 안심시키기 위해 퇴직하자 그 후임으로 편장군에 앉아 형주 동오군을 총지휘하게 된다. 그리고 유비와 제갈량이 양양과 완성 수비를 뚫지 못할 터이니 동맹인 오나라가 돕는다는 핑계로 강릉에 군을 투입하면 된다는 계책을 올려 승인받는다. 사실 손권은 선대 손책과 원한이 있는 육씨를 꺼려 중용하고 싶지 않아하나, 호족들의 여론도 있고 자기 눈치를 보면서도 육손을 추천한 여몽의 뜻 탓에 티도 내지 못한채 육손을 편장군에 임명한다.[60] 이후 여몽이 형남 원정을 시작할 때 1만 병력을 이끌고 육구에서 그와 합류해 형남의 봉수대를 무력화시키는 작전을 기획한다.
  • 반장
    오나라 장수. 손권의 형주 탈취 결정으로, 여몽의 산하에서 계속 군사를 움직여 제갈량을 찔러보고 있으나, 끝내 반응하지 않아 오히려 제갈량에게만 명분을 줄 판이라고 대답한다. 이후 손권의 명령하에 여몽을 보좌해 유비령 형주를 공격하는데 투입된다.
  • 주연, 정봉, 서성
    오나라의 장수들. 손권의 명령으로 여몽을 보좌해 유비령 형주를 공격하는 데 투입된다.
  • 감녕
    익주 태생으로 유표와 황조를 거쳐 손권에게 임관한 항장. 형주의 중요한 길목과 물목을 전부 꿰고 있어 원역사에서 그랬듯 익양과 임상현 사이에 있는 개울가를 틀어막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병 300에 노숙에게 1천 군사를 받아 출병하는 것까지는 순조로웠으나 개울에는 유비의 지시를 받은 제갈량이 보루를 2개나 세우고 다른 곳에 투입해야 할 물자와 인력까지 끌어와 만반의 준비를 갖춰둔 상태였다. 불길함을 직감하면서도 항장 출신이라 성과 없이 물러서면 출셋길이 막힌다는 생각에 정찰도 없이 무리하게 공격을 개시하나 신속한 이동과 점거를 위해 경무장에 변변한 공성장비도 없던 감녕군이 보루에서 쏟아지는 화살비를 감당하는 건 역부족이었고 본인도 교전 중 유시에 맞아 전사한다.[61] 감녕의 전사에 동오군은 물론 유비, 제갈량조차 당황했으나 아직 동오에서 중용받기 이전이고, 성품도 나쁜 탓에 딱히 언급되지 않고 묻힌다.[62]
  • 진무
    동오의 편장군. 손책이 막 거병할 때부터 그를 따른 상당한 원로이자, 군부의 중역이었으나 합비 공방전에서 조위 기병대의 습격으로 전사했다. 강동 토박이 호족 출신이기도 해서 그의 전사는 손권의 동오 민심에 입히는 타격이 컸다. 이에 손권은 진무의 애첩을 순장시키는 것으로 패전의 책임 추궁을 무마하는 경악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진무의 장남과 본부인은 아무리 첩실이라고 하나 생사람을 매장하는 모습에 공포에 질려 말리지도 못한다.[63]

6. 조위

작중 시작 시점에는 위공 즉위 이전이므로 조조군이었으나 213년 위공으로 즉위했다. 수도는 기주 업성. 하북 4주(유,기,병,청) 서주, 예주, 낙양, 장안을 차지한 작중 최대세력. 작중 유비는 초반의 전 병력이 5만여 내외, 손권 역시 7~10만 언저리의 병력을 동원하면서 큰 부담을 느끼는데, 조조는 애당초 승부를 낼 생각도 없는 유수구 전투에만 수만의 병력을 동원하거나, 1만 정도의 병력은 가볍게 찔러보는 식으로 투입한다. 또한 본인들의 부담은 최소화되는 이민족 징발도 적극적으로 행해서 본군은 2, 3만 정도만 동원하고도 서량에서 4~5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한 유비군을 수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유비는 이를 두고 후일 중원이 흔들리면 감당 못할 짓을 벌인다고 평하는데, 조조의 업적 중 대표적인 것이 이민족 토벌로 인한 국경 안정인데, 본인의 공을 덮고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조위 시절부터 서진 시대까지 이렇게 이민족과 척을 진 것이 후일 영가의 난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64]

찬탈을 위해 국내에서는 얼토당토 않은 황족 살해, 상식을 벗어난 공국 선포, 무의미한 전쟁 등 갖가지 폭거를 벌이고 있다. 유비는 원 역사 유비군이 이 시기에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승천할 수 있던 이유 중에 일부는 조조의 이런 폭주에 있다고 설명할 정도이며, 본작에서는 원 역사의 거진 1.5배에 달하는 대성장을 거두어 조위의 대적자로 떠오른다.

유비의 북벌 시점에서 자기 목숨 부지를 위해 동리곤의 보고를 뭉겠다가 후음의 난이 터져 진지하게 반란을 고민중인 위풍, 과거 유비의 부하였던 전예를 천거하는 가후의 발언을 마뜩찮아 하는 진군과 같이 서서히 내부분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6.1. 조씨 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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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비
    조조의 장남. 부승상 겸 세자로 조조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업성의 정무를 총괄하나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는 대신 만만한 위풍을 죽간으로 후려 패며 갑질하기 바쁘다. 본래도 성격이 좋다고는 못 하지만 아버지가 아직 아우 조식에게 미련이 남아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군권을 꽉 쥐고 있어 군공을 세우긴 어렵다보니 내정으로 공을 세우려 하는데 성과가 나지 않자 급해져서 아랫사람들을 더 다그치는 것. 위풍의 평에 의하면 조조나 조비나 얼핏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게 똑같아 보이지만 범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직관이 있어 그렇게 밀어붙인 일의 7~8할은 성공하고 그만큼 과실이 돌아오는 조조와 달리 조비는 직관이 없어서 그 반대라고. 조조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계속 조식에게 미련을 두고 있다.
  • 조창
    조조의 차남. 무재를 가진 장수로 서량 전쟁 시점엔 서른도 안된 젊은 나이.[65] 가후와 함께 1만 병력으로 위수 남방 오장원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가후가 법정과 황충의 방어가 탄탄해 오장원을 치기 어렵다고 조언하자, 별 미련을 두지 않고 받아들이며 앞으로 있을 후계자 경쟁에서 가후를 끌어들일 기회를 엿본다. 계속 대치하던 중 조조가 공세 준비를 갑자기 취소하고 퇴각을 명하자 불만을 가지고 가후에게 말려보자고 말하나, 가후가 따르라고 명하자 별 수 없이 퇴각한다.
  • 조식
    조조의 삼남. 큰형 조비와 경쟁했으나, 장자승계의 원칙과 주벽 때문에 결국 밀려났다. 그러나 조조는 여전히 조식에게 미련이 있어서[66] 조비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이는 조식 입장에서도 좋게 보일 수 없는 게 조식의 아내 최씨가 조조의 편집증적인 최염 숙청에 휘말려 억울하게 처형된 걸 생각하면 자신의 아내를 죽인 아버지가 자신을 여전히 아끼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추후 형의 보복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
  • 조인
    조조군 인척이자 장수. 조조군의 에이스로 형북 양양성에 주둔하고 있다. 양양성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고 상대중인 조운의 평가로는, 육로로 약간 약간 찔러보는 병력만으론 도저히 조인을 밀어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218년에는 후방인 남양군이 후음의 거병과 유비의 공격으로 넘어가는 위기를 맞으나, 조조는 역으로 조인을 양양에 두고서 낙양의 조홍을 주공으로 유비를 격멸할 계획을 세운다. 이 후 형남의 조운과 진도가 2만 병력으로 북상해 서로 견제하고 있는데 조홍의 패배 소식을 듣고 본인이 직접 유비를 상대해야 한다고 판단해 당양현에서 조운과 진도를 최대한 두들겨 힘을 빼놓고 있다.

    이후 여남군의 만총이 합류하자 그에게 양양 방어를 맡기고 본인은 남양으로 북상해 우금과 같이 유비를 견제하다 대홍수로 인한 재정비 필요성과 군인으로서의 육감으로 급히 번성으로 돌아와 최소 번성이 뺏기는 일은 막아낸다. 그러나 유비군의 사기가 워낙 맹렬해 성 안까지 밀려들어오고, 그 이후 공성전에서도 힘에 부치자 소수 정병을 이끌고 성 밖에서 유격전을 벌이기 위해 나갔다가 조운에게 제지당해 사투를 벌이던 와중에 우금이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면서 구사일생한다. 그러나 그 이후 번성이 수몰되면서 성벽 위로 대피하고, 우금이 항복한 걸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결국 부장들이 조인이 일부 군사만 데리고 탈출해서 원군을 불러야 한다는 건의를 받는다. 이에 만총이 그랬다가는 양번은 끝장이라면서 반대하고, 부장은 또 양번은 잃더라도 다른 지역은 지킬 수 있다고 반론한다.[67] 이에 조인은 자신의 백마를 베는 퍼포먼스를 통해 번성에 남을 것임을 천명한다.
  • 조홍
    조조군 서량전선 사령관. 장합, 곽회를 부장으로 두고 현친현에서 주둔하며 관우-마초와 맞서고 있다. 유비의 북원 점령 이후 곽회의 의견대로 진창에서 결판이 날 것을 깨닫고 최대한 전선을 유지하면서 진창에 원병을 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진창 공방전이 계속되던 와중 관우와 황권에게 수전에서 패배하고 만다.[68] 이후 조조의 지시를 받아 서량의 친조조 호족들을 직접 숙청한다. 이후로 병주에 주둔하다 조조의 명령을 받고 전군을 몰아 남양으로 진출한 유비와의 일전에 나선다. 하후연이 전사할 때까지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부채 의식에 기병 우위를 앞세워 빠르게 일전을 벌이려 한다.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사재까지 털었는데 그 인색한 조홍이 사재를 털었다는 말에 장합도 당혹해하며 일의 심각성을 깨달을 정도.[69]

    장합의 설득으로 일단 호수, 부방의 군사와 합쳐 수적 우세를 확보하기로 했으나, 유비군이 그 계획을 읽은 것처럼 아슬아슬한 남하해 호수와 부방을 칠 것처럼 보이자 전군을 지휘해 회전에 나선다. 부장인 장합과 의논해 유비를 가장 먼저 잡기 위해 중앙에 철기를 집중. 염행의 경기병으로 유비 보군의 방어선을 흔들고 하던대로 철기를 투입하나, 유비가 특수제작한 강노를 동원한 강노병 부대와 팔진도로 정면에서 철기의 돌격을 받아치자 경악한다.[70] 전황이 지지부진해지자 돈 떼먹힐 걸 우려해 직접 관우와 싸우겠다고 방방 뛰다가 전세가 완전히 기울고나서는 자신이 퍼부은 돈이 공중분해 됐다는 사실에 비틀거리고 만다.

    다행히 유비군의 기병 전력이 부족했던 덕에[71] 군대 자체의 피해는 아주 크진 않았고 조홍 본인도 비싼 명마들을 줄줄이 끌고 전장을 오가다보니 어렵지 않게 전장에서 빠져 나왔다. 이에 조조는 조홍에게 수습한 병력으로 완성을 포위하라고 지시하며 여기서도 실패하면 가산을 적몰하겠다는, 조홍 한정으로 사형보다 강력한 경고를 전달한다. 이후 완성을 10개월간 포위하며 말려죽이려 들지만 타이밍 좋게 유비의 원군이 당도하며 결전이 벌어진다.

    기병 대부분을 전방에서 유비군을 맞는 제장들에게 분배하고 자신은 보졸 위주의 5천만 거느린 채 후방에 머물렀는데 관우가 기병 2천을 이끌고 전예군 돌파에 성공하며 이를 막아야 할 처지에 내몰린다. 못 미더워서 옆에 붙들어 둔 염행이 관우만 베면 상황이 해결됨을 역설했으나 바로 그 선택지가 터무니 없이 어려운지라 뜸들이는 차에 다급해진 염행이 자청해 나갔다 일합만에 베여죽고 관우와 완성의 연계를 허용하고 만다. 후음을 죽이지 못하면 비슷한 반란자가 끝도 없이 봉기할 것을 예상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결국 완성의 포위를 풀고 박망현으로 물러나 조조에게 지원을 청한다.

    이후 관중에서 여력을 모조리 뽑아낸 조엄, 은서의 5만 대군과 합류해 양번을 지원하러 가나, 유비군의 포진을 뚫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조인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빨리 양번을 구해야 한다고 주전론을 편다. 이때 양번과 연락하기 위해 땅굴 작전, 봉수대 등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쓰나 촉한군에게 전부 틀어막히게 되고 이에 야전 밖에 답이 없다 판단해 먼저 출진한 은서를 지원하지만 은서의 군대가 패하며 다시 한 번 좌절할 위기에 놓인다.

    조씨 중진의 일원답게 눈앞의 전투만 생각하는 아랫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대국을 잘 살펴서 합리적으로 대처하려 노력했고 크게 실책을 저지른 적도 없었지만 대자연의 억까를 등에 업고 찔러들어온 유비군의 기세가 너무 매서웠다.
  • 조진
    조조의 친척인 젊은 장수. 서량 전쟁에 조조를 따라 종군해 북원 대치에서 기습하는 장비와 마초를 호표기로 막아선다. 잘 막아내다가 경사길에서 벌어진 반격에 어느 정도 피해를 보긴 했으나, 우세한 철갑 기병의 힘으로 끝내 막아낸다. 정사에 기록된대로 이 시절부터 비만인데 그에 비해 움직임이 굉장히 날래 장비가 놀라워할 정도다.
  • 하후연
    조조의 친위세력으로 조조의 동서이자 하후돈의 친척동생.[72] 조조가 강동정벌에 나선 사이 호군장군으로 서황, 장합의 보좌를 받으며 장안에 주둔해 있다. 관중제장의 난 이후 재기한 마초에게 격파당했다는 식으로 초반에 잠깐 언급된다.

    유비와 마초가 서량 호족연합을 격파하고 숨을 고를 즈음에 기습적으로 출병. 한수의 군세를 격파하기 위해 현친현으로 출격한다. 원역사대로 한수의 조잡한 강족 연합군 따위는 야전 한번에 대파할 수 있다고 비웃으나, 한수가 흥국성에 들어가 버티자 인근 부락을 파괴하며 야전을 유도하고자 하지만 유비가 이 작전을 간파하며 조조군의 기병대만 피를 본다. 그러나 동요하는 일 없이 장리천의 지형을 활용해 기병으로 유비군을 기습했으나 방통이 임기응변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마초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유비를 잡는 데는 실패한다.

    그 후 조조가 서량을 장악하려 보낸 염행에게 가세해서 장안의 군을 이끌고 나온다. 서황이 있는 진창성에 주둔하며 유비군과 분전하나, 예상 못한 오환족의 실수로 위기에 처하자 조조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 위해서 곽회의 의견대로 전 병력을 이끌고 진창으로 출병한다. 이후 유비군이 보루를 쌓는다는 소식을 듣고 시간을 벌었다며 안심하면서 그들의 동태를 살피는데 황충과 법정이 철저히 급습에 대비해둔 것을 보고 싸움이 어려워지겠다며 입맛을 다신다.

    유비군의 차륜전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서 목책 가까이에 깃발을 올리고 나서거나, 서황을 돕기 위해 직접 출격하는 등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를 지휘한다.[73] 그러나 약체인 익주군의 대응이 만만치 않고, 조조가 늦는다는 밀서가 온데다, 위수의 수전에서 조홍이 지고, 그에 따라 황권과 관우의 군사가 배를 타고 진창에 들어오는 걸 보게 된다. 이후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나 법정의 유인책에 걸려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되고 지쳐버린 상황에서 쌩쌩한 몸으로 달려오는 황충에게 원역사보다 2년 빠른 죽음을 맞는다.
  • 하후돈
    조조의 친위세력으로 조위의 공신. 유수구 전투 와중 유비가 서량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 조조군을 몰아붙인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조조가 조인과 함께 가장 믿는 측근인만큼 조조군의 최정예인 동남군을 총괄하는 상장이라고 한다. 이후 조조는 유비가 형주를 장악하자 결판을 내기 위해 하후돈을 시켜 동남의 군사를 차출한다.

6.2. 조정

  • 순욱
    상서령. 조조군의 책사로 수십년간 조조를 도와온 거물. 그러나 조조의 위공 즉위 이후 실의에 빠져 자결했다.[74] 이 소식을 들은 유비 세력과 손권 세력은 그 순욱이 죽었냐며 조조의 위공 즉위로 인해 조조 진영 내부에서도 극심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고 놀랐다. 순욱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전한 손권의 편지를 보면서 유비가 분노하는 척하며 조조는 역적이라고 선동하는데, 실 역사에서도 유비가 순욱의 죽음을 손권에게 전해듣고는 '늙은 역적 놈이 죽지 않으니 천하가 아직도 혼란하다'는 식으로 욕을 했었다. 유비(곽선호)의 말에 따르면 단순히 조조가 공작이 된 게 문제가 아니라 후한에서 황족을 왕으로 봉할 때도 1개 군밖에 허락하지 않는데도 조조가 수도권 최대 규모의 10개 군을 전부 공국령에 넣어버리면서 트루 역적 선포를 한 것과 다름없어졌고,[75] 어쨌거나 저쨌거나 겉으로 협천자를 주장한 승상 조조가 59세라는 고령에 역적 짓을 할 거라는 예상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순욱도 마찬가지였으리라 평했다.[76] 이후 경기에 의해 한 번 언급되는데 자신은 순욱처럼 무책임하게 자살로 끝내지 않고 저항하겠다는 것으로 좋은 평가는 못 받는다.
  • 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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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하십시오.
  • 정욱
    조조군 책사. 순욱의 자결, 가후의 처세로 인해 조조군 제일의 책사에 가까운 인물. 위왕으로 자리를 굳히는데 집중하며 당장 유비 쪽에 대군을 동원하고 싶지 않은 조조의 속내를 짐작하고 상용으로 도피한 장로를 이용하는 계책을 내놓는다. 이후 유비가 입촉을 시작한 시점에도 대군을 내서 유비를 쳐야 한다고 조언하나,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후 임상대치가 길어지도록 염행의 파견은 미루자는 조언을 하나 역시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비군이 익주를 차지한 이후 정말로 대군을 동원할 강적이 되었다고 판단해 경계한다. 성격은 조조의 정치전략에 이견이 있어도 한번 거절당하면 바로 물러서는 타입으로 할 때는 하면서도 눈치를 잘 보는, 가후와 순욱의 중간이라 볼 수 있다. 서량 전쟁에 조조가 친정할 때 함께하나 유비군의 방어선을 보고 뚫기 어렵다고 평가한다.[77] 유비가 써보낸 맹덕전에 말도 안되는 유언비어라고 열폭하면서 손해를 보더라도 유비군을 치고, 손권을 움직여서 유비군의 형주전선을 위협하자고 계책을 내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퇴각을 결정한다.

    유비의 북벌 당시에도 승상부에 근무하며 조홍군 6만이 정면 승부에서 유비에게 패하자 경악한다. 이후 조조의 장기전 전략으로 유리해졌을 때 경기, 위황의 난을 빌미로 수백명의 무고한 이들을 맹덕전의 내용대로 숙청하는 조조를 말려보지만 조조가 듣지 않자 포기한다. 이후 조조의 친정에 동행. 각지의 정보를 취합하며 조조의 선택을 돕는다.
  • 화흠
    조조군의 책사. 유비를 상대할 방법을 묻는 조조에게 유엽이 대군을 동원하자는 계책을 내자 이를 반대한다. 사실 조조 역시 찬탈을 위한 전쟁이 더 급했기에 화흠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위왕 즉위식을 준비하라 명받은 책사로 유비의 북벌로 인한 형북 전쟁 당시 양번이 위험해지자 강하의 문빙 수군을 빼자는 사마의의 건의를 곧바로 반박한다. 제갈량의 북진은 홍수로 인한 일시적인 재해일 뿐인데, 문빙이 빠지고 강하가 손권에게 넘어가면 동오는 일년 내내 언제라도 양번을 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78]
  • 진군
    젊은 시절 유비의 막료로 출사했었다 보니 유비가 화제에 오르면 발언을 삼간다. 유비에 대해 묻는 조조에게 유비의 대국을 보는 시야는 일개 촌부와 다를 것이 없다고 비위를 맞춘다.[79] 이후 유비가 한중에 군마를 모은다는 소식에 유비군이 장안으로 올 것이라는 의견을 개제한다.
    가후가 유비군을 상대할 장수로 과거 유비의 부하인 전예를 추천하자, 진군 자신도 휘말릴 위험이 높은 계책임을 깨닫고 가후에게 이를 간다.
  • 종요
    전직 사례교위 현 위나라 상국. 서량을 오랫동안 다스리며 마초 등도 막아낸 유능한 인물이다. 위공 즉위 시점에는 업성으로 이동해 출세가도를 밟고 있었으나, 원 역사에서는 자진 진압될 서량의 난이 유비의 가세로 장기화되어 사실상 서량을 상실하자 불안해한다. 원역처럼 서예가로서 명성이 높아서 그의 글씨는 익주 호족들 사이에서도 귀한 보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조조의 여론전을 위한 요순 선양에 관한 글을 써서 중원 전역에 퍼뜨려 유비가 죽서기년 발굴로 맞대응하게 된다. 중원의 민심이 조조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자신이 천거한 위풍이 승상부에서 곤란한 상황임을 잘 알지만 의도적으로 철저하게 무시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는데 뒷날 불미스러운 일이 터졌을 때 위풍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기 위해서로 공직 사회에 흔히 보이는 꼬리 자르기를 저지르고 있다.

    유능한 관료면서 예술가 기질도 있다 보니 장비가 쓴 죽서기년의 사본을 보곤 글씨 좋다고 속 편한 소리를 해서 조조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 유엽
    마초가 재기하고 유비가 입촉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고심하는 조조에게 크게 패한 뒤 아직 세력을 회복하지 못 한 서량과 익주에 2번에 걸쳐 전력을 차출해 전력이 약해진 형주를 치면 된다고 조언하나 마음이 딴 데 가있는 조조는 듣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 재차 조언하려 했으나 사마의의 제지로 멈춘다. 이후 사마의와 함께 가후를 찾아가 조조의 진의에 대해 조언을 듣는다. 214년 조조가 복씨 일가를 처형하는 걸 보면서 공포에 질리나, 사마의가 유씨인 자신이 조조를 지지하는 것은 아주 유용할 거라는 말을 듣고 안심한다. 217년 서량전쟁에도 조조를 따라 종군하나, 유비와 장안 근처에서 싸우는 상황에 한고조 유방을 떠올리고 얼어붙는다. 조조가 묻지 않았는데 적극적으로 계책을 내는 가후의 속내를 파악하고, 종친이면서 조조의 편을 든 자신도 그의 처지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고 이를 악문다.
  • 사마의
    서량과 형주를 쳐야 한다는 헌책이 거부당했음에도 거듭 나서려는 유엽을 제지한다. 후일 위를 찬탈하는 인물인 만큼 유비의 생각 속에서도 자주 비중을 보인다. 조조를 모방해 찬탈을 성공했으나,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은 악행으로 인한 성공이 후손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줘 결국 팔왕의 난을 유발했고 이후에도 역사적으로 수많은 비극을 낳았다고 평가한다.[80] 그와 별개로 주인공은 사마의는 조조의 수법을 따라하기만 했지 조조와 같은 창의성은 없다고 디스하기도 했다.

    서량 전쟁에도 책사로서 종군하다 유비의 맹덕전을 보고 이러면 조위 내의 유비 동조자들이 반란을 못 할 거라고 의아해하거나, 유비의 북벌에서 어차피 양번이 떨어지면 강하군도 유지할 수 없으니 문빙을 빼자고 말하는 등 확연히 승상부 책사들보다 한 발 앞서가는 면모를 보인다. 다만 아직 나이도 젊고 직위도 높지 않아 화흠 등의 고참들이 자신의 의견에 반박을 하면 재반박 하지 않고 그냥 물러난다.

    조조의 친정에 동행해 낙양까지 온다. 초반부터 직접 나서려는 조조에게 우선 동남의 장료, 장패에게 유비의 예봉을 상대시키고 조조는 그 후에 나서라고 간언해 받아들여진다.
  • 최염
    조조군 관료. 전선에 가깝단 이유로 형북과 회남 주민들에 대한 역이 과하다고 줄일 것을 제안하나 찬탈을 위해 하북과 중원의 민심이 중요했던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조에게 반기를 든 적도 없고 오히려 정국을 조조 뜻대로 이끄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모든 사람을 한 번씩 의심해보는 지경에 이른 조조는 그가 나중에 찬탈을 두고 다른 말을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는 이유만으로 사적으로 사돈인 그를 죽이기로 마음 먹는다. 이후 낭야왕 유희의 회상에서 속전속결로 제거되었음이 드러난다. 조조는 본래 작은 오점이라도 찾아 죽이려 했으나, 그런 것도 없어서 그냥 죽여버렸는데 이는 추후 조조의 큰 아킬레스 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 모개
    조조군 관료. 최염처럼 조조에게 충성하는 관료였으나, 나중에 다른 말을 할 것 같다는 예감만으로 숙청 명단에 올랐다. 최염이 결백히 죽었기 때문에 모개까지 죽이면 민심이 이반할 걸 우려해 우선 옥에 갇혀있다고 한다.
  • 왕랑
    회계태수로서 막 거병한 손책과 맞서 싸우다 패하고 북쪽으로 달아나 조조에게 봉직해온 중신. 최염, 유희를 연달아 제거해 공포정국을 조성한 조조가 오래전에 폐지된 육형을 부활시킬 뜻을 내비치자 반대할 엄두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는 신하들 사이에서 "죽을 죄 지은 놈들은 다 죽여야지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시국도 어수선한데 봐주지 말고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얼핏 조조편을 들어주는 것 같으면서 육형 부활에 명확히 반대하는 의견을 내 일단 보류되게 만든다. 교사들은 왕랑마저 잡아서 고문할 것을 건의했으나 말을 잘해서인지 조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유비가 촉한왕을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밑에 오랑캐만 긁어모아서 그런지 글재주 있는 이가 없어서 이런 칭호를 자칭했나며 송건과 다를바 없다고 비웃는다.[81]
  • 경기, 위황
    원 역사에서 경기, 위황의 난을 일으켜 조조에 맞선 관료들. 둘 다 조조 산하의 승상부에서 중역을 역임해 충분히 위나라 조정에서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는 배경이 있다. 실제로 경기를 만난 허창 승상부 장사 왕필은 위나라 관작 중 자신의 직위인 소부 자리에 왕랑이 앉았으니 은퇴할 작정이라 말하는 경기에게 왕랑이 얻은 관작인 소부 겸 태상 대리를 말하면서 왜 왕랑을 대리로 삼으면서까지 태상 자리를 비워 놨겠냐며 그 자리는 경기의 것이기 때문이니 오해하지 말라는 해명을 했을 정도였다. 태상이 실권이 약하다곤 하지만 명색은 한나라에서 서열 10위권 내에 드는 초 고위직인 구경 중 하나인지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자리이다. 즉, 조조도 경기의 배경과 능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이와 별개로 조조의 찬탈 행보를 배신이라 여기며 이를 갈고 있었는데 왕필에게서 유비가 자신들의 반란을 암시하는 내용의 글인 맹덕전을 퍼뜨려 이목이 집중되었다는 말을 듣고 유비가 시골 출신 황족이라 중앙 사정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 판단, 당장의 반란 계획을 접는다. 이는 유비가 원 역사 지식을 기반으로 경기, 위황의 난이 조조의 계획대로 진행될 것임을 간파했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고자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다. 유비가 젊을 적부터 알고 지냈으며 의대조 사건 당시에는 조조를 한조의 충신으로 믿고 있어서 참가하지 않았지만 현 시점에선 그것을 후회하고 있으며, 특히 경기는 후한 건국공신의 후예로서 순욱마냥 자신들의 과오를 방치하고 무책임하게 가고 싶진 않았기에 불리하더라도 거병할 각오를 하고 있다.[82]

    218년 유비의 군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의 진군에 맞춰서 거병할 생각에 일단은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고 유비군이 조조의 지구전에 고전하며 중원 진격이 어려워 보인 다음에는 여름 장마 때문에 거병을 미루다 가을을 앞두고서 난을 일으켰다. 중원이 텅 비어서 헌제를 탈환하는 것까지는 가능하다 여겼으나 조조는 오랜 시간 허도 인근의 땅을 부쳐 먹으며 사실상 조씨의 소작농이 된 둔전민들만으로 가볍게 진압한다. 조조의 앞으로 압송되어 최후로 한고제를 부르짖으며 한탄하는 순간, 가을 장마가 시작된다.

    사망한 후에도 그 나비효과가 언급되는데 둘 다 조조의 승상부에서 오래 몸담은 거물들이라서 중원 전역에 이들이 꽂아준 문생고리들이 수백명이 넘었다. 조조가 딱히 노린 건 아니지만 이들이 처형당하자 각지의 친조조파가 과잉충성의 일환으로 막무가내로 이들을 숙청하려 들었고,[83] 한참 숙청이 진행되던 와중에 유비군의 포위망이 뚫리면서 문생고리들 대부분은 살기 위해서라도 유비에게 가세할 수밖에 없게 된다.
  • 왕필
    후한의 승상장사로 현 시점 허도의 실권자급 인물이다. 허도의 여론이 생각보다 불순하지 않은 것에 실망감을 느끼고 있으며[84] 경기를 만나서 유비가 저술한 맹덕전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이때 경기를 뼛속까지 친조조파라 믿어서 속내를 다 털어놓아 버렸고 그 결과 경기가 반란 계획을 일단 접어서 적절한 반란을 유도하려던 조조의 계획을 꼬이게 만들어 버렸다. 조조 산하 문관들 중 가장 오래 일해온 인물[85]로 원 역사에서는 위의 경기, 위황의 반란 진압 중에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 위풍
    업성에서 승상부 실무를 총괄하는 서조연. 장안에서 실무 능력을 인정받고 업으로 들어와 조조를 가까이 모실 기회를 잡았으나 기실 빛좋은 개살구로 부승상 조비에게 민심이 왜 이 지경이냐며 죽간으로 두들겨 맞는 처지. 하북은 몰라도 중원은 언제든 봉기가 일어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임을 알지만 윗사람들은 그런 보고를 듣고 싶어하지 않음을 알기에 숨긴다. 다만 이 페이스면 사건은 터질 게 분명한데[86] 언젠가 사건이 터지면 홀로 모든 책임을 떠안고 목이 달아날 게 뻔함을 알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해 답답해 한다. 그리고 형북에서 후음의 반란이 일어나며 정보를 숨긴 것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 쓸 처지에 놓였다. 당장은 유비군을 상대하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느라 위풍을 문제삼는 자들이 없으나, 조만간 동조연이 보관하는 장계들 사이에 있는 형북 관리들의 보고서가 발견되면 자신이 중간에서 보고를 조작한 게 들키기 때문. 이에 조만간 병사들을 이끌고 쳐들어가서 업성 관청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219년 말 양번 전역으로 힘이 집중될 무렵 재등장. 여전히 조비에게 구박당하고 있으며, 그를 달래기 위해 백성들의 민심은 괜찮은데 도적들 때문에 나빠보이는 것이라며 입발린 소리를 늘어놓는다. 거짓말만 느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며 장천을 비롯해 현 조조정권에 불만 있는 관료들을 남몰래 모은다. 기회를 봐서 한 제국 충신이란 명분으로 업성을 뒤집을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장천이 준 가후의 밀서를 보고 당황하며 계획을 미룬다.
  • 장천
    장락위위이자 조앙을 죽인 것으로 유명한 장수의 아들로 아버지가 조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뒤 그 작위와 식읍을 물려받았으나 지속되는 조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한때 아버지를 섬겼던 가후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하자 네놈의 꾀를 쓴 사람들은 모두 결과가 비참했다며 울분을 토한다.[87]

    이후 위풍과 만나서 업성에서 거병할 계획을 짠다. 그러나 가후가 낙양에 가기 전 갑자기 찾아와 밀서를 건네서 계획을 말리자 당황하면서도 가후의 지략을 알기에 따른다.
  • 고유
    승상부 법조연. 위풍이 승상부 밖의 일을 관할한다면 이쪽은 승상부 내부를 관할한다. 교사 노홍, 조달의 비리를 철저히 파헤쳐 왔다. 유비와의 결전을 앞두고 내부단합용으로 효용이 다 한 두 교사를 처리하기로 한 조조의 의중에 따라 중신들 앞에서 그들의 비리를 낱낱이 고발한다.

6.3. 군부

  • 우금
    유비의 북벌에서 조홍이 패배하자 조조가 파견한 오자양장의 일인. 5만 대군을 몰고 남하해 염행, 곽회의 기병, 호수와 부방의 형주군까지 흡수해 7만 대군으로 유비군을 사정 없이 압박했다. 실력은 확실해서 장합과 조홍이 완성 공성전을 벌이면서도 유비가 후방을 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유비는 수적으로 열세해 힘들게 버티다가 홍수가 시작되자 반격을 개시한다. 유비군이 갑자기 공세로 반전한 이유도 모르고 계속 장기전 태세를 준비했으나, 조조의 명령으로 앞뒤 보지 않고 남하해 양번을 지원하러 이동해야 할 상황이 된다. 문제는 수전을 생각하지 못한 탓에 우금군에는 전선이 1척도 없다는 것. 때문에 유비군도 가봤자 한수를 오고 가며 번성을 치고 빠질 제갈량을 잡기는커녕 헛고생만 할 거라면서 방치한다.

    조조의 명을 받고 양번을 지원하러 가면서 유비가 추격하지 않음에 안도하나, 어쩌면 유비가 이 순간을 예측한 것이 아닌가 불길해한다. 생각보다 심각한 번성의 상황을 보고 경악해 병영도 세우지 않고 급히 지원하러 달려든다. 제갈량이 차분히 물러나자 무리하게 추격하는 대신 번성 북쪽에 진지를 세우기로 한다. 그러나 공사 중 한수의 범람으로 병졸들이 휩쓸려 어이없이 괴멸당하게 되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수천명의 병사들이 물에 빠져 휩쓸려가며 판자에 매달리느라 서로 싸우며 죽어가는 광경[88]을 보게 되자 완전히 넋이 나가서 구해야 한다고 중얼대기만 하다가 군관들에게 끌려서 겨우 대피한다. 이후 굶주림에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며 고심하다가 결국 항복을 결심하고 제갈량에게 향한다.

    수십년간 조조를 충실히 섬긴 우금이 투항을 결심하는 사고의 기저에는 후한에서 위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가져온 혼란으로 묘사된다. 후한의 장군으로 정통조정의 승상 조조 아래서 싸울 때는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었지만, 유씨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수백년 묵은 중화의 관념을 부수고 조씨로의 찬탈일직선을 밟아가던 과도기인 219년의 우금과 3만 장졸은 한의 군인도, 위의 군인도 아닌 그냥 개인이었다. 극한으로 몰려 자신을 돌아보니 충신도 역신도 아닌 사람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생존 욕구에 매달리게 된 우금은 살기 위해서 투항을 결심한다.[89]

    중원 출신이라 조조 산하에 오래 있어서 믿을 수 없는 우금군을 먹여살리는 문제로 유비군 내에서도 갱살해버리자는 의견이 많이 나왔으나, 제갈량의 트라우마와 유비 본인의 고심 끝에 결국 강릉으로 옮겨져서 모두 목숨을 보장받게 된다. 조조는 이를 두고 유비군이 결국 패망을 자초했다면서 비웃는다.[90] 관중과 낙양에서 추가로 대군을 동원하려하나 병력이 부족하자 조조는 투항한 우금군 병사들의 집안에서 무조건 장정 한 명씩을 차출하도록 지시한다.
  • 악진
    수년 전 남군 공방전에서 관우를 패퇴시킨 이력이 있어[91] 조조의 명에 따라 7천의 병력을 이끌고 상용을 침공한다. 전장이 좁기에 악진은 이전을 부관으로 삼아 상용에서 관우와 정면으로 격돌한다. 관우의 괴력에 당황하면서도 유인책으로 끌어들이는 노련함을 보였으나 법정의 개입으로 계책이 어그러졌고 이후로는 지지부진한 대치만 이어가다 신씨 형제의 신속 선언을 명분으로 퇴각한다. 물론 악진이 뛰어난 장수지만 관우, 법정, 유비라는 유비군 최상위 전력을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후 악진의 7천 병력은 조조군 중에서도 가리고 가린 정병들이라고 언급되며 엄밀히 말해 관우군은 정예 1천은 유비가 후방을 견제하기 위해 빼놔서 전투엔 거의 끼지 못했다는 등 어느 정도 보충설명을 하긴 했다. 이후 합비 공방전에서 장료, 이전과 같이 손권을 기습해 대패시킨다. 217년 유수구 전투에서 오랜 동료인 이전이 전염병으로 급사하고, 본인도 장례식에 갔다 오면서 불길한 현기증을 느낀다.[92] 이후 유비의 북벌이 진행되는 현재까지 언급도 등장도 하지 않는데 역사대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서황
    유비가 당초 조조의 예상과 달리 한중과 양주 쪽으로 진출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바로 주둔하던 장안에서 나와 서량과 장안 사이의 요충지인 진창으로 급히 진출해 이곳에 성을 쌓고 있다는 서술이 있다. 진창에서 길이 험하긴 하지만 한중을 칠 수도 있기 때문에 유비도 서황을 경계해서 한중에 있는 주력을 못 빼고 육천 정도만을 동원해 서량에 나가야 했다.

    5년여 후인 216년에도 진창성에 주둔하며 유비군을 견제하고 있었다. 유비군이 기성(마초), 상규성(관우), 오장원(유비) 세 방향에 주둔하고 있자 하후연에게 오장원의 유비군은 위수를 넘기 어려울 테니까 자신들은 가까이에 있는 상규성의 관우를 견제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으나, 그 직후 유비군이 오환족의 협조로 위수를 넘어서 북원을 끊어서 장안과의 보급로를 막아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당혹스러워한다.

    결국 진창성에서 하후연과 함께 유비군의 공세를 받게 된다. 전투 도중 약체인 익주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진하나, 장임과 황충에게 반격을 당하며 위기에 놓이지만 하후연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귀한다. 그러나 조금씩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조조가 늦을 거라는 진의가 담긴 밀서가 도착하고, 군사들에게 허장성세를 부리며 버텼음에도 결국 조홍을 격파한 관우와 황권군이 유비에게 합류하는 걸 보게 된다. 결국 전투 중에 하후연이 전사하고 본인은 패잔병에 가까운 위군만 남은 채로 진창에 완전히 포위당해 처지가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진창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이고자 다시금 역습을 시도하지만 황충의 적절한 대처로 무위로 돌아가며 결국 눈물을 머금고 철수한다. 그러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위군을 관우와 황권이 추격하자 후위를 맡아 추격을 막고자 하고 그 과정에서 관우가 내가 잘 말해줄 테니 유비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유비가 허도에 당도해 황제를 모신다면 역으로 황제가 더 위험해질 것이라 항변한다. 더는 약탈할 수 없을 때까지 약탈하다 파멸하는 미래만 기다리던 자신을 구제해준 조조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며 그가 비난받는 것을 억울해하고 있었다.

    관우에게 유비는 절대 제위에 오르지 않을 것이란 말을 끌어내 추후 유비 세력 내에 분란의 씨앗을 심어둔 것에 만족하고 죽을 걸 알면서도 관우와 일기토에 임한다.[93] 완전히 지친 몸으로 50여 합을 버티며 선전했으나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목이 베이며 원 역사보다 10년이나 빠르게 삼국지 무대에서 퇴장했다.[94] 이때 오랫동안 함께한 고참 노병들도 투항을 거부하고 서황을 따라 죽음을 택했다. 이를 보면서 독자들은 서황에 전작 내마속의 진군을 대입해서 보기도 했다.

    관우가 조조 밑에 있었을 당시 친하게 지냈다고 하는데, 이 때문인지 관우는 서황에게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서황을 죽이자 한동안 매우 괴로워하기도 했다. 원 역사에서도 서황을 전장에서 만났을 때 옛날 친구였던 시절처럼 호의적으로 대화하다 서황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당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고증이다. 서황도 관우에게 사적으로는 친구지만 나랏일은 다른 문제라고 선을 그었던 기록을 보아 나름 친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서황의 전사는 조조군에 있어서 몹시 뼈아픈 손실로 묘사되는데 조씨, 하후씨가 아닌 장수 중 가장 신뢰받고 있었으며 능력도 출중하고 견실하기에 다른 이들은 목숨이 아까워서 제시할 수 없는 선택지를 제시해줄 수 있는 장수였다고 한다. 실제로 작중 앙번 전선에서 원 역사의 서황이 택한 답안을 생각하면서도 목숨이 날아갈까봐 말을 못하는 무장의 묘사가 늘어났다.
  • 장합
    조조군 장수. 하후연의 부장을 하고 있으며, 항장 출신이라는 근본적 한계 탓에 조조의 친위 세력인 하후연에게 아부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한수의 군대를 동요시키기 위한 하후연의 명령으로 인근의 강족을 5천 명 정도 죽이려고 했으나, 조조군의 이 수법을 알던 유비가 보낸 유격대에 의해 조조군의 기병대만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유비군이 방패로 의지하는 장리천을 역이용해 유비군을 따라잡아 마침내 전투를 벌이게 되고 오자양장이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유비를 궁지로 몰아넣지만 방통의 책략과 타이밍 맞게 도착한 마초의 지원 탓에 결국 유비를 잡는 데는 실패한다.

    216년 위수 북쪽 현친현에서 염행을 도와 관우-마초와 대치하고 있었으며 조홍 대신에 염행의 요청을 상담하다가 그가 곽회에게 화를 내자 말리고, 곽회에게 해명할 기회를 준다. 서량 전쟁 이후 병주에 주둔하며 장안 방어를 맡았다가 조조의 명령으로 남양의 유비를 막는 데 투입된다. 병력이 적은데도 기병 우위를 앞세워 빠르게 일전을 벌이려는 사령관 조홍을 자제시키며 남양과 형북에 남은 병력과 합류할 것을 주장한다. 유비군과 대치하는 조홍과 자신의 상황이 과거 관도 대전 당시 전풍의 전술을 채택하지 않은 원소와 유사함을 깨닫고, 조홍이 자신을 은연중에 저평가하는 걸 알면서도[95] 최대한 장기전을 유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인색하기로 유명했던 조홍이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서 병참에 보태는 것을 보고 상황이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게 돌아간다고 우려한다.

    다만 여기서 조홍이 무조건 성급하고, 장합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게 장합은 유비군처럼 조조군 역시 보급 부담이 심하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홍의 군대만으로도 이미 유비군 본대보다 근소하게 적은 수준인데 기병 전력이 훨씬 많아서 보급 소요는 크게 차이가 없다. 여기에 조조가 이끄는 본대 역시 거대한 규모로 존재하니 이 둘을 한꺼번에 부담해야 하는 중원, 특히 북형주 일대 백성들은 부담이 어마어마하다. 이러면 굶어 죽기와 맞아 죽기만 남은 백성들이 마지막까지 자신들을 건사하려 했던 유비와 유표가 일군 평화를 파괴하고 수탈밖에 해준 게 없는 조조 중에 어느 쪽에 기울지는 불 보듯 뻔하며 이미 남양에서는 반란이 일어난 상황이다. 그런 민심까지 감안하면 조홍의 의견대로 다소 모험적이어도 기병 우위라는 확실한 강점을 내세워 빠른 일전을 벌여 터지기 직전의 민심을 억누르는 게 맞다. 거기다 장합이 건의한 형북 현지군을 지휘하는 호수와 부방만 해도 원 역사에선 조조를 배신하고 유비 편을 든 사람들이다. 거기다 유비를 빼면 누구도 모르는 것이긴 하지만 곧 대홍수가 터진다는 점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즉, 유비쟁패의 장합은 정치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한 전장의 상황만 보고 판단하는, 전형적인 정치에 관심없는 군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조조가 장합의 전술인 장기전을 명하기는 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전예가 남양 호족들을 모아놓고 당근(출세)과 채찍(대군)을 적절히 이용해 민심을 얻어낸 이후였기에 가능했다.

    조홍의 설득에 성공한 듯 했으나, 직후 유비군이 일부러 호수와 부방을 칠 것처럼 자신들을 유도하자 어쩔 수 없이 진군해서 야전을 치르게 된다. 정석대로 기병 우세를 살리는, 적의 대장을 잡을 수 있도록 포진을 짜서 운용했으나 유비군의 노림수에 휘말려 최정예 철기를 다수 잃자 자신들이 유도당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전황이 꼬여가는 걸 보고 불안해하면서도 분투하지만 결국 패전을 막진 못한다. 그래도 5만의 병력으로 퇴각해 조홍과 함께 완성 포위를 맡아 10개월간 완성을 괴롭히다 대홍수 이후 유비의 원군이 당도해 공세를 개시하자 장비를 막아선다. 장비가 치고 빠지려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기병을 끌고 전력으로 추격해 따라잡아 장비를 종일 붙잡고 전투를 벌인다. 본래도 기병이 많았던 만큼, 관우가 가세한다 쳐도 후방의 유기까지 끌고 와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관우의 돌격에 전예가 뚫려버리며 장비에 더해 마초까지 상대해야 할 처지에 놓여 전예는 뭐했냐고 부르짖다 관우의 입성을 알고 급히 군사를 물린다.
  • 곽회
    조조군 장수. 서량 전선에 배치되어 있으며 염행이 서량인들의 동요를 느끼고 비서량인 호위 병력을 요청하자 서량인들을 이끌어야 할 염 장군이 이래선 안된다고 정론으로 맞섰다가 멱살을 잡힌다. 그러나 유비군이 수적한계로 장안과의 연결을 전부 막지 못할 것이며 유수구에서 손권과 대치하는 조조가 6주면 도착한다고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후 전술을 묻는 조홍에게 유비군은 진창성으로 올테니 본인들도 주력군으로 이를 요격하자고 조언한다. 서량 전쟁 이후 병주에 주둔하며 조홍, 장합을 보좌하다 남양으로 들어온 유비군을 영격하는 데 투입되나 패하고, 이후 우금 산하로 배치되어 유비군을 견제한다. 이후 양번에서 대홍수가 터지며 우금이 항복하는 사태가 터졌지만 이때 곽회는 호수, 부방과 함께 있었던지라 홍수에 휩쓸리진 않았다. 이후 조홍군에 우금이 돌려보낸 기병들이 합류했다는 내용을 보면 그 역시도 다시 조홍과 합류한 것으로 보였고 사실로 밝혀진다. 이후 군의에서는 지속적인 패전으로 인해 발언권이 축소된 상황이다.
  • 문빙
    과거 유표 산하에 있던 장수로 조조 산하 최고의 수군 장수이며 현재 형북에 주둔하고 있다. 과거 형주 공방전 당시 관우를 격파한 전적이 있었으며, 217년 시점에서도 한수 연안을 방비하면서 제갈량을 고뇌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219년 가을장마가 시작되면서 아무것도 못하고 허망하게 촉한 수군이 새로 생겨난 수로로 지나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할 상황에 처했다.
  • 만총
    여남 조위군을 지휘하는 장수. 218년 유비의 북벌에 조조가 여남을 비우고 양양에 합류시키자 1만 군사를 데리고 양양에 들어온다. 이후 조인이 유비군 포위망에 참전해 남양으로 북상하면서 양번 수비를 담당하게 된다. 유비가 몰리면 분명 양양으로 남하할 것이라 믿고, 남방의 제갈량은 석양성의 문빙이 있으니 올 수 없다고 믿었으나 219년 가을 장마로 인해 제갈량의 수군 수백척의 습격을 받게 되고 활이 축 늘어지는 등 불리한 상황에서도 분투하지만 결국 한수 수로를 내주게 된다.

    이후 번성 공방전에서 제갈량에게 밀리다가 우금의 돌격으로 간신히 살아남는다. 이에 술과 고기를 풀어서 군민을 다독이려 했으나... 서기의 수문이 이상하다는 말에 그런 잡무까지 보고하냐고 화를 내다가 불길한 느낌에 수문을 확인한다. 한수 자체가 범람하여 오히려 수문에서 강물이 역류하는 것을 보고 경악해 물에 휩쓸리기 전에 겨우 도망치나, 우금군이 괴멸되는 걸 막지 못한다. 이후 우금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일각에서 조인이라도 성에서 내보내 원군을 데려오자는 의견이 나오자 그러면 양번이 무너지고 그 순간 황하 이남은 다 유비에게 넘어간다며 조인의 출성을 반대한다. 양번이 넘어가면 사예, 예, 서주까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거라는 예측을 속시원히 말하지 못했으나 조인이 만총의 의견을 인정해 번성에서 버티기로 한다. 이후에도 계속 번성을 지키나 은서가 이끌고 온 원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신병들임이 분명하다며 왜 신병들을 이리 깊숙히 끌고왔냐며 한탄한다.
  • 허저
    조조의 호위무장. 동관에서 조조군과 유비군이 대치하는 와중에 장비와 마초가 일군의 기병을 이끌고 찔러오자 즉시 조조를 보위한다. 조조 앞에 선 순간 벽이 하나 생겼다 할 정도로 거구이며 그가 직접 선발한 조조의 호위병들도 기골이 장대한 이들로 가려뽑은 강병들이라 그들이 온 것만으로도 조조군 모사들이 든든해할 정도다.
  • 전예
    민심을 무기로 사용하는 유비에 대응할 방법을 고심하던 조조에게 가후가 그를 남양 태수로 삼을 것을 추천한다. 예전에 유비의 부하이기도 했고 민심을 추스르는 역량이 뛰어나 남양을 단도리할 태수직에 최적의 인사라는 것. 이후 남양태수로 부임해 남양 호족들을 불러 모아 완전 툭 까놓고 "좌장군은 좋은 사람이 맞지만 이대로 있다간 내가 죽을 거 같아서 나온 거다."라는, 대놓고 나 배신자라 선언하는 자학성 발언으로 유비 편에 가담할 때 닥칠 고난과 깨끗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받아주는 조조의 그릇을 강조하고 우금이 이끄는 5만 대군이 곧 도착하니 함께 맞이하러 가자는 발언을 던져 국지전 패배 따위로 변하지 않는 양쪽의 세력 차이를 일깨운다. 동요하던 호족들을 단번에 진정하자 슬그머니 소작료 감면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이 백미.

    이후 완성에 합류하여 유비군의 공세 때 마초를 막아선다. 수레와 화공을 통해 마초의 맹공을 한나절이나 막아냈으나, 전예의 부곡들이 이민족과의 전투 경험이 메인이었던 것과 너무 눈치가 빠른 것이 독이 되는데, 마초가 물러나는 걸 눈치채자마자 과거 이민족들과의 전투 경험을 떠올려 사실상 싸움이 끝났다 판단해 긴장을 조금 풀었고 그 틈을 찌른 관우의 우회 공세를 막지 못하고 난입을 허락하고 만다.

    그래도 재빨리 예비대를 투입시키며 보병의 질량으로 소수의 기병을 뭉개 버린다는 정석적인 대응을 했는데 무아지경으로 일격필살을 실현하는 관우의 무력 앞에선 그런 정석 자체가 무의미해 대형은 붕괴되었고, 유비군 소속이었다는 패널티 때문에 후퇴 후 재정비도 못하는지라 울며 겨자먹기로 직접 칼을 들고 관우에게 달려든다. 당연히 무력 차이 때문에 일격에 승부가 갈렸으나 관우가 예전에 한솥밥 먹은 정으로 창대로 쳐준 덕분에 갈빗대 몇 대 부러지는 대신 목숨을 건지고 사로잡힌다.[96][97]

    그리고 이 씬에서 전예의 심리가 드러나는데 초기 유비군의 너무나도 아슬아슬한 상황에 못 배기고 나온 것으로 드러났다. 유비의 최측근인 관우조차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마당에 하위 무장인 자신은 여기 있다간 100% 제명에 못 살게 확실하다 본 것. 이 때문에 관우가 왜 아직도 살아있는 거냐고 기막혀하기도 했다. 다만 자기 목숨도 목숨이지만 부하들 목숨도 챙기려고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가 그 결정으로 인해 부하들이 관우와 마초에게 조져지며 안하니만 못한 결과가 되었다는 것.

    합비의 병력까지 빼 전군을 투입하는 조조의 움직임을 보고 자문을 구하는 유비의 말에 자문은 은근슬쩍 회피하면서도 태도는 싸바싸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 유비가 내린 전예에 대한 평은 인간 풍향계, 가후 순한맛. 그말인즉슨 전예가 적극 협력하면 자신에게 대세가 기울었다는 뜻이리라 여긴 유비도 계속 풍향계로 써먹기 위해 더이상 조조군 관련 정보는 묻지 않고 시시콜콜한 근황 이야기만 나눴다.
  • 주령
    조조에게 갖은 핍박을 당하고도 묵묵히 견뎌내며 끝내 고당정후 및 후장군 직위까지 올라가는 입지전적인 인물. 장리천 전투 당시 하후연 휘하에서 종군하며 보병대를 지휘했으며 이후 유비군을 막기 위해 서량에 주둔하나 서량 전쟁으로 조조군이 서량을 포기하면서 병주로 이동했으며 이후 유비의 북벌이 터지자 신야 전투에서 보병대를 지휘해 관우를 상대로 우직하게 버티나 뒤이어 들이닥친 장비의 기병대에게 측면을 찔리며 패퇴한다. 정사에서 유비와 함께 원술을 토벌하러 갔다는 기록이 나왔듯 유비와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장리천 전투 때도 유비가 인사하자 그에 호응하는 장면이 나오며 유비 역시 주령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고 묘사된다. 딱히 화려한 전술과는 인연이 없지만 끈기가 있는 장수로 우직하게 버티면 돌파하기 어렵다고 한다. 완성 전투에서 조홍과 같이 황충을 막아선다.
  • 장료
    합비성을 지휘하는 장수. 오자양장의 1인. 양주 자사 온회의 합비를 비우고 서진해 북형주에 가야 한다는 요청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98] 결국 미리 움직이지 않았고, 완성 전투가 유비군의 승리로 마무리 된 후에야 조조의 명령을 받아 양번 전선에 참전한다. 조조는 장료를 뛰어난 무용의 기병 지휘관이라는 점에서 관우를 견제하는데 붙일 계획이다. 그리고 온회의 조언을 받아들여 준비는 철저히 해둔 상황에서 명이 오자마자 곧바로 출진해 단 1천기의 기병으로 양번의 촉한군 진지를 덮쳐 오란을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이후 장비와 마초의 재빠른 개입으로 그 이상의 소득은 거두지 못한 채 장패와 하후돈의 지원을 받아 철수한다.[99]
  • 호주
    우금 휘하의 호군. 우금이 번성을 지원하러 갈 때 그를 수행하며 유비가 완성으로 향할 것 같다는 말에 이미 조홍이 준비를 해놨는데 거기에 꼬라박는다며 유비를 비웃다 생각보다 심각한 번성의 상황을 보고 말을 잇지 못한다. 이후 우금과 다른 장수들과 같이 군의 중에 범람으로 군사들이 무너지자 넋을 놓고 움직이지 못하는 우금을 끌고 언덕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식량도 불도 없어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고는 다 틀렸음을 깨닫는다. 동형이 항복을 건의할 때는 내심 찬성하면서도 본보기로 목이 날아갈까봐 대놓고 찬동하진 못한다.
  • 동형
    우금 휘하의 장수. 홍수로 인해 7군이 큰 피해를 입자 우금에게 항복할 것을 건의한다. 우금은 당장은 군율대로 거부하지만 결국 항복을 결정한다.
  • 은서
    관중 수비군의 장수. 서량 전쟁 당시 장비가 노석과 합류해 관중을 휘젓자 당황해 출격하려다 조엄의 제지로 수비 태세를 갖추어 휘둘리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유비의 북벌에서 재등장. 관중 수비군 5만을 이끌고 형북으로 들어와 양번 북쪽에서 대치한다. 방어를 준비하고 대치하자는 조엄과는 반대로 조인을 구하기 위해 싸우자고 주장한다. 허나 조엄의 연락책이 전부 실패하자 손해를 보더라도 싸워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킨다. 본래는 조심히 전진할 계획이었으나, 관중 수비군이 취약함을 눈치챈 유비군이 다가와 도발하자, 군기를 유지하기 위해 주요 부장들까지 여럿 데리고 출병하면서 함정에 넘어가고 장비와 황충에게 가볍게 격파당하며 양양이 유비군 손에 넘어가는데 영향을 주고 만다.[100]
  • 장패
    조조 휘하의 장수. 장료와 함께 조조의 동남전선 정병을 지휘하고 있다 유비를 막기 위해 소집된다. 이후 유비군 진영에 돌격한 장료의 지원을 위해 청주병을 이끌고 하후돈과 나서 장비의 추격을 끊어낸다.
  • 여상
    은서의 지원군이 패퇴하자, 결국 군사들의 배신으로 살해당하고 양양성도 촉군에 넘어가게 된다.

6.4. 기타

  • 유희
    유씨 방계 왕으로 낭야왕. 원 역사에서 말년의 조조의 대숙청에 휘말려 죽은 인물이다. 유희의 죽음은 복황후의 죽음과 함께 조조가 한실을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증거가 된다고. 특유의 생존력으로 난세에서 가늘고 길게 살아남았으나, 조조가 사돈인 최염을 죽이며 폭주를 벌이자 위기감을 느끼고 봉지를 버리고 도주한다. 우선은 가까이에 있는 손권에게, 만일 여의치 않으면 종친인 유비를 찾아가 의탁할 생각으로 재산도 거의 포기한 채 가족들과 일부 호위만 데리고 도망치나 장강에 도달해서 조조의 부하인 조달에게 붙잡혀 처형당한다.
  • 노홍, 조달
    교사의 수령들. 감시와 숙청으로 조조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비밀경찰 역할을 수행하며 봉지를 버리고 도주하던 낭야왕 유희를 잡은 게 이들이다. 이후 최염과 모개 등도 잡아넣으면서 업성의 분위기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조조에게 허도나 낙양에도 교사를 배치하자고 건의해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려 하지만, 조조는 허도와 낙양에선 학살을 해서 깔끔히 치워버릴 예정이라서 거절했다. 양양에서 유비와의 마지막 대전을 앞두고 내부를 다잡을 필요성을 느낀 조조는 고유를 시켜 수집해온 두 사람의 비리를 모두가 모인 앞에서 낱낱이 고해바치게 시키고 두 사람은 물론 일족들까지 모조리 주살한다. 반발할 사람은 이미 죽였거나 죽일 예정이고, 나머지 중신들도 언제든 죽일 수 있도록 증거를 다 수집해 놓은 이상 주변의 원한만 사는 둘을 놔둘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 충성의 댓가가 일족 몰살로 돌아오자 악을 쓰나 조조는 "너희도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따른 것 아닌가?" 라면서 무시하자 비로소 과거 비슷하게 조조에게 당한 군량 보급관을 떠올리곤 자신들이 어리석었다고 자책하며 형장으로 끌려간다.[101]
  • 조엄
    관중 호군. 군인이라기보다는 관료에 가까운 인물이나 원역사에서 관우의 공격에도 정확한 판단을 내렸을 정도로 군재를 가진 인물이다. 관중 호군으로 장안을 수비해야 할 장군 은서가 장비와 오환족의 남하에 당황할 때도 침착하게 인근 수비병력을 모조리 끌어모으고 중원에서 올 조조의 원군을 위한 준비를 하는 등 신속하게 결정을 내린다. 법정도 적장이 보통이 아니라고 감탄했으나, 사실 장안을 찔러볼 수 없어서 아쉬울 뿐 애당초 작전 자체가 장안 방면 병력이 전부 수세로 일관하게 만들어 진창을 치는 유비군의 후방을 안정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조엄이 유비군의 의도에 넘어간 셈이다. 이후 조조 본군이 장안에 당도하자 하후연과 서황의 전사 사실을 조조에게 보고하며 유비의 북벌때는 은서 휘하에서 장안 및 낙양에서 징발한 원군을 이끈다.

    하후돈이나 장료의 정병이 도착해 수적 우세를 확보하기 전에는 싸우면 안된다는 판단을 내렸으나, 원 역사에서 같은 의견을 내준 서황이 없었고, 훨씬 더 불리한 상황에서 조인의 목숨이 정말 경각에 달한지라, 입 밖에 내지 못한다. 때문에 우선 땅굴을 파서 소식을 전하려 했으나 이는 제갈량의 대응으로 실패한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조심해서 전진하자고 소극적으로 찬동한다.[102]

    냉철한 판단력과 담력을 지닌 명관료이나, 어디까지나 문관으로 정욱, 순욱 등 난세의 모사들과는 달리 직접 군을 지휘해 싸워본 적은 없는 탓에 정확한 판단을 내려도 현장파 군인들을 설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이는 은서의 패전에 영향을 주고 만다.
  • 왕찬, 사마랑, 진림
    217년 2차 유수구 전투 와중에 싸우지도 않았는데 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조위의 중진들. 왕찬과 진림은 건안칠자 중 1인. 사마랑은 그 사마의의 맏형으로 이미 예주자사를 역임하던 고관이다. 이런 거물들에 이전 같은 고위 군관들도 연달아 병으로 쓰려져나가자 유수구의 조조군은 그대로 마비되어 버리고, 이 사실은 형주를 거쳐 사방으로 퍼져나가서 반 조조 정서를 부추기게 된다.[103]
  • 온회
    양주자사. 날씨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장료에게 군을 움직여야 한다고 건의한다. 이후 장료가 조조에 명을 받기 전까지 출정할 준비를 갖추도록 도왔다.
  • 동리곤
    남양태수. 후음의 난이 터지자 군졸들을 전부 내보낸 뒤 홀로 태수부에 남아 포로로 잡힌다. 사실 도망칠 수 있었지만, 도망쳐봤자 남양태수로서 관리를 못한 책임을 물어 가솔들까지 처벌될 판이라 충신 코스프레라도 하기 위해 남은 것이다. 그동안 몇번이나 학정에 지친 군민들이 심상찮다고 보고를 올렸으나 모조리 무시당했다고 한다. 이후 종자경의 도움으로 풀려나서는 남양군 각지에 있는 둔전병을 모아서 후음을 토벌하려 시도한다.[104] 후음을 어설프게 똑똑하다며 비웃지만 머지 않아 등장한 마초에 의해 자신이 포로로 잡혀버리자 차라리 후음에게 계속 잡혀 있었어야 했다며 후회한다. 동리곤의 기회주의적 행보를 잘 아는 유비는 내심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기회주의자들이 몽땅 조조에게 붙어서 일치단결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투항을 받아들인다.
    유비군이 완성에 도착한 뒤 유비가 호수와 부방을 포섭하라는 명령을 종자경에게 내리자 저들은 조조가 믿고 보낸 인사들이라 쉽게 항복하지 않을 거라고 나름 조언을 건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 포섭시도는 동리곤의 예상대로 종자경이 호수와 부방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화살에 맞아 다친 종자경을 병문안와서 자신들이 유비를 도왔으니 조조에게 잡히면 죽을 것이라며 불안해하는 그를 조조는 자신들을 죽일 필요가 없으면 죽이지 않는다면서 안심시킨다.[105]
  • 종자경
    남양 출신으로 공조를 지내고 있는 남양군 내 실력가. 후음의 난이 터진 뒤 한실 부흥의 명분을 든 이상 공식적으론 한나라 관직을 받은 동리곤을 죽여선 안된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남양군 내 명사호족들을 설득하겠다는 조건으로 동리곤을 석방시켰다. 당연히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는데 이는 조조군이 너무 강해서 농민들이 이겨낼 수 없으니 자신이라도 나서서 후음을 토벌해 고향 사람들을 최대한 지키겠다는, 자기 딴에는 좋은 의도였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선 조조군보다 유비군이 완성에 더 가까이 있었고 결국 마초에 의해 동리곤과 같이 포로로 잡혀버린다. 세력이 약해 현지 호족들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던 유비는 조조였다면 그냥 죽여버릴수 있었을 것이라 아쉬워하며 투항을 받아들인다. 이후 유비의 명령으로 호수와 부방에게 투항을 권유하러 갔다가 만나보지도 못한 채 화살세례를 받아서 어깨를 다친다. 이후 돌아와서 이번 일 탓에 조조가 정말로 유비를 위해 일했다고 분노할 것이라 걱정하지만 조조는 필요여부에 따라 생사를 정하는 분이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동리곤의 말에 안심한다.
  • 유협
    후한의 마지막 황제. 조조에 의해 협천자당한 상태이며 그가 벗, 후견인, 장인, 아들, 아내와 충신들까지 죽이는 것을 한탄하다가 독서로 마음을 달래고자 하는데 한고조본기에 나오는 고조가 있는 곳은 구름기운이 있다는 여후의 대사를 계속 읽다 비가 내리는 바깥을 본다.[106]

7. 형북

남양과 양번을 중심으로 조조가 차지했으나, 형북과 밀접한 한중군 동쪽의 삼군(서성, 상용, 방릉)을 뜻하는 동삼군은 상용을 중심으로 산과 강에 둘러쌓인 분지라는 지형적 이점을 통해 명목상 조조의 영토일 뿐 반자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동삼군은 행정구역상으론 한중에 속하지만, 실질적으론 한중과 따로 놀며, 양양군의 바로 좌측이라 지도상으론 형북에 가까워보이나[107] 역으로 교통은 한중과 편하다는 기묘한 지역이다. 한중의 안정성과 형주 공략을 위해 요긴한 지역으로, 장로는 유비군을 피해 상용으로 도피했고, 조조도 상용을 통해 한중을 위협하려 해서 유비 역시 상용을 중시했다. 결국 유비와 조조군의 일전 이후 암묵적으로 양다리를 걸친 중립 지대가 된다.

유비가 형주 남쪽을 문제가 되리라 알면서도[108] 유지하는 건 이 형북의 세력구도 때문이다. 형주와 중원을 가로지르는 대별산맥과 한수에는 과거 중원에서 조조를 피해 도망친 잔당들이 매우 많아 조조의 영역인데도 반 조조 여론이 드높다.[109] 조조 역시 긴 시간을 들이거나 이들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토벌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세력이다. 형주에서 북진할 때 이들과 연결만 된다면 사기높은 대군과 현지의 민심을 거저 얻어 바로 중원의 허도, 낙양, 여남 같은 핵심지역을 위협할 수 있다. 유비는 임상대치 기간 동안 이들과 연락하는데 성공해 반 난민에 불과한 이들을 제대로 된 게릴라군으로 조직한다. 본래의 융중대가 서량에서 장안을 향한 공세였다면, 유비는 익주에서 한중을 통해 상용과 양양으로 이어지는 동북전선 공세를 기획한 것.

서량 전쟁이 유비군의 승리로 끝나자 끝까지 복종하지 않는 괴기의 방릉을 제외한 나머지 2개 군은 신속하겠다는 서신을 보내 유비측에 가담한다. 다만 괴기도 유비가 장수 아무나 1명 골라서 보내도 저항할 힘이 없는지라 유비군 내부에선 방릉도 사실상 자기들 땅이라 인식 중이며 이후 방덕과 장완을 파견해 괴기를 사로잡음으로써 방릉도 실제 지배를 이룩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동삼군을 완전히 손에 넣으면서 유비는 한중을 완벽하게 차지하게 된다.

유비와 조조의 전면전이 벌어질 전장으로 유비는 상용군을 통해 양양을 수로로 들이치는 작전에 주력군을 동원하고 본인도 친정하여 조조와 끝장을 낼 작정이다. 조조 역시 유비가 양양으로 올 것을 확신하고 장안과 관중이 위험해질 가능성을 알면서도 가능한 병력을 모조리 양양 일대로 모으고 있다.
  • 괴기
    방릉태수. 제갈량의 누나와 혼인해 제갈량과 인척 관계이지만 계속 유비에게 뻗대다가 결국 맹달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원역사를 알고 있던 유비가 본인이 직접 가서 그를 설득하고자 했으나 현지 민심이 양쪽을 저울질하기로 한 가운데 악진을 꺾는데 실패하며 1차 설득 시도는 실패했으며 이후 유비의 관심이 익주와 서량 쪽으로 돌려지며 존재감은 없어졌으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상용에서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일단 유비에게 적대는 하진 않는 모양. 서량 전쟁이 끝나고 장로와 신탐이 유비에게 신종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유비에게 굽히지 않고 있다고 언급된다. 그러나 유비에게 대항할 힘은 없어서 유비군 장수 중 아무나 한 명 골라 적은 병력만 끌고가도 저항하지 못할 처지라 유비군은 방릉을 사실상 자기들 영역으로 취급한다. 유비는 괴기가 자신에게 굴하지 않고 있지만 제갈량의 인척인 만큼 우선 설득부터 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교전을 벌여도 최대한 살릴 것을 지시하며, 방덕과 장완에게 1만 병력을 맡겨 보낸다. 결국 방덕과 장완에게 패해 붙잡혔다고 언급되는데 원역사에서는 맹달에게 처단되었으니 바뀐 역사의 수혜자.
  • 신탐, 신의
    상용군의 대표 호족. 유비, 조조 둘 중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채 간을 본다. 때문에 상용 전투 중에도 계속 관찰만 하고 있었으나, 상용호족들의 사병으로는 어디 편을 들어도 좋은 꼴을 볼 수 없을 거라는 객관적인 자기평가를 내린다. 전투가 소강기에 접어들자 유비 쪽에서 등지를 파견해 신호를 주어 조조, 유비 양쪽에 신속하겠다는 서신을 보내 두 세력이 상용에서 물러날 명분을 준다. 서량 전쟁이 유비의 승리로 끝나자 장로와 함께 신종하겠다는 서신을 전달했고 형제 중에 형인 신탐이 장로와 함께 가솔들을 이끌고 한중에서 유비를 영접했다. 유비는 크게 환대하며 상용태수 직에 그대로 유임시켜 이권을 보장했으며 신탐은 충성의 표시로 아들을 유비 진영에 남겨두고 떠났다.

    218년에 유비가 촉한왕에 등극하자 신탐은 진북장군, 신의는 건신장군에 임명되는데 이는 원역사에서도 있었던 일로, 상용군은 형북~중원을 치기 위한 주요 전략거점이었기에 상용의 대표 호족인 신탐을 후대하는 한편 혹여 딴 맘을 안 품나 감시하는 것도 겸해서 임명한 것.

    유비의 북벌이 시작되자 상용에 온 유비에게 동삼군의 주요 호족들을 데리고 찾아오며 전선기지로서 안정을 다지는 데 협조한다.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고 장유의 유언이 퍼지자 우리가 썩은 동아줄을 잡은거 아니냐고 불안해하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110] 발만 동동 구른다.
  • 후음
    남양군 완성에 살던 인물.[111] 조위의 무자비한 착취 아래 황폐해진 완의 상황에 절망하며 평화로웠던 유표 시절과 마지막까지 남양 백성들을 챙겨 떠나려 했던 유비를 그리워한다. 대대로 물려온 토지를 팔고 굶어 죽는 것과 봉기하여 창칼에 죽는 것 중 후자를 택해 원 역사대로 거병한다. 본래는 그저 앉아서 죽진 않겠다는 오기와, 10년 전 유비를 따르지 않은 일의 후회로 인한 결정이었으나 후음과 500명의 거병에 남양군민 수만 명이 합류하면서 쉽사리 완성을 점령한다.[112] 때마침 남양에 들어서던 유비군 선봉장 황권은 후음을 진압하겠다고 남양 외곽 조조군이 빠져버린 덕에 간단히 남양 외곽 무당현에 군영을 설치할 수 있었다.

    본래는 동리곤을 처단하려 했으나 남양의 명사호족인 종자경이 한나라 관리인 동리곤을 죽이면 안되고, 자신이 호족들의 협력을 얻어보겠다고 구슬리자 속아서 이 둘이 도망치게 두고 만다. 본래라면 이 둘이 남양 각지의 둔전병을 모아와 완성을 포위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사이 조인이 이끄는 원군이 도착해 토벌 당하나, 후음의 거병 소식을 들은 유비가 황권 쪽에서 마련해 둔 군수물자를 전달하고, 마초가 이끄는 기병 5천기를 급파해 동리곤과 종자경을 생포하고 외곽에서 지원하게 한 덕에 한결 여유롭게 수성전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완성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유비군이 중과부적으로 물러나자 잠시 괜히 일어났나 고민하지만 처음 봉기 했을때의 절박함, 죽더라도 세끼 밥 배불리 먹고 죽고 싶었던 때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113]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원역사보다 훨씬 긴 9개월, 즉 219년 대홍수까지 버티는데 성공한다.[114] 그렇게 완성의 식량도 떨어져가는 219년 가을.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115] 유비군 본대가 풍등을 통해 홍수로 인한 양번 포위와 우금군의 괴멸, 그리고 유비군의 완성 구원전 시작을 알리자 환호한다. 완성 농민들이 나가서 유비군에게 호응하자고 말하지만 자신들의 실력으론 오히려 성을 빼앗길 수도 있다며 거부하고 유비군의 승리를 간절히 기도하며, 결국 유비군이 승리하자 기뻐하며 이들을 맞이한다. 이후 유비가 남겨둔 위연, 왕평과 협조하며 완성을 지키고 있다.
  • 호수, 부방
    조조가 임명한 형주자사와 남향태수. 원 역사에서 관우의 북진에 맞춰 조위를 배신하는 지방관들이다. 218년 유비군의 북벌과 완성이 넘어가는 중에도 형북의 군사를 모아서 신야성을 포함해 요충지 몇 곳을 지키고 있었다. 일전을 서두르는 조홍을 말리던 장합이 그들이 2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아 두었으니 합류해서 싸울 것을 주장한다. 유비는 굳이 그들을 정리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일 여유가 없어서 원역사대로 먼저 투항을 권했으나, 사신의 말을 듣지도 않고 화살을 퍼부어 쫓아냈다고 한다. 유비는 이에 의아해하지만 그런다고 이들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한 건 아니라서 일단 방치한다. 물론 마냥 방치는 한 건 아니고 법정과 방통의 조언대로 조홍을 유인하기 위해 그들에게로 진군하는 척하는 방식으로 나름 써먹는다. 이후 우금이 양번을 지원하러 가면서 이들에게 현지병력과 기병을 맡겨 유비군의 추격을 막게 한다. 이후 완성 구원전의 묘사를 보면 기병들은 다시 완성으로 돌아가고 현지병력만 호수, 부방에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우금군의 전멸 소식을 듣고 동요하다 원역사대로 투항을 택한다.

    둘 다 승상부에서 평판이 좋지 않던 인물들로 사마의가 호수는 성격이 거칠고 이기적, 부방은 거만하고 사치스러우니 요직에 올릴 인물이 아니라고 평했다는 기록이 정사에 있다. 그럼에도 둘이 출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자양장급의 보좌를 맡을 정도인 우수한 군재와, 세태에 잘 영합하는 성향 덕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점 탓에 목숨이 위험해지자 별 고민도 없이 배신한다.

[1] 중원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있는 조조군 수뇌부에서도 이제 유비는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사실 익주와 한중도 점령된지 얼마 안된지라 개발도 제대로 안된 참인데도 이런 말이 나온 것.[2] 다만 조조는 유비의 세력은 과거 원소에 비견할만하나, 인구밀집지대가 많은 하북에 비하면 그 최대치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려면 엄청난 행정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평가했다.[3] 이것도 익주에서 지속적으로 지원군이 오고 있어 더 늘어날수도 있다.[4] 원래 융중대는 익주 방면에서는 서량-장안으로 이어지는 공세를 주장하나, 본작에서는 서량을 이미 유비의 동맹인 마초가 차지했고, 유비가 할거와 세력 확장보다 본래 목표인 조조 격파에 더 무게를 두기에, 중원의 핵심 지역을 바로 칠 수 있도록 좀 더 공세 방향이 북동쪽으로 바뀌었다. 작품 외적으로 생각하면 이전작 내마속에서 옹양주-장안-홍농-낙양순으로 북벌을 진행했기에 중복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5] 조운, 진도, 간손미 등[6] 제갈량, 방통, 황충, 위연 등.[7] 황권, 장임, 법정, 장송 등.[8] 본래 역사에서도 방통은 유비의 의견에 다른 의견을 내기보다는 군말없이 충성하는 측이었으나, 익주 정벌을 두고서는 유장의 장수들을 꺾고 부성에서 술에 취해 기뻐하는 유비를 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만을 보이는 거 아닙니까?' 라고 불평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등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유비가 방통에게 화를 냈다가 다시 불러들이면서 봉합되긴 했다.[9] 방통이 입촉을 찬성했단 기록도 있지만 본래 방통의 상책은 정병만을 모아서 성도를 기습해 제압하는 것인데 유비는 이를 거부하고 백수관 등의 성도 주변부터 차례대로 제압하는 중책을 썼다. 방통 입장에선 속전속결하자는 상책도 이미지 관리, 도박수라는 이유로 거절하고는 시간 걸리는 중책을 채택하더니, 아직 끝난 것도 아닌 마당에 긴장이 풀린 모습을 보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즉 입촉 찬성이든 반대든 간에 자기의 상책이 채택되지 않으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던 것.[10] 물론 이는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공법인 기산도를 택했을 뿐, 방통이 생각하는 상책은 익주에서 4~5개월 더 시간을 들여서 5만 이상 대군을 단번에 동원해 여러 진군로에서 동시에 공격해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조가 융족 등의 이민족을 대거 징병해서 먼저 가 있던 관우와 마초를 밀어붙이는 바람에 겨우 2만 내외의 병력만이 준비된 상황이라 상책을 쓸 수 없어서 기산도를 선택한 것.[11] 유비는 노린 적도 없는데 일치한 우연에 감탄했다. 기병을 잘 다루는 장비는 병주로, 백병전에 강한 위연은 북원에 배치하니 우연히 황충이 남은 것.[12] 물론 유비는 그 보군 2천을 기성의 난을 틈타 잠입시켜 마초의 가족을 구출하는데 써먹을 계획이어서 사양했다.[13] 원역사에서도 위연은 한중을 수비하는 독한중(督漢中)으로 발탁되었다.[14] 법정이 말을 뗐을 뿐, 방통도 찬성하고 사적으론 숙부인 관우와 장비도 소극적으로 동의했다. 특히 법정과 방통은 유비가 한번 거절했는데도 계속해서 유봉을 떼어내려고 시도했다.[15] 이 같은 조치는 원담을 폐출해서 형의 자식으로 만들어 놓고 청주는 계속 맡아 다스리게 했던 원소의 방식과 유사하며 결과도 비슷하게 파국으로 끝났다. 유봉은 보통 180년대 후반생으로 추정되므로 217년에는 이제 30살쯤 된 파릇파릇한 젊은이다. 유비군 무장들 사이에선 젊은 축에 들어 앞날이 창창하던 무장인 유봉이 자기 잘못도 아닌 이유로 고립된 상용에 억지로 처박히면서 군인으로서의 앞길이 끊긴 것인데 비뚤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16] 그러나 유비가 유봉을 보호하고 있기는 하지만 양자인 유봉은 장성한 상태에서 친아들인 유선, 유영, 유리 셋이 다 늦둥이로 태어나 어리다는 점 때문에 유비가 죽기 전에 어떤 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해야 한다.[17] 정확히 말하면 주창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정사에서 언급되긴 하지만 단순히 부장이라 나오지 이름은 안나온 탓에 주창이란 인물 자체는 정사에서는 허구 취급 받는다.[18] 다만 이에 대해선 이름 그 자체 때문에 못쓴 거 아니냐는 드립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105화에서 정상 등장했다.[19] 다만 정사에서도 유비를 설득할 때 일부러 화살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깡이 없는 건 아니다.[20] 물론 본인도 이것이 상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방통과 마찬가지로 5만 이상의 군대를 동원해 여러 곳에서 들이치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고 있으나 조조의 발빠른 대처 덕에 대군 동원이 불가능해지면서 차선책으로 진창도를 제안한 것이다.[21] 수년 동안이나 곁을 지킨 방통이나, 제갈량도 못할 말을 비교적 신참인 법정이 한 거라 상당히 광오한 발언인데, 관우와 장비, 방통은 형주에서 유비가 객장 티를 못 벗던 시절부터 유봉을 잘 알고 지낸 터라(관우, 장비는 사적으로 따지면 숙부다) 도의상 유봉을 폐하자고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막료들 중 짬은 떨어지면서 공은 상당히 많이 세운 법정이 총대를 멘 것.[22] 실제 역사상으로도 한번 물길을 타고 내려가면 다시 군대를 되돌리기 쉽지 않아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각된 상용점령작전을 기획한 사람인 만큼 어느 정도 이런 기책이나 도박을 즐기는 성격으로 작가가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23] 다만 장완은 맨 뒤에 있었다 언급되고 기어서 빠져나갔다가 기어서 돌아왔다 했으니 아예 눈치를 안 본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게 최고 상관인 유비한테 걸렸다는 것...[24] 형주 사람들은 수로의 주권을 지키지 못하면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한다고 한다. 미방과 부사인도 비슷했을 것이며 혹여 싸우고 싶었어도 아래 병사들 사기가 다 떨어진 마당에 뭘 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25] 그래도 실 역사에서는 동주계의 유력인물인 방희를 상대로 파군쪽을 두고 자웅을 겨룰 만큼 장로는 유장에게 있어서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유장 시기엔 파군 일대는 장로 측 인사가 더 많았다고 할 정도. 다만 동주병이 나섰으면 장로 따위 쓸려나갔겠지만(동주병은 작정하고 나서면 유비군도 위험할 정도의 정예다) 정예였던 동주병이 싸우기를 거부하고 2선급 현지 병력만 보냈는데 익주 토착 병력은 제대로 된 훈련도 안 받았고 의욕도 없어서 복지국가를 사수하려던 오두미교 광신도들에게 처발렸다고 한다.[26] 신탐은 본래 근거지인 상용이 기름지긴 하나 협소하기에 그대로 두고 이권을 보장해 줄 수 있었으나 조부 때부터 한중에서 종교지도자로 활동한 장로를 훨씬 큰 한중에 두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27] 원 역사에서는 아예 남진하는 조조군의 진입로에 토성을 쌓아버리는 대공사로 조조의 기를 죽였으나, 본작에서처럼 한중군민들이 경계를 유지하지 못한 탓에 패했다.[28] 실제 역사에서도 213년, 마초가 기성을 공격할 때 장로는 양앙을 대장으로 삼아 마초를 돕게 했고 마초가 기성을 점령하자 그의 명령대로 위강 등 위나라의 관리들을 죽인다.[29]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조조의 위왕 즉위로 인해 폭발한 반조조 인사들이 형주를 통해 유비군과 협력하면 손해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역사에서 익양대치 이후 동오는 더욱 관우를 경계할 정도로, 유비군의 기세는 매서웠다.[30] 유비도 이에 대해 굴릴만한 장수가 많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며 속으로 미안해했다. 다만 이후 익주를 차지하면서 어느 정도 인재를 분배하기로 한지라 중요순위가 낮은 임무 일부는 내려놓았을 걸로 보이는데 실제로 신병 모집과 훈련, 그리고 귀순자 감찰 업무를 진도가 담당 중이라는 언급이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부담이 줄은 것으로 보인다.[31] 유비는 가는 길에 무장을 하고 여비를 넉넉히 써도 이상하지 않도록 돈많은 비단 장수로 위장시켰는데, 유비의 서량 개입에 의한 나비 효과로 인해 서량과 조조 세력권의 치안이 생각보다 나빴기 때문에 도적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고 한다. 유비는 후일 이 일과 여러 정보를 통해 서량-관중의 인구 공백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함을 깨닫고 이를 기반으로 노석 구출 작전을 구상한다.[32] 파구에서 내려오는 수로가 유비쪽에 압도적으로 불리해 당대의 명장 누굴 데려와도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는 구도라 거리상 동오에 가까운 장사와 계양은 포기하는 걸 상정하고, 남쪽 구석에 있어 구원이 가능한 영릉을 지켜내는 데 집중하기로 한 것. 원 역사의 영릉태수 학보는 어찌어찌 버티나 싶더니 여몽의 블러핑에 넘어가 항복해버렸다.[33] 북원 대치에서 조조를 공격하는 장비가 노석의 오환기병을 거느렸다고 나온다.[34] 배송지의 기록으론 10만. 작중에선 5만 내외로 서술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전근대 병력 서술이 늘 그렇듯이 이 당시 10만을 호왈십만으로 본 듯하다.[35] 비록 적인 양부가 계속 호족의 지원을 받아 밀렸지만, 양부의 친척 일곱이 참살당하고 양부도 죽기 직전에 살아남는 혈전이었다.[36] 이는 강서의 어머니이자 양부의 고모로 원 역사에서 한 성질 하는 걸로 유명했던 노파를 유비가 데려와서 서량 호족 대부분이 마초를 배신한 이유가 동관대전에서 마초가 조조에게 패배할 때 조조가 너무나도 강대한 것을 실감했고, 이때 너무 큰 피해를 입어서 또다시 조조에게 개겼다가는 정말 다 죽을 것 같다는 이유임을 직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노파를 의대조 사건이라는 단어 하나로 데꿀멍 상태로 만들어 버리며 마초가 조조와 싸울 때 필요한 명분을 유비 자신이 쥐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마초의 입장에서 봐도 유비의 도움 없이 자기 혼자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해준 것이다.[37] 뛰어난 학력과 가문, 소수민족의 핏줄까지 가졌다. 마초는 복파장군 마원의 후손이며 강족의 피가 섞여 이민족들과도 연줄이 있었고, 무엇보다 군재도 뛰어났다. 만일 동관대전에서 이겼다면 적벽에서 이긴 손권처럼 군주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 다만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까지 되며 승승장구했지만 마초는 그렇게 되지 못했기에 실패한 버락 오바마라 한 것.[38] 마초는 역사에서 거병 와중에 갑자기 병주목을 자칭한 일이 있었는데 본래부터 조조의 방어라인을 우회해 병주를 통해 장안을 칠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39] 황권과 관우가 수군을 데리고 진창성에 가버린 판에 휘하 호족들이 조조군에 의해 강제 이주 당하고 있는 위수 북부의 동포들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도하를 했다간 조홍과 곽회에게 털리는 게 확정이라 동포들을 어차피 구할 수가 없는데(방통과 법정도 안타깝지만 이들을 구하는 건 포기해야 한다 했을 정도.) 호족들이 강짜를 부리는 통에 골치 아팠다고.[40] 본래 마초는 아예 완성에 들어가서 후음과 반군을 지휘해서 버텨보겠다고 했으나, 유비는 공통분모가 전혀 없는 두 우두머리가 한 공간에 존재하면 불협화음이 일어나 제대로 된 지휘가 이뤄지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실제 제갈탄의 난 당시 제갈탄과 오나라 지원군 지휘관인 문흠이 갈등을 빚다가 제갈탄이 문흠을 죽여버리면서 파국으로 끝난 사례가 있다. 물론 아예 면식도 없던 마초-후음과 달리 제갈탄-문흠은 문흠이 위나라 장수였던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즉 이미 면식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황권에게 지원받은 물자를 후음 측에 전달해 장기간 농성할 여건을 마련해준 다음엔 성 밖에서 위군이 포위망을 형성치 못하게 휘젓는 역할을 맡도록 한다.[41] 원역사보다 1년 빨리 침공이 벌어졌다.[42] 사실 둘의 사이를 일반적인 사위와 장인으로 보기 힘든 것이 한수와 반목하던 염행을 한수가 반강제로 화해 겸 붙들기 위해서 자기 딸을 줘서 사위로 만든 것이다. 염행은 결혼은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에게 항복해 도망쳐버렸고, 이 때 한수의 딸을 데려갔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43] 명분은 사위로서 장인의 조문을 가는 것.[44] 툭하면 반란을 일으켰다 불리해지면 특정인 한 명에게 덮어 씌우고 복속하기를 반복하다보니 역대 후한 조정도 서량 반란에 대해서는 당시 기준으로 관대하게 처우한 편이었다. 마등이 서량의 기반을 포기하고 일족 전부를 허도로 이주시키거나, 계속 서량에서 할거하는 대신 장남 마초를 서량에 두고 자신과 다른 일족만 입조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데는 이런 점도 작용했다.(물론 이에 대해선 조조가 그걸 바랬다는 설도 있다. 양주 이민족 세력의 안정을 위해 마등에게 관직을 주고 좋게 대우해준 것이기에 양주에서 마씨 일가가 입김을 발휘하며 버텨줘야 양주 이민족의 안정을 꾀하는 조조의 계책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 마씨 일가가 군대를 해산하고 양주 세력을 다른 이에게 넘긴다면 그 세력을 처음부터 다시 꼬드겨야 하니 조조 입장에선 상당히 귀찮아진다.)[45] 명목상으론 8천 명에 달하는 한수의 세력을 흡수했지만, 그들은 전부 한수 밑에 있던 호족의 사병일 뿐이며 또 염행은 말이 좋아 한수의 사위지 결혼하고 얼마 안가 조조에게 튀는 방식으로 사실상 한수를 배신한 전적이 있기에 한수의 세력이었던 이들이 염행에 대한 충성도가 높을리 없다. 그리고 염행이 믿을만한 기존 직속병은 조조에게 항복할 때 전부 분해된지 오래라 다시 모으는 것도 일이다.[46] 여기에 관우는 과거 염행이 마초의 가솔을 노렸던 것을 기억해두고 있었기에 염행이 덤벼오자 기다렸다는 듯 반격했다.[47] 원역에서야 똑같이 보병인 적과 관문 끼고 싸워 약점이 상쇄되었지만 유비가 서량에서 기병을 보충하고 기병 운용 노하우가 풍부한 숙장들을 동원해 샛길을 활용해 찌르고, 다소 위험을 감수하며 빠르고 몰아치자 이상의 약점이 두드러져 고전을 면치 못한다.[48] 익주는 한(漢)나라의 어원이 되었던 한수(漢水) 일대로 진나라가 멸망한 뒤 항우유방에게 처음 분봉한 땅으로서의 상징성이 있는 지역이지만, 유방은 익주 깊숙히 들어가지 않고 한중에 잠깐 머물다 항우가 팽성으로 돌아가자 마자 바로 관중으로 뛰쳐나와 통일 이전 진나라의 강역을 차지한 후 항우의 학살로도 다 지워내지 못 한 진나라의 여력을 뽑아내 천하통일을 이뤘다. 이후 400년 동안 익주는 조선함경도가 그랬듯이 상징성만 있는 변방 취급을 받았다. 이런 익주 호족들의 불만은 어떤 의미로는 강동 호족보다 크면 크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 역사에서 익주 호족들이 전한 경제의 후손이었던 유비-유선 부자에게 마지막까지 충성했던 것도 한나라의 시원(始原)은 자신들이라는 자부심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49] 물론 이때 낙오된 병력이 많아 합류에 성공한 건 5천 정도였으나 지금 당장 추가 군사가 필요했던 유비에게는 나중에 올 7~8천 보다는 당장 있는 5천이 더 중요했기에 칭찬을 들은 것.[50] 단순히 황권과 장임이 유비에게 투항할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며 이들이 유비를 물리치는 것을 더 걱정했다. 이들이 유비를 물리치면 그 공을 명분삼아 익주의 군권 자체를 가져갈 텐데 외부인으로서 성도 인근의 기름진 토지를 차지하고 토착 세력과 알력을 빚어온 동주병, 그 동주병의 주인인 유장 입장에선 침략이나 그거나 다를 게 없었다.[51] 유비가 장송에게 단순히 안부 편지를 보내는 방식이었지만 어쨌든 경계 대상 1호인 유비와 서신을 주고받은 것이니 황권은 이 기회에 장송을 조지고자 했다. 그러나 장송이 진짜 내통을 했다면 이렇게 대놓고 편지를 주고 받겠냐며 반박하자 황권도 아무 말을 못했고 일단 사형은 피한 채 옥에 수감된다. 이마저도 유비가 양회와 고패를 풀어주면서 유장에게 해명하는 서신을 보낸 덕에 곧장 석방된다.[52] 장사, 계양군을 넘겨주는 선택지도 쉬운 게 아니다. 이 2군이 개발이 덜 된 무릉, 영릉과 달리 이때부터 형남의 곡창지대로 활용되고 있었고 여기를 내줘버리면서 형주에서의 북진이 보급 부담으로 힘들어졌다. 파구를 점거하고 있는 동오가 이쪽으로 들어가는 지원군을 손쉽게 차단하고 순식간에 대군으로 밀어버릴 수 있어 정말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었다.[53] 형인 제갈근이 동오의 중신이다. 물론 두 형제 모두 공사구분이 확실한 성격이라 만나도 직접적인 정세 이야기는 안 나누지만 그래도 "아, 그쪽은 어떻구나."라는 분위기를 느낄 순 있다고.[54] 장소는 서주 팽성 출신으로 유방의 고향 땅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손견이 중원에서 활약한 만큼 손오의 공신들 중에는 강동 출신이 아닌 타지 출신들이 매우 많았다.[55] 과거의 원소도 조조가 협천자 이후 자기 말을 안 듣기 시작하자 조조를 토벌하려다가 조조가 대장군 자리를 양보하자 그만두는 바람에 조조가 성장해 원소를 무너뜨릴 기회를 줘버렸다.[56] 유비가 장사, 계양 쪽을 양보할 생각이 있는 것과 별도로 아직 익주를 떨어뜨리지도 못한 상황에서 영토를 할양해 버리면 아랫사람들을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뻔히 알면서 강짜를 놓은 것.[57] 실제 역사에서도 손권이 나중에 주유, 노숙, 여몽, 육손 등의 도독들을 평가한 바가 있었는데 노숙이 여러 부분에서 잘한 게 많으나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줘서 통수를 맞은 건 실책이라고 평가하여 주노여육 네 도독 중 가장 평가가 낮았다. 물론 노숙도 할 말이 있는데 작중에서도 언급되지만 강동과 형주를 잇는 장강 수로가 동오에 압도적으로 유리해서 막강한 수군으로 언제든 손쉽게 찔러 내려갈 수 있었고 수군이 약한 유비측은 여기 대응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호구라서 그냥 넘겨준 게 아닌 것.[58] 여강 주씨는 주유의 가문인데, 손책이 강동을 제패할 수 있던 이유 중 태반이 여강 주씨의 지지 덕이라는 평가도 있을 정도로 거대한 가문이다. 단 오의 사성에는 속하지 않는데 오군 주씨(吳郡朱氏)는 여강 주씨(廬江周氏)와 한자부터 다르다.(여강군과 오군 둘 다 삼국지 양주 휘하 행정구역이기는 했다)[59] 주유는 사망하기 얼마 전까지도 형주에서 위군과 싸우면서 군권을 쥐고 있었으며, 사망한 후에도 유서를 남겨 노숙에게 자신의 권력을 승계했다.[60] 이는 전작 내마속의 육손과도 비슷하다. 육손은 손권을 명군이라 생각하고 충성했으나 정작 손권은 항상 고까워하고 있었고 자기도 나이를 먹어 후계를 대비해야 할 시점이 되자 모욕하다 죽게 만들길 망설이지 않았다.[61] 이 시기가 215년으로 건강실록에 따른 사망연도이긴 하지만 반장전에 따르면 219년에 죽었다보는 것이 대부분의 시선이라 원역사보다 4년 빠르게 죽은 셈이다.[62] 원 역사보다 입촉이 빨리 진행되어 임상대치 역시 익양대치보다 빨리 진행되었을 터라 감녕이 분투했을 2차 합비 공방전이나 유수구 전투는 물론 (원 역사에서는 익양대치 이전이었던) 환성 전투조차 벌어지지 않아서 감녕의 활약상이 상당히 줄어들어 버렸기 때문.[63] 특히 본부인은 만일 첩이 없었다면 본부인을 순장시켰을 거라는 직감까지 느껴서 남편이 첩을 둬서 다행이라고 고마워했다.[64] 후조석륵이 조위-서진 치하에서 노예로 온갖 고생을 해서 조조-조비와 사마의-사마사&사마소 부자를 혐오한 기록이 있다.[65] 조창의 생몰년도는 정확하진 않으나 187년~191년 사이로 추정된다.[66] 자신의 특유의 직관을 신뢰하던 조조였으나, 세자 건은 주변 신하들의 의견과 원칙에 따라 결정했다. 그러나 계속 조식을 골라야 한다는 미련이 남아있었고 장천이 말한 '가후의 조언을 따른 자들은 끝이 나쁘다'라는 말을 듣고 다시 조식을 아까워한다.[67] 다만 역으로 생각하면 조조 정권에 있어 조인과 조홍 등의 조씨 상장들은 성 여러개와 수만 병사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양번 군사들을 버리고 도망치자는 말이다. 즉 항복하면 군법으로 가족까지 처벌하는 위나라 법률상 만총과 양번 수비군은 그냥 여기서 죽으라는 말.[68] 조홍도 염행, 곽회, 장합이라는 상당히 화려한 포진을 갖추기는 했으나, 배라고는 강족, 저족에게 징발한 쪽배 밖에 없는 상태에서 1년 이상 군선을 건조하며 준비해온 촉한의 수군 에이스 둘을 물 위에서 이기는 건 무리였다.[69] 이게 가능했던 것이 자신이 이기면 조조가 익주를 먹는 게 확정이니 여기서 받을 보상으로 메꿀 수 있다고 판단했었기에 가능했다.[70] 팔진도는 지휘가 어려워서 그렇지, 어지간한 유능한 기병 지휘관들에게도 한번 휘말리면 답이 없었다. 후대에 제갈량은 지금보다 열악한 상황에도 보군 위주의 촉한군으로 장합, 사마의, 곽회 등의 강력한 기병을 보유한 조위군을 야전에서 격파했고 서진의 마륭도 깊이 연구해 독발수기능을 토벌했다.[71] 서량을 점령했다지만 서량 전쟁 직후 조조가 위수 북쪽의 민호들을 다 병주로 이동시키면서 인구 손실이 컸기에 기병을 많이 짜내기 어려웠다.[72] 보통 조등의 양아들이자 조조의 친아버지 조숭이 본디 하후씨였는데 조등에게 입양되었다고 알려져 있어서 하후연이 조조의 사촌동생 정도로 여기지는 경우가 많은데, 패현 조씨와 하후씨가 가까운 사이는 맞았지만 정말 조숭-조조 가문과 하후씨의 관계가 혈연 관계 였는지 어땠는지는 지금도 설이 분분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조숭 문서 참고.[73] 유비는 이를 보고 역시 군웅할거의 시대를 살아남은 자 다운 담력이라고 평가했다.[74] 사실 이 부분은 본 소설의 시계열이 좀 꼬인 상태인데 본래 순욱의 자결은 한창 조조의 위공 즉위 논의가 진행되던 212년에 있었던 일이고 조조의 위공 즉위는 213년에 있었던 일이다. 아마도 이 세계관에서는 소식이 뒤늦게 전달됐거나, 혹은 조조가 위공을 칭하자 순욱이 그제서야 죽은 듯하다.[75] 21세기 대한민국에 비유하면 수원시, 화성시, 성남시, 군포시, 안양시, 오산시, 용인시, 평택시, 여주시, 안성시를 전부 자기 영지로 삼겠다는 선포와 다름없다고 한다.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이 10개 시의 지명만 듣고도 공작령을 만든 장군이 대한민국 전복을 꿈꾸는 역적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당대 후한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76] 당시에는 50세도 지천명 취급하던 시절로, 59세면 환갑잔치까지 열 정도로 고령 취급받던 60세보다 고작 1살 밑이다.[77] 정욱은 실제로 가후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직접 전선에서 전투를 지휘한 적도 있는 무장이기도 하다.[78] 그러나 당장 양번이 넘어갈 판국이라서 이후를 걱정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79] 여기서 대놓고 유비를 추켜세웠다간 유비 소속 출신이던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져 모가지가 날아갈 판이니 어쩔 수 없긴 했다.[80] 서진은 영가의 난이라고 중국사 최초로 한족 통일왕조가 이민족 왕조에게 멸망당해 남북조시대 시즌1을 찍었고, 동진은 유유에 의해 최초로 왕조 교체 뒤 전대 왕조 멸족을 당했다. 나라가 내외적으로 각종 국가 막장 테크를 밟았던 것은 덤이다.[81] 유비의 칭호인 촉한왕 겸 복파대장군은 현대로 치면 킹갓제너럴~ 운운하는 걸 공식 칭호로 가져다 붙여놓은 것이다. 한 마디로 싼티 풀풀나는 근본없는 호칭이라 왕랑이 비웃은 것.[82] 경기는 광무제를 따라 후한을 건국한 운대 28장의 일원인 경엄의 동생 경국의 현손이다.[83] 예시로 진변이라는 하급 군관이 나오는데, 경기를 만나본 지는 15년이 넘었고 의심스런 행적 한번 없었는데도(심지어 경기와의 마지막 만남도 뇌물을 건넸다가 단단히 혼난 것으로 좋은 마무리는 아니었다.) 단순히 경기가 천거했다는 이유로 잡혀서 처형당하고 처자는 노예가 된다.[84] 허도가 잠잠한 것임에도 실망하는 것을 보면 조조의 반란 유도 작전이나 허도 관료 숙청 계획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85] 최고참이었던 진궁은 조조를 배신했고 비슷한 시기에 사관한 조지, 임준, 순욱은 먼저 사망해 이 시점에 왕필 짬에 견줄 사람은 정욱 정도밖에 없었다. 냉혹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조조지만 이들에게 만큼은 한결 같았는데 자신을 배신해 무너뜨릴뻔한 진궁을 죽일 때 마지막까지 망설였고 마지막에 자신과 다른 길을 가기로 한 순욱도 자진할 수 있도록 해주고 가족들에겐 손대지 않았다. 조지와 임준이 일찍 죽었을 때도 슬퍼하며 후손들을 끔찍이 챙긴 데서 보여지듯 야심과 별개로 어려운 시절 함께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챙겨주고자 했던 사람이 조조다.[86] 위풍에 따르면 복황후와 낭야왕을 안 죽이고 교사를 안 부리며 하다못해 서량 전쟁에서 유비 목이라도 따왔다면 민심이 요동치지 않았을텐데 이 중 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으니 사건이 안 터지는 게 이상하다고. 결국 중원은 아니지만 형북인 완현에서 후음이 반란을 일으키며 그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만다.[87] 원래 역사에서는 상단의 위풍이 일으킨 난에서 동조했다는 혐의로 조비에게 잡혀 처형당하는데 위풍의 난 자체가 미수로 끝나는 과정에서 장천이나 다른 명사의 자제들이 연루되었다는 뚜렷한 근거도 없고 이렇다할 사료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 의문이 많은 사건이다.[88] 이 장면의 묘사가 실로 압권인데 우금이 심혈을 기울여 정예로 키워낸 병사들이 대자연의 힘에 무력하게 죽어간다.[89] 즉 아직 한장이었을 적이나 위장으로서 확고히 자리잡은 뒤였으면 결사항전을 택했을 것이다.[90] 쌀한톨 병사 하나가 아쉬운 상황에서 투항병을 위해 막대한 물자를 소모하는 것을 보고 비웃은 것인데 돌아갈 길이 없어진 우금이 유비에게 적극적으로 가담할 가능성도 있기에 향후 전개에 따라 평가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91] 관우는 변수가 적은 힘 승부, 단일전장에서는 강하나, 변수가 많고 분산되는 전장에서는 약한데 하필 형주가 딱 이런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 조조군은 이통, 문빙 등의 우수한 지휘관을 대거 동원했다.[92] 원 역사에서도 유수구 전투 1년 뒤인 218년에 사망한다.[93] 다만 이에 대해선 서황이 완전히 헛다리 짚었다고 보는 독자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유비 세력은 당시 대다수 군웅들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었는데 당장 유비군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황권이 관우를 보고 저 사람 왜 저러냐며 이해를 못할 정도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유비가 조조와 같으면 애당초 판이 이렇게 전개됐겠냐며 조소하면서도 거의 평생을 조조 밑에서 지내면서 유비를 겪어보지 못한 한계라고 보기도 한다.[94] 특히 서황이 번성 공방전에서 활약했던 것을 생각하면 여기서 퇴장 한 것이 추후 형북 원정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95] 관도대전 중 오소 습격 당시 장합은 조조군 본진을 쳤다가 패전한 적이 있는데 그때 조조군 본진에서 방어전을 지휘한 사람이 조홍이었다. 즉, 조홍 입장에선 나한테 진 놈이 말대꾸? 이렇게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96] 그래도 가솔들 걱정에 어쨌든 협력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잡지만 가솔들이 걱정됐다면 차라리 거기서 자결을 했어야 했다. 본인이 항장, 그것도 당장 적대중인 유비군 출신의 무장인 상황에서 그 유비군에게 길을 내준 데다 안 죽고 포로로 잡히기까지 했으니 위나라 조정에 이것이 어찌 보일지는 너무나 뻔하기 때문. 당장 같이 싸우고 있는 장합도 전예는 뭐했냐고 부르짖는 판국이니... 그나마 조조는 전예를 알 테니 당장 그의 가족을 해하진 않겠지만 문제는 그 뒤가 원 역사에서 거의 같은 길을 걸은 우금을 조롱해 분사하게 만든, 사이코패스 인성을 지닌 조비라는 것.[97] 이런 전예의 면모는 작가의 전작인 아! 내가 마속이다에서도 나타난다. 작가가 아예 전예의 캐릭터성으로 못박아둔 모양. 내마속과 유비쟁패뿐만 아니라 간절히 작가의 위나라 캐릭터들 자체가 유독 형벌에 대한 내로남불이 심하고(더 정확히는 나만은 무사할 거라는 안일함) 유비군에서 위군으로 전향한 인물 일수록 더욱 그런 성향이 강하며 그래서인지 유사 사례인 진군 같은 경우 내마속에서 아예 위나라의 사상을 대놓고 찬양하며 촉한을 헐뜯는다. 그리고 이들의 논리를 소설 전개를 통해 다시금 박살내는게 간절히 작품의 특징.(위의 진군 같은 경우에도 아들인 진태의 행적을 통해 논리를 박살냈었다.)[98] 이는 장료가 항장 출신이라 조조군 내에서 명령도 없이 군대를 움직여(무장 집단이 명령 없이 움직이는 것이니 역모로 비칠수도 있다.) 벌어질 일들을 뒷수습할 영향력이 안되기 때문이다. 독자들도 이걸 하려면 유비군에서도 관우, 장비급은 되야 하고 조조군으로 치면 조인이나 하후돈, 하후연급은 되야하지 굴러 들어온 돌인 장료에겐 무리라 보고 있다.[99] 그러나 유비의 북벌이 시작된 이래 조조군이 유비군에 처음으로 먹인 한 방이다. 운이 좋았다면 뇌동까지 죽일 수 있었을 정도고 장비가 구원을 왔을 때 뇌동은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100] 다만 은서의 판단이 틀린 것만은 아닌 게, 당시 관중군에는 서황같은 무게감 있는 대장이 없었기 때문에 대놓고 하는 도발을 무시하고 방치하면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나중에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게 된다. 조위군의 목적이 포위나 수비가 아니라 공격해서 촉한군의 포위를 뚫고 들어가는 것이니만큼 계속 버티고만 있을 순 없었다. 실제로 작중에서도 장로, 유장이 유비와의 전쟁에서 이렇게 무너졌다.[101] 다만 군량 보급관은 조조도 진짜 어쩔 수 없이 죽인거라 그것에 대해 아직까지도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으며 실제로 군량 담당관의 가족들에게 평생을 놀고 먹어도 될 재산을 제공하는 등 나름 챙겨줬었다.[102] 당시 위나라 분위기상 조인 장군이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가는 반역자냐고 의심받을 판국이라 끝까지 반대할 수 없었다. 찬성하는 장합과 곽회는 기존의 패전으로 발언권이 없어서 소극적으로 동감할뿐 의견을 보태주지 않았다.[103] 제갈량에게 귀부한 호족 진거는 과거 형주자사 유표 밑에 있던 왕찬의 죽음을 근거로 들면서 유비 세력에게 귀부한다고 둘러댔다.[104] 이 때 하는 말로는 아무리 조위에선 반쯤 버린 땅이라지만 남양군처럼 큰 군에 친조위파가 아니면 태수로 보내지도 않았을 거라고 한다.[105] 정확히는 이번에 유비군 토벌에 성공하면 어차피 대적자가 없어졌으니 동리곤과 종자경 정도는 죽든 살든 상관이 없어지니 굳이 안 죽일 거라는 것. 반면 유비군이 이기면 그대로 라인을 옮겨탄 셈 치고 매달리기로 한다.[106] 이는 현재 내리는 비가 고조가 후손을 돕고자 힘을 쓴 것으로 헌제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107] 동삼군의 동쪽 끝 방릉군의 바로 좌측이 양양이다. 그러나 길을 막는 산과 강물의 방향 때문에 바로 옆의 양양에서 동삼군에 오는 것보다, 어느 정도 떨어진 한중에서 오는 게 더 빠르다.[108] 원 역사에서도 방통 등은 형주는 익주와 교통도 불편하고 관리도 안되니 포기하자는 의견을 냈었다.[109] 조조 또한 세력의 핵심인 하북과 중원을 우대해 형북, 회남 지역은 거리낌없이 착취했다.[110] 상용의 군사들도 전부 전장에 갔으며 거점마다 유비의 심복들이 있고 자식들도 성도에 있어서 헛생각을 할 수가 없다.[111] 후음이 참수된 후에도 그를 따르던 무리가 상당한 규모(기록상 수천)로 남아있었고 조조 영역 내부에서 외부 지원 없이 3개월 가량 버티는 등 명망과 군재가 상당한 인사였는데 출신 성분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는 점에서 허저와 유사점이 있다. 군소 호족이었을 거란 주장도 있고 임협집단 우두머리였을 거란 추정도 있다. 다만 작중에서는 그런 것 없이 세금을 내기 위해선 아버지가 물려준 밭을 팔아야 할 정도로 여유롭지 않은 일개 백성이라고만 나온다. 물론 처음 봉기 때 장정 5백 명이 그와 함께 하고(하룻밤만에 모인 인원이라는 걸 보면 결코 적은 인원은 아니다. 대한민국 육군 병력 편제로 따지면 즉흥적인 거병에 대대 하나 정도는 모였다는 소리다.) 문지기들과도 친하다는 걸 보면 나름 완성 내에서 인망은 있는 듯하다.[112] 본래 조조는 양번과 완성을 핵심으로 대군을 배치했으나, 유비군이 한수를 타고 내려오기 시작하자 외곽으로 병력을 뺀 상황이었다. 후음의 반란 자체는 원 역사와 같은 시기에 일어났으나, 유비의 북벌이 앞당겨지면서 더 유리한 조건이 된 것.[113] 실제로 완성에 쌓여있던 위군의 군량미가 넉넉했고 마초와 황권이 지원해준 식량도 있어 한동안 밥 먹을 걱정은 없다고 한다.[114] 물론 조조군이 전력으로 몰아쳤는데 막힌 건 아니고 한 번 패한 병력을 더 소모시키는 대신 조조의 지구전 전략에 맞춰 천천히 물자를 소진시켜 말려 죽이려는 의도.[115] 이 시점에서는 어차피 조조가 완성에 자비를 베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 버티고 있을 뿐. 만약 우두머리만 죽이고 농민들은 살려준다면 후음은 자기 목이 날아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