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10-19 22:42:13

부량

송서(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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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본기(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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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소제기(少帝紀)」 5권 「문제기(文帝紀)」
유유(劉裕) 유의부 유의륭
6권 「효무제기(孝武帝紀)」 7권 전폐제기(前廢帝紀)」 8권 「명제기(明帝紀)」
유준(劉駿) 유자업 유욱(劉彧)
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0권 「순제기(順帝紀)」
유욱(劉昱) 유준(劉準)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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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列傳)]
||<-6><tablewidth=100%><tablebgcolor=#3f51ba> 41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42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43권 「서선지등전(徐羨之等傳)」 44권 「사회전(謝晦傳)」
유목지 · 왕홍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사회
45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46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47권 「유회숙등전(劉懷肅等傳)」
왕진악 · 단소 · 상정 · 유회신 · 유수 조륜지 · 왕의 · 장소 유회숙 · 맹회옥 ,맹용부, · 유경선 · 단지
48권 「주령석등전(朱齡石等傳)」 49권 「손처등전(孫處等傳)」 50권 「호번등전(胡藩等傳)」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손처 · 괴은 · 유종 · 우구진 호번 · 유강조 · 원호지 · 장흥세
51권 「종실전(宗室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준고
52권 「유열등전(庾悅等傳)」 53권 「장무도등전(張茂度等傳)」 54권 「공계공등전(孔季恭等傳)」
유열 · 왕탄 · 사경인(1) · 원담 · 저숙도(2) 장무도(3) ,장영, · 유등지 ,유병지, · 사방명 · 강이 공계공 · 양현보 · 심담경
55권 「장도등전(臧燾等傳)」 56권 「사첨등전(謝瞻等傳)」 57권 「채곽전(蔡廓傳)」
장도 · 서광 · 부륭 사첨 · 공림지 채곽
58권 「왕혜등전(王惠等傳)」 59권 「은순등전(殷淳 等傳)」 60권 「범태등전(范泰等傳)」
왕혜 · 사홍미 · 왕구 은순 · 장창 · 하언 · 강지연 범태 · 왕준지 · 왕소지 · 순백자
61권 「무삼왕전(武三王傳)」
유의진 · 유의공 · 유의계
62권 「양흔등전(羊欣等傳)」 63권 「왕화등전(王華等傳)」 64권 「정선지등전(鄭鮮之等傳)」
양흔 · 장부 · 왕미 왕화 · 왕담수 · 은경인 · 심연지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65권 「길한등전(吉翰等傳)」 66권 「왕경홍등전(王敬弘等傳)」 67권 「사령운전(謝靈運傳)」
길한 · 유도산 · 두기 · 신념 왕경홍(4) · 하상지 사령운
68권 「무이왕전(武二王傳)」
유의강 · 유의선
69권 「유담등전(劉湛等傳)」 70권 「원숙전(袁淑傳)」 71권 「서담지등전(徐湛之等傳)」
유담 · 범엽 원숙 서담지 · 강담 · 왕승작
72권 「문구왕전(文九王傳)」
유삭 · 유굉 · 유창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약
73권 「안연지전(顏延之傳)」 74권 「장질등전(臧質等傳)」 75권 「왕승달등전(王僧達等傳)」
안연지 장질 · 노상 · 심유지 왕승달 · 안준
76권 「주수지등전(朱脩之等傳)」 77권 「유원경등전(柳元景等傳)」 78권 「소사화등전(蕭思話等傳)」
주수지 · 종각 · 왕현모 유원경 · 안사백 · 심경지 소사화 · 유연손
79권 「문오왕전(文五王傳)」
유탄 · 유위 · 유혼 · 유휴무 · 유휴범
80권 「효무십사왕전(孝武十四王傳)」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81권 「유수지등전(劉秀之等傳)」 82권 「주랑등전(周朗等傳)」 83권 「종월등전(宗越等傳)」
유수지 · 고침 · 고기지 주랑 · 심회문 종월 · 오희 · 황회
84권 「등완등전(鄧琬等傳)」 85권 「사장등전(謝莊等傳)」 86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등완 · 원의 · 공기(孔覬) 사장 · 왕경문(5) 은효조 · 유면
87권 「소혜개등전(蕭惠開等傳)」 88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89권 「원찬전(袁粲傳)」
소혜개 · 은염 설안도 · 심문수 · 최도고 원찬
90권 「명사왕전(明四王傳)」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91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劉瑜) · 가은 · 곽세도 · 자원평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민 · 손극 · 하자평
92권 「양리전(良吏傳)」
왕진지 · 두혜도 · 서활 · 육휘 · 완장지 · 강병지 · 왕흠지
93권 「은일전(隱逸傳)」
대옹 · 종병 · 주속지 · 왕홍지 · 완만영 · 공순지 · 유응지 · 공기(龚祈) · 적법사 · 도잠 · 종욱지 · 심도건 · 곽희림 · 뇌차종 · 주백년 · 왕소 · 관강지
94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완전부 · 왕도륭 · 양운장
95권 「삭로전(索虜傳)」 96권 「선비토욕혼(鮮卑吐谷渾)」
삭로 토욕혼
97권 「이만전(夷蠻傳)」
임읍국 · 부남국 · 가라타국 · 가라단국 · 반황국 · 반달국 · 사파파달국 · 사자국 · 가비려국 · 고구려 · 백제국 · 왜국 · 형옹주만 · 예주만
98권 「저호전(氐胡傳)」 99권 「이흉전(二凶傳)」
구지 · 저거몽손 유소(劉劭) · 유준(劉濬)
100권 「자서전(自序傳)」
심약
(1) 본명이 사유(謝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인(景仁)으로 표기되었다.
(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f51ba><tablebgcolor=#3f51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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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송본기상(宋本紀上)」 2권 「송본기중(宋本紀中)」 3권 「송본기하(宋本紀下)」
유유(裕) · 유의부 유의륭 · 유준(駿) · 유자업 유욱(彧) · 유욱(昱) · 유준(準)
4권 「제본기상(齊本紀上)」 5권 「제본기하(齊本紀下)」
소도성 · 소색 소소업 · 소소문 · 소란 · 소보권 · 소보융
6·7권 「양본기상·중(梁本紀上·中)」 8권 「양본기하(梁本紀下)」
소연 소강 · 소역 · 소방지
9권 「진본기상(陳本紀上)」 10권 「진본기하(陳本紀下)」
진패선 · 진천 · 진백종 진욱 · 진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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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列傳)]
||<-6><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1·12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은숙의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장상유 · 치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 장요아 · 심묘용 · 왕황후 · 유경언 · 심무화 · 장여화
13·14권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의경 · 유준고 · 유의진 · 유의강 · 유의공 · 유의선 · 유의계 · 유소 · 유준(濬) · 유삭 · 유굉 · 유탄 · 유위 · 유창 · 유혼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무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범 · 유휴약 ·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15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16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유목지 ·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왕진악 ·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 주수지 · 왕현모
17권 「유경선등전(劉敬宣等傳)」
유경선 · 유회숙 · 유수 · 손처 · 괴은 · 상정 · 유종 · 우구진 · 맹회옥 · 호번 · 유강조
18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19권 「사회등전(謝晦等傳))」
조륜지 · 소사화 · 장도 사회 · 사유 · 사방명 · 사령운
20권 「사홍미전(謝弘微傳)」 21권 「왕홍전(王弘傳)」 22권 「왕담수전(王曇首傳)」
사홍미 왕홍 왕담수 ,왕훈,
23권 「왕탄등전(王誕等傳)」 24권 「왕유지등전(王裕之等傳)」 25권 「왕의등전(王懿等傳)」
왕탄 · 왕화 · 왕혜 · 왕욱 왕유지 · 왕진지 · 왕소지 · 왕열지 · 왕준지 왕의 · 도언지 · 원호지 · 장흥세
26권 「원담전(袁湛傳)」 27권 「공정등전(孔靖等傳)」 28권 「저유지전(褚裕之傳)」
원담 공정 · 공림지 · 은경인 저유지
29권 「채곽전(蔡廓傳)」 30권 「하상지전(何尙之傳)」 31권 「장유전(張裕傳)」
채곽 하상지 장유 ,장승,
32권 「장소전(張邵傳)」 33권 「범태등전(范泰等傳)」 34권 「안연지등전(顔延之等傳)」
장소 범태 · 순백자 · 서광 ·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안연지 · 심회문 · 주랑
35권 「유담등전(劉湛等傳)」 36권 「양흔등전(羊欣等傳)」 37권 「심경지등전(沈慶之等傳)」
유담 · 유열 · 고침 · 고기지 양흔 · 양현보 · 심연지 · 강이 · 강병지 심경지 · 종각
38권 「유원경전(柳元景傳)」 39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40권 「노상등전(魯爽等傳)」
유원경 은효조 · 유면 노상 · 설안도 · 등완 · 종월 · 오희 · 황회
41권 「제종실전(齊宗室傳)」
소도도 · 소도생 · 소요광 · 소요흔 · 소면 · 소경선 · 소적부 · · 소탄 · 소탄지
42·43권 「제고제제자전(齊高帝諸子傳)」
소억 ·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44권 「제무제제자·제문혜제자·명제제자전(齊高帝諸子·文惠諸子·明帝諸子傳)」
소장무 ·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
45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46권 「이안인등전(李安人等傳)」
왕경칙 · 진현달 · 장경아 · 최혜경 이안인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무 ·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47권 「순백옥등전(荀伯玉等傳)」 48권 「육징등전(陸澄等傳)」
순백옥 · 최조사 · 설연 · 우종 · 호해지 · 우완지 · 유휴 · 강석 육징 · 육혜효 · 육궐
49권 「유고지등전(庾杲之等傳)」 50권 「유환등전(劉瓛等傳)」
유고지 · 왕심 · 공규 · 유회진 유환 · 명승소 · 유이 · 유규
51·52권 「양종실전(梁宗室傳)」
소경 ,소매 소발 소앙 소욱, · 소의 · 소부 · 소창 · 소융 · 소굉 ,소정인 소정의 소정덕 소정립, 소수 · 소위 · 소회 · 소담
53권 「양무제자전(梁武帝諸子傳)」
소통 · 소종 · 소적 · 소속 · 소윤 · 소기
54권 「양간문제자·원제제자전(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傳)」
소대기 · 소대심 · 소대관 · 소대림 · 소대련 · 소대춘 · 소대성 · 소대봉 · 소대아 · 소대장 · 소대균 · 소대위 · 소대훈 · 소대구 · 소대흔 · 소대지 · 소대원 · 소방등 · 소방제 · 소방구 · 소방략
55권 「왕무등전(王茂等傳)」
왕무 · 조경종 · 조의종 · 석천문 · 하후상 · 길사첨 · 채도공 · 양공칙 · 등원기 · 장혜소 · 장징 · 풍도근 · 강현 · 창의지
56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57권 「심약등전(沈約等傳)」 58권 「위예등전(韋叡等傳)」
장홍책 · 유역 · 정소숙 · 여승진 · 악애 심약 · 범운 위예 · 배수
59권 「강엄등전(江淹等傳)」 60권 「범수등전(范岫等傳)」 61권 「진백지등전(陳伯之等傳)」
강엄 · 임방 · 왕승유 범수 · 부소 · 공휴원 · 강혁 · 서면 · 허무 · 은균 진백지 · 진경지 · 난흠
62권 「하창등전(賀瑒等傳)」 63권 「왕신념등전(王神念等傳)」 64권 「강자일등전( 江子一等傳)」
하창 · 사마경 · 주이 · 고협 · 서리 · 포천 왕신념 · 양간 · 양아인 강자일 · 호승우 · 서문성 · 음자춘 · 두즉 · 왕림 · 장표
65권 「진종실제왕전(陳宗室諸王傳)」
진의 · 진상 · 진혜기 · 진창 · 진담랑 · 진백무 · 진백산 · 진백고 · 진백공 · 진백인 · 진백의 · 진백례 · 진백지 · 진백모
진숙릉 · 진숙영 · 진숙견 · 진숙명 · 진숙경 · 진숙헌 · 진숙제 · 진숙문 · 진숙달 · 진숙탄 · 진숙표 · 진숙웅 · 진숙중 · 진숙엄 · 진숙신 · 진숙우 · 진숙평 · 진숙오 · 진숙흥 · 진숙선 · 진숙목 · 진숙검 · 진숙징 · 진숙소 · 진숙광 · 진숙순 · 진숙모 · 진숙현 · 진숙륭 · 진숙영
진심 · 진장 · 진윤 · 진억 · 진언 · 진경 · 진건 · 진념 · 진지 · 진전 · 진번
66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두승명 · 주문육 · 후진 · 후안도 · 구양위 · 황법구 · 순우량 · 장소달 · 오명철
67권 「호영등전(胡穎等傳)」
호영 · 서도 · 두릉 · 주철무(1) · 정영세 · 심각 · 육자륭 · 전도집 · 낙문아 · 손창 · 서세보 · 주부 · 순랑 · 주경 · 노실달 · 소마하 · 임충 · 번의
68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조지례 · 채경력 · 종원요 · 한자고 · 화교 · 유사지 · 사기 · 모희 · 심군리 · 육산재
6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심형 · 우려 · 부재 · 고야왕 · 요찰
70권 「순리전(循吏傳)」
길한 · 두기 · 신념 · 두혜도 · 완장지 · 견법숭 · 부염 · 우원 · 왕홍궤 · 심우 · 범술증 · 손겸 · 하원 · 곽조심
71권 「유림전(儒林傳)」
복만용 · 하동지 · 엄식지 · 사마경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공자구 · 황간 · 심수 · 척곤 · 정작 · 전완 · 장기 · 고월 · 척곤 · 왕원규
7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최위조 · 조충지 · 가희경 · 원준 · 유소(昭)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협 · 하사징 · 임효공 · 안협 · 기소유 · 두지위 · 안황 · 잠지경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완탁
73·74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瑜) · 가은 · 곽세통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구걸 · 사각수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인 · 손극 · 하자평 · 최회순 · 왕허지 · 오경지 · 소예명 · 소교처양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 구관선 · 손담 · 화보 · 해숙겸 · 한영민 · 유풍 · 봉연백 · 오달지 · 왕문수 · 악이지 · 손법종 · 유도민 · 등담공 · 도계직 · 심숭소 · 순장 · 길분 · 견염 · 조발호 · 한회명 · 저수 · 장경인 · 도자장 · 성경준 · 이경서 · 사린 · 은불해 · 사마고 · 장소
75·76권 「은일전(隐逸傳)」
도잠 · 종소문 · 심도건 · 공순지 · 주속지 · 대옹 · 적법사 · 뇌차종 · 곽희림 · 유응지 · 공기 · 주백년 · 관강지 · 어부 · 저백옥 · 고환 · 두경산 · 장영서 · 오포 · 서백진 · 심인사 · 완효서 · 등욱 · 도홍경 · 제갈거 · 유혜비 · 범원엽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77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78·79권 「이맥전(夷貊傳)」
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왜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연연
80권 「적신전(賊臣傳)」
후경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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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성공(建城公)
부량 | 傅亮
<colbgcolor=#3f51ba> 시호 없음
작위 건성현공(建城縣公)
성 부(傅)
휘 량(亮)
자 계우(季友)
생몰 374년 ~ 426년 2월 8일
출신 북지군(北地郡) 영주현(靈州縣)
부친 부원(傅瑗)
자녀 2남
국적 동진 → 유송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송나라 건국2.3. 소제의 폐위2.4. 문제의 즉위와 숙청

1. 개요

동진 및 유송의 인물. 부현의 5대손으로, 현조부 부함은 서진에서 사예교위(司隸校尉)를 지냈다. 부친 부원(傅瑗)은 동진에서 학문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관직은 안성태수(安成太守)에까지 올랐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아버지 부원은 치초와 친하게 지냈는데, 치초가 일찍이 부원을 찾아왔을 때 부원은 두 아들 부적(傅迪)과 부량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당시 부량은 네다섯 살이었는데, 치초가 사람을 시켜 부량의 옷을 벗기게 하고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가져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량은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치초가 부원에게 말하였다.
"경의 작은아들은 재능과 명성, 관직과 지위에서 장차 형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오. 그러나 집안을 보전하고 가문의 대를 이어 나가는 일은 결국 큰아들에게 달려 있을 것이오."
부량은 경서와 사서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특히 글을 짓는 데 뛰어났다. 처음에는 건위부(建威府)의 참군(參軍)을 지냈고, 이어 중군장군 환겸의 행참군(行參軍)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제위를 찬탈한 환현이 부량이 박학하고 문장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비서랑(秘書郎)으로 선발하여 비각(秘閣)의 서적과 문서를 정리하도록 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량이 미처 관직에 임명되기도 전에 환현이 패망하였다. 이후 유유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환현을 패망시킨 단양윤 맹창(孟昶)이 부량을 불러 다시 건위부의 참군으로 임명하였다.

의희 원년(405년), 부량은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郎)에 임명되어 중서성(中西省)에서 숙직하며 조서와 명령을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후 영군부(領軍府)의 장사(長史)로 전임되었고, 중서랑 등연(滕演)이 그를 대신하게 되었으나, 부량은 미처 새 관직에 부임하기 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는 무군장군 유의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고, 이어 영군부의 사마(司馬)로 옮겨졌다.

의희 7년(411년), 부량은 산기시랑(散騎侍郎)으로 승진하여 다시 등연을 대신해 중서성에서 숙직하였다. 이어 중서황문시랑(中書黃門侍郎)으로 옮겨졌으나, 중서성에서 숙직하는 일은 종전대로 맡았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태위 유유는 부량이 오랫동안 숙직하며 부지런히 일한 것을 생각하여 그를 동양태수(東陽太守)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가 먼저 이 뜻을 부적에게 알리자, 부적은 크게 기뻐하며 부량에게 전하였다. 그러나 부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곧바로 말을 달려 유유를 찾아가 말하였다.
"삼가 듣건대, 은혜로운 뜻으로 저를 동양태수에 임명하려 하신다고 합니다. 집안이 가난한 제가 외람되게 녹봉을 받게 되니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공(公)의 보살핌 아래 머물고 싶다는 바람이 제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부디 공의 곁에서 계속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청하오며, 지방으로 나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에 유유가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경에게 녹봉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오. 경이 이처럼 내 곁에 머물고자 한다면 내가 바라던 바와도 매우 잘 들어맞는 일이오."
마침 유유가 사마휴지를 토벌하기 위해 서쪽으로 출정하게 되자, 유유는 부량을 자신의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삼아 문서 작성과 관리를 맡게 하였다. 또, 참군 양휘(羊徽)를 중서랑으로 임명하여 부량을 대신해 중서성에서 숙직하도록 하였다.

이후로도 부량은 유유의 북벌에 종군하여 후진을 정벌하고 돌아와 팽성(彭城)에 이르렀다.

2.2. 송나라 건국

의희 14년(418년) 6월, 유유가 송공(宋公)에 봉해지자, 명령을 내려 부량을 시중(侍中)으로 삼고 세자중서자(世子中庶子)를 겸임하게 하였다. 이후 중서령(中書令)으로 옮겨졌으나 세자중서자의 관직은 종전대로 유지하였다.

원희 2년(420년) 정월, 부량은 유유를 따라 수양(壽陽)으로 돌아왔다. 당시 유유는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오를 뜻을 품고 있었으나, 이를 직접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술을 마시던 중 조용히 말하였다.
"환현(桓玄)이 포악하게 황위를 찬탈하였을 때 나라의 운명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나는 앞장서서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황실을 다시 일으켰고, 남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천하를 평정하였다. 이처럼 공을 세우고 대업을 이루어 마침내 구석(九錫)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 나이도 들어 노년에 접어들었고, 지위와 영예도 이처럼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모든 일은 지나치게 성대하고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해야 하므로 이러한 상태를 오래도록 편안하게 유지할 수는 없다. 이제 작위와 관직을 모두 반납하고 수도로 돌아가 늙은 몸을 쉬게 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은 유유의 공적과 덕을 크게 칭송할 뿐,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날이 저물어 연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지자 부량은 밖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유유의 뜻을 깨달았으나 이미 궁문은 닫힌 뒤였다. 이에 부량이 문을 두드리며 만나기를 청하자, 유유가 곧 문을 열어 그를 맞이하였다. 부량이 들어가자마자 말하였다.
"신은 잠시 수도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유유는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고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물었다.
"호위로 보낼 사람은 몇 명이나 필요하겠소?"
부량이 대답하였다.
"수십 명이면 충분합니다."
이에 부량은 곧바로 하직 인사를 올렸다. 부량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었는데, 긴 혜성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이 보였다. 부량은 자신의 넓적다리를 두드리며 말하였다.
"나는 평소 천문으로 길흉을 점치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이제야 그것이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알겠구나!"

원희 2년(420년) 4월, 부량은 수도에 도착하자 곧바로 유유를 불러들여 조정의 정사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이에 유유는 아들 유의강(劉義康)을 남겨 수양을 지키게 하고 수도로 귀환하였다.

원희 2년(420년) 6월 9일[1], 송왕 유유가 수도 건강에 이르러 중서령 부량을 통해 공제 사마덕문에게 넌지시 선양을 받으려는 뜻을 전하였다.

영초 원년(420년) 6월, 무제 유유가 공제의 선양을 받아 송나라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부량은 태자첨사(太子詹事)로 옮겨졌으며, 중서령은 이전과 같이 유지하였다. 또, 황제의 즉위를 보좌한 공로로 건성현공(建城縣公)에 봉해지고 식읍 2,000호를 받았다. 이후, 부량은 중서성에 들어가 숙직하며 조서와 명령을 작성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부량이 나라의 권력을 총괄하고 있었으므로 중서성 안에서 손님을 만나는 것도 허락받았다. 이에 신호문(神虎門) 밖에는 매일 아침 그를 찾아온 사람들의 수레가 늘 수백 대씩 모여 있었다.

유유가 처음 동진 조정에서 중용되어 권력을 잡았을 무렵에는 문서 작성을 모두 기실참군 등연이 맡았고, 북쪽으로 출정하여 광고(廣固)를 정벌할 때에는 모든 문서 작성을 장사 왕탄(王誕)에게 맡겼다. 그 뒤부터 유유가 천명을 받아 황제에 오르기까지 표문과 책문, 보고서는 모두 부량이 작성한 것이었다.

영초 2년(421년) 정월, 부량은 상서복야(尚書僕射)로 옮겨졌으며, 중서령과 태자첨사는 종전대로 유지하였다.

영초 3년(422년) 3월, 무제가 병이 들자, 부량은 태위 유도련, 사공 서선지, 영군장군 사회, 호군장군 단도제와 함께 궁궐로 들어가 명령을 받았다. 이때 부량은 반검(班劍) 20명을 지급받았다.

2.3. 소제의 폐위

영초 3년(422년) 5월, 무제가 부량, 서선지 등에게 고명(顧命)을 남기고 붕어하자, 태자인 유의부가 황위에 올랐다. 부량은 중서감(中書監) · 상서령(尚書令)으로 승진하였다.

경평 원년(423년) 윤 4월, 서선지의 조카인 단양윤 서패지와 그 무리가 사회를 의심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서패지가 부량을 찾아가 사회를 처형하라는 조서를 쓸 것을 요구하니, 부량이 말하였다.
"우리 세 사람은 함께 고명(顧命)을 받았는데, 어찌 서로 죽일 수 있겠소! 만약 그대들이 정말로 이 일을 실행한다면 나는 각건(角巾)을 쓰고 액문(掖門)을 걸어서 나갈 뿐이오."
이에 서패지 등은 계획을 중단하였다.

경평 2년(424년), 호군장군(護軍將軍)을 겸임하였다.

경평 2년(424년) 5월, 부량은 다른 고명대신들과 마찬가지로 소제 유의부의 행실을 못마땅하게 여겼기에, 마침내 서선지의 소제 폐위 모의에 가담하였다. 결국 서선지의 주도 하에 소제는 폐위되었고, 부량은 행대(行臺)의 여러 관리를 거느리고 법가(法駕)를 갖추어 강릉(江陵)에 있는 의도왕 유의륭을 맞이하러 갔다. 사부상서 채확(蔡廓)은 심양(尋陽)에 이르렀을 때 병이 들어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부량은 그와 작별하였다. 이때 채확이 말하였다.
"영양왕(營陽王)이 오(吳)에 있으니 마땅히 그를 후하게 모셔야 합니다.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그대들은 임금을 시해했다는 오명을 얻게 될 터인데, 앞으로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당시 부량은 이미 서선지와 영양왕 유의부를 살해하기로 의논을 마친 상태였으나, 채확의 말을 듣고 급히 사람을 보내 살해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미 일이 벌어진 후였다. 이를 알게 된 서선지는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남들과 함께 일을 모의해 놓고 어찌하여 갑자기 등을 돌려 그 악행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긴단 말인가!"
그리고는 다시 사신을 보내 소제를 폐위하기 전에 폐서인한 전(前) 여릉왕 유의진도 살해하였다.

경평 2년(424년) 7월, 부량은 강릉에 도착한 뒤, 성 남쪽에 임시로 문을 세우고 '대사마문(大司馬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어 행대의 여러 관리를 거느리고 문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 표문과 함께 옥새와 인끈을 바쳤는데, 의식에 사용된 물품과 의장이 매우 성대하였다. 이후 유의륭이 황제에 즉위하기 위해 수도로 내려가려 할 때 부량을 불러 만났는데, 몹시 비통하게 통곡하여 곁에 있던 사람들까지 슬픔에 잠겼다. 이윽고 유의진과 소제가 폐위되고 죽임을 당한 일의 전말을 묻더니 슬픔에 겨워 소리 높여 흐느껴 울었고, 곁에서 모시던 사람들은 차마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못하였다. 부량은 식은땀으로 등이 흠뻑 젖었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수도로 향하는 길에 유의륭의 측근인 도언지와 왕화등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깊이 친분을 맺으려 하였다.

경평 2년(424년) 8월 8일[2], 의도왕 유의륭이 건강에 도착하자, 여러 신하가 신정(新亭)에서 그를 맞이하고 절을 올렸다. 이때 서선지가 부량에게 물었다.
"왕은 누구와 견줄 만한 인물이오?"
부량이 대답하였다.
"진(晉)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보다 뛰어난 인물입니다."
서선지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반드시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실 것이오."
부량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을 것이오."

2.4. 문제의 즉위와 숙청

황제로 즉위한 문제 유의륭이 부량에게 산기상시(散騎常侍) ·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해주고, 본래 맡고 있던 관직은 모두 종전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사공부(司空府)에 속해 있던 문무 관리들은 그대로 좌광록부(左光祿府)의 관리가 되었다. 또 부량의 작위를 시흥군공(始興郡公)으로 올리고 식읍을 4,000호로 늘려 주었으나, 부량은 봉작을 올려 주는 것을 거듭 사양하였다.

처음에 회계(會稽) 사람 공녕자(孔寧子)는 문제가 진서장군으로 있을 때부터 그의 휘하에서 자의참군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문제가 즉위하자 공녕자는 보병교위가 되었는데, 그는 시중 왕화와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서선지와 부량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미워하여 밤낮으로 문제에게 두 사람을 헐뜯고 모함하였다. 결국 문제는 서선지와 부량을 처형하고 아울러 군사를 일으켜 사회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겉으로는 위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알렸다. 또 경릉(京陵)에 참배할 것이라고 하면서 출행에 필요한 물품과 군함을 준비하였다. 이때 부량은 사회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하삭(河朔) 지방을 정벌하려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아, 조정과 민간에서는 이를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소."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정의 관리들 가운데 북벌을 만류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폐하께서 외감(外監) 만유종(萬幼宗)을 보내 그대의 의견을 물어보도록 하실 것이오."
하지만 당시 조정에서 내리는 명령과 취하는 조치가 평소와 달랐으므로, 공녕자와 왕화 등이 꾸미고 있던 계획도 상당 부분 밖으로 새어 나갔다.

원가 3년(426년) 정월 16일[3], 문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임금, 아버지, 스승 세 사람을 섬기게 되는데, 이들을 한결같이 섬기고 사랑하며 공경하는 마음도 똑같이 지극해야 한다. 이는 어찌 예법과 도덕의 가르침에만 그치는 일이겠는가? 하물며 그 은혜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것에 견줄 만큼 크다면, 도리상 더욱 높이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서선지(徐羨之)와 부량(傅亮), 사회(謝晦)는 모두 기회를 만나 등용된 인물들로, 일찍이 선제의 은혜를 입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처지에서 발탁되어 단번에 중요한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다. 선제께서 그들을 보살피고 길러 주신 은혜는 새가 알을 품어 새끼를 기르는 것에 비유하더라도 부족할 정도였다. 영초(永初) 말년에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밝은 태양과 같던 선제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온 천하가 슬픔에 잠겨 소리를 죽였다. 이들은 실로 선제의 유언을 받들어 나라를 맡았으니, 그 책임은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것과 같았다. 그러나 팔다리처럼 임금을 보좌하는 신하로서 힘을 다하지 않았고, 마음과 정성을 모두 바치지도 않았다. 선제를 떠나보낼 때에는 그 유언을 충실히 받들어 지키는 절개를 보이지 않았으며, 뒤를 이은 황제를 섬기면서도 충성스럽고 곧은 신하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올바른 뜻을 받들어 이루도록 도운 일은 기록할 만한 것이 없고, 잘못을 바로잡거나 위기에서 구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총애를 잃지 않고 비위를 맞추는 데만 마음을 쏟아, 임금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을 그대로 따르며 그릇된 행동을 부추겼다. 비록 마지막에는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황제를 폐위하고 새 황제를 세우는 큰 계획을 세웠지만, 끝내 그릇된 마음을 멋대로 드러내면서 의롭지 못한 행동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폐위된 황제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할 때부터 그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으며, 유배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노골적으로 원한을 품고 살해하였다. 흉악하고 잔혹한 짓을 극도로 저질러 온갖 참혹한 고통을 가하였으며, 마침내 황제가 천한 하인들의 손에 쓰러져 임시로 머물던 객사에서 생을 마감하게 하였다. 수도와 지방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놀랐으며, 나그네들조차 눈물을 삼켰다.

전(前) 여릉왕(廬陵王) 유의진(劉義真)은 영민하고 뛰어나며 식견이 깊고 원대하여, 그의 훌륭한 인품에 대한 명성이 일찍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제후들처럼 황실을 떠받칠 중요한 역할을 맡을 인물로서, 조정과 민간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서선지 등은 난폭하게 남을 억누르며 권력을 독차지하려 하였고, 어진 인물을 시기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받을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교묘하게 모함하는 말을 꾸며 내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죄를 만들어 냈다.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의 눈을 가리면서 부당하게 유의진을 먼 곳으로 내쫓았으며, 조정의 명령을 왜곡하고 거짓으로 꾸며 끝내 이러한 참화를 불러왔다. 나라의 운명을 맡겼더니 오히려 황족들을 원수처럼 여겨 제거하였으며, 불과 몇 달 사이에 두 차례나 흉악한 살인을 저질렀다. 그 참혹함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모두 슬프게 하였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의 원한을 샀다. 문자가 만들어져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를 저버리고 이처럼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으며, 하늘이 명백히 드러낸 당연한 이치를 뒤집은 일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는 없었다.

옛날 자가(子家)가 임금을 시해하는 일에 가담하자 정(鄭)나라 사람들이 그 죄를 물었고, 송(宋)나라의 공자 비(肥)가 죄 없이 살해당하자 탕택(蕩澤)이 처형되었다. 하물며 이들의 반역과 난행은 과거의 죄악보다 훨씬 심하고, 나라와 황실이 입은 슬픔도 더욱 깊은데, 이러한 자들을 용납할 수 있다면 도대체 어떤 자들을 용납하지 못하겠는가! 마땅히 즉시 그들을 처형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큰일이 막 마무리된 참이었고, 서로 다른 의견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들이 나라를 바로잡는 데 세운 공적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지만, 그들이 저지른 지극히 큰 죄악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멀리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가까이 조정과 민간의 여론을 살펴보니, 비록 역적들을 토벌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이루기 어려울까 염려되었다. 이에 슬픔을 참고 억누르면서 치욕을 가슴에 품은 채 여러 해를 보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루기가 참으로 어렵고, 마음에 품은 뜻을 아직 펼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찌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보며 가슴 아파하지 않았겠으며, 베개에 엎드려 피눈물을 흘리지 않았겠는가! 이제 역신들이 저지른 죄악이 멀고 가까운 곳에 모두 드러나 알려졌으니, 군자들은 슬퍼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떨쳐 일어나려 한다. 가문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곧 사구(司寇)에게 명하여 법에 따른 형벌을 엄정하게 집행하도록 하겠다. 사회(謝晦)는 장강 상류의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어 즉시 죄에 대한 처벌을 받으려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짐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를 막아 내겠다. 중령군(中領軍) 도언지(到彥之)는 바로 오늘 번개처럼 신속히 출정하도록 하고, 정북장군(征北將軍) 단도제(檀道濟)는 뒤이어 쉼 없이 진군하도록 하라. 또한 위군부(衛軍府)와 주(州)의 관청에 명령을 내려 때를 맞추어 역적들을 붙잡아 제거하도록 하라. 이미 정로장군(征虜將軍) 유수(劉粹)에게 명하여 그들이 도망치거나 숨어들 수 있는 길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죄는 주모자들에게만 묻고, 나머지 사람들은 문책하지 않겠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고 슬픔을 가눌 수 없다. 이제 어지러운 기운이 걷혔으니, 바라건대 나라를 다스리는 올바른 도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문제는 부량을 처형하려고 먼저 그를 불러 만나려 하였다. 그런데 궁중에서 당직을 서던 사회의 아우 사조(謝㬭)가 이 사실을 몰래 부량에게 알려 주었다.
"궁궐 안에서 평소와 다른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에 부량은 형수가 위독하다는 핑계를 대며 잠시 집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어서 사람을 보내 서선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수레를 타고 성문 밖으로 나간 뒤 말을 타고 형 부적의 무덤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둔기교위 곽홍(郭泓)에게 붙잡혀 정위(廷尉)에게 넘겨졌다.

부량이 잡혀와 광막문(廣莫門)에 이르렀을 때, 문제는 중서사인을 보내 조서를 보여 주면서 다음과 같이 전하게 하였다.
"공이 강릉(江陵)에서 보여 준 충정을 생각하여 공의 아들들은 무탈케 하겠소."
부량은 조서를 다 읽고 나서 말하였다.
"나는 평민 시절부터 선제(先帝)께서 베풀어 주신 총애를 입었고, 마침내 나라의 앞날을 부탁받기에 이르렀다. 어리석은 임금을 폐위하고 현명한 임금을 세운 것은 나라를 위한 계책이었건만, 죄를 씌우려 한다면 어찌 구실이 없겠는가!"
곧이어 부량은 처형되고,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건안(建安)으로 유배 보내졌다. 향년 53세.

일찍이 부량은 세상살이가 험난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연신(演慎)》이라는 논설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큰 도리를 설명한 말에 '끝을 조심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면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역(周易)》에서는 '주머니 입구를 묶어 두면 허물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신중하면 해를 입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물건을 놓을 때 흰 띠풀을 깔아 두었으니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중함이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하였으므로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에서는 그가 많은 복을 누렸다고 노래하였다. 반면 중유(仲由)는 용맹을 좋아하여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려 할 만큼 무모하였으므로, 이를 경계하는 따끔한 가르침을 받았다. 《우서(虞書)》에는 몸가짐을 신중히 하는 것에 대한 칭송이 기록되어 있으며, 주(周)나라 종묘에서는 계단과 좌석 곁에 경계하는 글귀를 새겨 두었다.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몸을 지키고 덕을 온전히 보전하는 데 신중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하늘과 땅, 귀신과 사람의 도리는 모두 겸허함을 좋아하며, 하늘과 땅과 사람은 지나치게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한다. 상서로운 기운은 비어 있는 집에 모여들지만, 귀신은 높고 화려한 집을 엿본다. 크고 화려한 집에는 집안을 가리는 재앙이 따르고,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먹는 부귀도 백 년 동안 이어지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욕망을 좇아 삶을 풍족하게 누리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소홀히 여겨 경계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지난날의 일을 보고도 조금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 앞서 가던 수레가 이미 부서졌는데도 뒤따르는 수레는 멈추지 않는다. 위태로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안정을 얻으려 하고, 위험한 길을 걸으면서도 요행을 바라니, 마침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뒤집혀 멸망하는 재앙을 만나며, 목숨을 잃거나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는 화를 입게 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깊이 빠져들면서도 되돌아올 줄 모르고, 자신의 몸과 목숨을 물질보다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군자(君子)들은 명예와 작위를 향기로운 미끼와 다름없다고 여겼으니, 위태로운 재앙이 그들에게 미치지 않았다. 근심과 환난을 미리 생각하고 대비하였으므로 침술로 병을 치료할 필요도 없었다. 큰 물줄기도 처음에는 가느다란 시냇물일 때 막을 수 있고, 두 팔로 감싸 안아야 할 만큼 굵은 나무도 어린 싹일 때 잘라 낼 수 있다. 이처럼 작은 조짐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경계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위험한 기색이 보이면 곧바로 몸을 피하였다. 높이 나는 새를 보고 바람처럼 재빨리 떠날 줄 깨달았으며, 단술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린 옛사람의 일을 거울삼아 벼슬의 인끈을 벗어 던졌다. 어찌 잘못이 뚜렷하게 드러난 뒤에야 해결할 방도를 찾고, 재앙이 이미 닥친 뒤에야 되돌릴 방법을 생각해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시경》에서는 '그대가 지켜야 할 법도를 삼가 따르고, 뜻밖의 재앙에 대비하라'라고 하였다. 이는 재앙의 싹이 트기 전에 미리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선표(單豹)는 자신의 내면을 기르는 데 힘쓰다가 몸을 지키지 못하였고, 장의(張毅)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바로잡는 데 힘쓰다가 몸속의 병을 막지 못하였다. 제(齊)나라와 진(秦)나라에도 한쪽만 지키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으니, 어느 한쪽에만 의지해서는 안팎을 모두 온전히 보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있는 얼음과 숯처럼 차갑고 뜨거운 기운을 모두 씻어 내고, 무너질 듯한 높은 담장과 같은 위험으로부터 몸을 멀리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몸과 정신을 함께 온전히 보전하고, 안과 밖이 모두 평온하고 조화를 이루게 된다. 정신은 안으로 맑아지고 온몸은 밖으로 굳건해져, 사악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고 근심과 재앙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신중함의 도리를 지극하게 터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혜강(嵇康)은 뜻을 높이 세워 옛 성현들을 본받으려 하였고,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홀로 자유롭게 살았다. 삶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되는 다섯 가지 어려움의 근원을 이미 없앴으며, 목숨을 보전하는 데에도 거리낄 것이 없었으니, 사람이 겪을 만한 근심과 재앙은 거의 모두 사라진 듯하였다. 그러나 종회(鍾會)와 여손(呂巽)을 경계하는 데 소홀하였고, 우(禹)와 탕(湯)에 관해서도 거리낌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결국 털끝만큼 작은 일에서 재앙의 싹이 트고 말았으니, 자유롭게 날아오르려던 새가 막 날개를 펼치려는 순간 꺾이고 만 것과 같았다. 그가 친한 벗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맛있는 음식을 달콤한 독약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4]재앙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고삐도 없이 날뛰는 말을 타는 것과 같았고, 재앙을 경계하는 태도는 살얼음을 밟으며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았다. 어떤 사람은 거친 베옷을 떨쳐 입고 높은 곳에 은거하여 지팡이를 짚고 홀로 떠났으며, 어떤 사람은 풍족하고 화려한 생활을 마다하고 검소함을 지키면서 낮은 지위에 만족하였다. 그러므로 칠원(漆園)에서 벼슬하던 장자(莊子)는 초(楚)나라의 초빙을 거절하였으니, 이는 귀하게 대접받다가 죽임을 당하는 거북이나 제사에 바쳐지는 소와 같은 처지를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상산(商山)과 낙양(洛陽) 일대에 멀리 숨어 살던 은자들은 네 마리 말이 끄는 화려한 수레로 상징되는 높은 지위와 부귀를 두려워하였다. 안평중(晏平仲)은 최저(崔杼)와 경봉(慶封)의 일을 깊이 경계하여 봉읍을 사양하였고, 장림(張臨)은 지나치게 높은 지위와 부귀를 경계하며 상홍양(桑弘羊)과 곽우(霍禹)가 화를 입은 일을 뚜렷한 교훈으로 삼았다. 군자가 이 두 가지 길을 살펴본다면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가 분명해지고, 자신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과 파멸에 이르는 것의 결과도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바를 신중하게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신중함이야말로 말과 행동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 아니겠는가! 무릇 지도를 들고 칼을 휘두루는 일은 어리석은 사람조차 하지 않으며, 깊은 못가에 서거나 가파른 절벽에 오르면 누구나 두려워하며 떨게 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위험이 가까이 닥치면 걱정이 깊어지고, 재앙이 절박해지면 두려움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경》에서는 '감히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으려 하지 않고, 감히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작은 위험의 조짐부터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에 소를 잡는 요리사도 뼈와 근육이 복잡하게 얽힌 곳에 이르면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한다. 털끝만큼의 실수에도 이처럼 해를 입을 수 있는데, 하물며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재앙을 불러일으켜 죽을 곳에 뛰어드는 일이야 어떠하겠는가! 화와 복을 불러오는 요인들은 안팎에 가득하다. 공백(邛僰)의 아홉 굽이로 꺾인 험한 산길을 넘어가거나 여량(呂梁)의 거센 물결에 배를 띄웠다가 순식간에 뒤집히고 추락하는 재앙을 만나면, 목숨을 잃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더라도 아무도 구해 줄 수 없다. 아아! 슬프도다! 따라서 옛말에 '진실로 삼갈 줄 아는 것이 복의 근본이며, 이것이 무슨 해가 되겠느냐고 말하는 것이 곧 재앙으로 들어가는 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오직 모든 일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또, 부량은 평민 출신의 유생으로, 운 좋게 시대의 기회를 만나 재상의 자리에 올라 나라의 중요한 권력을 함께 총괄하게 되었다. 소제가 덕을 잃자 마음속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감물부(感物賦)》를 지어 자신의 뜻을 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늦가을에 궁중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밤이 깊어 고요해지고 업무에도 잠시 여유가 생기자 문학 작품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당시에는 찬바람과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여 추위가 닥칠 조짐이 보였지만, 벌레들은 여전히 많았다. 나방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다녀 방 안을 가득 메웠는데, 창가의 휘장으로 날아들어 밝게 타오르는 촛불에 모여든 것들은 반드시 불에 타 죽고 나서야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비록 보잘것없는 미물이었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다. 물러나 장자(莊子)가 기이한 까치를 만났던 일을 떠올려 보니, 나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눈앞의 것에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를 돌아보고 경계해야 한다는 도리를 잊고 있었다. 이것이 옛 스승들이 지혜를 자부하는 것을 경계한 까닭이며, 제(齊)나라 사신이 남의 잘못은 보면서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는 월왕(越王)을 꾸짖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이에 마음속에 여러 생각이 떠올라 착잡해졌고, 눈앞의 사물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마침내 이 부(賦)를 지었다.

가을걷이가 끝나 가는 저녁 무렵, 궁중에서 삼가 황제의 명을 받들고 있었다. 앞쪽 행랑에서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방의 창가에서는 밝은 달을 바라보았다. 쓸쓸한 바람은 휘장을 스치고, 새하얀 서리는 담장을 뒤덮었다. 계절에 맞추어 울어 대는 매미가 가련하고, 저물어 가는 햇빛이 아쉬워 다시 해가 떠오를 동쪽을 그리워하였다. 아아, 근심 많은 사람에게 온갖 감회가 한꺼번에 밀려드니, 어찌 이토록 밤은 길고 마음속에는 생각이 가득한가! 아득한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멀리 생각을 펼쳐 보니, 마치 끝없이 되풀이되는 순환과도 같았다. 의상(倚相)이 남긴 학문의 본보기를 되새기고, 동중서(董仲舒)가 학문에 두루 통달한 경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등불을 밝히고 책을 펼쳐 옛 성현들이 남긴 발자취를 되새겼다. 아득한 고서들은 너무나 오래되어 그 경지에 이르기 어렵고, 여러 학파의 가르침은 저마다 달라 복잡하게 나뉘어 있었다. 《시경(詩經)》 300편의 뜻을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라는 한마디로 꿰뚫고, 《도덕경(道德經)》 5,000자의 가르침도 하나의 근본 원리로 관통하였다. 옛 사서에서 지난날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시대가 번영하고 쇠퇴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품었던 생각과 그들의 행적을 찾아보았다. 인생에서 평탄한 길과 험난한 길을 만나는 것은 운명에 달린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온전히 보전하거나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스스로의 행동에 달린 것인가? 찬란하게 빛나는 문학의 세계를 두루 살펴보며, 뛰어난 문장가들이 발휘한 훌륭한 솜씨에 감탄하였다. 그들의 문장은 아름다움을 간직하면서도 거칠고 불필요한 표현을 버렸으며, 담긴 뜻은 고상하면서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비록 학문의 근원과 흐름은 깊고 넓어 끝을 헤아리기 어렵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 밝힘으로써 어리석고 깨닫지 못한 마음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작은 날벌레들은 떼를 지어 날아다니고, 가느다란 파리들은 가볍게 떠다닌다. 휘장을 따라 기어오르며 틈을 찾고, 불꽃을 바라보며 그곳으로 날아들려 한다. 향기로운 기름을 태우는 불길에 몸이 타 버려도 후회할 줄 모르고, 밝게 타오르는 촛불에 뛰어들면서도 지난 잘못을 경계하지 않는다. 앞서 가던 수레가 이미 뒤집힌 것을 보면서도 뒤따르는 수레는 길을 바꿀 줄 모른다. 보잘것없는 벌레가 죽은 것이 애석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일을 오래도록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여 가슴을 두드리게 된다. 사람은 참으로 귀한 존재로, 하늘과 땅과 나란히 설 만큼 영험한 존재이다. 맑고 넓은 기운을 받아 태어나며, 자연의 이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마음으로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분별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작은 조짐까지도 거울에 비추듯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지엽적인 것을 좇다가 근본을 버리고, 어떤 사람은 욕망에 빠져 자신의 목숨마저 잊는다. 하찮은 작위를 얻으려고 수후(隨侯)의 귀한 보주를 깨뜨리는 것처럼, 소중한 것을 버리고 하찮은 것을 얻으려 한다. 하물며 곤충들이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는 잘못을 지혜로운 사람들조차 여전히 저지르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장자(莊子)가 조릉(雕陵)에서 겪은 일을 통해 그가 깨달은 도리를 알게 되었지만, 나 역시 탁한 물을 바라보다가 맑은 물의 깊이를 잊을 뻔하였다. 옛 성현들이 남긴 훌륭한 본보기를 우러러보니, 나의 행적은 아직 그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겠다. 비록 송원군(宋元君)이 점을 쳐서 밖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냈다 하더라도, 어찌 그것만으로 나 자신의 처지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겠는가! 돌이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탄식하며 붓을 내려놓으니 마음속 감회만 더욱 깊어진다.

처음에 부량은 유의륭을 황제로 영접하러 가는 길에 시 세 편을 지었는데, 그중 한 편에는 지난 일을 후회하고 앞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른 아침 도성에서 배를 띄우니, 나를 전송하려고 배 앞에서 송별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떠나는 나에게 재물을 선물하는 대신, 아름다운 옥과 보석보다 귀한 충고의 말을 건네주네.
그칠 줄 아는 것을 도리에서 귀하게 여기고, 녹봉에 미련을 두는 것은 의리에 어긋난다고 나무라는구나.
네 마리 말도 먼 길을 달리면 지치는 법이니, 그대 또한 이제 고삐를 거두어도 좋으리라.
장량(張良)과 병한(邴漢)은 일찍이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혔고, 소광(疏廣)과 동중도(董仲道)도 때가 되자 수레를 멈추었네.
인생의 아침은 참으로 이미 지나갔고, 서쪽으로 기우는 저녁 해도 멈추지 않는구나.
목숨과 앞날을 어찌 뜻대로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을 품고 옛 현인들을 본받으려 하네.
옷깃을 여미며 간곡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허리띠에 차듯 훌륭한 충고를 몸에 간직하리라.
총애에 현혹되는 것은 본래 나의 뜻이 아니었으나, 두터운 은혜에는 아직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였네.
스스로를 돌아보면 쇠약하고 무능한 몸이 부끄럽고, 거듭 반성할수록 분수에 넘치는 작위가 부끄럽구나.
밝고도 밝은 황제의 은덕이 잡초가 우거진 곳까지 비추니,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그 뜻을 따르네.
충성스러운 충고의 뜻을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이제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솔직한 노래에 담아 부르네.
이처럼 부량은 자신이 결국 몰락할 것을 알고 있었으나, 벼슬에서 물러날 방법이 없었다. 이에 다시 신유(辛有), 목생(穆生), 동중도(董仲道)를 찬양하는 글을 지어, 그들이 작은 조짐을 보고 장차 닥칠 일을 미리 알아차린 훌륭한 점을 칭송하였다.

부량의 장남 부연(傅演)은 비서랑(祕書郎)을 지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요절하였고, 부연의 아우 부회(傅悝)와 부담(傅湛)은 도망쳤으며, 부담의 아우 부도(傅都)는 건안군(建安郡)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효무제가 재위하는 효건 연간(454~456년)에 이들은 마침내 모두 수도로 돌아왔다.

형 부적은 자가 장유(長猷)이며, 역시 유학에 능통하였다. 관직은 오병상서(五兵尚書)에까지 올랐으며, 영초 2년(421년)에 죽자 태상(太常)으로 추증되었다.


[1] 경신년 계미월 임술일. 음력으로는 6월 9일이고, 양력으로는 7월 5일이다.[2] 갑자년 계유월 병신일. 음력으로는 8월 8일이고, 양력으로는 9월 16일이다.[3] 병인년 경인월 병인일. 음력으로는 1월 16일이고, 양력으로는 2월 8일이다.[4] 원문 누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