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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팔렌 왕국 Königreich WestphalenDE Royaume de OuestphalieF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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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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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 1813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프로이센 왕국 | 프로이센 왕국 | |
뮌스터 주교후국 | ||
하노버 선제후국 | 하노버 왕국 | |
헤센 선제후국 | 헤센 선제후국 | |
브라운슈바이크울펜뷔텔 공국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 |
수도 | 카셀 | |
정치체제 | 입헌군주제 | |
국왕 | 히에로니무스 나폴레온 1세 | |
언어 | 독일어, 프랑스어 |
1. 개요
베스트팔렌 왕국은 프랑스 제국의 괴뢰국으로 라인 동맹 소속 국가이다. 국왕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막내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였다.2. 국명
베스트팔렌 왕국은 베스트팔렌[1] 지역의 이름을 따온 것이나, 영토 내에 베스트팔렌 지역은 거의 없었으며, 실제로는 오스트팔렌[2]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을 더해 만든 지역이다. 애초에 수도인 카셀부터가 베스트팔렌이 아닌 헤센에 속한 지역 이였고, 베스트팔렌 왕국이 아니라, 오스트팔렌 왕국이라고 부르는게 어울리는 지리적인 위치였다.3. 역사
3.1. 성립
1807년 나폴레옹이 틸지트 조약으로 프로이센 왕국이 양도한 영토 중 마그데부르크 공국, 하노버 선제후국,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후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후국, 헤센 선제후국을 병합하여 만든 국가이다. 11월 15일에 헌법이 제정되었고, 베스트팔렌 왕국은 근현대식 헌법을 가진 독일 최초의 군주국이 되었다. 프랑스 제1제국은 왕국 내의 행정구역을 지정하기 위해 프랑스어 용어를 사용했고, 지정된 주들은 전통적인 이름에 상관없이 강이나 산을 기반으로 이름을 지었다. 프랑스 자체의 주들과 비교할 때 베스트팔렌의 주는 상대적으로 작고 인구가 적었다.3.2. 멸망
1813년 9월, 러시아 제국군은 카셀을 포위하고 프랑스군을 완전히 무찌른 뒤에 도시를 점령했고, 10월 1일까지 러시아군은 왕국 전체를 점령했지만 3일 후 제롬 보나파르트가 프랑스군과 함께 돌아와 카셀을 탈환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다시 도시를 포위했고, 1813년 10월 19일 프랑스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체결된 빈 회의의 조약에 의거하여 왕국은 해체되었다.4. 유산과 의의
나폴레옹이 설립한 많은 괴뢰국들처럼, 베스트팔렌 왕국 역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모델의 수출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근대식 헌법이 반포되었고, 귀족 뿐 아니라 부르주아와 지식인까지 포괄한 독일어권 최초의 근대적 의회가 설립되었다.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었고, 나폴레옹 법전이 도입되고 사법 제도가 개혁되었으며, 농노제가 폐지되고, 귀족의 특권이 폐지되어 공식적으로 법 앞의 평등이 선포되었다. 재정적으로도 귀족의 면세특권이 철폐되고 근대적 관료제에 근거한 세제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혁신은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에도 많은 독일어권 국가들에게 받아들여졌다.경제적으로도 이 시기는 혁신의 시기였다. 자유로운 경제발전을 가로막던 중세적 특권을 가진 길드가 해체되면서 상공업이 진흥되었다. 특히 가장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은 마그데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엘베 지역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 이후 마그데부르크는 독일 산업혁명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후대에 남긴 유산과는 별개로, 베스트팔렌 왕국이라는 체제 자체는 당대인들에게 많은 증오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전쟁 수행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왕국의 관료들은 재정을 안정화시키고자 오만 노력을 다했지만 프랑스의 무리한 징발 요구에 의해 세어나가는 재정을 벌충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세금을 무리하게 매기자니 가뜩이나 프랑스의 백으로 들어온 외래인 입장에서 이는 현지인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일이라 실제 세금부담은, 면세특권이 폐지된 귀족들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왕국 존립 기간 내내 재정은 파탄 일보직전 상태였다.
또 당대인들에게 증오를 받은 지점은 징병제였다. 왕국은 근대적 체제를 이식하면서 성인 남성의 징병제를 도입했는데,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만나 3만명 이상의 거대 상비군을 징발하여 프랑스에게 유지해야 하는 의무까지 지게 되었고, 이는 자연스레 각종 반체제 시위와 봉기를 낳았다. 체제는 이에 대해 비밀경찰과 탄압으로 일관했고, 이는 더더욱 체제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는 원인이었다. 한술 더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 징발 요구에 응해 무려 2만 8천여명에 달하는 군대를 보내주었는데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 천명 미만(!)만이 돌아오는 끔직한 결과를 맞이하자, 결정적으로 민심이 체제로부터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1813년 러시아군이 입성하여 왕국이 멸망했을 때 유대인 등 체제 동안 보호를 받은 소수자들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러시아군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1] 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아른스베르크현, 데트몰트현, 뮌스터현[2] 현 니더작센 동부부터 작센안할트 북부에 걸친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