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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정희 정부의 외교 분야에 대한 평가를 다루는 문서2. 용미(用美) 노선
사실상 국가 예산의 절반 이상을 미 원조에 의존하는 빈약한 경제상황으로 미국에 아쉬운 얘기를 할 일이 많은 상황에서도, 사대주의가 아닌 용미주의(用美主義) 노선으로 우리 국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때때로 상당한 대척점에 서기도 하였다.베트남에 파병 결정을 해야 할 때는 측근 채명신의 조언[1]을 수용[2]했으며, 박 대통령 본인이 브라운 주한 미 대사에게 파병 병력의 지휘를 미군 사령관에게 일임한다고 약속하는 실수[3]를 하기도 했지만, 다시 "브라운 대사에게 말한 것은 그저 사적 대담이고, 곰곰히 생각하니 월남에서는 독자 지휘권을 갖되 상호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 잘 될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며, 파월사령부에서 지휘권 협상을 다시 하도록 하는 순발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4]
1971년 데탕트 국면에서,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조건으로 국군현대화 사업의 예산을 요구하여 받아내었으며, 1976년 출범한 지미 카터 정부가 출범한 더욱 거세진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놓고, 우리 정부에서 파견한 로비스트들이 북한군 전력에 대한 정보평가를 상향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건네는 한편, 미 의회의 반대 목소리 영향력을 증폭시켰다. 한국에 부정적인 시각을 보내는 카터 신임 정부와의 전면대결을 피하는 한편, 카터 대통령의 위험한 결정(주한미군 철수)을 '마지못해 받아들인다'는 태도를 취하며 교섭에 돌입, 핵무기 개발을 교섭의 도구로 역대 대한민국 정부를 기준으로도 상당히 반미적인 행태를 취하며 상당한 마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국의 안보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보상조치(철수미군의 중화기 장비 + 기타 군사원조 + 핵우산)을 받아내고 주한미군 철수를 지연시키는 데도 성공하였다. 후대인 박근혜 정부 말기에 THAAD 배치를 놓고 중국 및 배치예정지역 주민들과의 마찰을 매끄럽게 해결하지 못한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3. 용일(用日) 전략
박정희 정부는 엄청난 반발 속에서도 한일협정으로 이루어낸 대일국교정상화를 통해 경제 용일(用日)의 통로를 열었고, 그 결과 선진국에 진입한 일본의 기업들이 과잉생산에 따라 해외에서 투자처를 찾기 시작하는 와중 한국의 산업화는 수요가 확대되면서 생산 쪽에선 유일하게 수요가 있는 시기에 일본 기업들의 경쟁력이 있는 기술이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이에 미국이 차관 제공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과 기술을 대체하여 포스코를 건설하여, 할 수 있었으며 한국은 일본 정부의 견제 속에서도 일본 기업들로부터 철강, 화학, 전자 관련 제공된 상당한 기술과 자본을 제공받는 유상차관 계약을 이루었고, 이를 성공적으로 모방하며 체화하여 80년대에 이르면 스스로 국산화된 공업의 자립을 이룩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4. 한일회담의 성과
한일기본조약에서 일본에게 돈을 받고[5][6] 일본과의 무역 재개로 산업화의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한일기본조약의 부속협정을 통해서 독도 문제에 관련하여 일본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였고 동시에 이를 통하여 "한국 영토로서의 실효 지배를 굳히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평이 있다.5. 북한과의 관계개선 및 한반도 정세 관리
1970년대, 적십자회담, 비밀외교를 통해 북한과의 협력을 도모하고 7.4 남북 공동 성명을 내며, 비로소 남북상호 간의 체제를 인정하고 교류가 이어지는 해빙 국면의 단초가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그러나 1973년 북한이 남북화해기조를 깨트리고 남북간 총격전과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되어 이 시기는 무산되었다고 봐도 좋다.이어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은 공산권에의 문호개방,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6·23 선언'(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77년에는 장기적 관점에서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해 소련 및 중공과의 직접 대화를 모색하기도 했다.#
6. 중동 외교 및 중동 특수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중동 국가들과의 외교를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 중동 국가들과 국교를 수립하였다.[7]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과의 교류도 같이 이루어졌고, 당연히 이스라엘과의 영사 관계도 수립되었기에, 중동의 이슬람 산유국들과 수교는 맺을 수 있었으나, 경제적, 문화적인 교류 부분에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그러나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유가가 폭등하자 중동 산유국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막대한 자본으로 자국의 기반시설 건설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막대한 부와 구매력을 가진 중동시장은 한국의 가장 매력적인 상품 및 건설시장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박정희 정부는 석유를 수입하는 동시에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본을 조달하기 위해, 이전의 단순 수교 관계에서 친아랍정책으로 기조를 전환하여 미국,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중동의 산유국들과 이전 단순 수교관계에서 벗어나 정부 및 민간 차원의 적극적인 교류를 촉진시키며, 적극적으로 중동 시장 진출을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당시 1965년 베트남 파병과 함께 동원된 수많은 군역 건설 노동자와 제2차 경제 개발 계획(1967~1972) 동안 추진된 대규모 기간산업 건설 및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등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간접자본의 건설로 상당한 기술과 노하우, 노동력이 자본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갖춰진 상태였으며, 박정희 정부는 이에 따라 1973년 12월 15일에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을 발표하는 등 친아랍노선을 추구하여 반이스라엘, 반미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고, 이후 아랍국가들의 관계단절 요구와 함께 이스라엘과의 관계 소원으로 결국 이스라엘은 1978년 2월 한국 대사관을 철수시켰고 한국도 이스라엘 대사관을 폐쇄하여#, 냉전이 완화된 1992년에서야 다시 재개장하여 양국 관계가 정상화 될 수 있었다.
중동에 진출하는 기업들에게는 해외건설협의회설립 등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함과 관치금융으로 조세감면 등 금융·세제면에서 적극 지원하며 상당한 지원과 혜택을 부여했으며 기능사에게는 군복무 면제, 기능사 자격증 부여, 최고 연봉 등의 특전이 주어졌고, 사우디 대사관에 중동 건설 진흥 업무를 위해, 중량급 건설공무원을 상시 주둔하였으며, 경제부총리와 중앙정보부까지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이미 미국, 유럽의 경쟁력 있는 업체들도 이미 시장에 뛰어든 상황에 한국 기업이 아무리 경쟁력 있는 가격을 제시하여도, 공사 입찰에 필요한 입찰 보증과 이행을 보증하는 이행 보증은 당시 일개 기업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8]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해외건설 촉진법」을 제정하고 업체의 재정 능력을 보장해 주는 주거래 은행의 지불 보증을 의무화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곧 정부의 인증을 받은 업체에게는 주거래 은행은 이유 없이 무조건 지불 보증을 해야 한다는 내용인데, 이는 기업이 잘못된다면 나라도 도산될 수 있는 도박적인 정책이었기에 재정 금융당국의 결사반대를 받았으나, 결국 추진되어, 기업들은 대형공사를 입찰가능한 재정여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9]
이렇게 박정희 정부는 국내기업들의 중동 진출을 적극 지원하고 권장했으며, 1975년 8억 달러였던 국내 중동 진출 기업의 수주액은 1978년 81억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현대건설로 대표되는 국내 기업들은 빠르게 성장하였고[10] 결국 1975년에 이르러는 중동 건설 시장의 한국 기업의 매출액이 전체 건설 수출액의 93%, 1977년에는 96%를 차지하는 규모가 되었다. 1975~1979년 사이에 중동 건설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 수입은 총 205억 700만 달러로 총 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80년대 초까지 지속된 중동 특수로 벌어들인 외화는 총 400억 달러로 추산된다. 60년대와 70년대 당시 급격하게 성장한 경제와 시대적 차이를 감안한다 하여도 이는 이전 약 10억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고 추산된 이전 베트남 특수[11]와 비교해보아도 약 40배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였으며, 이를 발판으로 삼아 그동안 외화 보유에 어려움을 겪던 한국경제는 상당한 힘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1960~1970년대에 걸친 박정희 정부의 중동외교와 중동건설 진흥책은 두 차례의 걸친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향후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끈 결정적인 요인으로서 평가받고 있다.[12]
7. ASPAC 창설
박정희 정부는 1966년 6월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 Asian and Pacific Council)를 창설했다. 현재는 사실상 잊혀진 이름이 되었으나, 당시 국력의 한계를 탈피하여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국제협력기구였다는 점에서 상당한 외교사적 의의가 있다. ASPAC의 가맹국으로는 대한민국, 일본, 중화민국(대만),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베트남 공화국이 있었다.ASPAC은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연 1회, 총 7차례의 회의를 열었다. 미-중 데탕트 시기가 찾아오면서 각종 격변이 발생했고, 참여국 간 입장차이가 심화되어 결국 서울에서의 제7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자연소멸했다.[13]
8. 한일기본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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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8.1. 반대 여론 탄압
굴욕적인 한일 협정은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정권 퇴진 요구까지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의 시위를 '빨갱이들과 내란 선동자들이 일으킨 난동'으로 몰아세우며 탄압에 나섰다.
8.1.1. 한일협정 반대투쟁
1964년 일어난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같은 해 3월 24일의 고교생을 포함한 대규모 학생 시위에서 점화되어 4월 17일의 시위를 경과한 초기 투쟁, 5월 20일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5월 25일의 ‘난국 타개 학생 총궐기대회’와 같이 한일굴욕회담에 대한 반대 투쟁이 연합적 성격을 띠면서 본격화되는 시기의 투쟁, 6월 2일과 6월 3일의 격화된 시위와 계엄령 선포로 1964년의 투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결정적 투쟁의 시기로 나눠진다.대일 협상 진행 과정을 비밀에 부쳐오던 박정희 정권의 민주공화당은 1964년 2월 22일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안을 발표했다. 이들은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 달러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한국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했다. 1964년 3월 5일 정부와 여당은 연석 회의에서 한일 회담의 타결·조인·비준을 5월까지 모두 마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야당인사 200여 명은 3월 9일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의장 윤보선)를 결성하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총궐기할 것을 다짐한 후 전국 유세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이 5·16 군사쿠데타 이후 최초의 대규모 가두시위(3·24 시위)를 벌였다. ##2
특히 서울 문리대의 경우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이 참가한 학내 서클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주도했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 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도 '오늘의 단식 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각 대학에서는 관을 준비하여 한일 협상을 무리하게 추진하려는 박정희, 김종필에 대한 규탄 성명과 박정희 정권이 내걸었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열기도 했다('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이 한일 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6월 2일 고려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상대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데모를 주도하고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8.1.2. 6.3 항쟁
대한뉴스 <수도 서울에 계엄령 선포> 보도 | |
6월 3일에는 서울 18개 대학 1만 5천여 명 등 총 3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박 정권 타도"를 외치며 경찰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까지 진출,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그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이날 광주 등 지방 대도시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으며, 박정희는 같은 날 밤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 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압하였다.
6.3 항쟁은 일본 제국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으로서의 청구권 문제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 차관 3억 달러의 경제 협력 자금으로 변질된 소위 김종필 오히라 메모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온 국민이 굴욕적인 한일 회담에 반대하여 거리로 나서면서 일어났다.
이 시위는 4.19 이후 최대의 시위가 되었다. 단식 중이던 문리대생들이 거리에 나섰고, 서울대 농대생들은 수원에서부터 상경투쟁을 벌였다. 고려대생 연세대생 홍익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까지 나왔으며, 성균관대·동국대·중앙대·숭실대 학생들도 시내로 진출했고, 흰 가운을 입은 서울대 의대생도 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오후에 세종로 시민회관 앞의 경찰저지선에서 대치한 학생·시민들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시위대는 제4저지선인 조달청 앞까지 진출해 경찰과 맞서며 격렬히 시위했다. 광주와 대전에서도 학생 시위가 있었다.
그 결과 민정이양을 앞두고 계엄을 해제한 지 1년 6개월 만에 다시금 기본적 자유가 제한되었고 계엄사령부는 영장 없이 압수수색 및 체포 구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4개 사단 병력을 시내에 투입하였다. 여당인 공화당 내분을 잠재우고 부정부패 정권이라는 비난을 차단하기 위한 점도 있었지만, 학원과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서는 극약처분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날의 비상계엄은 그 후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에 군대를 동원하는 군사 통치 수법의 효시가 되었다.
8.1.3. 인민혁명당 사건 조작
윤보선, 장택상, 유진오, 장준하 등이 주도한 한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위원회는 학생들의 한일 회담 반대 투쟁을 지원하였는데, 박정희 정부는 인혁당이 한일 협정 반대 이슈를 선동하여 배후 조종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후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와 시위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 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 금지 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져 상당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었다.시위의 주동 인물과 배후 세력으로 지목된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검거되고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게 된다. 서울 시내에 경찰과 계엄군이 투입되어 7월 28일 사태는 진압되었고 이튿날 29일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
9. 독도 폭파 발언
"다른 사항에 대한 은밀한 대화가 오가던 와중에,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은 대한민국-일본과의 협상/교류/관계를 논하였고 이에 대해 미국은 최대한 빠른 결론에 다다르기 원한다는 의사를 두 나라에게 전했다. 국무장관은 이것[14]이 중요한 사항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으며 박 대통령도 독도(다케시마) 분쟁에 대해서 '작으나 거슬리는[15] 문제 중 하나'라고 단언했다. 한국-일본의 소유권 논란의 중심에 놓인 이 섬은 일본해[16]에 위치한 돌덩어리들 뿐인 무인도이다.
두 나라는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영토의 소유는 본인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한국은 이미 국가 안보원과 군인들을 배치하였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차라리 섬을 폭파시켜 이 문제를 아예 존재 유무를 논하지 말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예시로 100년전 미국과 영국 사이에 몇몇 섬들의 소유권에 대한 논쟁이 오갔으나 섬들을 이유로 각국 관계를 막장으로 치달을 필요성이 없음을 깨닫고 해당 주제에 대해서 양쪽이 포기했다고 말해주었다. 국무장관은 조언으로 한-일 공동 소유의 등대를 세워서 이 문제를 중립적으로 놔둬 이 갈등을 자연스레 소멸시키자라는 제안을 내놓았으나 박 대통령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두 나라는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영토의 소유는 본인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한국은 이미 국가 안보원과 군인들을 배치하였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차라리 섬을 폭파시켜 이 문제를 아예 존재 유무를 논하지 말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예시로 100년전 미국과 영국 사이에 몇몇 섬들의 소유권에 대한 논쟁이 오갔으나 섬들을 이유로 각국 관계를 막장으로 치달을 필요성이 없음을 깨닫고 해당 주제에 대해서 양쪽이 포기했다고 말해주었다. 국무장관은 조언으로 한-일 공동 소유의 등대를 세워서 이 문제를 중립적으로 놔둬 이 갈등을 자연스레 소멸시키자라는 제안을 내놓았으나 박 대통령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국무부 기밀 대화 비망록에 따르면, 1965년 5월18일 세 번째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가 데이비드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에게 '(한일수교 협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 시켜 없애버리자고 발언한 기록이 드러나 논란이 된 바 있다.#, #2
2012년 대선 당시 큰 논란이 되었던 사건으로 박근혜측 대변인인 조윤선은 '미국 측 특정 문서 한 구절에만 의존해서 박 전 대통령의 독도에 대한 입장을 왜곡하는 것은 대단히 정략적인 정치 공세'라며 반박했으나 박정희가 논란의 여지가 남을 발언을 한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10. 미국과의 관계 악화
박정희와 미국의 관계는 집권 초반부터 말년까지 좋지 않았다.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주한미군 사령관인 매그루더가 반란군을 진압하려 시도하였으며,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 활동 경력 때문에 사회주의 쿠데타가 일어난 줄 안 북한이 비밀 특사(황태성 사건)를 보내 미국의 의심을 샀고, 경제 정책의 핵심인 5개년 계획을 실시할 때 미국의 정치가, 관료들에게서 사회주의적이란 비판을 받았다.존 F. 케네디와 후임인 린든 B. 존슨 시절에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과 파월 장병들의 활약으로 관계가 나아졌지만, 1968년 미국 대선에서 험프리 부통령이 낙선하고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당선되어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시사한 후 다시 양국 관계는 서먹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박정희 정부는 학생들을 동원해 반미 시위를 조작하기도 했다. # 또한, 박정희의 지시로 미국내에서 반 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대규모 회유, 매수 공작에 뇌물로 사용했다.
10.1. 10월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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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972년 10월 유신[17] 이후, '유신 독재'라고도 불리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에서의 박정희 집권 시기에는 코리아게이트, 인혁당 등의 사건으로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독재 행위를 중단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는 경고를 들으며 한미 동맹에 금이 가던 시기였다.
10.2. 코리아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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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를 통해 미국 내의 반 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통일교 신자들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동원, 미국 의원들을 뇌물로 매수한 사건이다.
결과론이지만 로비스트 박동선이 자금 대부분을 횡령하는 배달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게이트로 확산되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21세기인 지금도 미 상하원의 관련 위원회 인사들의 여행경비나 편의를 봐주는 식의 로비가 일본, 한국이 현지에 세운 기관을 통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일본은 아예 연구소 간판까지 걸고 노골적으로 친일 여론을 조성하고 있기 때문.
10.3. 프레이저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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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1. 한일 어업문제
1952년 1월 18일 제1공화국 당시 이승만은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통해, 우리의 독도와 일본의 오키도 사이에 '한일 두 나라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기 바란다'는 의미로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긋고, 외국 어선이 침범하는 것을 금지했다. # 우월한 장비를 갖춘 일본 어선이 일방적으로 동해를 휩쓸고 다녔던 당시 어업 실태를 감안할 때, 평화선 선포는 한국 어민들의 생존권과 어족을 보호하기 위해 유용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는 국제법상 문제가 많은 조치였고, 해안선으로부터 12해리까지가 영해인데 무려 20배가 넘는 해역이 대한민국의 영해라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많았다.1965년 한일기본조약의 부속협정이었던 한일어업협정에서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의 어업문제를 합의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기존의 평화선을 무시하고 한국 어민들만이 어로할 수 있는 전관수역을 12해리로 축소시켰다.
2.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하여 한국 연해어장이 일본과 공동소유임을 밝혔다.
3. '기국주의' 실시에 합의하였다.[18] 기국주의란 일본 어부들이 협정 이외의 수역에서 불법 어로작업을 하면 일본 정부가 자국법에 의하여 자국법정에서 재판하겠다는 것이다.
2.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하여 한국 연해어장이 일본과 공동소유임을 밝혔다.
3. '기국주의' 실시에 합의하였다.[18] 기국주의란 일본 어부들이 협정 이외의 수역에서 불법 어로작업을 하면 일본 정부가 자국법에 의하여 자국법정에서 재판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발표되자 가장 격렬하게 항의했던 사람들이 어민들이었다. 어민들은 기존 평화선 포기가 한국 어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2
12. 간도 프로젝트 주도
간도 영유권 연구를 주도하였다.기사1, 기사2
국회도서관에서 "간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자료를 1975년에 발간한 적이 있다. 주간경향에 의하면 국회의원장 정일권과 대통령 박정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1975년 정일권 국회의장이 쓴 머릿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타나 있다.
‘오두(吾頭)는 가단(可斷)이언정 국강(國疆)은 불가축(不可縮)’이란 불굴의 의지로 선인들이 지켜온 간도가 구한말에 이르러 우리의 국력 쇠퇴로 국권이 일제에 탈취된 상태에서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른바 1909년 간도협약으로 일제의 대륙 진출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한 안봉선 부설권의 흥정에 의하여 우리 강역에서 떨어져나가고 말았다는 사실은 통탄치 않을 수 없다.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은 간도 연구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의 당면 과업은 분단된 통일이지만 차원을 달리할 때는 통일 이후의 민족 진로도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통일이 성취되는 즉시 두만강북의 국경 문제는 중대한 외교 문제로 등장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다. 따라서 이 간도 문제에 관한 자료 수집과 정리 그리고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는 국가적인 중대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간도오딧세이 국회 간도자료집 아쉬운 ‘미완성’
‘오두(吾頭)는 가단(可斷)이언정 국강(國疆)은 불가축(不可縮)’이란 불굴의 의지로 선인들이 지켜온 간도가 구한말에 이르러 우리의 국력 쇠퇴로 국권이 일제에 탈취된 상태에서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른바 1909년 간도협약으로 일제의 대륙 진출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한 안봉선 부설권의 흥정에 의하여 우리 강역에서 떨어져나가고 말았다는 사실은 통탄치 않을 수 없다.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은 간도 연구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의 당면 과업은 분단된 통일이지만 차원을 달리할 때는 통일 이후의 민족 진로도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통일이 성취되는 즉시 두만강북의 국경 문제는 중대한 외교 문제로 등장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다. 따라서 이 간도 문제에 관한 자료 수집과 정리 그리고 이에 대한 철저한 연구는 국가적인 중대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간도오딧세이 국회 간도자료집 아쉬운 ‘미완성’
일제의 기밀문서 복사본이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미국 국회도서관에 보관돼 있음을 알게 된 강 박사는 미국 국회도서관의 협조를 얻으면 필름을 입수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에게 도움을 청한다. 정 의장은 다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필요한 예산을 배정받고 발간 사업을 추진한다.……국회도서관에 입수된 마이크로 필름은 모두 51책 분량으로 상당한 양이었다. 할당된 예산으로는 전체를 책으로 엮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자료의 발췌작업이 시작됐다. 발췌작업은 당시 통일원 기획관리실장이자 간도연구가로 알려져 있던 노계현 전 창원대 총장이 맡았다. 노 전 총장은 3개월 남짓 자료를 선별했다. 공문과 각종 자료에 제목을 달고 연대별-종류별로 분류해서 국회도서관에 다시 이관했다. 이런 정황은 정 의장이 쓴 자료집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정 의장은 자료집 발간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 예산을 배정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김용태 국회운영위원장도 "정부의 예비비에서 예산이 할애됐다"고 적고 있다. 노 전 총장은 "박 대통령이나 정 의장 모두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라 누구보다 간도 문제에 관심이 컸을 것"이라며 "하지만 단순히 최고통치권자의 관심 때문에 자료집이 발간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국가가 예산을 지원하고 국회 산하기관인 국회도서관이 발간 주체였다는 것은 이 사업이 국책 사업으로 추진됐음을 말해준다'''.
간도를 되찾자,30년 전 국회서 간도문제 다뤘다
간도를 되찾자,30년 전 국회서 간도문제 다뤘다
위처럼 이 사업은 박정희 정권이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또한 이 사업은 박정희 정권 시절엔 탄탄했는데 10.26 사건 이후 위축됐다고 한다.
간도는 1712년 백두산정계비에 의해서 우리 영토였는데 1909년 청-일 간도협약으로 빼앗긴 땅이기 때문에 간도협약은 무효이니 1712년 백두산정계비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영토전문가들은 주장한다. 즉 을사조약이 무효이니 간도협약도 무효라는 것이다. ... 백산학회가 창립되던 197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 아래 국회 차원의 간도자료집이 발간되고 정부와 기업의 후원으로 학회 운영이 탄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박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간도 프로젝트는 위축되고 열의가 식어갔으며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엔 그 '꿈'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고 한다.
아, 간도! 되찾아야 할 우리땅
아, 간도! 되찾아야 할 우리땅
[1] "월맹 지도자 호치민은 독립투사 이미지가 강한 인물이고, 근래의 베트남 역사를 감안하면 우리가 싸울 명분이 적습니다. 미국이 공식 파병 요청을 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2] 이렇게 했는데도, "타국에서 우리 젊은이들의 피를 뿌릴 수는 없다"는 강력한 명분을 내세우는 야당의 반발과 국민 여론이 거셌기 때문에, 결국 날치기로 파병안을 통과시키는 초강수를 두었다.[3] 미군들이 꺼리는 험지에 우리 장병들이 작전을 하게 될 위험이 있다. 실제로 지휘권 협상에서 발을 빼 미군의 지휘를 받은 해병대는, 월맹 정예들과 자주 맞부딪히며 눈부신 전과를 올렸지만, 그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4] 파병 전까지 강한 훈련으로 출중한 실력을 쌓은 해병대 측에서는, 오히려 험지를 마다않는 강한 전투의지를 보여 결국 미군 지휘하에 월맹군 정예들과 주로 맞붙게 되는 험로를 걷게 되었다.[5] 장면 정부 때 내무부 차관을 지낸 김영구의 증언을 토대로 배상금 50억 불은 일본이 지불할 생각이 있었다며 긍정적인 면이 없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반감이 강한 강준만 교수도 한국 현대사 산책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며 실현성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라고 지적했고, 당시 일본이 보유한 외환보유고가 16억 불에 불과하다는 점, 그리고 타국에 낸 전쟁 보상금의 규모로 미루어 봤을 때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GDP가 약 900억 불 정도니, 50억 불이면 GDP의 5.5%가 되는데, 우리나라 현재 국방비가 GDP의 약 2~3% 정도에 불과하다. 실제로 자민당의 우쓰노미야 의원은 오히려 너무 많다고 반대했다.[6] 식민지배가 3년밖에 되지 않는 필리핀보다 훨씬 적다며 식민 지배 기간이 짧았다고 그들이 당한 피해가 마냥 한국보다 적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대표적으로 필리핀의 경우 2차 대전 중 약 백만 명의 사망자를 냈고, 베트남 같은 경우 일본의 무자비한 약탈로 인해 기근으로 1~2백만 명이 죽었고, 인도네시아 역시 기근으로 약 240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7] 1961년 12월 이집트와의 영사관계 수립을 시작으로 이스라엘(1962년 4월), 요르단(1962년 7월), 모로코(1962년 9월), 사우디(1962년 10월), 이란(1962년 10월), 모리타니아(1963년 7월) 이때 중동 및 북아프리카 산유국들과 영사 관계가 수립되었다.[8] 당시 현대가 수주한 사우디의 아랍만 (걸프)에 인접한 도시 주바일의 초대형 항만 건설의 사업비는 당시 한국 세수 총액의 5분의 1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실패한다면, 국가조차 도산시킬 수 있는 대규모 사업이었고, 이 계약의 입찰을 위해 정부의 건설부 장관과 부총리까지 사우디 본국으로 파견될 정도였다.[9]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에 건설관으로 파견되었던 홍순칠 씨의 인터뷰 참고. #[10] 현대건설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중동에서 51억 달러가 넘는 외화를 벌어들였는데, 현대의 총매출 이익누계에서 해외건설이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또한 국가적 지원 속에서 중동 건설의 총 수주액은 1974년의 8,900만 달러에서 1975년에는 7억 5,100만 달러로 급격히 증가했고, 19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에 달했다.[11] 물론 당시 한국으로서는 엄청나게 큰 액수의 금액으로 상당한 힘이 되었다.[12] # 당시 삼원공업의 대표 이사로 중동건설 현장에서 일선하였던 안용환 명지대 명예교수의 성공요인 관련 인터뷰.[13] 이용철. (2014). 냉전기 한국의 지역협력외교 : 박정희의 국가건설구상과 ASPAC창설. 국가안보와 전략, 14(2), 131-162.[14] 아마 독도에 대해 논하는 문제였을 것이다.[15] 여기서 단어 irritating은 '짜증나게 하는', '거슬리는'이란 부정적 의미이지만, 이 문맥에서는 '복잡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란 문단의 함축적 표현이다.[16] 번역 그대로 따른 것.[17] 아이러니하게도 10월 유신의 국제적 추진배경으로 데탕트로 대표되는 미중화해가 있었으며, 자유세계는 유신의 단행을 사실상 방관하였다.[18] 공해상의 선박은 그 선박의 소속국, 곧 그 선박이 등록되고, 그 국기를 걸고 있는 나라만이 관할권을 가진다는 국제법상의 일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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