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00000><tablebgcolor=#000000> | 치바 롯데 마린즈 2026 시즌 코칭스태프 |
| {{{#!wiki style="margin: 0 -10px;" {{{#000000,#e5e5e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000000,#e5e5e5 | <colcolor=#cccccc,#323232> '''<1군> 71 코바야시 히로유키 · 74 이시미네 쇼타 76 에무라 나오야 · 77 니시오카 츠요시 80 마츠야마 히데아키 84 쿠로키 토모히로 87 네모토 슌이치 · 86 사부로 [[감독#s-1.1| ★ ]] 88 쿠리하라 켄타 · 90 미츠야마 히데카즈''' | |
| '''<2군> 70 후쿠우라 카즈야 [[감독#s-1.1| ★ ]] · 72 미키 료 73 카나자와 타케시 · 75 호리 코이치 78 오토나리 켄지 · 79 마츠나가 타카히로 81 미마 마나부 · 82 호소야 케이 83 모로즈미 켄지 · 85 미나미 마사키''' | ||
| <코디네이터> 타테야마 요시노리 · 카와이 타카시 야자와 다이치 · 코사카 마코토 |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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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츠야마 히데카즈의 역대 등번호 |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40번 | ||||
| 정진수 (2000~2002) | → | <colbgcolor=#000><colcolor=#fff> 김영화 (2003) | → | 강민호 (20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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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191919><colcolor=#ffffff> 치바 롯데 마린즈 No.90 | |
| 미츠야마 히데카즈 [ruby(光山, ruby=みつやま)] [ruby(英和, ruby=ひでかず)] | Hidekazu Mitsuyama | |
| 한국명 | 김영화 (金英和) |
| 출생 | 1965년 11월 20일 ([age(1965-11-20)]세) |
| 오사카부 오사카시 이쿠노구 | |
| 국적 | |
| 학력 | 우에노미야고등학교 |
| 신체 | 186cm, 100kg |
| 포지션 | 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프로입단 | 1983년 드래프트 4라운드 (킨테츠) 2003년 해외교포 입단 (롯데) |
| 소속팀 | 킨테츠 버팔로즈 (1984~1996) 주니치 드래곤즈 (1997~1999)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9~2000) 치바 롯데 마린즈 (2001)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002) 롯데 자이언츠 (2003) |
| 지도자 | NOMO 베이스볼 클럽[1] 코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배터리코치 (2011)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배터리·작전코치 (2012~2013)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1군 배터리코치 (2016~2018)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배터리·작전코치 (2019~2022) 치바 롯데 마린즈 1·2군 총괄 코디네이터 (2023~2025)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수석·배터리코치 (2026~) |
1. 개요
전 일본 프로야구 야구선수이자 현 치바 롯데 마린즈의 코치. 현역시절 노모 히데오의 전담포수로 활약했으나 노모의 퇴단 이후 저니맨 생활을 하다 은퇴하였다.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우에노미야고교시절 3학년때 1983년 봄고시엔에 출전해, 1차전에서 고난 고등학교를 꺾고 2차전으로 진출했지만, 메이토쿠 고교를 만나며 탈락했다.같은 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킨테츠 버팔로즈로 부터 4순위로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하게 되었다.
2.2.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 |
| 노모 히데오의 전담포수로 활약하던 시절 |
1984년부터 1985년까지는 2군에서 생활하였다.
1986년부터는 1군 포수였던 나시다 마사타카의 노쇠화 등도 있어, 야마시타 가즈히코나 후루쿠보 겐지와 함께 1군에 대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1989년은 시즌 초반 부상으로 인해 시즌 종반에 복귀하여, 시즌 최종전 10월 15일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 5타수 4안타를 기록하며 활약하였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시리즈 2차전에서 부상으로 교체된 야마시타를 대신출전해 2타수 2안타를 기록하였고 3차전에서는 선발로 출전해 정규시즌에서는 1개도 치지못한 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하였으나, 팀은 결국 준우승에 그치게 되었다.
1990년 사회인 야구에서 활약하던 노모 히데오가 입단하면서 노모의 전담포수가 되었다. 타격면에서도 커리어 유일의 두자릿수 홈런인 12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주전 포수가 되어 활약하였다. 한때 삼성 라이온즈에서 그의 영입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선수 자신이 거절했다.
1995년 1월 노모 히데오가 메이저리그 도전을 위해 퇴단하자, 마토야마 테츠야 등 젊은 선수들의 성정으로 인해 출전기회가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1996년 9월에는 타격 연습 중 타구에 맞아 오른발 약지가 부러지는 일도 생겼다.
2.3.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1997년 개막 직전인 3월 31일, 트레이드로 서브 포수가 부상으로 잇따르고 있던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였지만, 1군에는 나카무라 타케시와 야노 데루히로 2명이 고정되어 있어 1군에 출전할 기회는 적었다.2.4.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99년 시즌 도중 요미우리의 요시하라 고스케와 트레이드로 이적하게 되었다. 당시 요미우리는 주전 포수였던 무라타 신이치가 안면에 사구를 맞아 1군에서 이탈한 상태였는데, 요미우리는 경험이 풍부한 포수를 찾던 중 주니치에서 뛰고 있던 미츠야마를 트레이드로 영입하게 되었다.이적 후 바로 선발로 출전한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3타석모두 안타를 쳐냈다 하지만 2사만루 동점 상황에서 4번째 타석에 들어섰으나 제구가 흔들리고 있던 이가라시 료타가 던진 볼에 어이없게 스윙이 나가며 삼진을 당했고 요미우리는 연장전 승부끝에 패배하고 말았으며 미츠야마는 저타석 이후로 43타석 연속 무안타를 기록하며 타율이 한때 7푼까지 떨어졌었다.
2000년에는 베테랑 스기야마 나오키나 신인이었던 무라타 요시노리 등 다른 포수진이 호조였기 때문에 1군에 한번도 올라가지 못하며 시즌 종료 후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2.5.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
2001년 당시 부상자가 많았던 롯데는 경기중 수비강화를 위해 미츠야마를 영입하였다. 하지만 4월 1일 경기중 사구를 맞아 오른발 엄지발가락이 골절되면서 1군에서 이탈하게 되었고 이 해 출전은 6경기에 그치며 시즌 종료 후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오프시즌에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그 외에도 멕시칸 리그에도 참가했었다.
2.6.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002년 3월 15일, 포수의 부상이 잇따르고 있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입단을 하여 3번째 포수로 기대되었지만, 8경기 출전에 그치며 3번째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2.7. 롯데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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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시즌 후 요코하마에서 방출당한 뒤 원래는 은퇴할 예정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입단 제안을 받고 은퇴 의사를 철회, 연봉 1,500만엔(약 1억 4,500만원)에 계약을 맺고 한국으로 왔다. 당시 롯데 감독이던 백인천의 제안으로 한국 롯데에서 뛸 수 있었던 것.[2]
사실 롯데는 미츠야마를 코치로 영입하려고 했지만, 코치로써 줄 수 있는 연봉에 한계가 있던 데다 겸사겸사 백업 포수로 써먹기 위해 선수 신분으로 전환해 계약했다. 재일 한국-조선인 3세였던 미츠야마의 KBO 등록명은 한국식 이름인 김영화(金英和)로 결정하였다.
백인천 감독은 2003년 스프링캠프 중 미츠야마를 향해 상대방 투수의 쿠세를 잘 읽어낸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재일교포였지만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투수와 의사소통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팀 전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여기에 많은 나이 탓인지 부상까지 겹치며 시즌 초반 잠깐 1군에서 모습을 보여준 걸 끝으로 2군으로 내려간 뒤 조기 퇴출당했다. 2003 시즌 당시 성적은 7경기 9타수 1안타 1홈런 타율 .111를 기록하였다. 당시 롯데 암흑기의 절정이었던 시절에 잠시 뛰다 간 선수였고 프로야구가 한창 인기가 없던 시절이다 보니[3] 골수 롯데 팬 아니면 이 선수가 한국에서 뛰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을 정도로 존재감조차 희미한 편.
3. 현역 은퇴 후
은퇴 후에는 한동안 야구와 거리를 두고 지냈다. 지인이 운영하는 술집에서 근무하면서 나중에는 음식점도 경영하는 등 개인 사업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자가 GAORA 야구 해설을 겸임하면서 야구 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4. 지도자 경력
2011년부터 세이부 라이온즈 1군 배터리코치로 취임하며 현장으로 돌아왔다. 이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배터리코치로 일했고, 요코하마 코치 시절 당시 감독이었던 알렉스 라미레즈한테 "마이 베스트 코치" 라는 호평을 받았다. 코치 시절 토바시라 야스타카를 주전포수로 키워냈다.2019년부터 이시이 가즈히사 감독의 제안을 받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배터리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라쿠텐이 B클래스를 확정한 2022년 9월 29일, 이시이 가즈히사 감독이 자진 사퇴하면서 미츠야마도 같이 퇴단하게 되었다.
2023년부터는 치바 롯데 마린즈의 총괄 코디네이터가 됐다. 2026 시즌부터 1군 수석코치 겸 배터리코치를 맡는다.
5. 여담
- 재일 한국-조선인 3세다. 다만 상술했듯 한국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고.
- KBO 리그 기준 역대 최고령 포수 데뷔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2003년 4월 5일 만 37세 4개월 7일로 최고령 기록을 세운 것. 이후 2021년 5월 8일, 데뷔 후 처음으로 포수로 출장한 이대호가 만 38세 10개월 17일로 기록을 경신하며 김영화의 이름이 재조명받기도 했다.
6. 관련 문서
[1] 일본과 미국에서 활약한 노모 히데오가 2003년 창단한 사회인 야구 팀이다.[2] 한편 롯데는 백인천 감독의 요청으로 2003 시즌 외국인 선수 역시 일본 쪽에 경력이 있는 선수들로 뽑았다. 일본인 투수 모리 가즈마와 직전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외국인 선수로 뛰었던 외야수 보이 로드리게스를 영입한 것. 그런데 모리는 시범경기에서 기량 미달의 모습을 보여준 채 시즌 개막도 하기 전에 퇴출당했고, 보이는 시즌 개막 직후 7경기만 뛰고 웨이버 공시당했다. 이는 미츠야마(김영화)와 함께 롯데 암흑기 시절 흑역사 중 하나다.[3] 실제로 롯데 암흑기의 절정이던 2002~2003년 당시 사직 야구장은 주말 경기에도 텅텅 비어있는 날이 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