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24 15:00:12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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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할힌골 전투3. 임팔 작전
3.1. 테니스 코트의 전투3.2. 후퇴 작전3.3. 옥쇄금지!
4. 종전까지5. 전후6. 평가

1. 개요

宮崎繁三郎
1892, 일본 제국 기후현 기후시~1965, 도쿄도 세타가야구

일본 육군 장성. 최종 계급 중장.

임팔작전 당시 총 지휘관 무타구치 렌야의 방침에 항명을 했던 사토 고토쿠와 마찬가지로 파격적인 조치를 내렸던 인물.

2. 할힌골 전투

할힌골 전투에서 전투 막바지 증원군으로 파견된 제2사단 16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게오르기 주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의 대공세로 시게사부로의 부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맡은 지역을 잘 지켜내었다. 시게사부로는 주둔지에 널부러진 바위에 자기 부대의 이름을 파놓았는데, 이는 만주-몽고 국경을 확정할 적에 일본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3. 임팔 작전

3.1. 테니스 코트의 전투

사토 고토쿠 중장 휘하 임팔 작전의 최우익을 담당한 제31사단의 임무는 2가지였다. 코히마의 점령과 임팔로의 증원군 저지이다. 코히마는 인도 아삼주의 수도 디마푸르과 친스키아 방면에서 오는 도로가 합쳐져 임팔로 향하는 요지로 따라서 코히마를 점령하는 것은 임팔로의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제31사단이 친드윈 강을 건넌 것은 3월 15일이었다. 당시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은 31사단 58연대를 주축으로 하는 임시 독립보병단의 지휘관으로, 31사단 본대와 나뉘어 진격하기로 되어있었다. 4천명의 미야자키 보병단이 아라칸 산맥으로 접어들었을 때 그는 병사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서방정토로 가는 길이니 염불을 외며 산을 오르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의 명령에 미야자키 보병단은 염불을 외며 무사히 아라칸 산맥을 넘었다.[1]

미야자키 보병단이 코히마 외곽에 도달한 것은 4월 5일이었다. 여기서 휴식한 미야자키 보병단은 6일 새벽 4시 반에 코히마를 기습하였고 코히마를 지키던 영국군은 자신들의 계산보다 2주일이나 빨리 일본군이 나타난 것에 당황하여 코히마의 주둔지를 포기하고 부근의 고지로 철수했다. 이때 미야자키 단장은 매우 뛰어난 통찰력과 융통성을 보여주는데, 보급이란 적에게서 얻는거라고 떠들어대는 총책임자 무다구치 렌야가 들어 앉은 15군 사령부가 결국 총알 한발, 쌀 한톨 보내주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서는 부대 내의 모든 제식화기를 폐기하고 부대원들을 노획한 적성화기로 재무장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일반적인 경우 적성병기는 지속적으로 적군의 물자를 노획하지 않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므로 집단으로 이를 사용하는 것은 비상식적이지만, 당시에는 무다구치 렌야가 보급품을 보내줄 생각 자체를 안했으므로 차라리 영국군 탄약을 노획할 가능성이 더 높았던 것이다. 작전 중에 적전에서 천황 폐하의 하사품인 제식장비를 유기하는 것은 당시 일본군의 기준으로도 중죄였지만, 정작 사령관 무다구치 렌야가 작전 중에 적전에서 병참을 끊는 희대의 병신짓을 하고 있었다 보니 그렇게 해서라도 공격명령을 수행하는게 오히려 나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테니스장 양 끝에 서로 참호를 파고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수류탄 던지기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투는 일본군이 캐망한 임팔 작전에서 그나마 벌여본 전투다운 전투였다.

결국 압도적인 영국군의 화력에 부대는 밀려버렸고 공방전 열흘 만에 일본군은 절반으로 줄었고 식량도 다 떨어졌다. 일본군은 이제 영국군의 수송기가 뿌리는 보급품이 자기네들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미야자키 보병단의 병력은 5월이 되자 원래의 1/4로 감소했고, 굶주림과 백병전으로 전멸해버린 중대가 3개나 되었다.

3.2. 후퇴 작전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은 임팔 작전에서 일본군이 겪는 비참한 실상에 분노했다. 그는 보급이 전혀 오지 않는 상황에서 15군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의 독단적이고 비현실적인 돌격 명령에 따른다면 휘하 병력이 이역만리에서 모조리 불귀의 객이 된다고 판단하고, 상부를 무시한 채로 단독으로 사단 후퇴를 결정했다. 사토 사단장이 후퇴하는 31사단의 후미 엄호[2]를 위해 라즈라 방면에서 선전하던 미야자키 보병단을 선정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미야자키 보병단은 5월에 이미 원래의 병력의 1/4 수준에 불과했고 후퇴를 결행할 당시에는 4천 명에 달하는 연대 병력이 600명으로 줄어 있었다.
미야지키 보병단은 말이 후방엄호지 사실상 스테가마리를 시전하며 명예롭게 전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보병단이라고 할 수도 없는 초라한 규모의 미야자키 지대에게 남겨진 장비는 사단에서 쓰는 대전차포 몇 문이 전부일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당시 미야자키 지대가 막아야 하는 영국군은 슬림 중장이 이끄는, 4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사단으로 구성된 14군이었다. 제공권마저 빼앗겼기 때문에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악재 속에서 미야자키 소장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3.3. 옥쇄금지!

이러한 극단적인 열세 상황에서 미야자키 지대장이 내린 명령은 바로 "옥쇄하지 말 것!"이었다. 보통 이러한 상황이라면 장렬하게 전사해서 가족의 명예라도 드높이자는 전근대 무사도에 물들어있던 여느 일본군 지휘관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던 것이다.

미야자키 지대는 수목에 시야가 차단되는 밀림지대의 특성을 이용, 우선 일부러 영국군의 주기동로상에 주방어거점을 만들어 영국군이 방어거점 양쪽을 포위하도록 유도했다. 밀림에서의 양익포위는 생각보다 많은 전력과 시간의 소모를 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번 미야자키 지대는 미리 후방에 다른 진지를 만들고 완전포위되기 직전에 다음 진지로 이동하는 식으로 지연전을 펼쳤다.
거기에 정글 밀림 곳곳에 취사를 하는 것처럼 연기를 피워 영국군이 병력의 규모를 착각하게 만들고, 여전히 다수의 일본군이 집요한 저항을 계속한다고 믿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결국 영국군은 미야자키 지대의 기만술에 속아서 혹시 어딘가에 매복해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군을 찾아 밀림을 일일이 수색하면서 전진하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했고 지대는 밤만 되면 영국군의 보급 거점을 기습하여 식량과 무기와 탄약을 탈취했다. 덕분에 그들은 영국제 레이션으로 배를 채우고, 영국제 무기로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다.

한편 미야자키 지대를 잡기 위해 영국군은 공군의 지원하에 맹공을 퍼부었지만 매번 피습과 심층수색을 반복하느라 전전긍긍했고 사상자가 무려 1260명이 넘게 발생했다. 600명에 불과했던 미야자키 부대는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린 셈이었다. 뒤늦게 일본군의 실제 병력이 극소수라는 점을 깨달은 영국군이 일본군을 따라다니는 전술 대신 주기동로를 화력으로 돌파하는 전술을 채택하면서 결국 영국군과 일본 15군의 거리는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 15군은 퇴각에 성공한 이후였다. 이후 미야자키 지대는 영국군의 저지선을 돌파하여 대부분의 지대 병력을 유지한 채 곳곳에 남겨진 부상병들과 31사단, 15군의 낙오병마저 수습하면서 복귀에 성공했고, 이 전공 덕에 미야자키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임팔 작전 당시 연합군의 피해는 사상자 1만 7500명이다. 적 전체 피해의 최소 7.2%, 최대 10%를 고작 600명으로 낸 것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전력 열세 하에서.

여기서 14군 사령관 윌리엄 슬림 중장이 교체되었다고 일부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루머이다. 윌리엄 슬림 중장의 행적을 살펴보면 경질은커녕 임팔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그 후 동남아시아 연합부대 사령관 자리에 올라 태평양 전쟁 내내 버마-인도 방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공을 거둬 최종적으로 육군 원수까지 진급하였다. 전후에는 (우리나라의 육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제국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호주 총독 등을 역임하는 등 몽고메리 못지 않은 전쟁영웅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전쟁 초기 패퇴를 거듭하던 버마-인도 방면의 영국군을 성공적으로 재정비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었고, 실제로 1942년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도-버마 전선에서 활약했다. 결과론적으로만 보면야 슬림 중장이 속아서 시간을 낭비한 것이지만, 영국군 입장에서는 정글전에서 적의 웅거와 매복에 신중하게 대처함은 오히려 상식적인 조치였으므로 슬림 중장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슬림이 교체되었다는 낭설은 전쟁 말기 그의 전공을 시기했던 상관 올리버 리즈 장군이 슬림을 말레이로 진격하기로 되어 있던 14군에서 후방 주둔인 12군 사령관으로 교체하려고 했던 사건이 와전된 것이다. 이후 오히려 리즈가 해임되었고, 슬림이 진급하여 리즈의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4. 종전까지

임팔 작전 후에 제54사단장으로 영전한 미야자키는 버마방면군 소속으로 1945년 4월에 이라와디 강 하류 부근에서 방위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달 말에 그 유명한 기무라 헤이타로 방면군 사령관이 겁을 먹고 국경지대로 도주하는 바람에 정보가 끊긴 54사단은 적 한가운데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포위섬멸의 위기 속에서 중장비는 포기하고 소규모로 부대를 나눠 적진을 돌파, 이라와디강 지역 베그 산맥의 대나무 숲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분산 돌파 이후 압도적인 병력 차이 때문에 하급부대가 모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진데다, 여전히 보급도 받지 못하고 상급부대와 연락도 끊긴 54사단은 전군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게 아래에 나올, 미야자키가 죽기 직전에 외친 말의 배경이 된 사태이다. 7월 하순에 다시 병력을 분산하여 적진 돌파를 강행했지만 장병 대다수가 사망, 목적지였던 싯탄 강까지 도착한 인원은 반수 이하였다. 미야자키는 싯탄강을 도하하지 않고 끈질기게 방위전을 계속하던 와중에 종전을 맞았다.

5. 전후

전쟁이 끝난 뒤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는 2년 이상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서 생활하였다. 시게사부로는 수용소에서 부하가 받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 항의하는 등 지휘관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 후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자 시게사부로는 도쿄 근교의 소도시에 그릇 가게를 차려 생계를 이어갔다.

1965년 8월 30일 향년 73세로 사망했는데,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적중 돌파로 분리한 부대를 확실히 장악했나!" 라고 연신 외치고 숨을 거뒀다고 한다. 이 말은 54사단장 시절 사단병력을 소규모 분산돌파로 싯탄강까지 철수시키던 와중에 베그산 근방에서 고립되어 몰살당한 부하 장병들을 평생 마음에 두고 살았던 까닭에 나온 것이다. 어찌 보면 죽을 때까지 PTSD를 앓은 셈이다.

맡은 바의 일을 잘 수행하였던 훌륭한 군인이 저 세상으로 가던 날 옛 상관이었던 무타구치 렌야임팔 작전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찌라시를 돌렸다. 이에 유가족과 조문객은 이 저주받을 불청객을 폭언과 멱살잡이로 맞아주었다.

6. 평가

비록 전적 자체는 크게 남기지 못했지만 당시 일본군 내에서 손꼽히게 유능한 명장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임팔 전투 당시 사토 고토쿠 같은 범장들이 도저히 작전수행이 불가능해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를 상대로 항명을 선언했다가 정신병 판정을 받은 것에 비해, 그 무타구치 렌야의 '보급은 적에게서 구하라' '공격하라'라는 지령 자체는 훌륭하게 수행했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소수의 분견대를 지휘해서 영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므로 작전이 실패했는데도 오히려 중장으로 진급했는데, 상술한 염불독송 작전이라던지 임팔 전투 중간에 무타구치 렌야가 후방 보급을 끊을 것임을 귀신같이 통찰했다거나 밀림을 최대한 활용해 끝도 없이 적군을 괴롭힌 점을 보면 일본 제국 육군대학이 배출한 군계일학의 천재라고 봐도 손색이 없다. 전쟁사에서도 발상의 전환을 아무나 해내는 것은 아니니.

물론 일본군의 배짱 좋고 재능 출중한 인재라면 기무라 마사토미도 있었지만, 귀찮은 걸 싫어했던 기무라 마사토미와 달리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는 이에 더해 부지런한 데다 덕망까지 출중했다. 임팔 퇴각전에서 미야자키 지대장은 진지 구축 작업과 최전선 전투 현장을 직접 챙기며 부하들과 늘 함께했고 항상 선두에 서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모범적인 지휘관의 모습을 보였다. 무모한 작전과 반자이 돌격으로 많은 장병들을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게 만든 대다수 일본군 지휘관들과 달리 반자이 돌격이나 옥쇄 같은 자살행위를 금하였으며 항상 부하들과 함께하며 한 명의 부하라도 살려서 돌아가려고 최선을 다했다. 세상을 뜨기 전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54사단 부하들을 구해야 한다는 말이었을 정도였으니 이 사람이 얼마나 부하들을 아끼는 상관이자 군인인지 알 수 있다.

그와 별개로 상관 복이 지지리도 없다. 임팔 작전 때는 무타구치 렌야라는 희대의 무능 상사에게 걸려서 임팔에서 자신도 무지막지하게 고생하다가 겨우겨우 돌아왔고, 이후 부임한 기무라 헤이타로는 적이 온다니까 탈영해버려서 상황이 꼬여 부하들과 함께 급히 도망치다가 모두 흩어져서 궤멸당하는 참극까지 겪었다. 심지어 임팔 당시 상사인 무타구치는 자기 장례식 때 고인드립까지 쳤다. 물론 당시 일본군에서 미야자키 같은 신세의 장교들은 매우 많았지만, 이 인간은 관련자의 에피소드가 하나같이 가관이다 보니 눈에 띄는 편이다.


[1] 메이지 유신 조차 일본인들에게서 천년이 넘는 신토와 습합불교의 전통을 없애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 모든 것이 낯설고 뭐를 맞닥뜨릴지 모르는 이역만리에서의 산행이 성지순례가 되는 셈이니까.[2] 일본은 전국시대부터 이런 부대를 신가리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