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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마흔 선언

20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서아시아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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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916년 1917년 1920년
후세인-맥마흔 서한 사이크스-피코 밀약 밸푸어 선언 세브르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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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참고문헌4. 관련 문서

1. 개요

McMahon Decla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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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리프 후세인과 맥마흔

1차 세계대전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 헨리 맥마흔[1]이 아랍 민족이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국 측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전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아랍국가의 독립과 후세인 빈 알리 지도하에 아랍 칼리프제 구축을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아랍 반란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전후 영국, 프랑스는 통합된 아랍 국가 설립 약속을 저버리고 사이크스-피코 밀약을 통해 아랍 지역을 반으로 나누어 위임 통치령을 세웠다. 이러한 배신은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중동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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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갈등이 시작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20세기 초 여러 국가에서 모인 6,000만 명의 군인이 싸운 제1차 세계대전이다. 팔레스타인은 당시 오스만 제국으로 불리던 오스만 제국의 지방이었다. 튀르키예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와 같은 편에 서서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오스만 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모두 직접 관리하지 못했고, 20세기 들어서는 튀르크 민족주의가 발동하며 아랍 지역의 소외가 더욱 심해졌다. 오스만 제국의 그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이 당시 메카의 군주이자 하심 가문 아미르인 후세인 빈 알리 (샤리프 후세인)에게 비밀협상을 제안했다. 영국은 후세인 빈 알리에게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국가지역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그 전에 후세인이 오스만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 경이 그런 내용을 담은 서신을 후세인 빈 알리와 주고받았다. 이 서신들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불린다.

후세인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져 있는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후세인 빈 알리를 도왔다.[2] 그러나 영국과 후세인의 약속은 애초에 지켜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후세인 빈 알리는 스스로를 '아라비아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실효성이 없었다. 영국 역시 그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프랑스 역시 영국이 현지인들에게 무슨 약속을 했건 자신에게 알바 아닌 문제였으며, 영국 역시 프랑스의 전후 요구를 막을 명분도 힘도 없었다. 이 협상을 맡은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 찰스 조르지 피코와 영국 정부에서 파견한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을 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 [3]

한국에선 맥마흔 선언 vs 밸푸어 선언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후세인- 맥마흔 서한이 무시된 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다. 벨푸어 선언은 전체 아랍 지역이 아닌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한된 내용이고, 맥마흔 선언과 사이크스 피코 협정이 아랍 전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랍인들의 입장과는 전혀 무관하게 진행된 외교전이었고, 샤리프 후세인의 거병을 유도하기 위한 거짓 약속이었지만 힘이 곧 정의였던 제국주의 시기에 아랍인들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일례로 전후 시리아에서 하심 왕가인 파이살 1세를 군주로 하는 시리아 왕국이 세워졌지만, 1920년 프랑스 군이 침공해 무력으로 무너뜨린 후 위임통치령으로 삼아 지배했다. 하심 왕가가 왕국이 허가된 것은 영국 영향력 하의 요르단과 이라크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1940년대 중반까지 국방권과 외교권은 영국에 있는 허울 뿐인 독립이었다. 더군다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헤자즈 왕국은 영국의 벨푸어 선언 지지 요구를 거부했다가 밉보여 결국 네지드 왕국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90쪽.

3. 참고문헌

  •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갈등이 시작된 중요한 사건은 20세기 초 여러 국가에서 모인 6,000만 명의 군인이 싸운 1차 세계대전이다. 팔레스타인은 당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군주 오스만의 이름을 따 오스만 제국으로 불리던 터키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다. 터키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와 같은 편에 서서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터키의 지방 군주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부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각자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그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이 당시 메카의 군주였던 후세인 빈 알리에게 비밀협상을 제안했다. (중략) 영국의 제안은 당시 메카의 군주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영국은 후세인에게 팔레스타인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대신 그 전에 후세인이 오스만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 경이 그런 내용을 담은 서신을 후세인 빈 알리와 주고받았다. 후세인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애드워드 로렌스가 그를 도왔다.
13쪽, 15쪽
이 서신들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불린다. 아랍 민족이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국 측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전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아랍국가의 독립과 후세인 지도하에 아랍 칼리프제 구축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13쪽
그러나 영국은 약속과 달리 거대 왕국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후세인 빈 알리는 실망했다. 그는 스스로를 '아라비아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서양에서는 그를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지방인 헤자즈의 군주로만 인정했을 뿐이다.
당시 반란을 도모한 후세인은 영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비밀협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오스만 제국을 그곳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토를 분할해 두 나라가 나눠 갖기로 합의를 했다. 이 협정은 협상을 맡은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 찰스 조르지 피코와 영국 정부에서 파견한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을 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
이러한 비밀협정에 대해 팔레스타인들 대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15쪽

4. 관련 문서



[1] 맥마흔 라인도 이 양반 작품이다.[2]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3쪽 15쪽[3]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