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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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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술탄국
سلطنة المماليك | Salṭanat al-Mamālīk
튀르크국 / 체르케스국[1]
파일:맘루크 술탄국 국기.svg 파일:Coat_of_arms_of_the_Mamluk_Sultan_of_Egypt.svg
국기 국장[2]
<nopad> 파일:맘루크 술탄국_지도.jpg
서기 13세기경의 최대 강역
1250 ~ 1517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아이유브 왕조 오스만 제국
위치 이집트, 서아시아, 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
수도 카이로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군사정권
선거군주제
국가원수 술탄
주요 군주 이즈 앗 딘 아이바크
바이바르스
앗 나시르 무함마드
바르스베이
카이트베이
칸수 알 구리
투만베이 2세
면적 1,564,220km²
인구 6,800,000명~7,300,000명
민족 이집트인
아랍인
튀르크인
유대인
체르케스인
언어 아랍어
튀르크어
콥트어
체르케스어
종교 이슬람 수니파
통화 디나르

1. 개요2. 역사3. 정치4. 군사5. 경제
5.1. 이크타 제도5.2. 농업과 무역5.3. 경제적 번영
6. 종교
6.1. 수니파의 발전6.2. 기독교도들에 대한 차별
7. 문화
7.1. 건축
7.1.1. 장식7.1.2. 미나레트7.1.3. 돔7.1.4. 입구7.1.5. 아파트 단지
8. 언어9. 문양10. 여담11. 역대 군주12. 역사보기 틀

1. 개요

아이유브 왕조의 뒤를 이어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시리아이집트를 통치한 이슬람 제국.

해방노예 출신인 맘루크들이 아이유브 왕조를 뒤엎고 세운 왕조다. 술탄 바이바르스와 술탄 칼라운의 통치 하에 9세기 이후 알레포, 다마스쿠스 등 지방 왕조들과 일 칸국, 십자군, 어쌔신 등 외세로 점철되었던 시리아를 완전히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십자군과 몽골의 침공이 모두 잦아든 14세기 초반부터 도시 문화와 제조업, 상업이 융성해졌고, 특히 1310년 즉위[3]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장기 집권 하에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당대 카이로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거대한 도시들 중 하나였으며[4] 이집트의 부유함은 이때 그 정점을 찍었다.[5] 그러나 앗 나시르 무함마드 사후의 권력 투쟁과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로 점차 쇠락하기 시작한다.

재정이 고갈 직전에 이르자 술탄 바르스베이가 대유럽 무역독점과 세금 강제징수를 통해 난국을 타개하려 했지만 침체는 계속 이어졌다. 그나마 15세기 후반 술탄 카이트베이[6]의 안정적인 통치하에 힘을 회복하여 킬리키아를 두고 벌어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중흥기를 맞았지만 16세기에 들어 대항해시대를 맞은 포르투갈의 인도양 무역 잠식으로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7] 술탄 칸수 알 구리의 강압적인 재정정책과 군제개혁은 왕조의 쇠퇴를 막지 못했고, 결국 1516년 신무기와 근대적 군대를 앞세운 오스만 술탄 셀림 1세에게 정복당하며 멸망했다.[8]

십자군몽골 제국 등 외세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맞섰고, 형식적이긴 했지만 아바스 칼리파를 다시 옹립하여 기존의 이슬람 문화를 보전했다. 비록 맘루크 왕조의 지배계층은 체르케스인, 튀르크계 노예 군인이었지만 튀르크계 유목 전사들이 득세한 당시 페르시아-튀르크 문화가 발달했던 중동의 여타 제국과는 달리 아랍어와 아랍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킨 역사적 의의가 있다. 비록 술탄의 평균 재위 기간이 6년에 그칠 정도로 권력 투쟁이 심했지만 일본막부처럼 지극히 내부 다툼이었기에 민중의 삶을 크게 악화시키지는 않았다.

2. 역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맘루크 왕조/역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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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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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맘루크 왕조/역사#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맘루크 왕조/역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정치

3.1. 술탄

파일:Mihrab_(marking_the_direction_of_the_Kaaba_in_Mecca)_-_Madrasa_of_Sultan_al-Zahir_Barquq_(14803204015).jpg
술탄 바르쿠크의 모스크-마드라사 내부의 미흐랍
맘루크 왕조에서 술탄은 최고 통치권자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녔지만,[9] 카이로 등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의 통치권은 '누와브 알 술타나', 즉 술탄의 대리인인 총독들에게 있었다. 개중 이집트 총독이 가장 지위가 높았고 그 다음으로 다마스쿠스, 알레포, 카라크, 사페드, 트리폴리, 홈스, 하마 순대로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 특히 하마에서는 예외적으로 1341년까지 옛 아이유브 왕조의 후예들이 도시를 다스렸고 인기가 높았던 총독 아불 피다는 앗 나시르 무함마드에게서 술탄 칭호를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마를 제외한 도시들의 총독은 거의 맘루크 출신이었다.

맘루크 왕조는 장자상속이나 세습이 아닌 가장 실력있는 자가 술탄이 되는 식이었다. 새로운 술탄을 선출할 때에는 주로 아미르와 맘루크들의 회의에서 술탄을 선출한 뒤 충성 서약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술탄은 '알 말리크'라는 왕호를 정하고 카이로 시내를 대규모 행진한 뒤 마지막으로 금요일 예배 '쿠트바'에서 술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림으로써 즉위식이 완료되는 식이었다. 다만 교황 선출과정마냥 법적, 제도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고 선출권자들의 자격도 명확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맘루크 정치파벌들의 치열한 권력다툼으로 차기 술탄이 좌우됐고 라이벌 파벌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일도 빈번했다.

물론 아예 세습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부분적으로 세습왕조의 모습을 띠기도 했는데, 바흐리 왕조 시기 바이바르스의 아들 바라카와 살라미시가 차례로 술탄직을 계승했고 이후 칼라운이 왕위를 탈취한 뒤에는 무려 4대에 걸쳐 직계계승이 이루어졌다. 반면 부르지 왕조 때에는 직계계승은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모든 술탄들이 부르지 왕조의 창건자 바르쿠크와 혈연 혹은 같은 맘루크 파벌로 엮여있었다. 이렇게 친족 계승이 이뤄지는 경우는 보통 바이바르스, 칼라운, 앗 나시르 무함마드, 바르쿠크 같은 강력한 술탄이 죽기 직전 유언으로 지정해놓는 식이었는데, 정작 아들이 아버지의 능력을 못따라가는 경우가 많아 즉위하고서 꼭두각시가 되거나 쫒겨나는 경우도 흔했다.

루이 14세 시절 프랑스 왕국 등은 왕권신수설을 도입해 왕가의 혈통 자체를 신성화했지만 맘루크 왕조는 그 정반대였다. 지방 영주들과 맘루크들은 술탄을 본인들과 동등한 신분의 동료이자 보호자 정도로만 인식했고, 만약 술탄이 만족할만한 부나 특권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당장에 폭동이나 쿠데타, 명령 지연 등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맘루크들 사이에서는 '쿠쉬다시야'라고 해서 노예 시절 같은 주인 '우스타드'를 섬기던 무리들끼리 공유하던 관계망이 있었다. 쉽게말하면 맘루크판 지연이었다. 이 쿠쉬다시야 제도는 맘루크들의 기반이자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핵심이었는데, 술탄 역시 같은 쿠쉬다시야를 공유하는 맘루크들을 중용했다. 하지만 이 쿠쉬다시야는 술탄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맘루크들의 1차적 충성 대상이 술탄이 아닌 옛 주인 우스타드였기 때문이다.[10] 게다가 술탄의 쿠쉬다시야에 속한 맘루크나 영주들도 반란을 일으키곤 했는데, 특히 시리아의 영주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 정도가 심했다. 맘루크 술탄의 권력은 평시에 약해졌고 전시에 강해졌다.

술탄은 군사와 행정, 종교를 모두 담당했다. 법령의 제정과 시행, 개전, 전쟁세 부과, 자원 분배, 판결 및 사법권까지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다. 게다가 무슬림이 평생에 한 번씩은 행해야하는 성지순례의 경우, 카이로다마스쿠스에서 출발하는 순례단의 총책임자 역시 술탄(대부분의 경우 그 대리인)이었다. 술탄 칼라운 때부터는 매년 메카카바 신전을 덮는 천 '키스와'를 독점적으로 제작공급할 권리를 새로 얻어냈고 예루살렘바위의 돔도 후원하는 등 종교적으로도 매우 강력한 권한을 가졌다.

3.2. 아바스 칼리파와의 관계

맘루크 왕조는 통치의 정당성 강화를 위해 아바스 칼리파를 끌어들였다. 1258년 몽골 제국에게 털려버린 바그다드에서 도망친 아바스 가문의 후계자들을 꼭두각시 칼리파로 옹립한 뒤 이슬람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것이다. 술탄 바이바르스는 1262년 알 무스탄시르 2세를 새 칼리파로 옹립해 칼리파위를 재건했고, 알 무스탄시르 2세가 몽골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이번에는 알 하킴 1세카이로에서 옹립해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 칼리파들은 이집트, 시리아, 자지라, 디야르바크르, 헤자즈, 예멘의 명목상 통치권을 맘루크에게 부여하는 권위의 원천이었다.

아바스 칼리파들은 200여년 동안이나 카이로에서 머무르며 대를 이어갔지만 실권은 아예 없었다. 1412년 칼리파 알 무스타인이 잠시 술탄으로 즉위한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고 그마저도 얼마 못가서 쫒겨났다. 술탄 라긴의 재위기 때 반란이 일어나자 라긴은 칼리파의 칙서를 제시하며 항복을 요구했지만, 정작 반란군들은 이제 누가 칼리파의 말을 신경이나 쓰는가?'라며 비웃을 정도였다. 실제로 칼리파의 실권 부활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집트의 첫 아바스 칼리파였던 알 무스탄시르 2세가 몽골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이유도 진짜로 칼리파가 바그다드를 되찾아버리면 술탄에게 반항할까봐 우려한 바이바르스가 지원을 대폭 줄여버린 탓이 컸다.

하지만 아바스 칼리파의 권위는 여전히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잘라이르 왕조의 아흐마드, 오스만 술탄국바예지드 1세는 물론이고 심지어 저멀리 북인도의 델리 술탄국마저 아바스 칼리파에게서 통치권 인준문서를 받거나 형식적인 충성을 표했다. 오스만의 무라드 1세는 칼리파를 자칭했지만 대부분의 무슬림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했고 여전히 수니파의 보편 칼리파는 카이로의 아바스 칼리파였다. 그러나 15세기 들어서 칼리파의 권위는 급격히 쇠퇴했고, 칼리파는 그나마 남아있던 권위도 사라진 채 큰 행사가 있을 때 술탄을 빛내주는 훌륭한 악세사리 수준으로 전락했다. 오스만 제국이 1517년 알 무타와킬 3세에게서 칼리파위 선양을 받으며 칼리파직은 셀림 1세에게 넘어간다.

4.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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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년 말을 타는 맘루크들
맘루크 술탄들은 모두 군사 계급 출신들로, 이집트에서 군사 엘리트 계급에 진입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맘루크 출신으로 제한됐다. 맘루크의 아들들, 즉 맘루크 2세대 '아울라드 앗나스'(awlad al-nas)도 군에 들어가 높은 지위에 오를 수는 있었지만 신분의 벽은 분명히 존재했고 대부분은 군사 대신 상업, 학문, 행정 등 민간 분야에서 활동했다.

맘루크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해방되어 더이상 노예가 아니었지만, 모두 과거에는 노예 출신이었다. 맘루크들은 모조리 다르 알하르브(Dar al-harb, 비이슬람 지역)출신의 비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노예시장에 팔려온 이들로. 이집트나 시리아로 끌려온 후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군사 학교 겸 병영에서 훈련받으며 성장했다. 가족 없이 자라났기에 자연스럽게 술탄을 아버지로, 동료 맘루크들을 형제처럼 여기도록 교육받았다. 훈련을 마친 뒤에는 카르즈(kharj)라는 해방 의식을 통해 자유 신분을 얻었고, 이후 궁정 행정직이나 군대에 배속되어 독립된 병사로 경력을 시작했다.

맘루크 병사들이 자유민보다 선호된 이유는 태생부터 충성심이 강할 수 밖에 없는 맘루크 특유의 특성 때문이었다. 자유민 가정 출신의 병사는 위급한 상황에서는 혈연이나 가족에게 먼저 충성을 바치지만, 부모와 길러준 가정이 없던 맘루크 병사는 오직 군대와 술탄을 가족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더 믿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바이바르스가 처음 물려받은 군대는 쿠르드족과 튀르크족 전사들,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의 잔여 병력, 그리고 몽골 침공으로 흩어진 다른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 이후 군대를 왕실 맘루크 부대, 에미르 휘하의 병력, 그리고 할카(halqa) 라 불린 비맘루크 병사들 이렇게 총 3개 부문으로 재편했다: 개중 술탄의 직접 지휘를 받는 왕실 맘루크들이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으며, 입대 자격 역시 극히 제한적이었다.

왕실 맘루크는 술탄의 사병 집단이었고, 하급 아미르들도 각자 자신의 병력을 거느렸다. 이들은 필요할 때 술탄의 명령으로 동원되었지만 서로 경쟁 관계에 놓일 경우 각자의 병력을 동원해 충돌하기도 했고, 이런 권력 다툼은 종종 사회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한편 할카 부대는 맘루크 정규군보다 지위가 낮았고 독립적인 행정 체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술탄의 직접 통제를 받았다. 14세기 이후에는 전문 비맘루크 병사들이 점점 줄면서 할카의 규모와 중요성도 급격히 축소됐다.

아이유브 왕조 시절의 군대는 명확한 위계 구조가 없어 혼란이 심했기에 바이바르스가 이를 체계적으로 정비했다. 그는 10인·40인·100인 단위로 아미르가 맘루크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며 아미르들 간의 계급 체계를 도입했다. 마치 로마 제국의 천인장, 백인장, 십인장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100인 아미르는 전투 시 최대 1000명의 기병을 지휘할 수 있었다. 또한 군의 복장과 장비를 통일하고, 아이유브 왕조 시절 즉흥적으로 운영되던 군제를 바로잡았다. 바이바르스와 칼라운은 아미르들에게 지급되는 이크타(토지 배분권) 제도를 정비해,계급과 토지 규모가 명확히 연동되도록 하기도 했다.

바이바르스는 병사들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격주 단위로 군사 검열을 시행하고 무기 보급을 위한 정기 점검도 병행했다. 칼라운 시기부터는 술탄과 군사 행정관이 제국 내 모든 아미르의 명단과 역할을 문서화하여 전시에는 각자가 군의 좌익과 우익 어느 편에 속하는지까지 세세하게 규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맘루크들이 행정과 궁정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자 아이유브 왕조의 기존 관료 체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관직 제도가 만들어졌다. 술탄 바이바르스는 우스타다르(ustadar, 궁정총감), 하지브(hajib, 궁정 시종장), 아미르 잔다르(amir jandar, 무기고 지휘관), 하진다르(khazindar, 재무관) 등 아이유브 시대에도 존재하던 관직에 더해 다와다르(dawadar, 비서 또는 고문), 아미르 아쿠르(amir akhur, 왕실 마구간 지휘관), 루우스 알누왑(ru’us al-nawab, 맘루크 부대 총지휘관), 그리고 아미르 마즐리스(amir majlis, 국왕 접견 지휘관) 등을 추가했다. 이 새로운 관직들은 실무보다는 의례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이 컸으며, 모두 군사 계층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우스타다르(ustadar)는 본래 아랍어 'ustadh al-dar(집의 주인)'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술탄의 비서실장 겸 궁정 총감독 역할을 맡았다. 왕실의 일상 업무를 조정하고 술탄의 개인 재정을 관리했으며, 카이로 성채의 모든 건물과 하인, 관리들을 감독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우스타다르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위의 인물은 우스타다르 알아리야(ustadar al-ʿaliya, 대우스타다르)라 불렸고, 그 아래에 우스타다르 사기르(ustadar saghir, 부우스타다르)들이 여러 명 있었다. 이들은 성채 내의 재정, 사유재산, 주방 등 특정 부문을 각각 맡아 관리했다. 또한 아미르들도 자신들의 궁정을 운영하기 위해 각자 우스타다르를 두었다.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우스타다르 알아리야의 권한이 한층 강화되었다. 특히 술탄 바르쿠크와 술탄 앗 나시르 파라즈 치세에 이르러서는 술탄의 전용 맘루크 부대를 관리하던 별도의 행정 부서가 우스타다르의 통제 아래로 옮겨졌다. 그 결과 우스타다르는 사실상 국가의 최고 재정 책임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5.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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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왕조 시절 지어진 카이로의 알 구리 마드라사의 1800년대 모습[11]
맘루크 왕조 시절 이집트의 경제는 크게 술탄과 맘루크 엘리트층이 주도하는 국가재정과 이집트와 시리아 현지인들이 담당하는 민간시장경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맘루크들은 이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경제 중앙화를 시도했다. 카이로에 국가관료조직을 정비했으며, 이미 행정체계가 자리잡고 있었던 다마스쿠스알레포를 통합했다. 또한 정부가 군인에게 봉급을 지급하는 대신 특정 토지에서 조세할 권한을 부여한 제도 이크타(iqta)를 통해 지방경제를 중앙의 통제 아래 두었다. 특히 이집트를 남북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나일강의 존재 덕에 빠른 수운이 가능했기에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경제 운영이 가능했던 것이다.

통화 제도는 아이유브 왕조 시절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아 금화 디나르, 은화 디르함, 동화 풀루스를 사용했다. 그러나 맘루크 왕조의 통화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두카트나 피렌체 공화국의 플로린에 비하면 신용도가 매우 떨어졌다. 술탄들이 빈번하게 화폐 정책을 갈아치웠고 구리 화폐를 남발하거나 은화에 구리를 섞어 주조하며 인플레이션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왕조 중후반에 접어들면 재정부족으로 금이 없어서 금화를 만들지조차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정도였다.

맘루크들은 시장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히스바(hisba)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시장감독관 무흐타시브(muhtasib)를 두어 감독하게 했다. 대도시 카이로알렉산드리아, 푸스타트, 상이집트 지방에 1명씩 무흐타시브를 두었는데 수도 카이로의 무흐타시브가 가장 권위가 높아 사실상의 재무장관 역할을 했다. 무흐타시브의 역할은 도량형 검사, 상품의 품질 점검, 거래의 합법성 관리, 가격 조작 및 담합 단속 따위로 다양했다. 초기에는 이슬람 법학자 카디들이 무흐타시브를 맡았지만 15세기 이후 현금과 재정이 부족해지자 지방의 아미르들에게 봉급 대신 무흐타시브 직책을 부여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와 함께 무흐타시브 직책의 성격이 종교직에서 행정실무직으로 바뀌면서 맘루크 아미르 출신의 무흐타시브들이 등장하게 된다.

5.1. 이크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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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크타(iqta) 제도는 아이유브 왕조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술탄이 신하들에게 특정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 권리를 주는 제도를 일컫는다. 유럽의 봉토는 말그대로 땅 자체의 소유권을 주는 것인 반면, 이크타 제도에서는 땅주인은 여전히 술탄이고 신하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 곳의 조세권 뿐이었다. 맘루크 왕조 아래 이크타 제도는 더욱 정교하게 정비되었는데, 술탄들은 휘하 영주와 아미르들에게 번거롭게 꼬박꼬박 월급을 지급하는 대신 이크타 제도로 징세권을 부여해 알아서 군졸들의 봉급과 군비 등의 비용을 충당하도록 했다.

맘루크가 집권하기 이전에는 이크타의 소유자들은 자신들이 담당하는 구역을 마치 개인재산처럼 상속, 소유하려는 경향이 심했다. 하지만 맘루크 왕조 들어서는 이런 일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다만 레바논 산악지대의 드루즈계 귀족들처럼 특정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지역토후들은 워낙 깊게 뿌리박혀있었기 때문에 맘루크 중앙정부에게 끈질기게 저항했고, 그결과 본인들의 구역을 대대로 상속해줄 수 있었다.

맘루크 시대에 들어서 이크타는 지방 아미르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1337년 이후부터는 일부 영주들이 더 많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 비(非) 맘루크들에게도 이크타 징세권을 빌려주거나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1343년에는 이런 일이 더욱 빈번해졌고 1347년에는 아예 이크타 징세권의 매매도 과세 대상이 될 정도로 공공연화되었다. 이크타는 당사자 본인들끼리 처리하는 것이었기에 세금 인상이나 관직 매매, 강제 수탈보다 훨씬 안정적이었고 맘루크 재정의 중심축이었다. 맘루크 상층부의 군사귀족들은 이크타 제도를 이용해 합법적으로 시리아와 이집트의 부를 빨아들였고, 덕분에 맘루크의 군사엘리트가 경제엘리트로 전환되는 기점을 만들 수 있었다. 이크타 제도는 맘루크 사회 전반에 깊이 얽혀있었고 농업과 무역, 인구까지 이크타 제도의 영향을 안받는 것을 찾아보기가 더 드물었다.

정부는 군복무의 대가로 이크타를 나눠주었다. 정부는 라우크(rawk)라고 불리는 토지조사를 실시해 토지를 페단(feddan) 단위로 측정하고 토질과 예상 세수를 평가했다. 또한 이슬람 재단 소유의 와크프(waqf)가 될 것인지, 아니면 영주들에게 나누어줄 이크타로 분류할 것인지 결정하기도 했다. 1298년 라긴 술탄 때 첫 토지조사를 실시했고 1315년 앗 나시르 무함마드 때 2번째이자 마지막 토지조사를 했다. 맘루크 왕조는 이 1315년의 토지 조사를 기준으로 무려 200년 넘게 세금을 물렸다.

시간이 지나며 정부가 군비충당을 위해 더 많은 토지를 과세대상으로 물리면서 이크타는 점점 확대된다. 하지만 이렇게 마구잡이로 이크타 토지를 늘리다보니 한 영주의 이크타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거나 징세가능기간이 짧아지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그 결과 영주들은 땅을 관리하기보다는 최대한 짧은 기간 내에 많은 세금을 뽑아먹을 궁리하는 데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행정관리와 기반 시설 유지가 소홀해지면서 농업 생산력은 점점 떨어졌다.

5.2. 농업과 무역

전근대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듯이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로마 제국 시절 '제국의 빵바구니'라고 불릴 정도로 풍요로운 나일강의 생산력은 맘루크 왕조 시절까지 이어져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일대의 주요 수출품 역시 농산물이었다. 밀이나 대추야자 뿐만 아니라 목화를 길러 직물을 만들거나 사탕수수를 재배해 설탕을 만들기도 했다. 정부는 모든 작물들에 세금을 매겼고 이익의 가장 큰 몫은 당연히 술탄에게, 그 다음몫은 아미르와 대상인들이 나누어먹었다. 지방의 아미르들은 자신의 이크타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에 매긴 세금으로 병사들을 먹여살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특히 이집트의 농업은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에 비해서 훨씬 중앙집권적인 통제 하에 있었다. 농업이 오직 나일강의 수계 단 하나에 의지했기에 정부의 통제가 더욱 강했던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매년 반복되는 나일강의 범람에 맞추어 관개 제도와 수리권를 재조정했다. 반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지하수나 빗물 등 강이 아니어도 수원이 다양했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들끼리 알아서 물 분배와 관개권을 정했다. 또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은 지형이 복잡하고 외세의 침입이 잦았기에 이집트처럼 완전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이루기도 어려웠다. 그 결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정부의 역할은 조세 수취와 기반 시설 유지에만 치중됐다.

맘루크 왕조는 지방에 총독들을 임명해 버려진 땅에 인구를 재정착시켜 비옥하게 만들고 베두인들의 약탈로부터 농경지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겼다. 기존 관개 시설을 보수확장하는 일이 최우선 임무였고, 특히 비옥한 저지대 일대를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농촌의 가장 큰 위협은 유목민 베두인들이었는데, 베두인들이 습격해 농촌을 교란해 한해 농사를 망치고 세수가 급감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맘루크 정부는 베두인들의 무기를 강제압수하는 등 베두인들의 무장세력을 막으려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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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왕조 최대의 무역항이었던 알렉산드리아와 카이트베이 요새[12]의 전경
이집트와 시리아는 원래부터 중세 국제 무역에서 중심적인 중계지였는데, 맘루크 왕조 초기에 이러한 지위가 더욱 강화되었다. 바이바르스제노바와, 칼라운실론와 각각 상업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서면서 맘루크 내부의 권력 다툼,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와 이크타 세입의 축소, 그리고 버려진 농경지를 잠식한 베두인 부족들로 인해 술탄국의 재정이 크게 흔들렸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맘루크 정부는 세 가지 정책을 병행했다. 도시 중산층에 대한 세금 강화, 목화와 설탕의 생산 및 유럽 수출 확대, 그리고 유럽과 극동 간 무역의 중계권을 이용한 수익 확대였다. 이 가운데 세 번째, 즉 무역 중계에서 얻는 이익이 가장 큰 수입원이었으며, 때문에 맘루크들은 베네치아·제노바·바르셀로나 등과의 교역량을 늘리고 관세를 인상했다. 유럽과 이슬람 세계 간의 무역이 국가 재정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이집트의 항구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뜯어내며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다.

맘루크 시대의 이집트는 서유럽에 직물을 공급하는 주요 생산지이자 원자재 수출국이었다. 그러나 흑사병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직물·비단·설탕·유리·비누·종이 산업이 크게 위축되었고, 동시에 유럽에서는 자체적으로 상품들을 자급자족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무역은 계속 이어졌고, 십자군 전쟁 중 교황이 이슬람과의 교역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무역은 활발히 유지되었다. 후추·육두구·정향·계피 같은 향신료와 약재, 쪽(인디고) 등으로 페르시아·인도·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어 시리아와 이집트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갔다. 반대로 유럽 상인들은 금·은화, 견직물·모직물·리넨·모피, 밀랍·꿀·치즈 등을 가지고 와 교환했다.

바르스베이 치세에는 향신료 등 사치품 무역에 대한 국가 독점제가 시행되었다. 국가는 가격을 직접 책정하고 이익의 일정 비율을 징수했다. 1387년 바르스바이는 알렉산드리아를 직접 장악하고 그 세수를 국고가 아닌 술탄의 개인 금고로 이전시켜버렸다. 또한 1429년에는 홍해에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향신료의 직송을 금지하고 모든 향신료 무역을 카이로를 경유하도록 명령하여 유럽 무역을 철저히 통제했다. 그러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이르러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맘루크-베네치아 간의 지중해 무역 독점이 붕괴되었고, 이는 맘루크 술탄국의 몰락과 시기를 같이했다.

5.3. 경제적 번영

"피렌체 인구 전체를 합쳐도 카이로 시내 한 곳의 사람들보다도 더 적다."

피렌체인 레오나르도 프레스코발디, 1384년 카이로를 방문하고 남긴 평.
"페르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10개를 합쳐도 카이로보다 더 작을 것이다."

페르시아인 칼릴 알자히리, 14세기 카이로를 방문하고 남긴 평.
"카이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그 어떠한 도시들보다도 부와 번영에서 뛰어나다."

베네치아인 엠마누엘 필로티.[13], 카이로에 대한 평

맘루크 왕조 치하의 이집트와 수도인 카이로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모두 이집트의 놀라운 번영을 찬양했다. 맘루크 왕조는 유럽과 인도양을 잇는 중계 무역에서 수수료를 거둬 눈부신 번영을 누렸다. 14세기 무렵, 맘루크 왕조 치하의 이집트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여러 기록들을 보면, 당시 맘루크 왕조가 얼마나 풍요로웠는 지 알 수 있다. 1341년, 맘루크 왕조의 제14대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 (재위 1310~1341)는 11명의 딸들을 시집보내면서 한 명 당 800,000 디나르의 금화지참금으로 주었다.

또한 1356년 맘루크 왕조의 제23대 술탄인 바드르 압딘 하산(Badr ad-Din Hasan 재위 1354~1361)은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졌던 제21대 술탄의 이름을 딴 ‘하산 모스크’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3년 후에 완공된 이 하산 모스크는 유럽에서 수입해 온 제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27개의 대리석들로 지어졌으며, 아울러 모스크 안의 기도실 벽에는 전부 황금과 은을 발라 실로 눈부시게 빛이 났다. 모스크 옆에는 45m의 미나렛(첨탑)과 건물 안에는 약 7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기숙사가 같이 세워졌다. 그리고 머무르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음식과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했다.

군주가 아닌 상인들도 세계 각지에서 몰려오는 무역에 손을 대면서 엄청난 재산을 쌓았다. 한 예로 ‘나시르 알딘 발리시’란 상인은 인도와 예멘 및 에티오피아에서 수입한 향신료를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 팔아서 큰 돈을 벌었다. 또한 그는 향신료를 파는 무역상인들이 만든 조합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나시르는 1373년에 죽었는데, 아들에게 무려 1,000,000 디나르의 금화를 유산으로 남겼다. 나시르 같은 향신료 대상인들이 쌓은 재산이 얼마나 많던지, 때로는 술탄들조차 그들에게 돈을 빌릴 정도였다.

1348년 카이로의 인구는 500,000명에 달했는데, 이는 인구 200,000명의 파리나 50,000명의 런던보다 2.5배에서 10배나 많은 숫자였다.[14]

6. 종교

6.1. 수니파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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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4년 제작된 쿠란 필사본 앗 나시르 무함마드 모스크 내부의 미흐랍
국교는 수니파 이슬람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여러 이슬람 학파들(madhab), 수피즘 교단들이 존재했고 남쪽의 상이집트에는 소규모의 시아파 이스마일파 신자들도 존재했다. 특히 콥트교회 신자들 역시 무시못할 수준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맘루크 왕조는 아이유브 왕조 시절부터 시행했던 수니파 부흥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미 살라딘부터가 파티마 왕조의 국교였던 이스마일파와 파티마 왕조의 관용정책 아래에서 서서히 번성하고 있던 콥트교회를 제압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니파 진흥 정책을 펼치고 있었는데 맘루크 왕조 역시 이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

맘루크 왕조가 수니파 이슬람을 대폭 장려했던 이유는 수니파맘루크와 피지배층들이 공유하는 유일한 가치였기 때문이었다. 맘루크들은 어릴 적부터 철저한 수니파 이슬람 신앙 속에서 성장한 노예 계급이었고 사회적 엘리트 계급에 속했던 맘루크들을 신민들과 가장 쉽고 빠르게 묶어줄 수 있는 정체성은 바로 수니파 이슬람이었다. 맘루크 왕조는 당시 십자군몽골 제국의 침략을 동시에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이슬람 제국으로서 사회적, 도덕적 통합이 절실했는데 이런 필요에 맞추어 곧 백성 다수가 신봉하는 수니파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맘루크 왕조는 종교 학파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백성들을 술탄의 종교적 권위 앞에 복종하도록 유도했다. 전대 아이유브 왕조처럼 샤피이파를 가장 선호했지만 말리키파, 한발리파, 하나피파 등 다른 수니 법학파들도 함께 지원했다. 특히 바이바르스는 이슬람 대법관으로 샤피이파만을 임명했던 관행을 깨고 4개의 학파들에서 1명씩 총 4명의 대법관을 뽑도록 했다. 이는 다양한 무슬림들이 이집트 내에 공존하는 현실을 반영한 조치이자 학파들 간의 권력 균형을 맞추어 더욱 쉬운 통제를 가능케하고자할 목적이었다. 물론 샤피이파는 여전히 여러 특권들이 존재했고 타 학파들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맘루크들은 수피즘을 포용했다. 13세기 경 이미 이집트 전역에 수피즘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고 개중 13세기 모로코의 학자 아부 알하산 앗샤딜리가 창시한 샤디리야 교단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샤디리야 교단은 느슨한 조직과 유연한 사상, 빠른 현지화가 특징으로 쿠란하디스에 기반한 수니파의 경건성과 수피즘의 신비주의, 성인 숭배와 성지 순례, 낭송 예배(dhikr) 같은 대중 신앙의 요소를 모두 합쳐 큰 인기를 끌었다. 샤디리야 교단 외에도 리파이야 교단, 바다위야 교단 등 역시 많은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맘루크들은 수피즘 수도원인 '자위야'에 후원하는 방식으로 수피즘을 장려했다. 국교 수니파의 경우 법학자 울라마를 관직에 임명하는 식으로 후원했다.

맘루크 왕조 시기의 가장 유명한 학자로 한발리파이븐 타이미야가 있다. 쿠란과 하디스의 구절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 엄격한 도덕적 규율을 강조했고 수피즘의 신비주의나 대중신앙적인 요소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 학자였다. 맘루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저명한 신학자지만 정작 당시 맘루크가 후원하던 정통 수니파들은 그를 이단이라고 여겼다. 종교적 견해 차 때문에 여러 차례 투옥되기까지 했지만 그의 사상은 심지어 현대까지도 이슬람 세계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6.2. 기독교도들에 대한 차별

수니파가 주류였지만 기독교유대교 신자들도 결코 무시못할 숫자로 존재했다. 이들은 술탄에게 충성하는 동시에 각자의 종교를 믿었기에 이슬람 맘루크 왕조에게는 언제나 꺼림칙한 존재였다.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들에게는 이교도 '디미'들에 대한 처우를 규정한 우마르 협약에 따라 종교세 지즈야가 부과됐고 회당을 지을 때는 반드시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했으며 공공장소에서의 복장도 제한됐다.

전반적으로 유대교도들의 대우가 기독교도들보다 나은 편이었고 기독교도들은 이전보다 더 큰 박해를 당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도들이 잠재적인 몽골 제국과의 협력집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 칸국의 몽골군들은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기독교 세력을 보조군으로 활용했으며 십자군과 동맹을 시도했고 점령지에서 무슬림들은 학살했지만 기독교도들은 살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무슬림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독교도들이 꼴보기 싫을 수 밖에 없었다. 반기독교 정서는 술탄의 주도라기보다는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특히 관료 조직 내에서는 기독교도들이 차지한 특권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이집트의 콥트 교회는 이미 맘루크 왕조 초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중후반으로 갈수록 그 쇠퇴 속도가 빨라졌다. 무슬림들은 부유한 콥트교도들을 싫어했고, 기독교도들이 관료로 일하는 것에 반발해 여러 차례 시위를 벌였다. 폭동이 일어나면 기독교도들과 무슬림들은 서로의 예배당을 불태우곤 했고 감정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결국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쳐 콥트 교도들을 대상으로 한 관직 해임령이 떨어졌고 1301년에는 모든 교회들을 강제로 폐쇄하는 초강수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태가 진정되면 콥트 신자들은 다시 관직으로 복귀하곤 했고, 콥트 교도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겉으로만 이슬람으로 개종한 척하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지속된 탄압으로 14세기를 기점으로 대규모 개종이 일어났고 결국 맘루크 왕조 말기 무슬림과 기독교도 비율은 10:1까지 벌어졌다.

한편 시리아에서도 여러 기독교 분파들이 존재했다. 맘루크 왕조는 이들이 십자군과 연계할 것을 우려해 마론파정교회 신자들을 강제로 내륙으로 이주시켰다. 특히 마론파는 교황청과 서유럽 국가들, 특히 키프로스 왕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감시대상이었다. 정교회는 영적 중심지였던 안티오크가 맘루크들에게 파괴당하고 특히 티무르알레포다마스쿠스를 초토화시키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시리아 정교회도 내부에서 교황 선출을 놓고 분열이 일어나고 외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세가 크게 위축됐다. 아르메니아 정교회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맘루크 왕조가 1374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침략하며 쇠퇴하기 시작했고 티무르 제국, 백양 왕조, 흑양 왕조의 전쟁에 휘말리며 그 세가 급감했다.

7.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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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이의 세례반 14세기 시리아에서 제작된 램프
맘루크 시대의 장식 예술은 유리 공예, 금·은상감 금속 공예, 목공예, 직물 공예 등에서 특히 뛰어났다. 개중에서도 채색 유리와 금박 유리는 지중해 전역과 유럽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베네치아의 유리산업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등 지중해세계 곳곳의 공예 생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맘루크 왕조는 페르시아, 인도, 중국과의 무역도 활발히 전개하는 무역과 소비의 중심지였다. 중국의 문양을 기물이나 건축 장식에 사용한 것처럼 동방에서 들어온 이국적인 사치품들을 현지 예술에 적용하기도 했다. 노예 태생인 맘루크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지위에 오른 계층이었기 때문에 신분 의식이 강했고,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고유 표식이 새겨진 고급 예술품들을 주문 제작하기를 좋아했다.

맘루크들은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예술을 후원했는데 개중 가장 중요한 것이 건축이었다. 술탄들과 고위 맘루크들은 모스크, 마드라사, 영묘 같은 종교 건축물들을 장식하기 위해 수많은 예술품들을 의뢰했다. 채색한 유리 램프, 쿠란 필사본, 황동 촛대, 목조 민바르(설교단) 등이 대표적이다. 예술 후원의 수준은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그 절정기는 앗 나시르 무함마드카이트베이 치세였다. 예술 분야의 중요성 또한 시기에 따라 달라졌다. 예를 들어 채색 유리 공예는 맘루크 왕조 전반기의 대표 산업이었지만 15세기 이후 급격히 쇠퇴했다. 반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카펫의 대부분은 맘루크 왕조 말기에 제작된 것이다. 도자기 생산은 전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미 중국산 자기들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권 특유의 책 장식은 맘루크 왕조에서도 유행했다. 그중에서도 쿠란을 가장 정교하게 꾸몄다. 카이로, 다마스쿠스, 알레포가 대표적인 책 제작의 중심지였으며, 당대 이집트의 쿠란 필사본은 풍부한 채색과 금박 장식으로 유명했다. 당시 종이 제조 기술이 발달하면서 더 크고 질 좋은 종이를 쓸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예술가들은 넓어진 지면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문양과 구도를 고안했다. 일부 쿠란은 매우 거대한 크기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알아슈라프 샤아반을 위해 만들어진 한 쿠란은 높이가 75~105cm에 달했다. 넓은 여백 속에 파스텔톤 배경 위로 금박 잎사귀무늬 두루마리가 장식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 서두 장식은 별 모양이나 육각형의 기하학 문양으로 꾸며지는 경우가 많았다.

금속 공예품 역시 다양한 용도로 널리 사용됐다. 주전자, 대야, 촛대 등이 인기가 많았고 황동이나 청동 재질에 금·은상감으로 문양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금속 공예의 품질과 생산량은 대체로 맘루크 왕조 초기에 가장 높았고 후기로 갈수록 상감 대신 선각 기법이 더 흔해졌다. 이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가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성 루이의 세례반(Baptistère de Saint Louis)'으로, 큰 황동 대야에 아라베스크 무늬와 동물, 사냥꾼, 폴로를 하는 기수들의 장면이 수평 띠 형태로 상감되어 있다. 후기에 제작된 금속작품들에는 술탄 카이트베이메디나 예언자의 모스크에 있는 무함마드의 무덤을 위해 주문한 촛대들이 유명하다. 황동을 선각한 후 검은 역청을 표면에 채워 서로 광택 있는 황동 부분과 대조되도록 처리했으며, 장식은 거의 전적으로 아랍어 서예 캘리그라피다.

유리 공예 또한 맘루크 예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분야로, 특히 모스크용 유리 램프 제작이 대표적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맘루크 이전부터 유리 제조의 전통이 발달해 있었으며, 맘루크 시대에는 다마스쿠스가 가장 중요한 생산 중심지였다. 이전의 아이유브 왕조 시기에는 색유리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맘루크 시기에는 에나멜과 금박이 유리 장식의 주요 기법으로 떠올랐다. 모스크용 램프는 아랫부분이 둥글고 윗부분이 넓게 퍼진 형태를 띠었으며, 수천 점이 제작되어 쇠사슬에 매달려 천장에 걸렸다.

7.1.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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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하산의 모스크-마드라사
맘루크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여러 기능을 하나의 건물 안에 결합한 복합 건축물이었다는 점이다. 도시 공간은 점점 좁아지는 와중에 자신들의 건물이 주변에 묻히지 않고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이기를 원했던 의뢰인들 때문에 건물들의 평면 구조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파티마 왕조 시기부터 이집트에서는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모스크의 시각성이 더욱 두드러지도록 하는 거리맞춤식 입면 설계를 도입해오고 있었는데, 맘루크 건축가들은 건물 장식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해 일반인들이 길거리에서 모스크를 볼 때의 시각 효과를 극대화했다.

맘루크 시대의 건축물은 구조와 용도 면에서 다양했지만 거대한 돔과 첨탑 미나레트는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이 돔과 미나레트는 모스크의 핵심 중 핵심으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특히 카이로에서는 돔과 미나레트가 신앙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맘루크 건축가들은 둥근 돔과 수직의 미나레트, 그리고 높은 정면 벽을 조합한 것을 이상적인 건축미로 여겼다. 건축비를 대는 후원자들은 본인들의 묘소가 기도실 내부와 거리 모두에서 잘 보이도록 배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예배자들이 창문을 통해 무덤을 쉽게 볼 수 있게 설계하는 경우가 많았다.

맘루크 건축물의 규모와 기능은 다양했다. 작은 규모의 건물은 단일 묘당이나 공공 식수대처럼 자선 목적의 시설이었고, 대형 복합 건축물은 여러 기능을 하나로 묶은 형태였다. 여기에 포함된 시설로는 모스크, 수피 수도원(한카, khanqah), 신학교(마드라사), 병원(비마리스탄, bimaristan), 초등학교(마크타브 또는 쿠탑, maktab/kuttab), 무료 급수대(사빌, sabil), 가축용 급수조(호드, hod)가 있었다. 또한 상업 기능을 가진 시설들도 많았는데 상인과 상품을 위한 숙소 겸 창고인 위칼라(wikala)나 한(khan), 세입자용 아파트 단지인 랍(rabʿ) 등이 대표적이다.

건축 양식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맘루크 시대에는 마드라사 건축에서 십자형 또는 4이완(four-iwan) 구조가 널리 채택되기 시작했고 이는 기존의 기둥식 모스크(hypostyle mosque)를 대체하며 대형 공공 건축물들의 일반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돔 형태의 이완 천장이 주로 쓰였지만 후기에는 평지붕 형태의 이완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전 시대보다 기념비적인 장식 입구가 일반화되었고, 그 위에는 정교한 무카르나(muqarna) 조각과 기타 장식 문양들이 더해졌다. 입구 뒤의 현관 공간은 화려한 석조 궁륭 천장으로 덮었다. 특히 1373년경 건립된 울자이 알유수피 마드라사의 현관은 맘루크 건축에서 처음으로 정교한 교차궁륭 천장을 도입한 사례로, 후대에도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맘루크 건축의 새로운 건축양식으로 자리잡았다.

7.1.1.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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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왕조 시대의 스투코 석고 장식
맘루크 시대가 이어지면서 건축물의 장식은 점점 더 섬세하고 화려해졌다. 바흐리 맘루크 시기에는 석고 부조가 실내 장식은 물론 벽돌로 만든 돔과 미나레트의 외부에서도 널리 사용됐다. 초창기에는 유리 모자이크도 쓰였지만 후기에는 점차 사라졌다. 색이 다른 돌을 교차로 쌓는 압라크(Ablaq) 조적 방식도 유행했는데 바이바르스가 다마스쿠스에 지은 압라크 궁전(Qasr Ablaq) 이 대표적인 예시. 물론 압라크 궁전의 경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초기의 맘루크 건물들에는 여러 지역의 영향을 받은 석고 장식들이 나타난다. 다른 지역에서 초청된 장인들이 공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앗 나시르 무함마드 마드라사의 미흐랍은 당대 일 칸국 타브리즈 지역의 섬세한 석고 장식으로 장식해놨고, 미나레트에는 안달루시아마그레브 지방의 기법과 옛 파티마 왕조의 전통 문양이 섞여 있다.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졌기에 맘루크 예술은 현지 양식과 외래 양식이 조화를 이룬 독특한 미감을 만들어냈다.

시간이 지나며 벽돌 대신 돌을 주된 건축 재료로 쓰게 되면서 장식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시리아와 베네치아의 영향을 받아 석재 조각과 다색 대리석 모자이크가 주요 장식 기법으로 자리 잡았고, 대리석은 벽면과 바닥 포장에 함께 사용됐다. 기하학 무늬와 식물 문양의 아라베스크가 장식의 중심이었고, 그 사이에 꽃무늬 꾸피, 사각 꾸피, 술루스 서체로 새긴 서예 띠나 패널을 더했다. 종교 건물들의 경우 미흐랍, 즉 메카의 방향을 가리키는 벽의 오목한 부분이 내부 장식의 중심이었다. 미흐랍의 안쪽 반원형 부분, 일명 '콘치(conch)'에는 마치 빛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는 해돋이와 비슷한 문양을 자주 새겼다.
파일:Flickr_-_HuTect_ShOts_-_Pattern_of_The_Tomb_Gate_-_Masjid_of_Sultan_Hassan_مسجد_ومدرسة_السلطان_حسن_-_Cairo_-_Egypt_-_28_05_2010_(1).jpg 파일:Minbar_of_Baktimur_al-Jugandar_at_the_Mosque_of_Salih_Talai_DSCF6609.jpg 파일:Qaytbay_sabil_interior_ceiling.jpg
알살리흐탈라이 모스크의 민바르[15] 술탄 하산 영묘의 청동문 카이트베이 재위기 건설된 목조천장 장식
건축물의 장식에는 종종 둗근 띠 안에 후원자의 이름과 칭호를 아랍어 서체로 새기는 방식으로 건축 후원자의 문장(blazon)을 새겨놓곤 했지만 모든 건물에 후원자의 문장을 새긴 것은 아니고 건축물들마다 다르다. 목재는 중요한 건축 재료로 쓰였으나 맘루크 왕조 후기에는 공급이 어려워져 귀한 자재로 여겨졌다. 귀한 목재로는 천장을 만들거나 내부 가구들을 짰다. 목재 천장은 화려한 채색과 금박 장식으로 꾸며졌다. 모스크 내부의 주요 가구였던 설교단 민바르 역시 정교한 맘루크 목조 예술의 대표작. 민바르에는 섬세한 조각과 상감 장식을 더했고 기하학 무늬를 기본으로 한 화려한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종교 건축물의 문은 대부분 청동판으로 덮여 있었고, 표면에는 정교한 기하학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술탄 하산 모스크-마드라사의 문은 맘루크 시대 청동 세공의 절정으로 손꼽힌다. 이 건물의 정문은 나중에 알무아야드 모스크로 옮겨졌지만 영묘의 문은 아직도 여전히 제자리에 잘 남아 있다. 영묘의 문에는 은과 금으로 장식한 꽃무늬 상감이 새겨져 있어 당시 맘루크 기술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7.1.2. 미나레트

파일:Qalawun-Komplex_2015-11-12b.jpg 파일:Tomb_of_salar_and_sangar_and_al-gawli_minaret.jpg 파일:Cairo,_moschea_di_al-maridani,_minareto.jpg 파일:Qaytbay_minaret_Northern_Cemetery_DSCF0155.jpg
칼라운 복합단지 미나레트 살라르 산자르 알자울리 영묘 미나레트 알 마리다니 미나레트 카이트베이 영묘 미나레트
맘루크 시대의 미나레트는 장식이 점점 화려해졌고 대개 3단으로 나뉜 형태인 것이 특징이다. 각 층은 발코니로 구분되며 서로 다른 형태와 장식으로 꾸며졌는데, 특히 수도 카이로에서 이런 미나레트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초기 바흐리 맘루크 시대의 미나레트는 벽돌로 세운 경우가 많았지만,칼라운 복합단지나 앗 나시르 무함마드 모스크의 미나레트처럼 돌로 만든 사례도 있었다. 1340년대 이후부터는 석조 미나레트가 점차 일반화되어 결국 표준이 되었다. 미나레트만 전문으로 세우는 건축가들이 따로 있어서, 본건물과는 독립적으로 더 실험적인 설계를 시도할 수 있었다.

초기 바흐리 시기의 미나레트는 파티마 왕조아이유브 왕조 시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네모난 탑신 위에 향로 모양의 마브카라(mabkhara) 구조를 얹고 그 위를 홈이 파인 돔이 덮는 형태였다. 칼라운 복합단지의 큰 미나레트가 그 예시였지만, 상부는 후대에 다시 지어져 원형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흠. 살라르와 산자르 알자울리의 영묘(1303)와 순쿠르 사디 마드라사(1315년경)의 미나레트가 보다 잘 보존되어 있는데, 전통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더 날렵한 비례와 2층부 팔각형 기둥 같은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다. 1340년경의 알 마리다니 모스크 미나레트는 완전한 팔각형 탑신을 채택한 최초의 예이며, 여덟 개의 가느다란 기둥 위에 팽팽한 석제 장식을 얹은 좁은 등롱(lantern) 구조로 마무리된 첫 사례였다. 이후 이 형태가 맘루크 미나레트의 기본 양식으로 자리 잡았고, 기존 마브카라형 상부 구조는 14세기 후반에 사라졌다.

부르지 왕조 시기의 미나레트는 보통 1층이 팔각형, 2층이 원형, 3층이 등롱 구조였다. 석조 장식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정교해졌으며 건물마다 세부 문양이 달랐다. 칸수 알 구리 시기 말에는 다시 네모나 사각형 탑신의 미나레트가 등장했고, 이때는 상부의 등롱 구조를 두 겹 또는 네 겹으로 쌓는 시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카니바이 카라 모스크와 알아즈하르 모스크의 알구리 미나레트는 이중 등롱 구조를 갖고 있었고, 알구리의 마드라사 미나레트는 네 겹의 등롱으로 장식돼 있었다. 사실 두 겹 등롱은 이미 14세기 중반 술탄 하산 모스크-마드라사의 원래 미나레트 중 하나에서 처음 등장했지만, 그 이후로 오랫동안 다시 쓰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술탄 하산의 미나레트는 17세기에 붕괴했고 알 구리의 네 겹 미나레트 상부도 19세기에 무너졌다.[16]

7.1.3.

파일:Khanqah-Mausoleum_of_Faraj_ibn_Barquq_DSCF0242.jpg 파일:Qaitbey4_(2133768658).jpg
바르쿠크의 한카 쌍둥이 영묘 돔 카이트베이 영묘의 돔
맘루크 시대의 돔 발전이 미나레트와 비슷한 흐름을 보였지만 속도는 훨씬 느렸다. 초기에는 나무나 벽돌로 만든 돔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석조 구조로 바뀌었다. 내부에서는 둥근 돔의 하부와 네모난 방의 벽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처음엔 여러 겹의 스퀸치(squinch)를 썼고, 이후에는 무카르나스 장식이 새겨진 펜던티브(pendentive)를 이용했다.

바흐리 시기의 초창기 돔은 반구형에 약간 뾰족한 형태로, 두 가지 기본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곡선이 바로 밑부분에서 시작되고 표면이 매끈한 낮은 돔으로, 바이바르스 알자샨키르의 한카처럼 생긴 경우다. 다른 하나는 곡선이 위쪽에서 시작되고 표면에 세로 능선이 잡힌 높은 돔으로, 살라르와 산자르 영묘에서 볼 수 있다. 술탄 하산 영묘, 술탄 바르쿠크 영묘, 알나시르 무함마드 마드라사의 묘당, 카이로 성채의 알 나시르 모스크, 그리고 훨씬 뒤의 알구리 영묘의 벽돌 돔들처럼, 나무나 벽돌로 만든 이 시기의 돔들은 관리 부실, 구조적 불안정, 지진 등으로 붕괴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이 후대에 다시 지어진 것들이다.[17]

바흐리 왕조 시기 나무와 벽돌 돔은 안팎 두 겹으로 구성된 이중 돔이었고, 팽창된 형태를 띠어 이후 티무르 제국 시대의 돔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이러한 이중돔 구조는 살르기트미쉬 영묘의 돔(19세기에 재건됨), 술타니야 영묘의 쌍둥이 돔, 술탄 하산 영묘의 원래 돔 등에서 볼 수 있다. 일 칸국이나 잘라이르 왕조 등 페르시아와 아나톨리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다른 지역의 예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계보를 밝히기는 어렵다. 페르시아식 이중 돔 건축술이 카이로의 건축술과 결합해 이처럼 볼록한 돔 형태가 나타났다는 것이 정설.

부르지 시기의 돔은 한층 뾰족해지고 드럼(돔의 받침부)이 높아졌다. 초기에는 석조 돔 표면에 단순한 V자 무늬만이 새겨졌지만 후기에는 복잡한 기하학 문양과 아라베스크 장식이 새겨졌다. 1400년 ~ 1411년 사이에 세워진 파라즈 이븐 바르쿠크의 한카의 쌍둥이 영묘 돔은 공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맘루크 돔 건축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카이로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석재 돔으로 지어진 사례이며 직경이 14.3m에 달해 맘루크 왕조 때 지어진 것들 중에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15세기 후반 술탄 카이트베이 시대에 맘루크식 돔의 화려함이 그 절정에 이르렀다. 카이트베이의 영묘 복합 단지가 가장 대표적인 예시.

7.1.4. 입구

파일:Khanqah_of_Baybars_al-Jashankir_(1310)_DSCF9254.jpg 파일:Moschea_del_sultano_hasan,_1362,_esterno_04.jpg 파일:Khan_el-Khalili,_Old_Cairo,_al-Qāhirah,_CG,_EGY_(47859498782).jpg
바이바르스 알자샨키르 한카의 입구 술탄 하산 모스크-마드라사의 입구 칸 알칼릴리의 입구
맘루크 건축에서 입구 포탈(portal)은 외벽을 구성하는 중요한 시각적 요소였다. 다른 이슬람 건축 전통과 마찬가지로 장식이 매우 화려했지만, 카이로의 건물들은 외벽 전체가 창문, 사빌(sabil, 공공 급수대), 마크탑(maktab, 초등학교), 그리고 다양한 장식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 건축처럼 입구가 외벽의 중심을 완전히 지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바흐리 맘루크 시기의 포털은 형태가 다양했다. 예를 들어 칼라운 복합단지(1285)나 살라르와 산자르 영묘(1303)의 입구는 대리석 패널로 장식되어 있지만, 건물 전체의 비례나 위치 면에서는 특별히 강조되지 않았다. 반면 1310년에 세워진 바이바르스 알자샨키르 한카의 입구는 바흐리 맘루크 시기를 통틀어 가장 웅장하고 인상적인 포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포털은 종종 외벽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고, 그 위를 정교한 석조 캐노피(차양)가 덮고 있었다. 14세기 중엽에는 무카르나(muqarna)로 장식된 반돔형 차양이 흔하게 쓰였다. 원래 이런 무카르나 차양은 다마스쿠스 아이유브 왕조 건축에서 많이 쓰이던 방식이었는데, 14세기 들어 카이로로 전해진 것이다. 1330년대에는 평평한 형태의 무카르나스 차양도 등장했는데, 대표적으로 아미르 울마스 모스크(1330)와 바슈탁 궁전(1339)에서 볼 수 있다.

술탄 하산 모스크-마드라사(1356~1361)의 거대한 입구는 특히 눈에 띄는데, 13세기 시바스의 셀주크 시대 괵 메드레세(Gök Medrese)와 같은 아나톨리아식 포털과 닮아 있다. 장식 일부는 완성되지 않은 채 남아 있지만 웅장한 캐노피 안에는 당시 맘루크 예술 전반에 퍼져 있던 중국풍 문양도 보인다. 이 시기 혹은 조금 뒤에 지어진 살르기트미쉬 마드라사(1356)와 움 술탄 샤반 마드라사(1368)의 입구도 이와 유사한 구조로, 좁은 피라미드형 무카르나 차양을 사용했다. 특히 움 술탄 샤반 마드라사의 무카르나 포털은 맘루크 시대에 지어진 이 양식의 마지막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15세기 부르지 맘루크 시기로 들어서면서, 무카르나로 장식된 포털은 점점 줄어들었다. 알무아야드 셰이크 모스크(1415~1420)의 입구는 맘루크 시대에 세워진 마지막 대형 장식용 입구였다. 이후로는 세 개의 아치가 맞물린 형태의 삼엽형 포털이 주류가 되었는데, 이는 두 개의 4분의 1 돔 위에 반돔이 덮인 구조로 교차궁륭을 형성한 것이 특징. 일부 포털에서는 이 구조 안쪽의 스퀸치 부분에도 무카르나가 더해졌다. 이런 설계 방식은 훗날 돔 내부의 펜던티브 구조에도 적용되어, 포털과 돔 건축이 동시에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보여준다. 맘루크 후기의 대표적인 교차궁륭 포털은 1511년 칸 알칼릴리(Khan al-Khalili) 에 세워진 바브 알구리(Bab al-Ghuri) 의 대문으로 그 정교함과 규모 면에서 맘루크 건축의 마지막 절정을 보여준다.

7.1.5. 아파트 단지

맘루크 시대에는 랍(rabʿ, 복수형 ribāʿ 또는 ʿurbu) 이라 불리는 다층 임대주택이 널리 지어졌고, 이후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카이로 시민들이 살아가는 대표적인 가옥이었다. 이런 형태의 아파트식 건물은 당시로서는 카이로에 거의 유일한 주거 유형이었다.

랍은 보통 2층 또는 3층의 복층구조였고, 종종 상업용 건물인 카라반사라이(위칼라, wikala)와 결합되어 있었다. 이런 경우 아래 두 층은 창고나 상점 등 상업 공간으로 쓰였고, 그 위층은 세입자들에게 임대했다. 다만 위칼라와 결합된 형태라 하더라도, 주거 공간인 랍은 항상 별도의 입구를 만들어 아래층 상업 구역과는 철저히 구분했다.[18] 카이로의 주거지는 이러한 건물들이 모여 하라(harat) 라고 불리는 밀집된 이웃 공동체를 이루었다. 하라에는 밤이나 소요 사태가 발생할 때 문을 닫을 수 있는 출입문이나 차단문이 설치된 경우도 많았다.

8. 언어

맘루크가 집권했을 때 이미 이집트에서는 아랍어가 종교, 문화, 행정의 언어로 자리 잡고 있었다. 비무슬림 집단 사이에서도 널리 쓰였는데, 이는 평민들 사이에서도 지배층과 학자층의 언어를 배우려는 욕망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랍 부족들이 이집트로 대거 이주하고 현지인과의 혼인이 더해지면서 아랍어가 자연스럽게 퍼졌다. 맘루크가 몽골군과 십자군을 격퇴하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아랍어권 무슬림의 피난처로 만들면서, 다른 이슬람 지역에서 온 아랍어를 사용하는 학자와 장인, 난민들이 대거 유입됐다. 몽골군의 시리아 침공이 계속되자 시리아인 이주가 한층 늘어났고, 이 가운데에는 학자와 기술자들도 많았다.

행정 언어는 아랍어였지만 맘루크 지배층이 실제로 쓰던 언어는 킵차크 튀르크어(Kipchak Turkic) 였다. 맘루크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언어로 튀르크어를 썼는데, 다만 실제로는 킵차크어나 체르케스어 같은 중앙아시아 방언을 썼다고 한다. 맘루크 지배층의 뚜렷한 정체성은 결국 튀르크성(Turkishness)이었고 오직 맘루크들만이 튀르크어를 구사하고 튀르크식 이름을 가졌다. 실제로 맘루크 엘리트는 다양한 출신으로 구성돼 있었지만, 비튀르크계 맘루크들도 결국 튀르크 문화와 언어를 받아들여 튀르크화되었다.

튀르크계 바흐리 왕조를 몰아내고 들어선 부르지 왕조 시기 권력을 잡은 체르케스계 맘루크들 역시 튀르크어로 교육을 받았고, 아랍어를 쓰는 일반 이집트인들에게는 똑같은 튀르크인으로 인식됐다. 킵차크 튀르크어는 문서에도 쓰였지만 주로 맘루크 내부 기록용이었고, 점차 아나톨리아의 영향이 커지면서 오구즈 튀르크어(Oghuz Turkish) 로 대체됐다.

맘루크 술탄국의 군사 엘리트 계층은 대부분 맘루크 출신으로만 구성됐다. 이런 배경 때문에 튀르크계 혹은 튀르크화된 지배층과 아랍어를 사용하는 민중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존재했다. 맘루크에게 어떤 민족에서 왔는가는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였고, 이름, 복식, 관직, 술탄의 '니스바(출신 표기)' 등에 드러났다. 맘루크의 자식들 즉 맘루크 2세대들은 '아울라드 앗나스(awlad al-nas)'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온전한 맘루크로 편입되지 못하고 대신 행정관이나 종교 기관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흐리 왕조 시기의 술탄들과 아미르들은 자신들의 킵차크 튀르크 혈통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킵차크 출신이 아닌 키트부카, 바이바르스 2세, 라긴 같은 인물은 동시대 기록에서 정통성이 약한 군주로 평가됐다. 반면, 부르지 왕조 시기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체르케스 혈통을 숨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9. 문양

파일:Mamluk_Sultanate_in_the_Catalan_Atlas_(1375).jpg 파일:바이바르스 사자.webp
1375년 카탈란 아틀라스의 맘루크 왕조[19] 바이바르스의 문장
맘루크 술탄과 아미르들은 각자 지위와 신분을 상징하는 개인 문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맘루크 지배층의 독특한 문화적 특징이었다. 왕조 초기 몇 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맘루크들은 스스로 자신의 문장을 선택했다. 문장은 이들이 아미르로 재직하던 시절 자신이 맡던 관직이나 직책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았고, 술탄이 된 뒤에도 그대로 사용했다. 문장은 군기의 깃발에 새겨지는 것은 물론 맘루크 후원으로 제작된 각종 공예품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건축물에도 새기는 등 맘루크 왕조 전반에 걸쳐 두루 사용됐다. 이러한 문장 제도는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는 유례가 없던 맘루크 왕조만의 독특한 전통이었다.

유럽의 문장제도와 달리 맘루크의 문장은 매우 제한된 범위의 상징만 사용했다. 약 45가지 정도의 문양이 존재했다. 초기 맘루크 문장은 단순한 형태로 컵·칼·동물 같은 단일 상징인 경우가 많았다. 일부 깃발은 그저 무늬나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만 그려져 있었을 정도. 바이바르스의 문장은 표범 혹은 사자 무늬였으며, 칼라운의 문장은 백합꽃 문양이었다.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중엽 사이에는 초승달 문양이 도자기나 화폐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개인 문장으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앗 나시르 무함마드 시기부터는 아랍어 서예를 문장 안에 넣는 서체형 문장이 새롭게 등장했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문장은 점차 복잡해졌고, 방패 모양의 문양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각 구획 안에 주요 상징이 들어가거나 짝을 이루는 형태로 변했다. 후기 맘루크 시대의 문장들은 더욱 정교하고 장식적으로 발전했지만, 동시에 형태가 유사해져 개별 인물의 고유 문장이라기보다는 사회 계층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변모했다.

맘루크 술탄들은 아이유브 왕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노란색을 술탄의 공식 색으로 사용했다. 노란색은 술탄의 깃발과 군기의 색깔이었으며 바이바르스는 자신이 사용한 노란색 깃발이 안티오키아 공국 보에몽 6세의 붉은 깃발과 대비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1516년 셀림 2세가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뒤 맘루크의 황색 비단 깃발이 오스만 제국의 붉은 깃발로 교체되었다고 기록했던 것을 보면 노란색이 맘루크 왕조의 상징이었음은 거의 확실한 사실. 술탄 알 무아야드가 소아시아의 한 봉신에게 붉은 깃발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맘루크들도 붉은 깃발을 사용한 적이 있다.

유럽의 기록에서도 맘루크 왕조를 상징하는 여러 문양이 등장한다. 1360년 이후 한 유럽인이 쓴 《모든 왕국의 지식서》에는 카이로의 깃발이 흰 바탕에 파란 초승달이 그려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1375년에 마요르카의 지도 제작자 아브라함 크레스케스가 만든 카탈루냐 지도에서는 맘루크 제국을 팔에 초록 앵무새[20]를 올린 무슬림 통치자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 옆에는 카이로와 함께 바빌론이 표시되어 있는데, 노란 바탕에 초승달이 있는 깃발이 그려져 있다. 초승달은 이슬람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근처의 알렉산드리아는 옛 술탄 바이바르스의 표범 문양이 새겨진 깃발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십자군 전쟁 시절부터 유럽 세계에 유명했던 바이바르스의 명성과 영향력 때문이다.

10. 여담

내 말을 듣고 귀를 기울여라. 그리하여 그대와 다른 이들은 우리 가운데 운명과 붉은 죽음의 기사들이 있음을 알게 되리라.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만으로도 그대의 모든 군대를 패배시킬 수 있다. 만약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한번 시험해보라. 그러나 다만 그대의 군사들에게 제발 총만은 쏘지 말라고 명령해다오. 그대는 여기에 모든 인종으로 이루어진 200,000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대의 자리에 서서, 그대의 병사들에게 전투대형을 갖추게 하라. 우리 편에서는 단 세 사람만이 그대와 맞서기 위해서 나서리라… 그대는 두 눈으로 이 세 기사가 이루는 위업을 목격할 것이다… 그대는 황급히 온 세상에서 군사를 끌어모았다. 기독교인들과 그리스인들과 그밖에 여러 민족들을. 그리고 그들이 전쟁터에서 무슬림의 기사들을 대적할 수 없게 되자, 유럽의 기독교도들이 고안한 정교한 무기를 가지고 왔다. 이 무기는 설혹 여인이라고 해도 그것을 쏘기만 하면 그토록 많은 숫자의 남자들을 죽일 수 있는 총이었다… 그대에게 저주가 있으라! 어떻게 그대가 감히 무슬림들에게 총을 쏠 수가 있단 말인가![21]
《세계전쟁사》, 존 키건 지음, 유병진 번역, 까치, 68쪽
  • 맘루크들은 뛰어난 기마전사들이었으나 총과 대포 같은 화약 무기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심했다. 기마병이 되려면 오랫동안 힘들게 승마와 각종 무술들을 배워야 하는데, 총은 아무런 무술 훈련도 받지 않은 여자나 아이들도 방아쇠만 당기면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를 간단히 죽일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에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여겨서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중세 유럽의 기사들이 석궁에 대해서 보였던 반응과도 같다.[22]
  • 이런 상황에서 1497년에 어린 술탄인 사다트 무하마드가 흑인 노예들로 이루어진 화승총 부대를 조직했고, 이들 중 자신이 총애하던 흑인 노예인 파라잘라흐에게 맘루크 처녀를 시집보냈다. 이에 다른 맘루크들이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파라잘라흐를 비롯한 50여 명의 흑인 노예들을 죽여버렸을 정도로 총에 대해 부정적으로 여겼다.[23] 맘루크들은 전쟁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화약무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옛 전투 방식에 집착했지만, 결국 화약 무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멸망했다.
  • 깃발을 위로 세우면 어몽어스 캐릭터처럼 생겨서 서양권에서는 이 되기도 했다.
  • 원조 맘루크 왕조는 1250년보다 약 반세기 앞서 세워진 북인도 델리 술탄국노예 왕조였다. 둘 다 원주민들과 매우 다른 태생의 맘루크 출신 군부가 통치했고, 이슬람 왕조였으며 창건자 역시 '아이바크'로 동명이인이었다. 심지어 티무르의 침공을 받아 쇠퇴하고, 약 270여 년간 존속하다가 포병을 앞세운 제국에게 멸망한 것도 비슷하다.

11.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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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대수 이름[24] 재위 비고
<rowcolor=#fff> 살리히 맘루크[25]
초대 <colbgcolor=#fff>이즈 앗 딘 아이바크 1250, 1254~1257 <colbgcolor=#fff>첫 맘루크 술탄. 샤자르 앗 두르의 남편, 1250.7 ~ 1254.1 섭정[26]
제2대 누르 앗 딘 알리 1257~1259 아이바크의 아들
제3대 사이프 앗 딘 쿠투즈 1259~1260 호라즘계, 아인잘루트 전투 승리
<rowcolor=#fff> 바흐리 맘루크
제4대 루큰 앗 딘 바이바르스 1260~1277 안티오크 정복, 엘비스탄 전투 승리
제5대 나시르 앗 딘 바라카 1277~1279 바이바르스의 장남
제6대 바드르 앗 딘 살라미시 1279 바이바르스의 차남
제7대 사이프 앗 딘 칼라운 1279~1290 2차 홈스 전투 승리, 트리폴리 정복
제8대 살라흐 앗 딘 칼릴 1290~1293 칼라운의 장남, 아크레 정복
제9대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 1293~1294 칼라운의 차남, 1차 재위
제10대 자인 앗 딘 키트부가 1294~1296 몽골 포로 출신
제11대 후삼 앗 딘 라긴 1296~1299 체르케스계
제12대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 1299~1309 2차 재위, 마르즈 앗 사파르 전투
제13대 루큰 앗 딘 바이바르스 앗 자샨키르 1309~1310 체르케스계 , 바이바르스 2세 혹은 바이바르스 앗 자샨키르
제14대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 1310~1341 3차 재위
제15대 사이프 앗 딘 아부 바크르 1341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차남
제16대 알라 앗 딘 쿠주크 1341~1342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육남
제17대 시하브 앗 딘 아흐마드 1342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장남
제18대 이마드 앗 딘 아불 피다 이스마일 1342~1345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삼남
제19대 사이프 앗 딘 샤반 1345~1346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사남
제20대 사이프 앗 딘 하지 1346~1347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오남
제21대 바드르 앗 딘 하산 1347~1351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칠남, 1차 재위
제22대 살라흐 앗 딘 살리흐 1351~1354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팔남
제23대 바드르 앗 딘 하산 1354~1361 2차 재위
제24대 살라흐 앗 딘 무함마드 1361~1363 하지의 아들
제25대 자인 앗 딘 샤반 1363~1377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손자[27], 샤반 2세
제26대 알라 앗 딘 알리 1377~1381 샤반 2세의 장남
제27대 살라흐 앗 딘 하지 1381~1382 샤반 2세의 차남, 1차 재위
<rowcolor=#fff> 부르지 맘루크
제28대 사이프 앗 딘 바르쿠크 1382~1389 체르케스계, 1차 재위
제29대 살라흐 앗 딘 하지 1389~1390 2차 재위
제30대 사이프 앗 딘 바르쿠크 1390~1399 2차 재위
제31대 나시르 앗 딘 파라즈 1399~1405 바르쿠크의 장남, 1차 재위
제32대 이즈 앗 딘 아브드 앗 아지즈 1405 바르쿠크의 차남
제33대 나시르 앗 딘 파라즈 1405~1412 2차 재위
제34대 알 무스타인 빌라 1412 아바스 왕조 칼리파 출신
제35대 알 무아야드 샤이크 1412~1421 체르케스계
제36대 알 무자파르 아흐마드 1421 샤이크의 아들
제37대 사이프 앗 딘 타타르 1421 체르케스계
제38대 알 나시르 앗 딘 무함마드 1421~1422 타타르의 아들
제39대 사이프 앗 딘 바르스베이 1422~1438 체르케스계
제40대 알 아지즈 자말 앗 딘 유수프 1438 바르스베이의 아들
제41대 사이프 앗 딘 자크마크 1438~1453 체르케스계
제42대 파크르 앗 딘 우스만 1453 자크마크의 아들
제43대 사이프 앗 딘 이날 1453~1461 체르케스계
제44대 시하브 앗 딘 아흐마드 1461 이날의 아들
제45대 사이프 앗 딘 쿠쉬카담 1461~1467 그리스계
제46대 사이프 앗 딘 빌바이 1467 체르케스계
제47대 티무르부가 1467~1468 그리스계
제48대 사이프 앗 딘 카이트베이 1468~1496 체르케스계
제49대 앗 나시르 무함마드 1496~1498 카이트베이의 아들
제50대 아부 사이드 칸수 1498~1500 체르케스계, 칸수 1세
제51대 아부 앗 나시르 잔발라트 1500~1501 체르케스계
제52대 사이프 앗 딘 투만베이 1501 체르케스계, 투만베이 1세
제53대 칸수 알 구리 1501~1516 체르케스계, 칸수 2세
제54대 투만베이 2세 1516~1517 체르케스계, 투만베이 2세

12. 역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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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사막 페트라 메데바 암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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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과 남수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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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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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는 북부 나파타 지역, M는 중부 메로에 지역, A는 남부 알로디아, P는 동해안 푼트 지역, D는 서부 다르푸르 지역, S는 남부 (사하라)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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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오만 걸프 네지드 헤자즈
고대 예멘계 소왕국[1] 마간(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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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
중근세 무함마드 시대
정통 칼리파 시대(라쉬둔 칼리파국)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아바스 이바디 운동 아바스 왕조
유피르 오만 이맘국 카르마트파 툴룬 왕조
파티마 카르마트파 아바스 왕조
노예 술라이히 부와이흐 왕조 카르마트파 베두인 이흐시드 왕조
술라이히 왕조 오만 이맘국 압둘 카이스 파티마 왕조
나자흐 주라이 우윤 왕조
마흐디 함단 셀주크 제국 메디나-메카
아이유브 왕조 나바니 왕조 유스푸르 왕조 아이유브 왕조
라술 왕조 호르무즈 왕국
나바니 왕조 자르완 왕조 맘루크 왕조
타히르 왕조 자브르 왕조
맘루크 왕조 호르무즈 왕국 포르투갈
오스만 제국 야루바 왕조 오스만 포르투갈 오스만 제국
예멘 대반란 사파비 왕조

오스만 제국 오만 제국
근현대 자이디 이맘국 아프샤르 왕조 토후 할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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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부사이드 왕조 아부
샤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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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오만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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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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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정치
위원회
아랍토후국연합(UAE) 카타르 쿠웨이트 왕국
바레인 왕국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연두색 : (수니파) 아랍계 왕조, 진한 초록색 : 시아파나 하심 가문 왕조, 자주색 (짙은 핑크) : 이란 계통 / 연한 빨강 : 토착 예멘계 왕조. 쿠웨이트는 오만 제국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파비, 오스만의 지배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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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인 왕국, 카타반 왕국, 하드라마우트 왕국 등.

아나톨리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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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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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적인 국명은 튀르크국(아랍어: دولة الأتراك Dawlat al-Atrāk)과 체르케스국(아랍어: دولة الجراكسة Dawlat al-Jarākisa)였다. 전자는 1250년 바흐리계 맘루크(튀르크인)들이 건국할 당시부터 쓰였고, 후자는 1382년 부르지계 맘루크(체르케스인) 집권기부터 1517년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2] 사실 맘루크 술탄들이 실제로 사용한 문장이 아닌 중세 유럽인들이 임의로 부여한 '상상 문장(Attributed Arms)'이다. 이는 문장과 귀족 가문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당대 중세 유럽인들이 문장을 사용하지 않았던 12세기 이전의 고대인들도 당연히 썼을 거라 어림짐작하여 비슷한 느낌의 문장을 자체적으로 고안했던 것이다. 헤당 문장은 1413년 제작된 '메시아 데 빌라데스테스' 지도에 맘루크 왕조의 상징으로 표시되어 있다. 사실 맘루크 왕조와 동시대 국가들 중에는 문장만 있고 국기가 없는 나라도 많다.[3] 이전에 2번씩이나 쫒겨났다가 다시 복위한 경험이 있기에 3차로 즉위한 것이다.[4] 1300년대 카이로를 방문하고 압도된 피렌체인이 피렌체 전체 인구를 합쳐도 카이로의 시내 하나에 미치지 못한다며 과장섞인 감탄을 하고갈 정도였다.[5] 이에 경도된 서유럽 국가들이 원양 항해에 나서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마드라사모스크 등 수많은 건축물이 지어졌다.[6]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자리에 본인의 이름을 붙인 성채인 카이트베이 요새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7] 얼마나 심각했느냐 하면 맘루크 술탄들이 금화가 없어서 구리로 가짜 금화를 만들어 유통하다가 오히려 화폐 가치가 떨어져 물가가 더 올라갔고, 심지어 병사들한테 줄 월급도 없어서 오스만 군대가 쳐들어오는 와중에도 월급을 받지 못한 고참병들이 참전하지 않겠다고 파업을 벌일 정도였다.[8] 다만 왕조는 멸망했어도 맘루크 군부 자체는 건재했으며 오스만 지배에 협력하면서도 종종 소요를 일으키다가 19세기에 알바니아계 총독 무함마드 알리 시대에 와서야 소멸했다.[9] 맘루크 왕조는 전대 아이유브 왕조의 영토(이집트, 시리아, 헤자즈)는 물론 행정과 법률, 경제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 다만 왕족들 사이에서 영토를 분할했던 아이유브 왕조와는 달리 맘루크 왕조는 단일 국가였고 카이로의 술탄은 국가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였다.[10] 때문에 술탄이 가장 믿을만한 세력은 술탄이 직접 구입한 뒤 훈련시킨 노예 맘루크들, 즉 술탄을 우스타드로 모시는 쿠쉬다시야였다. 반면 전임 술탄이 구입해 훈련시킨 맘루크 파벌들은 최고의 견제 대상이었다. 바흐리 왕조의 술탄들은 몽골이 다스리던 중앙아시아 출신의 맘루크들을 가장 선호했지만 몽골 제국과 십자군이 노예 공급로를 틀어막으면서 어쩔 수 없이 일 칸국 출신이나 탈영병들을 맘루크로 받아들이기도 했다.[11] 영국인 오웬 브라운 카터(1806~1859)의 작품.[12] 맘루크 술탄 카이트베이가 지은 요새로, 요새가 있던 바로 저 자리가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서있던 자리다.[13] 그는 20년 동안 카이로에서 비단포도주를 팔았다. 이슬람 교리상 술을 금기시하는 포도주를 팔았다는 것에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슬람권에서도 을 몰래 마시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14]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43~146쪽[15] 설교자들이 올라가 설교하는 높다란 단으로 1300년대에 만들어져 현존하는 맘루크 민바르들 중 가장 오래된 것들 중 하나다.[16]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두 미나레트는 그 후 복원된 형태로 원래보다 단순한 양식을 하고 있다.[17] 알구리 영묘의 돔은 19세기에 완전히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18] 가장 오래된 사례로는 1341년 이전에 지어진 아미르 카우순(Amir Qawsun)의 위칼라가 있는데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지만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도 비슷한 건물들이 많이 지어졌는데, 어떤 것은 카라반사라이의 일부로, 또 어떤 것은 독립된 주택 단지로 지어졌다.[19] 흔히 맘루크 왕조의 깃발이라고 불리는 노란빛 깃발은 바로 이 카탈란 아틀라스에서 착안한 것이다.[20] 초록 앵무새는 귀족적 품격이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21] 맘루크 역사가인 이븐 자불이 남긴 기록[22] 군사적 측면 외에도 전쟁의 중심이 기병인 자신들에서 보병들에게 넘어가는, 기득권을 위협하는 상황이었던 것이었다.[23] 출처: 《세계전쟁사》, 존 키건 지음, 유병진 번역, 까치, 69쪽[24] 볼드로 표시한 술탄은 세습 왕조의 창건자이다.[25]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이던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직접 육성한 맘루크 노예들을 그의 이름을 따 '살리히 맘루크'라고 불렀다. 이들이 아이유브 왕조를 뒤엎고 본인들의 왕조를 개창한 것인데, 한 마디로 건국 1세대라고 보면 된다.[26] 아이유브 왕자 알 아슈라프 무자파르 앗 딘 무사를 허수아비 술탄으로 앉힘[27] 즉위하지 못한 그의 아들 알 암자드 후세인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