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년 경의 영토
1. 개요
아라비아 반도 내륙, 즉 네지드에 세워졌던 토후국 중 하나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전신이다. 기존 디리야 셰이크국에 와하비즘이 더해진 종교 국가 형태로 1744년에 세워져 19세게 초에는 메카, 메디나, 바레인 등지를 포함한 대국으로 성장했다.하지만 곧 오스만 제국의 견제를 받아 8년 간의 전쟁 끝에 1818년 메흐메트 알리에 의해 멸망했다. 다만 6년 후 2차로 탄생하여 네지드 토후국이 되었고, 1897년 또다시 멸망했다가 3차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전 이름인 리야드 토후국으로 다시 탄생한다.
2. 배경: 디리야 셰이크국
사우드 왕가는 아랍 부족들의 분류에 있어 라비아계 바누 하니파 출신의 므루다 가문에 속한다. 15세기 무렵 므루드 가문은 내륙의 네지드와 해안의 알 하사 (아흐사)에 분산되어 있었는데, 그중 후자에 속하는 카티프 인근의 마을 앗 두르우에 살던 마니 이븐 라비아 알 무라이디가 사우드 왕가의 직계 조상이다. 1446년 마니는 네지드에 속하는 하즈르 (리야드) 남쪽의 만푸하[1]에 살던 친척 이븐 디르아를 방문했고, 그의 도움으로 경작이 가능한 땅이었지만 당시 거의 무주지에 가깝던 서북쪽의 구사이바와 알 물라이비드 일대를 할양받았다. 이듬해 마니는 일족과 함께 바누 하니파의 원적지이기도 한 와디 하니파가 흐르는 구사이바와 알 물라이비드로 이주했고, 그곳에 고향 앗 두르우 혹은 땅을 내어준 친척 이븐 디르아의 이름을 따서 앗 디리야 (الدرعية)라는 도시를 세웠다. (1447년)마니를 시작으로 그의 후손들은 농업과 무역을 바탕으로 디리야를 발진시켰고, 이로써 인구가 불어나며 디리야 셰이크국이란 정치체가 확립되었다. 1463년 마니를 계승한 아들 라비아는 야지드 부족과 싸우며 와디 하니파를 따라 앗 나이마, 알 와실 일대를 정복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력이 커지자 내분이 발생했고, 결국 라비아는 아들 무사에게 찬탈당하여 중상을 입은 채로 북쪽 우야이나의 셰이크 하마드 빈 하산에게 망명했다. 이후 디리야 셰이크국은 정체되었고, 무사 사후 아들 이브라힘과 후자의 아들 마크란이 계승했다. 그러다 1654년 들어 마크란의 두 아들 라비아와 무크린의 후손들이 각각 알 와탄과 알 무크린 파벌을 이루어 내전을 벌이고 외세도 침공해 오면서 디리야 셰이크국은 더욱 약해졌다. 1695 ~ 1708년간 알 하사 출신의 술탄 이븐 하마드 알 카바스가 집권했고, 암살 후 동생 압둘라가 계승했다가 라비아의 증손자 무사가 집권하며 사우드 가문의 지배를 회복했다. 1720년 무사에 이어 무크린의 손자 사우드가 집권했고, 1725년 라비아의 다른 증손자 자이드가 찬탈했다. 그러던 1726년 사우드의 사후 그 아들이자 무크린의 증손자인 무함마드 빈 사우드가 무크린 계파의 세력을 모아 1727년에 마침내 6촌인 자이드를 폐위하고 집권하며 내전이 종식되었다.
3. 건국: 무함마드 빈 사우드
1727년에 40세의 나이로 디리야의 군주로 집권한 무함마드는 부족을 통합하고 도시의 발전에 힘썼다. 한편 1740년을 전후로 한발리 법학자 집안 출신의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하브가 타클리드 (전통)로 불리는 기존 이슬람 법학파들과 수피즘 및 시아파 등을 비판하며 무함마드와 정통 칼리파 시기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살라피즘 및 이슬람 근본주의적 신앙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디리야 서북쪽에 있는 알 우야이나의 군주 우스만 이븐 알 무아마르를 설득해 성지이던 사하바 자이드 이븐 알 카탑의 무덤과 신령수들을 파괴하는 등 강력한 유일신 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1669년부터[2] 독자적으로 알 하사를 지배하며 네지드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니 칼리드 연맹의 군주 술레이만 빈 무함마드[3]가 우스만에게 그가 소유한 알 하사의 재산을 압수하겠다며 이븐 압둘와하브를 죽이거나 추방하라고 협박했다. 그에 굴복한 우스만에 의해 우야이나에서 추방된 이븐 압둘 알와하브는 디리야로 향하여 보호를 청했다. (1744년)이미 형제 중 투나인과 미샤리가 이미 이븐 압둘와하브의 제자였고, 아내 무디 빈트 아비 와흐탄 역시 와하브파 교리에 공감하며 설득한 결과 무함마드는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745년에 무함마드는 이븐 압둘 알와하브와 디리야 서약을 통해 함께 세력을 합하여 와하비 교리를 설파하고 반대파를 격멸하는 셩전 (지하드)에 나서기로 했다. 특히 이븐 압둘 와히브는 (신실한) 무슬림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대신 전쟁을 통한 전리품 획득이 더 이윤이 클 것이라 조언했다. 또한 서약의 증표로써 무함마드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압둘아지즈와 이븐 압둘 와합의 딸이 결혼하며 양가는 사돈을 맺었다.[4] 이로써 무함마드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이끄는 이맘이 되었고, 이븐 압둘 와합은 종교 및 윤리를 담당하며 그의 참모 역할을 했다. 본격적인 1차 사우디 국가의 시작이었다.
3.1. 초기 팽창 : 네지드 중부
무함마드는 네지드 각지의 와하비 신도들을 모아 군대를 편성했고, 전쟁을 통해 복속시킨 부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디리야를 더욱 발전시켰다. 동시에 이븐 압둘와하브는 2년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신도들을 디리야로 불러 모으고 네지드 각지에 적극적으로 전도에 나섰다. 그 결과 네지드 중부에 해당하는 알 아리드 지역에서 우야이나, 하르멜라, 만푸하, 아마리야, 쿠와이야, 파르아, 카사브, 샤크라, 하우타, 타르마다아 등의 도시들이 응답하며 디리야에 복속했다. 하지만 알 아리드의 중심지인 리야드 자체는 다함 빈 다와스의 지도 하에 복속을 거부했고, 이후 디리야는 그와 27년간 17번의 전투를 벌였다. 양측의 전쟁에서는 4천여명이 사망했고, 우바이드 전투에서는 무함마드의 두 아들인 파이살과 사우드가 전사할 정도였다.나머지 도시들의 지배도 쉽지만은 않았다. 우선 1750년에 우야이나의 군주 우스만이 금요 예배 중 반사우디 세력에게 살해되었고, 무함마드는 미샤리 빈 무아마르를 그곳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751년에는 하르멜라가 복속했으나 이븐 압둘와하브의 형이면서 현지 카디 (법관) 술레이만 이븐 압둘 와합이 군주 무함마드 빈 압둘라와 주민들을 설득해 사우디 병력을 축출하며 복속을 철회했다. 하지만 보복이 두려워진 무함마드 빈 압둘라가 다시 사우디 병력을 부르자, 라시드 가문이 공격해 그와 8명의 추종자들을 살해했다. 이에 분노한 무함마드는 아들 압둘아지즈를 파견했고, 하르멜라를 확실히 복속시킨 그는 사우디 측에 도움을 청한 현지인 무바라크 빈 아드완을 총독에 봉했다. 1746년에 군주 알리 빈 마즈루의 결정으로 복속했던 만푸하[5]는 1753년 주민들의 봉기로 이탈하여 인접한 리야드의 다함에게 복속했다.
4. 전성기
1753년 후 디리야 토후국의 영토는 빠르게 늘었다. 알 아리드를 넘어 알 와샴 지역에서도 샤크라가 복속했고, 1755년에는 알 쿠와이야가 뒤를 이었다. 비록 타르마다, 우샤이기르, 알 카사브, 마라트, 알 파르아는 계속 저항했지만 압둘아지즈가 여러 차례 출정하여 10년 내로 모두 복속시켰다. 더 북쪽의 수다이르 지역 역시 이때 복속되었다. 한편 우야이나를 디리야에 후 네지드의 패권이 흔들린다 여긴 알 하사의 아미르 우라이르는 1759년, 디리야를 목표로 진격하여 그 길목인 주바일라에서 주민들 및 사우디 군의 저항을 받았다. 우라이르는 거듭된 공격에도 주바일라를 함락하지 못했고, 하르멜라 점령을 위해 파견된 별동대마저 실패하자 알 하사로 철수했다. 한편 그동안 디라야의 주민들은 성탑을 지닌 두 성벽을 쌓는 등 전쟁을 대비했다. 우라이르의 철수 후, 압둘아지즈는 직접 주바일라로 향해 선물을 주어 치하했다.다만 국력 소모가 컸기에 이듬해 무함마드는 15년 넘게 전쟁을 이어오던 리야드의 다함과 휴전을 맺었고, 함께 다피르 부족을 공격했다. 다만 양측의 평화는 5년 후 다함이 배신하며 전쟁은 재개된다. 1764년 압둘아지즈에 패배한 아즈만 부족이 나즈란 측에 도움 요청했고, 이에 나지란의 군주 하산 이븐 히바툴라 알 무크라미는 우라이르 및 다함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1765년) 연합군의 집결지로 선정된 하이르에 하산이 먼저 도착했다. 하산의 나즈란 군대는 사우디 군대를 공격해 4백여명을 전사시키고 3백여를 포로로 잡으며 격파했다. 이에 무함마드와 압둘아지즈는 아즈만 부족 등의 포로 석방을 조건으로 휴전을 제안했고, 하산이 승낙하며 회군했다. 그동안 디리야에 당도한 우라이르가 도시를 한달간 포위하나 함락하지 못하고 철수하며 디리야 토후국은 멸망 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4.1.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
- 1773년 리야드 정복
- 1775년 부라이다 정복[6]
- 1782년 부라이다 방어전 및 수다이르 평정
- 1784년 카르지 정복[7]
- 1785년 우카이르 습격, 페르시아만 당도
- 1786년 문타피크 연맹의 카심 침공
- 1788년 우나이자 정복
- 1789년 바니 칼리드 연맹 복속
- 1792년 아흐사, 카티프 정복
4.1.1. 네지드 평정
1750년대부터 연로한 무함마드를 대신해 군사 원정을 이끌던 아들 압둘아지즈는 1765년, 나즈란-아흐사 연합군의 침공 후 부왕이 사망하자 디리야의 이맘 겸 아미르로 즉위했다. 그는 리야드를 꾸준히 압박하며 1768년 네지드 북부 카심 지역을 복속시켰다. 마침내 1773년 압둘아지즈는 리야드를 점령했고, 다함은 도주했다. 이로써 네지드 중부인 알 아리드 일대가 사우디 영토로 확립되었다. 한편 1774년 아흐사의 우라이르는 부라이다를 침공, 친사우디 군주이던 압둘라 빈 하산을 폐위하고 라시드 앗 두라이비 알 아부 알얀을 옹립했다. 뒤이어 재차 디리야 원정을 꾀하던 우라이르는 불과 두달 후, 부라이다를 떠난 직후에 사망했다. 우라이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이 내전을 벌였고, 그 틈에 압둘아지즈는 더욱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리야드 점령 후 압둘아지즈는 카르지의 군주 자이드 이븐 자밀 앗 둘라이미와 전투를 벌인 끝에 1775년에 휴전을 맺었다.1768년 부라이다의 군주 함무드 앗 두라이비 알 아부 알얀은 디리야에 복속을 표했다. 다만 형식상에 그친다고 판단한 압둘아지즈는 바니 칼리드 연맹이 내전을 벌이던 1775년에 부라이다를 점령, 후자일란 이븐 하마드 앗 타미미를 아미르에 봉했다. 1776년에는 카르지의 자이드가 휴전을 깨자 압둘아지즈는 재차 공격하여 그를 전사시켰고, 술레이만 빈 아파시안을 카르지 총독에 봉하려 했다. 그러나 자이드의 아들 투르키가 저항을 계속하여 전투와 휴전이 반복되었다. 한편 역시 1768년에 복속했던 우나이자의 군주 압둘라 빈 아흐마드 빈 자밀은 부라이다의 침탈을 목격한 후 반란을 일으켜 와하비 성직자들을 살해했고, 1782년에는 아흐사의 새 군주인 셰이크 사둔 빈 아리아르에게 지원을 청했다.
막 내전을 종식하고 집권한 사둔은 부친처럼 네지드 패권 회복을 갈망했기에 다피르, 라시드, 샴마르, 아니자 부족 연합군을 파견했다. 반사우드 연합군은 부라이다를 포위했고, 선발대가 정면 공격에 나섰다가 후자일란 휘하 수비대의 반격으로 괴멸되었다. 그러자 사둔이 직접 정예병과 포위군에 합류했고, 사다리를 통한 공격이 실패하자 공성병기를 동원해 일부 성벽과 성탑들을 허물었다. 뒤이어 포위군은 아침에 총공격에 나섰으나 부라이다 주민들의 결사 항전에 격퇴되었고, 어느덧 5개월이 지난 후라 사기가 꺾인 연합군은 결국 철수했다. 같은 해인 1782년, 라우다트 수다이르의 알 마디 가문이 카르지의 투르키와 동맹을 맺고 도시의 사우디 병력을 축출했다. 하지만 타디크에 주둔하던 압둘아지즈의 아들 사우드가 반격에 나서 알 마디 가문을 격파하고 수다이르 지역에서의 패권을 재확립했다.
1784년, 압둘아지즈는 투르키 역시 전사시키고 카르지를 완전히 병합하여 술레이만 빈 아파시안을 그 총독에 봉했다. 동시에 바니 칼리드 연맹에 대해 공세로 전환한 압둘아지즈는 같은해 아들 사우드를 아흐사로 파견했다. 사우드는 알 우윤을 습격해 약탈하고, 이듬해에는 아흐사에서 출발한 상단을 습격했다. 1785년 결국 문타피크 연맹의 지원을 받은 두와이히스에게 찬탈당한 사둔은 디리야로 망명했고, 압둘아지즈는 장군 술레이만 빈 아피산을 보내 아흐사를 공격했다. 술레이만은 지샤에 이어 우카이르를 함락, 항구에 방화하고 많은 전리품을 챙겨 귀환했다. 이는 사우디 군대가 처음으로 페르시아 만에 당도한 때였다.
네지드 주요부를 평정한 압둘아지즈는 경제적, 농업적으로 발달한 네지드 북부의 자발 샴마르 지역을 노렸다. 1785년, 그의 명령을 받은 후자일란이 출정했다. 하지만 그는 하일로 진군하던 도중에 마주친 이라크발 순례단을 습격해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후 돌아가버렸고, 분노한 이라크의 문타피크 부족장 투와이니는 1786년에 보복에 나서며 오스만-사우디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투와이니는 타누마를 함락했지만 부라이다를 공격하던 중 본국의 사정으로 철수했고, 그를 도우려 진군하던 바니 칼리드 부족장 셰이크 압둘 모흐센 빈 사르다 역시 소식을 듣자 회군했다. 위기를 넘긴 후자일란은 재차 하일로 진군해 그 군주인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압둘 모흐센 알 알리를 복속시켰다. 이로써 외부와 단절된 카심 지역은 점차 사우디 영토로 넘어갔고, 끝까지 저항하던 우나이자도 1788년 사우드에 의해 평정되었다.
4.1.2. 걸프 해안 정복
1789년 사우드는 직접 알 아흐사로 출정, 가리멜 전투에서 바니 칼리드 군대를 격파했다. 패배한 아미르 두와이히스와 섭정 압둘 모흐센은 문타피크 연맹에게 망명했고, 사우드는 자이드 빈 우라이르를 아미르로 봉했다. 하지만 1792년 말엽, 친사우디 아미르이던 자이드 빈 우라이르를 그의 외사촌 바라크 빈 압둘 모흐센이 찬탈하자 사우드는 재차 대군과 함께 아흐사로 출정했다. 사우드는 샤이트 전투에서 바라크를 격파했고, 후자는 알 아흐사의 주민들과 함께 사우디에 복속했다. 사우드는 한달간 알 아흐사에 머문 후 회군했는데, 그 직후 주민들이 재차 반기를 들자 바니 칼리드 연맹의 수도인 알 무바라즈로 진격해 다시 복속시켰다. 뒤이어 사우드는 우나크를 점령한 후 5백여 수비대를 학살했다. 이후 그가 쿠다이흐마저 점령, 약탈과 학살을 저지르자 파르다에 피신해 있던 카티프 주민들은 5만 쿠로쉬에 해당하는 3천 자르를 바치며 휴전을 청했다. 이를 승낙한 사우드는 와하비 교리에 맞지 않는 여러 권의 책들을 불태운 후 회군했다.카티프 상실 후 바니 칼리드 연맹의 군사령관 압둘라 이븐 술레이만 알 마슈리는 난공불락의 타루트 성채로 피신해 요새화했다. 그러자 아흐사에 남겨진 사우디 장군 이브라힘 빈 아피산은 동생 파흐드 빈 아피산에게 3천 군사를 주어 타루트를 공격하게 했다. 파흐드는 1차 공격이 많은 병력 손실과 함께 실패하자 물러나 봉쇄로 일관했는데, 이에 수비대가 반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파흐드의 구원 요청에 이브라힘은 살레흐 이븐 라시드 앗 도사리가 보낸 증원군을 이끌고 타루트로 향했고, 수비대는 다시 농성을 준비했다. 이브라힘은 대포를 동원해 성채를 폭격하며 20일간 포위한 끝에 총공격에 나섰고, 8백의 바누 칼리드 수비대는 창병을 앞세워 결사 저항했으나 사우디 군이 성내에 진입했다. 결국 압둘라 이븐 술레이만 알 마슈리가 도주했고, 카티프 지역 전역이 사우디 령으로 병합되었다. 한편 1793년 사우디 군대가 북상해 두마툴잔달을 복속시켰고, 이후 무함마드 이븐 압둘 모흐센은 알 자우프 지역의 샤라라트 부족을 공격했다.
1793년 아흐사의 이브라힘은 카타르를 침공하여 파리하, 후와일라, 유수피야, 루와이다 등을 손쉽게 점령했다. 이후 그는 압둘아지즈의 승인을 받아 더욱 북상하여 반도 끝의 주바라를 포위했다. 1783년에 바레인을 얻었지만 여전히 기존 거점 주바라를 더 중시하던 칼리파 가문은 완강히 저항했지만, 결국 항복하고 바레인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로써 카타르 반도는 사우디 령이 되었다. 뒤이어 이브라힘은 쿠웨이트로 북상하여 명목상의 복종을 받았다. 한편 아흐사 정복 후 압둘아지즈는 무틀라크 이븐 무함마드 알 무타이리에게 무산담 반도 일대에 대한 공격을 명했으나, 그는 바니 야스 부족에게 격퇴되었다. 이에 압둘아지즈는 동부의 부왕 이브라힘을 파견했고, 그는 바니 야스와 누아이미 부족을 복속시켰다. 또한 디리야에서 파견된 와하비 선교사들은 이바디파를 믿는 하나위 계열 부족들과 대립하던 한발리파의 가파리 계열 부족들을 포섭했다.
1795년 이브라힘은 무틀라크와 함께 부라이미 오아시스를 점령, 앗 사바라 궁전을 세워 오만 원정 및 와하비 교리 전파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 무렵 바니 야스, 앗 누아임, 앗 샤와미스, 앗 다와히르, 바니 쿠툽 등의 부족들이 사우디에 복속했다. 그리고 1796년, 일부 바니 칼리드 귀족들이 반란을 꾀하자 사우드는 재차 동진해 호푸프 인근 라키카에 주둔하며 그들을 숙청하고 아미르 바라크를 폐위시키며 아흐사 지방을 완전히 사우디 령으로 병합했다. 바라크는 1797년 오스만측 원정군에 합류했다가 사우디 측에 전향하여 그 휘하에서 싸우다가 이듬해 전사했다. 알 아흐사 정복으로 디리야 토후국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함께 본격적으로 걸프 지역에 진출하게 되었다. 한편 1797년 후자일란은 와디 앗 시르한의 샤라라트 및 루왈라 부족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아라비아 반도 북쪽 끝인 알 자우프 지역도 평정되었고, 하일의 아미르 무함마드 이븐 압둘 모흐센의 영지로 주어졌다. 동시에 디리야 토후국은 오스만령 시리아와 접경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오만 진격에 앞서 압둘아지즈는 후방에 해당하는 라스알카이마의 카와심 (카시미) 가문을 복속시키려 했다. 하지만 카시미 부족장 사크르 빈 라시드가 거부하자, 무틀라크가 재차 파견되어 누아이미 부족과 함께 라스알카이마를 포위했다. 일대의 유일한 식량원인 야자나무 숲과 단절된 채로 버티던 사크르 빈 라시드는 1797년에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와하비 교리를 수용하고 디리야에 자카트를 납부하는 조건 하에 항복했다.
1800년에 압둘아지즈는 이브라힘 대신 살렘 이븐 빌랄 알 하르크를 부라이미의 아미르로 봉했다. 살렘은 다와히르, 키타브, 바니 알리, 바니 라시브 등 인근 부족들을 복속시켜 디리야에 자카트를 바치게 했다. 당시 바레인 원정에 집중하던 오만의 군주 술탄 빈 아흐마드는 무스카트 북쪽의 바티나 지역까지 사우디 세력이 미치자 협상에 나서 5천 리얄의 연공을 바치는 대가로 3년의 휴전을 체결했다. 1804년 술탄 빈 아흐마드가 카시미 부족에게 피살된 후 오만은 분열되어 그의 아들 사이드와 동생 카이스가 각각 무스카트와 소하르를 기반으로 내전을 벌였다. 13세에 불과했던 사이드의 섭정단은 이미 1803년에 술탄 빈 아흐마드에 대해 반란을 시도했다가 패배해 디리야로 망명했던 사이드의 사촌 바드르 빈 사이프를 초청했다. 1804년 바드르는 사우디 병력과 오만에 당도, 카이스를 무트라에서 몰아내며 실권자가 되어 군림했다. 1806년, 사이드가 성년이 된 후에도 바드르가 권력을 이양하지 않자 사이드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후 그와 결투에 나서 검으로 찔러 죽이고 실권을 회복했다. 사이드는 디리야에 내던 자카트를 중단했고, 이에 무틀라크의 사우디-카시미 군대가 침공하자 카이스와 함께 맞섰으나 후자는 1808년에 코르파칸 패하여 전사했다. 그후 무틀라크가 무트라를 점령하고 무스카트 앞에 당도하자, 대부분의 오만 도시들이 사우디에 복속했다. 사이드 역시 부친처럼 연공 납부를 조건으로 휴전을 맺었다. 이렇듯 걸프에서 사우디 세력이 크게 성장하자,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 주둔 함대 일부를 보내어 견제에 나섰다.
4.1.3. 히자즈 정복
1793년에는
1803년 술탄 빈 아흐마드 빈 사이드가 매년 자카트 납부 약속
무함마드 이븐 압둘 모흐센은 샤라라트 및 루왈라 부족애게 시리아를 공격하게 했고, 1810년 그들은 주민들이 달아난 보스라를 약탈했다. 이단시되던 와하비 세력이 최초로 오스만 제국의 직할령을 공격한 이 사건은 메카 상실 후 다마스쿠스 총독 및 오스만 조정에 재차 큰 충격을 안겼다.
4.2. 사우드 대왕
5. 오스만-사우디 전쟁과 멸망
5.1. 히자즈 전역
5.2. 디리야 공방전
6. 창작물에서
Roblox의 군사 외교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로 형성 가능한 국가이다
7. 국기
Rise of nations(roblox)에서 디리야 에미레이트를 형성 시 해당 국기로 바뀐다.
[8]
[1] 현재 리야드 시가지 남부[2] 본래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던 바니 칼리드는 1669년 오스만 주둔군을 축출하고 알 아흐사를 장악했다.[3] 전체 이름은 술레이만 빈 무함마드 빈 구라이르 알 하미드 알 칼리디. 1752년에 축출되어 카르지로 망명했고, 아라이르 빈 두자인이 집권한다.[4] 이후 이븐 압둘 와합의 후손들은 알 앗-셰이크라 불리며 사우드 왕조의 종교 부문을 담당하는 셰이크 혹은 무프티로 활약했다. 다만 무함마드의 동생 투나얀은 디리야 서약에 반대했다.[5] 현재는 원래 리야드 남쪽의 별개의 도시였으나 20세기 말엽의 시가지 대확장 후 현재에는 리야드 시가지 남쪽의 구이다.[6] 후자일란 이븐 하마드 앗 타미미 총독 선임[7] 술레이만 빈 아파시안 총독 선임[8] 초록색으로 표시된 영역이 디리야 에미레이트의 영토다.